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의 하루 - 여인들이 쓴 숨겨진 실록
박상진 지음 / 김영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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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 등 왕실 가족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던 임무를 맡았던 왕녀에 대한 삶은 다양하기만 하다.팔자가 센 여식,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궁궐로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나이 네, 다섯 살부터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를 궁궐에 보내 가장 밑바닥 생활부터 노비 등을 거느릴 수 있는 제조상궁에 이르기까지 직급과 임무는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설겆이,빨래하는 일부터 임금과 가장 지천에서 왕과 왕비를 보호하는 지밀상궁 그리고 그 윗선인 부제조상궁,제조상궁이 수직으로 일종의 궁녀의 서열이 매겨졌던 것이다.

 

 

이들이 궁녀가 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궁녀로 발탁되는 것이 아니었다.그 선발기준은 선조 중에 강도나 역적 등 죄 지은 자가 없어야 하고,선조나 가까운 친척 가운데 중병을 앓은 자가 없어야 하는 등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다.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유부녀는 아예 궁녀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처녀 감별법'이라는 것을 이용했는데 의녀가 앵무새의 생피를 처녀의 팔뚝에 떨어뜨려 피가 묻으면 처녀이고,안묻고 흘러내리면 처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의 유래는 삼국시대 이후부터 비롯되고 고려 말의 이곡 선생이 지은 주행기(舟行記)에 부여성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가 금강으로 떨어져 내렸다는 기록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하,은,주대부터 있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유장하다는 생각이 든다.왕실,황실을 보필하고 시중을 들 만한 대상이 어린 소녀들이 대상이 아니었을까 한다.궁녀들은 입궁 시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지위의 고하가 정해지고 위계질서가 확연했다.가장 높은 상궁부터 그 밑에 나인이 있었다.출신 계급은 중인,상민 출신으로 충원되었으며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선발을 하지 않는다든지 있는 궁녀를 감원차원에서 퇴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궁녀로 들어 오면 죽는 순간까지 궁녀로 남아야 하기에 언감생심 혼인은 생각하지도 못했다.그렇기에 과년에 이른다든지 방자(房子)와 같이 애송이 궁녀의 경우에는 외로움과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고 별감이나 왕자들과 잠자리를 하다 덜컥 아이를 갖게 되고 이것이 궁궐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게 되면 궁녀는 왕의 명령에 따라 극형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그 가운데 세종의 며느리 봉빈과 소쌍이 나눈 동성애사건은 '채홍'에서도 잘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봉건적이고 윤리적인 사회에서 그러한 행동은 용서를 받지 못한 행위였다는 생각이 든다.그런데 궁녀들은 먹고 자고 입는 문제가 궁궐에서 해결되기에 경제적인 수입은 직급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오랜 세월 궁녀로 재직하다 보면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글에 실린 대표적인 궁녀들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 많다.죽음까지 함께 한 기옥과 서향,연산군의 희생양이 된 상궁 조두대를 비롯하여 조선 최고 갑부 궁녀가 된 박상궁,신경숙작가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리진(李眞),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침방나인 출신임),명나라 출신 궁녀 굴씨,조선의 성녀 오타 주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궁녀들이 왕과 왕비,왕자 등을 지근에서 수발을 들고 보살피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이번 글을 읽으면서 궁녀의 역사,선발과정,직급,하는 일,에피소드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역사의 뒤안길로 묻힐 뻔했던 궁녀들의 삶은 비록 빛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왕조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고 이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반추하는 것도 역사 학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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