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집
류가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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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삶이 던지는 비애와 비장감을 잔인할 정도로 하드보일드하게 다루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뇌살적인 유년을 보낸 두 주인공의 고통은, 환타지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이 제공한 해방감 속에서 무디어졌거나 공감을 더디게 만들고 그럭저럭 재미는 있으나 울림은 없는 맨송맨송한 느낌만 갖게 한다. 작가는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해 ‘에버렛’의 평행 우주로 자신의 주인공들을 떠나 보낸다. 그곳에서 주인공들이 만나게 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우주를 살아가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스스로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서슴없이. A=B다, 라는 것을 주입시키기 위해 과잉 친절을 베푼다. 끝부분 이십여장에서는 그런 앙탈이 가볼 데까지 가보자고 한다. 슬며시 조롱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독자를 뭘로 보고! 더구나 이 여자는 피의 관계로 맺어진 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도살에 대해서는 무지한 듯 하다. 실패한 어머니가 딸의 성공에 집착하는 행위를 ‘진짜 엄마라면 그녀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로 일축해 버린다. 무지막지하게 상식적인 풀이다. 진짜 엄마라면 자식의 삶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입양아의 고백에 아직도 가슴 얼얼한 탓일까. 지극히 일반론적인 설정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유리와 클락의 해피엔딩, 사랑만이 구원이다라는 모티프를 과감히 수용한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듯 보이고, ‘실패는 끝이 아니라 삶의 필수적인 여정이란 것’ 따위의 구세대적 아포리즘들도 마음에 안 든다. 소소한 재미는 있으되 공감의 여지는 없고 광대무변하게 펼쳐는 놨으되 기립박수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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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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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그러나 그리 오래는 아닌 어느 날, ‘연쇄엽기살인행각’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그때 난 어렸고 누군가 잽싸게 채널을 돌렸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둥지에서 시체 소각장이 발견되었다는 대목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기억 뿐. 다른 범죄와는 다르게 살인은 인간의 우발적 행동의 결과물이라 생각했던 내게 그들의 ‘시체 소각장’은, 살인도 사전 계획에 따라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케 함으로써 내 정신 일반에 치명타를 날리기에 손색 없었다. 그러고도 유괴와 살인의 이중주는 현대의 한 테마로 자리매김했지만 한번의 경악과 분노로 그에 대한 기억은 번번이 소멸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이 일단락된 살인의 결과물에 대한 건조한 보도일 뿐, 끔찍하고 잔학한 살인의 과정에서는 (다행히) 배제되어 있었던 탓일 것이다. 그런데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은 독자로 하여금 살인의 도정에 직접 참여하게 함으로써 섬뜩한 공포에 그대로 직면하게 한다.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구역질과 뒷골 당기는 서늘함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한창림은 ‘만드릴 원숭이’의 야생적 습성에 매료된다. 만드릴 원숭이의 수컷이 보여주는 단세포적 기질과 포악성은 한창림 자신의 그것과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야생의 세계를 지배하는 위계 질서는 펫숍 삼촌과 한창림의 관계에서 형상화된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힘의 논리이며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복종하거나 또 다른 것을 제물로 삼는 방법밖에는 없다. 펫숍 삼촌의 도착을 위해 한창림은 여성성이 남아있는 사내아이를 납치하고 아내 박태자와 포르노그래피를 찍고 사체를 앞마당에 묻는 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에서 납치된 ‘작은 수컷’들이 ‘거름’으로 묘사되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납치된 아이들은, 한창림과 박태자에게 있어 존엄성을 지닌 인간의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폭력의 진원이자 욕망의 발화를 부추기는, 그러한 폭력과 욕망의 대상일 뿐인 물화된 존재로 전락한다. 익명의 사내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자신의 아내를 세일하고, 유괴와 감금과 린치가 판을 치는 ‘목화밭’은 도덕적 가치는 부재하고 욕망만 극대화된 부조리의 공간이다. 가족의 해체와 인간성의 말살,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이 야생의 법칙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이번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 그려지는 너구리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자 인간성 파괴의 산실인 현대의 거대 메커니즘에 알몸으로 항거하는, 이중적 메타포를 지녔다. <목화밭 엽기전> 또한 마찬가지다. 한창림은 권력에 순응하고 권력의 폭력성에 도취되어 있으나, 권력이 휘두르는 야수성에 전면 대항을 도발하는 인물이다. 그것이 전폭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무능하게 일그러지고 마는 것이 현대의 불행이라면 불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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츤토쿠 2005-01-31 0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헌데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는 백민석이 아니라, 박민규의 작품입니다. 둘 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라....

마녀물고기 2005-08-03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보고 고쳤답니다. 감사합니다. ^^
 
첫사랑 (구) 문지 스펙트럼 2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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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트렌드인 웰빙에 발맞추는 현대적 감각을 지니기 위해, 서는 아니고 그저 덮개 위에다 책 놓고 읽는 이미지에 혹해 욕조 덮개를 구입했다. <첫사랑>은 그러니까 욕조 덮개의 실용성도 실험하고 한군데 진득허니 앉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내 인내심도 테스트해 볼 겸 해서 반신욕 중에 읽게 된 책이다. 꼴에 본 건 많아서 레드 와인 한 잔도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일단 욕조덮개로 말하자면 후회없는 선택, 이었다는 데 한 표. 반신욕의 효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물 속에 잠겨 느슨해진 상태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가슴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땀방울의 미학을 즐기는 것도 좋고 움직임을 느낄 때마다 유선형의 물살이 나긋하게 몸을 감싸는 느낌도 좋다. 이런 아늑함 속에서 책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최강이다. 반신욕 중엔 들뢰즈라도 술술 읽힐 것 같다. 몸의 긴장이 완화되면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유지하기에는 최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첫사랑>, 달콤하고 아릿한 추억을 불러들인 다음, 베케트 문학의 특징적 요소들을 감안하여, 첫사랑이란 현상을 통하여 실체 불분명한 감정 상태가 야기하는 관계 맺음의 왜곡과 본질에 대한 회의 등이 다루어지나 보다,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일단 <첫사랑>에는 첫사랑은커녕 바람같은 사랑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나’가 언급하는 결혼이란 것은 벤치에서 만난 여자와 있을 법 하지 않는 동거 상태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베케트는 기존의 언어 체계마저 허문다. <첫사랑>, <추방자>, <진정제>, <끝>, 네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텅 비어 있거나 으깨어져 있거나 파괴된 자들이다. 그들은 세상과 관계 맺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도 타협하지 못한다.

베케트의 소설을 읽으면서 틈 없이 정영문을 떠올렸는데, 정영문의 글쓰기가 베케트 소설을 ‘의식적으로’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드러내놓고 떠벌이고 싶어하는 작가는 드물다. 하지만 정영문은 베케트의 작법이라든지 설정, 소재까지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일단, 쉼표를 과용하면서 이미 발화한 것을 부정하고 뒤집으며 그 의미를 지워나간다. 의미를 생성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 의미를 희석하기 위한 글쓰기인 셈이다.

- 내가 도달한 단계까지 아무 변화 없이 내가 이르렀다면, 설혹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되니까, 그렇다 해도 그 단계에 내가 이르렀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역시 변함없는 사실인데,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다. (도대체 이게 웬 말장난인가.)

또, 어디론가 걷는 사내, 벤치나 공원 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일회성 공간에서의 만남, 혈육을 부정하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인물, 자신은 임신과 출산에 기여한 바가 없음을 밝히고, 소년과 염소에게 집착하고, 모르는 사내에게 자신의 발기 불능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등, 베케트의 소설은 정영문의 소설에 그대로 현현된다. 정영문식 글쓰기에 적이 실망스러우면서도 그의 솔직함에 호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정영문을 내처 읽으며 그 일관된 정서에 긴 하품을 했던 여운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서였을까. 어쩔 수 없이 읽는 내내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을, 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 쓰는 독서가 되었다. 기실 베케트가 무슨 잘못이랴. 사놓고 읽지 않았던 내 잘못이지. 베케트의 <첫사랑>은 그것으로 족하고 그것으로 매력적인 소설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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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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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가 웃기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이런 제목은 나올 수 없다, 라는 게 책을 읽고 난 후의 내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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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
윌리스 파울리 지음, 이양준 옮김 / 어진소리(민미디어)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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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학 교수의 저서에 음악 평론가인 임진모가 발문을 썼다는 것부터 흥미롭다. 임진모는 배철수의 음악 캠프 수요일 코너 고정 게스트다. 툭툭 내뱉는 배철수의 말발에 청년같은 임진모는 번번이 주눅 든 채 말꼬리를 잃고 헤매지만 그가 쓴 칼럼들을 보면 음악에 대한 열정과 깔끔한 문장이 녹아 있다. 두툼한 그의 얼굴, 어눌한 언변과는 꽤나 대조적이다.

- 난 랭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뿐만 아니라 시 세계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랭보라는 이름은 오래 전부터 아주 친숙했다. 기본적인 상식에서가 아니라 나의 고교시절 영웅인 짐 모리슨과 도어스 때문이다. 도어스 팬들이라면 짐 모리슨이 학창 시절 랭보의 시를 탐독했다는 사실을 기본으로 챙긴다. 도어스와 관련한 기록과 자료 그리고 서적에 랭보라는 이름이 빠지는 적은 없다.

반면 ‘랭보 전문가’인 월리스 파울리 교수는 짐 모리슨이 누구이고 도어스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랭보 번역 전집을 낸 후 1968년 배달된 한 통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은 록 가수인데 불어 실력이 신통찮은 관계로 교수님의 랭보 번역집 출간에 감사하며 이 책은 영원히 자신과 함께 할 것이라는 내용의 짤막한 서한이었다. 다음 날 강의시간에 ‘별 생각없이’ 짐 모리슨이 누구인가 묻자 학생들은 교수의 무지에 의아해 했다. 그 후 또 한번의 계기로 월리스 파울리는 랭보와 짐 모리슨을 연결시켜 연구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자신의 연구 성과를 강단에 세움으로써, 도어스는 알지만 랭보에는 무지한 학생들에게 랭보의 존재를 설파한다.

1장 <반역의 예술가 두 사람>에는 이러한 그의 행보가 흥미있게 다루어진다. 2장 <랭보>편에서는 그의 암울했던 유년시절과 베를렌느와의 파행적 사랑, 절필 후 고독한 탐험가이자 육체 노동자로, 마르세이유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의 생애를 그의 작품과 더불어 고찰한다. 3장 <짐 모리슨>편에서는 해군 아버지를 둔 덕에 잦은 이사가 불가피했던 짐이 사춘기 이후 예의 바르고 고분고분했던 예전의 성격을 팽개치고 가출과 반항과 욕망의 분출을 코드로 삼기까지의 과정, 음악에 심취하고 또 음악에 환멸을 느끼면서 시인이고자 했던 파리에서의 생활, 목욕탕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던 당시의 상황, 그의 존재를 불멸로 남기는 파리 라셰즈 묘역의 순례 행렬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4장 <글을 맺으며>에는 시대를 뛰어넘어 만나게 된 두 천재 예술가의 삶을 저자 자신의 시선으로 아우르며 따뜻한 갈채를 보낸다.

랭보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낡은 시론이 내 언어의 연금술을 상당부분 차지했다’ 라든가, ‘꽃의 거품들은 내 출항을 가만히 흔들어 주었고’, ‘쓰라린 사랑이 나에게 황홀한 무기력을 불어넣었다’, ‘하늘로 올라가고 나를 때리고 나를 뒤엎고 나를 끌고가는 악덕’같은 몇몇 시행들에서 난 종종 고무되곤 하지만 대개 랭보의 시는 내게 너무 어렵고 그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랭보에게 심취할 수 없었으며 자연 관심도 사라져 갔다. 시집에 실린 랭보의 초상 스케치가 피카소 작품이라는 것도 몰랐다면 말 다 한 게지. 하지만 도어스에 관한 한 할 말이 많다. 내가 도어스란 그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94년 ‘도어스’란 영화가 개봉한 후였다. 발 킬머의 강렬한 이미지가 그대로 튀어나올 듯한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고 포스터 만큼이나 강렬한 영상과 음악들로 인해 도어스가 구사한 싸이키델릭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로큰롤은 흑인들간의 성교를 뜻하는 속어이다. 로큰롤이라는 명칭 자체가 기존 성 질서에 대한 도전을 뜻하는 것이고 보면 록 음악이 구가하는 폭발적 사운드의 반란은, 그대로 기성세대에 억눌린 젊은이들의 폭발이며, 저항하는 젊음이 삼투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터이다. 이러한 록의 정신과 더불어 60년대 반전을 외치며 등장한, 자유와 방랑의 대명사인 히피 문화를 배경으로 싸이키델릭록이 탄생한다. (우리가 뽕락이라고 부르는) 싸이키델릭이란 단어는 미국의 한 의학박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LSD라는 약물의 환각 효과에 대한 보고를 위해 사용되었던 의학 용어라고 하는데, 싸이키델릭과 면한 음악가들이 대부분 LSD를 복용하고 연주를 했다는 사실과도 묘하게 접목한다. 우리나라 싸이키델릭록의 선구자인 신중현씨도 LSD와의 합방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가 더맨 밴드와 연주한 ‘거짓말이야’는 20분이 넘는 대곡이지만 그의 숨가쁘고 현란한 기타에 휩쓸리다 보면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싸이키델릭을 규정 짓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그 하나는 전율과 환각을 유도한다는 것인데, 이는 히피 문화의 특성을 유지하는 자유분방한 형식을 추구한다는 점과 맞물려 있다. 정말 싸이키델릭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약을 복용한 것처럼 몽롱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것의 위험성을 처음 느낀 것은 내가 싸이키델릭을 접하고도 한참 후였다. 그날은 숨차게 비가 왔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았으며, 종착지 알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에 손에서 맥주캔을 뗄 수 없었다. 그때 듣고 있었던 것이 Syd Barrett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몽환과 에로틱한 공상에 사로잡혀 사각의 방이 제멋대로 변형되고 왜곡되고 육체가 상승하고 더불어 하락하는 등 낯설지만 황홀짜릿한 느낌에 오줌이 마려울 지경이었다. 싸이키델릭을 왜 뽕락이라 부르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후로 그때처럼 광분에 사로잡히는 경우는 없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아슬아슬하다.

뽕락의 특징 중 또 다른 하나는 감상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이다. 뽕락은 듣고 즐기는 음악이다. 그만큼 아티스트의 역량이 중요시 되는데, 이는 객석에서 던지는 요란한 동의와 팽창, 열광을 통해 배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뽕락은 라이브가 생명이다. 또한 뽕락에 현란한 조명시설이 빠질 수 없다. 파열하고 쉼없이 변형되는 조명의 시각적 효과로 인해 울부짖음과 엑스터시가 증폭되기 때문이다.

도어스는, 짐 모리슨은, 이러한 싸이키델릭록의 수혈을 받아 탄생하고 입지를 굳혔으며 저항하는 청춘의 심볼이자 퇴폐와 초월을 상징하는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짐이 라이브 도중 옷을 벗어던지며, 나랑 흥건하게 놀아볼 사람은 무대로 올라오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는 이 시대에서조차 아찔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가 펼쳤던 파행적 행동은 그의 진지한 음악적 해석과, 자유와 반항으로 점철되는 젊음을 아이콘화 하여 기존의 질서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음악으로 상승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아 마땅하다. 더불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그의 죽음은 그의 천재성을 부각시키는데 일조한다. 일전에 C와 천재의 요건 중 하나가 요절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천재는 타고 나는 것이지만, 죽음은 그 천재성이 모두 고갈되고 휘발되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천재를 완성시키는데 한 몫 한다는 것에 의견을 맞춘 셈이다.

쓰다 보니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이야기가 많아졌다. 도어스를 다루는데 있어 싸이키델릭이, 그것이 구가하는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책에는 이것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아무튼 임진모의 말마따나 ‘대중음악을 3분 짜리 유행가로 보는 천대가 저류하던 그 시절에 (일개 록가수를) 인문학 영역에 견주었다는 사실부터가’ 이 책의 집필과 출간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더구나 ‘젊은이들은 도어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묵시록의 의미를 배웠다.’라는 말미의 문장은 여든이 넘은 교수가 광기와 파행의 록가수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두고두고 새겨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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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4-3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속 200KM.당신 손가락의 속도같군요.
파죽지세로 내려꽂히는 폭우같은 글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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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련하게 눈을 씻었으므로
속도위반 딱지는 떼지 않겠음^^
너무 많은 말들이 난무했던 이 화려한 두 사람에 대해서는 침묵을.
이들 반항아 이미지의 과소비자는 어쩌면 좁쌀만한 심사의 나같은 소시민들은 아닐는지.

마녀물고기 2004-04-3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차가울 수록 이런 코드들에 전염되는 속도가 빠른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전혜린을 읽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민망하게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돌이켜 보면 그때 저에게 차가운 현실은 시험! 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가 잘 안 되면 화장실에 가서 물 틀어 놓고 통곡을 하기도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