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2:1-4 하나님을 체험함

우리 감리교회에는 웨슬리 신학의 4대 원리가 있습니다. 성경, 전통, 이성, 체험. 우리 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제5항은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라고 말합니다. 감리교회는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일차적인 원천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모든 영역을 다 다루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연 설명할 이차적인 원천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고 신앙을 체험하면서 구원을 확증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곱 가지 길 중에서 다섯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성을 다루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체험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신앙의 선배 중에서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사무엘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어머니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기도를 하고 얻은 아들입니다.(삼상1:11)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아마도 세 살 전후에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삼상1:24) 한나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의 시중을 들며 여호와를 섬겼습니다.(삼상3:1) 그 당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일도 드물었고, 환상을 보여주시는 일도 흔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얼른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을 부르지 않았다고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사무엘을 부르는 소리가 3 번 들렸고, 그 때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고, 엘리 제사장은 부르지 않았다고 돌려보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고 직감하고 어떻게 대답할지를 알려주었습니다.(삼상3:8-9) 하나님께서 4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이 대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삼상3:19-21)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듯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말씀하세요.' 라고 귀를 막아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라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선배 중에서 교인을 박해하던 사울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행9:1-25)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 받고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추자 그만 땅에 엎드러졌고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예수님은 사울이 행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 안수하게 하셨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각 회당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 사울은 교인을 체포하러 다메섹에 왔다가 오히려 예수님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교인들은 광주리에 태워 사울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듯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마귀의 종이었는데 ㄹ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변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전히 세상일에 얽매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하든 일을 멈추고 주님께 달려가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막1:18)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감리교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존 웨슬리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사로 지낼 만큼 우수한 인재였습니다. 웨슬리는 1735년 미국 조지아주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자 죽을까 두려워했는데 모라비안 교도들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앉자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체험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윌리암 홀랜드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다. 웨슬리는 천국에 이르는 확실한 길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1739년 브리스톨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하면서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성경의 진리는 성령님의 내적 증거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성령님을 체험해야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1990년 12월 11일 화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일주일후면 대학 학력고사가 있었습니다. 나는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낮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 강단에 흰옷을 입은 키가 큰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분에게 안수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분의 커다란 손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 교회를 잠깐 다니다가 청년 시절에 다시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체험도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잠시 흔들리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환상과 계시를 자랑합니다. 바울이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한 게 아니라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다고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에 바울도 어쩔 수 없이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은 세 개 내지 일곱 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지구의 대기권이고, 둘째 하늘은 우주이고, 셋째 하늘은 하늘들의 하늘인 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글로 옮길 수 없는 장면을 보았습니다.(고후12:1-4) 바울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나님의 말씀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지 체험을 통해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은 단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일 뿐입니다. CCC 성경공부 교재는 성경과 체험과의 관계를 기차로 묘사합니다. 옛날 기차에는 기관차와 연료차와 객차가 있었는데 성경은 기관차입니다. 기관차는 기차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합니다. 기차를 출발하게도 하고 정지하게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집니다./ 이 기차를 움직이는 연료차는 믿음입니다. 이 기차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움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신앙 생활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에너지입니다./ 객차는 우리의 신앙 체험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체험을 강조하지만 객차가 기관차를 따라가듯이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으면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체험에 의존하다 보면 신앙이 고조될 때는 열심이지만 침체될 때는 엉망이 됩니다. 일교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리기 쉽듯이 신앙의 일교차가 심하면 시험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감정은 가을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너무 감정적인 체험에 의지하지 마시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나침반을 삼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면 우리가 머리로 알았던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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