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친구와 있어도 불편할까? - 누구에게나 대인불안이 있다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조경자 옮김 / 상상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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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불안.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불안을 말한다. 남 앞에 나섰을 때 느끼는 불쾌감이라든지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신경 쓸 때 높아지는 불안함 감정을 가리킨다. '나는 왜 친구와 있어도 불편할까?'라는 제목이 궁금해 읽게 되었는데,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대인불안을 느낄 수 있겠더라. 도쿄대 출신 유명 심리학자 에노모토 히로아키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데, 본인이 대인관계에 지나치게 힘을 쏟느라 쉽게 지쳐버리는 유형이기 때문에 심리학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의 고민을 듣다보면 대부분 서툰 대인관계에 관한 것이라니 나 또한 대인관계로 고민하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시절 과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동기, 선후배들과 잘 지내는 편이었다. 명절이나 새해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메일로 인사를 했고, 그 중에 친한 친구나 언니와는 가끔씩이라도 긴 시간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선배나 친구에게 연락을 했는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하더라. 학창시절의 나는 '관계'에 너무 신경을 썼나보다. 그때까지 관계의 너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그 후로는 관계의 깊이를 중요시하게 됐다.




친구의 권유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동의하지 않는데도 남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예의를 차리느라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고 세상을 사는 게 아니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아'라거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라는 등 타인의 평가만을 걱정하는 삶이란 참으로 쓸모없다. 미움받는 것을 걱정하는 대신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는 말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된다. (94) 어떤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나를 내보일까봐 걱정하다가 불안해지는 것이 대인불안인 셈인데, 상대방의 반응을 하나하나 신경쓰는 것도 너무 머리 아플 것 같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심리인 '대인불안'에 관한 이 책은 대인불안이 어떤 심리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대인불안을 완화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극적이거나 말주변이 없는 사람도, 누구와도 신나게 수다 떨며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도 누구나 대인관계에 고민이 있을 수 있고, 대인불안을 느낄 수 있다. 눈치 보는 자신이 싫어진다면, 남의 시선을 불안해하지 않으려면, 남보다 나를 먼저 챙기기 위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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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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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유럽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학교 수업 중 커다란 사진 한 장으로 인해 가고시마행 표를 바로 예매했고, 영국을 좋아하다못해 사랑한다는 그녀. 뭔가를 하기로 결심했다면 바로 끝내버려야 하고, 남들이 많이 하는 것보다는 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걸 추구한다. 그녀의 여행 스타일이 맘에 들어서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좋았다. 다양한 곳의 여행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신 났다. 파리, 로마, 교토, 세비야, 아를, 제주 등 내가 갔던 곳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고, 브라이턴, 아이슬란드, 가고시마, 런던, 포르투 등 내가 가보지 않았던 곳에 대한 마음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동안 내 여행 추억도 스멀스멀 떠올랐다. 일단 저질러놓으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중략)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출국일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발권을 하고 비행기에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7-18) 대학교 마지막 여름 방학에 친구와 보름간 그리스 여행을 계획했다. 가족이 아닌 친구와 성인이 되어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첫 여행뿐 아니라 대부분의 여행이 그랬다. 비행기에 탈 때까지도 실감 나지 않다가 현지 공항에 도착하고서야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해왔던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결심하게 된 것도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298) 회사를 그만두고 갔던 5박 6일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 어느 게스트하우스 스탭을 만났고 짧은 대화로 나도 제주도에서 살아볼 수 있겠구나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게스트하우스 스탭도 되기 전에 비행기표부터 예매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했다. 온통 하얀 세상, 아늑한 숙소, 좋아하는 친구들, 맛있는 음식…. (257) 3개월간 스탭을 하기로 하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일하는 날은 숙소에서 여행자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 이야기를 하고, 쉬는 날은 제주 곳곳을 여행하며 보냈다. 한여름 밤, 숙소 창문으로 손톱 같은 달을 마주했을 때 지금 이 순간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영어보다는 일본어가 좀더 편해서 나홀로 첫 해외여행지는 도쿄로 정했다. 가기 전까지 걱정을 했고, 누군가와 함께이길 바라기도 했지만 혼자서 잘 다녔다. 그 후에 간사이 지방과 나가사키도 혼자 갔다. 차분한 색의 집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모든 게 정갈하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일본에 왔구나,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린다. (89) 긴 비행 끝에 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는데, 캐리어도 찾지 못한 채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숙소 입실 전에 들른 동네 작은 Bar. 비까지 내려 우울했는데,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심신을 녹일 수 있었다. 카페와 카푸치노만 존재하는 메뉴와 협소한 가게 내부는 관광객의 흥미를 끌기 쉽지 않지만, 일단 이곳에 한 번 들어오면 이탈리아 바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80) 프랑스에서 파리만 보고 가긴 아쉬워서 일정에 넣었던 도시 아를. 고흐의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을 좋아하고,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가 보고 싶어서 아를에 가자고 했다. 리에 비해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 풍경을 보면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57)




좋아하는 나라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생일을 보냈다는 그녀.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영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영국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했을지도 모른다던 남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살면서 한 번쯤 가볼 기회가 있을까. 그녀가 추천하는 여행지들을 슬며시 체크해놨다. 혹시 누군가 브라이턴에 간다면, 세븐 시스터스에 갈 계획이 없더라도 그 버스는 꼭 탔으면 좋겠다. 고작 몇 천 원의 버스비를 내고 볼 수 있는 풍경고는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중략) 마침내 그 길 끝에 마주한 거대한 흰 절벽은 말문이 막히도록 황홀했다. (27) 7년 전인가, 여행작가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수강생들 각자 여행 에피소드를 써왔는데, 그 중에 아이슬란드 이야기도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는데, 아이슬란드도 궁금해졌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비몽사몽으로 투어 버스에 올라 마주한 아이슬란드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가도 '내가 진짜 여기에 있는 게 맞긴 해?'라는 생각이 바로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곳보다 담을 수 없는 곳이 훨씬 더 아름다워 자연스레 카메라를 내려놓고 두 눈으로 담담히 마주 보게 만드는 이곳, 아이슬란드. (110)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여행은 계획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일정, 예산 등을 고민하다보면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저질러버려야 한다. 일단 비행기표를 끊어버리면 그에 맞춰서 일정도, 예산도 준비할 수밖에 없다. (128) 이 말에 동의한다. 나도 여행을 결심하면 비행기표부터 검색하고는 했다. 내가 사회초년생일 때부터 적은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했고, 부모님과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돈 쓸 일이 크게 없었다. 더군다나 여행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간다, 여행 다니는 거 보니 돈이 많구나, 이런 말들을 싫어하는 편이다. 세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평소에 먹지 않았던 식사를 하고, 거리를 나서면 어제와는 또 다른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매 순 사소한 모험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실수가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그렇게 낯선 일상이 반복되는 곳, 여행지. (71) 여행 초보자일 때는 여행 중에 잠에서 깰 때마다 신기했다. 내 집이 아닌 한국이 아닌 먼 나라에 와있다니. 혼자 하는 여행은 시작부터 특히 더 긴장했는데, 막상 여행지에 발을 디디면 어디서 용기가 나는지 열심히 돌아다녔다. 원한다면 언제든 이렇게나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산다는 건 정말 낭만적일 것이다. 매일 봐도 무뎌지거나 지겨워지지 않을 아름다움. (305) 그녀의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 책을 읽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여행에세이인데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글을 읽는데 머리가 아파오기도 한다. 어느 분야든 읽기 쉬운 글이 최고인 것 같다.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은 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어떤 의미를 지닐까. 태어나 처음 보는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과 와는 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곳의 사람들. 하지만 한 달 동안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 미래에 대한 걱정 혹은 불안을 다 접어두고 오롯이 눈앞에 현재의 것들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고, 그래서 지난 한 달 내 가득 행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겐 가장 값진 일이 아니었을까. (86)



책 표지부터 제목, 여행 사진, 그녀의 글까지 모두 좋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 때면, 낯선 일상을 찾았다. 어딘가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30대 초반까지의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여행에서도 참 많이 걸어다녔다. 그리스에서 일본에서 터키에서 둘이서 혹은 혼자서 신발이 닳도록 걸었다. 제주에 100여 일 머물면서는 올레길을 두 코스 빼고 다 걸었다. 뜨거웠던 계절에 팔다리가 까매지도록. 그래서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이 책이 좋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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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도시 이야기 - 포르투, 파리, 피렌체에 스미다
신지혜.윤성은.천수림 지음 / 하나의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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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혼여행 대신 결혼식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했다. 추운 계절이라 아래쪽에 있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가자고 했고, 루트를 짜면서 프랑스와 포르투갈도 들르기로 했다. 배낭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그랬지만, 한 달의 일정을 짜면서 무척 설렜다. 여행 중에 셀프웨딩촬영을 하기로 했고,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앉아 있을 때,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를 보았다. 우린 곧장 숙소로 가서 촬영 준비를 했고, 피렌체에서 마지막 날, 첫 촬영을 했다. 여행 두 달 전, 밀라노에서 파리 가는 야간열차를 예약했다. 그리고 며칠 후,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심란했지만, 취소/환불도 안 되고, 두 달 후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행히 파리에서는 무사했다. 뮤지엄패스를 소지하고 미술관을 마음껏 다녔다. 여행은 포루투갈 리스본에서 마무리했다. 3박 4일 머물렀던 리스본, 그곳이 아주 맘에 들어서 다음번 포르투갈 여행을 기약하며, 그때는 꼭 포르투도 가보자고 했다.

예쁘구나. 정말 예쁘구나. 게다가 포르투라는 도시가 주는 온화함과 평온함이 여행객의 긴장감과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 준다. (중략) 이래서 포르투가 좋다고 하는구나. 모든 여행지는 나름의 매력이 있고 즐거움을 주며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시간의 속도를 늦추게 만들기에 좋은 느낌으로 남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포르투갈, 포르투에 다녀온 사람들이 "그냥 좋았다"라고 이야기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19-20p)


<세 도시 이야기>는 포르투, 파리, 피렌체를 이야기한다. 영화음악을 진행하는 아나운서의 포르투 이야기, 영화 평론가의 파리 이야기, 아트저널리스트의 피렌체 이야기. 난 내가 여행했던 피렌체와 파리 이야기부터 읽느라 책을 뒤쪽부터 펼쳤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가 여행 에세이인데, <세 도시 이야기>는 여행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렌체를 이야기하며 영화, 역사, 건축, 문학, 미술에 관해서도 들려준다. 역사를 어려워하는 난 피렌체보다는 파리 이야기가 더 쉽게 읽혔다. 나도 관심 있는 분야인 미술과 영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내가 생각하는 여행 이야기에 좀더 가까웠던 것 같다. 포르투를 읽으면서는 역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눈길을 확 끄는 화려함은 없다. 확실히 정신을 앗아갈 만큼 아찔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러나 간소하고 청렴한 삶을 영위하는 전통 있는 가문의 후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포르투갈의 선입견이 그러했듯, 포르투의 첫인상이 그러했듯이 포르투의 장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고나 할까. (44p)




해발 130미터인 몽마르트르 언덕은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파리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관광지다. 눈부시게 하얀 사크레쾨르 대성당 앞으로는 언덕을 내려가는 계단이 양쪽으로 카펫처럼 쭉 뻗어 있고, 그 가운데 녹색 융단 같은 잔디밭이 깔려 있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 양식을 절충해 지었다는 우아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조금만 돌아 나가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테르트르 광장이 펼쳐진다. '화가들의 광장'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120p) 행정구역상으로는 나누어져 있으나 이 100년 된 녹색 간판의 서점(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불과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700년 된 성당이 바로 '우리 어머니' 혹은 '귀부인', 곧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를 가진 노트르담 성당이다. (141p) 파리의 노트르담은 꼭 들러야 하고 들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142p)


파리에서 처음 3일 동안은 날씨가 흐리더니 하늘이 참 맑았던 마지막 날 오후,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랐다. 화가들의 광장이라고도 불린다는, 사크레쾨르 대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테르트르 광장이 궁금하다. 미리 알았더라면, 꼭 가봤을텐데, 아쉽다. 종탑에 오르기 위해 두 번이나 찾아갔던 노트르담 대성당과 불과 200미터 떨어진 곳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있었다니, 혹시 걷다가 지나쳤으려나. 여행 전에 <세 도시 이야기>를 읽었더라면, 내 여행은 마음이 더욱 풍요로워졌을지도 모르겠다.



두말할 것 없이 파리의 미술관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곳은 오르세 미술관이다. 파리를 떠나기 전날에도 무엇을 할까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이곳에서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감상했다. 그들의 작품에는 시간을 초월해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감동을 전달하는, 내가 감히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전자가 내재해 있다. (148p) 나 같은 파리 초보 여행자에게는 루브르가 오랑주리 미술관과 퐁피두 센터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이 그들과 센강을 사이에 두고 대략 삼각형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흥미로웠다. 이 얼마나 경제적인 동선인가! (151p)


한국에서 미리 구입한 뮤지엄패스를 챙겨 들고 파리에 있는 동안 열심히 걸었다. 파리 둘째 날에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 셋째 날 저녁에 오랑주리 미술관, 마지막 날은 로댕 미술관과 퐁피두 센터. 지도를 펼쳐놓고 일정을 짜던 때가 그립다. 오르세와 루브르에는 몇 시간씩 머물면서도 시간이 모자라 아쉽기만 했다.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던 루브르는 무척이나 광대(廣大)해서 맘에 드는 몇 작품만 골라 보았다.



거대한 로마나 화려했던 밀라노, 환상적인 베니스와는 달리 피렌체는 우아하고 기품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265p) 

여행을 시작한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과 성 피에트로 대성당은 웅장했다. 파리행 열차를 타기 위해 하루 여행 했던 밀라노는 두오모 외관이 특히 화려했다. 우산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베니스였지만, 바포레토를 타고 다니며 황홀했고, 피렌체는 예쁘고 아름다웠다. 두오모 쿠폴라에서 내려다본 피렌체는 영화 속 아니, 동화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 사이에 앉아 있으면서는 박물관에 있는 느낌이었고, 우피치 미술관을 찬찬히 돌아보면서는 궁전 안에 있는 듯했다. 



피렌체의 뒷골목은 특히 더 여유로웠고, 편안했다. 피렌체는 보아야 할 미술관, 박물관, 정원, 장대한 건축이 즐비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자 갤러리니까. 하지만 골목길 안에 숨어 있는 공방이나 가게를 보지 않는다면 진짜 피렌체를 봤다고 할 수 있을까. (296p)

피렌체에서는 아니, 이탈리아 여행 내내 날씨가 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에서 웨딩촬영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베키오 다리를 배경으로,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삼각대와 리모컨이 찍어준 우리의 첫 셀프웨딩 사진은 너무도 어색하지만, 그래도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다.



<세 도시 이야기>는 피렌체와 파리 여행을 추억하며, 언젠가 가게 될지도 모르는 포르투를 떠올리며, 읽고 싶었던 책이다. 세 명의 저자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각 도시를 이야기한다. 손바닥 만한 책의 크기와 두께, 표지 디자인, 심지어 'ㅍ'으로 시작하는 세 도시의 이름까지도 맘에 든다. 오랜만에 읽은 여행 에세이라서 그럴까? 임신과 출산으로 배낭여행과는 잠시 멀어진 지금 상황에서 읽은 <세 도시 이야기>는 여행에 목마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다시금 '여행'이란 단어에 설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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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클래식한 사람 - 오래된 음악으로 오늘을 위로하는
김드리 지음 / 웨일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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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래식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임신 중에 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태교음악으로 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리뷰를 먼저 봤는데, 클래식에 좀더 마음이 끌리고, 좋아하는 곡 한두 개 정도 만들고 싶다면 꼭 읽어보라고 하더라. 출산 후, 백일까지는 아이와 붙어있느라 책 읽기가 버겁더니 4개월 지나니까 숨통이 조금 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육아 서적이 아닌 내가 읽고 싶은 첫 번째 책으로 『왠지 클래식한 사람』을 선택했다.

클래식에 관심은 있지만 아는 게 없어서 부담된다면 그냥 취향에 맞는 음악을 틀어놓고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이 음악이 왜 듣기 좋은지 내 마음에 다가가보자. 나는 여행을 갈 때도 역사적인 지식 없이 그저 예쁜 건물과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사진을 보며 그때의 감상을 돌이켜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클래식도 유럽의 어느 마을에 산책을 가듯이 만났으면 한다. 이 곡 저 곡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좀 더 머무르는 것이다. 왜 내 마음이 이 오래된 작곡가의 벤치에 머무는지, 작곡가는 이 곡을 썼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지 상상해보면서. (7p) 


목차를 보면, '왠지 클래식한 기쁨'으로 시작해 즐거움, 흥겨움, 열정, 평화, 위로, 몽환, 슬픔, 우울, 불안, 그리움, 고통, 고독, 분노, 공포, 감사 등 16가지 감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여러 감정에 얽힌 고전음악과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들려주며,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들었으면 하는 음악도 추천해준다.

<사계>는 그림으로 치면 사실적인 풍경화에 가깝다. '봄'에서는 뾰롱뾰롱 지저귀는 새소리,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봄날 한때의 천둥소리, 양치기의 춤 등을 악기의 특징을 살려 묘사했다. 마치 음표로 그림을 그리는 듯 눈앞에 봄의 풍경이 펼쳐진다. 특정 부분에서 표현한 것이 '봄의 무엇'인지 척척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이기에, 클래식 입문자에게 흥미로운 감상이 된다. (24p) 영화로도 제작된 뮤지컬 <렌트>는 음악이 대중적이고 어렵지 않아 누구나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78p) <렌트>에서 꼭 한 곡만 들어야 한다면 <Seasons Of Love>를 추천하고 싶다. (80p) 같은 음악이라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곡된 곡 자체가 주는 감성도 있지만 연주자들의 열정과 에너지에서도 큰 힘이 생긴다. 그것이 클래식을 듣는 재미이기도 하다. (84-85p)


'왠지 클래식한 기쁨'에서 모두에게 가장 친숙한 곡 <생일 축하합니다>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조금 품격 있게 즐겨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생일 축하 변주곡>을 감상해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할렐루야>를 이야기하며, 헨델과 바흐에 대해 들려 준다.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과 신랑신부 퇴장할 때, 바그너와 멘델스존의 행진곡을 사용하게 된 이야기도 한다.

바로크시대 작곡가 비발디가 만든 <사계> 중의 <봄>과 말이 필요 없는 '음악의 성인' 베토벤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봄>은 찬란한 계절에 꼭 한번 감상해볼 곡들이다. (23p)

임신 중에 참석했던 태교음악회에서 제일 처음 들었던 곡이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이었다. 비발디의 사계는 학창시절부터 익히 들어 친숙하게 느껴진다. 베토벤의 <봄>을 이야기하면서는 베토벤은 물론이고,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도 언급한다. 이 부분을 읽을 즈음,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저자의 이야기가 어렵지 않아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는 것도 처음이다.


재즈는 실제 연주하는 사람들은 참 자유로워 보이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막성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어렵기도 하다. 재즈를 들을 때 멜로디와 화음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즉흥연주를 만들어나가는지 하나하나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면 <I Got Rhythm>처럼 짧은 노래를 따라 불러보면 어떨까? 멜로디와 가사를 외우기 쉬운 데다 정박자에 들어오지 않고 뒤로 살짝살짝 밀리는 장난스러운 리듬들은,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발걸음과도 비슷하다. (60p)

왠지 클래식한 흥겨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조금 어려웠다. 조지 거슈윈, 카텐버그, 오펜바흐 등 내게는 생소한 이름의 작곡가들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저자의 생생한 설명 덕분에 글만 읽었는데도 음악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아침의 기분>은 페르귄트가 세계를 모험하던 중 모로코에 당도했을 때의 설레면서도 비장한 마음을 나타낸 곡이다. 처음에는 플루트의 가느다랗고 신비로운 선율로 시작한다.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기 직전인 듯한 고요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멜로디가 참 오묘하다. 우리나라의 대금이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인도의 피리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104p) 평화로운 하루, 아니 평화로운 한 해를 기원하며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이 곡을 들으며 에너지를 충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105p)

어릴 적에 방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대금 연습을 하시던 아빠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는 생소한 악기인 대금, 그 소리는 지금 생각해보면 평화로웠다. 그 당시의 아빠는 회사일에 지쳐 심신을 달래기 위해 대금을 연주하셨던 게 아닐까?


또 그는 다른 음악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변형해 연주하거나 편곡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주인공은 <흑건>을 연주하다가 뒷부분을 '백건'으로 바꾸어버린다. 쇼팽의 왈츠를 연주하다가도 꾸밈음들을 섞어 넣으며 재치를 발휘하기도 하니, 쇼팽이 보면 질겁을 할지도 모른다. (83p) 그런데 이러한 멘델스존과 <무언가>가 조금 유명해진 기회가 있었다. 영화 <원스> 때문이다. 무명의 뮤지션과 거리에서 꽃을 파는 여인이 음악을 통해 서로 이끌리는 내용의 영화인데, 여주인공이 악기점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이 멘델스존의 <무언가> 중 <베네치아의 뱃노래>이다. (중략) 영화에 나온 곡은 작품번호 30번에 해당하는 뱃노래로, 강물에 달빛이 비치는 어두움이 내린 베네치아가 그려지는 음악이다. (274p)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 속 에피소드를 들려주니 더 집중해서 읽게 되고, 쉽게 읽힌다. 덕분에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원스>를 음악에 집중하며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책 속 장소로 여행을 가는 것처럼 영화 속 음악을 들어보는 것도 두근거리는 일인 것 같다.


이들의 음악은 공통적으로 마치 스칸디나비아산맥 같은 압도적인 힘이 있다. 칼날 같은 바람처럼 거침이 없기도 한데, 깊은 호수처럼 울림이 풍성하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개성이 살아 있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광활한 대자연이라면, 그리그의 음악은 광활함 안에서도 가끔 종달새들이 찾아와 노래를 하는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닐센은 널리 알려진 작곡가는 아니지만, 모더니즘과 결합하여 많은 음악적 시도를 했던 만큼 약간의 난해함으로 인해 점차 변덕을 부리는 날씨 같다. (103p) 라벨의 <물의 유희>는 수만 개의 물방울이 무지개와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은 신비한 느낌의 작품 (110p)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라벨의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하얀 눈밭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 같은 음악이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112p) 이 곡만큼은 정말 모든 생각을 비우고 들어보길 권하고 싶다. 비우고 들으면 따뜻함과 평화로움이 채워지는 음악이다. (113p) 구노의 <아베마리아>를 처음 들었을 때 '어, 이거 바흐 곡인데?'라고 느낀다면 정답이다. (중략) 바흐 전주곡의 깨끗한 화성 위에 흐르는 구노의 우아한 선율은 세기의 콜라보가 아닐까 싶다. (125p) 모차르트의 <레퀴엠> : 처음에는 비통하고 엄숙하게 시작하지만 합창을 통해 점차 따뜻한 화음으로 감싸준다. 누군가가 햇빛이 쏟아지는 곳의 문을 열어주며 손을 잡아주는 느낌이다. (129p) 드보르자크 <신세계교향곡 2악장> : 매일 떠오르는 붉은 태양과는 다른, 하얀색의 빛이 끝없이 쏟아지면서 감싸주는 느낌이 드는 곡이다. (133p)

 『왠지 클래식한 사람』을 읽는 동안 음악을 표현하는 저자의 글솜씨가 눈길을 끌었다. 멜로디처럼 예쁜 말로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는 따뜻한 연애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음악을 들어보고 싶게 만든다.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도 인상깊게 보았고, 박민규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궁금해졌다.


바흐는 평생 1,000곡이 넘는 곡을 쓰면서 일개미처럼 음악을 했다.교회음악, 기악음악, 성악음악 가리지 않고 오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의 기초를 제공하며 마치 음악백과사전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진다.그래서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생겼을 것이다. (108p) 슈베르트의 작품은 그의 대표작인 <미완성 교향곡>처럼 뭔가 채워지지 않은 풋풋함이 있다. 기교적으로 화려하거나 멋을 부린 느낌은 없는데, 단순한 멜로디 자체가 매우 음악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타고난 소울'이 풍부한 사람이랄까. 그래서 슈베르트를 참 좋아한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600여 곡의 가곡을 남겨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데, 가곡뿐만 아니라 기악곡에서도 멜로디를 너무 잘 썼다. 그의 멜로디는 과하지도 않고 뻔하지도 않아서 계속해서 듣고 싶고, 슈베르트라는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277p)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고만 외웠지,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아니면 수업시간에 배웠는데, 기억을 못하는 걸까? 바흐나 슈베르트뿐만 아니라 들어본 적 있는 작곡가에 관한 이야기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고, 처음 듣는 작곡가의 이야기도 흥미로운 에피소드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예컨대 '쇼팽 전주곡 1번을 들을게요!' 하면 전주곡 1번이 흘러 나오고 끝나는데,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을게요!' 하면 1악장이 연주되고, 차례로 2악장과 3악장이 나온다. (중략) 어울리는 맛이 조합되면서 디저트까지 즐길 수 있는 코스요리와 같다.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등이 대표적인 '다악장' 형식의 곡이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각각의 악장이 다른 빠르기와 분위기로 표현된다. 1악장부터 피날레까지 이어지면 마치 하나의 건축물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이 전해진다. (136p) 교향곡이든 협주곡이든 다악장 형식의 경우 2악장은 느린 악장이다. (137p)

학창시절에 음악시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던 시간을 제외하고, 노래 부르기나 악기 다루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음악 실기시험이 있는 날은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음악 시간에 배웠던 이론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서 그런지  『왠지 클래식한 사람』을 읽으면서는 이론적인 내용도 귀에 잘 들어온다.


바이올린은 현악기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지만, 그만큼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것이 매우 힘든 악기이다. 고음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소리를 자랑하는 악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이올린 솔로곡 중에서 낮은 음을 내면서 참 편안하게 조곤조곤 얘기를 해주는 곡이 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이다. (106-107p) 
2악장에서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의 화음에 실려 점차 고조되는 부분은 정말 감동적이다. 시벨리우스의 곡들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잘 어울린다. 쓸쓸한 계절에,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나의 어두움을 보고 싶을 때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다. (138p)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 가장 먼저 매료시키는 플루트의 선율은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 같다. 목관악기인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점차 가세하며 함께 색깔이 섞이다가 하프가 등장한다.이 분위기에 하프까지 나오면, 말 다했다.나른한 봄날, 몽상에 빠져들기 딱 좋은 음악이다. (149p) 드뷔시의 음악을 들으면 멜로디나 화성이 뻔하지가 않아서 '와, 어떻게 이 멜로디에서 이 멜로디로 이어지지?' 감탄을 계속하게 된다. (150p)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지금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4곡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에 항상 빠지지 않는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1악장이 끝나고 이어지는 2악장의 아름다운 선율은 들을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328p)

음악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가 쉬운 문체 때문인 것 같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들려 준다. 저자가 음악을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상황에 들으면 좋은지 하나하나 소개해주니 어렵지 않다.


우울한 음악이 필요할 때, 모차르트의 단조 소나타 중 8번을(199p), 말러의 불안하고 예민한 감성에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다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만들었던 <9번 교향곡>을(217p), 쇼스타코비치의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감성에 더욱 깊이 빠져보고 싶다면 <첼로 협주곡 1번>을 추천하고 싶다. (중략) 이 곡에서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라는 첼로의 '반전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저음부터 고음에 이르기까지 날카롭고 강한 첼로의 움직임이 마치 전쟁을 연상시키는 곡이다. (220p) 차이콥스키 <비창> :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어렵다면 4악장만큼은 꼭 들어보길 권하고 싶다.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곡의 마지막 악장으로, 강렬한 현악기의 주제가 '고통이란 이런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듯하다. (261p)

저자가 추천하는 음악은 목록을 따로 정리해두고 싶다. 어떤 기분일 때  어떤 음악을 듣고, 어느 음악가를 이해하고 싶을 때 어떤 음악을 들으면 좋은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좋은 것 같다.


랩소디를 광시곡이라고 해석했을 때 특히 잘 어울리는 곡은 영국 록그룹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일 것이다. 이 곡은 랩소디가 가지는 서사적인 특성, 자유로운 형식, 강렬한 감정 등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팝송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노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일단 곡의 총길이가 약 6분으로 보통 노래의 두 배쯤 된다. 6분 안에서 그야말로 서사시가 펼쳐지기 때문에 노래를 듣고 나면 거짓말 조금 보태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 (중략)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이 노래로 서사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가르치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아카펠라-록발라드-오페라-헤비메탈-발라드'로 이루어진 5단계의 구성이 지루할 틈 없게 만들어준다. (290p)

끝으로  『왠지 클래식한 사람』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을 소개하자면, <보헤미안 랩소디>에 관한 이야기였다. 6분의 긴 노래를 듣고 나면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는 저자의 말이, 지루할 틈 없다는 5단계의 구성이, 무척 궁금해졌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데 한참 걸렸다. 아이를 재우고 밤중에 시간 날 때마다 읽었다. 피곤한데도 내용이 지루하지 않아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나처럼 클래식에 대해 무지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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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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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관련 책을 읽다가 태아에게 동시를 읽어주면 좋다는 말을 보았다. 초등학교 졸업 선물로 받았던 동시집이 있었는데, 결혼하고 이사하면서 버렸는지 보이질 않더라. 동시 대신에 태교동화만 여러 권 읽어주었다. 그러던 중 <시 읽는 엄마>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임신 전에도 제목에 '엄마'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책에 눈이 갔지만, 임신하고서 더욱 그런 것 같다.

시 읽는 엄마, 엄마라는 무게 앞에 흔들릴 때마다
시가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습니다

엄마라는 위치가 얼마나 힘든지, 그런 엄마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시는 얼마나 위대한지 책 표지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딸아, 너와 닿으면 희망이 보여 ; 에 관한 이야기
2. 가끔은 엄마도 위로가 필요해 ; 엄마로서 의 이야기
3. 엄마, 곁에 계실 때 더 잘해드릴걸 ; 내 엄마에 관한 이야기

우선 시를 소개한다. 세계적인 고전 명시, 현세대의 세계 명시, 한국 대표 시인의 작품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좋은 시인의 작품들.

그리고 시와 연결지어 신현림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가 딸을 임신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어서 더욱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딸이 곁에 있어 견디고 인내할 수 있었다. 그 위대한 사랑의 능력은 엄마가 되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5p)

생계부터 육아까지 1인 5역을 하며 고단하고 속상한 엄마, 자기를 떼어놓고 일하러 가는데도 울고 보채지도 않는 어린 딸이 안쓰러우면서도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란 딸이 너무 예쁘다.


옆에 있는 딸을 꼭 껴안았다. 이렇게 껴안을 땐 서로 부드러운 스펀지가 되어 각자가 가진 염려와 슬픔을 빨아들인다. 딸과 내가 껴안는다는 건 ' 엄마는 네 속에 있을 테니, 언제 어디서든 두려워하지 마 ' 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기쁨은 돈으로도 셀 수 없을 만큼 애틋하다. (53p)

신랑 회사일이 바빠서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출근하면, 나 혼자라는 느낌이 강했다. 임신 후기가 되고 보니 불러온 배 만큼 태아의 존재도 커졌나보다. 출산을 한 달 앞둔 지금은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엄마는 자식과의 정을 먹고 산다. 그렇게 엄마는 자식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다. 내가 내 딸의 엄마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소중함을 느낀 만큼, 내 딸에 대한 애정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이따금씩 이렇게 묻는다. '내 딸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내 피붙이가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다정하고 따뜻할 수 없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딸이 주는 경이로움이 이렇게 클지 처녀 시절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내 안의 씨앗이 어느새 자라 걷다니……. 직립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순간순간 맛보는 인생의 신비. 내겐 이 모든 순간이 하나의 기적이었다. (130p)
 
갓난아이를 어찌 키워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함을 나도 곧 느끼겠지, 세상 모든 어둠이 우리 딸을 피해가기를 바라겠지, 딸이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둘 만의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으며, 밤새 수다 떨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다.


엄마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매일 하며 살아도 아쉬운 인생이다. 입으로 자꾸 되뇌다 보면 처음에는 힘들어도 잘하게 된다. 표현하지 않는 애정은 애정이 아니더라. 표현의 때를 놓치면 영영 기회를 잃을 수도 있더라. 자식이 먼저 던지는 사랑의 인사는 엄마의 인생에 큰 용기가 된다. (164~167p)

난 엄마에게 살갑게 하질 못한다. 신랑이 항상 장모님 안아드리라고, 메시지 보낼 때 하트도 보내드리라고, 한다. 엄마도 그런 나를 아니까 애 낳아 보면 알겠지, 하신다. 자식을 키우면, 엄마를 더 생각하고 더 이해하게 되겠지?


나는 내 딸을 책 많이 보는 사람으로 키우는 게 꿈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무릎에 앉혀두고 이솝우화며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려고 애썼다. 인생을 좀 더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위해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p)

나도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내 딸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엄마 아빠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이며 책 읽을 환경을 만들어주고, 장난감 대신 책을 손에 쥐어주고 싶다. 주말이면 손잡고 도서관에 가서 책구경도 하고, 서점에 가서 읽고 싶어하는 책도 사주고 싶다.



<시 읽는 엄마>는 단순히 시를 읽는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가 되고서 눈물이 많아진 그녀가 세상일에 치여 지친 날, 시를 읽으며 위로 받고 마음을 다잡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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