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2:34-40 관상과 행동

우리나라 목사님들에게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일까요?’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겠습니다만 아마 주일을 거룩하고 지키고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는 교인이라는 답변이 많을 겁니다. 한국교회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못 하고를 가르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잘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칭찬할까요?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잘 했다고 교회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세상에서는 경쟁자를 잔혹하게 쓰러뜨리는 비정한 사업가였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신앙의 형식입니다. 겉모습이죠.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속을 중요시 하십니다. 신앙의 내용을 중요시 하시죠. 그렇다면 신앙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여섯 번째 시간으로 관상 그리고 행동으로서의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관상을 조용한 기도로 묵상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내면의 침묵으로 묵상보다 높은 경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저는 관상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유대교에는 여러 가지 파가 있었는데 그 중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 그 중에서도 율법을 해석하는 율법사 오늘날로 하면 신학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35절) 공동번역에는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서에는 613가지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248개는 ‘하라’는 조항이었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조항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조항’과 ‘덜 중요한 조항’을 나누는 작업을 하느라 고생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율법 중에서 가중 중요한 조항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만족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율법사는 망신을 주려고 별렀습니다. 그러나 유대와 헬라 세계에서 유명한 스승은 재치 있는 대답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37-4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613가지 율법을 2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적 차원이고, 목숨은 의지적 차원이고, 뜻은 지식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 다시 말해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교회를 나올 때도 전인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머리로 오늘이 ‘주일이구나.’ 라고 인식했고, 마음으로 ‘교회 가야 되겠네.’ 라고 결심했고, 손발로 차를 운전해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올 때도 전인적으로 행동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을 겸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이웃을 행동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도 포함되고 남도 포함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전인적으로(전 존재로) 나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골자라고(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신앙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의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세로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아들을 죽여서까지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을까요? 솔직히 저라면 제 아들을 죽여서까지 남을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9장 15절을 통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젖먹이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데 혹시 엄마가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효도하듯이 우리도 신앙이 깊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친한 사람은 자주 만나고 마음도 잘 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려면 하나님과의 영혼의 대화인 기도를 자주해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입니다. 나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방통행식의 얕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깊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런 깊은 기도가 관상이고, 관상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관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수평적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가로에 해당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해도 무한대로 용서해주시지만 이웃은 조금만 잘못하면 금방 서운해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원만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원만한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배려해 줍니다. 우리가 이웃과 원만해지려면 내가 바라는 만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이웃을 본능적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21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명절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눈에 거슬리는 동서를 핀잔하기보다 따뜻한 말로 위로해 보십시오. 시누이가 얄밉다고 삐죽거리기보다 작더라도 정성이 담긴 선물을 건네 보십시오. 사랑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겁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신앙의 형식인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속 빈 강정’과 같습니다. 맛있는 강정이 속이 비었다면 맛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지키지만 내용이 없으면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빈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더라도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떡이라도 먹을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의 내용은 있지만 형식이 없으면 좋은 물건을 포장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하는 교인이 돼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교인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형식과 내용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엮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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