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
정영문 지음 / 세계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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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9년 겨울이다. 그보다 한 해 전, 작가정신에서 이윤기의 <진홍글씨>를 필두로 소설향 시리즈를 내놓았는데 정영문의 <하품>이 열한 번째 발간되었다.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는 이순원, 윤대녕, 최윤, 신이현, 김채원 등 작가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기껏해야 150쪽을 넘지 않는 분량이라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적합하고 코팅되지 않아 소박한 표지가 마음에 쏙 들었던지라 15권 째까지 착실하게 사 읽었다.

이후 김연수(친구가 김연수의 누나와 친분이 있는 모양이다. 그가 김연수를 생각하며 던진 멘트는 그 엄살에 있어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 ‘지인의 동생이 펼친 무공 실력에 대한 평가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라니. 그 후 김연수는 친구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평온하고 세심한 인사법’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문학상을 거머쥔 자의 여유로움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여유로운 심성이 문학상을 먹어치우게 했던 것일까)와 백민석의 소설이 합류했다.

난 정영문의 풀어 헤친 머리가 좋다. <하품>의 한쪽 면을 차지한 정영문의 사진은 수도승처럼 보이기도 한다. 퍼머가 풀어져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아래를 향하고 있는(어쩌면 눈 감고 있는) 눈과 굳게, 그렇지만 고집스럽게 보이지 않는 얇은 입술과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두 무릎을 말아쥔 힘줄이 돋은 그의 손. 입 주위에 모여든 한 줄 주름으로 정영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정영문을 정영문 답게 보이게 하는 건 그의 옆모습이다. 그의 옆모습에 영광 있으라!

그건 그렇고, 정영문의 글쓰기를 가리켜 ‘이단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듯 정영문 소설의 방식은 주류와 멀어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전공(심리학)을 글쓰기에 백분 발휘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인물은 두 명으로 족하다(하나여도 상관은 없지만 그리 되면 소외와 단절의 극적 효과가 반감될 것이므로). 그들의 직업은 무위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으며, 듣는 이의 반응에 조응하는 방식으로의 대화가 아니라 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독백의 방식(<하품>에서 ‘나’와 동물원에서 만난 사내가, <겨우 존재하는 인간>에서 ‘나’와 공원에서 만난 사내가, <중얼거리다>에서 왕과 왕비, 광대, 시종, 시녀가, 또한 그의 단편에도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상은 대부분 익명의 누군가이다)을 차용함으로써 ‘관계’의 비루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대체로 상대에게 무관심하지만, 구걸하는 태도가 사뭇 당당하거나 살인을 고백하는데 있어 오늘 점심에 무얼 먹었는지에 대해 얘기하듯 대수로워하지 않는 등, 상대가 파렴치하거나 뱀처럼 사악해 보일 때는 예외적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갖는다.

또 정영문은 가족이란 관계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인하며 혐오감을 드러낸다. 누군가 얘기했듯 가족은 그것이 끊을 수 없는 사슬로 엮인 운명이라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절망적이다 라는 말을 형상화시킨다. <무게없는 부피>에서 죽음을 앞둔 화자는 아들의 탄생이 여자가 놓은 덫이라 생각하고 그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들이 잉태되는 순간조차 자신은 여자의 역동성 앞에 불가피하게 놓여있었을 뿐, 임신에 기여한 바가 없었음을 명백히 한다. ‘핏덩어리의 그 기괴하면서도 느끼한 느낌’이라 표현되는 아기의 탄생은 그가 자람에 따라 역겨움과 가증스러움과 환멸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을 향해 ‘우리의 모든 관계는 무효이며, 마땅히 무효가 되어야 하며, 무효임을 선언한다.’라며 교활하게 웃는다. <환멸>속에 등장하는 ‘나’는 어머니를 창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치매에 갇힌 아버지의 삶을 비꼬며 ‘그가 내 아버지라는 확신을 가진 적은 단 한번도 없’을 뿐더러, 오늘도 그의 죽음이 유보된 것을 애석해한다. <괴저>의 ‘그’는 몸이 썩어들어가는 병을 앓는다. 그는 가족이라는 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지우는 쪽을 택한다. 그의 죽음을 보며 가족들이 터뜨리는 눈물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는 이 아이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이 아이는 우리를 살렸어’라는 자신들의 안도에 대한 거북함 탓이다.

또한 정영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백스페이스는 무용지물이다. 그는 언어를 생산하고 그 언어를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로 나아간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사고와 언어를 無로 되돌린다. 이것은 그의 소설의 일관된 정서다.

“네가 내게 올 수 있는 먼길들을 놔두고 가장 가까운 길로 와줄래?”
“.....”
“어쨌든 안 갈게.”
“됐어. 그럼. 그래, 오지 않을 수 있으면 오지 마.”
“그래도 되겠지?”
“괜찮아. 어쩌면 너무도 혼자 있고 싶은 나머지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기라도 바랐는지도 몰라. 네가 옆에 있게 되면 너를 견딜 수 없게 될 거야.” (불면증)

- 후회가 되나, 내가 말했다.
= 아니. 아니, 후회가 돼.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한 게 후회가 된다고 말하고 싶군. (하품)

- 그것을 보는 사람을 다소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아니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는 춤이면 좋겠어. 그것의 넋을 빼놓는 나팔소리에 넋이 빠져 그것을 보는 사람의 넋까지 빼놓는 춤을 추는 코브라가 추는 춤 같은. 아니, 꼭 그런 춤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춤이어도 좋으며, 그런 춤이어도 좋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런 춤이어야 한다 (중얼거리다)

이것은 그의 글쓰기 방식과도 통한다. 그의 글은 어리둥절하고 넋이 빠지게 만들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함과 동시에 정영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반드시 그런 방식을 유지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영문식 언어의 유희를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을 <고문하는 고문당하는 자>에서 발견한다.

-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한다. 너는 그 말들의 울림만을 느낀다. 그의 모든 말은 네게 다가오지 못하고 네 주변에 머물 뿐이다. 너 또한 무슨 말인가를 하고자 한다. 자신으로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말을, 의미를 벗어나 있으며, 그 상태로 자족적인 어떤 말을, 하지만 너는 어떤 말도 구상할 수가 없다. 너의 모든 생각들은 혼돈 속을 서툴게, 다리를 저는 사람처럼 가로질러갈 뿐이다. 너는 너의 언어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정영문의 소설은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전혀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루하다. 그의 소설집을 주욱 늘어놓고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좋다. 서사가 그의 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곳이든 칼로 오려내어 짜맞추기 해도 새로운 소설 한 편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품의 기운을 털어내기는 힘들다. 또 정영문은 한 문장에 소유격 조사를 반복해서 사용(의도된 것이라면 그 의도의 내용이 궁금하다)하고 쉼표를 남발함으로 해서 자연스러운 읽기를 방해하는 오류를 범한다. 간혹 비문과 맞닥뜨리는 일도 있다. 정영문이 고뇌하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진로와 문학에 대한 성찰은 <어두운 화면 위에 떠오른 느슨한 말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결국 문학의 본질적 기능은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 언어에게 낯선 이미지들을 소개하고, 언어가 그 이미지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도록 행위에로 이끌어내는 작업. 언어의 보살핌과 위협을 동시에 받으며 하는 사고의, 좌표 없는 항해, 존재의 규명이 아닌, 그것의 규명될 수 없음을 규명하는 헛된, 하지만 부득이한 노력.

- 자신의 절망을 표현할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더 큰 절망.

- 그는 자신의 글이 사조라는 하나의 군(郡)에 묶이기에는 넘치거나, 아니면 턱없이 모자라는, 단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싶어한다.

- 재치 있는 기교와 놀라운 착상이 아닌, 투명한 직관과 깊은 성찰에서 나온 작품은 얼마나 드문가. 그러한 작품들의 결핍으로 인한 커다란 구멍 속에서 사람들은 허우적거리고 있다.

- 자아에 대한 비평적 거리 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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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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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요즘 차 안 갖고 다녀? 라는 질문에 뒤늦은 자각이지만 나까지 교통 지옥에 합류할 게 뭐 있습니까? 게다가 서울 시내 공기 좀 보십쇼, 대중교통 이용해야지, 라며 어깨를 으쓱하지만 사실 내가 차를 모셔두기로 한 것은 순전히 기름값 때문이다. 맘 먹고 카드 명세서를 훑어 보았더니 한 달 기름값이 이십만 원을 상회한다. 이십만 원이다! 하루에 만 원 돈을 교통비로 날리는 셈이다. 뒷골이 띵할 수밖에.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기로 마음 먹은 후 얻은 것이 많아졌다. 햇빛 내리는 거리를 활보할 때의 유순한 청량감, 사람들의 지저귐 속에서 맛보는 타인의 삶, 육체가 깨어있다는 느낌, 반은 졸고 반은 책 읽는 지하철 안에서의 나른함 등. 오늘 하루 오며가며 읽은 것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다. 149쪽으로 짧은 데다가 여백도 많고 행간도 넓어 한 시간이면 족히 읽을 수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5년 전쯤 친구에 의해 알게 된 작가다. 그는 그녀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3부작에 매료되어 틈만 나면 읽었니? 하며 나를 괴롭혔다. 그녀의 어떤 점이 너를 그렇게 들쑤셔 놓은 거야, 물었지만 그는 번번이 읽고 나서 얘기하자 했다. 난 그의 태도와 수선스러움이 못마땅했으므로 일부러 피해가며 읽지 않았다. 그 후 우린 둘 다 사는 것에 바빠졌고 자연히 뜸해졌다. 그리고 봄, 교향곡처럼 아름답게 분열하는 햇빛 속에서 그가 그리워졌고 그리움의 대가로 그녀를 읽어보리라 작정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시리즈를 읽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절판되었으니 <어제>라도 읽을 수밖에.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요즘 읽게 되는 책들마다 고통이다.

토비아스의 어머니는 몸을 팔아 밥을 산다. 어머니의 몸을 유곽으로 삼은 농부들은 토비아스라는 존재에 대해 무감하다. 그들은 문을 걸어잠글 생각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능욕한다. 선생만이 예외다. 그는 어머니의 방문을 넘으며 문을 잠그고 방문을 나서며 토비아스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 날, 토비아스는 어머니의 몸 위에서 잠든 그의 등에 칼을 꽂고 국경을 넘는다. 그는 낯선 나라의 이방인으로, 기계와 같은 삶을 꾸리는 공장노동자로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린’은 유일한 구원이자 해방구이다. 자신은 알고 린은 모르는, 린은 자신의 배 다른 여동생이다. 린의 출현은 토비아스를 또다른 비극으로 몰아간다. 유부녀를 사랑하는 일은 일상의 퇴화를 가속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체는 간결하다. 그녀는 자신과 등장 인물 사이에 심리적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의 고통 속에 저자 자신이 함몰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그녀의 등장 인물들은 운명에 지치고 고독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정신 분열에 시달리지만 그녀는 그들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견지하며 무덤덤하게 서술한다. 그녀는 풍경화 한 장 걸어놓고 그곳에서 숲의 역사를 찾으라 한다. 홀씨 하나 바람에 날려 뿌리내리게 된 날의 황홀, 새와 짐승들의 노님, 폭우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키 큰 소나무들, 그 자리를 대신한 단풍나무, 떡갈나무, 물푸레나무들이 바람에 사각대는 소리,를 몸소 느껴보라고 한다.

문학이 스스로 울지 않고 그 눈물의 몫을 독자에게 남겨 놓는 것이라면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그러한 문학의 바람에 착하게 조응하는 작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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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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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게는 책을 들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떠안기는 버릇이 있었다(이것이 과거형인 것은 이제 그 버릇을 옆집 개에게 줘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그가,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책을 보고 마음에 들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 못된 버릇 때문에 내게는, 정작 내가 갖고 있어야 할 녀석들이 절판되는 수모 앞에서 종종거리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이것이 현재형인 것은 아직도 그때의 종종거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청하 출판사 발행 초판본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아무튼 난 그 무렵 장 그르니에의 <섬>을 끼고 다니며 틈 날 때마다 애독했다. 그러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가끔 버스에서 마주치는 훤칠한 재수생에게 매료되어 눈인사 한번 나누어 본 적 없는 그에게 이거요, 전해 주었다. 그 날 눈이 왔고 훤칠한 재수생은 눈보다도 더 새하얀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알량하게도 그 눈부심에 꼴깍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그 후로도 청하 발행본 <섬>을 몇 차례 더 구입했고 구입한 족족 마음에 드는 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운명은 가혹하기만 한 것이어서 얼마 후 청하 출판사는 문을 닫았다. 청하가 발행한 장 그르니에 전집은 표지의 착 가라앉은 색채(쟈끄만은 예외라 연초록의 뽀사시함이 거슬리긴 했다만)와 타원 안에 들어있는 그르니에의 판화 초상 덕에 꽤 마음을 자극했던 지라 청하의 파산은 나의 그것처럼 마음 서늘한 소식임에 분명했다.

그러다 민음사에서 <섬>이 발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친구가 종로서적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을 바로 그 시각 그 즈음에 <섬>이 눈에 띄었다. 난 단숨에 값을 치르고 뽀얀 미소로 친구를 맞았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이 <섬>이 그 <섬>이 아니다? <섬2>다? 섬의 후속편인가? 그러나 소설인데? 앗뿔싸, 민음사가 아니라 책세상이네? 게다가 그르니에가 아니고 끌레지오라? 다행이었던 것은 끌레지오에게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 난 그의 <섬>뿐만 아니라 <조서>와 <침묵>과 <사막>과 <황금물고기>와 기행문인 <하늘빛 사람들>까지 찾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타오르는 마음>도. 아오, 사설 길다.

<타오르는 마음>은 일곱 개의 단편으로 엮여 있다. 그의 데뷔작인 <조서>를 약간 머리에 힘 주고 읽어야 했던 반면 <타오르는 마음>은 그저 술술술술 읽힌다. 그의 소설이 관통하고 있는 것은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대한 반발과 인간으로 인해 거대해진 세상이 인간 자신을 살해하는 병기가 될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페시미즘이다. 하여 클레지오는 원시의 자연으로, 사고가 영글기 이전인 어린 시절로 회귀한다. 그런 그에게 제3세계를 그리는 일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겠다.

<타오르는 마음>에 실린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리거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하지만 이들은 삶이 선사하는, 주옥같은 음률에 익숙한 티없음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날 선 세계가 휘두르는 횡포에 상처 받은, 상실과 고독을 먼저 체득한다. 하지만 그들을 읽으며 뼛속까지 아리지 않은 것은 클레지오가 그리는 서정성 때문이다. 그의 묘사는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신비하기까지 하다. 그의 세밀한 묘사 탓에 누구는 그를 사실주의 작가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지만 난 오히려 그가 몽환의 밤을 서성이는 신비주의 작가라 말하고 싶다. 그가 그리는 가시덤불과 관목들, 노천 시장, 마차들, 밤꾀꼬리의 울음 소리, 맨발로 걷는 아이, 정령들을 따라 가다 보면 머리 속이 옅어지고 호흡이 느려지며 박무에 싸인 텅 빈 숲을 거니는 것처럼 아련해지는 것이다. 글을 읽으며 나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 그는 천진난만하고 그윽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내친김에 사적 고백을 좀 더 하자면 이렇다. 시험 공부한답시고 졸던 와중에 라디오에서 사연을 읽는 디제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연인즉슨, 이제 대학생이 되어 떳떳해진 내가 버스 안에서 만난 여학생과의 재회를 꿈꾼다, 뭐 그딴 것이었는데 사연의 말미를 듣고 난 기절초풍하여 그 달던 잠에게 레프트 훅을 날리고 싶어졌다. 세상에나, 그 여학생이 건네준 그르니에의 <섬>이 이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가 되었다는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 되어서 다시 듣기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놈의 잠 때문에 시험도 망치고 그놈의 잠 때문에 주소 한 줄 제대로 얻어듣지 못하다니. 내 생에 다시는 없을, 극적인 순간을 허무로 마감한 잠은, 그러나, 여전히, 내 곁에서 위풍당당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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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거북 두 마리 - 글로바다 어린이문고 9 글로바다 어린이문고 9
강정규 지음, 이나미 그림 / 국민서관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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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해 전부터 '게으름의 미덕'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현대의 '발전'과 '발달'의 패러다임은 인간을 부품화 시키고 삶에 대한 사고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어떻게든 바쁘게 살아야만 의미 있게 사는 것이란 환상 속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바쁨의 중독'은 '인간성 상실'이란 위기를 초래한다. 점점 강퍅해지고 메말라 가는 현대인에게 경종이라도 울리려는 듯 근래의 서점가에는 때아닌 '느림'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벼운, 또 때로는 무거운 톤으로 들려주는 느림의 미학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한다. 주위를 돌아볼 만한 틈도 없이 바쁘게만 살아 온 지난날을 반성하고 삶의 의미를 재조명해 보자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서적들이 '인간성 회복'이란 주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청거북 두 마리>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느림의 미학' 사전이라고 하면 좋을까? 총 12편의 단편동화로 묶인 이 책은 각기 다른 소재, 주제를 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글들은 모두 '인간성 회복'이란 커다란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하루에 4, 5개의 학원을 전전하고 여유 시간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느라 인간 관계의 부재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자연과 타자와의 어울림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운다.

이 동화집의 글은 크게 세 가지의 주제로 묶을 수 있다. 첫째, 자연 사랑이다. '아빠와 함께 춤을'에서 주인공 '나'와 동생 '태완'인 엉뚱한 실수로 간혹 웃음을 사긴 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아이들이다. '나'는 미꾸라지를 잡아서 사이다병에 넣어 가지고 뛰어가는 경기를 하는 도중 운동장에 떨어진 미꾸라지가 불쌍해서 그것들을 집어서 다시 양동이에 넣어주다 경기가 끝나는 것도 모른 채 주위의 면박을 사기도 하고 동생 태완이 또한 외갓집에서 잡아온 개구리를 엄마 개구리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고집을 피우는 통에 밤중에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외갓집으로 가는 소동을 피우기도 한다.

'청거북 두 마리'는 이사 간 이웃의 청거북을 키우게 된 이야기로 평소에 내성적이고 움직이는 것은 절대 그리지 않던 형이 거북이에게 묵묵히 애정을 쏟기 시작하면서 가족과 세상을 향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과정을 그려보이고 있다. '아기게 두 마리'에서는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아기 게를 한 마리 얻은 가족이 그 아기 게를 고향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버스를 갈아타고 소래포구로 향한다는 이야기다.

지갑을 잃어버려서 모처럼의 휴일에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하고 되돌아오다가 작은 게 한 마리 때문에 돈을 구해 다시 발길을 돌린다는 이야기... '우리 강아지'는 강아지를 제 아이 대하듯 지극정성으로 돌보다가 아내의 임신으로 할 수 없이 다른 집에 맡겨 부부가 짬을 내서 강아지들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화분, 그리고 어항'은 아버지를 잃고 실의에 빠진 가족이 물고기를 키우게 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희망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야기들은 모두 생명의 고귀함과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지를 잔잔히 그려내고 있다.

둘째는 가족사랑이다. 집안일로 바쁜 어른들 때문에 심심해진 기명이가 이웃 아저씨를 따라 삼촌을 찾아 나섰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어 헤매다 지친 몰골로 가족의 품에 안긴다는 '기명이의 외출', 학교에서 늦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을 늘 등잔불을 밝히며 버스 정류장에 서 계셨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등잔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그리움이 애잔한 '등불', 성적으로만 평가되는 학교 제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도태되려는 아들의 방황 을 감싸 안고 '풀무 학교'라는 시험도 없고 자연과 친화하여 살아갈 수 있는 학교로 전학을 시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다시 건강해진 아들의 졸업식을 담고 있는 '거꾸로 가는 학교'가 그렇다. 가족간의 화해와 사랑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새삼스런 자각을 갖게 한다.

마지막 이웃사랑. 자신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닐까하는 스스로의 질문 앞에서 행복을 나누기 위한 일환으로 장기 기증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엄마의 숭고함을 이야기하는 '촛불', 열차 안에서 만난 병든 딸과 늙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인 '마음으로 여는 길'. 자선남비 옆에서 시주 받은 돈을 모두 자선남비 안에 털어 넣고 발길을 돌리던 스님의 모습이 전편을 훈훈하게 했던 '스님과 사관님', 이는 '가족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에게 이웃과 나누어 가지는 사랑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행복이며 가치 있는 일이란 것을 깨닫게 한다.

'청거북 두 마리', 이 단편 동화집은 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자칫 잃기 쉬운 사랑이란 감정을 전면에 부각시켜 빠름의 속도를 조금 줄이고 느긋하게 세상을 걷다 보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를 향한 사랑,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랑이 얼마나 많은 지, 그런 것들을 거두어 가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의미 있는 것인 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삶의 풍경이 되어 펼치는, 따뜻한 아랫목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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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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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러니까 2002년 봄, 건조한 문체로도 머리에 쥐 나게 웃길 수 있구나, 라는 것을 통감케 하던 P모씨께서 과감히(!) 추천하신 책이 바로 <서재 결혼 시키기>다. 내가 과감히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것은 P모씨 왈, 2001년 연말 자신이 선정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새로 발견된 작가상, 최우수 유머와 위트상, 최우수 표지디자인상, 최우수 지적인 글쓰기상, 최우수 번역상을 몽땅 휩쓸어 6관왕을 차지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셨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한 얇은 귀를 지닌 나로서는 그야말로 혹,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약간의 의심 속에서 진행된 책 읽기는 그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의심이 얼마나 부질없었는가 일깨워 주었다. 딱 2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읽어보아도 마찬가지, 마냥 행복하고 즐겁다.

앤 패디먼과 그녀의 남편은 ‘안 지 10년, 함께 산 지 6년, 결혼한 지 5년 된 사이’다. 둘은 티셔츠며 양말이며 레코드 등 일상다반사를 공유하지만 단 한 가지 책에 관한한 예외다. 침대나 미래를 공유하는 것은 자신들의 역사가 담긴 책을 공유하는 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그들이 결혼 5년에, 아이까지 하나 낳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장서를 합병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이야말로 ‘좀 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을 이루는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두 사람의 서재를 결혼시키기 위해 벌이는 우여곡절은 조금이라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고개 끄덕이며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 그의 영국식 정원 운영 방법과 나의 프랑스식 정원 운영 방법 사이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어쨌든 단기전에서는 내가 승리를 거두었다. 내 방식대로 책을 정리해도 그는 그의 책을 찾을 수 있지만, 그의 방식대로 정리하면 나는 내 책을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논리 덕분이었다. 우리는 주제에 따라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역사, 심리, 자연, 여행 등. 문학은 다시 국적에 따라 세분하기로 했다. (조지는 내가 너무 까다롭게 군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우리 친구가 이야기해 준 정리 체계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 친구의 친구가 몇 달 동안 실내 장식업자한테 집을 빌려 주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모든 책이 색깔과 크기를 기준으로 재정리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 직후 실내 장식업자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식탁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사고가 인과응보라고 입을 모았다.) -

책 한번 잘못 옮겼다가, 교통사고 당한 일로 인과응보란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허허 정말 재미있지 뭔가. 두어 번 포장이사를 경험한 내 경우는 이렇다. 이삿짐 센터 직원들은 일단 책장이 자리를 잡기만 하면 내 귀여운 책들을 이곳저곳에 무자비하게 쑤셔넣는다. 난 그 꼴을 잠시라도 허용할 수 없다. 침대와 옷장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여념이 없고 덩치 큰 소파와 장식장이 좌우로 행렬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난 그들이 쑤셔넣은 책들을 안전하게 꺼내 제 자리에 앉히느라 진땀을 뺀다. 어머니는 나중에 하라고 고함을 치시고 직원들은 책을 다듬느라 삐죽이 솟은 내 엉덩이를 노려 보며 기우뚱 기우뚱 짐을 나른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결벽증이라며 도리질을 해싸치만 이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런 친구들을 향해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아! 속사포를 쏘아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서재 결혼 시키기> 덕분이다.

또한 앤 패디먼은 교열 강박증 환자이기도 하다. 誤字를 견디지 못한다. 그녀는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의 페이퍼백에서 오자 15개를 발견하고는 ‘내가 알아채고 아끼게 된 오류들을 적은 편지’를 그에게 보내기도 하고 케이크를 주문했을 때 빵집 직원이 잘못 적어넣은(HAPPY BIRTHDAY'S) 아포스트로피에 기절을 하기도 한다. 이 또한 얼마나 흐뭇한지. 티비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급기야 채팅을 하면서도 오자를 보면 지적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정말이지 함박만한 웃음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누구든간에 이 책의 사랑스러운 마법에서 헤어나기란 어렵다. <서재 결혼 시키기>의 일독을 권하는 의미로 그녀의 유머스러움을 팁으로 하나 더.

- 우리는 하드백이 페이퍼백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단 책 여백에 써 놓은 글이 있을 때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 <미들마치>는 내 것을 남겨 놓기로 했는데, 이 책은 내가 열여덟에 읽은 것으로 여백에서 나의 미숙한 문학 비평 시도를 엿볼 수 있다(37쪽: “으그그”, 261쪽: “헛소리”, 294쪽: “우웩”). <마의 산>은 조지 것이 남고, <전쟁과 평화>는 내 것이 남았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여인들>에서 가장 괴로운 논란이 벌어졌다. 조지는 그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환각적인 표지에 전라와 반라의 두 여자가 등장하는, 그의 첫 밴텀판 페이퍼백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진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 책을 열여덟 살에 읽었다. 그 해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내가 그 해에 처녀를 잃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데는 굳이 일기를 들추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 사실은 내가 나의 바이킹판에 적어 놓은 촌평들에 빤히 드러나 있으니까(18쪽: “폭력이 섹스를 대신한다”, 154쪽: “성적인 고통”, 159쪽 : “성적인 힘”, 158쪽: “섹스”). 서로 항복하고 둘 다 보관하기로 하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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