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의 키릴로프는 언제나 우리를 매혹했다. 보통 처음에는 스타브로긴에게 반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이 키릴로프가 제일 넘사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모방을 불허하고 반복을 불허한다. 아, 모방하고 반복하기 싶지도 않기 때문일 터이다. 돈이 있나, 힘이 있나, 직업이 있나(-있으되 일을 안 하니), 여자가 있나 등등. 한데 그가 28세의 건강한(^^;;) 청년임은 독자들이 좀처럼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지라르의 말대로, 키릴로프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비이기 때문에(골방 속 그리스도, 워너비 그리스도, 랄까) 절대적으로 선해야 한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권총 콜렉션 밖에 없어서), 선할 수밖에 없다. (앗, 아니지, 못/안 가졌다고 다 선한 건 아니다.) 집을 나가는 일도 잘 없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온다. 소설 속에서 그가 외출하는 일이 몇 번 있지? 스테판 집 한 번, 스타브로긴 결투 입회인으로 한 번, 정말 딱 그 정도인 것 같다. 죽을 때도 표트르가 그의 집을 찾아오고 거기서 자살한다.

 

이렇게 두문불출하는 그가 꿈꾸는 일은 오직 하나, 다시금 그리스도-되기이다. 벽을 기어오르는 거미한테도 기도하고 주인집 갓난 아이와도 잘 놀아주고(공놀이^^;;) 몽상으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어제 니진스키의 <감정> 일부를 강독하는데, 아침 9시에 일어났는데 아침을 12 넘어서 먹는다 -_-;; 과연 광기의 제국. 광기의 계보도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광기에도 등급이 있다.

 

 

 

 

 

 

 

 

 

 

 

 

 

다시 키릴로프. 그리하여 키릴로프는 신을 봤던가. 아니, 그의 꿈대로 자살하는 순간 (신인이 아닌) 인신이 되었던가.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썼다. 언제 책을 만들지. 습관적인 조급함은 있는데, 생산성은 예전에 비하면 형편 없다. 짜증이 날 법하지만 어쩌겠나, 할 수 없지, 우선은 번역부터 다듬고. 음, 그 다음에는 톨스토이의 소설에 관해 두 편의 논문을 쓸까 하는데, 원래 올해 목표였던 이 일이 미루어졌다. <지바고> 논문을 쓴다고, 또 운전 면허를 딴다고 그런 것인데, 가용 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다른 한편,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나의 친구가 무척 부러워진다... 이게 아이러니가 아니라서 더 슬프다.

 

키릴로프가 생각 난 건, 화,목 아침에 흥미로운 집단(?)을 보는 덕분이다. 시간표가 애매하여 아침에 한 두 시간을 학교 커피숍에서 개긴다.(갈 데 없는 나 같은 신세의 시간강사들이 많다, 언제 이런 것에 대해서도 써볼까 한다. '지방-시'만 힘든 게 아니다. '서울-시'도 힘들다.)  9시와 10 사이, 사실상 이른 아침(^^;;)이라고 해도 좋을 그 시간에 (초등생들처럼^^;;) 단둘, 혹은 삼삼오오 테이블 앞에 모여 앉는 사람들이 있다. 아, 뭘하지? 세미나? 내가 더 바보구나. 주섬주섬, 도 아니, 엄정하게, 책을 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읽는다, 기도한다. 헐, 아침 기도 모임? 그런가 보다. 아침밥 챙겨먹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은데, 저 역시 믿음의 힘인가.

 

주변에 독실한 크리스천(개신교든, 가톨릭이든)이 많다. 한데 이 믿음에 있어 이런 집단(모임, 제도, 의식 등)이 꼭 필수적인가, 하는 의문 역시 오랫동안 가져왔다. 다른 종교(가까이는 불교)도 마찬가지. 여기서도 (아이 걱정과 나란히) 이른바 사회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아무리 고립을 자처해도 '세계'는 필요한 것이다. 저 키릴로프만 해도 그렇다. 옆집 사람들(샤토프, 주인 할매)이 있고 '나'(안톤 G-v)를 비롯하여 스타브로긴과 같은 '세계'가 있다. '고립/은둔' 역시 '사회성'을 전제로 한, 그것을 염두에 둔 굉장히 적극적인 사회 활동이다. 현재 나의 작태, 나의 꼬라지가 그렇다. '왕따'를 자처하면서도 얼마나 '끼고' 싶어 하는가 말이다.

 

키릴로프가 '끼고' 싶어한 세계는 (물론 소설이니까^^;) 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러게 그는 신이 아니라 광인의 대열에 들었다. 위대한 광인. '키릴로프-교'의 신도였던 내 친구도 그런지. 에라잇, 이것도 모르겠다. 날도 춥고 짤릴까봐 너무 겁나서. 

 

палка о двух концах

문자 그대로, 끝이 두 개인 지팡이.

이렇게 그렸는데 개 뼉다귀 그림이 되었다.

의역해서, 양날의 칼.

(<죄와 벌>에서 포르피리와 라스-프의 논쟁에 많이 나옴. / <카라마조프>에도 많이 나옴.)

양쪽에 날이 서 있는 칼을 그렸는데, 눈(구멍) 없는 자리몽땅한 꽁치 그림이 되었다.

 

일해야 하는데 두 시간 반 동안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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