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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르한 파묵(52)의 집필실은 언덕 위에 있었다. 베란다 문을 열면 아래로는 작은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보였고, ‘골든 혼’으로 불리는 만(灣)의 푸른 물길이 눈에 들어왔다. 만의 저 건너편으로는 옛 오스만제국의 톱카프 궁전과 블루 모스크가 서 있는 고도(古都)가 아스라하게 펼쳐졌다.
지난 4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오르한 파묵 인터뷰 기사 중 일부다. 오르한 파묵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종종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와 비견된다. 『하얀성』을 읽기 바로 전 그의 가장 성공작이라는 『내 이름은 빨강』을 읽었지만, 전 세계가 열광하고 간혹 측근이 전해주는 칭송의 소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소심한 인간인지라 독서 후 세인들의 평가와 상치되는 느낌을 갖게 되면 심히 불안하다. 무언가 놓친 게 있으리라는 조급증은 결국 내 지식의 얄팍함과 남독의 습관이 야기한 난독증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귀착한다. 나는 오르한 파묵을 이해하고 싶었고 진실로 함께 경배하고 싶었으므로 웹사이트를 뒤지며 그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캤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소설이 나쁘진 않았으나) 그를 향해 열광하는 소리들이 난 참 낯설다. 서두에 적었던 기사를 읽으며 근사한 서재를 가졌구나, 부럽다, 했던 것이 전부.
‘하얀성’은 ‘기독교’를 의미한단다. 그렇다면 결국 호자와 내가 청춘을 바쳐 설계하고 제작한 무기가 하얀성 앞에서 주저앉아버리고 만 것은, 서구 문명에 잠식된 동양적 전통을 상징하는 것이란 말인가? 난 외려 개인의 빙의현상으로 읽었는데? 호자와 내가 책상에 마주앉아 과거의 기억이며 죄에 대한 고백을 늘어놓는 것은 감금되어 있던 무의식을 끌어내 외부적 힘으로 사용하려는 의지이고, 기꺼이 그것에 지배되기를 허하여 극단적 행동을 가능케 한 것이라 읽었는데? 보태어 난, 호자와 내가 쌍둥이처럼 닮은 각각의 인물이 아니고 분열된 하나의 자아라고 읽었는데? 허나 이 또한, 무언가 있을 게야 분명, 하는 의구심이 촉발한 짜맞추기식 감상이었는데 말이다.
‘여러 가지 정황들이 서로 모순 양립’ 하여 독자에게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만든다는, 그래서 이 책은 정교한 미스터리이고 해답없는 수수께끼, 모종의 두뇌 게임이라는데 난 너무 단순하게 읽었다. 보르헤스가 파묵보다 훨씬 지적이고 환상적이며, 마르케스의 사랑이 더 본질적이고 칼비노의 허구가 보다 더 자유롭고 우화적이고 모험으로 가득하다. 세간의 환상적인 평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퍽 매력적이었을 소설을 의문부호 가득한 채로 읽은 듯하여 파묵에게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