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
함영이 지음 / 말글빛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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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지도자가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과거 역사 속의 여성 지도자의 뒤안길을 살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실록과 사료에 의한 것일지라도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조심스럽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접근해야 마땅하다.특히 남존여비와 같은 남성 위주의 조선시대에 여성이 국사를 일임했다는 것은 파격적인 행보로 다가올 수도 있다.조선 27대 임금 가운데 비록 여왕은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임금 곁에서 반려(伴侶)로서 정사에 대한 막후 교섭,관여,조언,정책 만들기 등은 얼마든지 가능했다.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듯 든든하고 아낌없는 부군의 신임과 격려에 힘입어 정치적 감각을 발휘했을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큰 물줄기에서 벗어나 지류(支流)에서 벌어졌던 사안들에 대해 나름 관심을 갖고 있다.이러한 참에 조선시대 최초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그 인물은 바로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였다.놀라운 것은 배운 바가 없어 까막눈에 일자무식이지만 부군 세조 곁에서 터득한 정치적 감각은 훗날 어린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정확하게 말하면 청정(聽政)의 정치를 행사했다고 본다.그 기간은 성종 즉위(1469)년부터 1476년까지 청정을 했다.어찌된 일인지 정희왕후가 청정을 할 시기엔 조선의 정정(政情)과 사회상은 비료적 평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부군 세조는 정희왕후에게 깊은 신뢰와 애정이 컸기에 그녀의 척족들에게 내린 벼슬도 정비례했던 것이다.청정에 들어가고 나올 때에 정희왕후는 늘 세조의 힘을 빌렸던 것으로 보인다.

 

 군주이며 부군이었던 세조는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시킨 장본인이며 이 사건에는 정희왕후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고,단종의 정비 정순왕후에겐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고 한다.또 하나 정희왕후에 대한 실책은 세조의 계비(繼妃)이며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여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나아가 공신과의 결탁,부패척결 미온 및 외척 관리 미흡 등이 있다.반면 그녀는 청정을 시작하면서 정치가답게 정사를 펼쳤다.군주로서 독단을 내릴 때도 있고 원상(院相)들의 수렴을 거쳐 대왕대비에게 아뢰게 하여 정책결정을 해 나갔다.국사를 훈구세력들과 자주 의논하고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고 신진세력을 키워 나가는 작전을 펼쳤다.청정 첫 행보로 민생을 살피는데 역점을 두었다.호패법폐지,경제 살리기 측면에서 양잠업 장려 등이 있다.청정을 마치고 성종이 치세하던 시절엔 경국대전이 완성되기도 했다.

 

 정희왕후는 2남 1녀를 두었다.요절한 맏이인 의경세자(懿敬世子),족질로 고생했던 예종(睿宗,14개월 치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에겐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의 저주,젊은 임금의 건강악화로 권력의 공백이 생길 염려가 있고,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저주를 온몸으로 감싸면서,이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겼다.길지 않은 기간 정치 기간 중 정희왕후의 정치력은 시험대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벼슬과 잇속을 챙기려는 공신들의 아귀다툼,부패와 비리,척족들 관리는 그녀에게 한계상황이었을 것이다.요즘말로 하면 민생 위주의 경제 살리기,과거 정권과의 화해 등을 구사하면서 밝은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세조의 정비이면서 조선시대 첫 청정을 했던 정희왕후라는 인물을 인식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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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박찬영 지음 / 리베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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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왕권 중심인 것 같으면서도 신권 및 척족,붕당 세력들이 드세었던 시대였다고 생각을 한다.조선 개국 공신 가운데 정도전과 같은 인물은 신권을 강화하면서 세를 넓혀 가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제 명에 살지를 못하고 척살당한다.나아가 명종대에 시작된 당파 싸움은 넓게 보면 현대까지 미치고 있다.붕당은 발본 색원이 안되는 권력을 갖은 자들의 본능이고 속성인가 보다.또한 왕은 유교사상에 젖어 들어 왕의 말 한마디가 법이 되고 사회체제의 근간이었기에 이를 어기고 눈에 벗어나게 되면 다양한 법률을 적용하여 유배 내지 사사시키기도 했다.조선시대 모든 왕들 면면이 보수적이고 편협된 사상과 이념에 스스로 갇혀 있었던 꼴은 아니었을까.오늘날과 같이 기술이 발달하여 첨단 장비가 있고 민주적 정치형태를 띠였다면 말도 안되는 증거 불충분,사실 왜곡 및 과장,축소는 없었으리라.

 

 조선 왕조는 27대 왕이 있었다.7명의 왕만이 적자 승계에 의해 선위(禪位)가 되고 나머지 왕들은 여러 사정에 의해 차자 및 후비가 낳은 자식,먼 척족이 왕권을 승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는 여러 모로 무능하고 예지력이 없는 임금으로 각인되고 있다.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신립이 이끄는 충주 탄금대전투가 왜군에게 대패하면서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가게 되는데 최악의 경우에는 명에 몸을 의탁하고 명군의 원조를 요청하려고 했다.수치와 유약한 임금이 아닐 수가 없다.아들 광해군을 임금으로 어쩔 수 없이 앉히게 되는데 광해군에겐 이복 동생이 있었다.나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작은 어머니꼴인 인목대비에겐 영창대군과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있었다.ㅅ선조는 삶의 황혼기에 영창대군에게 선위의 뜻이 있었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를 못한 채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라는 유훈을 남기면서 세상을 떠난다.그 뒤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강화도로 유배시켜 뜨거운 방에 감금하여 죽음을 맞게 한다.아무런 죄도 없는 어리디 어린 피줄을 잃은 인목대비와 누나 정명공주는 끌려 가다시피하는 영창대군을 보면서 자신들이 죽든  살든 광해군에 대한 복수의 염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 낳은 정명공주는 당시 나이로는 드물게 팔십 삼세까지 장수를 누렸다.어린 시절 어린 동생을 잃고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西宮)으로 폐출되면서 겪었을 암울했던 시절을 겪으면서 이복 오빠인 광해군에게 빛나는 정치를 갈구했을 것으로 보인다.그것이 바로 화정(華政)이다.정명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 화정,정명공주/신명호 지음을 통해 알게 되었다.새로운 감각으로 정명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파편적인 정명공주의 기록보다는 『계축일기』와 『연려실기술』에 나타난 정명공주의 직간접적인 언급을 바탕으로 그녀의 삶을 조명했다.그녀는 선조부터 숙종까지 6대 임금과 함께 했던 파란만장한 생애였다.다행히 서궁 유폐에서 풀려나 창덕궁으로 돌아온 정명공주는 연하의 홍주원과 백년가약을 맺는다.인목대비,정명이 유폐에서 풀려 나면서 인조는 반정의 명목이 폐모살제였지만 명.청과의 외교정책도 큰 몫을 차지했다.이후 정명은 숙종에 이르기까지 있는듯 없는듯 살아갔던 인물로 자리매김된다.그녀가 낳은 자식들이 후일 혜경궁 홍씨 가문을 탄생케 했다.

 

 

  정명이 태어나던 선조대부터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는 앞날이 불투명하기만 했다.붕당 싸움으로 사분오열되었던 조정,민심 이반 그리고 왜구의 침략과 사대교린,조공을 요구하는 명과 새롭게 탄생한 누루하치의 후금 정책은 간난신고의 조선을 더욱 힘들게 했다.게댜가 인조 반정은 이괄의 난을 불러 일으키면서 당쟁은 격랑 속으로 빠져 들면서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붕당 싸움,예송 논쟁 등 유교사상의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엊그제 포털 뉴스에서 선거시 지역 감정 조장하는 발언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해도 선거법 위반으로 금배지를 떼어 내겠다고 한다.제발 그렇게만 되었으면 좋겠다.지역 감정 역시 붕당에서 기인한 구태의연의 극치가 아닐 수가 없다.살얼음판을 살았던 정명공주가 빛나는 정치를 갈구했다면 현대 정치인은 지역 감정의 암적인 낡은 세포를 오차없이 적출해 내야 한다.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인 만큼 사람사는 세상도 진일보하기를 바란다.아울러 정명공주가 살았던 6대 임금이 재위하던 시기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접하게 되어 학습이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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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120년 만에 밝혀지는 일본 군부 개입의 진상
이종각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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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은 구한말 명성황후 서거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교과서,매체,소문 등을 통해 명성황후가 누구의 손에 살해되었는가는 안개 속과 같다.게다가 이 문제를 파고 들려는 역사 연구가가 많지 않은 것도 안타깝기만 하다.다행히 이종각 저자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하여 다방면의 사료를 수집하여 얻은 결과가 이 도서인데,읽어 가다 보니 당연 통한으로 남는 것은 강한 국가,강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명성황후가 시해되던 1895년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이었다.동학혁명,청.일전쟁은 강대국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국내에선 민란이 끊이질 않았고,대외적으로 개방의 압력을 받았던 조선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정책 실행보다는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던 못난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강화도 조약)을 맺었던 조선은 을미사변,을사늑약,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불행의 연속이었다.동학혁명이 거세어지면서 조선 조정은 청국에게 군 요청을 하게 되고,일본은 이에 질세라 청과 일전을 불사른다.결국 이것이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은 승리를 거머쥐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는다.랴오뚱 반도를 할양 받으려 했던 일본은 독.프.러 3국 간섭으로 랴오뚱 반도를 할양 받지 않는 대신 청국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다.이 시기 조선 조정은 친일파와 친러파로 분류되는데 친러파의 핵심인 명성황후였다.일본 정부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미운 오리새끼였기에 폐제(廢除)하려 치밀한 음모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청.일전쟁의 공신으로 인정 받았던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조선에 러시아를 불러 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명성황후를 제거해야 조선에서 일본이 당당하게 세력을 팽창시키면셔 조선을 병탄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대신 후임으로 조선에 공사로 온 사람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거사 전날 군부대신 안경수는 미우라 공사에게 훈련대 해산 예정을 통보하게 되니 미우라 공사 입장에서는 차질없이 거사 성공만 남은 셈이었다.그는 육군 보병 중장출신으로 명성황후 살해를 실행하기 위해 휘하 군부 요인들을 내세워 조선의 심장부를 난입했다.또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쿠데타로 위장했다.

 

 

 

 명성황후 시해 당일 경복궁 담을 넘어 명성황후 침전이 있는 건청궁까지 난입했던 자객(刺客)들은 명성황후의 거처를 수소문하면서 궁녀들을 시퍼런 칼날로 인정 사정없이 살육한다.이 자리에 궁내부대신을 먼저 발포하고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칼로 찌른 장본인이 바로 미야모토 다케타로우 소위다.미야모토는 생경한 인물인데 명성황후 살해 직후 우치다 사다쓰치 일본 영사는 명성왕후 살해 사건에 대한 뒷처리를 했던 인물이다.그는 당시 살해 사건에 대한 객관성과 신빙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일등 신민국가인 일본제국이 이웃 나라 왕후를 살해하려 했던 음모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명성황후는 건청궁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시신은 옥호루 뒷쪽 녹산(鹿山)에서 통나무에 기름을 부어 화장하고 유해를 연못에 버렸지만 후환이 두려워 다시 수습하여 녹산에 묻었다고 한다.이후 청량리 홍릉에 이장하고 고종이 승하하면서 남양주 홍유릉(후비포함)에 합장했다.그렇다면 미야모토 소위는 누구일까?

 

 

 

 

 미야모토 소위는 일본 야마구치현 평민 출신으로 동학혁명 정토(征討)에 참여했고,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연루된 소위 네 명 가운데 미야모토가 끼여 있다.일본 정부,대본영은 미야모토와 같이 계급이 낮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하수인으로 내세우고 거사가 끝나면 없었던 걸로 하려고 했던 흔적,심산이 강렬하게 다가온다.미야모토가 거사를 마치고 바로 퇴한(退韓)한 뒤 일본에 머물게 되면 그가 훗날 심경의 변화가 있어 을미사변에 관여했다고 이실직고할지도 모르기에 일본 정부는 미야모토를 타이완 헌병대로 차출시키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크다.미야모토 중위(1858∼1897)는 짧은 삶을 살았다.명성황후 거사 직후 일본 정부에 보낸 제1타전에서 일본 군부가 살해했다는 내용,그리고 우치다 영사가 올린 정식보고서,비밀사신(私信)에서 '육군소위','육군사관'을 왕후 살해범으로 단정하고 있다.그런데 일본 정부는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명단에 미야모토 다케타로우라는 인물은 없다.일본 정부 최고위층,대본영 수뇌부가 조직적.계획적으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은폐,왜곡,증거 인멸을 획책하고 있다.명성왕후 살해 사건의 주범이 이제야 밝혀져 다행이다.일본 정부는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리발을 내밀 것이낙.역사를 은폐,왜곡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암울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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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서 찾아낸 조선의 민낯 - 인물과 사료로 풀어낸 조선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
이성주 지음 / 애플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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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 시절 받은 역사 수업은 천편 일률적인 거시사에 다름없다.그것도 국가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편향한 역사 교과서 짜맞추기식이 대세였다고 되돌아 본다.즉 한국 근.현대사가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쓰여진 것들로 올바른 역사 학습과 정통성이 결여된 것이었다.왕조를 중심으로 한 편년체가 주된 내용으로 한 번 훑고 지나가면 그만인 주마간산식 역사 학습은 부정적이고 유익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한국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붐(Boom)이 매체를 통해 전파되면서 그간 알려지지 않는 인물,사료를 중심으로 논문,연구서,서적 등이 줄을 서고 있어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영국 처칠의 말처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것은 오늘날 주변국들이 과거 역사 왜곡 및 영토 분쟁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조선은 총 27명의 왕조가 명멸해 갔다.조선의 역사의 흐름을 담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등에서 조선의 역사를 남기고 있으며,개인이 엮은 다양한 역사 자료,문집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사료로써 당대의 중앙과 지방 정부,양반,중인,양인(良人) 등 계층간 사회적 신분,경제적 수입을 현대 계층과의 비교를 통해 신분,직업,수입의 변화 등을 가늠할 수도 있다.조선의 정체는 주자학에 바탕을 둔 유교 철학이 대세였다.또한 적장자 계승 원칙을 내세우면서 일반인들에게도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아이러니하게도 임금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적장자 계승을 하지 못한 비율이 꽤 크다.겨우 6인의 왕조(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밖에 없다.

 

 지난 역사 학습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면 깊고 내밀한 조선 역사의 속살을 창문 틈으로 관찰하는 것도 흥미와 학습을 거둘 수 있으리라.크고 굵직한 조선 역사와 더불어 개인사와 비화(秘話)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의 이야기를 펼쳐 낸 《조선의 민낯》은 카메라에 비친 주인공의 모습 뒤에서 표시 나지 않은 수많은 민초들의 삶의 무늬 즉 엑스트라들의 삶 그리고 조선 왕조의 주체격인 왕과 신하들이 표면화할 수 없었던 국체와 체신에 금이 가는 것들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고 있어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조선 역사의 비화를 음미할 수가 있었다.

 

 이 글은 조선 역사의 비화를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역사적 주인공,분쟁.민란의 뒷이야기,특별한 제도,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이야기를 읽다 보니 이미 알고 있는 사안도 있고 겉면만 알고 속은 몰랐던 이야기도 있었다.나아가 생경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주의를 기울이면서 상상의 안테나를 길게 뽑아 당대 상황들의 수신(受信)이 생생하게 전해 오도록 탐독했다.그러면서 지나간 역사의 물줄기가 과연 중립적이고 공정하지만은 않기에 왕조는 왕조가 갖고 있는 국체와 사상 그리고 주류 계층에 속하지 않은 계층들의 삶의 속성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견주어 보기도 했다.조선 시대는 당연 양반이 최고 계층으로 사회적,경제적으로 누리는 혜택과 보상이 꽤 크다.반면 소외 계층들은 양반 계층이 되어 가문의 명예와 경제적 혜택을 누리려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흔적들이 엿보인다.

 

 신권(臣權)이 강했던 조선 왕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궁합과 의기투합이 맞았던 왕과 신하들이 국정 과제를 두고 호흡을 맞춰 가면서 탕평과 통합을 거두고자 했던 왕이 있는가 하면 코 앞의 안위에만 급급한 무능하고 판단력이 흐리멍텅한 왕도 있었다.처세술에 능한 상소의 왕 정태화,바닥에 엎드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중국의 사관과 같이 서서 기록할 수 있게 시정 요구,독서를 위한 휴가 제도,영조의 장수 비결,조선을 사랑한 스파이 강홍립의 처신 등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뭐니뭐니 해도 조선 사회의 발전이 뒤쳐진 것은 오랜 사색 당쟁과 세도 정치,그리고 비실리적이고 무용(無用)적인 유교 사상 등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손 치더라도 어느 임금이 되었든 왕과 신하,책사 등이 권력의 역학을 균형 있게 활용할 수 있었다면 조선 사회의 발전은 진일보했을 것이다.권력의 속성과 분쟁,민초들의 가렴주구에 가까운 삶,인간 심리적 내면 세계 등을 인물과 사료를 중심으로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다시 재해석했다.이를테면 당시엔 ∼했는데,오늘날의 ∼과 같은,∼에 해당하는 식이다.아울러 역사 학습은 거시적인 면과 미시적인 면을 골고루 읽으면서 거울로 삼아 현대 및 미래의 삶에 접목 내지 교훈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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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정명공주 - 빛나는 다스림으로 혼란의 시대를 밝혀라
신명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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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 시간에 미처 접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던 부분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시선과 이목을 집중케 한다.또한 그렇게 발굴되고 소개되는 사료와 인물,사건들을 접하면서 당대 정치,사회상을 머리 속에 새롭게 그려가게 된다.역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고 객관성을 띠어야 하기에 독자인 나로서는 저자가 전하려는 바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새롭게 세상에 소개되는,베일에 가려졌던 새로운 인물 정명(貞明)공주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간과 세월을 용케 견디어 내면서 보기 드물게 83세까지 살았던 사람이다.그렇다면 정명공주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가게 되고 그를 대신하여 정사를 펼치기도 했던 광해군 사이에 왕위 계승 문제에 의혹과 균열이 생기면서 궁궐의 암투는 서서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선조는 제 1왕비 의인(懿仁)왕후가 아기를 갖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제 2왕비인 인목(仁穆)대비를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선조에겐 대비 외에 공빈(共嬪) 김씨와 인빈(仁嬪) 김씨라는 두 후궁이 있었다.19세에 왕비가 된 인목대비는 딸 정명공주와 아들 영창(永昌)대군을 낳게 된다.특히 후궁에게서 낳은 광해군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적장자 원칙에 의해 차기 왕위로 옹립하려는 분위기를 읽으면서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인목대비 제거를 시도하려 한다.선조는 52세와 55세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지만 이미 정사를 치르지 못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지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선조는 혼미한 상태에서 유교칠신에게 영창을 부탁한다.광해군은 왕으로 즉위하지만 인목대비 측근들의 세력이 커질까 우려한 나머지 먼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위리안치한다.

 

 신명호 작가가 쓴 《화정,정명공주》는 임진왜란에 의해 임금의 정전이 불타면서 정릉동 임시 행궁에서 벌어지던 왕궁의 권력 암투를 묘사하고 있다.참고로 이 글은 《계축일기》를 핵심 자료로 하고 《광해군일기》와 《추안급국안》을 보조 자료로 하여 정명공주의 인생을 살피고 있다.

 

 영창 추대 세력을 축출하는 계축옥사(1613년)가 발발하고 사건과 깊게 관련한 역모인 서양갑,김제남 등이 체포되고,인목대비,정명공주는 유릉(裕陵 의인왕후) 저주조사차 체포된다.놀라운 점은 정명과 영창이 봉작 후의 처우가 대단했다.영창을 위리안치 하면서 그가 받았던 혜택들은 광해군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되었다.광해군에게 선조는 생각하기도 싫은 왕이고 아버지였다.살아서는 권력으로 자신을 짓누르고 죽기 직전에는 유언장으로 자신을 위협했으니 인목대비 및 친혈육 및 척신들은 저주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인목대비가 대비가 된 후,선조 및 의인왕후의 지밀궁녀들을 측근으로 받게 된다.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속셈이었다.광해군이 인목대비보다 아홉살이나 많지만 대비는 어디까지나 대비인 법.허나 유릉 저주 사건이 일파만파 번지면서 인목대비 및 정명공주 측근들이 줄줄이 몰살,고문을 받고 죽게 된다.게다가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를 배신했던 공노비들까지 있었고 영창대군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인목대비에겐 누구를 믿고 살아야만 했단 말인가.정명공주만큼은 자신이 끝까지 보호하고 은둔시키기 위해 죽은 사람으로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궁궐 권력 암투로 인해 정명공주와 인목대비는 각각 서인(庶人,평민) 및 후궁으로 강등된다.인목대비가 폐서인이 되기 위한 죄목 10가지에 대한 요청과 상소는 영창대군 때보다 더 치밀하고 시간까지 길게 잡았다.이렇게 정명공주는 왕비인 어머니가 후궁으로 강등되고 자신은 폐서인이 되면서 죽는 날까지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한많은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그녀가 쓴 화정(華政 빛나게 다스려라)은 서궁 유폐 시절의 작품으로 남성적인 기상을 떠오르게 한다.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역모죄로 유폐시키면서 효보다 충을 더 강조했다.광해군 자신에게 불충을 저질렀던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했으며,그것이 민심이라고 확신했다. 1623년 야밤에 거사된 인조반정(능양군에 의해 실시)은 옥새를 서궁의 인목대비에게 올리고 도망치던 광해군은 은신처인 의원의 친척(정담수)가 광해군의 소재지를 밀고하면서 인조반정은 무혈 승리하게 된다.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극이 완성되었던 것이다.이로써 인목대비는 서궁에서 대비로,영창대군과 정명 공주는 각각 대군과 공주로 복귀했다.공주의 재산도 환급되었다.인목대비의 친정 부모 모두 신원(伸寃)되고 재산은 환급되었다.정명공주는 인조반정 당시 21세로 과년을 훨씬 넘긴 나이로 남편감은 연하인 18세 홍주원으로 노론 명문가 풍산 홍씨 출신이다.당시 정명공주의 신혼 살림집(안국동)은 궁궐처럼 거대하고 으리으리했다고 한다.이것은 인조가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를 극진히 배려했기 때문이다.정명공주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이다.흥미로운 점은 남편 홍주원의 후손들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정조 시절의 혜경궁 홍씨를 비롯하여 홍봉한,홍인한이 돈녕보첩(敦寧譜牒)에 잘 소장되어 있다.정명공주의 죽음은 《숙종실록》 16권 11년(1685년)에 기재되어 있다.생과 사의 경계에서 정명공주는 지난 시절을 어떻게 회고하면서 살아 갔을까.한 여인의 굴절된 삶과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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