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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달게 유쾌한 사람과 마주 앉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보았다. 터무니 없이 오래 되어 기억을 더듬는 것조차 녹녹찮지만 생각건대, 내가 사심없이 달고 경쾌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에 대한 호감과 경외와 무한한 우정과 사랑이 존재했을 때라야만 가능했던 것 아닐까 한다. 그럴 때 마음은 휴지처럼 풀어져 무방비 상태가 되며 어떠한 경계 경보로도 조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느슨한 무위에 던져지는 말 한 마디는 그것 자체로 존재감을 지니는 것이어서 흐뭇하기 그지 없다. 예컨대, 웃음은 대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해 품게 되는 자신의 감정의 빛깔 여하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석제’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입담 좋은 글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진대 이상하게도 그의 유머는 달다 못 해 혀끝이 아리기까지 하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제목만 놓고 보자면 아, 이 치가 느즈막이 남여상열지사의 도라도 깨친 것일까 오인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성석제 소설’이라는 표지에 박힌 글자로 황홀한 플롯을 기대했다가는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에세이라 불러도, 엽편이라 불러도 될 성 싶게 짤막한 이야기 서른 두 편으로 묶여 있다. 도시를 버리고 낙향한 화자의 렌즈에 잡힌 농촌 사람들의 일상이 유쾌, 통쾌, 상쾌하게 펼쳐져 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온갖 형태의 웃음에 대한 의성어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낄낄거리다가, 키득이다가, 크 하고 입 언저리의 변죽을 울리기도 하고 하하하 박장대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석제가 어디 웃기기만 한 인간인가. 손 닿지 않는 곳을 벅벅 긁어주기도 하고 아주 잘 여문 솜씨로 꼬집거나 찌르기도 한다.

책을 덮고 생각한다. ‘유쾌한 글 읽기’와 더불어 ‘유쾌한 연애 하기’, ‘유쾌한 삶 살기’에 도전해 보자고. 냐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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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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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차곡차곡 쌓이던 빗줄기가 멈춤과 동시에 밤을 잡는 건 이미 가을이다. 열어둔 창틈으로 성마른 바람이 스민다. 쇄골이라도 만져질 듯 강파르고 괴괴하다. 신파를 찍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알맞게 차고 알맞게 쓸쓸하고 또 알맞게 은밀하며 스스로 붕괴하는 가을. 하여, 가을엔 떠나지 말아야 한다. 기어이 떠날 양이면 마데카솔이라도 한 박스 선사하시든가. 스물 다섯의 나이에 걸맞는 삶-나이에 걸맞다, 라는 표현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는 논외로 하고-은 어떤 것인가?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라는 카피의 정당성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두 주인공은 모두 몇 번인가의 사랑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을 준비하는 남녀의 거개는 ‘첫눈에 반하다’ 라는 구문에 매혹된다. 설레임과 환상이라는 묘약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하늘을 가르는 섬광처럼 눈부시고도 두려운 그 상황에 휘몰리는 남녀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비행기에서 만난 ‘앞니 사이는 벌어지고, 코는 너무 작고, 입은 너무 크고, 가슴은 너무 작고, 발은 너무 크고, 손은 너무 넓적한’ 클로이에게 첫눈에 반한다. 알랭 드 보통은 클로이를 미화시키는 ‘나’의 주관을 플라톤과 칸트, 프루스트와 비트겐슈타인을 동원하여 객관화시킨다. 또한 둘 사이의 만남을 수학적 확률로 치환하여 운명론의 서가에 꽂아놓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스토리 라인은 너무 빤하다. 첫눈에 반한 남녀가 정신과 육체를 투신하여 사랑을 하고 갈비뼈의 배신으로 인해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지만, 죽음 또한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사랑의 조짐을 느끼게 된다는 것. 하지만 이 소설이 진부하지 않은 건 마치 사랑의 담론을 보는 듯 작가 자신의 직관과 여러 사상가들의 이론을 차용해 독자를 휘몰아간다는 점이다. 남녀의 사랑 전선에 마르크스까지 동원된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알랭 드 보통의 사랑학(?) 중에 인상 깊었던 것 한 가지.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는 알 수 없는 나의 상실감과 슬픔과 혼란스러움을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라는 클로이의 말 한 마디에 위로 받으며 우울증이 호전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던 느낌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기꺼이 내 세계로 들어와 나 대신 그것을 객관화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문장보다 더 멋진 건 이 문장이 들어있는 제14장 첫 쪽 여백에 연필로 쓰여진 문구다. ‘내 우울증을 희화화하고 그것에 객관적인 이름을 붙여줄 그 누군가’라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되, 찡그리거나 호들갑 떨지 않으면서 그것을 가볍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사랑은 또한 자기 정체성의 지속적인 확인 작업이다. 미처 깨닫지 못한 나 자신의 존재감을 대상이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내게서 애교있는 여성성을, 목소리의 멜로딕함을, 심연의 유머러스함을 발굴하고 특정 언어를 구사할 때의 톤이나 눈빛의 촉촉함이나 왼쪽으로 갸우뚱한 채 떨구어진 고개나 특이한 손놀림 등을 온전히 나의 것이 되게 해 주는 것도 대상이다. 바야흐로 ‘나’로 인해 클로이의 벌어진 앞니는 섹슈얼하게 재창조된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이런 소설을 써도 되는 건가, 하는 시기심이 책을 덮는다. 젠장, 이런 작가를 만나게 되는 건 불행이다. 좌절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독자의 이름으로 만나게 될 때는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아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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