따귀 맞은 영혼 -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장현숙 옮김 / 궁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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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딘가 쿡쿡 쑤시는 것도 좋고, 끊임없이 저려서 제 손으로 제 몸 주무르는 것도 좋고, 기억을 더듬으며 혈흔같은 눈물 한 점 떨구는 것도 좋다. 정신을 놓는 것은 싫다. 고통이 명치 끝까지 부풀어 올라도 마음놓고 술에 나를 부리는 일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죄길, 그럼에도 올곧지도 못한 생의 하루를 그나마 잃게 되다니. 나약한 정신이 불러온 질병 하나 이기지 못해 까무룩 죽음을 더듬다 온 미련함이라니.

게슈탈트 심리학(형태주의 심리학)은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존의 정신분석학적 접근방법과 원자론적 접근방법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심리 현상의 본질은 원자론적인 분석으로는 밝혀낼 수 없고, 그 자체가 구조나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통합적으로 전체를 아울러야 한다는 것이다. ‘따귀 맞은 영혼’은 이러한 게슈탈트 심리학의 토대 위에 저자의 임상 경험담을 느긋하게 섞어 마음 상함의 근원적인 배경을 파헤치고 그것에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우리가 마음을 상하는 것은 비난이나 배척, 거절, 무시 같은 것들로 인해 자존감이 약화될 때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남들이 나에게 해를 입히려고 한다는 ‘투사’와 타인의 확신을 내 것으로 내면화 시키는 ‘내사’가 심리적 기제로 작용한다. 저자는 마음 상함을 일으키는 비판의 요건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추려 보자면

- 제삼자가 비판할 때
- “넌 이해 못해”라든가, “네가 전적으로 잘못한 거야” 하는 식으로 매도된다고 느껴질 때
- 듣는 사람의 인격 전체에 해당하는 비판이어서, 그로 하여금 자신이 바보라는 생각을 더욱 굳게 할 때
- 비판자가 듣는 사람에게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자기가 훨씬 더 잘 안다는 걸 뽐내려 할 때
- 특별히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또는 잘 보이고 싶은 장소에서 비판받을 때, 등이다.

20년된 친구에게 두 해 전에 결별 당한 적이 있는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가 내게 등을 돌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친구가 나열한 이유들은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어서 난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난 관계를 호전시키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사과를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분에게 친구를 소개시키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그 사람 앞에서 내가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한 목걸이가 하도 예뻐서 그것을 화제로 올려서 얘기를 하던 중 그것이 이미테이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내가 “이미테이션 하면 간지럽지 않니? 난 알러지가 있어서인지 아무리 예뻐도 가짜는 못 하겠더라.” 했다는 것이다. 혜음! 이야기를 듣고 십분 이해하고 반성했지만 그러한 것들이 이십 년 우정을 단칼에 동강낼 정도인 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비판을 받자 즉시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이고 그것이 분노를 일으켜 나와의 관계를 끊게 만든 방어 기제로 작용을 한 것이다. 여튼 그 친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내 따귀를 갈기고 싶어진다.

앞서 말한 ‘내사’에 관련해서 재미있는 용어를 하나 발견했는데 바로 내사 성향이 농후한 사람을 가리켜 ‘치아 장애자’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도 치아의 기능에 이상이 있는데 무엇이든 잘 으깨어진 상태로 받고 싶어하고, 남의 의견을 비판과 검토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상처 받기도 그만큼 쉽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비판에서 아무런 모순도 발견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삼켜버리므로 자괴감과 수치감을 느끼는 정도 또한 높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마음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사를 버리든가 변화시켜야 한다고 충고한다. 내사를 변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내사는 대개 어린 시절의 경험과 직결되어 일찍 형성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옭죄는 과거 속의 원인을 찾아 마음에서 추방시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거부당하고 상처받은 우리 안의 어린 아이, 다시 말해 예전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했던 부분을’ 찾아내어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자신조차 함부로 대했던 이 어린아이를 긍휼히 여겨 함께 울고 슬퍼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그 어린아이(어릴 적 자신)에 대한 애정이 싹튼다는 것이다. 전자가 원인을 거세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원인을 끌어안는 방법이랄까.

임상의 이러저러한 예를 들어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한 대상과 관계를 끊는 것은 결국 더 깊은 상처로 남을 뿐이며, 그보다는 그와 일정거리를 두고 계속 접촉하며 적극적으로 나를 표현하고, 과도한 자기애는 버려야 하며 좀 더 긍정적인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말이다. 난 가끔 무언가 제안을 한 뒤엔 상대의 반응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경향이 있는데, 상대가 거절하면 수치심 때문에 자괴감 느껴지고, 상대가 허락을 하더라도 그것이 흔쾌한 반응인지 아니면 내키지 않아 힘겹게 내린 수긍인지 걷잡을 수 없어 뭐 마려운 개새끼마냥 종종거린다는 것인데, 이런 것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있었던가. 타인과의 접촉 기능이 붕괴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내가 점점 수상해진다?!!)

아흐, 이런 책의 독후감을 쓰는 건 너무 힘겹다. 수박 겉 핥기를 모면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궁금하면 읽어봐라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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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7-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테이션 사건이요..저도 그런일 당한적^^ 있어요 .대학다닐때 후리지아를 좋아해서 사갖고갔더니, 다른 애들은 이쁘다이러는데, 유독 한 아이가.."후리지아, 제일 싼꽃이잖아" 이러는거예요.-..- 도대체 아름다운 꽃의 가격을 누가 정한단 말인가요..저도 그 친구와 의절했어요..그렇게 친한 애도 아니었고, 잘보이고 싶은 사람들 앞도 아니었지만..두고두고 생각나서, 어처구니 없게하네요..지금두요.

마녀물고기 2004-07-27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게 그 친구는 각별했습니다. 속 좁은 친구가 아니어서, 그 친구가 의절을 선언한 데는 그간 알게 모르게 저지른 제 잘못이 두터웠을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힘든 일이 생길 적마다 생각나는 친구인데, 요즘은 더욱 자주 생각이 납니다.
우우, 근데 후리지아에 그런 대사라니. 의절 잘 하신 거 같아요. -.-
 
라모의 조카 프랑스 현대문학선
드니 디드로 지음, 황현산 옮김 / 세계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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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을 보니 환상적으로 눈님이 나리시기에 아흐 탄성을 지르는 찰나, Where is the love~ 핸드폰이 울어댄다. 당신이 누구든! 내 당신에게 백 년 동안의 키스를 보내오, 자못 정열적인 어투로 손짓, 허리짓, 발짓, 쌩쑈를 해가며 전화를 받았으나 통재라, 코끝 앙 깨물어줘도 시원찮은 애인도 아니고 내 살처럼 익숙한 친구도 아니고 느끼하지만 그닥 싫지 않은 호의 보이는 뭇사내도 아닌! 일터의 대빵님이시다. 침 꿀꺽 삼키며 pay 올려준다는 얘기면 참아야지, 여차지저차해서 오늘 농땡이다 하면 참아야지, 했지만 눈도 오는데 늦지 않으려면 다른 날보다 일찍 나서야 할 거라는, 친절한 코멘트를 휘날리신다. 죄길, 그럼 그렇지. 어떻게 내 주위의 인간들은 감성이라고는 뙤약볕에 나뒹구는 개똥보다도 팍팍하고 말라 비틀어진 북어 대가리보다 볼품없고 만성 변비 환자처럼 누르퇴퇴하단 말이냐. ‘눈이여요, 그대. 하늘에서 무수히 그대가 나려요.’ 어찌하여 이런 문자 하나 날리지 못하는 것이냐 말이다! 내가 봐도 좀 닭살스럽긴 하다만.

이리 쓰잘데기 없는 썰을 풀며 변방을 도는 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읽었는지 아닌지 기억조차 못하는 내게 독후감 쓰기는 지푸라기이자 마지막 보루인 셈인데, 대체 이런 류의 소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도통 모르겠다. 굳은 머리에 기름칠 해가며 열심히 읽긴 읽었다만 사실 뭔 말인지 헤아리는 것도 수월찮다. 내가 얀세니즘을 아나,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가 어쩌고 하는 계몽철학을 아나, 유물론을 아나, 그렇다고 혁명 이전의 프랑스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기를 하나, 책을 읽은 건지 글자 공부를 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은 당시 프랑스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대해 일자무식의 문외한이 읽기엔 버겁고 또 버거운 책이라는 것이다. 하여 난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행히 역자인 황현산 교수가 무지막지한 책임의식을 갖고 방대한 자료와 빛나는 석학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무수한 주석을 달아놓기는 했지만 본문 읽으랴 주석 읽으랴 그 또한 중노동이었음에랴. 또한 역자의 해설로 말하자면 넘어서야 할 또 다른 텍스트일 뿐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내 정신은 일개 미립자 보다도 불완전하다).

이것은 1인칭 화자인 ‘나(철학자 디드로)’ 와 건달인 ‘그(음악가인 장 필립 라모의 조카)’의 대화로 진행되는 대화체 소설이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한나절 동안 주고받는 이야기가 십수년을 아우른다. 라모의 조카는 생계를 위해서라면 권세 있고 돈 있는 자에게 빌붙어 자존심도 버린 채 광대짓을 서슴치 않는 자이다. 그는 사회의 변혁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못하는 천재들을 혐오스러운 존재라 치부하고 도덕이나 학문, 교육 등도 봉건 귀족을 옹호하고 그들의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 조롱하면서, 도덕적 가치와 상식을 뒤엎고 악덕이 덕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악인임을 인정함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이야 행동은 그렇게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인 것에 비하면 적어도 ‘위선자’라는 불명예에서는 비켜간다. 그의 인생관은 표리부동에 있다.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면 그때 그때 진실을 말할 수도,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진실이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헌데, 디드로는 이렇듯 방종하고 비열하며, 파렴치한인 라모의 음악적 재능에 매혹된다. 라모는 스스로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되고, 비통함에 오열하는 여자, 절망에 빠진 사내, 눈물짓는 처녀, 폭군이 되어 위협하고 노예가 되어 복종하기도 하는 등 열정에 사로잡혀 노래하는 시인이다. 디드로는 라모를 경멸하면서 찬탄해마지 않는다.

일갈하고, (짧은 소견으로) 디드로는 자신이 편집을 맡고 있던 <백과전서>가 팔리소, 슈아젤, 베르탱 등에게 공격을 받자 광기 어린 무뢰한인 ‘라모’를 등장시켜 자신을 포함한 당시의 지식인과 지배계급을 마음껏 조롱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을 통해 그들을 색다르게 풍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무식하게 진격하기 보다는 의뭉스럽게 우회하는 전술을 편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건 그렇고 아무튼! 앞서도 말했듯 당시 프랑스의 여러 가지 배경이나 디드로와 책에서 언급되는 인물들간의 관계에 대해 통찰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 책은 어렵고 또 너무나 어렵다!
누가 제발 내게 이 책을 이해시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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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4-12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모의 조카와 함꼐 읽었던 것이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옛거장들,비트겐슈타인의 조카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언젯적 읽은 책인지 아득하군요.얇은 책 속에 함축된 유럽문명을 약간 엿보고는,슈팽글러의 중세의 몰락을 읽었을 때처럼,한문원본의 사서삼경의 책장을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들춰보고 난 뒤처럼, 아 난 너무 무식하구나...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ㅋㅋㅋ.지금은? 그냥 웃지요

마녀물고기 2004-04-1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냥 웃지요.. 너무 재미납니다.
 
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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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어둠>은 우울증에 대한 저자 자신의 경험적 보고서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겪게 된 삶의 마비와 그로부터 탈피하기까지의 과정을 엮고 있다. 스타이런이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심각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시노 델 듀카상을 수상하기 위해 파리에 체류하게 된 시점부터다.

스타이런은 시상식 행사의 일부인 오찬 약속을 까맣게 잊고 프랑수아즈 갈리마르와 점심 약속을 하는가 하면 방송사가 주최한 피카소 박물관 견학 일정도 망각해버리고 만다. 우울증은 비단 감정의 하강뿐만이 아니라 평면적 일상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우둔한 이성이든 냉철한 이성이든 관여하지 않고 끔찍한 균열을 일으키며 자기 혐오를 거쳐 자기 파괴의 욕망에까지 시달리게 하는 것이다.

스타이런은 까뮈와 로맹가리, 무정부주의자인 애비 호프먼 등의 우울증에 관련한 죽음에 대해 언급하며 분노한다. 타인에 의해 그들의 자살은 혐오스런 범죄로 왜곡되기 일쑤이고 비통해하기 보다는 치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나의 사촌 언니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우울증의 희생자가 되었다. 형부의 불륜으로부터 비롯된 우울증은 결국 그녀의 목을 매달았다. 그녀의 자살은 가족들을 슬픔과 비통함 대신에 수치심과 몰이해, 혐오감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위로받지 못했다. 모두들 쉬쉬했다. 측근의 자살을 문학적 치기에 덧칠하려 했던 나란 인간을 빼고는 말이다.

우울증은 스타이런의 육체에 경련을 일으키고 마비를 가져왔으며 격렬한 고통에 시달리게 했다. 불면이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극도로 예민하거나 정 반대 극도로 무감하고 무기력한 시간들이 지속되었다. 결국 자신에 의해 자신이 살해될 운명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를 자처한다.

기이하게도 자물쇠로 잠긴 철망을 친 방과 음산한 복도가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두뇌에 끊임없이 몰아치던 돌풍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휴식처로 찾아들어온 곳이 떠나온 세계보다 좀더 친절하고 부드럽게 미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엄살을 떨지만 결국 그곳에서 그는 갱생하게 된 것이다.

스타이런은 말한다. 우울증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우울증의 의미는 이 세계의 모든 악의 모사품처럼 느껴진다. 일상생활에서의 불협화음, 혼란, 불합리, 전쟁, 범죄, 고문, 폭력, 죽음을 지향하는 충동과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등 견딜 수 없는 역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라고. 끔찍하지 않은가?

우울증은 자칫 배 부른 사람들의 호사품이나 전유물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암이나 에이즈, 사스 같은 병들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왜 우울증은 한겨울 윗목 신세인 것일까? 우울증을 고양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료한 자의 사치쯤으로나 간주되는 우울증을 지리멸렬 읊조릴 용기가 누구에겐들 있을까. 나 혼자 그러안고 감당해야 하는 데서 오는 추락의 깊이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게걸스러운 기대를 가졌던 만큼 실망도 크다. 오히려 우울증에 대한 공포심만 자극한 격이랄까.

상실감이 우울증을 심화시킨다. 왼쪽 귀에서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가끔 근육이 경직된다. 틱 장애도 아닌데 눈꺼풀이 파들거리는 때가 왕왕 있다. 나 같은 음지식물을 누가 좋아할 것인가, 라는 자기혐오는 말할 나위도 없다. 떠남과 내침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다. 핸들을 틀어버리고 싶다는 파괴의 욕망도 두렵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들뜸도 이 즈음에선 겁이 난다. 우울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 이 지독한 상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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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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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하다. 밤이 나를 어지럽히는 일은 좀체로 없다. 깨고 나면 잊히는 꿈들도 이제는 수월하다. 먼 곳의 애인이 아들 얻었다는 소식을 재떨이에 뱉으며 일을 나가고 석류처럼 떫은 그리움을 등에 지고 귀가한다. 돈통 속의 누런 동전들이 십 년 동안 쌓이면 약속도 황달 앓는 낯빛이 될 터이지. 그러나 나의 허무는 그리 단단하지 않았으므로 봄밤의 환한 배꽃이며 나를 조롱하며 날아오르던 자목련이며 오래 걷던 길이며 알몸으로 서늘하던 기다림들이 시처럼 아프다. 일상에 잠식 당한 대가는 비구니 같은 표정으로 세상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일이다.

한 남자가 행방불명된다. 실종된 지 7년이 지나자 남자는 사망으로 인정되지만 그는 砂丘에 갇혀 오늘과 내일의 유기적 관계를 상실한 채 맥락없는 삶을 살고 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모래에 시달려 썩어가는 나무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집, 퍼나르기를 멈추면 금세 모래사태에 쓸려 묻히고 마는 집, 모래 구덩이의 을씨년스러움에 감금 당한 남자는 모래를 팔아 연명하는 부락 주민에 의해 강제 부역을 떠맡는다.

모래 속의 여자는 남자에게 유곽 같은 존재다. 여자는 유폐에서 오는 외로움을 녹여주는 대가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폭력을 묵묵히 받아낸다. 하지만 여자 또한 곤충 채집을 원했을 뿐인 남자에게 행사되는, 도발적이고 야만적인 횡포와 무관하지 않다. 모래와 부락은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유기체다. 그 둘은 교묘히 연동하며 자신들을 버린 세상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낸다. 남자의 존재는 원죄의 원형이다. 존재 자체가 죄가 되고 형벌의 대상이 된다. 탈출과 좌절, 복종과 반목이 뒤범범돼 읽는 내내 모래 더미에 갇힌 듯 텁텁하고 끈적하다. 여자는 자궁 외 임신으로 모래 구덩이에 내려진 로프에 묶여 올려지고, 여자를 끌어올린 로프는 여전히 사다리에 매달린 채이지만 소설은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남자의 독백으로 막을 내린다.

여행은 돌아옴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늘 일탈을 꿈꾸지만 일탈을 잉태하는 것은 내가 서 있는 일상의 자리이다. 하나가 소멸하면 또 다른 하나도 숨을 죽이고 마는, 안은 밖이 되고 밖은 안이 되어버리는 뫼비우스의 띠가 차지한 공간, 그곳에서 나는 오늘도 숨 가쁘다.

아베 코보는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리는 실존주의 작가이며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세계 10대 문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를 보는 세간의 시선이 어떠하든, 그의 행보가 어떠했든지 간에 <모래의 여자>는 매혹적이다. 마치 Radio Head의 노래를 듣는 듯 朦染하고 스산하다. 터지지 않아 답답한 울음처럼, 공증받지 못해 허름한 약속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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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9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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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를 읽는다. '지독한 사랑'은, 이제는 너무나도 평면화된 글귀라 감동의 자투리마저 남아있지 않은 제목이다. 또한 그것은 도덕적 가치(라는 게 있다면)를 상실한 기형적 사랑으로 변질된 지 오래이다. 마찬가지로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 또한 불구의 사랑이지만 섬뜩할 정도로 치열하고 민감하다. 하지만 김진석의 말대로 사물을 보는 눈은 지극히 정답고 따뜻하며, 그들을 관찰하는 시각 또한 허투로 된 것 하나 없이 섬세하고 날카롭다. 쉬임없이 분열하다가 어느 순간 합일로 도약하며 한없이 냉소적이다가 눈물날 정도로 살가와지기도 한다.

시집은 시인의 육체에 대한 이데올로기로 꽉 차 있다. 불가능하고, 방심할 수 없는 공포. 굳이,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강은교 선생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상상력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포커스를 맞춘 시는,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섬뜩하다. 그래서, 집어들 때마다 진한 눈물이 맺히는 건지.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간다. 투명한 너의 몸이 나를 감싼다. / 나를 보태고도 넘치지 않는 너의 몸! 찢어지는 아픔도 피 / 흐르는 고통도 없는 너의 몸 속에서 나는 숨이 가쁘다. 호흡 / 이 곤란하다. 내가 나의 몸으로 남아 있으려고 몸부림칠수록 / 숨은 점점 끊어져오고 네 몸은 내 몸을 틈없이 너무나도 꼭 / 맞게 마신다. / 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너는 내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 / 걸 알았을 때 내 몸은 네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나 / 를, 내 몸을 찾을 수 있을까? 너를 다 퍼내고 남은 발라진 / 생선 가시일까? 내 몸은, 네 몸이 증발하고 남은 얼룩일까? / 너의 살 속으로 들어갈 때 이미 나는 네 몸에 젖어 있었다. / 물 속의 물방울이여. - '물 속의 물방울' 전문

누군가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일, 먼지 한 톨 틈입할 수 없게 그를 포획하는 일, 나의 견고한 자아, 명료한 의식을 버려야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일까. 사랑은, 그렇게 나를 버리고 네게로 열린 길을 향해 내딛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너무 서글픈 일 아닌가. 나를 잃고 어떻게 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지.

살아가야 할 날들이 석탄더미처럼 시커멓게 드러누워 있 / 는데 그대는 꽃잎 하나로 이 세월을 버티나. 황토를 거머쥔 / 뿌리로부터 솜털난 잎, 새 잎 가는 줄기를 거쳐 울컥, 새벽을 / 부르는 북소리같이 첫새벽 새 바람을 일으키는 이슬같이 아 / 름다움을 낳아놓은 그대, / 견뎌야지, 견뎌야지 - '작고 짧은 속삭임' 일부

역시 사람만이 희망인 것일까? 석탄더미 같은 삶들, 그것을 마시며 갈 수밖에 없다는 자각은 실로 참혹하다. 앞을 보니 끊겨진 교각마냥 황폐하기만 한 시간들이고, 뒤를 보니 희망이 휘발된 앙상한 뼈의 무덤 뿐일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덤에 묻히거나 끊긴 교각으로 돌진하는 일 뿐이다. 이런 절망에서 나로 하여금 '견뎌야지'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낳는, 낳아놓는 그대라는 고백, 정말 아름답다.

토사물을 볼 때의 낯섦처럼 그 밤에 내 속에서 내가 울컥 /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혓바닥을 까부리며 국수가락 빼듯 말/ 들을 토해냈다. ... 오물을 몸에 처바르고 팬티를 벗겨내리고 / 더럽고 더러운 짓을 할 때에도 내 몸은 민감하게 반응할 뿐 / 죽은 시체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몇 걸음 / 떨어져서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책들을 뜯어발기는 생피비린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 지경이었다. ... 책 속에서 조화롭게 / 서로서로를 지탱하는 말들이 찢겨져서, 절룩이는 말, 피 흘리 / 는 말, 마지막 숨을 내쉬는 말, 비명지르는 말, 살려달라고 / 애원하는 말, 살점이 찢겨져 삼켜지는 말들로 삽시간에 아수 / 라장이 되었다. / (그 참혹한 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라고 말하지 / 않는다. 나는 증거를 찾기 위해 나를 심문한다. 그 참혹한 밤/ 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 말의 몸, 몽염 8 중 일부

'몽염' 시리즈에서 육체는 영혼과 분리되어,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첨예하게, 혹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립한다. 또한 인간이 사물화되기도 하고, 나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나를 찢어발기는 익명들과 만나기도 하며 유리의 이쪽과 저쪽에서 결코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이, 입김만이 둘의 존재를 가늠케 하는 소통 불가의 공간에 놓여지기도 한다. 읽을 수록 답답하고 시인의 가위눌림이 내게 전이라도 된 듯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이 펼쳐진다. 차라리 화악, 손목이라도 그어야 놓여날 절망. 하지만 얄밉게도 시인은 이러한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눈물 찔끔 짜도 좋을 만큼 따뜻한 손길로 가슴을 쥐기도 한다. 영악한 것인지, 죽음의 공포와 치열하게 싸운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자비로움인 것인지.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넌다 /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숫대가 서 있고 / 누렁빛 들판에는 풍성한 예감이 있다 / 먼데 산이 선명하다 / 형은 펌프 옆에서 양말을 빨고 / 하, 참 이 가을엔 / 햇빛의 뼛속까지 보이는구나 -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전문

근래 들어 또다시, 호흡이 불안정한 때가 잦다. 이러다 죽지 싶게 심장이 조인다. 내 멋대로 쓰고 죽고 달뜨다가 침몰하다가 허술한 일면 마음껏 들키다가, 막상 부딪치면 피 나게 후회하고 도리질하고, 이끌림에 대한 열망 수없이 부정하고. 담배가 늘었다. 불꽃 잠들 날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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