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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마르셀 소바죠 지음, 백윤미 그림, 김문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거나, 혹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을 때면, 어떤 확실한 기호 체계도 수중에 갖지 못한다. - 롤랑 바르트
사랑처럼 ‘기호의 불확실성’이 암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언어의 범람 속에 살면서도 정작 내면의 소요를 적확하게 인화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란 요원한 일이다. ‘내 사랑을 믿지? 그렇지?’로 시작되는 『마지막 편지』는 주인 찾지 못했던 저자의 슬픈 시니피에들로 가득차 있다. 사랑의 순간에 갖게 되는 조심스러움은, 고백이 야기할 감정의 왜곡과 무반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변질된 시니피앙으로 표출된다. 하여 마르셀 소바조라는 여인은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마저,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방법에 익숙해있다. 그것이 상대에게 긍정으로 작용할지, 부정으로 작용할지 모르는 모험 속에 스스로를 방기하는 것이다.
이렇듯 어눌한 사랑이 정작 사랑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야, 생이 종착지에 다다른 순간에야 비로소 명징한 언어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책장을 열고 얼마간은 실연한 여성들의 공통적인 징징거림으로 읽혀 거북하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담담하고 단정하게 써내려간 그녀의 편지를 읽다보면 배신으로 인해 눈물 쥐어짜는 순간들이 얼마나 하릴없고 부끄러운 짓인지 짐짓 송연해지는 것이다. 마르셀 소바조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직시하며 사랑 뿐만이 아니라 관계를, 자아를, 나아가 삶을 냉철하게 조망한다. ‘강하고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생각의 풍부함’에 매료되었던 남성들은 결혼의 제도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 남성의 태생적 지배 본능에 굴복하여, 고분고분하고 범상하며 온순한 여성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연인을 위해 순종적인 역할을 전담하는 것은 존재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 존재감을 상실한 채 이어가는 사랑은 불구의 사랑이다. 하여 마르셀 소바조는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어린애처럼 열광하면서 자신의 성숙을 포기하고 남자에게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행복에 증인이 될 수 없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감각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아주 사소한 부분들까지 기억하려 했던 일이, 그가 없을 때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꽃피게 될까봐 조바심치던 일이, 그가 느끼는 것을 자신도 느끼기 위해 빠르게 걷던 걸음을 늦추고 파리의 구석구석을 냄새 맡고 바라보고 소리 듣던 일들이, 이제와 사랑을 버리고 우정의 이름으로 명명되어진다면 어느 누가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마지막 편지』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내면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고 폭우에 맞서듯 당당하게 일어서기 때문이다. 마르셀 소바조는 사랑이 갖는 물리적 작용과 관계의 부적절함, 모호함 등을 탐구하면서 인간에게 내재된 이기심과 자기합리화, 취약한 자존감, 감정의 그릇된 전도, 실존, 가치있는 삶 등을 성찰한다. 그녀가 ‘종교적 행복감’이라 일컬었던 마지막 춤이 닫히는 순간, 정체 알 수 없는 희열과 슬픔을 동시에 느껴야 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그녀가 누린 마지막 행복이었기 때문이리라.
이미 70년 전에, 이렇듯 앞선 사고로 외롭게 저항하던 마르셀 소바조는 모든 선구자들이 그러하듯 33살의 나이에 신의 부름을 받는다. 무정형의 사랑과 자신을 밀쳐낸 변심, 비가시적인 죽음을 각혈로 토해내면서 묵묵히 자신의 생각을 살다간 한 여인의 비극적 생, 그 앞에서 평화를 감지했다면 야박하단 핀잔 면치 못할까? 책을 덮고 느꼈던 평화가 오롯이 그녀의 것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