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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말은 징글맞게 감각적이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언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언어다. 내뱉는 것이 아니라 혀에서 또르르 굴려 튕겨내는 언어다. 살갗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감각하는 언어다. 말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고 소통을 내포하고 있는 언어다. 새초롬히 앉았다,는 말에서 위풍당당함을 연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새초롬이란 말 자체가 얌전한 듯, 부끄러운 듯한 홍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이란 말에서 적요롭고 한적한 마을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지러진,이란 말에서 풍만함을 연상하는 사람을 찾는 일은 겨드랑이에 깃 돋은 사람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 발표가 날 때마다 화가 씨굴씨굴해진다. ‘사뿐히 즈려밟고’라든지, ‘이지러는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믓이 흐리고 있다’라든지,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라든지,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이라든지, ‘넌즛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라든지, ‘붙배기 키’라든지,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라든지,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이라는 말을 대체 어떤 언어로 바꿔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말은 너무 교교하고 풍만하고 도도해서 이국의 언어를 수용하지 않는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출신 존 쿳시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여러모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닮았다. 우선 두 작품 모두 부조리를 기반으로 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소통과 인과관계가 부재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간다. 그런 그들이 탄생과 죽음, 살아감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 앞에서 오지 않는 고도, 절대 이상향을 선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고도’는 그들의 삶을 연명케 하는 원동력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제국의 수하들은 제국을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오지 않는,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야만인을 기다리다, 급기야 원정대를 보내 유목민과 어부들을 포획하여 야만인을 조작하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변경邊境인들 위에 군림한다. 여기에 이성적인 인간은 치안판사뿐인 듯 보이지만 그 또한 암암리에, 또는 무기력을 빙자하여 제국의 영속화에 기여함으로써 부조리한 일면을 드러낸다.
소통의 부재는 치명적이고 슬프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 모두는 같은 질문을 몇 번씩 하게 만들면서도 동문서답을 일삼는다. 야만인을 기다리는 대령과 준위에게 치안판사의 말은 은퇴를 앞둔 늙은이의 푸념이거나 야만인을 옹호하고 제국에 반하는 배신의 행각으로 읽힐 뿐이다. 더구나 치안판사가 사랑을 느끼는 유목민의 딸,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그녀와의 소통의 어긋남은, 그것이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좌절케 한다는 점에서 더욱 부조리하다. 치안판사가 그녀의 일그러진 발을 씻기고 몸을 닦아주는 행위는 분명 그녀를 향한 지고한 사랑의 표현이지만, 판사에게 몸을 허하고 싶었던 그녀에게는 내침이자 원망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배려가 독이 되기도 한다. 사색의 시간을 지켜주려는 침묵이 외면으로 읽히기도 하고 달뜬 한기를 다독이기 위한 온기가 광포한 열을 몰고 오기도 한다. 지나친 배려는 그래서 종종 어긋나고 서럽다.
소설의 종반에,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역사의 안쪽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귀를 기울인다. ‘오염된 물이다.’, ‘이곳의 물을 마시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흙 묻은 오른손이 입에 닿지 않도록 해야겠다.’라는 독백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것은,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진실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정의에 대한,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라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스스로를 향한 해답과 연결된다.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정의와 진실을 짓뭉개고 그것에게 실소를 보내는 이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존재의 시원과 현실을 외면한 채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야만인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부재했으므로. 야만인의 형상을 구축하여, 가상의 위협으로 공포에 빠진 변경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의지하게 만들었던, 제국의 존속을 위해 부재를 실재로 왜곡했던 제국인들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부조리도 사라진 것인가? 이제 그들의 적은 야만인도, 제국인도 아닌 추위와 배고픔이 가져온 죽음의 공포다. 하지만 존 쿳시는 그곳에 무연한 희망을 부여한다. 눈이 나리는 광장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하늑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절망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지독한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잘 다듬어진 이야기와 노는 일은 언제나 기껍지만 우리 문학이 제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악(마음속에서 공연히 생기는 심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