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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미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75년 9월
평점 :
향 태우는 걸 즐긴 지 십 년이 넘은 것 같다. 무신론자이기는 하나 사찰의 고즈넉함과 절밥의 정갈함에 끌려 간혹 엄마님을 따라 산에 오르곤 한다. 솔가지 사이로 산새 드나드는 모습, 인적 드문 산길을 멋지게 활보하는 다람쥐의 경쾌함, 황토흙의 짓궂은 장난, 서늘하고 새하얀 대기, 바람이 굴러 만들어내는 풍경소리, 그리고 짙푸른 향 냄새, 이들은 소란스러운 마음을 은은하게 어루만져 잠들게 하는 태초의 어머니다. 석가모니불과 협시불, 무시무시한 탱화에 잔뜩 움츠러든 마음을 하늘하늘 나비잠 자게 만드는 것, 바람을 안고 포르르 대기로 사라지는 푸른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육체는 공기보다 가벼워져 내 거처하는 곳의 누른 때가 참으로 하찮게 여겨진다.
요즘 태우는 것은 일찍이 미당 선생께서 ‘실파와 생강과 미나리와 새빨간 동백꽃, 거기에 바다 복 지느러미 냄새를 합친 듯한 미묘한 향내’라 일컬었던 침향이다. 침향은 향 중에서도 으뜸으로, 바다와 개펄이 만나는 땅 속에서 천년 세월을 자고 일어난 참나무나 향나무로 만드는 것이라 한다. 깊디 깊은 바다 내음이 천년의 세월을 흘러 내 앞에 와 머무는데 어찌 황홀타 말하지 않을까. 황병기 선생의 ‘침향무’를 듣다 보면 이렇듯 곰삭은 침향이 가야금 자락을 타고 굼신굼신 피어오르는 내음을 맡을 수 있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느리게 재게 휘도는 춤사위가 눈앞에 선연히 펼쳐진다. 여인의 몸처럼 가녀리고 남정네의 의기처럼 강직하다.
불꽃이 수직의 운명을 타고났듯 향불도 상승과 하강의 이마주를 현현한다. 향은 스스로의 몸을 살라 푸른 연기를 증기시키고 사명을 다한 재는 땅으로 환속한다. 그것은 결연하게 뚝, 떨어진다. 그것의 조직이 강밀한 것일수록 흐트러지고 바스라지는 일 없이 나무의 모습 그대로 서 있다가 한순간 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미련이나 후회 따위는 없다. 향은 연기와 향내의 도약을 구현함으로써 제 소명을 다했다고 믿는다. 촛불의 순수한 빛을 구현하기 위해 불순물을 내재하고 있듯, 그것을 소멸시켜야하듯, 향내의 그윽함을 풍미하기 위해서는 몇 겁의 세월 속에서 농익은 삶의 질곡, 그것의 소멸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촛불이 몽상(바슐라르와는 관계없이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자면)의 명백한 증거라면 향불은 명상의 명백한 증거이다. 향의 이마주는 범속한 살이에 대한 반성과 고요한 내면을 암시한다. 값싼 감동과 자지러질듯 숨찬 이별이 얼마나 무질서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하여, 박라연은 고백한다.
잠시 잊은 것이다 / 生(생)에 대한 감동을 너무 헐값에 산 죄 / 너무 헐값에 팔아버린 죄, / 황홀한 순간은 언제나 마약이라는 거 / 잠시 잊은 것이다 / 저 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가을이 있어 / 가을 조기의 달디단 맛이 유별나듯 / 오래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달디단 맛인가 / 불면의 香(향)인가 / 잠시 잊을 뻔했다 / 白檀香(백단향)이, / 지상의 모든 이별이 그러하다는 것을 /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사는 / 沈香(침향)을, - 박라연, 沈香
『촛불의 미학』은 야금야금 읽어야 마땅하다. 또한 이것은 낮의 책이 아니라 밤의 책이다. 노인의 깊게 패인 골에 움틀거리는 검버섯의 손등과, 물거품같은 머리카락이며 수염이며,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 노쇠한 미소를 떠올리는 일은 얼마나 쓸쓸한가. 깔끔하게 정돈된 그의 정신과 단정한 어조, 아득한 심연의 울림, 천진한 상상력의 틈새를 유영하는 일은 얼마나 애틋한가. 밤의 이윽한 순간에 나는 촛불의 시를 밝히고 책장을 넘긴다. 불꽃의 예민함 때문에 작은 방이 이지러지고 음영이 마찰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 작은 책에 가득한, 시의 언어를 탐미한다.
- 램프에 의해 비춰진 책상 위에서 백지의 페이지의 고독이 펼쳐질 때, 고독도 한층 커진다. 백지의 페이지! 건너가야 할, 결코 건너 보지 못한 이 광대한 사막. 매일의 밤샘에서 하얀 그대로 머물러 있는 백지의 페이지는 끝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고독의 거대한 표시가 아닌가? 단지 배우기만을 바라거나 생각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쓰기를 바라는」사람의 것일 때, 그 고독한 사람에게 달라붙는 것은 도대체 무슨 고독이겠는가. 그때 백지의 페이지는 하나의 허무, 고통스러운 허무, 기술의 허무이다. 그렇다. 아무튼 쓸 수 있기만 한다면!
에필로그는 램프의 기름이 다했음을 알리는 타종 소리다. ‘꿈꾸는 존재’이자 ‘일하는 존재’로서의 한 위대한 몽상가가 자신의 생을 숙려하며 잔잔히 써내려간 글 속에서, 나는 그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실존이 안식을 찾아가는 길과 만난다. 하지만 완전한 안식이란 없는 것일까? 그가 생에 던지는 한점 미련으로 인해 촛불이 흔들리고 촛농이 울먹인다.
기실 이 책의 감상을 적는 일처럼 부질없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독서할 때마다 나는 개인적인 몽상의 일들, 추억의 일들을 만나고는 한다. 하나의 말, 하나의 몸짓이 나의 독서를 멈추게 한다.’ 바슐라르가 앙리 보스코의 『히아신스』를 읽으며 느끼던 감명이 고스란히 내 것이었거늘. 그의 농밀한 몽상에 ‘향’을 끌어들여 얄팍함으로 덧칠한 나의 가비야움이 살짝 부끄럽기까지 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