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hantomlady >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노향림,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보루라는 게 있다.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고 신념일 수도 있고 어쩌면 환상일 수도 있다. 대개 그 환상이 깨지는 순간 어린이는 어른이 된다. 철이 드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이 신을 믿지 않는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히틀러를 존경하는 중학생이 커서 운동권 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서 노사모 회원이 되고 장년이 되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되는 것..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정치인이야말로 이런 케이스가 너무 많다. 나는 그런 정치인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 상처받은 낭만주의자는 염세주의자가 된다. 시를 쓰기 위해 파리로 간 아르띄르 랭보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상이 되는 것처럼 그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태어나 한번도 남자와 손을 잡아본 적 없다는 전직 미스코리아가 부모님 잘 모시고 남편을 존경하며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빛나는 커리어를 다 버리고 결혼했는데 육 개월만에 헤어지고 돌아와 이혼녀로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것.. 나는 이 여자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미워할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보면 철없는 이모가 집에 놀러온 대학생 오빠를 사랑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산부인과에 들르는 얘기가 나오는데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영양보충을 위해 우적우적 삶은 계란을 먹을 때..

나는 철없는 어른이 철이 드는 그 통과의례가 너무 가슴 아파서 아, 이 작가는 상처받은 낭만주의자구나 그래서 하나 둘 셋 그 다음부터는 많다, 라고 그 이상의 숫자는 세기를 포기하는 염세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뒤틀린 방식으로 밖에는 소설을 쓸 수 없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경의 냉소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이해할 수는 있을 거 같았다.

어린이는 자신의 환상이 깨지면서 자아가 완성되지만 환상을 잃어버린 어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주변에서도 가끔 그런 순간들을 본다.

태어나서 한번도 혼자 영화를 본 적 없는 한 착한 남자가 쓸쓸히 영화를 보는 것, 한번도 남자친구를 먼저 차 본 적 없는 착한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고 집에 돌아와 우는 것, 한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쓸개빠진 인간이 무표정해지는 것, 그런 것들을 보면 나는 너무 슬퍼진다. 그건 아마 이 비루한 세상에서 나만큼 환상을 지키고 싶었던 인간이 없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달리 놀 사람도 없지만.. 혼자 밥도 꾸역꾸역 잘 먹고 혼자 영화도 잘 보러 다니고 혼자 여행도 훌쩍 잘 떠나지만 태어나서 여태 혼자 못했던 게 하나 있는데 혼자 술 마시는 거였다.

이상하게 집에서도 혼자 술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시고 취해서 헤롱헤롱하는 게 좋았지 인생이 슬퍼서 술을 푸고 싶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스트레스를 겪다보니 나 같이 낮짝 두꺼운 인간도 맨정신으론 견딜 수 없어서 올 해 들어 처음 혼자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3번 쯤 혼자 술을 마시러 갔나? 심지어는 집에 맥주캔을 싸들고 와서 홀짝홀짝 마시다 잠들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을 살다보니 몸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너무 느는 바람에 혼자 술 마시는 건 포기하고 요즘은 우아하게 커피나 홍차 따위를 마셔주지만 이미 내 작은 환상은 깨어졌다..

너무 슬퍼서 아무나 술 좀 사달라고 칭얼댔는데 아무도 사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는 바람에 이미 내 환상이 부서져 버린 것이다. 두둥~~~ (잘 나가다 여기서 코미디가 되는군 ^^;)

어제 저녁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꺼내고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서 열 두시 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린이날이다. 흐린 하늘을 보며 슬퍼서 명랑한 노래를 듣는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당분간은 철이 덜 들었으면 좋겠고 불의의 사고로 애어른이 되는 순간은 없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꿈과 낭만에 젖어 살게 된 어른들이 나도 한번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보겠다고 자기계발 코너에 가서 어슬렁거리는 꼴도 보고싶지 않다.

힐튼 상속녀께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철 따위는 들지 말고 공유도 세퍼트처럼 건빵선생이나 좋아하시고.. 정신 건강에 심히 안 좋은 브릿팝도 계속 들어주시고 싸이의 도토리도 꾸준히 사주시고.. 그렇게라도 살면서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환상을 잃어버리지는 말자.

대부분의 여자들은 일하기 싫으면 시집가고 싶어하던데 나는 일하기 싫으니까 오늘도 네이버 지식인에 '수녀가 되는 법'이나 뒤적이고 있다. 배수아의 말 처럼 이 치열한 약육강식의 시대에 생에 대한 별다른 의지가 없는 나 같은 인간은 도태되는 게 마땅하겠지..

그러나 과연 나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나. 내가 이 삶에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환상은 뭘까. 다른 사람들은 직업적인 야망이나 연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라도 가지고 있다지만 도대체 나는 뭘 가지고 있나 도대체 뭘 찾고 있나. 아니 내가 찾는 것들이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나는 늘 뭔가를 잃어버린 속상한 기분이다. 잠깐의 실수로 소중한 그 어떤 존재를 떠나보내고 평생 잊지 못하는 그런 상실의 상태.. 손을 쥐었다 펴본다. 아무 것도 없다. 언젠가 휴 그랜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에게도 사랑이라는 새가 잠깐 날아와 손바닥에 앉은 적이 있지만 그 행운은 금방 날아가 버렸다고.. 

오랜만에 노향림의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을 꺼내 소리를 내어 읽어본다. '깊은 우물'이라는 시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언젠가 나도 그 새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새의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잠시 내게 날아온 순간을 기억한다. 바보같이 놓쳐버렸다. 그 새가 바로 내가 찾고 있는 환상일 지도 모르는데..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나도 그 새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그대 가슴에는 두레박 줄을 아무리 풀어내려도 닿을 수 없는 미세한 슬픔이 시커먼 이무기처럼 묵어서 사는 밑바닥이 있다.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안 보이는 하늘이 후두둑 빗방울로 떨어지며 덫에 걸린 듯 퍼덕였다..                                      

                                                                                                   - 노향림 '깊은 우물' 중에서

 

나는 지금 좀 우울한가보다. 심히 감상적인 글이다 흠흠.. 여기까지 쓰고 시집의 후기를 읽는데 아, 너무 마음에 든다. 이 글도 옮겨야 겠다.

 

나는 늘 혼자다. 이 말처럼 완벽한 말을 나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고 가르쳐주는 말이기에 그렇다. 내 속에 존재하는 모든 근원적인 고독을 떠올리며 나는 이 시집을, 외로움을 깊이 앓는 독자에게 드리고 싶다.

후투티는 불길한 전조의 새라고 한다. 하지만 후투티가 나의 섬에 날아와서 갇힌 자아를 뒤흔들어 무한대로 풀어놓아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 후투티를 내 생의 행운의 새로 받아들겠다. 영원히 날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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