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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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말이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눈빛으로 말하는 것보다 시적이고 신실한 언어가 또 있을까? 그(그녀)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정염은 아무리 냉정을 가장하고 무심한 언어를 내지를 때라도 읽히게 마련이고, 요사스럽고 간질이는 말로 상대를 미혹하려 해도 그(그녀)의 눈빛이 품고 있는 간악은 들통 나게 마련이며, 대범한 체 어깨를 으쓱이며 자이로드롭을 향해 가는 그(그녀)의 눈빛의 동요는 언제든 적발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 우리는 자주 기의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허둥대기 일쑤이고, 가령 적재적소에 그럴 듯하게 들어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달변가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진정성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는 이들은 몇 없을 것이다. 기실 인간의 말처럼 허랑하고 혼돈되며 낯선 것이 또 있을까.

부조리극의 기수이자 대가로 일컬어지는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는 이렇듯 부실하고 부정한 언어를 해체한다. 언어가 그 본연의 전달기능을 상실한 채 무의미하게 부유하고 기본적인 플롯이나 인물의 성격도 부재하며 다만 이미지와 은유만이, 무차별적인 헛소리만이 난무할 뿐이다. 읽고 있으면 오래 전 축출했던 사랑니가 들썩이며 아파오고 유원지의 펀치볼이라도 된 양 머리가 얼얼 빙글거리고 갱년기를 향해 돌진하는 아낙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홧홧해진다. 암울함의 변죽인 베케트와는 달리 풍자의 강렬함이 살아있다는 이오네스코의 작품은, 머리 쥐어짤 것이 아니라 웃음 뒤에 오는 페이소스에 잔잔히 빠져들기만 하면 그 뿐이란다. 하지만, 나같이 머리도 나쁘고 감각도 나쁜 독자는 내 읽기의 조야함에게 바치는 페이소스에서 허부적대다 난삽해질 뿐이다.

『대머리 여가수』는 표제인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의자」세 편으로 엮여 있다. 이오네스코는「대머리 여가수」의 제목에서부터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머리 여가수’는 소방대장이 퇴장하며 뜬금없이 던진 대사 한 마디로 겨우 존재한다. 똑같은 이름의 각기 다른 인물들이 총출동하고, 부부이되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도널드와 엘리자베스가 우여곡절 끝에 부부임을 자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이면서 그들이 아니라는 하녀의 방백이 이어진다. 또, 이어지는 벨소리가 누군가의 존재를 의미하는가 부재를 의미하는가 하는 무의미한 논쟁이 오가기도 한다. 타자의 부재가 또는 존재가 현실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질 뿐이다.

「수업」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언어의 폭력이다. 교수는 학생에게 수학과 언어학을 가르친다. 하녀는 언어학은 범죄의 지름길이라면서 교수를 만류하지만 수학에서 언어학으로 이어진 교수의 강의는 자신만만하던 학생을 무기력한 짐승으로 추락시키고 급기야 살인에까지 이르게 한다. 일방적인 소통의 횡포는 자유를 상실케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주범이다.

「의자」는 가장 극적이면서 공허하고 암울하다. 비어있는 의자와의 억지 소통, 그리고 이어지는 자살, 까뮈의 말대로 우리가 만져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관계의 대립과 단절 뿐인 것일까.

7호선 전철을 오가며 읽는 내내, 난 웃음의 전조도 없이 찾아온 페이소스로 가슴을 통통 쳐야했다. 언어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이오네스코와는 달리 사람들은 쉼 없이 핸드폰을 열어 문자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언어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그 무엇이라면, 그들의 즐거움 또한 가짜이고 부재하는 현실이란 말인가. 또다시 까뮈의 말을 빌어, 부조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절망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시지프스처럼 반항해야만 하는 것일까. 모든 게 너무 깜깜하고 울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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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07-2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의 한계, 사람들은 말하자면, 정작 자신이 하는 말을 들어주기를 원하는 걸까? 아닐까?
제가 궁금한 건 그것입니다. 나 역시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게 쉽지가 않네요. 나올래?,라고 물어놓고, 그럴 땐 안 나온다고 해야지,라고 말하는 건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요? 이제 한국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아, 난해한 언어...

마녀물고기 2004-07-2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별 걸 다 밑줄을 긋고 그러십니다. 쿨럭. 제목의 전복은 전복죽의 전복이 맞습니다. -.-
선인장//선인장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건지 아니까, 알아서, 더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간혹 에두르거나 반어적으로 내뱉을 때가 있는데 상대방에겐 그 의미의 모호함이 당혹스럽기도 하겠어요. 하지만 나를 까발리는 일은 또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