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에 대한 명상 - 민음의 시 7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5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198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중산층은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건전한 소비 계층이다. 따라서 이들 계층의 안정화가 경제 활성화에 기여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우리사회의 양극화는 극도로 심화되어, 기존의 중산층 3명 중 1명이 하류층으로 전락했다고 여길 정도이다. 카드빚 때문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낙사한 주부와 생활보조금 이십만 원으로 한 달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과 하루 노동의 대가로 여관방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해외로 골프 여행을 떠나고 자녀들에게 서민의 한 달 생활비에 웃도는 고액 과외를 시키고 명품의류와 외제 승용차를 끌고 다니며 일상의 무료함을 호화 소비로 달래는 사람들도 있다. 이같은 사회양극화 현상은 계층 간의 괴리감을 조성하고 상대적 빈곤감과 아노미 상태를 야기하므로 문제가 된다.

장정일은 이런 문제의식의 간극을 비집고 들어간 시인이다. ‘시영물물교환센터에서 일하며 한 블록 떨어져 당당히 버티고 서 있던 D백화점 북지점을 모델로 이 작품을 쓴다.’는 「백화점 왕국」의 에피그라프(epigraph)는 부유층과 빈곤층의 대비되는 삶을 잘 드러낸다. 「백화점 왕국」은 산업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고발한다. ‘밀대와 빗자루가 작은 내 생활의 가게를 쓸고 있을 때’, 길 건너편의 왕국에는 ‘황금색 상호로 번뜩이는 왕국의 차들이’ 몰려 온다. 왕국의 주민들은 멋들어진 옷차림으로 맵시 있는 자태를 뽐내지만 그들은 여왕벌의 충실한 일벌일 뿐이다. 해서 시인의, ‘왕국의 여자를 아는 것은 왕국을 아는 것’이고, ‘내가 왕국을 정복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열 시간의 노동만이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왕국의 여자에 의해 부정된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겠다는 말은 이미 철지난 담론이다. 우리에게는 개처럼 벌어도, 죽은 고기만을 제 식량으로 삼는 ‘삵’의 삶만이 남을 뿐이다.

노동은 인간존재를 확인하는 활동이라고 한 Georges Friedmann이나, 노동은 순수한 즐거움이거나 여가활동 만큼이나 만족스러운 활동이 될 수 있다고 한 Corado Gini의 접근방법은 효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현대의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노동은 비인간적인간적 행위이다.’라는 장정일의 진술은 그래서 안타깝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안간힘이 가슴 뻐근하다. 두 살 차이임에도 장정일을 ‘소년’이라 칭했던 기형도의 다정함은, 어쩌면 이러한 장정일의 순수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문 묻을까봐 손을 씻은 뒤 책을 읽는다던 장정일의 결벽 또한 세상을 향한 애련 탓은 아닐까? ‘다국적 사람 망치기 왕국’에서 ‘젖통에 남은 젖을 아이에게 먹일 힘도 없이’ 문을 닫는 아내의 슬픈 어깨가 못내 사무친다.

이렇듯 비루한 연명은 장정일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쉼 없이 ‘뛰고 달리고 고꾸라’지면서도 경기를 중단시키지 못하는 축구선수의 모습에서(「축구선수」), 금전과 사랑을 갈취 당하고 매질을 받으면서도 스트립 춤을 춰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그녀」), ‘근친상간의 소문을 무릅쓰고’ 어머니와 한방에서 지내면서 급기야 욕망하는 자신을 개새끼라고 힐난하는 아들의 모습에서(「방」), 나는 쌀개방 반대를 외치다 부르튼 목통을 제 손으로 가른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부모가 일 나간 사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숨진 어린 형제의 천진한 눈망울이 되살아나고, 서울역 대합실에 누운 헐벗은 발가락들이 꼬물거리고, 복사꽃 같은 청춘을 천장에 매단 사촌언니의 붉은 살내가 맡아진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갈수록 더디다. 찬물을 머슴처럼 들이킨다. 답답하다.

김지하가 세상에 대한 인식을 고지식한 청년의 입으로 당차게 외쳤다면, 장정일은 세상을 역설로 패러디한다. 그래서 그의 기표들은 잘 정제된 쌀알이 아니라 비틀고 늘이고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자기 검증의 과정에 있다. 돈 벌기 위해 시를 썼다는 장정일이지만, 시인을 단순한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로 보았음을 발견할 수 있는 시편들이 있다(어쩌면 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려던 의도였을까?). 「시집」이 그렇고 「쉬인」이 그렇고 「입장권을 만지작거리며」가 그렇고 「철강노동자」가 그렇다. 아무리 뇌수가 빠질 듯 시를 끄적여 본댔자 시는 주식시세나 운동경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시인에게 딸을 주려는 어머니는 없으며, 시는 이제 연애편지의 한 귀퉁이나 고색창연한 골동품 수집가의 메뉴 중 하나에 불과하다. ‘너무 뻣뻣하여 화장지로조차 쓸 수 없는 재생불능의 종이 뭉치’가 바로 시집인 셈이다.

얼마 전, 티브이 프로그램에 장정일이 출연하였다. 장정일은 소설과 희곡을 쓰게 된 후로 시가 써지지 않는다 하였다. 아니, 시 쓰는 법을 잊었다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시는 쓰지 않을 거라고도 하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도끼도 자주 써야 날이 서는 법이다. 시가 멀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무려나. 유하가 세상의 모든 저녁을 서정으로 풀어냈듯이, ‘동정을 빼앗고 매독을 선사한’ 충남당진여자에게 한 베개 쓰자고 한 소년의 순수함으로 서정시나 편편 써보는 것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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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7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물고기 2005-03-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말//소리없이 드나드시다 가끔 소식 주시면 더 반갑지요, 무어. 마음 잘 짚어가며 사시길 기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