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에 대한 명상 - 민음의 시 7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5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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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산층은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건전한 소비 계층이다. 따라서 이들 계층의 안정화가 경제 활성화에 기여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우리사회의 양극화는 극도로 심화되어, 기존의 중산층 3명 중 1명이 하류층으로 전락했다고 여길 정도이다. 카드빚 때문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낙사한 주부와 생활보조금 이십만 원으로 한 달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과 하루 노동의 대가로 여관방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해외로 골프 여행을 떠나고 자녀들에게 서민의 한 달 생활비에 웃도는 고액 과외를 시키고 명품의류와 외제 승용차를 끌고 다니며 일상의 무료함을 호화 소비로 달래는 사람들도 있다. 이같은 사회양극화 현상은 계층 간의 괴리감을 조성하고 상대적 빈곤감과 아노미 상태를 야기하므로 문제가 된다.

장정일은 이런 문제의식의 간극을 비집고 들어간 시인이다. ‘시영물물교환센터에서 일하며 한 블록 떨어져 당당히 버티고 서 있던 D백화점 북지점을 모델로 이 작품을 쓴다.’는 「백화점 왕국」의 에피그라프(epigraph)는 부유층과 빈곤층의 대비되는 삶을 잘 드러낸다. 「백화점 왕국」은 산업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고발한다. ‘밀대와 빗자루가 작은 내 생활의 가게를 쓸고 있을 때’, 길 건너편의 왕국에는 ‘황금색 상호로 번뜩이는 왕국의 차들이’ 몰려 온다. 왕국의 주민들은 멋들어진 옷차림으로 맵시 있는 자태를 뽐내지만 그들은 여왕벌의 충실한 일벌일 뿐이다. 해서 시인의, ‘왕국의 여자를 아는 것은 왕국을 아는 것’이고, ‘내가 왕국을 정복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열 시간의 노동만이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왕국의 여자에 의해 부정된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겠다는 말은 이미 철지난 담론이다. 우리에게는 개처럼 벌어도, 죽은 고기만을 제 식량으로 삼는 ‘삵’의 삶만이 남을 뿐이다.

노동은 인간존재를 확인하는 활동이라고 한 Georges Friedmann이나, 노동은 순수한 즐거움이거나 여가활동 만큼이나 만족스러운 활동이 될 수 있다고 한 Corado Gini의 접근방법은 효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현대의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노동은 비인간적인간적 행위이다.’라는 장정일의 진술은 그래서 안타깝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안간힘이 가슴 뻐근하다. 두 살 차이임에도 장정일을 ‘소년’이라 칭했던 기형도의 다정함은, 어쩌면 이러한 장정일의 순수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문 묻을까봐 손을 씻은 뒤 책을 읽는다던 장정일의 결벽 또한 세상을 향한 애련 탓은 아닐까? ‘다국적 사람 망치기 왕국’에서 ‘젖통에 남은 젖을 아이에게 먹일 힘도 없이’ 문을 닫는 아내의 슬픈 어깨가 못내 사무친다.

이렇듯 비루한 연명은 장정일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쉼 없이 ‘뛰고 달리고 고꾸라’지면서도 경기를 중단시키지 못하는 축구선수의 모습에서(「축구선수」), 금전과 사랑을 갈취 당하고 매질을 받으면서도 스트립 춤을 춰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그녀」), ‘근친상간의 소문을 무릅쓰고’ 어머니와 한방에서 지내면서 급기야 욕망하는 자신을 개새끼라고 힐난하는 아들의 모습에서(「방」), 나는 쌀개방 반대를 외치다 부르튼 목통을 제 손으로 가른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부모가 일 나간 사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숨진 어린 형제의 천진한 눈망울이 되살아나고, 서울역 대합실에 누운 헐벗은 발가락들이 꼬물거리고, 복사꽃 같은 청춘을 천장에 매단 사촌언니의 붉은 살내가 맡아진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갈수록 더디다. 찬물을 머슴처럼 들이킨다. 답답하다.

김지하가 세상에 대한 인식을 고지식한 청년의 입으로 당차게 외쳤다면, 장정일은 세상을 역설로 패러디한다. 그래서 그의 기표들은 잘 정제된 쌀알이 아니라 비틀고 늘이고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자기 검증의 과정에 있다. 돈 벌기 위해 시를 썼다는 장정일이지만, 시인을 단순한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로 보았음을 발견할 수 있는 시편들이 있다(어쩌면 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려던 의도였을까?). 「시집」이 그렇고 「쉬인」이 그렇고 「입장권을 만지작거리며」가 그렇고 「철강노동자」가 그렇다. 아무리 뇌수가 빠질 듯 시를 끄적여 본댔자 시는 주식시세나 운동경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시인에게 딸을 주려는 어머니는 없으며, 시는 이제 연애편지의 한 귀퉁이나 고색창연한 골동품 수집가의 메뉴 중 하나에 불과하다. ‘너무 뻣뻣하여 화장지로조차 쓸 수 없는 재생불능의 종이 뭉치’가 바로 시집인 셈이다.

얼마 전, 티브이 프로그램에 장정일이 출연하였다. 장정일은 소설과 희곡을 쓰게 된 후로 시가 써지지 않는다 하였다. 아니, 시 쓰는 법을 잊었다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시는 쓰지 않을 거라고도 하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도끼도 자주 써야 날이 서는 법이다. 시가 멀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무려나. 유하가 세상의 모든 저녁을 서정으로 풀어냈듯이, ‘동정을 빼앗고 매독을 선사한’ 충남당진여자에게 한 베개 쓰자고 한 소년의 순수함으로 서정시나 편편 써보는 것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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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7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5-03-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말//소리없이 드나드시다 가끔 소식 주시면 더 반갑지요, 무어. 마음 잘 짚어가며 사시길 기원하나이다.
 
릴라는 말한다
시모 지음, 유나니.정영리 옮김 / 민음사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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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끈적한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몇 권인가의 소설을 읽었다. 피로했고, 육체는 덕지덕지 내려앉은 먼지를 쓸지도 않아 강팍하고 추레했지만, 목에 걸린 초조함과 울음을 애써 삼켜가며 책장을 들먹였다. 참으로 질기고 우울했던 여름.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밥벌이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도 아닌데, 오랜 시간 손을 떠나 있는 그것을 보고 있으면 눈두덩이 파르르 떨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내 삶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무언가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총알이 관통한 것처럼 심장이 휑하게 열리는 느낌, 무위를 참아내지 못하면서 무위로 남고자 하는 헛된 열망, 익숙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혐오.

도스토예프스끼의 『상처받은 사람들』은 꾸역꾸역 읽어냈다. 산만한 구성과 과장된 고통, 평면적인 인물들, 필연의 부재가 읽는 내내 걸리적거렸고 과도하게 늘어지는 호흡도 거추장스러웠던 것.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는 중남미 여성작가들의 작품집이라 은근슬쩍 기대를 했는데 역시 실망. 엽편이라고 할 법한 잔소설들이라 읽기엔 부담이 없지만 그네들의 살이나 문학적 성향을 엿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와중에 『릴라는 말한다』는 그 상상력의 서정과 아름다움, 살풋 드리운 커튼 사이로 속살 엿보는 것 같은 긴장으로 인해 읽는 내내 즐거운 떨림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논픽션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모눈종이에 휘갈겨 쓴 원고뭉치를 전한 뒤 사라져 버렸고, 당연 그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릴라가 말하고 자신은 릴라의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라고, 소설 속 시모의 거듭되는 언질과 릴라의 통속적인 자기 고백은, 실재하는 인물들과 정황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하지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 작은 책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충분히 자극적인 것을. 게다가 결말 부분의 반전은 서늘하고 슬프고 비정하기까지 하다.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서 섹스가 두 남녀의 화해하는 방식이었다면 『릴라는 말한다』에서 섹스는 릴라가 빈민가의 암울한 삶을 견디는 하나의 코드였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땀냄새와 폭력과 비굴함과 창녀가 넘쳐나는 골목에서 하얀 운동화의 릴라는 숨쉬기조차 버거웠을 테니 말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려면 태생이 거지거나 불균형을 자행하며 스스로 망가지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천사의 고결함과 귀족의 우아함을 타고난 릴라는 그 길에 합류하지 못한다. 그래서 릴라는 자신과 닮은 영혼인 시모에게 끊임없이 섹스에 대해 말한다. 빗소리처럼 달면서 슬프고 오전 10시의 햇살처럼 광휘롭고도 가녀린 섹스.

어젯밤, 귀찮아서 모기향을 켜두지 않았더니 대대적인 모기 공습에 시달렸다. 일어나 보니 쇄골 주변과 팔다리가 두드러기 환자 꼴새를 하고 있다. 모기에 물리자마자 침을 바르곤 하는데(내 경우 물리고 바로 침을 발라두면 아침엔 말짱해지곤 한다), 어제는 축축 늘어지는 몸 일으키기 수월찮아 그대로 두었더니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빼꼼한 틈이 없다. 모기 물린 곳을 혀로 핥아주는 남자의 이미지를 소설에 담아보면 어떨까. 그렇담 조우석 기자가  『릴라는 말한다』에 버금갈 만한 성애소설이 드디어 한국에서 탄생했다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써줄지도 모를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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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4-08-30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럴수가.
서평을 읽고 바로 보관함에 저장해두려는데, 이책은 품절이라네요.
짭.

마녀물고기 2004-08-30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뒤져 보니 인터파크에는 3권 정도 남아 있네요!

선인장 2004-08-30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네요. 리뷰 올라온 거... 저도 이 여름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던 일 마무리하면 내일부터는 좀 한가할 듯... 이틀 연속 너무 많은 책들을 주문해 버렸는데, 또 이런 책을 소개하다니요. 간만에 책 한 권 빌려 읽어볼까요?

마녀물고기 2004-08-3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는 않고 사재기만 하는 일은 나빠요. 저도 요즘 나쁜 짓만 하고 있답니다. ㅠ.ㅠ
전 내일만 바쁘고 수요일 오후부터는 언제나 그렇듯 내리 한가합니다. 언제라도 오셔서 대출해 가세요. 환영입니다, 씨익-.

드팀전 2004-08-3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요즘 다른 곳에서 놀고 계신가^^

jenny-come-lately 2004-08-3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두달간 거의 아무것도 못 읽었습니다. 일기도 못 썼고 본것도 없고... 어느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말았는데 이런 놀이도 없이 시간을 보냈을때는 새가 된 기분입니다. 시작한 영어공부 같은경우 엔진시동도 아직 못걸었지요. 아아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마녀물고기 2004-09-02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눼..

사유//기력 쇠하여 이곳에서도 못 노는데 딴 곳이라닙쇼. -.-

벨//누구신가 했습니다. 닉네임을 바꾸신 게로군요. 우우.. 바쁘신가 봐요. 아이 엠 탐 밖에 모르는 저는 영어공부 생각도 못한다지요. 쿨럭-
 
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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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말이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눈빛으로 말하는 것보다 시적이고 신실한 언어가 또 있을까? 그(그녀)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정염은 아무리 냉정을 가장하고 무심한 언어를 내지를 때라도 읽히게 마련이고, 요사스럽고 간질이는 말로 상대를 미혹하려 해도 그(그녀)의 눈빛이 품고 있는 간악은 들통 나게 마련이며, 대범한 체 어깨를 으쓱이며 자이로드롭을 향해 가는 그(그녀)의 눈빛의 동요는 언제든 적발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 우리는 자주 기의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허둥대기 일쑤이고, 가령 적재적소에 그럴 듯하게 들어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달변가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진정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는 이들은 몇 없을 것이다. 기실 인간의 말처럼 허랑하고 혼돈되며 낯선 것이 또 있을까.

부조리극의 기수이자 대가로 일컬어지는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는 이렇듯 부실하고 부정한 언어를 해체한다. 언어가 그 본연의 전달기능을 상실한 채 무의미하게 부유하고 기본적인 플롯이나 인물의 성격도 부재하며 다만 이미지와 은유만이, 무차별적인 헛소리만이 난무할 뿐이다. 읽고 있으면 오래 전 축출했던 사랑니가 들썩이며 아파오고 유원지의 펀치볼이라도 된 양 머리가 얼얼 빙글거리고 갱년기를 향해 돌진하는 아낙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홧홧해진다. 암울함의 변죽인 베케트와는 달리 풍자의 강렬함이 살아있다는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머리 쥐어짤 것이 아니라 웃음 뒤에 오는 페이소스에 잔잔히 빠져들기만 하면 그 뿐이란다. 하지만, 나같이 머리도 나쁘고 감각도 나쁜 독자는 내 읽기의 조야함에게 바치는 페이소스에서 허부적대다 난삽해질 뿐이다.

『대머리 여가수』는 표제인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의자」세 편으로 엮여 있다. 이오네스코는「대머리 여가수」의 제목에서부터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머리 여가수’는 소방대장이 퇴장하며 뜬금없이 던진 대사 한 마디로 겨우 존재한다. 똑같은 이름의 각기 다른 인물들이 총출동하고, 부부이되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도널드와 엘리자베스가 우여곡절 끝에 부부임을 자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이면서 그들이 아니라는 하녀의 방백이 이어진다. 또, 이어지는 벨소리가 누군가의 존재를 의미하는가 부재를 의미하는가 하는 무의미한 논쟁이 오가기도 한다. 타자의 부재가 또는 존재가 현실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질 뿐이다.

「수업」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언어의 폭력이다. 교수는 학생에게 수학과 언어학을 가르친다. 하녀는 언어학은 범죄의 지름길이라면서 교수를 만류하지만 수학에서 언어학으로 이어진 교수의 강의는 자신만만하던 학생을 무기력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급기야 살인에까지 이르게 한다. 일방적인 소통의 횡포는 자유를 상실케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주범이다.

「의자」는 가장 극적이면서 공허하고 암울하다. 비어있는 의자와의 억지 소통, 그리고 이어지는 자살, 까뮈의 말대로 우리가 만져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관계의 대립과 단절 뿐인 것일까.

7호선 전철을 오가며 읽는 내내, 난 웃음의 전조도 없이 찾아온 페이소스로 가슴을 통통 쳐야했다. 언어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이오네스코와는 달리 사람들은 쉼 없이 핸드폰을 열어 문자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언어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그 무엇이라면, 그들의 즐거움 또한 가짜이고 부재하는 현실이란 말인가. 또다시 까뮈의 말을 빌어, 부조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절망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시지프스처럼 반항해야만 하는 것일까. 모든 게 너무 깜깜하고 울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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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07-2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의 한계, 사람들은 말하자면, 정작 자신이 하는 말을 들어주기를 원하는 걸까? 아닐까?
제가 궁금한 건 그것입니다. 나 역시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게 쉽지가 않네요. 나올래?,라고 물어놓고, 그럴 땐 안 나온다고 해야지,라고 말하는 건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요? 이제 한국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아, 난해한 언어...

마녀물고기 2004-07-2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별 걸 다 밑줄을 긋고 그러십니다. 쿨럭. 제목의 전복은 전복죽의 전복이 맞습니다. -.-
선인장//선인장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건지 아니까, 알아서, 더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간혹 에두르거나 반어적으로 내뱉을 때가 있는데 상대방에겐 그 의미의 모호함이 당혹스럽기도 하겠어요. 하지만 나를 까발리는 일은 또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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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징글맞게 감각적이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언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언어다. 내뱉는 것이 아니라 혀에서 또르르 굴려 튕겨내는 언어다. 살갗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감각하는 언어다. 말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고 소통을 내포하고 있는 언어다. 새초롬히 앉았다,는 말에서 위풍당당함을 연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새초롬이란 말 자체가 얌전한 듯, 부끄러운 듯한 홍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이란 말에서 적요롭고 한적한 마을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지러진,이란 말에서 풍만함을 연상하는 사람을 찾는 일은 겨드랑이에 깃 돋은 사람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 발표가 날 때마다 화가 씨굴씨굴해진다. ‘사뿐히 즈려밟고’라든지, ‘이지러는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믓이 흐리고 있다’라든지,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라든지,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이라든지, ‘넌즛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라든지, ‘붙배기 키’라든지,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라든지,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이라는 말을 대체 어떤 언어로 바꿔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말은 너무 교교하고 풍만하고 도도해서 이국의 언어를 수용하지 않는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출신 존 쿳시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여러모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닮았다. 우선 두 작품 모두 부조리를 기반으로 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소통과 인과관계가 부재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간다. 그런 그들이 탄생과 죽음, 살아감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 앞에서 오지 않는 고도, 절대 이상향을 선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고도’는 그들의 삶을 연명케 하는 원동력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제국의 수하들은 제국을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오지 않는,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야만인을 기다리다, 급기야 원정대를 보내 유목민과 어부들을 포획하여 야만인을 조작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변경邊境인들 위에 군림한다. 여기에 이성적인 인간은 치안판사뿐인 듯 보이지만 그 또한 암암리에, 또는 무기력을 빙자하여 제국의 영속화에 기여함으로써 부조리한 일면을 드러낸다.

소통의 부재는 치명적이고 슬프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 모두는 같은 질문을 몇 번씩 하게 만들면서도 동문서답을 일삼는다. 야만인을 기다리는 대령과 준위에게 치안판사의 말은 은퇴를 앞둔 늙은이의 푸념이거나 야만인을 옹호하고 제국에 반하는 배신의 행각으로 읽힐 뿐이다. 더구나 치안판사가 사랑을 느끼는 유목민의 딸,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그녀와의 소통의 어긋남은, 그것이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좌절케 한다는 점에서 더욱 부조리하다. 치안판사가 그녀의 일그러진 발을 씻기고 몸을 닦아주는 행위는 분명 그녀를 향한 지고한 사랑의 표현이지만, 판사에게 몸을 허하고 싶었던 그녀에게는 내침이자 원망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배려가 독이 되기도 한다. 사색의 시간을 지켜주려는 침묵이 외면으로 읽히기도 하고 달뜬 한기를 다독이기 위한 온기가 광포한 열을 몰고 오기도 한다. 지나친 배려는 그래서 종종 어긋나고 서럽다.

소설의 종반에,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역사의 안쪽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귀를 기울인다. ‘오염된 물이다.’, ‘이곳의 물을 마시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흙 묻은 오른손이 입에 닿지 않도록 해야겠다.’라는 독백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것은,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진실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정의에 대한,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라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스스로를 향한 해답과 연결된다.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정의와 진실을 짓뭉개고 그것에게 실소를 보내는 이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존재의 시원과 현실을 외면한 채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야만인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부재했으므로. 야만인의 형상을 구축하여, 가상의 위협으로 공포에 빠진 변경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의지하게 만들었던, 제국의 존속을 위해 부재를 실재로 왜곡했던 제국인들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부조리도 사라진 것인가? 이제 그들의 적은 야만인도, 제국인도 아닌 추위와 배고픔이 가져온 죽음의 공포다. 하지만 존 쿳시는 그곳에 무연한 희망을 부여한다. 눈이 나리는 광장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하늑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절망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지독한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잘 다듬어진 이야기와 노는 일은 언제나 기껍지만 우리 문학이 제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악(마음속에서 공연히 생기는 심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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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6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4-07-07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말
#1.
에이, 그렇게 짱짱한 칭찬은 잘난척쟁이의 건강에 해롭다고요. 정말, 말이 주는 매혹만큼 아득하고 깊은 소설을 일군의 젊은 글쟁이들에게서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아쉽.. 님께서 쓰시압!

#2.
배려가 서러울 때가 있더란 말이지요. 그것 때문에 한참동안이나 해찰을 떨었더니 머리가 다 얼얼하지 뭐여요. 참말 뭐든 지나치면 화근이여요. 배려만큼의 거리,라는 말에 심하게 동감합니다. 울적함이 전이되어요.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요...

선인장 2004-07-07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그치고, 밖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 것도 같은데, 사무실 안의 공기는 고요하기만 합니다.
울적함이 전이된다지만, 그 울적함의 근원은 바로 이곳인 걸요...
저는 이미 한참 전부터, 감정의 허방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한 시간이면 끝날 일을 몇 시간째 붙잡고 있으니... 점점 두통이 몰려와요...
장마철 감상은 치명적이에요. 비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몇 날 떠날 생각을 않으니...
이런 날, 심수봉을 조심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쥐약이에요...

마녀물고기 2004-07-07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비 그치고 바람도 서늘한데 마음 한구석, 후텁지근함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선인장님 밝은 목소리에서 그늘을 보았다고 하면 주제 넘은 이야기일까요? 침잠된 것을 밖으로 토해내지 못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타자와 대면했을 때 우격다짐으로 밝음을 연출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선인장님도 그리 보였어요 제겐.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더 살갑게 느껴졌나 봅니다.
여전히 늦은 시간, 사무실에 오롯이 앉으셨군요. 어여 마치셔야할 텐데요.
그래도 장마가 있어 다행이지 뭐예요. 책임 전가할 그 무엇도 없이 허방에 빠진 기분이라면 엿같잖아요. 우린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쥐약 먹고 즉사라도 할까요?

드팀전 2004-07-0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의 아름다움엔 가끔 번쩍 번쩍 놀랍니다.
하지만 번역할 수 없는 또는 번역해도 맛이 살 수없는 외국어도 수없이 많겠지요.결국 문체의 내밀한 맛은 모국어를 쓰는 자들의 특권일겁니다.다른말로 하면 아름다운 문체로는 우리문학이 세계에서 인정받기 난망하다는 거겠죠.결국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그리고 보편성인데......앞으로 잘되길 기대합니다.

2004-07-07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4-07-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유님//우리말 정말 아름답지요. 이런 살풋한 어감들을 자랑하지 못하는 게 속 상하다가도, 외국어에 젬병인 주제에 우리말만 그럴 것이라는 단정을 하다니, 의심을 품기도 합니다. 하지만 외국어에 능숙하다 해도 이국어의 참맛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태생적, 문화적 차이에 기인하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말처럼 다채로운 어감이 주는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언어는 없지 싶어요. 통찰, 보편성, 참으로 끄덕. 그런데 잘 되길 기대하신다니 무슨 말씀이시니까.

귓말//난독증은 제 오랜 지병이기도 합니다. 난독증에 오독증까지 곁들여 뽄새가 가관이 아닙지요. 님의 난독증은 겨울날 살풋 나리는 첫눈처럼 금세 스러지는 것이지 싶습니다. 늘 책 곁에서 사시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데요. 제 글이 가끔 읽기 어려운 건, 마음 담긴 미문이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여요. 흑.. 찬사는 슬퍼요.

2004-07-07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4-07-07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말//아이 참, 흥분하시는 게 전 좋은 걸요. -.-
반가운 게 많은 사람 속살은 어떨 지 궁금합니다. 봄볕 같을까나요. 햇김치 먹고 싶네요. 아뵤오- 조금만 퍼 주셔요. 행복하시고요. 헤..

2004-07-07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4-07-07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말//그림에 떡 주신단 거군요. 오흑..

2004-07-07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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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이유없이 찾아든 괴멸감에 사로잡혀 서성이다 창문 앞에 오래도록 붙박여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 에피파니처럼 안개가 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어둠을 걷어갔다. 세상의 속도를 자연의 속도가 앞지르는 유일한 지점, 한기가 느껴졌다. 안개처럼, 내가 독서 중 느끼던 혼란과 아픔과 슬픔은 모호하고 애매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난 내 불안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숨을 고르게 내쉬며 이야기의 대략을 떠올렸다. 수많은 길을 놔두고 가장 쉬운 길을 택한 창녀의 이야기일 뿐이야, 창녀를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도주의적 사랑에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성공한 속물의 이야기일 뿐이라구, 더 이상 육체를 고양시킬 방법이 고통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변태성욕자의 이야기일 뿐이지. 글이 전하는 메시지를 외면하고 인물의 행위를 왜곡하고 아무리 폄훼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나…….

파울로 코엘료는 매춘의 역사가 聖과 俗, 두 갈래에서 출발했다는 것에 착안한다. 俗에 속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 ‘살의 매매’ 행위이다. 이는 부끄러움과 비난과 죄의식을 양산하는 은폐의 영역 안에 있다. 그녀들은 붉은등이 켜진 인형의 집에서 11분의 쾌락을 위해 음습하게 찾아든 남자와, 남자의 두둑한 주머니를 위해 다리를 벌리고 욕망을 연출한다. 그녀들의 방은 세계와 차단되어 있다. 거세된 희망에 안주하여 야릇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녀들을 우리는 창녀라 부른다.

‘그곳에는 아주 이상한 관습이 있다. 수메르에서 태어난 모든 여성은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의 신전으로 가서 환대의 표시로 상징적인 돈만 받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몸을 바친다……로마의 여신 베스타는 철저히 순결을 지키거나 아니면 누구에게든 몸을 줄 것을 요구했소.’ 성스러운 매춘은 그러니까, 신에게 복종하며 경배하고 신과 일체가 되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셈이다. 성스러운 매춘은 남성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맞닥뜨리면서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제 매춘은 염오의 속살이다.

랄프 하르트와 테렌스는 聖과 俗의 매춘을 상징한다. 테렌스는 고통의 극점에서 느끼는 쾌락을 행위한다. 마리아는 전적인 굴욕과 복종이 선사하는 희열로 무아지경에 이르지만 그것의 기저에 두려움과 죄책감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쾌락은 더 크고 강렬한 고통을 욕망한다.

‘당신은 분명 쾌감을 가져다주는 고통을 느꼈을 거요. 나 역시 그것을 느껴보았소. 나는 그것을 당신 영혼에서 뽑아버리고 싶어요.’ 랄프 하르트의 침착한 고뇌의 현장에서 눈물이 터진다. 나는 한동안 가슴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통증을 붙안고 눈물에 사로잡힌다. 그 눈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만큼 더 가야하는지 몰라 나는 당혹스럽고 불안하다. 나는 마리아를 동일시하게 된 것인가? 이곳에 내사의 작업이 끼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깊디 깊은 어둠이, 정적이, 홀로있음과 깨어있음이 나를 겁먹게 했다. 나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 지도 모른다는, 일방적으로 뿌려지는 존재감이 아니라 마음의 동요를 고백하고 영혼의 동의를 구하는 소통을 희원했다. 마치 나 자신인 것처럼 마음의 얼개를 열어 가슴을 앓게 만드는 혼란을 설명하고, 실종된 자아를 되찾아주고 공명하는 기쁨 속에서 세심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밤은 더없이 단단했고 위안은 이곳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내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물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신비한 숲을 거닌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대로 ‘아주 미묘하고 껄끄러운, 충격적인’ 『11분』을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그가 만지는 현실은 차고 가차없다. 그가 그리는 극단에 내몰려 얼떨떨한 취기 끝에 몰려드는 통각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불가피하게 서늘하고 비참하게 따뜻하다. 서슴없이 외롭고 오래도록 아프다. 이 책의 울림을 견디기란 부재하는 소통을 갈망하는 것처럼 헛되다.

새벽 5시, 김선일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허구적이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우는 일에 전념했다. 정성스레 우는 일이 외로움 탓인지, 긍휼한 죽음 탓인지, 권력의 새디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울음을 그친 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찾아도 좋지 않을까? 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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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06-2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밤, 외대에 있는 그의 빈소에 다녀왔어요.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그와 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하더군요. 깊은 밤, 텅 비어 있는 빈소에서 재학생들 몇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 음료수 몇 개 사 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조금 울었어요.
이상하게도 파울로 코엘료의 책은 한 권도 읽은 게 없네요.
당분간은 좀 미뤄두어야겠네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우는 게 무서워요...

마녀물고기 2004-06-24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현실에 무지하고 무심한 구석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고 열광하는 일에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편인데, 김선일씨 죽음은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권력 구조나 이면의 흉계 따위 때문이라기보다 그저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택했던 방법이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가 느꼈을 공포와 고통, 남겨진 이들의 비통함과 황망함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코엘료, 글쎄 모르겠어요. 찬찬 생각해보면 울음 터뜨리게 만드는 요소가 별반 없었음에도, 그때 왜 그리 서럽게 울었던 건지. 몽조리 지나친 감상 탓이겠지요.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선인장님은 어떻게 느끼시는지, 알고 싶거든요.

드팀전 2004-06-24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첨 본 코엘료는<베로니카....>와 <연금술사>인데...다 슬프진 않았어요.^^
<연금술사>는 딱 만만하게 뜰거 같았는데...결국 떳더군요.^^

마녀물고기 2004-06-2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개인적으로는 연금술사보다 베로니카가 더 좋았어요. 베로니카, 연금술사, 미스프랭 순으로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한 숨씩 재미없어지길래 11분? 읽어? 말어? 하다 읽었더랬죠.
딱 만만하게 뜰 거...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