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유배지 답사기 - 조선의 귀양터를 찾아서
박진욱 지음 / 알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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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부패한다." - 액튼 -

 

 새삼스레 권력의 양면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권력을 쥔 사람의 정치 철학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 권력은 부패할 수도 있고 정의의 화신이 될 수도 있다.야망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되면 악이 될 소지가 많고,욕심이 없는 사람이 가지면 그 반대의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대학』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먼저 몸을 닦고 천하를 다스리라 했고,『노자』는 몸을 닦아 그 덕이 진실해진 다음에 천하를 다스리면 그 덕이 두루 미친다고 했다(修之於身 其德乃眞,修之於天下 其德乃普).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쥔 사람들은 대개 권력에 굶주린 '야망'을 가진 자들이어서 평온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었다.권력을 잡기 전과 잡은 후의 모습이 '화장실에 가기 직전과 화장실을 나온 모습'과 매우 흡사하기만 하다.

 

 조선시대에 왕이었던 군주에게 미운 털이 보였던 정객들이 받는 형벌을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그 가운데 유배형(유형)으로서 곤장을 맞고 유배형에 처해지기 마련인데 유배지는 절해고도로 가게 마련이다.식솔과 압송하는 관리가 따라 가고,유배지에서 먹고 자는 문제는 유배객의 몫이었다.유배객은 정권이 바뀐다든지 유배형의 기간을 다 채우게 되면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형벌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유배객도 있고 사약을 받아 목숨을 다하는 이도 있었다.조선시대의 유배객들은 대부분이 사색당파의 와중에서 빚어진 결과로서,주류 당파의 세력과 조종에 의해 유배살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진욱 저자와 함께 떠나는 《남해 유배지 답사기》 는 창랑한 물결,유서 깊은 유배 문화재,남해 주민들의 일상과 구수한 (남해)사투리가 정감 어리게 다가온다.저자는 《남해문견록》의 저자이면서 유배객이었던 류의양(柳義養 1718∼?)이 지은 남해 기행문을 토대로 13일 간 걷고,자전거를 타고 남해를 일주했던 결과를 여정을 따라 스케치 하고 있다.남해는 뭍인 하동과 현수교로 연결되고 섬의 모양은 어머니가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은 형상이다.

 

 하동에서 남해로 넘어 가기 직전 노량 바다가 보이면서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이했던 역사적인 현장이면서 그를 기리는 충렬사가 남아 있다.유배지를 따라 가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팔만대장경은 남해에서 만들었다는 것이다.자작나무,산벚나무,후박나무 등이 경판의 목재가 되는 나무로서 거제도,하동 포구에서 떠내려 보낸 후 소금물에 쉽게 절일 수 있는 곳으로 남해의 관음포가 적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관음포는 왜구가 조선을 침략하다 떼죽음을 당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관음포를 매립하여 악몽의 역사를 지우려 했다고도 한다.

 

 모두(冒頭)에서도 말했듯이 유배객들은 군주의 미움을 산 나머지 유배형에 처해졌는데,내막을 알고 보면 사색당파 싸움에 기인한 것이 대부분이다.조선 선조 이조전랑 임명권을 둘러 싸고 동인 김효원과 서인 심의겸이 분열하면서 사색(四色)으로 분파되어 갔던 것이다.동인은 남인과 북인,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게다가 시파와 벽파까지 생기면서 조선은 당파로 인한 분란이 끊이질 않으면서 나라마저 외세에 넘어 가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당파 싸움의 전성기는 숙종 시기 경신,기사,갑술환국에 의한 정권 교체기에 주류 이데올로기에서 밀려난 붕당의 미운 털이 박힌 자들이 유배형의 고배를 맞이했던 것이다.붕당이 요즘 말로 하자면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지는데 권력을 쥔 자와 권력에서 밀려난 자 간의 갈등과 대치,이합집산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일종의 감탄고토(甘呑苦吐)라고 할까.

 

 남해의 땅으로 유배형에 처해진 자들의 면면을 보면 기(旣) 익히 들었을 법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어떠한 이유로 남해로 떠밀려 왔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당파 싸움이 주 요인이고 유배객의 곧은 성정(性情)과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대쪽 같은 신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숙종 시기 유배객 류의양의 《남해문견록》과 박진욱 저자의 유배지 답사기는 데칼코마니와 같이 정확하게 포개지지는 않지만 흡사하게 흘러 가고 있다.남해의 땅은 개발화에서 한 발 물러난 듯한 천혜의 자연 환경과 유서 깊은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어 마음의 본향을 찾아 간 듯한 강렬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유배객이 낳은 남해 유배지의 역사,문화적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한편 고단하고 지친 심신을 달래 줄 여행지로서 남해는 전혀 손색이 없는 곳으로 각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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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
정창권 지음 / 푸른역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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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오직 사랑으로 살 자신이 있습니까?"라던 주례사의 말씀이 엊그제처럼 새롭기만 하다.물론 "네"라고 자신있게 대답을 했다.그런데 경제적,심리적,사회적 결핍 증상이 커지면서 부부관계도 예전같지만은 않게 되었다.신혼초에는 직원들끼리 회식하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마누라 보러 집에 가는 것이 최고의 낙(樂)이였는데 지금은 많이 식었다고 스스로 느낀다.마음 속으로는 '그러면 안되는데'라고 스스로 채찍을 하지만 현재 처해져 있는 입장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생각하노라면 무엇이 먼저인가 스스로 되묻는다.

 

 긴 인생에서 보면 개인은 혼자서 살아 가기에는 너무도 험난하고 고적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거친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인간은 남과 여가 만나 부부로 거듭나게 된다.부부의 연이 길든 짧든 서로 힘을 모아 인생이라는 항로를 잘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그러한 의미에서 부부가 이상적인 관계를 오래 지속하려면 (변치 않는) 서로 배려하고 존중할 것이고,대화와 소통을 열어 놓아야 할 것이고,적극적인 사랑을 표현해야 할 것이고,평등한 관계로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고,이상적인 부부관계의 지속은 물론 자식 사랑도 변치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 옛날 조선의 부부는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 갔을까.흔히 남존여비,여필종부라는 봉건적인 이미지를 상기케 하지만 지금과 같이 쉽게 혼인하고 쉽게 이혼하는 풍조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잔불로 사골을 푹 끓이듯이 진한 사랑이 은근하게 배여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부부의 연을 죽는날까지 자연스럽고 멋지게 지켜나가려 했던 부부도 있을 것이고,속칭 못잡아 먹어 안달날 정도로 서로 으르렁대면서 살아단 부부도 있었을 것이다.부부란 서로 상호보완하는 입장에서 존중과 배려의 기본 정신을 잃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시련과 역경이 찾아올지라도 이를 잘 극복하여 보다 더 나은 부부관계를 이어가지 않을까 한다.

 

 조선시대의 특별한 부부 10쌍과 가상으로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글을 엮은 《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는 참으로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부부관계는 대등하게 여기고 바깥일,집안 일을 누가 맡아야 하는 것이 아닌 공동분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농사일과 노비관리,자녀 교육 등을 놓고 어느 하나 소홀히 하기라도 하면 남편보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자칫 부부싸움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이렇게 아내의 기가 셌던 시절(15∼17세기)은 개방적인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아내의 힘이 크고 드세지면서 남편에게 손지검을 비롯한 폭력까지 휘두르면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하게 된다.이리하여 나온 것이 중국의 혼례제도를 도입하여 아내에게 재산을 주지 않고,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즉 18세기 이후로는 남존여비의 사상과 관념이 오래도록 뿌리 박혀 온 것이다.

 

 이 글은 매맞는 남편을 제외하고 10쌍의 부부들이 금슬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과거시험에 몇 번이나 낙방해도 그저 남편이 잘되기만을 고대하는 눈물겨운 아내의 내조,먼저 간  아내에게 바치는 애서문(哀逝文),방사(房事)를 통해 식지 않은 애정을 과시하는 한 부부의 얘기,아내를 먼저 보내고서도 첩(妾)을 두지 않고 죽은 아내을 내내 그리워 하는 연모의 정,학문의 방향을 놓고 해맬 대 아내가 삶의 멘토가 되어 주었다는 일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시.서.화를 비롯한 문인,학자,사대부들과 반려자인 아내의 사랑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 진실한 사랑은 영혼을 울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여성의 이름이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던 봉건적인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못지 않게 글재주,창작력이 뛰어났던 여성들도 제법 눈에 띄인다.

 

 사랑은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처음 상대를 대하는 것처럼 늘 새로운 기분,편안한 자세로 대해야 할 것이다.현실은 어렵겠지만 부부라는 연을 끊지 않고 오래 유지하려면 존경,배려,신뢰의 축을 공고히 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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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 - 구한말에서 베트남전쟁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이야기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
임기상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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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역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부화가 치밀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문명은 대중을 위한 방향으로 흘러 가는 추세이지만 한국 사회를 주름 잡고 있는 세력들은 특별하다 못해 모난 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세력들은 명목상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기치는 있되 이념과 사상과 같은 코드가 부합한 자들에 한해 밀월 여행을 즐겼던 것은 아닐까.개인의 영달과 사리사욕을 위한 일이라면 나라도 목숨도 흔쾌히 던질 것만 같았던 친일세력을 비롯하여 해방후 이승만 정권에 줄서기를 했던 세력,박정희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동지들은 친일파들로 묶여져 있다는 것은 역사 상식이 되어 버렸다.

 

 일제 강점기(36년)에는 잃어 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에 맞서 국내.외를 불문하고 한 목숨을 기꺼이 희생할 각오로 나섰건만 일신의 영달과 사리사욕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을 온갖 학대와 고문으로 일삼던 친일파 경찰관들이 해방 후에도 버젓이 한국 사회계를 이끌어 갔다.그것은 이승만 정권이 친일세력들을 단죄하지 않은 소이가 컸으며,박정희 정권도 동일선상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이러한 친일파 세력들이 오로지 개인의 입신영달을 꾀하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국가의 발전을 건설적으로 도모하려던 세력들에겐 날카로운 군화발로 짓뭉개기를 반복했다.인권의 유린 시대가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자주 드러나고 있다.말그대로 독재의 전형(典型)을 재현했던 시기였다.

 

 한국 현대사는 역사 교과서에 드러나지 않은 비화가 수두룩하다.그것은 친일세력,이승만,박정권 정권하에서 저질러졌던 비민주적이고 비인권적인 행태들이 그들에겐 치졸하기 그지 없는 치부(恥部)이기에 대중 앞에 떳떳이 공표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게 진리인 만큼 세월이 흘러도 진실은 더욱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뜻있는 사람 및 후손에 의한 당대의 사회적 비리와 부조리 등이 하나 둘씩 밝혀지게 마련이다.일제 강점기,해방후 남북이 이데올로기로 소용돌이 쳤던 시기,한국전쟁 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 매고 살았던 시절이 지나면서 과거의 잘못된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는 이제는 청산되어야 마땅하다.독립지사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과 희생을 감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국가적 처우(후손들의 생계 문제 등) 문제에 대한 실질적 실천 방안은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무엇이 선하고 악인가에 대해 냉철하게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다.단순히 정권을 유지하고 세력을 키워 나가려는 꼼수의 연속이라면 한국 사회의 앞날은 블랙홀로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렇잖아도 보수,진보로 뒤엉킨 정치 풍향계 속에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친일파로 대변되는 보수층이 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하고 있다.안타깝지만 남북이 분단된 대치상황에서 보수층은 선거철 내지 국면전환용으로 종북 및 빨갱이라는 용어를 재탕,삼탕 부르짖고 있다.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공권력'이라는 이름하에 혹세무민하고 있다.집권층이 아직도 국민을 위한 정책 만들기에 전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낡아빠진 이념 문제로 언제까지 바보로 만들려는 것인가.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 사회는 소득 불평등(빈부격차의 심화),불안정한 민주 정치,남북한 대립,중.일 양국의 영토 문제 및 군사 재무장,통합진보당 탄압 등이 한국인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사는 재미를 찾을 수가 없다.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밑에서 밥그릇을 챙겼던 수많은 친일 세력들과 그 후예들이 이 사회를 주름 잡고 있다.누구나 사회적 정의,상식을 부르짖고 있지만 특별하고 특이한 한국 사회 풍토상 언제 사회 구성원들이 웃음 웃고 사는 세상이 도래될까.

 

 뒤틀리고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바로 알고 또한 바로 잡아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이 글을 쓰게 된 임기상 저자는 일제 강점기시 애국지사들의 독립투쟁,해방 직후 좌우익 이데올로기 투쟁 및 내전,한국전쟁 후 가난을 탈출하기 위한 서민들의 피와 땀으로 가득했던 경제 개발에 관한 문제를 주요 이슈로 삼고 있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애국지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친일파들이 급부상하게 된다.이승만 정권이  친미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친일파들도 스리슬쩍 이승만 정권에 동참하면서 입신영달과 사리사욕을 채우게 된다.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인식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노무현 정권에서 『친일 인명 사전』을 펴낸 바 있다.친일파 및 그 잔당들이 한국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에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사회 풍향계가 달라지리라 생각되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 발전을 위한 실질적으로 이끌어 갈 청사진이 수립되어야 한다.또한 기득권 세력에게만 시혜가 미치지 않고 대다수 서민들에게도 기회와 희망을 안겨 주는 사회체제로 변환되었으면 한다.그렇게 해야만이 대다수 서민들이 사회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과 불신,박리(剝離)현상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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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엮음 / 채륜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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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과 유교가 국가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던 조선은 대외개방적이고 실리적인 국가 살림을 챙기려 하기 보다는 신권 및 사대부가 왕권을 조종하고 명분과 대의를 숭상하다보니 오랑캐,왜구 등 외침이 있을때마다 조선의 산하는 쑥대밭이 되고 무고한 백성들은 삶의 도탄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국가의 최고 책임자인 왕마저 신하들에게 의해 중심을 잡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참으로 무능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는 않다.왕과 신하를 중심으로 하는 국정의 개요 및 전개 그리고 대외관계에 있어 왕과 사대부,무인들이 보여 주었던 전반적인 시대 및 사회의 흐름은 고인 물과 같이 정체되어만 있었다.당시 직업의 중요성과 신분제도가 보여 주듯 조선은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체제에 젖어 있었다.조선의 왕 가운데에는 국가의 발전과 대의를 위해 개방적이고 실리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던 왕들도 있었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서는 단국대학고 동양학연구원이 2005년∼2014년까지 구한말 개화기(1876년)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신문과 잡지 등의 대중매체 자료를 바탕으로 자료집과 연구서를 바탕으로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는 조선의 전통문화가 탈각하여 새로운 조선 문화로 이식되어 과정을 잘 그려 내고 있다.조선의 근대 모습을 열 가지로 담고 있는 세 갈래로 나뉘고 있다.<욕망의 늪에 빠진 근대>,<놀이의 이중성>,<신풍속의 탄생>으로 나뉘고 있다.

 

 욕망의 늪에 빠진 근대는 세비로(일본어로 양복이라는 의미)라는 서양식 의복과 개량복이 유행을 타게 된다.미에 대한 욕망은 화장술의 유입으로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여성들의 본능을 한층 자극하였다.그런데 화장품의 경우 분(粉)가루에는 중독성 성분이 함유되어 건강을 위협했다.또한 매매춘 여성 사이에서 성병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화장품의 경우 두산기업의 창업자의 부인은 박가분(朴家粉)이라는 분을 만들어 판매하게 되었는데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이를 계기로 두산이 대기업이 되는 발판이었다고 한다.한,당,명과의 관계 속에 조선의 의관,의복도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개화를 맞으면서 조선은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된다.

 

 종교와 신앙,의례,굿 등과 깊은 관계가 있는 '놀이'는 노리개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놀리거나 조소 및 도박이나 노름을 즐기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조선은 설날,대보름,단오,추석 등 명절과 관련한 놀이가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윷놀이,쥐불놀이,그네타기,달맞이놀이,단풍놀이 등 세시풍속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다.오늘날과 같이 요란법석을 떠는 놀이가 아닌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이러한 놀이가 일제강점기에 들어 오면서 놀이의 대상이 동적인 면에서 정적인 면으로 바뀐다.상술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 했던 장난감은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제품의 질면에서 부작용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장난감의 경우에는 경성과 같은 대도회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시중에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장난감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세세하게 열거하면서 부모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끝으로 미두(米豆)라는 주식거래로 인해 일확천금을 거머쥔 반복창의 호화스러운 결혼식과 '한탕주의','한바탕 꿈'으로 끝난 그의 삶은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만 하다.

 

 부모의 욕심과 관례에 따라 조혼의 풍습이 폐해로 번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혼인방안을 모색하게 된다.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아이들(12세∼23세)의 조혼은 봉건적인 유토 전통에 기반을 둔 전근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결혼 나이도 늦춰지게 된다.족두리에서 면사포로 넘어가고 자유결혼,예배당 혼인,신혼여행이 등장하게 된다.이것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근대적 문물과 서구식 사상,제도 등이 조선의 혼례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문화로 이어나가게 된 것이다.결혼식 직후 여는 피로연은 신랑 신부를 축하하러 온 하객들에 대한 답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본의 피로연 문화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그외 창경원 야앵(夜櫻)으로 불리는 벚꽃 놀이는 일제가 조선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창경궁을 헐고 만든 인조 공원이다.1920년대 초 개장한 창경원은 1980년대 과천 대공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벚꽃 놀이의 장소로서 인기를 탔다.1923년 방정환에 의해 공포된 어린이 날,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크리스마스 행사 등은 하나의 명절로 자리잡게 되었다.(신풍속)

 

 구한말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에 불어 닥친 새로운 모양새는 삶의 질을 높이는 것도 있었지만 개인 및 사회 전반에 걸쳐 부작용을 낳게 한 것들도 꽤 있다.또한 일제라는 외세에 눌려 조선의 혼이 사라지는 쓰라림을 겪기도 했다.불과 140여 년 전 구한말 조선의 풍속들이 허물을 벗어 던지고 성충으로 탈바꿈하려는 흐름과 물결이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잘 수록되었다.단대 동양학연구원들께서 자료를 바탕으로 잘 연구.분석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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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3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 3
EBS 역사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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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역사를 학습하면서 과연 진실된 역사를 체현했다고 자부할 수가 있을까.게다가 작금 중국이 한반도 고대사를 왜곡하여 중국역사로 편입시키고,일본 역시 일제강점기를 비롯 한반도 과거사를 왜곡.날조하고 있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참된 정체성마저 느낄 수가 없는게 안타깝기만 하다.국력이 약하다 보니 고유의 역사마저 빼앗긴 것인지 아니면 국가를 이끄는 위정자들은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고 싸워 쟁취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보였는지.작금 정치동향을 보면 모두가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정작 챙겨야 할 근본적인 것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겉으로는 만기친람(萬旗親覽)하는척 하지만 자기분야가 아니어 어렵고 괜히 끼어들어 덤터기라도 쓸까봐 두려워 도망치는 위정자들이 많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지난 역사를 세밀하게 피학습자에게 일일이 주입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간의 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관이 주류가 되고 있다.공정하고 중립적인 자리에 있는 학자 및 연구진들이 편향적이고 수구적인 자세에서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가 만들어질리 만무하다.후학들이 올바로 된 역사를 어떻게 수용하고 이를 어떻게 계승해 나갈 것인가.다행히 북하우스 역사e가 속간하면서 기존의 왕과 신하,사대부,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역학관계를 고려한 천편일률적이고 비주체적인 것이 아닌 역사의 행간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좋다.특히 세상에 소금이 되어 준 무명의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어 당대의 개인부터 사회,국가,대외관계에 이르기까지 점층적으로 인식하고 깨닫는 계기가 되어 역사학습의 의미가 한층 크기만 하다.

 

 호랑이 나라로 상징되는 한반도의 지도 형상을 그린 이야기부터 조선 무예 종합교본인 무예도보통지에 이르기까지 조선 시대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싣고 있다.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추재기이와 같은 산문집 등에서 발췌한 글들을 바탕으로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이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역사채널ⓔ〉 편집진들의 이해하기 쉬우면서 계통성 있게 체계적으로 편집되어 있어 학습효과를 맛보고 흥미가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해설하고 있어 보강이 되고,역사의 행간에 숨겨져 소개가 되지 않았던 내용들이 이번 기회에 소개가 되면서 흥미와 학습이라는 토끼 두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한 내용들인데 문화유적과 같은 문물들이 외세 및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고 해방후에는 이러한 문물들이 일제의 잔재라 하여 치욕적이라는 명분에 의해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되면서 문화재를 관리하고 관장하는 측과 정부당국자는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될까.이해논리에 따른 개발이 우선이지 않았나 싶다.옛것을 잘 보존하면서 이러한 문물들을 있는 그대로 후학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된 역사학습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키워 나가면서 자긍심을 살릴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주자학에 바탕을 둔 유교와 사색당파가 오랜시간 사회체제의 근간이 되다보니 국가의 발전은 지체되고 외세에 의해 침입을 받았던 것이다.무명바지.치마,저고리,곰방대,망건과 갓,상투,비녀,유두를 내놓고 생활하던 여인네들의 생활상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다.잃다 보니 안타까운 사연 있었다.울산 울주 언양읍에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주변 댐 건설로 인해 암각화가 물속에 잠기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암각화의 주요 부분이 지워져 간다는 것이다.아직도 암각화를 보존하는 것을 둘러싸고 문화재측과 건설사측의 논리가 일치하지 않아 암각화는 날이 갈수록 침수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하나의 사연,에피소드가 마무리되면 관련 도서가 소개가 되면서 독자층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반대로 흐믓하고 든든한 사연도 있다.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을 도운 이방인들의 사연이다.호머 헐버트,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후세 다쓰지라는 인물이다.또한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만담꾼과 같이 읽은 책의 내용을 스스로 각색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구성지면서 신바람나게 들려주고 약간의 수고비를 받는 전기수(傳奇叟),그들은 낭독의 달인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세인들에게 소개되지 않아 그늘에 가려진 역사의 행간들이 자주 소개가 되리라 생각한다.기이하고 신선하고 흐믓하기도 하지만 수치스럽고 굴욕적이고 수구적이다 못해 망국을 자초한 위정자들의 꼬락서니를 보면 오늘날 정치꾼들의 행태를 읽을 수가 있고,나라의 장래마저 예측할 수가 있다.제대로 된 역사를 알아야 국가의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개인으로서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을 갖을 수가 있는 것이다.그럼으로써 사회공동체적 삶도 좁혀져 오리라 생각한다.역사는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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