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회사가 갑이라지만 관공서 앞에선 을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급조된 어제의 접대.
그리고 몇 가지 사건.

1.
안주/식사로 따지면 산낙지->연포탕->낙지수제비 순서였다.
산낙지를 못 먹는 나로선 곤혹스러운 차림이지만, 갑의 단골차림이라는 식당주인의 귀뜸에 따를 수밖에.
그런데, 꿈틀대는 산낙지를 보며 비명을 지르거나 호들갑을 떨진 않지만
슬쩍 시선을 피할 줄 아는 나였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참기름에 범벅대어 꾸물거리는 산낙지를 보고 눈을 돌리기는커녕 "정말 맛있겠다"라고 입맛을 다신 것이다.
보신탕 먹는 사람은 야만인이라며 맹렬히 공격하던 여자가
임신한 뒤 1주일에 한 번은 수육 한 접시를 혼자 먹어치우더라는 얘기는
지어졌거나 과장된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딱 그 상황이었다.
나는 정말 내 느낌이 아닐거야, 단지 배가 고파서 잠깐 착각한 걸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내 젓가락은 나의 '생각'을 무시하고 산낙지를 들어올려 입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씹지 못하고 뱉어내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지만 연포탕과 낙지수제비가 나오든말든
산낙지 접시에만 끝까지 집중한 건 나뿐인 듯 싶다.
하아, 내 속에 나와 다른 그 누가가 있다는 걸 오싹하리만치 실감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에이리언이 임신의 공포를 극대화한 영화라는 분석에 진심으로 동감했을 정도.

2.
술은 소주->소맥(맥주에 소주를 섞은 폭탄주)->소주로 이어졌다.
우리쪽 참석자 6명은 거듭된 폭탄주 순배에 끊임없이 항복 선언을 했지만 싸그리 무시되었고,
결국 남자들은 틈틈이 화장실에 가는 방법으로 술자리를 버텼다.
나는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맥주컵 가득 물을 원샷하는 것만으로 힘들었는데, 정말 남자들이 안쓰러웠다.

3.
차라리 폭탄주 문화는 그런가보다 할 수 있었다.
갑의 여직원들의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유부녀건 아니건 하나같이
우리쪽에(정확히 말하면 미혼남성에게만) 러브샷을 제안했다.
'영계'를 연호하는 그 모습이 나로선 성희롱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지만,
당하는 남자들은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진 않는 듯 했다.
(러브샷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질색했지만 그건 러브샷 때문이라기 보다 폭탄주 때문이었다.)
'친구'나 '동지'가 아닌 '남자'가 술 따라달라는 말만 해도 술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문화에 익숙한 나로선
내가 술자리와 담쌓고 지낸 사이 문화가 바뀐 건지, 그곳이 특이한 건지 알 수 없었고,
어느 쪽이든 불쾌하다고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4.
다행히 접대는 8시 30분에 끝났다.
원래 우리는 짧고 굵게 마신다는 그분들의 설명에 그나마 안도하며 귀가했는데,
오늘 아침 들어보니 처녀총각만 남아 자리가 더 이어졌다고 한다.
우리의 뺀질이 양과장이 갑의 소문난 여걸인 ***씨에게 쥐어잡혀 끌려다녔겠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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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6-2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저는 관공서 접대회식하고는 관계가 먼 곳에 있어서 생소한 분위기네요.

인터라겐 2006-06-2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참~ 그나 저나 산낙지 맛있어요..^^ 조선인님이 집착하셨을 산낙지가 먹고 싶어요..흐흐

우리나라 접대 문화는 정말 변화가 필요해요.. 무거운 몸으로 고생하셨겠어요...

Mephistopheles 2006-06-2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미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셨군요..^^
저도 아직까지는 젓가락에 통째로 돌돌 말린 건 못먹지만 토막친 건 맛있게
먹습니다..^^ 그나저나 산모는 열외가 없나봐요...??

paviana 2006-06-2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 들어가서 첨 산낙지 먹었는데 정말 맛있지 않나요? ㅎㅎ
관공서 접대회식이라..새로운 세계군요.

조선인 2006-06-2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사실 저야 접대와 거리가 먼 부서인데, 이번 프로젝트의 특징이 특징이다 보니 실무자로 참석한 거죠.
새벽별님, 정말 백호 때문에 놀랐어요. 내가 산낙지를 냠냠 맛있게 먹을 줄이야.
인터라겐님, 그래도 2차, 3차 줄구장창 이어지는 접대가 아니라 양호했다죠.
메피스토님, 저도 토막친 거였어요. 이러다 통째로도 먹을 수 있으려나?
파비아나님, 제가 의외로 입이 짧아요. 어려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지금도 안 먹어요. 그런데 단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을 맛있겠다고 집는 내 젓가락에 정말 경악했답니다.

Mephistopheles 2006-06-2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님 신고해서 포상금 받으세요...속닥속닥=3=3=3)

반딧불,, 2006-06-2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960007

어머어머 60000이 넘어갔어요.

잘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려니 해야죠. 힘드셨겠어요.


ceylontea 2006-06-2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1. 안주/식사로 따지면 산낙지->연포탕->낙지수제비 순서였다.
이부분에.. 저두요..
저두 어제 회식에서 낙지 먹었어요. 전 산낙지->낙지 무침- 연포탕->낙지전->볶음밥/칼국수 였어요..
그 중 제가 먹은 것은 산낙지 조금, 낙지 무침, 연포탕, 낙지전.. 낙지로 배불러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물론 맛있었구요.. ^^ (배불러서 밥과 국수는 먹지도 못했다는...)
문제는 그러고 탈이 나서리.. 좀 고생했어요.. 아무래도 낙지 무침이 좀 매웠던듯..

바람돌이 2006-06-2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낙지 좋아하는 백호! ^^
그나저나 저런 접대자리 힘드시겠어요. 분위기 안 맞는데 맞춰줘야 하는 회식자리 정말 싫어요. ^^

ceylontea 2006-06-2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저희는 소주만 마셨구요.. 소주 파도타기를 4번인가, 5번은 했어요.. 파도타기 중 건배 제의를 한 사람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파도타기도 있었어요.. 저야 소주잔에 물을 따라 마셨지만... 조선인님.. 맥주컵 하나 가득은 정말 고문이셨겠어요... ㅠㅠ;
3. 동감이어요.. 그런 것을 보고 있는 것 자체도 짜증이죠.. 그래도.. 저희 회사는 그런 분위기는 없어 다행이네요..--;
4.저희도 9시쯤 1차가 끝났어요.. 2차는 집으로.. 전.. 사무실 들러 집으로 갔구.. 술집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구.. 여튼.. 집으로.. ^^

(사족)전 저런 접대나 회식이 싫어 PM은 하기 싫다는...--;

sooninara 2006-06-2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들과 딸..큰아이와 둘째는 입덧도 땡기는 음식도 다르죠.
산낙지계로 입문하심을 축하^^

마태우스 2006-06-2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브샷은 진짜 웃기는 일이어요. 왜 그딴 걸 하는지 모르겠음.... 죄송합닏..

조선인 2006-06-2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비법은 있을지언정 불법은 없었다구욧!
반딧불님, 구글 여파로 이젠 방문자수 의미가 떨어진 거 같아요. 히잉.
실론티님, 러브샷이 일반적인 문화는 아닌 거죠? 안심했어요.
바람돌이님, 백호는 대체 어떤 애일까 불안해져요. 히잉.
수니나라님, 달라도 너무 달라요. 깜짝 깜짝 놀란답니다.
마태우스님, 님이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

전호인 2006-06-22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메뉴로 접대하셨네여. 낚지와 연포탕 죽이는 메뉴인 것은 자명합니다만 접대에 위치에서 이렇게 힘들어 하시는 줄은 몰랐네여. 저는 주로 접대받는 유형이라서..... 폭탄주는 접대하는 쪽에서 접대받는 쪽을 빨리 보내기(?)위해서 하는 수법(?)이져!!ㅋㅋㅋ
그것도 양주폭탄주가 아니라 소주폭탄주라면.......
암튼 우리의 술문화 바뀌어야 합니당.

기인 2006-06-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는 동생이 휴가나오면 접대(?)나 해야겠어요 ^^;

건우와 연우 2006-06-2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병아리 눈물만큼 우리도 접대란걸 해봤는데 진짜 그거 재미없어요...
그나저나 회식까지 가시느라 만만치 않으시겠군요. 선험자로 말씀드립니다. 아이구 어쩌나, 요령껏 빠지세요. 그리고 한두명 절대적인 아군도 확보하시구요. 그리고 늘 잊지말것!!! 절대 기운빠지지마세요. 화이팅!!!

조선인 2006-06-23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아, 결국은 접대를 위해 폭탄주가 발달한 거군요. 수긍이 가네요.
기인님, 넵, 동생에게 좋은 접대를. *^^*
건우와연우님, 저야 술을 못 하니까 늘 면제대상인데,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관여하는 거라 빼도 박도 못했어요.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2006-06-23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