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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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이래로 수많은 위인과 성인이 존재했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현세인들에게 많은 존경심과 귀감이 되는 분들이 많은데,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잊혀져 가고 외세에 의해 수탈되는 수모를 겪는 우리의 문화재 특히 자기류,화첩,전적등을 굳건히 지켜온 절세의 수장가,전형필선생님의 일대기와 발자취,업적등을 읽어 가면서 새롭게 조명하고 한국 고유의 미를 간직하고 대대손손 그 빛을 발휘할 수 있게 우리의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관심과 애정을 갖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간송은 만석군의 아들로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되며 도일하여 와세다 법학부 3학년 재학중이던 귀국하여 우연히 춘곡선생님을 만나 뵙고 왜놈들 손에 넘어가는 서화와 전적들을 지키는 선비가 될 것을 권유받고,변호사의 꿈을 접고 한국의 보물들을 되찾아 보고 수집하는 수장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되며,위창 오세창선생님을 뵙고 우리 고유의 서화와 전적들을 수집하고 수장하는데 커다란 사사를 받게 된다.

 간송은 친부와 양부가 남긴 물경 전답 4만 마지기를 이용하여 서화,전적,도자기등에 대한 안목과 인내,정성들여 빼앗긴 유산을 찾기 위해 도일하기도 하고 불에 탈뻔한 서첩과 전적을 극적으로 구해 내는 행운도 얻는등 수장 가치가 있는 보물은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가격이 얼마가 되었든 되찾아 오고야 마는 애착심이 깊에 베어 있었던 거 같다.

 인상이 깊었던 점은 영국인 개스비는 고려시대 청자 수집가였는데,간송은 이를 전부 구입해서 되돌리려고 가격흥정으로 진땀을 뺏던 일화인데,개스비는 귀국하게 되면서 결국 조선의 품으로 보물들을 안겨 주는게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청자 20점고국의 품으로 가져 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조선 독립의 확고한 믿음 하에 자신의 호를 딴 ’간송 미술관’을 조선인 설계사에 의해 설계되고,자재는 외국에서 수입해 견고하면서도 멋진 미술관을 짓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38년 7월 완공의 기쁨을 맞이한다(보화각이라고 명명함).미술관이 완공되고 해방이 되면서 그는 교육사업(보성중학교장)과 양로원에 구제사업에도 뜻을 펼친다.

 그가 수집하고 수장한 작품 및 보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훈민정음 해례본부터 심사정,정선,혜원신윤복,조영석,추사,흥선대원군,고려청자,석탑등 실로 국보급부터 보물에 이르기까지 그가 가격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집한 한국의 미는 그의 탁월한 안목,인내,정성의 결실로 고스란히 우리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이다.그 중에 <훈민정음>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간송이 살아 계셨더라면 더 없는 기쁨을 누렸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그는 급성 신우염으로 환갑의 나이도 채우지 못했지만 봄,가을 무료로 개방 관람할 수 있는 보화각의 주역,간송을 생각하면 한국의 미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들게 된다.참 멋진 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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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품은 한국사 여섯 번째 이야기 : 지명유래 서울.호남편 지명이 품은 한국사 6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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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및 한자어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레 한자어가 나오면 무슨 뜻인지를 먼저 유추해 보게 된다.아울러 서울을 비롯하여 산간 오지의 동네에 이르기까지 그 명칭과 유래는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다.신화와 전설,인물과 비사,산과 강 등 자연과 연계하여 지어졌으리라 생각한다.초기에는 지역명,동네명 등이 순수한 한글이었다가 시대가 변천하면서 행정구역명도 대부분 한자어로 개명되었을 것이다.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주 전철을 이용하여 볼 일을 보게 된다.전철역명이 대부분 한자어이기에 아는 것은 물론이고 모르는 것들도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그 유래와 비사 등을 알아 내곤 하는데 개인적으론 지역명,동네명을 하나 둘씩 알아 가면서 우리의 지난 역사를 훑어 가는 재미와 학습적인 효과마저 있어 일석이조라고 생각한다.지하철 6호선을 타고 가다 '광흥창(廣興倉)'역을 지나치게 되었다.과연 광흥창의 유래가 무엇이고 한자의 구성은 무엇일까를 궁금해서 포털 사이트에 접속,확인해보니 조선의 행정기관으로서 태조1년에 문무벽관의 녹봉의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던 관청이고 호조 소속이었다.

 

 '타오름'출판사에서 지명이 품은 한국사시리즈를 여섯번째 내놓게 되었다.첫번째 지명유래부터 읽기 시작하다 보니 어느덧 서가에는 시리즈물로 단정하게 비치가 되어 있어 자부심까지 든다.자주는 보지 않지만 한국역사와 관련한 도서를 읽다 지명이 나오게 되면 해당지역의 도서를 꺼내어 일별하기도 하고 음미해 보기도 한다.그러면서 (당연한 얘기이지만)한국인으로서 지난 역사의 흔적과 선조들의 삶이 희미하게나마 연상된다.한국은 중국의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두문자를 사용하고 한글이 창제되었지만 오랜 기간 한자 및 한자어는 꼭 이해하고 유추하는 능력을 기르는 자세를 갖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모든 분야가 한자어(70% 이상)로 되어 있기에 당연 어린시절부터 한자를 익히고 지역유래 등은 부모가 먼저 알고 그 의미와 가치를 전달해 주는 부모교육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서울 지역의 지명은 종로구부터 서원천동,행당동,홍익동,금호동,용답동,왕십리동,사근동,송정동,성수동,도선동,미아동 등이 있으며 동작구의 지명은 한강과 연관한 나루터 그리고 서원과 슬픈 역사,설화 등을 자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나아가 관악구 지명은 양녕대군과 무학대사에 얽힌 풍수설이 인상이 깊었고 이은식저자께서 두 발로 답사를 하면서 꼼꼼하게 서술해 주고 있어 한국역사의 단면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무척이나 든든하기만 하다.조선왕조의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해야 하는 한강에는 많은 나루터가 있는데,광나루(광진),삼밭나무(삼전도),노들나루(노량진),삼개나루(마포진) 등이 있으며 사람과 물자를 건네주는 도선장(渡船場)이 있었다.한양이 한때 4대문을 중심으로 성곽과 커다란 대문이 있었기에 예전에는 경기도 고양군,00리였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때 일본에 의해 서울의 행정구역이 대폭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호남권은 주로 전라남도의 지명유래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광주광역시,담양,나주,목포,장성,영광,해남,무안,영암,광양,진도,곡성,구례,장흥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전라북도는 순창과 정읍만 단촐하게 소개하고 있어 약간 지역소개에 대한 균형과 조화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터를 잡는 데에 지세가 좋아야 하고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특히 지세에 있어서는 먼저 물길을 본 후 들판의 형세,산악의 모양 등을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아마 이것은 당시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거주지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그가 살 만한 곳으로 꼽는 곳이 평양.춘천.여주를 들고 있는데 물길과 들녘,산악의 모양이 골고루 균형을 이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흐믓한 얘기로는 가문을 더럽히지 않고 일신의 명예를 수치스럽게 않기 위해 젊은 나이에 자신을 희생하고 가시밭길을 꿋꿋이 수절하신 간아지 할머님의 장하신 지조를 높이 평가한 중종 임금은 "국가 장래를 걱정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사회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충신,호자와 열부(熱婦)를 찾아 기록에 남기고 비문에 새겨 천추에 길이 빛나도록 하라"고 예조에 명했다는 것이다.이렇게 지명유래 및 훈훈한 비사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인데 이를 사료와 기록물,구전 등을 토대로 인물과 역사의 유래를 찾아 후세들에게 교육적인 면에서 든든하기만 하다.한반도가 통일이 되어 북한의 지명유래까지 알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역사학습이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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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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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과 명예,권력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그것은 일반인부터 권력이 최정점에 있는 권력가에 이르기까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오늘날에는 정치와 재벌,법조계,언론인들이 권력을 분배식으로 야합을 하는 양태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일반인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권력의 본질이 무엇이고 권력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다.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갖음으로써 입신출세는 기본이고 부와 명예까지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지나간 한국 역사 속에서 최고권력에 있던 왕,그들은 천신(天神)과 같은 존재였고 그 측근에는 그를 보좌하고 정사의 향방을 논의하던 신하들이 있었다.정치관료였던 신하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때로는 임금의 부인 왕비,친인척들도 국사에 영향을 줄 만큼 왕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그런데 왕의 역린(逆鱗)을 거슬러 토사구팽 내지 일패도지(一敗塗地)한 신하도 있다.정치는 교과서와 같은 이론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다.삼국시대,고려,조선시대의 왕의 존재 및 위상은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었기에 일단 왕과 신하는 코드가 맞아야 하고 왕의 비위를 맞추되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간언(諫言)도 마다하지 않았다.이러한 신하는 요즘 말로는 직설적이고 까칠하다고 하여 위화감을 안겨 주기에 방출할 소지도 없지 않겠지만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복됨을 추구해야 하는 왕의 소임을 생각할 때에 간언,직언,상황판단을 잘 했던 왕이야말로 후세에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

 

 왕이 되기 위한 조건이 있을테지만 삼국시대,고려보다는 조선시대에는 왕의 장자 즉 적자(適者)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다.적자에게 커다란 흠집 이를테면 문란한 행위 및 왕의 교육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왕의 자질이 엿보이지 않을 때에는 단연 임금의 눈과 귀에 소리소문없이 그 사실과 상황이 들어 오게 마련이다.또한 권력의 파이를 노리고 시류 및 시대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들도 있었다.왕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에 귀를 열어 놓고 신료들과 현안문제 및 국사의 향방을 밀도 있게 논하고 적절한 결과물을 내놓아야 마땅한데 편협한 시각과 그릇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사회는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외세에대해서는 자존감마저 모두 주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덕일저자의 <왕과 나>는 삼국시대,고려,조선시대의 왕을 만든 주역들의 삶과 정치관,후대에 미치는 영향 등을 잘 들려 주고 있다.자신을 알아 주고 신임해 주는 신하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하지만 왕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갈 길이 달라지는 경우에는 그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다만 이상적인 경우는 왕과 신하가 동지로서 수미일관 의기투합하여 상생의 정치를 이끌어 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당대의 사회상과 왕과 신하를 둘러싼 세력들의 권력꼼수로 말미암아 그들은 온전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냉혹한 승부욕의 소유자 김유신은 헌신과 희생으로 신라를 변화시키고,신숭겸.배현경.복지겸.홍유는 충신으로 고려를 건국했으며,보기 드물게 여성의 힘으로 백제 건국을 선택하고 백제를 지탱한 소서노,역성혁명의 주역 정도전의 개혁적인 마인드와 사상,평생을 할 말 다 하면서 고종명(考終命)했던 황희,대동법과 화폐 창제의 주역 김육,전통을 지키려다 쿠데타를 맞은 천추태후,명청 교체기의 혼란기에 나라를 위해 희생되었던 강홍립,(요즘)토목.건축기술의 대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박자청,정략결혼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고 목적 없는 권력을 탐했던 인수대비(仁粹大妃),왕의 역린을 건드려 퇴각한 홍국영이 등장하고 있다.

 

 현실은 냉엄하다.하물며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왕과 신하는 관계가 좋을 때에는 한없을 것 같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일정기간의 밀애일 뿐이다.신하가 나라의 발전을 꾀하고자 할 때에는 우선 자신을 낮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진심으로 겸허한 자세로 왕을 모시고 시운을 기다려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것이다.그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적용되는 정치덕목일 것이다.왕을 만드었던 신하들의 11가지 코드를 통해 인상깊게 다가오는 점은 명분과 실리의 중간지점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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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 진옥섭의 사무치다
진옥섭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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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따라 유랑극단,어머니따라 불공을 드리고 씻김궂을 보러 따라 다니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연하다.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대 위에 알록달록 분장한 희극인들이 연기하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짙은 눈썹에 하얀 분가루를 진하게 바르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권위있는 자세로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하기도 했다.실감나게 연기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눈과 귀를 쫑긋히 하고 숨을 죽이면서 할머니와 구경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할머니 머리에는 따가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수건이 가려져 있고 배가 고프다고 하니 팥들어 간 찐빵을 사서 허기를 달래기도 하면서 유랑극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그리고 불교를 믿는 집안이라 사월 초파일에는 으례 절에 등불을 켜고 공양을 드리기도 하고 집안에 액운이 찾아 오면 유명한 무당을 찾아가 씻김궂을 벌이기도 했다.식구들의 앞날,죽은 조상의 한(恨)을 풀어주기 위해 내복을 사서 가지고 갔다.무당은 의식에 따라 접신의 예를 갖추고 식구들의 사주를 보면서 액운을 풀어 주고 조상의 한을 달래 주었다.

 

 

진도 씻김궂

 

 한국 전통예술문화이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승무,살풀이춤,태평무,판소리,궂거리 등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는 토속문화이다.백성들의 애환을 달래기도 하고 신명나는 춤과 노래로 좌중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손과 발동작,목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마다가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절제된 미가 압권이다.노래,춤,장단이 일체가 되어 풀지 못한 한을 풀어 내던 한국 고유의 샤머니즘 문화이다.이러한 춤과 소리가 어우러진 전통예술문화가 요근래에는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서구의 문화와 사상이 온천지에 만연하다 보니 자칫 사라질 염려마저 없지 않아 있다.중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지훈시인의 <승무>는 불교적 복식에 유교적 가치관을 띤 스님의 춤사위을 애절하게 다가온다.

 

 

얇은 사 하이얀 꼬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 꼬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냥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꼬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승무(僧舞)

 

 우리의 전통예술문화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진옥섭저자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의 춤꾼,소리꾼들을 찾아 다니며 춤 한 사위,소리 한 소절이라도 듣고 싶어 애간장이 탄 흔적과 발품이 가상스럽기만 하다.그 예인들의 증류수와 같은 목소리,한마리 학이 되어 사뿐사뿐 걷는 발걸음,소리의 달인이 된 득음의 경지는 두 눈을 집중시키고 마음의 깊은 골짜기까지 후려치고 만다.감탄과 감동이 절로 일어난다.저자가 만났던 예인들이 나이가 들고 질병이 찾아 오면서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바람과 이슬과 같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서글픔과 그리움을 동시에 안겨 준다.그래서 저자는 한 명이라도 더 뵙고 소리,춤의 무늬와 질감을 더 깊게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지난 시절 예인들과의 추억과 그리움,사모하는 정이 못내 아쉬어 다시 올 수 없는 시간 속을 마중 나가는 참이었다.

 

 

공옥진여사의 광대연기

 

 

 나에게는 소리와 춤으로 유명한 고(故)공옥진여사의 공연하던 기억이 선연하다.흔히 병신춤으로 널리 알려진 예인 공옥진은 신체가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의 사연을 진한 연기로 관중들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대학시절 수업을 마치고 또 다른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을 이동하던 중 공옥진여사의 <병신춤>과 그녀의 찰지며 대담하기까지 한 표정과 대사에 강의받는 것은 잊은 채 표정과 말씨를 진지하게 구경했던 시간이 새롭기만 하다.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홀로 자립을 해야 했던 공옥진여사는 <심청가>를 비롯한 살풀이춤,씻김궂까지 다재다능한 분이었다.세련되지 않은 극히 자연스럽게 촌티나는 말씨에 솔직한 표현은 좌중을 울리기에 충분하다.말년 감나무를 벗하며 홀로 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공옥진여사의 춤과 소리,연기가 그립기만 하다.

 

 소리꾼,광대,춤꾼 모두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회적 신분이 그리 높지는 않다.지금이야 직업의 귀천이 사라져서 이들에 대한 선입견과 시선은 바뀌었지만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해방직후에 활동했던 그들은 부부의 연을 끊고서라도,돈을 되지 않지만 하늘이 내려준 천부적인 '끼'를 놓치고 싶지 않아 집을 뛰쳐 나오고 세상을 방랑하면서 소리와 춤을 배우고 익히며 세상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이들은 스스로 팔자에 정해진 길이라 여겨 담대하게 이 길을 선택하고 결정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이러한 소리꾼들은 교방,예기조합,권번을 거치면서 해방후에는 국악원으로 바뀌어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다만 이들에 대한 처우가 아직은 흡족하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소리와 춤 정말 다양하기만 하다.소고춤,민살풀이춤,중고제의 쑥대머리,학춤,북춤이 있다.그리고 판소리 열 두마당을 여섯 마당을 신재효는 춘향가,심청가,적벽가,수궁가,흥부가,가루지기타령으로 정리하고 있다.판소리 명창들은 득음을 이루기 위해 깊은 산중 굴을 파고 독공을 해야만 하고 목청을 위해 생소금을 삼켜야 하는 시련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매일 나오는 각혈과 더럽고 오래된 인분도 삼켜야 하는 과정은 보통 사람은 할 수가 없는 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그들의 목표는 폭포수를 뚫고 나갈 소리를 벼리기 위한 것이었기에 아무리 가시밭길과 같은 시련의 과정일지라도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소리꾼과 북을 치는 고수가 콤비가 되어 진행하는 판소리는 언제 들어도 구성지면서 가슴 뭉클할 때가 많다.

 

 

판소리 장면

 

 

   전라도에서 소리를 동편,서편으로 나눈 것처럼 춤도 나눠보는 것이다.남녘을 동서로 나눠 호남 전체를 서편으로 영남을 동편으로 양쪽의 춤을 살피면 가정은 퍽 유효해진다.호남의 춤이 살풀이장단에 계면조라면 영남의 춤은 굿거리 장단에 우조인 것이다.기교를 위주로 한 호남에 비해 영남은 정직한 몸놀림으로 춤을 춘다.계면조가 식민지 설움을 통과하며 주류를 이뤘다는 견해에 따르면,우조는 유구하고 고풍스런 몸짓인 것이다. -본문-

 

 이렇게 춤과 소리,궂이 일제강점기,해방을 거쳐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전통의 맥을 유지해 왔다.춤판은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과 소문이 잦아 몽골,중국,동남아,유럽 등의 원정공연을 하면서 한국의 전통예술의 미를 맘껏 발휘하는 기회를 갖기도 한다. 1992년 사물놀이 팀이 발족되면서 전통 무형문화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현대적인 느낌을 살린 공연들이 시대의 흐름과 감각에 맞춰 색다른 맛과 여운을 안겨 주고 있다.끼를 살리고 팔자로 쓰여진 대로 살아가려고 했던 소리꾼,춤꾼,광대들의 신명나는 한마당,구성지면서 가슴을 저미는 감동과 열광의 도가니를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그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은 케케묵은 것이 아닌 켜켜이 묵힌 신토불이와 같은 존재요,보배로운 한국의 무형자산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이 도서와 함께 <춤과 그들/동아시아출판/유인화저>을 읽으면 더욱 우리의 전통예술의 혼과 미를 이해하면서 우리의 것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고취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http://blog.yes24.com/document/7204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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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아들,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 -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한명기.신병주.강문식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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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 주던 왕조시대가 구한말까지 죽 이어졌다.특히 조선시대 27대 왕조의 역사를 읽어 가노라면 적장자 원칙하에 맏아들에게 왕위을 물려 주는 것이 관례이고 통념으로 여겨졌다.그런데 국왕이 맏이를 차기왕으로 낙점을 하더라고 왕비,친인척,당파,조정의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변수가 생기면서 애초 국왕의 의지대로 이행할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그런데 국왕이 점찍은 왕세자가 국왕이 바라는 대로 따라 주지를 않는다든지 시절을 잘못 만나 국왕의 판단력이 흐려 주위의 의견과 주장에 휩쓸리는 경우도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왕과 아들이 나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기에 자연인이 아닌 만큼 국사의 제대로 이끌어 가면서 국리민복을 챙겨야 하는 막중한 자리이다 보니 국왕이 차기왕권을 이을 자식을 세상에 널리 반포했을지라도 시대의 흐름과 변화,분위기에 의해 국왕은 마음을 달리하여 다른 세손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게 하는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특히 조선은 개국초부터 국체를 성리학에 두고 유교를 국시로 내세우면서 모든 일처리가 경직되고 고집불통으로 보일 정도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조선이라는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왕위 계승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소용돌이를 치기도 하는 등 왕위를 놓고 지리멸렬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이 글에 나오는 다섯 명의 왕위 계승 예정자들은 각각 자신의 위치와 입장,성격과 체질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원인도 있고,당시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교린의 관계에 있었기에 인사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명의 허락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상당히 고역스러웠을 것이다.게다가 명과 청이 전쟁을 치르고 청이 이기자 청은 때를 놓칠세라 조선에 조공의 압박을 해오고 몇 차례의 호란까지 일으키면서 왕위 계승에도 빨간불이 켜졌던 것이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이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읽는 내내 흥미롭기도 하고 정치권력의 비정하기도 함을 새삼 발견할 수가 있었다.태종의 경우에는 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는 등 정사를 거뜬하게 치를 수가 있다고 태조 이성계도 그에게 신임을 했지만 이방원이 정몽주 살해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이방원의 포학하고 비도덕적인 성향으로 그를 정치적 실권에서 배제했지만 이방원은 정권야욕에 눈이 먼 나머지 그의 친형제,이복동생 그리고 조선개국의 공신 정도전마저 정적으로 몰아 숙청하고 만다.태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맏이인 양녕대군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려 하지만 그는 대신의 딸 여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아기까지 생기는 등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된다.하지만 태종은 양녕대군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면서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당근과 채찍을 내리지만 결국 양녕대군은 폐위되고 충녕대군인 세종이 왕위를 물려 받게 된다.

 

다음에 나오는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주까지 몽진을 가게 되고 한양.개경.평양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의주 행재소에서 선조를 국사를 맡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한양 이남의 국사를 임시로 맡게 하는 등 그에 대한 선조의 신임을 두터웠지만 명은 적장자의 원칙에 의해 광해군을 임금으로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영의정 유영경은 광해군이 전섭하는 것이 싫은 나머지 상소를 올리면서 선조는 광해군에 대한 태도가 돌변하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유지를 남긴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면서 전쟁의 상처를 씻고 국가의 전열을 가다듬는데 치중하지만 토목공사에 집착을 하면서 사대부,민심 모두를 잃게 되고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가깝게 하고 폐모살제(廢母殺弟)까지 저지르고 만 광해군은 결국 폐위되고 만다.이것이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맏이인 소현세자를 일찍이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분조의 임무까지 맡겼다.그러는 가운데 이웃 후금은 태조 홍타이지 체제로 들어가면서 아민을 대장으로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발생하면서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한산성을 물샐틈 없이 포위한 청군에 의해 인조는 수치스러운 삼배고구두례의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봉림대군 등 수많은 사람들이 청으로 인질로 잡혀간다.인조는 소현세자가 인질로 잡혀가고 그의 귀에는 그가 청국에 입조할 것인가,아니면 퇴위할 것인가가 들려오면서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를 못하는 한편 소현세자와의 관계는 악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소현세자는 인질로 잡혀간 지 8년 만에 귀국을 하여 아버지 인조에게 귀국인사를 하지만 쌀쌀하게 백안시한다.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학질이라는 진단을 받고 3일 만에 세상을 뜨게 되는데 그의 죽음은 의문의 독살설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임금 중에서 최장수를 누린 영조(52년)는 마흔둘에 사도세자 낳게 되는데 열 살에 왕세자로 내정하여 대리청정까지 맡기는 등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신임은 두텁기만 하다.하지만 사도세자는 착하면서 내성적인 성향을 띤 나머지 영조의 눈에는 그의 대리청정이 미덥지가 않다.제왕이 되려면 정관정요를 읽어야 하고 조강,주강,석강,야대까지 받아야 하고 부왕 영조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하면 호된 질타와 함께 그를 가르치는 사부,시강원 관료,환관까지 벌을 받아야 했기에 사도세자에겐 커다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이렇게 빡빡하고 다그치는 영조의 훈육에 사도세자는 온몸에 종기 내지 곪음이 도져 온양 온천을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아 간만에 외유를 한 셈이다.설상가상으로 사도세자는 관서지방을 외유하고 돌아온 것이 영조와의 격절된 관계가 되고 만 셈이다.게다가 사도세자와 정적이었던 노론세력(홍봉한)과 사도세자의 행실에 대한 나경언의 고변은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삶을 척결하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고 결국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의 명령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짧으면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정치권력은 비정하고 무상하기만 하다.지금이야 국민의 투표에 의해 정치지도자가 선택되고 결정되지만 왕권중심시대였던 조선에서는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왕위를 적장자에게 넘기게 되지만,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적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눈과 귀,비위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차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도 하고 피를 흘리는 혈육전쟁을 통해서라도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왕들도 있다.그들은 자신의 시각과 경험에 의해 자신과 똑같이 국사를 치뤄주기를 바라고 그러한 그릇이 되기만을 원해서인지 비운에 간 세자들은 가련하고 안타깝기만 하다.게다가 왕권중심의 사회였을지라도 왕위문제만큼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을 만큼 주변세력들의 입김과 알력이 컸다.그리고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의 전란과 조.명의 사대교린에 의한 조공과 인사권 문제까지 명과 청의 승인을 얻어내야 했고,왕위문제까지 당파의 이해간계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불투명하고 불안전한 시대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그 와중에 왕위문제로 힘들었을 세자들의 말못할 고민과 갈등,번민은 행복보다 불행했던 시간이 더 많았으리라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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