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3:17-19 하나님을 향한 사랑


무지개는 빛이 조금 떨어져 있는 물방울을 비출 때 나타나는 반원 모양의 일곱 줄입니다. 흔히 비가 그친 뒤 태양과 반대 방향에서 나타나는데 바깥쪽에서부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차례로 나타납니다. 무지개가 일곱 빛깔을 가졌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레노바레 운동의 설립자인 리처드 포스터 교수와 그의 제자인 게일 비비 교수는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무지개에도 각각의 색깔이 있듯이 영성에도 각각의 길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지은 [영성을 살다(IVP)]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예수님이 어떻게 신앙 생활하셨는지를 알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역할모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대명사였습니다. 아니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인을 위해 죽을 사람은 더러 있을지 몰라도 죄인을 위해 죽을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을 겁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사랑을 실천하셨으니 제자인 우리도 사랑을 실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3-45절을 통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저주 기도하지 말고 축복 기도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나님의 자녀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춰주시고 단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려주시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선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아무런 상도 없습니다. 세리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를 통해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하자 계명을 지키라고 대답하셨고 어떤 계명이냐고 구체적으로 질문하자 19절 하반 절을 통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이웃은 동료 유대인들을 가리켰지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를 통해 이방인에게까지 확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족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계명을 지켰다고 이웃을 사랑했다고 자신만만해 하자 21절을 통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과성 구호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4절 이하를 통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모세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질문하자 37-39절을 통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하셨습니다. 우리는 전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사랑과 사람을 향한 수평적인 사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없다면 막대기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한일서 4장 20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와 자매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와 자매 사랑은 사랑을 표현하는 두 날개입니다. 두 날개로 날아야 하늘을 날 수 있듯이 두 개의 조화를 이뤄야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을 통해 성령님의 은사를 설명하고 31절 전반 절을 통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의 은사는 고린도 교인들이 크게 생각하는 방언의 은사보다도 그리고 우리가 부러워하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도 더욱 큰 은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사랑의 은사를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랑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까요? 새번역으로 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뽐내지 않아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원한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친절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모든 것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바랍니다.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지 않아야 할 것 보다 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먼데 서부터가 아니라 가까이에서부터 실행해야 합니다. 사랑의 파랑새는 먼데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랑의 은사보다 능력의 은사를 갈망하자 능력의 은사보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은사는 일시적이지만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만 사랑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사보다도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성격이 모나면 싫어하듯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차갑다면 아무도 따르려 하지 않을 겁니다. 사랑이 없는 능력은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첫째, 우리가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릴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둘째,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고 그리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바라십니다.(엡3:17-19) 아는 것은 머리로가 아니라 손발로 나타납니다. 지식은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전기 코드를 플러그 인하면 전기가 흘러들어와 가전제품을 작동하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플러그 인하여 그 사랑을 공급받고 그 사랑을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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