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에 힘써야 할 때 9.11테러가 발생했다. 임산부의 소명을 망각하고 나는 그날 TV를 보며 밤을 샜고, 혹시 제4차 세계대전(3차대전=냉전)이 나는건 아닐까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임신 8개월 때 전치태반 진단을 받고 병가를 내야 하자, 모든 게 시국탓이라 여겨졌다. (원래 임산부는 호르몬의 장난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논리적 사고력이 떨어진다.)

시어머니께서는 일을 하시고, 친정어머니께서는 당뇨환자이신지라 마로를 낳은 뒤 큰맘먹고 거금을 들여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젖공장이 된 거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만 빼면 산후조리원은 천국에 가까왔다. 하지만 어느날 저녁식사 후 산모들이 마루에 모여 앉아 함께 뉴스를 본 게 화근이 되었다. 참혹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보며 산모들은 눈살을 찌푸렸고, 이제 막 젖을 뗐을법한 아기가 엄마없이 넋잃고 앉아있는 장면이 지나가자 하나둘 울기 시작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이라크나 북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자의 발언이 이어지자 산모들은 거의 패닉상태가 되어 수유실로 쫒아들어가 아기를 안고 울었다. 당연히 산후조리원은 다음날부터 뉴스시청을 '금지'했지만, 산모들은 저 핏덩이를 들고 과연 피난갈 시간과 장소가 있을까 소곤소곤 의논하곤 했다. (임산부 못지않게 산모들도 호르몬의 장난에 희생된다.)

그리고 2년 반 동안 마로가 본 뉴스는 온통 전쟁, 전쟁, 전쟁. 마로가 총놀이를 좋아하는 게 뉴스탓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기만 하다. 지난해 놀이방에서 물총을 선물받은 것 외에는(이것도 물론 광에다 숨겨놨다) 전혀 장난감 총이 없는데도, 어째 모든 물건이 마로 손에 들어가면 총이 되고 만다.

게다가 모처럼 엄마와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름휴가인데, 엄마는 애 데리고 광화문 나갈 준비에 바쁘다. 하필 휴가기간에 추가파병을 강행한 정부가 밉기만 하다. 젠장할, 원래 오늘 저녁엔 어린이대공원에 갈 예정이었는데. 불쌍한 마로, 지지리 복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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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8-0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비로그인 2004-08-0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렸을 때 인형 아닌, 로보트와 총을 갖고 놀았는데 --;;
저의 어머니께선 무슨 뉴스를 보셨길래... ;;

반딧불,, 2004-08-0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요..
그나저나..전 왜 이리 웃음이 나올까요??

아마도 엄마도 호르몬의 장난에 희생된다가 맞는 듯 합니다.

아영엄마 2004-08-0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많이 더운데.. 나라 시국도, 파병문제도 걱정이지만 솔직히 전 마로가 더 걱정됩니다.( 아이도 함께 광화문으로 나가신다는 거죠?) 마로는 사람많은 곳에 같이 다녀서 익숙해졌나요? 부디 님이나 마로 모두 건강 지키시길...

책읽는나무 2004-08-0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마로앞에선 뉴스 자제하셔야겠어요!!
설마...꼭 그래서 마로가 총을 가지고 놀았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이들은 엄마의 상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듯하더라구요!!..ㅡ.ㅡ;;

그리고 아이들 어릴때 보면요!!
여자아이들은 총이랑 칼을 가지고 놀고...남자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경우가 많더라구요....^^....또 그렇게 상반된 성으로 장난감을 즐기면 남자아이는 여동생을 보고...여자아이는 남동생을 본다고 어른들은 좋아하시더군요!!..(100% 정확하지도 않는데도 말입니다..ㅎㅎ)
참고로 민이는 현재 인형을 가지고 놉니다.....ㅡ.ㅡ;;;

저도 민이 가졌을때 9.11 테러 뉴스를 보고서 며칠을 우울증에 시달렸던 기억이 나네요!!
너무 너무 우울하더군요!!...가슴도 벌렁벌렁했구요!!
태교때문에 겨우 겨우 진정을 하고 일체 뉴스를 쳐다보질 않았지만....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는 장면에선 정말 눈물이 나오더라구요.....ㅠ.ㅠ
암튼.....임산부들과 수유하는 엄마들은 되도록 전쟁에 관한 기사는 안보는게 나을듯합니다....ㅡ.ㅡ;;;
호르몬...전쟁.....아이들이 희생되어서야 되겠습니까!!

sweetmagic 2004-08-0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희 어머니는 저를 임신하셨을 때 태몽으로 여자 임을 직감하시고 유지인(?) 인가 하는 여자 배우처럼 생긴 아이 낳게 해달라고 그분 사진을 틈나면 보셨답니다. 뭐 하나도 안 닮긴 했지만... 사회성이 좋은 아이 였으면 하고 그에 관한 태교를 받았던 막둥이도 두 누나들과 인형놀이 하고 컸습니다.......엉뚱한 소리만 늘어 놨습니다만 ...
호르몬 전쟁은 아직 아무것도 아닌 지금의 저도 두렵습니다.

starrysky 2004-08-0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정말 오늘같은 뉴스 들은 날은 이놈의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_-

진/우맘 2004-08-0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예요, 님이 뉴스를 보며 흘린 눈물 덕분에 마로는 정의롭고 심지 곧은 아이로 자랄 겁니다. 분명히요.
(연우도, 만삭의 엄마가 잠도 안 자고 밤 새 이라크 전 뉴스만 봐서인지...지금도 잠이 없다는...-.-;)

마립간 2004-08-0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태어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자라나느냐도 중요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