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정원 Jimmy Fantasy 1
지미 지음, 백은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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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다. 커다란 빛이 몇 개인가 지나갔고 그 뒤를 빠르게 따라온 굉음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머리맡에 떨어졌다. 친구에게 몸도 마음도 젖지 말라고 당부한 뒤 발코니를 서성였다. 푸른 빛이 또 한번 세상을 가르고 뒤이어 묵직한 탁음이 머리를 흔들었다. 사는 게 왜 이리 고달픈가 물으면 다들 그렇게 산다고 말한다. 힘겨움은 이제 낯익은 소문이다. 너무도 익숙한 소식이므로 사람들은 더 이상 타인의 고독 따위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흔하다고 해서 슬픔과 절망 따위의 부박한 감정들이 제 몫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숨통을 조일 채비를 하고 검은 날개를 편 채 공중을 상회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 외면당할까봐 지레 겁먹고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지만 어느 때보다도 마음 토닥여주는 손길을 필요로 한다.

《내 마음의 정원》, 시가 있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림이 있는 독백이라고 해야 할까. 고등학교 축제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시화전’이었다. 난 멋들어지게 시를 쓰고 황홀하게 밑그림을 그려놓고도 번번이 색을 입히는 것에 서툴러 작품을 망치곤 했다. 시가 제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이 엉망이면 묻히게 마련이다. 반대로 그림이 멋져도 시가 부족하면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지미의 글과 그림은 천칭의 수평을 가능케 한다. 그림도, 글도 무척이나 따뜻하다. 우리가 수없이 지나치는, 그러나 조곤조곤 짚어보면 꽤나 달착지근하고, 또한 씁쓸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어느 해 봄 혈액암에 걸렸다가 몇 년 후 다시 봄이 왔을 때 그것이 흔적을 감추는,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이라서일까.

지미는 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끊겨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늘에 떠 있는 달과 아직 내 안에 있는 상상력과 그곳에 있는 천사들에 안도하며 절망을 신나는 모험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러면서도 행복한 순간에 느끼게 되는 불안이며 시작도 하기 전에 우리를 사로잡는 의심 때문에 서서히 얼어붙는 우정, 꼭 필요한 순간이면 벽으로 나타는 자동응답기 등을 통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쓸쓸함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한쪽 눈으로는 그림을 보고, 또 다른 눈으로 지미의 글을 읽으며 한없이 나른해졌다가 짧은 순간 미소를 짓기도 하고 평범한 문장 뒤에 숨어있는 깊이있는 사색에 감탄하기도 한다. 색감은 풍부하지만 결코 화려하지 않고 그림 속의 지미는 무척이나 친근하다. 가끔 동굴에 갇힌 듯 답답해 큰숨 내쉬며 쉬어가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미의 우화 속에서 잠시나마 유년을 돌아보며 미소지을 수 있으니 좋고, 사람이 위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나 이 작은 책에서, 잠깐의 휴식과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비 온다. ‘내 마음의 정원’이 소리도 없이 파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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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5-22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내 마은은 호수요.그대 배 저어오오....하는 가곡이 생각났어요.
5월달은 비가 많이 오더니 이번 주말은 햇볕 쨍쨍이네요...
어디 대학 캠퍼스에라도 가서 넓은 하늘 아래 책 한장 넘겨보고 싶은데...주말에 손님들이 오셔서 힘들것 같아요. 마음에 비가 내리면 우산을 써야하나?

마녀물고기 2004-05-2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해가 쨍쨍하네요. 이번 주말은..
참, 요즘 대학 축제 기간 아닌가요? 벌써 끝났나.. 축제, 하면 무작정 흥분되곤 했는데 요즘은 그 말 들어도 무덤덤한 것이, 이럴 때마다 새삼스레 나도 늙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으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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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소설 속에는 ‘악한 여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남편과 정부를 죽게 하고, 부모를 상대로 가짜 납치극을 벌이며, 남자 친구와 약혼자를 기만하고, 결혼한 여자와 위험한 동성애에 빠진다. 그들은 공적인 도덕적 가치나 윤리에 따르기보다는 욕망의 개인 전략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좀 더 의식적인 차원에서 로맨스, 결혼, 가족, 국가 등을 둘러싼 제도적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책날개를 장식한 말이다. 이것은 물론 정이현 소설 속의 여성들의 ‘위장술’을 사회적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학’으로 본 비평가의 말을 옮긴 것이다. 난 책날개에 적힌 이러한 평가에 매료되었고 이 소설에 흥미와 호기심을 갖고 읽어 나갔다. 그런데 역시, 비평가의 말재주와 비약의 해석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결론만 얻게 되었을 뿐이다.

정이현 소설의 여성들은 이제 한물 간 ‘순결’과 ‘섹스’를 담보로 제 입지를 굳건히 하거나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그것이 가급적이면 나약하고 순수한 여성성을 희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이광호가 말한 ‘위장술’이다. 소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제가 파격적이거나, 기존의 주제를 울궈낼 작정이라면 풀어가는 방식이 독특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문체라도 반짝여야 하는 것 아닌가? 소파 승진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순결을 무기로 부유한 집의 막내 아들을 잡으려 하고<낭만적 사랑과 사회>, 회사의 실권을 쥔 남자와의 로맨스를 계획하다니<트렁크>, 너무 빤한 설정이 아닌가 말이다.

<소녀 시대>의 ‘나’는 강북을 폄훼하는 사고방식과 부모의 불화 속에 성장한 강남권 아이다. ‘나’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섹스 산업에 참여하고 아버지의 아이를 가진 스무 살짜리 여자의 낙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남자 친구와 함께 납치극을 벌인다. 이러한 ‘나’의 행위는 뚜렷한 동기 부여를 얻지 못하므로 그저 사춘기 소녀의 반발과 무료함에 대한 돌파구 쯤으로 읽힌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를 향한 조롱, 물질에 경도되어 있던 아이가 난데없이 아버지의 불륜의 상대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다니.

보험금과 유산 상속을 노리고 거듭되는 결혼을 선택하는 여자의 이야기<순수>는 너무 지루하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결혼이란 제도에 편승한 동성애자와 그녀를 갈구하는 ‘나’의 이야기<무궁화>는 대상이 둘 다 여성이라는 점만 빼면 흔해 빠진 사랑 타령과 다를 것이 없다. <홈드라마>는 또 어떻고.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가를 주무르는 불일치를 좀 더 깊이있게 탐색할 수는 없었는가. 또 그 불화를 해소하는 방법을 좀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었는가. 그냥 이럭저럭 해결하고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는 현실의 그것보다 훨씬 느긋하고 안이하다. 남자에게 버림 받고 거식증세를 보이는 여자가 또 다른 사랑을 위해 다이어트를 준비하는 <신식 키친>에 이르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김동인의 소설을 패러디한 <이십세기 모단걸>, 김연실전을 재해석하고 싶기라도 했던 것일까.

정이현의 소설은, 그녀의 여성들은, 한국이라는 땅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를 드러내고, 어떻게 해서든 그곳에 제 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방법론에 있어서 지나치게 구태의연한 액션을 취했다는 점에서, 그것을 풀어나가는 목소리가 너무도 평이하고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세태를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세태를 있는 그대로 도열시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도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이다.

비평가의 장황한 응원을 등에 업고도 정이현의 소설들은 반짝이지 않는다. 비평의 후광이 역부족이었거나, 아니다, ‘발칙하고 불온한 상상력과 언어 구성력’이라느니 ‘새로운 여성 문법의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한다느니 하는, 무조건 밀어주기성 발언은, 그럭저럭 참아줄 수도 있었을 것에 반감을 갖게 함으로써 역효과를 낳고 만다. 재미나게 읽고 싶었는데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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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5-2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는 것이 도리어 재미납니다.저 책은 어째 내 스타일이 아닌 거 같아 눈질해보지 않았는데, 역시 ...하고 끄덕이며 갑니다.리뷰를 잘 쓰셔서 코멘트가 없는 듯 해요.

마녀물고기 2004-05-2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잘 써서가 아니라, 너무 못되게 굴어서 그런 듯 해요.
 
타임라인 1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이무열 옮김 / 김영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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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무런 생각없이 ‘재미’와 ‘궁금증’만 가지고 책을 읽었다. 독서의 호흡이 길지 못해 한꺼번에 네다섯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대는 습벽을 지닌 내가 책 한 권에 몰두해 끝을 본 일도 새삼스럽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을 쓴 작가이다. 파리의 혈액에서 공룡의 유전자를 찾아내 부활시킨다는 발상은 재미있었지만 그 점 외에는 이렇다할 호기심도, 아름다운 책략도 없었던 지라 <타임라인>도 만화적 상상력만 가득한 것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털어내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건 <쥬라기 공원>보다 백 배는 재미있다.

양자 역학을 토대로 한 시간 여행에 초점을 맞춘 크라이튼은 백년전쟁이 한창인 중세의 프랑스로 주인공들을 날려 보낸다. 우리가 ‘시간 여행’이라고 할 때 흔히 생각하는, 일직선상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것,에서 벗어나 ‘웜홀’이라 불리는 우주에서 또 다른 우주로 이동할 수 있는 구멍을 통해 수평 이동을 시도한다(이것은 일전에 말한 <거미여인의 집>에서도 나타난다. 이제 작가들은 수직선을 오가기보다는 수평선을 오가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크라이튼은 이 우주에서 평범한 셀러리맨으로 살고 있는 내가 다른 우주에서는 천재적인 작가일 수도,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하다. 각기 다른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을 과연 동일하게 볼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책에서 어떤 이해나 납득을 찾으려 한다면 책읽기는 골치 아프고 허무맹랑하며 짜증나는 것이 될 수 있다. 내로라 하는 과학자들조차 선명한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는 양자역학을 이해하자고 덤비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튼 이런 의문점들을 넘겨버릴 수 있을만치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중세로 넘어간 이들이 겪는 우여곡절(이곳에서 주인공들은 단련된 기사들보다 더 기술적이고 늠름하며 영웅적으로 그려진다. 다분히 헐리우드 적이다.)과 귀환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37시간의 귀환 데드라인이 주는 긴장감, 거기에 아련한 예감으로 진행되는 사랑까지, 어느 것 하나 재미를 놓을 수 없다. 읽는 내내 영화로 만들면 딱 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미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서도 개봉이 되었다고 한다. 근간의 우리 영화의 활약에 힘입어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본문도 훌륭했지만 말미를 장식한 옮긴이의 말도 걸작이다. 덕분에 아주 가뿐하게 잠들 수 있었다.

- 아 참, 모처럼 만의 고감도 서스펜스와 스릴 속에 푹 빠져 잠도 못 자고 있었을 독자의 소중한 수면 시간을 시답잖은 이야기로 1분이나마 더 뺏어 버린 것 같다. 작가를 용서하는 마음의 100분의 1만 할애하여 옮긴이의 실수도 용서해 주시고, 어서 발 뻗고 주무시기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올라 있을 테니. 

* 참, 이 책 두 권 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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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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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나선형의 계단, 숨죽인 고요, 흰색 담벼락의 공포, 창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 길게 내쉬는 한숨. 무릎으로 머리를 깍지 끼고 앞뒤로 흔들다 보니 2000년 겨울의 덕수궁이 떠올랐다. 그때 덕수궁은 오르세 미술관 인상파 화가 전시회로 분주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싶었던 나는 하얀 입김을 뿌리며 언 발을 종종거리며 덕수궁으로 향했다. 미술관임에도 매표구부터 길게 늘어선 행렬이 전시관 안까지 이어졌다. 타인의 몸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질 정도로 밭은 공간을 이동하며 별이 빛나는 밤을 찾았지만 끝내 볼 수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느슨하게 계단을 밟았다.

2층은 1층과 비교해 무척이나 한산했지만 공간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그곳을 꽉 메우고 있던 기괴함은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고야의 작품 백 여점이 주제별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타인의 고통> 표지 그림도 그 중 하나였다. 고야의 판화 ‘전쟁의 참화’ 시리즈는 인간의 잔악성을 극대화시키고 짐승처럼 도살된 무참한 죽음과 그것을 즐기는 도착적인 광기를 부상시킴으로써 혐오와 구토를 자아냈다. 발을 떼기가 겁이 날 정도로 공격적이고 포악했다. 나는 서둘러 문을 빠져나오며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하늘이 유난히 맑고 유연한 날이었다. 고야의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겨울의 냉기 사이로 빠르게 흩어졌다. 이렇듯 타인의 고통은 한시적인 충격은 유발할 지언정 영원을 구가하지는 않는다.

수잔 손택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스펙터클한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타인이 겪는 고통과 불행(손택은 주로 전쟁에 초점을 맞춘다)은 연민과 분개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내재화하여 고통에 참가시키지는 못한다. 폐허의 먼지 속에서 살점이 너덜거리는 손가락 하나가 기어 나와도, 포탄과 함께 하늘을 나는 남자의 가슴에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여도, 사지가 절단되어 몸통만으로 걷는 아이가 배시시 웃고 있어도, 우리는 욕을 퍼부어대며 채널을 돌리거나 인상을 찡그리며 가족과의 오붓한 저녁 식사에 열중한다. 마찬가지로 기아체험은 하나의 이벤트이자 개인의 성과물일 뿐, 고통을 분담하려는 의지는 아니다.

사진은 실제보다 사물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사진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야 하므로 보다 더 충격적인 이미지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최초의 자극은 점차 엷어지고 충격에도 익숙해진다. 더불어 충격적인 이미지가 주는 이런 고통은 이곳이 아닌,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는 믿음과 함께 안도감마저 심어준다. 나아가 이러한 안도감은 개인의 은밀한 관음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여 희열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수반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분명 사진은, 작가의 상상력이나 주관이 확고하게 개입되는 그림에 비해 객관적이고 실체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러나 사진도 조작은 가능하다. 그것이 카메라로 잡기 이전의 연출이든, 인화나 전시 과정에서의 조작이든 간에 작가 자신이나 영향력 있는 힘의 필요에 따라 조작되고 교묘히 이용되기도 한다. 손택은 미국에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미국인들이라면 히로시마와 베트남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을 보려는 행위를 병적인 것이라 간주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미국인들은 ‘국민을 격분시켜 당국에 맞서게 만들 위험이 조금도 없는’, ‘미국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이 어떠한 매체이든 힘의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손택 특유의 통찰력과 깊고 편안한 문체, 당당한 지성이 아름답다. 게다가 문학과 사진, 전쟁의 영역과 역사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지력은 놀랍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보다는 온몸으로 끌어안으려 한 그녀의 용기와 실천은,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로부터 귀감을 사 마땅하다.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르며 L이 말했다. 교수가 타인의 고통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쓰느냐면서 이 책을 추천했노라고. 난 사실 조금 웃겼다. 그 교수가 했다는 말은 마치, 이 책을 통독하기만 하면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고 체화시키는 현목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으스대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교수가 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쳐도 그것은 지식인들의 비굴한 자기만족이거나 우월감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의 텍스트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인가. 짧은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저자의 통찰력을 눈 여겨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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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5-1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봐야겠네요. 한 권의 책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깝쭉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마녀물고기 2004-05-10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허를 찌르시는군요. 감상문 쓰면서 그 부분이 영 찜찜했거든요. '으스대는 꼴' 이딴 말 쓰면서 잘난 척 하려는 게 아닌가 해서요. 근데 제가 워낙에 자기 검열에 티미합니다. 헤..

갈대 2004-05-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 스스로에게 한 말이니 괘념치 마시길^^

마녀물고기 2004-05-1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옙.. ^^

메시지 2004-05-1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고'싶어하고 그 상황에 안주하려는 경향의 제 모습에 일침을 놓는 글이네요. 꼭 치유해야할 병인데, 쉽지가 않네요.

마녀물고기 2004-05-11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더러는 '안전한 곳에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너그러워질 수도 있고 말이죠. 근데 그곳에 안주만 하려는 경향은 좋지 않을 건데.. 저 또한 그 몹쓸병은 고쳐지지가 않네요. 에휴

hanicare 2004-05-1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이미지가 바뀌었네요. 랠프 깁슨의 몽유병자군요.배경이 미니멀해서 손이 더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마녀물고기님의 리뷰,새 이미지 모두 좋다는 말로 간략한 인사 전합니다.오늘 바람끝이 산뜻하군요.마음의 습기를 널어놓으러 갑니다.어떨땐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가 편해요. Have a nice day.

마녀물고기 2004-05-1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난 번에 바이올린에 대해 쓰신 글 잘 읽었어요. 한 마디 남기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전 남의 서재에 가서는 움츠러들어서 덧글을 달지 못하겠더군요. 이미지는.. 예전에 어떤 분이 제 지느러미와 닮았다며 보내주신 건데 이 방에 잘 어울릴 것 같아 걸어 보았답니다. 저도 잘 하지 못하는 영어지만. Y, too.

심재규 2004-05-11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미를 추천하는 분이없네여.....

마녀물고기 2004-05-11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개미를 읽지 않았고요. 개미.. 리뷰는 많이 올라와 있지 않나요?

드팀전 2004-05-1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저기 돌다가 연인이 닿아 이곳 까지 왔군요. 아나키스트 물고기인가 봐요^^ 정신병 병력도 있고^^ 리뷰와 서재 인상적으로 봤습니다.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보고 다음 그의 책을 기다리다 주말신문서평에서 이 책을 봤습니다. 볼까 말까 하다...다른 책으로 넘어갔죠.요즘 미국의 이리크 포로 고문 사진이 언론에 폭로되고 있습니다. 시의적으로 적절한 때의 책읽기가 아닐까 하네요. 앞으로도 자주 들르겠습니다.

마녀물고기 2004-05-1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아나키스트? 어디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하신 게지? 하고 보니 서재 주소에 나와 있네요(혹시 스토커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흐, 그런데 아나키스트와는 거리가 멀다죠). 전 <은유로서의 질병>을 읽었을 뿐이었어요. 작가나 제목을 잘 기억 못 해서, 그것이 수잔 손택의 저서라는 것도 이 책을 읽고서야 겨우 생각해냈죠. 이라크 포로 고문 사진을 보고, 음음.. 제가 아닌 것에 안도했습니다, 책을 읽고서도 어쩔 수 없는 이기라니!

자일리톨 2004-10-1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문제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보다는 온몸으로 끌어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같이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에게 그것은 몹시도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요즘들어 많이도 느낍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때"에야 그 존재의 의미를 비로소 발견하게 될 거라는 '조그만' 생각을 님의 글을 읽으면서 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효형출판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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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 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1854년, 미서부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추장의 시애틀 연설문이다. 이 연설은 미서부지역 토착민들의 삶터를 차지하는 대신에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보존지구를 마련해 주겠다는 백인정부의 제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은 여타의 공식적 연설문에서 보이는 딱딱함과 근엄성이 배제된, 거의 시적이라 할만큼 아름다운 문장과 영혼의 울림을 담고 있어 개발이라는 명제 하에 자행되는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파괴로 인류가 직면하게 된 고통의 시대에 오히려 더 생생한 호소력을 지닌다. 추장은 잔잔한 어조와 소박한 언어, 자연을 대하는 따스한 시각과 이미지, 비유들로 자연의 신비와 인간 삶터와의 관계에 대한 직관을 피력한다. 인디언들은 대의적 명분과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인 대지를 떠나 변방으로 밀려났지만 자연 파괴로 인류가 감당하게 된 폐해들이 속출하는 이때, 다시 한번 되새겨봄직할만 하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경제성장에 치여 불모가 된 녹지대에게 보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만가이다. 각 챕터들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주인공이 겪은 에피소드를 일기 형식으로 나열한 듯 보인다. 극도로 정밀하고 압축된 상징이 읽기를 방해하고 화자의 내밀한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는 듯 하지만, 그가 그리는 풍경에는 초록이 풍성하고 반짝이는 물소리가 경쾌하고 물장구 치다 온 바람이 맑게 떠다닌다. 그것으로 족하다. 붕붕거리는 차량의 소음, 유골이 뿜어내는 악취, 넘쳐나는 쓰레기더미 속을 걷다 온 발목이 잠시 나른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그 작은 풀벌레 소리들에 위안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상냥한 유머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다정하게 소근대며 웃음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가 생태주의 전통에 서 있는 작가이든 상실과 죽음에 대한 페이소스를 드러낸 작가이든 간에, 아니 그런 구명을 굳이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의 문체는 확실히 발랄하다. 하지만 그 발랄이 지나쳐 수소풍선처럼 하늘을 휘젓고 날아다닐 정도는 아니다. 몸을 벗어나지 않을 만큼 안정을 유지하면서 가끔 겨드랑이를 간질여 움직임을 만드는 정도?

- 내 정액은 물 속으로 터져 나왔다. 환한 빛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그것은 즉시 흐릿하고 기다란 형태로 마치 유성처럼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죽은 물고기 한 마리가 떠 내려와 흩어진 내 정액 사이로 들어갔다. 그것의 눈은 강철처럼 뻣뻣했다.

- 그 날 오후, 양들은 내 낚싯대 앞에서 하천을 건너갔다. 양들은 아주 가까이 지나가서 그 그림자들이 내 낚싯밥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래서 나는 양들의 항문에서 송어를 잡는 셈이 되었다.

- 우리는 미처 풀지 않은 박스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촛불은 마치 접시의 우유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아이를 만들었고,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브라우티건은 피켓을 들고 현대 문명의 반성과 비판을 외치거나 생태계의 회복을 전면에 내세워 공포감을 조성하지도 않는다. 아들의 잠자리 곁에서 우화를 들려주듯 잔잔하고 다정하게 목가적 풍경을 그려나갈 뿐이다. 다만 그 사이사이 ‘죽은 물고기의 강철처럼 뻣뻣한 눈’처럼 반의적 문장들을 포진해 둠으로써 자연파괴에 대한 반발을 무의식 속에서 의식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이 불편하지 않은 건 그의 수더분한 유머 때문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브라우티건의 문장이 상징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역자의 주석을 눈여겨 보면 된다. ‘양떼는 저항할 줄 모르고 독재자를 따르는 체제 순응적이고 무력한 민중의 상징이다. 목동은 민중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파시스트나 독재자를 상징한다.’ 역자는 브라우티건의 이미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살뜰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이 텍스트의 알맹이, 생태주의 작가로서의 브라우티건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초록숲과 개울이 주는 작은 휴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돌다리 통통 거리듯 살풋 건너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브라우티건은 51세에 권총 자살했다고 한다. 악몽같은 현실을 이렇듯 달작지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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