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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는 말한다
시모 지음, 유나니.정영리 옮김 / 민음사 / 1996년 7월
평점 :
절판
끈적한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몇 권인가의 소설을 읽었다. 피로했고, 육체는 덕지덕지 내려앉은 먼지를 쓸지도 않아 강팍하고 추레했지만, 목에 걸린 초조함과 울음을 애써 삼켜가며 책장을 들먹였다. 참으로 질기고 우울했던 여름.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밥벌이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도 아닌데, 오랜 시간 손을 떠나 있는 그것을 보고 있으면 눈두덩이 파르르 떨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내 삶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무언가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총알이 관통한 것처럼 심장이 휑하게 열리는 느낌, 무위를 참아내지 못하면서 무위로 남고자 하는 헛된 열망, 익숙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혐오.
도스토예프스끼의 『상처받은 사람들』은 꾸역꾸역 읽어냈다. 산만한 구성과 과장된 고통, 평면적인 인물들, 필연의 부재가 읽는 내내 걸리적거렸고 과도하게 늘어지는 호흡도 거추장스러웠던 것.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는 중남미 여성작가들의 작품집이라 은근슬쩍 기대를 했는데 역시 실망. 엽편이라고 할 법한 잔소설들이라 읽기엔 부담이 없지만 그네들의 살이나 문학적 성향을 엿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와중에 『릴라는 말한다』는 그 상상력의 서정과 아름다움, 살풋 드리운 커튼 사이로 속살 엿보는 것 같은 긴장으로 인해 읽는 내내 즐거운 떨림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논픽션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모눈종이에 휘갈겨 쓴 원고뭉치를 전한 뒤 사라져 버렸고, 당연 그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릴라가 말하고 자신은 릴라의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라고, 소설 속 시모의 거듭되는 언질과 릴라의 통속적인 자기 고백은, 실재하는 인물들과 정황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하지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 작은 책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충분히 자극적인 것을. 게다가 결말 부분의 반전은 서늘하고 슬프고 비정하기까지 하다.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서 섹스가 두 남녀의 화해하는 방식이었다면 『릴라는 말한다』에서 섹스는 릴라가 빈민가의 암울한 삶을 견디는 하나의 코드였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땀냄새와 폭력과 비굴함과 창녀가 넘쳐나는 골목에서 하얀 운동화의 릴라는 숨쉬기조차 버거웠을 테니 말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려면 태생이 거지거나 불균형을 자행하며 스스로 망가지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천사의 고결함과 귀족의 우아함을 타고난 릴라는 그 길에 합류하지 못한다. 그래서 릴라는 자신과 닮은 영혼인 시모에게 끊임없이 섹스에 대해 말한다. 빗소리처럼 달면서 슬프고 오전 10시의 햇살처럼 광휘롭고도 가녀린 섹스.
어젯밤, 귀찮아서 모기향을 켜두지 않았더니 대대적인 모기 공습에 시달렸다. 일어나 보니 쇄골 주변과 팔다리가 두드러기 환자 꼴새를 하고 있다. 모기에 물리자마자 침을 바르곤 하는데(내 경우 물리고 바로 침을 발라두면 아침엔 말짱해지곤 한다), 어제는 축축 늘어지는 몸 일으키기 수월찮아 그대로 두었더니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빼꼼한 틈이 없다. 모기 물린 곳을 혀로 핥아주는 남자의 이미지를 소설에 담아보면 어떨까. 그렇담 조우석 기자가 『릴라는 말한다』에 버금갈 만한 성애소설이 드디어 한국에서 탄생했다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써줄지도 모를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