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즈음인가, 아주 흥미로운 블로그-서재를 발견해서 밤마다 들어간다. (자기 사진도 더러 올라오는데, 자신에 대한 미학화 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과도 비슷할까.) 옛날 글도 막 뒤져 읽다가, 어제도 아주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일일일식'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키가 148밖에 되지 않는 나는, 많이 먹지 않는다,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이 키에 52킬로 나갔던 이력이 있다. 중고 시절인데, 그건 정말 최악이고 대략 48킬로 정도 나갔다.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배가 불러 터질  때까지 먹고(특히 먹기 간편한 빵, 사발면, 과자 같은 거)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 읽고 공부하고(책 보면서 또 먹는다) 이동은 오직 학교 - 집(기숙사), 그러면 된다. 대학 4년인가를 기점으로 체중이 조금씩 줄었는데, 아마 연애와 담배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보다 양질의 음식을 연인과 함께 먹고 사랑하고 산책 하고 그리고 담배를 배웠다. 학령기가 끝난 서른살, 나는 누가 봐도 말라깽이였다. 40킬로를 넘긴 적이 없다. 흡연, 특히 줄담배는 권장할 것이 아니지만, 소식은 무척 권장할 일이다. 고 박완서 역시, 위가 아픈 자, 약을 먹지 말고 음식을 줄이라, 라는 식의 충고를 한 바 있다.  

 

아, 그런데 일일일식이라. 말 그대로 하루에 한 끼만 먹나? 궁금해서 좀 찾아보니 '간헐적 단식' 비슷하게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다이어트의 한 방식인가 보다. 내 입장에서 소식은 그저 생활이다. 아이 낳고 살이 좀 불어 41-42킬로를 유지하는데(아프면 좀 더 빠지고), 여기에는 나잇살도 있겠지만 육아가 우리 아이엄마에게 요구하는 체력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모유 수유 기간에는 젖을 만들기 위해(!) 곰국 같은 것도 퍼마신다. 나는 모유가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더 좋은 젖을 만들기 위해(써놓고 보니 왜 그랬지??) 반쯤 억지로 영양식을 먹는 것이다. 삶에서는 어떤가. 말마따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골고루'를 귀에 못이 박히듯 들어왔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밥상', 덧붙여 '시골밥상'에 익숙한 나는 물론, 그렇게 먹고 자랐다. 단백질(고기)이 턱 없이 부족했지만, 생선이나 두부가 많았던 밥상을 생각하면 그리 불균형은 아니었을 터. 그래도 절대적으로 각종 채소류, 과일(아버지는 과일 도매상이었다)을 많이 먹긴 했고, 지금도 그렇다.

 

처음 시댁의 밥상을 보고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상다리 부러진다'는 말의 실현이었다. 음식의 종류, 양이 너무 많았다. (시)아버지도 대식가, 아들만 셋. 이해 된다. (시)어머니도 어느 순간에는 대식가가 된다. 게다가 워낙에 요리를 잘 하시니, 그냥 먹다가도 과식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걸 먹고 나면, 후식 내지는 간식이 나온다. 옥수수 찌고 껍질콩 삶고 등등. 그러고 한 두시간이면 다음 끼니다. 헉. 뱃속에 음식이 덩그러니 들어있는데, 더 먹으라고?? 명절의 전부치기. 오죽하면, 부치는 건 할게요, 제발 다 먹으라곤 하지 마세요 ㅠㅠ 밥만 먹게 해주세요, 떡국까지는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식사만 할 게요, 간식은 정말 못 먹어요 ㅠㅠ 한번은 이상한 돌게(??)인가를 주문하셔서 먹으라고,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그랬더니 "니가 너무 불쌍해서 하는 소리다, 이 귀한 걸 왜 안 먹니!" 진정한 '식고문'이다.

 

나야 그들 입장에서 남이지만, 손자는 다르다. "니가(니들이) 조금 먹는다고 애(들) 그리 주면 안 된다!"  그렇다. 자라는 아이들은 골고루, 많이 먹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마다 소화력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몸에 맞고 안 맞는 음식이 다 다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 입안에 처넣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학교 급식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집에서만이라도 '안 먹을 자유'를 달라.

 

아이의 식성은 남다르다. 그렇다고 자폐성 기질의 아이처럼 편향적인 건 아니고, 이건 거의 전적으로 엄마 닮은 것 같은데, 나물류, 채소류, 과일류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먹인 탓에 고기도 먹을 줄 안다. '-줄 안다'라고 쓴 건,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라는 말을 절감하는 탓이다. 나는 지금도 소고기와 날생선(회, 스시)을 잘 못 먹는다. 반면, 아이는 이런 것도 어지간히 잘 먹는다. 사탕, 초콜릿, 젤리, 아이스크림 이런 유의 군거짓거리도 별로 즐기지 않는다. 놀라운 건 계란을 안 먹는다. 왜? 알레르기? 그것도 아니다. 계란의 형체를 없애고 요리하면 먹는데, 계란 모양이 살아 있으면 안 먹는다. 뭥미?

 

아마 내가 장어를 곧 죽어도 안 먹는 것과 같을 터. 왜 안먹냐고?? 장어는 너무 징그럽게 생겼다!!! 썰어놓으면 안 보인다고? 상상이 되어서 싫다. 그럼 문어, 낙지, 오징어는? 심지어 해삼, 멍게는? 그건 또 먹는다. 내 맘이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피해를 안 주는 이런 유의 편식은 굳이 억압받을 게 아니다. 아, 보는 사람 눈에 재수 없다고? 그렇긴 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회식을 무척 싫어하고, 회식할 때는 아주 편한 자리가 아니면(그런 자리면 회식이 아니지) 밥을 잘 안/못 먹는다. 그때 많이 먹으면 백프로 집에 와서 토한다. 같은 이유로, 혼밥을 무척 즐긴다. 남의 눈에 처량해보일 테지만, 나는 지복의 순간. 젓가락질도 잘 못하고 많이 묻히고 흘리고(그래서 냅킨이 잔뜩 쌓이고) 무엇보다도 편식에 소식에, 먹는 속도도 무척 느리다. 이걸 맞춰 줄 사람은 애인-남편밖에 없다. 흠, 그런데, 아이는 지금 엄마보다 더 한 것이다 -_-;;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의 식생활에 반성 아닌 반성을 할 때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골고루 줘야 하는데, 꼬박꼬박 줘야 하는데, 아이들은 간식까지 하루 다섯끼는 먹어야 한다는데 등등. 하지만 나는 사실상 1식 1찬, 그 다음 과일, 이렇게 먹인다, 넘 귀찮아서 -_-;; 1찬은 너무 하고 가끔 뭘 덧붙일 때도 있다. 밥과 빵을 같이 줄 때도 있다. 오직 식판의 칸을 채우기 위해서다.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와서 속만 삭 발라, '샐러드야~' 이러고 줄 때도 있다. 어쩌랴, 요리는 정말 넘 싫은 것을. 그런데 굳이 '다양'할 필요가 없음을, '골고루'가 능사가 아님을 주장하는 글을 보고서 나름의 희망을(?!) 얻는다. 비단 음식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목을 매는 독서, 내 입장에서는 글쓰기도 그렇다. 출처 밝히고 한 번 긁어와본다.

 

다양한 음식을 고루고루 먹는 것이 건강식이 될 수 없듯이 다독이 사유를 넓히는 것도 아니듯이 다양한 경험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서사를 풍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행과 경험의 다양성이 그 사람의 인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면 세계 곳곳을 누빈 김우중과 이명박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칸트는 오로지 산책을 통해서만 거대한 사고를 확장했고 몽테뉴의 << 수상록 >> 은 다락방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https://blog.aladin.co.kr/myperu/10569752)

 

 

먹는 것,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것이 읽고 쓰는 것이다. 나는 발자크보다 더한 속물이지만, 게다가 아이 엄마로서도 결코 극성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높은 것'에 대한 지향(^^;)이 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읽고 쓰느냐, 방법론인데, 이제 와서 내가 나를 바꿀 수 없다. 음식을 골고루, 많이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기와 쓰기 역시 기존의 방식을 취하되 보다 더 현실적인 길을 찾아봐야 한다. 새로 나올 책에 다루는 책이 몇 십권이다. 이런 식의 읽기 대신, '덜-골고루'로 가려고 한다. 내 몸에, 마음에 맞는 음식-책을 꼭꼭 씹어서 열심히 먹으려고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릴 터이다, 한 권 읽는 데. 소위 '돌려막기' 독서를 하지 않으련다.  그 다음.

 

소설가로서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경험의 부족이다. 과연, 그럼, 경험 많은 니들은 나보다 잘 쓰냐?? 니들의 경험은 과연 그토록 유의미한 것이냐?? 많은 경험으로 더 잘 썼던 자들이 있다. 우리가 손쉽게 리얼리즘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 개인의 경험이 사회, 국가의 보편적 경험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 무엇보다도, 작품이 좋았던 덕분이리라. 이 점에서 '미메시스'는 우리가 여전히 숭상해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미메시스'(모방, 재현)가 그 대상으로 삼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단답일 수 있다, 주관식, 서술형, 논술이어야 한다. 

 

 

 

 

 

 

 

 

 

 

 

 

 

 

 

 

조이스는 일찌감치 더블린(아일랜드)을 떠났으나, 그의 문학 속 공간은 항상(어쩌면 유일?) 그곳이다. 그가 문학화한 경험은 극히 '편식', 심지어 '일식'에 '일찬'이라고 할만하다. 모더니즘의 특징일까? 프루스트도 많이 다니지 않는다. 많은 사람을 만나나? 그래본들 가족과 몇몇 벗, 연인(레오니 할매, 프랑수와즈 하녀, 부모, / 첫사랑 질베르트, 그녀의 부모 스완과 오데트 / 그 다음 참사랑 알베르틴, 그 주변 사람들, 블로크, 예술가들 등등)에 한정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선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 그런 체험이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으로 거듭난다. 소설가는 오지를 떠도는 여행가가 아니다!!! 헤밍웨이 같은 소설도 있지만, 다 그런 모험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쓸 수도 없거니와.

 

 

 

 

 

 

 

 

 

 

 

 

 

 

 

이제 막 한숨 돌린 나의 장편을 보니, 사람도 많고 에피소드도 많다. 아주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자의식 충만한(그런가?) 내 소설과 아주 차별되나? 그런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웃기지만, 내가 뭘 쓰는지도 모르고 쓰는 거다. 뭘 쓰는지 알면 잘 안 써진다. 막 써놓고 다시 보면 뭘 썼는지 보여서 초난감하다. 어쩌지? 일단은 막간의 여유를 누리고 나중에 가서 생각하자. 이런 식으로, 논문 쓰는 자, 즉 학자-평론가 모드로 돌아가면, 나는 아주 오만하게 거들먹거릴 수 있다. 심지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씹고 있다. 썩 괜찮은 비평서-연구서를 내고 싶은 욕심이 여전히 있지만, 내 나이와 내 능력을 응시하면, 너무 아뜩하다. 

 

그래도 기죽지 말고 꾸준히, 열심히.

 

"**아, 내가 머리카락이 여기 좀 많이 안 났니? 내 생각에는 얼굴에 침을 맞고 잔대 달인 물을 꾸준히 먹고..." 님의 그 낙관주의와 신심이 님의 머리카락을 돋게 하리라...^^;; 또한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머리카락이 나든 말든, 배가 나오든 말든 거의 '달관'의 포즈다. 불충한 며느리(들)를 꾸짖지 않고 감싸안음으로써 덕/득 보는 건 며느리(들)이 아니라 결국 시어머니다. 그녀는 우리(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우월하다. 

 

*

 

다시, 아이의 식단. 일일일식, 일일일찬까지는 아니지만 더 '골고루' 해 줄 여력이 없다. 그래도 나는 편의점 표 도시락을 주는 엄마는 아니다 -_-;; 과거에도 '본죽'표 이유식 대신 엄마표 이유식을 만들었다. '마음의 양식'은 어떡할 것인가.

 

 

 

 

 

 

 

 

 

 

 

 

 

 

 

"오늘은 할머니 집에서 문어를 먹었으니까 <문어>책을 보자."

유치원생들 보는 수준이지만(프뢰벨 과학책 -_-;;) 초등에게도 그리 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아이와 같이 읽는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문어는 '알'에서 '아기 문어'가 되는데 2개월이 걸린다. 많나, 적나? 오징어는 겨우 5일이 걸린다! 즉, 한 마리의 문어가 태어나는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함은, 응당, 개체수도 적다는 것이고, 살아남은 놈들의 수명도 길다는 거다. (인간이라는 종을 생각하면 된다.) '문어'의 '문'자는 '글월 문'이라고 한다. 헐, 똑똑한 물고기^^;; 저 비싼 연체류는 제사상에만 올라왔던 것인데, 그래서 나는 문어보다 오징어를 더 좋아하거나 더 쉽게 먹는다. 물론, 아이는 그 무렵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으니 문어, 주꾸미, 낙지(얘네들 다 문어과, 라고 한다), 오징어, 갑오징어, 한치 등 모든 연체류를 다 섭렵하고 있다. 아이도 문어와 오징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한다. 혹은 그런 척 한다. 그래야만, 아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강화제 없는 독서-공부가 가능한가.

남들의 눈에는 소위 '공신/책신'에 가까운 나에게 먼저 물어보자.

아니다. 단 5분을 쉴 지라도, 강화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지금도 '강화제' 맞고 있는 중?)

하물며 아이(들)의 경우에는, 물론.

 

*

 

- "엄마, 그런데 나는 장애인이야?"

(아마 어제 할아버지가 자기 어릴 적 친구 '장애인' 얘기를 한 탓인듯 한데, 그는 자신의 아내와는 참 정반대의 캐릭터라, 이 대조가 놀라울 따름이다.)

- "왜 물어? 니 생각은 어떤데? 니가 장애인인 것 같아?"

- "음, 엄마 생각은 어떤데? 엄마 생각에는 내가 장애인이야?"

아, '진격의 거인'이 아니라 '반격의 거인'!^^;;

엄마가 너를 감동시킬 멋진 (음식은 안 되겠고) 논리-답변을 만들어주마! 하고 다짐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엄마-나도 니가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붙는 아이인지 어떤지 잘 모르니까. 요즘은 더더욱. 너는 그냥 나의 아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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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도 변함없이, 잠든 아이를 옆에 두고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다가 '석경징'이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렸다. 왜 갑자기? 정말 너무 뜬금없다. 아무래도 최근에 나온 나보코프 소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주지하다시피, 나보코프는 포스트모더니즘, 미국작가, 이런 맥락에서 영문학자들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 중 <어둠 속의 웃음소리>는 그의 유명작도, 대표작도, 애정작도(?) 아니다. 90년대 초중반 <롤리타>로 쬐금(^^;;) 유명하던 그를, 오직 러시아 출신 작가이기에, 찾아 읽었다. '찾아'라는 말도 맞지 않는 것이 번역된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주로 세계문학 전집에 끼여 있고, <창백한 불꽃>인지 <세바스찬...>은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와 같이 수록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무렵 학교 근처 서점에서 오직 그의 소설이라는 이유로, 활자가 아주 작은 문고판 책을 한 권 샀다. 박영사였나. 서점은 <그날> 아니면 <광장>이었을 터.

 

 

 

 

 

 

 

 

 

 

 

 

 

 

 

<어둠 속의 웃음 소리> 역자가 석경징이었다.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쉽게 외워졌다. 나중에도 곱씹었지만, 번역이 참 좋았다. 물론 처음 읽을 때는 소설의 내용에 집중했는데, 중산층 멀쩡남의 몰락이 뭐랄까, 엄청 고소했던 것 같다. 마르고(?)던가, 작고 속된 여자도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화가(?) 남자의 귀여운 악랄함(?)에도 왠지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거듭 말하건대, 이 소설은 나보코프가 그리 아낀 것도, 또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그리 사랑 받는 것도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롤리타>보다도 더 나보코프다운 소설이다.

 

 

 

 

 

 

 

 

 

 

 

 

 

 

 

 

 

3학년때던가, 석경징 선생님의 <영산문강독>(??)인가 하는 수업을 들었다. 한학기 내내 조이스의 <더블린사람들>만, 그 중 두 어편만 읽었다. 그것도 곤혹이었다. 문제는... 중간고사 치는 날인가, 왠일지 대박, 속수무책, 늦잠을 자고 지각을 해버린 것이다. 나는 제법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이상하게 한 번씩 이런 미친 일이 벌어지곤 했고, 열에 아홉 수면 탓이었다. 앗, 후다닥 일어나 셔틀 버스 타고 학교 갔더니 이미 끝. 부리나케 연구실로 갔다. 다행이 연구실에 계셨고, 뿔테인지 쇠테인지 아무튼 동그란 안경을 낀 선생님은 예의 그 느긋한 웃음을 웃으시면서 여기 앉아 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그 다음. 학점이 B+인가, B0인가 나왔다. 1학년 1학기의 '방황' 이후 공부를 열심히 하던 터라, 사실 2학년부터는 B를 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A0, A-도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이었고 21학점 들으면서 소위 올A+을 받은 학기도 있었다. 헉, 그런데 B라니. 게다가 그때는 아무 말씀 없이 시험도 여기서 보면 된다고 하셨으면서. 이런 서운한 마음이, 배신감이 물론 들었지만, 그렇게 저렇게 묻혔다.  영어와 영문학에 관심이 별로 없어 재수강은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내가 그 자리에 서 보니 이른바 '형평성'이라는 것이 교단에 선 자를 얼마나 옥죄는지 알겠다. 그리고 학점을 깎기에 가장 마음 편한 것이 바로 결석(혹은 심한 지각), 결시, 보고서 미제출 같은 것이다. 사실상 결시라고 봐도 될 상황인데, 그나마 답안을 써냈기에 저 정도라도 나온 것일 터. 그 학기에 조이스 소설인지 뭔지를 읽고 페이퍼를 쓰라 하셨던 것 같다. 그때 처음 조이스를 읽었다.

 

 

 

 

 

 

 

 

 

 

 

 

 

 

 

 

석경징 선생의 번역으로 저 이론서도 읽었으나, 저역서가 많은 것도 아니다. 당장 조이스를 좋아셨지만(아마 전공) 마땅히 번역을 제대로 내놓으신 것도 아니다.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의가 아주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그럴 수 있는 성격의 강의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스승들 90프로(심지어 99프로?)에 해당하는 분. 그래도 나로서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저런 개인적 인연이 있어서 상위 몇 프로의 평가는 주고 싶은 분이다.  "우리가 이번 학기에 한 번도 안 쉬었나요? (예!) 그럼 다음 주 * 요일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한 번 쉬죠!" 씨-익 웃음. 하필 그맘때 영화 <파리넬리>가 나왔는데, 아주 불편한 심사를 완곡하게 표현하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꼰대려나?^^; 하지만 그때는 중년(노년?) 교수의 그런 발언에 날을 세우곤 하던 때가 아니었다. 그저 선생님은 저리 생각하시는구나, 끄덕끄덕. (단, 수업 준비 안 하는 선생님은 못 참아!!^^;;)

 

 

 

 

 

 

 

 

 

 

 

 

 

 

 

 

얘기가 길어졌다. 어제 검색해보니...

선생이 돌아가셨더라. 마지막 사진을 보니 내가 알았던 모습보다 체구가 좀 더 커보였다. 수필가 피천득의 애제자인 것, 영문과가 아니라 영교과 출신인 건 이번에 알았다. 출신이 왜 중요하냐고? 대학, 특히 국립대는 굉장히 보수적이다. 보수일 수록 출신을 따진다. (요즘에는 진보도 그런 것 같긴 하다^^;)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박제된 나의 저 시절 또한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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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박완서, 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린다.(1988년 내 인생에, 삼성생명주최 중등부 독후감 심사위원으로서, 아주 잠깐 등장해주신 것을 아주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 지금 생각해보니 삼성은 이런 데도 돈을 썼구나^^;) 소설에 관한 한, 특히 건전한 중산층의 생활감각을 담은 걸작 수준의 소설에 관한 한, 더 말이 필요 없겠다. 국문학자들도 많이 연구하는 걸로 안다. 그런데 박완서가 동화를 썼음을 올해 알았다. 초2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아이에게 벌로(!!) 읽으라고 한 적이 있는데, 어제는 심심해서 나도 읽어보았다.

 

 

 

 

 

 

 

 

 

 

 

 

 

 

최근에 읽은 <...싱아..>가 너무 강렬했는데, 재주 없는 소설가가 보기에 소설가 박완서의 가장 큰 재주는 겸손함(!)이다. 박완서는 그냥 사람 사는 얘기를 한다. 일견, 너무도 시시하고 평범한 얘기를, 덧붙여 너무나 쉽고 심지어 무성의하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글을 조금만 써 본 사람이라면, 평범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많은 독자에게 쉽게 읽히도록 하기 위해, 그녀는 정반대로, 쓰는 일을 무척 어렵게 했던 것이다. 톨스토이가 그 시시한(!!!) 문장을 쓰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퇴고를 거듭했음은 나 같은 전공자만 아는 일이기도 하다.

 

 

 

 

 

 

 

 

 

 

 

 

 

 

 

또 하나, 소설가 박완서는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이점에서도, '도덕군자'가 아닌 '소설가' 톨스토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나목>부터 그녀는 그저 자기 얘기를 할 뿐이다. 이점도 강조되어야겠다. 시종일관 자기 얘기다. 젊은 처녀 박완서가 있고, 나중에 우리가 보는 건 중년, 노년의 박완서다.  저 페르소나 사이에 일관성이 물론 있다. 왜냐면 그건 어쨌거나 박완서니까. <도둑맞은 가난>처럼 소위 공순이(?)가 주인공인 경우에도, 여주들은 모두 굉장히 야무지고 당당하다. 아주 마음에 든다! 그들은 아줌마가 되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그렇다. 어디 가서 기죽지 않는다. 늙어도 기죽지 않는다, 아주 좋은 일이다. 이런 일련의 장점, 미덕을 소설적 자아-화자인 박완서는 소설 속 다른 인물이나 독자에게 훈계, 강요, 설파하지 않는다. 덧붙여, '나'의 얘기를 '우리'의 얘기로 만드는 저력, 넘나 부러운 것이다... 다른 소설가들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동화는 좀 달라서 놀랐다. 개미 나라가 엄청난 기근에 시달리던 중, 한 일개미가 엄청나게 큰 먹잇감을 찾는다. 너무 커서 혼자 못 옮긴다. 그래서 동료 일개미를 부른다. 대체 이 먹이는 뭐지? 궁금해하던 중, 지혜로운 노인 개미 왈: 이건 매미야, 7년 동안의 잠을 거쳐 매미로 태어나는 거지. 의구심이 오간다. 진짜 매미야? 그런데 왜 땅속에 있어? 그런데 왜 땅밖으로 못 나가? 노인 개미의 답: 땅 위가 콘크리트로 뒤덮여서 그럴 수가 없다는 것. 여기서 개미들 사이에 의견 충돌. 이 개미를 먹이로 취할 것이냐, 아니면,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부드러운 땅 밑으로 옮겨줄 것이냐. 결국 후자. 그래서 일개미들은 이 기근에(!!!) 매미 먹이를 포기하는 대신, 애벌레-번데기 매미를 성충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매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맞아, 땀흘려 일할 때 매미 노래를 들으니 행복했어. 등등.

 

평소 박완서의 문체를 생각하면 군말도 좀 많게 느껴지고 무엇보다도, '원한'이 느껴지는 저 이타주의, 희생이 불편하다. 세대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배고픔도 너무 싫고(개미나라의 기근) 그것을 억누르고 다른 더 큰 것(매미의 인생)을 추구해야 하는, 살려야 하는, 거의 신화적 차원의 희생도 너무 싫고, 집단주의도 너무 싫다. 과장 좀 하면 치가 떨린다. 이런 전근대적인(!) 세계를 우리는 세계문학의 전범에서도 많이 보아왔다. 물론, <죄와벌>이 으뜸이다.

 

 

 

 

 

 

 

 

 

 

 

 

 

 

 

 

 

세계 전반의 불운(기근 등등)과 부조리는 결국 혁명을 통해서밖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도-키가 처했던 당시 러시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1970, 80년대 우리의 현실이기도 했을 터. 다시 읽은 <당신들의 천국>에 드러난 소위 '건설 대한민국'이 불편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이청준-조백헌이 은근히 박정희의 유비로 읽혀, 혀를 내둘렀다. 우리의 부모 세대를 그를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숭배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독재자의 딸이 등장하는 것이다.

 

 

 

 

 

 

 

 

 

 

 

 

 

 

 

박완서 동화와 나란히, 외국 작가가 쓴 <휴고와 동생 샤샤>를 읽었다. 아이가 방학식 날 학교에서(교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기(소년) 사자 휴고는 어느 날 동생이 생겨 당혹스럽다. 엄마를 빼앗긴 것. 하지만 여기서 엄마의 태도가 '쏘쿨~'이다. "엄마는 동생도 돌봐야 해, 혼자 자렴." 그랬다가 또 형편이 되면 "이리 오렴, 엄마랑 놀자." 그랬다가 대체로 심드렁(?!)한데, 정녕 선진국형 심드렁함이다. 다른 한편, 동화에 기승전결이랄까, 암튼 클라이맥스라는 것이 따로 없다. 휴고가 샤샤를 괴롭히고 엄마한테 야단을 맞기도 하지만 그리 과격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샤샤가 호기심에 코끼리를 보러 갔는데, 그 동생을 형 휴고가 구하는 것이다. '형제됨'의 과정에 대한 아주 사실적이고 담백한 스케치라고 할 법하다. 여기에는 어떤 '원한'도, 또한 메시지도 보이지 않는다. 아주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 동화도 아니고, 유명한 동화도 아니다. 심지어 이미지도 긁어오기 힘들 정도다. 그럼에도 유럽적(독일?) 세계관을 엿보기엔 참 제격인 듯하다. 비슷한 걸로, 앤서(터)니 브라운의 <달라질 거야>를 떠올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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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나서 알게 되는 작가가 있다. 토니 모르슨. 헉,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라도 한 권이라도 사 봐야지, 말하고 싶지만 아마 안/못 읽을 것 같다. 그래서 여기다 쓰는 것인데, 정녕 소개글만 봐도 울분이 차 올라 끝까지 읽지 못할 책임을 알겠다. 흑인, 여자, 노예. 이 정도만 봐도 각이 나온다. 동화를 주문해볼까 한다.

 

 

 

 

 

 

 

 

 

 

 

 

 

 

즉, 그런 시대, 그런 세계가 있는 것이다. '쏘쿨~'도 피라미드의 토대가 갖추어져야지 가능한 것이지(이 점에서 나는 정녕 유물론자), 당장 일차욕구가 해결되지 않는데 무슨. <7년동안의 잠>도 사실 저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을 법하다. 그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참 잘 살고 있지 않나. 이렇게 말하는 나는 구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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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아이의 생일이었는데, 미역국을 끓이는 걸 깜박했다. 꼭 끓여야 하나? "미역국 먹을래?" "아니, 싫은데?" 아이가 먹고 싶어한 건 초코 케이크였다. 미역국 안 끓은 걸 꼭 직무유기로 봐야 하나. 사실 좀 뜨끔했던 것이, 정말 까맣게 잊은 탓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계속 늦어지는 논문심사결과를 노심초사 기다리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제야 비로소 결과가 나왔다. 한 명은 100점, 짤 없이 게재가, 한 명은 70점 이하 짤 없이 수정후재심이었다. 이런 극과 극의 결과를 보면 당혹스럽다. 또 한 명은, 천만다행, 8-90점(?) 수정후게재. 이 '마일드- 온건한' 중간자(?) 덕분에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비슷한 스타일로 '게재불가'를 받은 적이 있어(그것도 <카라마조프> 논문을!^^;) 그 참담함을, ...이라기보다는 귀찮음과 성가심을 너무 잘 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아 다행이다.

 

심사는 심사자의 몫, 필자-연구자인 나의 몫은 내 논문, 논문 쓰기에 대해 생각, 반성하는 것이다. 인지불균형이 나쁜 것처럼, 나의 논문이 이렇게 호불호가 격하게 엇갈리는 스타일로 가는 것 역시 좋은 건 아니다.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순 없지만(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런 아포리즘적(!) 글쓰기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겠다.

 

아포리즘. 소설가 박완서에게는 없지만 동화작가 박완서에게는 그 위험이 보였다. 동화니까? 글쎄, 그렇지 않은 동화들이 워낙 많아서(특히 요즘 나오는 외국 동화) 써본 것이다. 동화는 교훈 충만이어야 한다, 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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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워보일 수 있지만 성장소설(교양소설)은 모름지기, 장편의 (한) 원형이자 모범이다. 우리 문학에도 적잖이 있을 텐데, 생각나는 대로 꼽아본다.

 

 

 

 

 

 

 

 

 

 

 

 

 

 

<새의 선물>은 아직 고전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유학 가기 전 이십대 중반에 읽은 까닭인지, 계속 그 이전에 쓰인 교과서급(?) 소설과 함께 묶여서 연상된다. 새로 나온 표지보다 초록색이 압도적인 저 표지가 마음에 든다. 주인공 이름이 진희였던 것, 광진테라 아줌마, 정도만 기억날 정도로 가물가물하지만,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사 장면이 초반에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부분이 좀 거슬렀던 느낌도 있다. 저 소설이 너무 좋았던 탓인지, 이후 은희경의 소설은 다 실망이었다. 그럼에도, 이 문장 속에 이미 들어 있지만, <새의 선물>의 작가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 여전히 궁금해서 사 읽게 된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아줌마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유학 갔다온 이후 읽은 장편 중 손꼽을 만한 것이었다. 소설 쓰기에 마땅한 작법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할 것이다. 이후 어린이 책도 좀 쓰고 장편도 꾸준히 써오는 것 같던데, <설이>는 제법 읽히는 모양이다. 챙겨볼 시간이 없어서 유감이다. 언제 또 기회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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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많은 작품을 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떠오르지 않아 놀랍다. 지금 놀라고 있다. 역시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하나?

 

 

 

 

 

 

 

 

 

 

 

 

 

 

 

 

얼마든지 더 꼽아볼 수 있다. 심지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서유럽문학은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는 장편이 무척 많다. 그들의 시간 감각, 세계 감각과 잘 맞는 장르여서 일 것이다. 러시아문학에 한정하면, 톨스토이가 그런 균형감각(시간과 성장)을 잘 갖추고 있어서, 그런 전통의 소설을 많이 쓰게 된다. 실상 <전.평.>도 나타샤의 성장 소설일 수 있다. 도스-키도 이 장르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에 한 편 시도하는데 바로 <네토치(츠)카 네즈바노바>. 결국 미완으로 끝났고(체포 됐음) 훗날 완성해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왜냐면... 그는 이른바 '성장'이 불가능한 시공간을 사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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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아주 많이, 많이 쓰고 싶은데 체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소설을 쓸 수 있다면 굳이 다른 글을 쓸 이유가, 필요가 없다. 번역은 더더욱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다듬는 원고의 초고를 잡은 건 2007년 여름이다. 정확히 12년 전이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혹은 있어도 틀지 않는) 4평 남짓 원룸에서 하루 두 세 갑의 담배를 피우며 썼다. 밖에 나가서 밥 먹고(아마 한끼 정도) 동네 산책하고 담배 사오고 하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집에서 쓰기만 했을 터. 2천매 쓰는 데 두달쯤 걸렸을 것이다. 내 몸 사정을 내가 잘 알기에 무척 조심했음에도 이삼일은 아파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생리통도 너무 심해, 하지만 이 심하고 성가신 통증조차 겪을 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너무 소중하여,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곁들어, 대부분의 사상가와 작가가 남자였던 지라 월경/생리에 대한 사유가 적은데, 지금 떠오르는 걸로는 이 작품 정도다.

 

 

 

 

 

 

 

 

 

 

 

 

 

 

 

 

늙으면 입만 산다더니,그럴 수밖에. 수족이, 몸이 이렇게 부실해지니 뭘 할 수가 없다. 입의 힘을 모아 조금이라도 더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쓰는 데 무척 많은 힘이 소요된다. 한달 내내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살았는데 이삼일 누워 있었더니 그 통증은 싹 사라졌다. 하지만 몸에 너무 힘이 없고(당연하지만^^;) 여차하면 체중도 출산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하나도 반갑지 않다!) "살긴 살았는데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벚꽃 동산>의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말이다. 나도 요즘 비슷한 생각을 한다. 별로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죽을 생각을 해야 하다니. 주변의 많은 이들이 스위스를 꿈꾼다. 하지만 거기도 돈이 든단 말이지, 캬.  

 

*

 

어제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의 유치원 시절 담임샘을 만났다. 약간 의아스러웠는데 어떤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 디스크 때문에 더는 교사 생활을 못한다고. 한편, 그 아이는 내가 아는, 3학년 짜리 어떤 남자 아이의 여동생이다. "너 ** 오빠 동생이지? 할머니 계시잖아요? 매일 안고 다니셨는데 이제 유치원 다니니까" "올해 돌아가셨어요." "예?" 어쩐지 안 보이신다 했더니 세상을 아주 떠난 것이다. "하늘나라 갔어요, 할머니." 옆에서 손녀가 웃으면서 종알댄다. 건강하고 젊은, 그래서 오지랖 넓은(교회 다니라고^^;;) 할머니였는데... 그런 정겨운, 전근대적 오지랖도 이제는 듣기/보기 힘들겠다.

 

이런 분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시부모들에 비하면 나의 아버지는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인가. 칠순에도 술을 퍼마시는 퇴폐적 자유도 아무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거 아버지 니들 초등학교 때 죽을 줄 알았다, 하도 술을 퍼서." 어제 엄마가 한 말. 여기에 무슨 철학이 있겠는가. 그저 무한한 자기방기, 그리고 나태와 무력이라는 악덕일 뿐. 보들레르가 생각난다. 역자인 황현산 선생도 세상에 없다.

 

 

 

 

 

 

 

 

 

 

 

 

 

 

 

 

한편으론, '성장'이란 참 슬픈 말이다. 그 끝은 어쨌거나 결국 '죽음'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죽음(들)이 없는 성장(들), 성장소설은 없다.  이 죽음을 삶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국 아이-생산이다. 그런데 요즘은 참들, 아이를 낳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권은 <되찾은 시간>인데, 소설의 맨 마지막 단어도 (내가 직접 읽지는 않았으나) '시간'(temps)이라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생각해본다. 구토가 가라앉아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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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과거는 우주보다 낯설고 또 멀다. 그렇지만 이렇게 써가는 동안에는 또 이만큼 익숙하고 가까운 것이 없다. 소설이란 결국 시간과의 싸움. 시간 사용법.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서사의 방식을 결정한다.  미셸 뷔토르의 <시간의 사용>(시간 사용법)을 직접 읽지는 못했는데, 내가 무척 좋아했던 소설가이자 불문학자 최수철의 박사논문 주제여서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기억이 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또 절망을 낳고."(??) 이상의 말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교'(=적절한 화법, 문체)를 찾다가 '절망'하여 아무 '기교 없음'으로 가보기로 결정했고, 그러고 나니, 내가 써놓은 원고 더미와 마주할 용기가 생겼고, 2주째 씨름하고 있다. 총 5장에 에필로그 2천매인데, 절반 가까이(심지어 이상) 날리는 것이 목표이다. 1장만 해도 거의 절반을 날렸다. 좋아! 이렇게 뭉텅 뭉텅 잘라낼 때의 쾌감은, 정말이지,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다.

 

 

 

 

 

 

 

 

 

 

 

 

 

 

 

 

지금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소설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스완네 집쪽으로>가 나왔을 때 꼼꼼하게 정독, 재독하고 그 이후에는 손을 못 댔다. 그 사이 이렇게나 많이 나왔다. 역시 '적들'은 쉬지 않는다 ㅠㅠ 글쎄, 다시 읽어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장안의 소문과 협박과는 달리(!!!) 이 소설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다만, 길 뿐이다 ㅠㅠ 혹은, 혹자에겐 지루할 뿐이다ㅠㅠ 나의 입장에서, 긴 건 사실이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그러니 읽을 만했고 더 읽고 싶다. 이쯤 되면 당위이기도 하다. 읽어야 한다!^^;; 

 

 

 

 

 

 

 

 

 

 

 

 

 

 

 

나아가, 이쯤되면 나의 스승들의 작품은 저 프루스트의 아류(^^;;)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런 인정에 조금의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닥치고(!!!) 써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저 소설을 쓰던 스승들 보다도 더 나이가 들었다. 할 말이 없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조동일 선생이 그러셨나, 나이 들고 나서 역작을 쓰겠다는 학자는 해 질 무렵 등산하는 거라고. 나의 나이 역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도, 절반을 넘었다.  안 쓰고 있으면 그냥 게을러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일단 쓴다. 기왕지사 쓰는 거 조금은 잘 썼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하루에 서너 시간 이상은 절대 쓰지 않기로 한다. 앗, 그럼 <악령>은 언제 고치지?

 

그러게, 다 할 수는 없단다, 얘야^^; 수학을 많이 했으면 국어 할 시간이 없고 국어 수학 다 많이 했으면 놀 시간이 없고, 대신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다 하고 왔기 때문에 집에서는 놀 수 있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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