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에서 그냥 쉽사리, 휙 놓치고 가는 장면. 지금 고치다가, 정말 하나도 버릴 게 없구나, 도-키의 소설은, 이런 생각이 들어 가져와 본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소설에 비해, 20여년 나의 번역에는 버릴(고칠) 것이 무척 많다. 단순히 '스킬'이 부족하여 문장이 어수선한 거야 그렇다 쳐도(그 사이 나의 성장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오역이 제법 발견되어 놀랍다.(송구스럽기도 하다.)  너, 그 무렵엔 러시아어 정말 잘 하지 않았니?^^;;

 

레뱌드킨 집의 문은 닫혀 있을 뿐, 잠겨 있지는 않았고 우리는 거침없이 들어갔다. 거처라고 해 봐야 더러운 벽지 뭉치가 그야말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을린 벽에 둘러싸인, 크지 않은 역겨운 방 두 칸이 전부였다. 주인인 필립포프가 술집을 새 건물로 옮기기 전 언젠가는 여기가 몇 년 동안 술집이었다. 술집에 딸린 나머지 방들은 지금 잠겨 있고 오직 이 두 칸만 레뱌드킨의 손에 떨어졌다. 가구래야 팔걸이가 떨어진 낡아빠진 안락의자 하나를 빼면 소박한 의자들과 판자 쪽으로 만든 탁자들이 전부였다. 두 번째 방의 한 구석에는 mademoiselle 레뱌드키나의 것인 무명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었는데 대위 자신은 밤이면 옷을 입은 채 마룻바닥에 나뒹굴다시피 자기 일쑤였다. 곳곳에 부스러기, 쓰레기, 물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 방은 마룻바닥에 흠뻑 젖은 두툼하고 큰 걸레가 뒹굴고 있고 바로 그 웅덩이 속에 닳아빠진 낡은 신발짝이 빠져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난로도 떼지 않고 음식도 만들지 않는다. 샤토프가 상세히 얘기해준 대로 심지어 사모바르도 없었다. 대위가 여동생과 함께 도착했을 때 완전히 거지신세였고, 리푸틴의 말대로, 처음에는 정말로 집집마다 구걸하러 다녔다. 하지만 뜻밖에도 돈을 받게 되자 당장 술을 퍼마셨고 숫제 술에 절어 살았기 때문에 살림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mademoiselle 레뱌드키나는 두 번째 방의 구석, 판자 쪽으로 만든 식탁 앞 의자에 얌전히,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우리를 부르지도 않았고 숫제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샤토프는 원래 그들은 집 문을 잠그지 않는데 한번은 밤새도록 현관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있었노라고 말했다. 쇠 촛대 위, 희끄무레하고 가느다란 양초 불빛 아래로 나는 서른 살쯤 된 듯한 병적으로 여윈 여자를 분간해냈는데, 짙은 색의 낡은 사라사 원피스를 입고 긴 목에 아무것도 감지 않은 채 듬성듬성한 짙은 색 머리카락을 목덜미에 두 살배기 어린애의 주먹만 한 크기로 묶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즐거운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 앞의 탁자 위에는 촛대 말고도 시골풍의 작은 손거울, 낡은 카드 한 세트, 노래집 같은 다 해진 조그만 책, 벌써 두어 번 베어 먹은 독일식 하얀 빵이 놓여 있었다. mademoiselle 레뱌드키나가 얼굴에 하얗게 분칠하고 빨갛게 연지를 찍고 입술에도 뭔가를 바른 것이 눈에 띄었다. 눈썹도 시커멓게 칠해 놓았는데 원래도 가늘고 검은 눈썹이었다. 하얗게 분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좁고 높은 이마에는 세 줄의 긴 주름이 상당히 뚜렷이 그어져 있었다. 그녀가 절름발이라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이번에 우리가 가 있는 동안 그녀는 일어나는 일도, 걷는 일도 없었다. 언젠가 한창 때는 바싹 여윈 이 얼굴도 밉지 않았을 법했다. 하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회색 눈은 지금도 훌륭했다. 몽상에 잠긴 듯 진실한 무언가가 거의 기쁨에 찬 그녀의 조용한 시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카자크 채찍이며 오빠의 온갖 무자비함에 대해 모두 들은 다음이라, 나는 그녀의 미소 속에 표현된 이 조용하고 평온한 기쁨에 깜짝 놀랐다. 이상하게도, 신의 벌을 받은 이 같은 모든 존재와 함께 있을 때 흔히 느끼는 힘겹고 심지어 두려운 혐오감 대신에 나는 첫 순간부터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거의 유쾌했으며 나중에도 혐오감은커녕 애처로움에 휩싸일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문자 그대로 몇날며칠을 저렇게 혼자 꼼짝도 않고 앉아서 점을 치거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샤토프가 문지방에서 그녀를 가리켜 보였다. “그놈은 먹을 것도 주지 않아요. 가끔 곁채의 노파가 워낙 불쌍한 마음에 뭘 좀 갖다 줘요. 어떻게 촛불만 덩그러니 켜놓고 저렇게 혼자 내버려둘 수 있는지!”

놀랍게도, 샤토프는 그녀가 방 안에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안녕, 샤투시카!” mademoiselle 레뱌드키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마리야 티모페예브나, 손님을 데려왔어.”

샤토프가 말했다.

, 손님이라니, 영광이네. 당신이 데려온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어, 이런 사람은 기억 안나.” 그녀는 양초 너머에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곧 다시 샤토프 쪽을 향했다(그리고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나라는 인간은 아예 그녀 옆에 없는 양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참, 너무 불쌍하고 딱해서, 원. 이 소설에서 형편 없는 악역(-축에도 못 끼는) 레뱌드킨. 사실 그도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양, 적어도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보호, 배려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이거늘. 자기가 당한 것을 고스란히 더 약한 자에게 푸는 이 메커니즘, 너무 낯익다.

지적장애에 자폐에 지체장애(어쩌면 뇌병변)까지 있는 서른살의 노처녀 마리야는 말할 것도 없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해묵은 편견도 새삼스럽다. "신의 벌을 받은.... " "혐오감... 애처로움(동정)..."

그리고 도입부에 포착된 저 가난, 그리고 술.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런 것을 제대로 소설화하지 못해 서럽다. 물론  전혀 '시의성'이 없는 주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 역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좀 잘 써보란 말이다, 쳇.

배고프다. 움직임이 적을 때는 조금도 먹어도 됐는데 (아이 때문에) 움직임이 많아지니 많이 먹어야 한다. 총체적인 소비량의 증가. 

 

*  

 

번역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뭘 번역하냐가 중요한다. 도-키 소설을 번역하는 나는 불쌍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그를 나는 정말 좋아하나 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심지어 나와 가족을 먹여살리고 있다.) 작년에 어쩌다 그만(정녕 어쩌다?? ㅠ.ㅠ) 톨스토이 단편선(민화) 계약을 했는데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순전히 아이가 읽을 책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해야 할 법하다...ㅠ.ㅠ 어떤 일(노동)에 굳이 '명분'을 찾아야 할 때 우리는 불행해진다..ㅠ.ㅠ  걍(그냥) 하는 것이 좋다. 과연, 프로정신 약한 번역가가  행복감과 자긍심을 동시에느끼면서 번역에 몰입하려면 그 텍스트에 대해 얼마만큼의 사랑이 필요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