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펼쳤다, 도-키의 <악령>. 주지하다시피(과연 그런가?^^;;), 이 소설의 주인공 스타브로긴은 오묘하다. '주인공'임에도 사실, 무대에 세운다고 하면, 등장 횟수나 시간, 대화의 분량 같은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분신들(표트르, 샤토프, 키릴로프 등)과 거의 평등하다고 해야 할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주인공인데, 그 지위가 거의 신적-악마적이다. 그것이 생성되고 유지되기 위해 꼭 요청되는 것이 무엇이냐.

 

 

 

 

 

 

 

 

 

 

 

 

 

 

지라르의 말대로(<낭만적...>은 그의 초기 저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도-키를 거쳐 자신의 저 사유 체계로 간다), 우선은 미남이어야 한다. 그리고 부자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키릴로프는 절대적으로 선량한 인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미친 짓-이념적 자살-이 동기화되고 설득력을 얻는다.

 

심각한(심오한?!) 악은 반드시, 그 대상과의 밀도 있는 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냥 마구 사람을 찔러죽이고 등등 하는 건 짐승짓일 뿐이다. 밀도 있는 관계가 가능하려면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미모와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덧붙여, 이성을 상대로 하면(아, 요즘은 동성애도 많다!) 성적 매력 또한 갖추어야 한다. 이 역시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게 있어야 악을 행할, 그 전제 조건이 되는 관계를 맺어갈 시간이 확보된다. 진정한 악은 '먹고사는 일' 너머, 그 바깥에 존재한다. 역으로, 그래야만 또한, 진정한 악, 즉 '미학'(=무관심성)이 완성된다. 아무래도 권태가, 나아가 우수가 중요한데, 동어반복이지만, 이 역시 과잉-넘침의 산물이다.

 

"나는 돈 없어요.(가난해요.) 어머니가 부자인 거죠."(?)

이와 비슷한 얘기를 스타브로긴이 어디선가 한다. 하지만 그게 그거다. 그가 지금까지 쓴 돈(가령 샤토프와 키릴로프의 아메리카 여행 비용, 마리야 레뱌드키나에게 주는 생활비 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돈이 없어요~"라고  말하면서도 평온할 수 있는 저 드높은 자존감이야말로, 핵금수저만이 가질 수 있는, 각종 흙수저(목수저, 동수저 등)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맥락에서 모든 것이 '가면'이요 '연기'다. 말쑥한 사교계 청년의 가면, 타락한 부잣집 도련님의 가면, 난폭한 싸움꾼의 가면, 심지어 소아성애자의 저질스러운 가면까지.

 

 

 

 

 

 

 

 

 

 

 

 

 

 

<좀비>는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단순하게, 담백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필력에 감동했고, <종의 기원>은 다소 장황한 느낌을 주어 실망했다. 후자는 아마 '어머니'의 얘기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해서 그런 것 같다. 진정한 사이코패스는 말(잡생각)이 별로 많을 것 같지 않다. 성실(?)할 수록 많이 죽여야 하니까, 또 그 처리도 직접 해야 하니까.

 

*

 

<버닝>에서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을 보면서, 딱 스타브로긴을 떠올렸다. 말쑥한 외모, 중저음의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에  거의 포커페이스라고 할 만한 예의바른 표정과 그런 말투. "(굳이 등단해야 하나) 글을 쓰면 작가지." "두 달에 한 번. 그 정도 페이스가 딱 좋은 것 같아요." 등등. 그는 정녕 연쇄살인범, 사이코패스인가.

 

영화 속에서 그의 부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한 아이템(?)은 일단 포르쉐, 그 다음 서초의 고급 빌라다. 내 생각으론, 이 정도론 부자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은데(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부'를 유지하고 확대하느라 무척 바쁠 것이다), <버닝>의 세계에서는 이 정도로도 '순수 악' '미학적 악'을 행하기에는 충분한 토대가 된다. 비유컨대 '위대한 개츠비'가 된다. 옆의 친구들이 거지 수준으로 못 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내 주변에는 이 수준이 무척 많은데, 이들이 다 불행한 건 아니다! <버닝>의 남주, 여주가 불행한 건 '보바리 콤플렉스' 때문이다. 감히 주제에 소설가를, 감히 주제에 여배우를 꿈꾸다니!  

 

'벤'이 파괴(어쩌면 응징?)하고자 한 건, 그리하여 결국 '번burn'한 것은 그들의 그런 가증스러운, 혹은 애처로운 꿈이었으려나. 꿈 깨시라, 이것들아!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야말로 '벤'이 제일 부러워한 것이 아니었을까. "저는 해미를 사랑합니다."(?) 이런 감정, 신분상승의 욕구,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그 생명력(소설의 맨 첫 장면) 등. 그에 반해 '벤'은 만사가 다 따분하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특히 종교!^^;;) 자신을 가꾸지만 '하품'이 그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품. 스타브로긴의 하품, 그것을 살풋 감추려는 미소.  

 

맨 마지막, '종수'는 '벤'을 진짜로 죽이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 한 장면인가. 아무튼, 제법 길게 찍힌 이 장면에서 두 남주는 포르쉐 위(옆)에서 꽤 오랫동안 부둥켜 안고 있는 모양새다.(<태양은 가득히>가 연상되기도 했다.) 여주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은근히 짝패였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갖지 못한 것을 동경하니까. 또 그래본들 지금 내 자리에 대한 어떤 관성이. 집착이 있으니까.

 

이 장면 보면서 간만에 '미장센'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았다.

여주인공이 좀 없어 보이는, '성형한 된장녀-허영녀' 컨셉에 좀 안 맞게,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자연 미인(?)이라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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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0년 전에 내놓은 <악령> 번역을 심히 고치는 작업을 하면서(분량이 엄청 줄어드는 이 마술은 뭐냐, 정말?! -_-;;) 세상에 번역만큼 하기 싫은 일이 없음을 알겠다, 에효. 재작년 겨울, <지바고> 번역 작업은 '(짝)사랑의 힘'으로 했나 보다 -_-;;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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