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책을 덮고 이유없이 찾아든 괴멸감에 사로잡혀 서성이다 창문 앞에 오래도록 붙박여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 에피파니처럼 안개가 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어둠을 걷어갔다. 세상의 속도를 자연의 속도가 앞지르는 유일한 지점, 한기가 느껴졌다. 안개처럼, 내가 독서 중 느끼던 혼란과 아픔과 슬픔은 모호하고 애매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난 내 불안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숨을 고르게 내쉬며 이야기의 대략을 떠올렸다. 수많은 길을 놔두고 가장 쉬운 길을 택한 창녀의 이야기일 뿐이야, 창녀를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도주의적 사랑에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성공한 속물의 이야기일 뿐이라구, 더 이상 육체를 고양시킬 방법이 고통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변태성욕자의 이야기일 뿐이지. 글이 전하는 메시지를 외면하고 인물의 행위를 왜곡하고 아무리 폄훼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나…….
파울로 코엘료는 매춘의 역사가 聖과 俗, 두 갈래에서 출발했다는 것에 착안한다. 俗에 속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 ‘살의 매매’ 행위이다. 이는 부끄러움과 비난과 죄의식을 양산하는 은폐의 영역 안에 있다. 그녀들은 붉은등이 켜진 인형의 집에서 11분의 쾌락을 위해 음습하게 찾아든 남자와, 남자의 두둑한 주머니를 위해 다리를 벌리고 욕망을 연출한다. 그녀들의 방은 세계와 차단되어 있다. 거세된 희망에 안주하여 야릇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녀들을 우리는 창녀라 부른다.
‘그곳에는 아주 이상한 관습이 있다. 수메르에서 태어난 모든 여성은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의 신전으로 가서 환대의 표시로 상징적인 돈만 받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몸을 바친다……로마의 여신 베스타는 철저히 순결을 지키거나 아니면 누구에게든 몸을 줄 것을 요구했소.’ 성스러운 매춘은 그러니까, 신에게 복종하며 경배하고 신과 일체가 되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셈이다. 성스러운 매춘은 남성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맞닥뜨리면서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제 매춘은 염오의 속살이다.
랄프 하르트와 테렌스는 聖과 俗의 매춘을 상징한다. 테렌스는 고통의 극점에서 느끼는 쾌락을 행위한다. 마리아는 전적인 굴욕과 복종이 선사하는 희열로 무아지경에 이르지만 그것의 기저에 두려움과 죄책감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쾌락은 더 크고 강렬한 고통을 욕망한다.
‘당신은 분명 쾌감을 가져다주는 고통을 느꼈을 거요. 나 역시 그것을 느껴보았소. 나는 그것을 당신 영혼에서 뽑아버리고 싶어요.’ 랄프 하르트의 침착한 고뇌의 현장에서 눈물이 터진다. 나는 한동안 가슴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통증을 붙안고 눈물에 사로잡힌다. 그 눈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만큼 더 가야하는지 몰라 나는 당혹스럽고 불안하다. 나는 마리아를 동일시하게 된 것인가? 이곳에 내사의 작업이 끼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깊디 깊은 어둠이, 정적이, 홀로있음과 깨어있음이 나를 겁먹게 했다. 나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 지도 모른다는, 일방적으로 뿌려지는 존재감이 아니라 마음의 동요를 고백하고 영혼의 동의를 구하는 소통을 희원했다. 마치 나 자신인 것처럼 마음의 얼개를 열어 가슴을 앓게 만드는 혼란을 설명하고, 실종된 자아를 되찾아주고 공명하는 기쁨 속에서 세심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밤은 더없이 단단했고 위안은 이곳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내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물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신비한 숲을 거닌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대로 ‘아주 미묘하고 껄끄러운, 충격적인’ 『11분』을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그가 만지는 현실은 차고 가차없다. 그가 그리는 극단에 내몰려 얼떨떨한 취기 끝에 몰려드는 통각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불가피하게 서늘하고 비참하게 따뜻하다. 서슴없이 외롭고 오래도록 아프다. 이 책의 울림을 견디기란 부재하는 소통을 갈망하는 것처럼 헛되다.
새벽 5시, 김선일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허구적이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우는 일에 전념했다. 정성스레 우는 일이 외로움 탓인지, 긍휼한 죽음 탓인지, 권력의 새디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울음을 그친 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찾아도 좋지 않을까? 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