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즈음인가, 아주 흥미로운 블로그-서재를 발견해서 밤마다 들어간다. (자기 사진도 더러 올라오는데, 자신에 대한 미학화 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과도 비슷할까.) 옛날 글도 막 뒤져 읽다가, 어제도 아주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일일일식'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키가 148밖에 되지 않는 나는, 많이 먹지 않는다,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이 키에 52킬로 나갔던 이력이 있다. 중고 시절인데, 그건 정말 최악이고 대략 48킬로 정도 나갔다.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배가 불러 터질  때까지 먹고(특히 먹기 간편한 빵, 사발면, 과자 같은 거)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 읽고 공부하고(책 보면서 또 먹는다) 이동은 오직 학교 - 집(기숙사), 그러면 된다. 대학 4년인가를 기점으로 체중이 조금씩 줄었는데, 아마 연애와 담배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보다 양질의 음식을 연인과 함께 먹고 사랑하고 산책 하고 그리고 담배를 배웠다. 학령기가 끝난 서른살, 나는 누가 봐도 말라깽이였다. 40킬로를 넘긴 적이 없다. 흡연, 특히 줄담배는 권장할 것이 아니지만, 소식은 무척 권장할 일이다. 고 박완서 역시, 위가 아픈 자, 약을 먹지 말고 음식을 줄이라, 라는 식의 충고를 한 바 있다.  

 

아, 그런데 일일일식이라. 말 그대로 하루에 한 끼만 먹나? 궁금해서 좀 찾아보니 '간헐적 단식' 비슷하게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다이어트의 한 방식인가 보다. 내 입장에서 소식은 그저 생활이다. 아이 낳고 살이 좀 불어 41-42킬로를 유지하는데(아프면 좀 더 빠지고), 여기에는 나잇살도 있겠지만 육아가 우리 아이엄마에게 요구하는 체력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모유 수유 기간에는 젖을 만들기 위해(!) 곰국 같은 것도 퍼마신다. 나는 모유가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더 좋은 젖을 만들기 위해(써놓고 보니 왜 그랬지??) 반쯤 억지로 영양식을 먹는 것이다. 삶에서는 어떤가. 말마따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골고루'를 귀에 못이 박히듯 들어왔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밥상', 덧붙여 '시골밥상'에 익숙한 나는 물론, 그렇게 먹고 자랐다. 단백질(고기)이 턱 없이 부족했지만, 생선이나 두부가 많았던 밥상을 생각하면 그리 불균형은 아니었을 터. 그래도 절대적으로 각종 채소류, 과일(아버지는 과일 도매상이었다)을 많이 먹긴 했고, 지금도 그렇다.

 

처음 시댁의 밥상을 보고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상다리 부러진다'는 말의 실현이었다. 음식의 종류, 양이 너무 많았다. (시)아버지도 대식가, 아들만 셋. 이해 된다. (시)어머니도 어느 순간에는 대식가가 된다. 게다가 워낙에 요리를 잘 하시니, 그냥 먹다가도 과식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걸 먹고 나면, 후식 내지는 간식이 나온다. 옥수수 찌고 껍질콩 삶고 등등. 그러고 한 두시간이면 다음 끼니다. 헉. 뱃속에 음식이 덩그러니 들어있는데, 더 먹으라고?? 명절의 전부치기. 오죽하면, 부치는 건 할게요, 제발 다 먹으라곤 하지 마세요 ㅠㅠ 밥만 먹게 해주세요, 떡국까지는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식사만 할 게요, 간식은 정말 못 먹어요 ㅠㅠ 한번은 이상한 돌게(??)인가를 주문하셔서 먹으라고,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그랬더니 "니가 너무 불쌍해서 하는 소리다, 이 귀한 걸 왜 안 먹니!" 진정한 '식고문'이다.

 

나야 그들 입장에서 남이지만, 손자는 다르다. "니가(니들이) 조금 먹는다고 애(들) 그리 주면 안 된다!"  그렇다. 자라는 아이들은 골고루, 많이 먹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마다 소화력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몸에 맞고 안 맞는 음식이 다 다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 입안에 처넣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학교 급식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집에서만이라도 '안 먹을 자유'를 달라.

 

아이의 식성은 남다르다. 그렇다고 자폐성 기질의 아이처럼 편향적인 건 아니고, 이건 거의 전적으로 엄마 닮은 것 같은데, 나물류, 채소류, 과일류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먹인 탓에 고기도 먹을 줄 안다. '-줄 안다'라고 쓴 건,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라는 말을 절감하는 탓이다. 나는 지금도 소고기와 날생선(회, 스시)을 잘 못 먹는다. 반면, 아이는 이런 것도 어지간히 잘 먹는다. 사탕, 초콜릿, 젤리, 아이스크림 이런 유의 군거짓거리도 별로 즐기지 않는다. 놀라운 건 계란을 안 먹는다. 왜? 알레르기? 그것도 아니다. 계란의 형체를 없애고 요리하면 먹는데, 계란 모양이 살아 있으면 안 먹는다. 뭥미?

 

아마 내가 장어를 곧 죽어도 안 먹는 것과 같을 터. 왜 안먹냐고?? 장어는 너무 징그럽게 생겼다!!! 썰어놓으면 안 보인다고? 상상이 되어서 싫다. 그럼 문어, 낙지, 오징어는? 심지어 해삼, 멍게는? 그건 또 먹는다. 내 맘이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피해를 안 주는 이런 유의 편식은 굳이 억압받을 게 아니다. 아, 보는 사람 눈에 재수 없다고? 그렇긴 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회식을 무척 싫어하고, 회식할 때는 아주 편한 자리가 아니면(그런 자리면 회식이 아니지) 밥을 잘 안/못 먹는다. 그때 많이 먹으면 백프로 집에 와서 토한다. 같은 이유로, 혼밥을 무척 즐긴다. 남의 눈에 처량해보일 테지만, 나는 지복의 순간. 젓가락질도 잘 못하고 많이 묻히고 흘리고(그래서 냅킨이 잔뜩 쌓이고) 무엇보다도 편식에 소식에, 먹는 속도도 무척 느리다. 이걸 맞춰 줄 사람은 애인-남편밖에 없다. 흠, 그런데, 아이는 지금 엄마보다 더 한 것이다 -_-;;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의 식생활에 반성 아닌 반성을 할 때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골고루 줘야 하는데, 꼬박꼬박 줘야 하는데, 아이들은 간식까지 하루 다섯끼는 먹어야 한다는데 등등. 하지만 나는 사실상 1식 1찬, 그 다음 과일, 이렇게 먹인다, 넘 귀찮아서 -_-;; 1찬은 너무 하고 가끔 뭘 덧붙일 때도 있다. 밥과 빵을 같이 줄 때도 있다. 오직 식판의 칸을 채우기 위해서다.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와서 속만 삭 발라, '샐러드야~' 이러고 줄 때도 있다. 어쩌랴, 요리는 정말 넘 싫은 것을. 그런데 굳이 '다양'할 필요가 없음을, '골고루'가 능사가 아님을 주장하는 글을 보고서 나름의 희망을(?!) 얻는다. 비단 음식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목을 매는 독서, 내 입장에서는 글쓰기도 그렇다. 출처 밝히고 한 번 긁어와본다.

 

다양한 음식을 고루고루 먹는 것이 건강식이 될 수 없듯이 다독이 사유를 넓히는 것도 아니듯이 다양한 경험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서사를 풍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행과 경험의 다양성이 그 사람의 인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면 세계 곳곳을 누빈 김우중과 이명박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칸트는 오로지 산책을 통해서만 거대한 사고를 확장했고 몽테뉴의 << 수상록 >> 은 다락방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https://blog.aladin.co.kr/myperu/10569752)

 

 

먹는 것,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것이 읽고 쓰는 것이다. 나는 발자크보다 더한 속물이지만, 게다가 아이 엄마로서도 결코 극성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높은 것'에 대한 지향(^^;)이 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읽고 쓰느냐, 방법론인데, 이제 와서 내가 나를 바꿀 수 없다. 음식을 골고루, 많이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기와 쓰기 역시 기존의 방식을 취하되 보다 더 현실적인 길을 찾아봐야 한다. 새로 나올 책에 다루는 책이 몇 십권이다. 이런 식의 읽기 대신, '덜-골고루'로 가려고 한다. 내 몸에, 마음에 맞는 음식-책을 꼭꼭 씹어서 열심히 먹으려고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릴 터이다, 한 권 읽는 데. 소위 '돌려막기' 독서를 하지 않으련다.  그 다음.

 

소설가로서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경험의 부족이다. 과연, 그럼, 경험 많은 니들은 나보다 잘 쓰냐?? 니들의 경험은 과연 그토록 유의미한 것이냐?? 많은 경험으로 더 잘 썼던 자들이 있다. 우리가 손쉽게 리얼리즘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 개인의 경험이 사회, 국가의 보편적 경험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 무엇보다도, 작품이 좋았던 덕분이리라. 이 점에서 '미메시스'는 우리가 여전히 숭상해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미메시스'(모방, 재현)가 그 대상으로 삼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단답일 수 있다, 주관식, 서술형, 논술이어야 한다. 

 

 

 

 

 

 

 

 

 

 

 

 

 

 

 

 

조이스는 일찌감치 더블린(아일랜드)을 떠났으나, 그의 문학 속 공간은 항상(어쩌면 유일?) 그곳이다. 그가 문학화한 경험은 극히 '편식', 심지어 '일식'에 '일찬'이라고 할만하다. 모더니즘의 특징일까? 프루스트도 많이 다니지 않는다. 많은 사람을 만나나? 그래본들 가족과 몇몇 벗, 연인(레오니 할매, 프랑수와즈 하녀, 부모, / 첫사랑 질베르트, 그녀의 부모 스완과 오데트 / 그 다음 참사랑 알베르틴, 그 주변 사람들, 블로크, 예술가들 등등)에 한정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선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 그런 체험이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으로 거듭난다. 소설가는 오지를 떠도는 여행가가 아니다!!! 헤밍웨이 같은 소설도 있지만, 다 그런 모험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쓸 수도 없거니와.

 

 

 

 

 

 

 

 

 

 

 

 

 

 

 

이제 막 한숨 돌린 나의 장편을 보니, 사람도 많고 에피소드도 많다. 아주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자의식 충만한(그런가?) 내 소설과 아주 차별되나? 그런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웃기지만, 내가 뭘 쓰는지도 모르고 쓰는 거다. 뭘 쓰는지 알면 잘 안 써진다. 막 써놓고 다시 보면 뭘 썼는지 보여서 초난감하다. 어쩌지? 일단은 막간의 여유를 누리고 나중에 가서 생각하자. 이런 식으로, 논문 쓰는 자, 즉 학자-평론가 모드로 돌아가면, 나는 아주 오만하게 거들먹거릴 수 있다. 심지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씹고 있다. 썩 괜찮은 비평서-연구서를 내고 싶은 욕심이 여전히 있지만, 내 나이와 내 능력을 응시하면, 너무 아뜩하다. 

 

그래도 기죽지 말고 꾸준히, 열심히.

 

"**아, 내가 머리카락이 여기 좀 많이 안 났니? 내 생각에는 얼굴에 침을 맞고 잔대 달인 물을 꾸준히 먹고..." 님의 그 낙관주의와 신심이 님의 머리카락을 돋게 하리라...^^;; 또한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머리카락이 나든 말든, 배가 나오든 말든 거의 '달관'의 포즈다. 불충한 며느리(들)를 꾸짖지 않고 감싸안음으로써 덕/득 보는 건 며느리(들)이 아니라 결국 시어머니다. 그녀는 우리(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우월하다. 

 

*

 

다시, 아이의 식단. 일일일식, 일일일찬까지는 아니지만 더 '골고루' 해 줄 여력이 없다. 그래도 나는 편의점 표 도시락을 주는 엄마는 아니다 -_-;; 과거에도 '본죽'표 이유식 대신 엄마표 이유식을 만들었다. '마음의 양식'은 어떡할 것인가.

 

 

 

 

 

 

 

 

 

 

 

 

 

 

 

"오늘은 할머니 집에서 문어를 먹었으니까 <문어>책을 보자."

유치원생들 보는 수준이지만(프뢰벨 과학책 -_-;;) 초등에게도 그리 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아이와 같이 읽는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문어는 '알'에서 '아기 문어'가 되는데 2개월이 걸린다. 많나, 적나? 오징어는 겨우 5일이 걸린다! 즉, 한 마리의 문어가 태어나는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함은, 응당, 개체수도 적다는 것이고, 살아남은 놈들의 수명도 길다는 거다. (인간이라는 종을 생각하면 된다.) '문어'의 '문'자는 '글월 문'이라고 한다. 헐, 똑똑한 물고기^^;; 저 비싼 연체류는 제사상에만 올라왔던 것인데, 그래서 나는 문어보다 오징어를 더 좋아하거나 더 쉽게 먹는다. 물론, 아이는 그 무렵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으니 문어, 주꾸미, 낙지(얘네들 다 문어과, 라고 한다), 오징어, 갑오징어, 한치 등 모든 연체류를 다 섭렵하고 있다. 아이도 문어와 오징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한다. 혹은 그런 척 한다. 그래야만, 아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강화제 없는 독서-공부가 가능한가.

남들의 눈에는 소위 '공신/책신'에 가까운 나에게 먼저 물어보자.

아니다. 단 5분을 쉴 지라도, 강화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지금도 '강화제' 맞고 있는 중?)

하물며 아이(들)의 경우에는, 물론.

 

*

 

- "엄마, 그런데 나는 장애인이야?"

(아마 어제 할아버지가 자기 어릴 적 친구 '장애인' 얘기를 한 탓인듯 한데, 그는 자신의 아내와는 참 정반대의 캐릭터라, 이 대조가 놀라울 따름이다.)

- "왜 물어? 니 생각은 어떤데? 니가 장애인인 것 같아?"

- "음, 엄마 생각은 어떤데? 엄마 생각에는 내가 장애인이야?"

아, '진격의 거인'이 아니라 '반격의 거인'!^^;;

엄마가 너를 감동시킬 멋진 (음식은 안 되겠고) 논리-답변을 만들어주마! 하고 다짐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엄마-나도 니가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붙는 아이인지 어떤지 잘 모르니까. 요즘은 더더욱. 너는 그냥 나의 아이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