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키의 <죄와 벌>이 던지는 치명적인 물음 중 하나가 이것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라스-프가 직접 소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 하겠는가, 저 노파처럼 '못된' 자가 살아야 하겠는가, 마르-프 가족처럼 아무 죄없는 자가 살아야 하겠는가 등. 어릴 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이 물음, 이 전제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간과한다. 즉, 노파는 과연 '못됐나'. 적어도, 도끼에 맞아죽어야 할 정도로 악인인가. 그 다음 소냐 가족들은 무조건 '선인'인가.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결함이나 악덕도 없는가.

 

노파 알료냐의 이기주의와 탐욕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그녀는 직업 자체가 고리대금업이고(고로 '고리'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열심히 살고자 했던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리자베타를 학대한 것 역시 어디까지나 소문이고 그녀의 장애 상태, 둘의 관계, 업무 분담, 노동 착취 등에 관해선 사실 별로 확인된 바가 없다.(참고로, 장애인 학대는 가족 사이에서 제일 많이 일어나지만, 이건 가깝기 때문,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라스-프가 소위 '구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부류는 무조건 선인인가. 차라리 그들이야말로, 온갖 악덕의 집합체이다. 나태, 음주, 열패감, 히스테리, 광증, 허영심, 과거 집착 등.

 

여기서 우리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불쌍한 것들'. 레 미제라블. 좀 더 세련되게, 영어 버전으론 '푸어 크리쳐'. 어느 대목에서인가 유발 하라리가 쓴 대로, 그들은 악마도 천사도 아니었다, 그냥 인간이었다.

 

 

 

 

 

 

 

 

 

 

 

 

 

 

 

 

라스-프의 범행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위의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즉, 그가 죽인 노파가 (리자베타는 뜻밖의 오류였다고 해도) 절대악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야말로, 혹은 그녀 역시도 그저 불쌍한 존재,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누가 죽어야 하고 누가 살아야 하는가. 겸사겸사, 그 다음에 충족되어야 하는 전제는, 노파 하나 죽인다고 과연 세계가 구원받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라스-프 이전에 그런 일이 행해졌을 터이다. 너만 똑똑하고('천재') 다른 놈들은 다 병신('이')인 줄 아니?^^;  

 

 

 

 

 

 

 

 

 

 

 

 

 

 

 

 

 

어릴 때 명화극장(?) 이런 데서 봤던 영화. <소피의 선택>. 여배우(메릴 스트립)가 좀 안 예쁘다고 생각하고 봤던 영화. 독일 나치, 무슨 소용소, 아들이냐, 딸이냐, 그런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언제 소설로 한 번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여태껏 못 읽었다. 아무튼 우리에게 이런 치명적인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랄 밖에.

 

 

 

 

 

 

 

 

 

 

 

 

 

 

그리하여, 노회한(!) 중년 작가 도-키는 그 대답을 신에게로 떠넘긴다. 이 점은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에 드러난 톨-이의 은근한 비겁함(?)과 유사하다. 굳이 '비겁'하다고 한 이유는 그 누구보다도 '사회소설'(+가족소설)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하려고 누구보다도 노력했던 그마저도 결국 궁극의 해답은 현실에서 찾지 못하는 것이다. <전.평.>에서는 그게 그리 불가능하지 않았을 텐데(작가도 아직 삼십대) <안나...>, <부활>에 이르면 속수무책. "복수는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도-키에게 이 말을 해주는 신의 사도, 천사는 소냐이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을 결정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하는 식. 사람이 나이 들 수록 종교로 가는 것이 요즘 정말 이해된다. 감성에서 지성에서(감성-지성에서) 영성으로. 

 

 

 

 

 

 

 

 

 

 

 

 

 

 

 

 

<내가 만난 하나님>. 이걸 지난 여름에 읽고 수업 시간에도 잠깐 소개했는데, 다들 웃었다, 문자 그대로 웃었다. <무진기행>의 작가의 개종이라, 거참. 이어령과 박완서의 저 책은 읽지 않았으나, 두 저자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참척의 고통'이라던가. 박완서가 쓴 글을 통해 알게 된 표현인데, 자식 잃은 고통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늙은이와 젊은이, 부모와 자식. 이들 중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그나마, 여러 견지에서 봐도, 고민할 사람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다시금 이 '비의'는 무엇인지. 정확한 문장은 생각이 안 나지만, 박완서 수필 어딘가에서 본 구절. "자식 먼저 보내고 밥을 처 먹는 어미의 모습이 너무 징그러워서..."  

 

*

 

의식을 찾고 퇴원하는 아이의 사진. 실루엣에서 이미 젊음이 느껴진다.(한데, 이런 사진, 이런 보도는 이제 좀 하지 않으면 좋겠다! 저널리즘의 저속에 대해서 또 한 번 분노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이가 가진 그 젊음이 한편으론 왜 그리 슬퍼 보이냐. 또 다른 한편, 똑같은 시공간을 살았으되  이토록 엇갈리는 삶의 명암은 무엇이냐. '죄'는 있으나 '죄인'은 없는 상황.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상황이다. 아들(남자친구)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가 교통사고를 당한 일가족도 그렇고.

 

'감성'과 '지성'(이성)의 대립항 외에 도-키가 굳이 '영성'을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오래 전에 한 학생의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은, 군이 지금의 그 인생 계속 살아보라, 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

 

다시금 실루엣. 실루엣만 봐도, 윤곽만 봐도 나이가 보인다. 유년, 청소년, 청년, 장년, 중년, 노년. 아이의 성장 발달에서 만 6-7세가 되면 소위 '베이비몸매'를 졸업한다고 한다. 머리통이 몸통에서 보다 더 독립하고 가슴과 배의 윤곽이 형성되어 상체-몸매가 된다. 몸놀림이 날렵해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아, 그래서 이 연령대가 학령기의 시작인 것이다. 두 번째 시기는 대략 만 10세쯤으로 잡는 듯하다. 적어도 피아제 이론은 그런 모양이다. 여기가 말하자면 인지 발달의 데드라인. 물론 전체 그림은 그 전에 완성되지만, 일종의 패자부활전, 연장전이랄까. 너무 암담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아이의 까마득한 미래와, 역시나 어딘가 꽉 막혀 도무지 뚫리지 않을 것 같은(연통?!) 나의 현재가 맞물려, 올 연말도 참 우울하다. 과연, 자리는 하나 밖에 없고,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할지. 아니면, 이렇게 다 죽어야할지. 모두가 다 죽는 저 비극이 오히려 희극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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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에서 그냥 쉽사리, 휙 놓치고 가는 장면. 지금 고치다가, 정말 하나도 버릴 게 없구나, 도-키의 소설은, 이런 생각이 들어 가져와 본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소설에 비해, 20여년 나의 번역에는 버릴(고칠) 것이 무척 많다. 단순히 '스킬'이 부족하여 문장이 어수선한 거야 그렇다 쳐도(그 사이 나의 성장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오역이 제법 발견되어 놀랍다.(송구스럽기도 하다.)  너, 그 무렵엔 러시아어 정말 잘 하지 않았니?^^;;

 

레뱌드킨 집의 문은 닫혀 있을 뿐, 잠겨 있지는 않았고 우리는 거침없이 들어갔다. 거처라고 해 봐야 더러운 벽지 뭉치가 그야말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을린 벽에 둘러싸인, 크지 않은 역겨운 방 두 칸이 전부였다. 주인인 필립포프가 술집을 새 건물로 옮기기 전 언젠가는 여기가 몇 년 동안 술집이었다. 술집에 딸린 나머지 방들은 지금 잠겨 있고 오직 이 두 칸만 레뱌드킨의 손에 떨어졌다. 가구래야 팔걸이가 떨어진 낡아빠진 안락의자 하나를 빼면 소박한 의자들과 판자 쪽으로 만든 탁자들이 전부였다. 두 번째 방의 한 구석에는 mademoiselle 레뱌드키나의 것인 무명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었는데 대위 자신은 밤이면 옷을 입은 채 마룻바닥에 나뒹굴다시피 자기 일쑤였다. 곳곳에 부스러기, 쓰레기, 물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 방은 마룻바닥에 흠뻑 젖은 두툼하고 큰 걸레가 뒹굴고 있고 바로 그 웅덩이 속에 닳아빠진 낡은 신발짝이 빠져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난로도 떼지 않고 음식도 만들지 않는다. 샤토프가 상세히 얘기해준 대로 심지어 사모바르도 없었다. 대위가 여동생과 함께 도착했을 때 완전히 거지신세였고, 리푸틴의 말대로, 처음에는 정말로 집집마다 구걸하러 다녔다. 하지만 뜻밖에도 돈을 받게 되자 당장 술을 퍼마셨고 숫제 술에 절어 살았기 때문에 살림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mademoiselle 레뱌드키나는 두 번째 방의 구석, 판자 쪽으로 만든 식탁 앞 의자에 얌전히,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우리를 부르지도 않았고 숫제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샤토프는 원래 그들은 집 문을 잠그지 않는데 한번은 밤새도록 현관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있었노라고 말했다. 쇠 촛대 위, 희끄무레하고 가느다란 양초 불빛 아래로 나는 서른 살쯤 된 듯한 병적으로 여윈 여자를 분간해냈는데, 짙은 색의 낡은 사라사 원피스를 입고 긴 목에 아무것도 감지 않은 채 듬성듬성한 짙은 색 머리카락을 목덜미에 두 살배기 어린애의 주먹만 한 크기로 묶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즐거운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 앞의 탁자 위에는 촛대 말고도 시골풍의 작은 손거울, 낡은 카드 한 세트, 노래집 같은 다 해진 조그만 책, 벌써 두어 번 베어 먹은 독일식 하얀 빵이 놓여 있었다. mademoiselle 레뱌드키나가 얼굴에 하얗게 분칠하고 빨갛게 연지를 찍고 입술에도 뭔가를 바른 것이 눈에 띄었다. 눈썹도 시커멓게 칠해 놓았는데 원래도 가늘고 검은 눈썹이었다. 하얗게 분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좁고 높은 이마에는 세 줄의 긴 주름이 상당히 뚜렷이 그어져 있었다. 그녀가 절름발이라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이번에 우리가 가 있는 동안 그녀는 일어나는 일도, 걷는 일도 없었다. 언젠가 한창 때는 바싹 여윈 이 얼굴도 밉지 않았을 법했다. 하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회색 눈은 지금도 훌륭했다. 몽상에 잠긴 듯 진실한 무언가가 거의 기쁨에 찬 그녀의 조용한 시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카자크 채찍이며 오빠의 온갖 무자비함에 대해 모두 들은 다음이라, 나는 그녀의 미소 속에 표현된 이 조용하고 평온한 기쁨에 깜짝 놀랐다. 이상하게도, 신의 벌을 받은 이 같은 모든 존재와 함께 있을 때 흔히 느끼는 힘겹고 심지어 두려운 혐오감 대신에 나는 첫 순간부터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거의 유쾌했으며 나중에도 혐오감은커녕 애처로움에 휩싸일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문자 그대로 몇날며칠을 저렇게 혼자 꼼짝도 않고 앉아서 점을 치거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샤토프가 문지방에서 그녀를 가리켜 보였다. “그놈은 먹을 것도 주지 않아요. 가끔 곁채의 노파가 워낙 불쌍한 마음에 뭘 좀 갖다 줘요. 어떻게 촛불만 덩그러니 켜놓고 저렇게 혼자 내버려둘 수 있는지!”

놀랍게도, 샤토프는 그녀가 방 안에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안녕, 샤투시카!” mademoiselle 레뱌드키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마리야 티모페예브나, 손님을 데려왔어.”

샤토프가 말했다.

, 손님이라니, 영광이네. 당신이 데려온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어, 이런 사람은 기억 안나.” 그녀는 양초 너머에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곧 다시 샤토프 쪽을 향했다(그리고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나라는 인간은 아예 그녀 옆에 없는 양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참, 너무 불쌍하고 딱해서, 원. 이 소설에서 형편 없는 악역(-축에도 못 끼는) 레뱌드킨. 사실 그도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양, 적어도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보호, 배려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이거늘. 자기가 당한 것을 고스란히 더 약한 자에게 푸는 이 메커니즘, 너무 낯익다.

지적장애에 자폐에 지체장애(어쩌면 뇌병변)까지 있는 서른살의 노처녀 마리야는 말할 것도 없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해묵은 편견도 새삼스럽다. "신의 벌을 받은.... " "혐오감... 애처로움(동정)..."

그리고 도입부에 포착된 저 가난, 그리고 술.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런 것을 제대로 소설화하지 못해 서럽다. 물론  전혀 '시의성'이 없는 주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 역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좀 잘 써보란 말이다, 쳇.

배고프다. 움직임이 적을 때는 조금도 먹어도 됐는데 (아이 때문에) 움직임이 많아지니 많이 먹어야 한다. 총체적인 소비량의 증가. 

 

*  

 

번역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뭘 번역하냐가 중요한다. 도-키 소설을 번역하는 나는 불쌍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그를 나는 정말 좋아하나 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심지어 나와 가족을 먹여살리고 있다.) 작년에 어쩌다 그만(정녕 어쩌다?? ㅠ.ㅠ) 톨스토이 단편선(민화) 계약을 했는데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순전히 아이가 읽을 책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해야 할 법하다...ㅠ.ㅠ 어떤 일(노동)에 굳이 '명분'을 찾아야 할 때 우리는 불행해진다..ㅠ.ㅠ  걍(그냥) 하는 것이 좋다. 과연, 프로정신 약한 번역가가  행복감과 자긍심을 동시에느끼면서 번역에 몰입하려면 그 텍스트에 대해 얼마만큼의 사랑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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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의 키릴로프는 언제나 우리를 매혹했다. 보통 처음에는 스타브로긴에게 반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이 키릴로프가 제일 넘사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모방을 불허하고 반복을 불허한다. 아, 모방하고 반복하기 싶지도 않기 때문일 터이다. 돈이 있나, 힘이 있나, 직업이 있나(-있으되 일을 안 하니), 여자가 있나 등등. 한데 그가 28세의 건강한(^^;;) 청년임은 독자들이 좀처럼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지라르의 말대로, 키릴로프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비이기 때문에(골방 속 그리스도, 워너비 그리스도, 랄까) 절대적으로 선해야 한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권총 콜렉션 밖에 없어서), 선할 수밖에 없다. (앗, 아니지, 못/안 가졌다고 다 선한 건 아니다.) 집을 나가는 일도 잘 없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온다. 소설 속에서 그가 외출하는 일이 몇 번 있지? 스테판 집 한 번, 스타브로긴 결투 입회인으로 한 번, 정말 딱 그 정도인 것 같다. 죽을 때도 표트르가 그의 집을 찾아오고 거기서 자살한다.

 

이렇게 두문불출하는 그가 꿈꾸는 일은 오직 하나, 다시금 그리스도-되기이다. 벽을 기어오르는 거미한테도 기도하고 주인집 갓난 아이와도 잘 놀아주고(공놀이^^;;) 몽상으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어제 니진스키의 <감정> 일부를 강독하는데, 아침 9시에 일어났는데 아침을 12 넘어서 먹는다 -_-;; 과연 광기의 제국. 광기의 계보도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광기에도 등급이 있다.

 

 

 

 

 

 

 

 

 

 

 

 

 

다시 키릴로프. 그리하여 키릴로프는 신을 봤던가. 아니, 그의 꿈대로 자살하는 순간 (신인이 아닌) 인신이 되었던가.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썼다. 언제 책을 만들지. 습관적인 조급함은 있는데, 생산성은 예전에 비하면 형편 없다. 짜증이 날 법하지만 어쩌겠나, 할 수 없지, 우선은 번역부터 다듬고. 음, 그 다음에는 톨스토이의 소설에 관해 두 편의 논문을 쓸까 하는데, 원래 올해 목표였던 이 일이 미루어졌다. <지바고> 논문을 쓴다고, 또 운전 면허를 딴다고 그런 것인데, 가용 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다른 한편,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나의 친구가 무척 부러워진다... 이게 아이러니가 아니라서 더 슬프다.

 

키릴로프가 생각 난 건, 화,목 아침에 흥미로운 집단(?)을 보는 덕분이다. 시간표가 애매하여 아침에 한 두 시간을 학교 커피숍에서 개긴다.(갈 데 없는 나 같은 신세의 시간강사들이 많다, 언제 이런 것에 대해서도 써볼까 한다. '지방-시'만 힘든 게 아니다. '서울-시'도 힘들다.)  9시와 10 사이, 사실상 이른 아침(^^;;)이라고 해도 좋을 그 시간에 (초등생들처럼^^;;) 단둘, 혹은 삼삼오오 테이블 앞에 모여 앉는 사람들이 있다. 아, 뭘하지? 세미나? 내가 더 바보구나. 주섬주섬, 도 아니, 엄정하게, 책을 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읽는다, 기도한다. 헐, 아침 기도 모임? 그런가 보다. 아침밥 챙겨먹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은데, 저 역시 믿음의 힘인가.

 

주변에 독실한 크리스천(개신교든, 가톨릭이든)이 많다. 한데 이 믿음에 있어 이런 집단(모임, 제도, 의식 등)이 꼭 필수적인가, 하는 의문 역시 오랫동안 가져왔다. 다른 종교(가까이는 불교)도 마찬가지. 여기서도 (아이 걱정과 나란히) 이른바 사회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아무리 고립을 자처해도 '세계'는 필요한 것이다. 저 키릴로프만 해도 그렇다. 옆집 사람들(샤토프, 주인 할매)이 있고 '나'(안톤 G-v)를 비롯하여 스타브로긴과 같은 '세계'가 있다. '고립/은둔' 역시 '사회성'을 전제로 한, 그것을 염두에 둔 굉장히 적극적인 사회 활동이다. 현재 나의 작태, 나의 꼬라지가 그렇다. '왕따'를 자처하면서도 얼마나 '끼고' 싶어 하는가 말이다.

 

키릴로프가 '끼고' 싶어한 세계는 (물론 소설이니까^^;) 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러게 그는 신이 아니라 광인의 대열에 들었다. 위대한 광인. '키릴로프-교'의 신도였던 내 친구도 그런지. 에라잇, 이것도 모르겠다. 날도 춥고 짤릴까봐 너무 겁나서. 

 

палка о двух концах

문자 그대로, 끝이 두 개인 지팡이.

이렇게 그렸는데 개 뼉다귀 그림이 되었다.

의역해서, 양날의 칼.

(<죄와 벌>에서 포르피리와 라스-프의 논쟁에 많이 나옴. / <카라마조프>에도 많이 나옴.)

양쪽에 날이 서 있는 칼을 그렸는데, 눈(구멍) 없는 자리몽땅한 꽁치 그림이 되었다.

 

일해야 하는데 두 시간 반 동안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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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막달레나 (I)

 

밤이 되자마자 나의 악마가 여기 와 있고, / 과거에 대한 나의 보복이 시작된다.

 

내가 사내들의 기분풀이 노예, / 악귀 들린 바보였을 때,

나의 은신처가 거리였을 때 / 그 시절 음탕의 추억이 찾아와

나의 심장을 빤다.

 

몇 순간이 남았고 / 관 속 같은 정적이 엄습하리라.

하지만 그 몇 순간이 지나기 전 / 나는 나의 삶을 끝까지 밀고 가

당신 앞에서 설화 석고처럼 / 산산이 부순다.

(...)

 

 

24. 막달레나 (II)

 

사람들은 축일을 앞두고 대청소를 합니다.

이 북새통에서 비켜나,

나는 너무도 깨끗한 당신의 두 발을

물통의 향유로 씻습니다.

 

아무리 더듬어도 신발을 못 찾겠나이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헝클어진 머리타래가

내 눈 위로 장막처럼 드리워졌습니다.

 

나는 당신의 두 발을 치마폭에 받치고

눈물로 씻나이다, 예수여,

내가 목에서 흘러내리는 구슬 목걸이로 두 발을 휘감아

아랍인 외투 같은 머리카락 속에 파묻었습니다.

 

당신이 미래를 정지시킨 양

그것이 그토록 세세히 보여,

시빌라128)의 예지의 투시력으로

나는 지금 앞날을 예언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면 사원의 장막이 떨어질 것이요,

우리는 한쪽에 동그랗게 모일 것이요,

나에 대한 동정심에

발밑의 땅이 흔들리겠지요.

 

호위대는 행렬을 정비하고

말 탄 자들이 출발할 것입니다.

폭풍우 속의 회오리바람이 머리 위로 솟구치듯

이 십자가는 하늘에 닿으려 할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발 아래 땅위로 몸을 던지고,

까무러치며 입술을 깨물겠지요.

당신은 너무 많은 사람을 안기 위해

십자가 양끝을 따라 두 손을 펼치겠고요.

 

누구를 위해 이 세상은 이토록 넓을까요,

이토록 많은 고뇌, 이토록 큰 힘이 필요할까요?

이 세계에는 이토록 많은 영혼과 생명이 있는 것일까요?

이토록 많은 마을, , 그리고 숲이?

 

하지만 그런 사흘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런 공허 속에 처해질 테니,

이 무서운 막간 동안

부활을 맞을 만큼 성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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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펼쳤다, 도-키의 <악령>. 주지하다시피(과연 그런가?^^;;), 이 소설의 주인공 스타브로긴은 오묘하다. '주인공'임에도 사실, 무대에 세운다고 하면, 등장 횟수나 시간, 대화의 분량 같은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분신들(표트르, 샤토프, 키릴로프 등)과 거의 평등하다고 해야 할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주인공인데, 그 지위가 거의 신적-악마적이다. 그것이 생성되고 유지되기 위해 꼭 요청되는 것이 무엇이냐.

 

 

 

 

 

 

 

 

 

 

 

 

 

 

지라르의 말대로(<낭만적...>은 그의 초기 저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도-키를 거쳐 자신의 저 사유 체계로 간다), 우선은 미남이어야 한다. 그리고 부자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키릴로프는 절대적으로 선량한 인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미친 짓-이념적 자살-이 동기화되고 설득력을 얻는다.

 

심각한(심오한?!) 악은 반드시, 그 대상과의 밀도 있는 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냥 마구 사람을 찔러죽이고 등등 하는 건 짐승짓일 뿐이다. 밀도 있는 관계가 가능하려면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미모와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덧붙여, 이성을 상대로 하면(아, 요즘은 동성애도 많다!) 성적 매력 또한 갖추어야 한다. 이 역시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게 있어야 악을 행할, 그 전제 조건이 되는 관계를 맺어갈 시간이 확보된다. 진정한 악은 '먹고사는 일' 너머, 그 바깥에 존재한다. 역으로, 그래야만 또한, 진정한 악, 즉 '미학'(=무관심성)이 완성된다. 아무래도 권태가, 나아가 우수가 중요한데, 동어반복이지만, 이 역시 과잉-넘침의 산물이다.

 

"나는 돈 없어요.(가난해요.) 어머니가 부자인 거죠."(?)

이와 비슷한 얘기를 스타브로긴이 어디선가 한다. 하지만 그게 그거다. 그가 지금까지 쓴 돈(가령 샤토프와 키릴로프의 아메리카 여행 비용, 마리야 레뱌드키나에게 주는 생활비 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돈이 없어요~"라고  말하면서도 평온할 수 있는 저 드높은 자존감이야말로, 핵금수저만이 가질 수 있는, 각종 흙수저(목수저, 동수저 등)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맥락에서 모든 것이 '가면'이요 '연기'다. 말쑥한 사교계 청년의 가면, 타락한 부잣집 도련님의 가면, 난폭한 싸움꾼의 가면, 심지어 소아성애자의 저질스러운 가면까지.

 

 

 

 

 

 

 

 

 

 

 

 

 

 

<좀비>는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단순하게, 담백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필력에 감동했고, <종의 기원>은 다소 장황한 느낌을 주어 실망했다. 후자는 아마 '어머니'의 얘기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해서 그런 것 같다. 진정한 사이코패스는 말(잡생각)이 별로 많을 것 같지 않다. 성실(?)할 수록 많이 죽여야 하니까, 또 그 처리도 직접 해야 하니까.

 

*

 

<버닝>에서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을 보면서, 딱 스타브로긴을 떠올렸다. 말쑥한 외모, 중저음의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에  거의 포커페이스라고 할 만한 예의바른 표정과 그런 말투. "(굳이 등단해야 하나) 글을 쓰면 작가지." "두 달에 한 번. 그 정도 페이스가 딱 좋은 것 같아요." 등등. 그는 정녕 연쇄살인범, 사이코패스인가.

 

영화 속에서 그의 부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한 아이템(?)은 일단 포르쉐, 그 다음 서초의 고급 빌라다. 내 생각으론, 이 정도론 부자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은데(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부'를 유지하고 확대하느라 무척 바쁠 것이다), <버닝>의 세계에서는 이 정도로도 '순수 악' '미학적 악'을 행하기에는 충분한 토대가 된다. 비유컨대 '위대한 개츠비'가 된다. 옆의 친구들이 거지 수준으로 못 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내 주변에는 이 수준이 무척 많은데, 이들이 다 불행한 건 아니다! <버닝>의 남주, 여주가 불행한 건 '보바리 콤플렉스' 때문이다. 감히 주제에 소설가를, 감히 주제에 여배우를 꿈꾸다니!  

 

'벤'이 파괴(어쩌면 응징?)하고자 한 건, 그리하여 결국 '번burn'한 것은 그들의 그런 가증스러운, 혹은 애처로운 꿈이었으려나. 꿈 깨시라, 이것들아!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야말로 '벤'이 제일 부러워한 것이 아니었을까. "저는 해미를 사랑합니다."(?) 이런 감정, 신분상승의 욕구,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그 생명력(소설의 맨 첫 장면) 등. 그에 반해 '벤'은 만사가 다 따분하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특히 종교!^^;;) 자신을 가꾸지만 '하품'이 그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품. 스타브로긴의 하품, 그것을 살풋 감추려는 미소.  

 

맨 마지막, '종수'는 '벤'을 진짜로 죽이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 한 장면인가. 아무튼, 제법 길게 찍힌 이 장면에서 두 남주는 포르쉐 위(옆)에서 꽤 오랫동안 부둥켜 안고 있는 모양새다.(<태양은 가득히>가 연상되기도 했다.) 여주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은근히 짝패였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갖지 못한 것을 동경하니까. 또 그래본들 지금 내 자리에 대한 어떤 관성이. 집착이 있으니까.

 

이 장면 보면서 간만에 '미장센'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았다.

여주인공이 좀 없어 보이는, '성형한 된장녀-허영녀' 컨셉에 좀 안 맞게,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자연 미인(?)이라 좀 아쉬웠다.

 

 

*

 

거의 20년 전에 내놓은 <악령> 번역을 심히 고치는 작업을 하면서(분량이 엄청 줄어드는 이 마술은 뭐냐, 정말?! -_-;;) 세상에 번역만큼 하기 싫은 일이 없음을 알겠다, 에효. 재작년 겨울, <지바고> 번역 작업은 '(짝)사랑의 힘'으로 했나 보다 -_-;;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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