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특집 추리 드라마 <극한추리 콜로세움>입니다. 1회당 30분씩 총 4회로 이뤄져 있어서 2시간만 가볍게 투자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어제 밤에 가벼운 기분으로 봤는데, 역시 가벼운 작품이었습니다. 감독은 오카모토 코이치라는 처음 듣는 사람이고, 주연은 카시와바라 타카시, 여주인공은 아야세 하루카라고 하네요. 둘 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낯이 익더군요. 카시와바라 타카시는 그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그 유명한 <러브레터>에서 소년 후지이 이츠키로 나왔던 인물입니다. 당시에도 샤방 냉미남이었는데 조금 나이를 먹은 요즘도 꽃미남이더군요. 사실 저도 꽃미남은 못 되도 꼰미남이기는 한데...(다리를 꼰 미남, 허리를 꼰 미남..-_-;;) 여주인공 아야세 하루카는 히가시노 게이고씨의 대표작 <백야행>에서 유키호 역을 맡았던 배우였습니다.

 

내용은 꼭 <튜브>를 연상케 합니다. 편의점에서 프리터로 근무하며 하루하루를 생각없이 보내는 화가지망생 남주인공, 어느날 정신을 잃고 눈을 떠보니 기묘한 공간에 와 있습니다. 무지무지 더운 집에 자신을 포함한 일곱 명의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 역시 이 집에 와 있는 이유도 모른채 끌려왔고, 서로 안면도 없습니다. 그들은 컴퓨터를 발견하고, 주최자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당신들은 추리게임에 초대되어 왔다. 일곱 명의 사람 중 매일 밤 한 명씩 죽을 것인데 범인을 맞추기 전까지 살인은 계속된다. 범인을 맞춘 사람들에게는 각 1천만엔씩이 지급될 것이지만, 틀린 답을 입력할 경우에는 모두 죽게 된다. 현재 당신들이 머물고 있는 더운 집은 여름별장인데, 다른 곳에 겨울별장도 있다. 이 곳에도 일곱 명의 사람이 와 있고, 역시 매일 사람이 죽을 예정이다. 당신들은 여름별장과 겨울별장의 살인자 두 명을 맞춰야 하는데, 범인을 늦게 맞추는 쪽 역시 전멸이다. 행운을빈다."

 

뭐 이런 식입니다. 여름별장의 사람들은 겨울별장의 사람들과 화상채팅을 통해 교신하게 되는데, 그쪽은 무지 추운 방입니다. 개인적으로 추위를 싫어해서 저 같으면 여름별장으로 가겠습니다. 어쨌든 하룻밤이 지나고 여름과 겨울의 방에서 각각 한 명씩 죽어 나갑니다. 게임이 진짜였다는 걸 깨닫게 된 사람들은 전력으로 사건을 추리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경쟁 체제에 돌입한 여름과 겨울의 방 사람들은 유일하게 정보를 교류해나가는 화상 채팅에서 서로 틀린 정보를 가르쳐주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져듭니다. 과연 범인은누구일까요?

 

   이 작품의 재미는 특이한 설정에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한 명씩 죽어나가는 대강의 내용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류의 고전 추리물의 변주입니다. 무엇보다 여름과 겨울의 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 방보다 먼저 사건을 풀어야하기 때문에 틀린 정보를 비롯해 온갖 협잡이 난무합니다. 올바른 정보를 얻기 위해 머리를 살포시 굴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이예요.

 

그러나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살짝 시시합니다. 진지하게 머리를 굴려 추리해보고 싶은 분도 계실텐데, 일본어 단어에 관한 일종의 암호풀이가 주된 트릭이기 때문에 일어를 못 하시는 분들은 맞출 수 없는 내용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단서는 우연에 의해 주어지고, 등장인물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도 걸립니다. 솔직히 한 방에 모여 있으면 아무도 안 죽을텐데,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데도 각방을 고집하는 등장인물을 보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러나 뭐 다 모여 있으면 이야기가 안되겠지요. 짧은 만큼 가볍게 볼 만한 작품이지만 별점을 주라면 두개, 많이 줘도 세개 정도에 그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궁극의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한다는 메피스토 상 수상작 야노 류오 씨의 <극한추리 콜로세움>을 원작으로 했다는데, 원작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드라마보다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국내에 소개되긴 힘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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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6-05-16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추리를 좋아하시는군요!
전 김전일이 한계에요. 무서운건 절대 못봐요 ㅠ_ㅠ
기묘한 이야기도 어느 순간부터 손이 안가더라는;;
카시와바라군은 저도 좋아해요~ 꽃꽃꽃미남 ^^

jedai2000 2006-05-1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 좋아하죠. ^^;; 키티님도 더 많이 읽어보세요. 분명히 매력을 발견하실 겁니다.
<극한추리 콜로세움>은 별로 무섭진 않아요. 김전일보다 덜 무서울 것 같은데요.
<기묘한 이야기>에 무서운 이야기도 있나 보죠. 전 극장판 DVD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 안 봤거든요. 친구가 그 중 한 이야기가 엄청 무섭다고 하대요. 카시와바라 군을 좋아하시는군요. 역시 미녀는 꽃미남을 좋아하나 봅니다~ ^^;;
 
탈선 모중석 스릴러 클럽 1
제임스 시겔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공군: 나 왔다.

강군: 또 너냐. 넌 일도 없냐.

공군: 백수 신세가 뭐 그렇지. 심심한데 맥주나 마시러 가자.

강군: 그놈의 맥주는 질리지도 않냐.

공군: 나나 되니까 너하고 맥주라도 마셔주는 것은 모르고.

강군: 하긴. 일세의 혁명가가 나같은 애송이하고 맥주를 마셔준다니 껄끄럽기도 하겠지.

공군: 너도 <삼대> 읽었구나.

강군: 고등학교 때 배웠잖아. 알았다. 술 한잔 하러 가자.

 

공군: 이 집은 좀 시끄럽네.

강군: 그래도 여기가 분위기는 좋잖아. 뭐 마실래? 오늘은 내가 쏜다.

공군: 뭐 뻔하지.

강군: 우리라고 맨날 맥주만 마실 일 있냐. 오늘은 좀 비싼 양주 같은 거 마셔보자. 메뉴판 줘봐라.

공군: 오~ 자식 돈 좀 들어왔나 보네.

강군: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어. 난 맥주.

공군: ...나도 맥주.

 

공군: 그나저나 어제는 일요일인데 뭐했냐?

강군: 책 읽었지. <탈선>이라고 스릴러 소설이었다. 

공군: 어째 제목이 너랑 잘 어울린다.

강군: 나쁜 짓 하는 탈선이 아니라, 기차가 탈선했다 할 때 그 탈선이다.

공군: 그렇군. 무슨 내용이냐?

강군: 어. 내용이 아주 재미있더라. 중년의 광고 회사 중역이 있어. 그 사람은 아내랑 딸이 있는데, 딸이 소아당뇨라 가정에 웃음이 사라졌지. 어느날 출근을 하다가 늘 타던 8시 43분 열차를 놓치고 9시 5분 열차를 타게 되는데 거기서 모든 일이 시작된거야. 시작은 조그만 엇갈림이었지만 결국 주인공을 위기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공군: 여자를 만났구나.

강군: 눈치가 구백단이네. 주인공은 매혹적인 여자를 알게 되지. 매혹적인 여자와 함께 하면서 오랜만에 죽어있던 마음에 꽃이 피는 근사한 경험을 하게된 주인공은 그 여자와 계속 시간을 보내다 결국 불륜에 빠지게 되지.

공군: 이야, 흥미진진하다. 하기야 불륜같이 금지된 열망에 빠진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처럼 독자를 매료시키는 게 없지. 

강군: 반주가 좋구나. 이야기하는 흥이 난다. 자, 두 사람은 마침내 호텔에 가서 사랑을 나누고 나오려는 찰나에 괴한이 침입해. 괴한은 지갑을 빼앗은 다음 주인공을 폭행하고, 여자는 강간하지.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냐.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불륜도 해본 사람이 하는거야. 순진한 주인공은 싸구려 호텔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몰랐던 거야.

공군: 좋았던 분위기에 완전 찬물을 끼얹었네.

 

강군: 진짜 위기는 그때부터야. 괴한이 지갑을 가져갔잖아. 거기 적혀있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보고 주인공에게 협박을 하는거야. 돈을 내놓으라고 말이지. 괴한은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 순진한 주인공의 한수 위에 있어. 주인공이 벗어나려 몸부림쳐봐도 범죄에 잔뼈가 굵은 괴한의 손바닥안에 있는거라. 게다가 두 불륜 연인은 애초 시작이 잘못됐기 때문에 각자 배우자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지. 악몽같은 상황에 빠진 주인공이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지가 작품의 핵심인게지.

공군: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강군: 정신없이 읽히더라. 하루만에 460페이지라는 두꺼운 분량을 다 읽었어. 기차 여행을 할 때 보면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없을거야. 무엇보다 주인공이 평범한 인물이라는 게 절묘하지. 특별한 능력도 없고, 완력도 약한, 소심한 중년남인 주인공에게 계속 닥쳐오는 위기를 보면서 역시 소시민에 불과한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거야.

공군: 상대하는 악역 묘사가 좋아야 할텐데.

강군: 괴한의 정체를 모르니까 서스펜스가 가중되는 거지. 실체가 드러나면 그 때부터 공포감이 엷어지잖아. 왜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한테 맞기 직전이 무섭지, 일단 맞고 나면 별로 안 무섭듯이 말야. 이 작품에서 괴한의 정체는 마지막까지 자세히 밝혀지지 않거든.

공군: 그렇구나.

강군: 그런 면에서 스릴을 창조하는 작가 재능이 돋보이더라구. 물론 결말이 생각보다 약한 감이 있는데, 결말까지 쭉 끌고 나가는 힘이 있어. 뭐 특별히 남는 건 없겠지만 읽는 동안은 정신없이 재미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공군: 나도 읽어보련다. 다음에 볼때 책 좀 가져와라.

강군: 알았다. <탈선>은 중년 남성의 도덕적 일탈이 가져온 위기와 그것에 관한 단죄라는 주제를 볼 때 꼭 히치콕 영화같기도 해.

공군: 히치하이커?

강군: 히치콕! 너 이제 귀에도 문제가 있구나.

공군: 시끄러워서 그랬어. 

강군: 아무튼 히치콕 영화에서 늘 주인공들이 금발머리 여자한테 홀려서 나쁜 짓을 저지르고, 결국 그것에 대한 단죄를 당하잖아. 이 소설이 꼭 그래. 히치콕이 살아 있으면 만들어 볼만한 영화인데, 유감스럽게도 이미 사망했으니 다른 사람이 영화를 만들었지. 클라이브 오웬과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뭐 영화로 만들기 꼭 좋은 소설이지. 스릴 넘치고, 전개가 빠르니까. 엎치락뒤치락 역전과 반전도 제법 있고. 작가 제임스 시겔은 이제 책 3권을 낸 신인급의 작가인데 미국 스릴러 계에서 주목받는 신예란다. 작품들이 다 영화화 계약이 될 정도로 잘 나간다고 하네.

공군: 그래, 잘 들었다. 그나저나 너는 꼭 나를 만나기 전에 준비하고 오는 것 같아. 주저리주저리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너 혹시 나 기다렸던 거 아냐? 나 오면 책 이야기 말해주려고.

강군: 무슨 소리야!

공군: 에이, 맞잖아. 너 나말고 친구 없지? 그래서 나만 보면 읽은 책 이야기해주고 싶어 안달하는 거 아냐? 불쌍한 놈, 나말고 친구도 없는 녀석. 하하

강군: 아니라니까!!!

 

 

<인상적인 구절>

 

"내가 직접 방아쇠를 당긴 것과 다름 없었다. 간통, 사기, 그리고 이제 살인까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이름 없는 선한 시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체를 태우고 매립지가 있는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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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어요^^

jedai2000 2006-05-1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방 읽으실 겁니다. 재미있으시죠? ^^;;
 
애완동물 공동묘지 - 상 밀리언셀러 클럽 33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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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소에서 비싸게 돈을 들여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분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솔직히 이름이 뭐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녀가 잘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작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있으니 그 이름, 바로 미국의 스티븐 킹이다. 이름에 킹(King)이 들어가는 작가답게 스티븐 킹은 작가로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으니 아마 현존하는 작가 중에 가장 많은 책을 팔았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누적 판매 부수가 3억부를 넘고 대부분 영화화되었다. <캐리> <스탠 바이 미> <샤이닝> <돌로레스 클레이븐> <쇼생크 탈출> <드림 캐처>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 그의 소설이든 영화든 한 편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래 호러소설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일까.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다. 중학교 때 It이라는 작품을 보다가 내던진 기억도 난다. 공포소설이라는데 무서운 장면이 안 나오길래, '귀신은 언제 나와'를 수십번 외치다가 결국 포기했었다. 유일하게 읽은게 <사계>라는 단편집이었는데 여기 수록된 작품들이 <쇼생크 탈출> <스탠 바이 미> <죽음보다 위험한 비밀 Apt Pupil> <생매장>이다. 이 뛰어난 단편집은 일반 소설에 가까운데 스티븐 킹이 머리 식히는 의미에서 가볍게 썼다는 말을 듣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이 작가는 진짜 본인 자체가 괴물인 것을 알고나 있을까. 거의 처음으로 접한 스티븐 킹의 본격 호러소설 <애완동물 공동묘지>를 읽고난 지금의 심정 역시 비슷하다. 한 마디로 대단하다.

 

미국 남부의 한적한 도시로 이사한 크리드 일가는 행복하다. 남편 루이스는 대학에서 근무하는 의사로 벌이도 괜찮고 존경도 받는다. 아내 레이첼과의 사이도 좋고, 유치원에 다니는 귀여운 딸 엘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갓난쟁이 아들 게이지와 함께 커다란 집에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옆집에는 아버지를 일찍 여윈 루이스에게 유사 부자 관계로 다가오는 저드라는 현명한 노인도 산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그러던 어느날, 딸 엘리가 너무나 귀여워하는 고양이 윈스턴 처칠이 교통사고로 죽게 되자 루이스의 주름살이 깊어진다. 딸이 상심할텐데, 걱정하는 그에게 저드는 이 마을의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그곳에 죽은 애완동물을 묻으면 그날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루이스는 처칠을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묻고 고양이는 부활한다. 그러나 총명했던 처칠의 몸놀림은 굼뜨고, 몸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변모는 처칠에게 새로 생긴 취미였다. 까마귀나 쥐를 잡아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파내는 취미에 빠진 처칠을 보고 루이스는 경악한다. 그럼에도 루이스 일가의 삶은 아직까지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아들 게이지가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는. 마르지 않는 슬픔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루이스의 선택을 예상해 보라. 루이스는 생각한다. 고양이가 부활한다면 사람도 부활할 것이 아닌가...

 

호러 제왕의 작품답게 이 작품은 시종일관 소름끼치고 독자를 덜덜 떨게 만든다. 무엇보다 설득력있는 이야기 전개가 압권이다. 특히 아들을 잃은 루이스의 절절한 슬픔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공포소설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필력이었다. 아들 게이지가 커가면서 이룰 수 있었던 가능성에 대해 루이스가 상상하는 모습들. 게이지는 커가며 수영을 즐기고, 나아가 국가대표 선수가 되서 금메달을 딸 수도 있었다. 수영 모자를 쓰고 단상에서 금메달을 수여받는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이지. 그러나 현실에는 아무 것도 없다. 어린 게이지의 모자는 피로 가득차 있었고, 이제 수영은커녕 차디찬 무덤에서 쓸쓸히 잠들어야만 한다. 아니 아들이 수영은 못해도 좋다. 바보라도 좋다. 그저 곁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하고 바라는 루이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말았다.

 

루이스는 처칠의 변화를 통해 이미 학습했다.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 부활한 존재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파국을 이미 예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을 살려내야만 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한 번만이라도 다시 봤으면 하는 욕망 때문에.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금기에 대한 매혹적인 열망, 구역질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유혹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 이래 미국의 뛰어난 소설가들은 공포소설이라는 외피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면을 천착하고 있다. 스티븐 킹은 선대의 위대한 소설가들에 비교해 전혀 부족할 것이 없는 작가다. 에드거 앨런 포, 헨리 제임스 등의 작가와 비교해 그가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3억부를 팔았기에 대중소설가로 굳어져 있지만 그의 필력과 작품 세계는 이미 후대에도 빛날 거장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스티븐 킹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건 거의 처음이지만 이 정도의 수준과 재미를 다른 작품이 보장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그의 작품을 잡을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조여오는 불안감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심리적인 공포에 능한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애완동물 공동묘지>에는 공포영화나 공포소설의 팬들이 익숙한 여러가지 장치들도 자주 등장한다. 취미로 까마귀의 머리를 찢는 고양이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긴 분량의 작품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뒷이야기를 살짝 노출시키면서도 김이 빠지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그의 필력은 과연 선수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올림픽 수영 팀도 없었고, 대학에서 3.0을 받는 일도 없었고, 성당을 다니는 어린 여자 친구나 개종도 없었고, 아가왐 캠프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게이지의 운동화는 찢겨져 있었다. 점퍼는 안팎이 뒤집혀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조그만 아들의 몸, 그렇게 튼실했던 몸은 거의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이의 모자에는 피가 가득 차 있었다...그는 침대 위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며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흐느끼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일이라도."  

 

별점:   ★★★★ 1/2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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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5-14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고양이 윈스턴 처칠 나오는 책이군요!! 제가 본 가장 무서운 책이었어요. 예전에 '고양이 윈스턴 처칠 어쩌구' 하는 제목으로 나왔어서 몰랐는데,

비로그인 2006-05-14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끌렸었는데.. 아이궁.. 제다이님, 저를 더 고민스럽게 하는 유혹적인 리뷰여요..;;;;

상복의랑데뷰 2006-05-1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름신 ㄷㄷㄷ ^^

jedai2000 2006-05-1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국내에 최초 소개된다고 띠지에 써 있었는데 이미 나와있었군요. 저도 상당히 무섭게, 슬프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포 소설에는 관심 없지만 킹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비숍님...오! 새로운 캐릭터네요. 비숍님의 실제 모습과 비슷한가요? ^^;; 저는 이 작품은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꼭 보시길..^^;;

상복님...지름신에 한 번 홀려도 크게 후회하지 않을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5-1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두번인가 번역됐을 겁니다. 신의 작은 늪이라는 이름으로도 번역됐을 거에요. 위에 하이드님이 말씀하신 작품명 말고도. ^^

jedai2000 2006-05-1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황금가지의 무신경한 띠지였군요. 국내 최초 소개라고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더니...^^;; <신의 작은 늪>이라니 작품 중에 그런 곳이 등장하긴 하네요.
 
반도에서 나가라 - 상
무라카미 류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반도에서 나가라>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다. 일본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의 'TWO무라카미'가 대단한 명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주로 미스터리 소설만 읽는 본인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읽어보지 못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마음 속으로 칼을 갈고 있던 차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하루키 의무방어전 1차전은 성공리에 끝냈다. 이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다 <반도에서 나가라>의 출간 소식을 듣고 이 작품을 골랐다. 무엇보다 내용이 아주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일군의 북한 특수부대가 일본 후쿠오카를 점령하고, 부랑아에 진배없는 일본의 불량소년들이 북한군과 대결한다는 내용 자체가 본인의 호기심과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2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을 순식간에 다 읽고 나서 독후감을 남긴다.

 

시간적 배경은 가까운 미래인 2011년. 눈부신 경제력으로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의 현재는 암울하기만 하다. 국제 금융과 경제 위기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일본은 경제적으로 파산을 선고하고 살인적인 인플레와 국민의 10%가 실업자에 달하는 초유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동안 경제력으로 모든 난관을 돌파하던 일본의 경제력이 파탄나자 미국과 중국 등의 국제 열강들은 일본에 모두 등을 돌리고 만다. 믿고 따르던 미국이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일본을 버리자 국민들은 분노하지만, 그들은 국제 사회의 냉엄한 진리를 몰랐던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력은 그 나라의 힘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을 말이다.

 

한편 세계의 골칫덩이인 북한은 남한, 미국, 중국 등과 해빙 무드를 조성해 평화 통일의 계기를 맞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통일 후에 북경 대저택으로 망명할 예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군부내 대미 강경파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이에 북한 고위층은 몰락한 일본을 타깃으로 기발한 작전을 구상한다. 대미 강경파가 지휘하는 군단을 일본 후쿠오카로 파병해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계륵이니 일본에서 희생당해도 좋고, 후쿠오카를 점령해버리면 그것대로 좋다. 군단의 명칭은 '고려원정대'로 하고 북한 내 반란군으로 발표해 버린다. 이러면 후쿠오카를 점령당한 일본측의 항의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명목상 북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일본으로 망명하는 셈이니 북한측과는 원칙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이 작전의 이름이 바로 '반도에서 나가라'이다.

 

고려원정대는 치밀한 작전을 세워 후쿠오카를 차근차근 점령해 나간다. 처음에는 9명의 특공대가 후쿠오카 돔의 3만 관중을 인질로 잡고 일본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500명의 추가 부대를 급파해 후쿠오카 시 일부를 점령한다. 12만 명의 추가 군단이 도착하는 예정일은 약 열흘 후, 일본 열도는 충격으로 혼미해진다. 그러나 고려원정대가 한 가지 몰랐던 것은 '이시하라 그룹'이라는 일종의 사회부적응자 집단의 존재였다. 일본인들도 고려원정대도 인간쓰레기 취급을 하며 무시했던 이들은 사실 파괴의 충동을 가슴 깊히 묻고 사는 위험한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대단히 길게 내용 설명을 했다. 워낙에 방대하고 사실적인 플롯이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소 길게 적었다. 독서의 재미를 빼앗는 게 아니냐고 항의하지 마시라. 이 작품에는 워낙 많은 이야기와 다양한 재미가 있기에 이 정도로는 <반도에서 나가라>의 재미를 조금도 훼손시키지 못하니까.

 

무엇보다 이 작품은 테러에 대한 사실적인 접근과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돋보인다. 누구도 주인공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출연해 고려원정군의 테러에 대해 다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원정군의 장교들과 사병들을 비롯해 일본의 정치인들,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들, 이시하라 그룹의 소년들 등 다채로운 인물의 다채로운 시선으로 미증유의 테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만 50명에 가까울 정도인데 그들의 눈에 비친 테러의 실체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911테러' 이후 변화한 테러의 양상도 적절하게 녹여내고 있다. 비행기가 대형 빌딩에 자폭하고, 이어 빌딩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영상도 안방에서 생생히 볼 수 있게 된 현대 상황에 맞춰 고려원정군의 테러 장면도 실시간으로 NHK 방송에서 중계하고 있다. 보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기묘한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테러하면 연상되는 것은 보통 죽음과 파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절묘한 건 그런 테러의 이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쿠오카를 점령한 북한군의 여성장교가 하는 일은 통조림이나 햄같은 식재료를 도매하는 업자와의 가격 합의다. 테러분자들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게 아닌가. 12만 군인들의 식품, 의복, 주거지, 분뇨 처리 등의 일상적이지만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장면은 보통 작가라면 상상해내기 힘든 절묘함이다. 작가 무라카미 류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무라카미 류는 작가이기 이전에 일본인이다. 그는 타자(고려원정군)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도 힘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파악하는 일본인의 실체가 비판적으로 묘사되는데, 최초의 침투 과정에서 9인의 특공대는 그들을 발견한 부자(父子)를 죽이고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나중에 깨닫게 된 그 위화감의 정체는 부자에게 혼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도망도 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일본의 현재 모습이 아닐까 하는 작가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 정세와 부족한 게 없는 경제 호황으로 일본인들이 식물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원정군과 대결하는 인물들을 '이시하라 그룹'으로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은 일본도로 사람을 죽이고, 47차례의 방화로 수십명의 인물들을 태워죽이는 등의 소년범들이지만 무기력한 식물이 아니다. 원초적인 파괴 본능을 잃지 않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울부짖는 야수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작가는 극악한 이시하라 그룹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 받아야 할 비난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다소 동정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있고, 섣불리 그들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잘난 사회에서 약간의 성공이나마 거두기 위해 이빨을 감추고 사는 무기력한 사람들 속에서 거침없는 파괴 본능을 드러내는 그들의 모습에 일정한 통쾌감을 느낀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고려원정군의 점령 과정은 분명 신사답지 못했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점령지의 일본인들도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은 교류를 해야만 살 수 있다. 이 세계에서 혼자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작가는 후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힌다. 작가 후기를 발췌해 보면.

"역사도 문화도 가치관도 다르고 이해의 일치조차 없는, 더구나 한쪽은 무장하고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그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나를 이 작품의 집필에 불러 세운 최대의 동기였다."

이 점에서도 작가는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 특히 아이를 잃은 북한 여성 장교와 소년병으로 참전해 전쟁과 폭력의 무익함을 깨달은 일본의 노의사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가 미워하는 일본인과 그래도 우리의 동포인 북한군이 대결하는 이 작품을 가볍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괜시리 불쾌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엄연히 픽션이고, 사실 우리가 불쾌해할 만한 요소는 작품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단치 않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이 작품을 놓치는 건 분명히 손해다. 모든 걸 다 떠나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작가 무라카미 류는 어마어마한 양의 취재를 통해 작품을 벽돌성같이 탄탄하게 만들었고, 소설의 대중적 재미 역시 최고 수준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정과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해 일그러진 영혼을 가지게 된 이시하라 그룹이 북한군과 마주하면서 함께 하는 일의 의미와 재미를 깨닫게 되는 장면이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그 부분을 발췌하며 맺으려 한다.

 

"어떻게든 작업을 완성시키고 싶다고 히노가 말했을 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공동작업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서로를 도와가며 일을 분담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나간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자신의 작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도와준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런 관계를 가져 본 적조차 없다. 모두 고려가 죽도록 무서웠지만, 끝까지 작업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싶었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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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muko 2006-05-1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그 적지않은 분량때문에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제다이님 리뷰를 보니 마구 땡기는군요. 한동안 잘 참았는데....

jedai2000 2006-05-1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하 1200페이지 정도 되는데 방대한 양에 어울리는 대작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총기 사용과 테러 장면이 다수 등장해 제 취향과는 맞았는데 네무코님이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네요. 꼭 읽어보세요. 재미있습니다. ^^;;

페일레스 2006-05-1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가 잘 쓰는 장르 중의 하나가 이런 가상 역사소설인데, 저는 [5분 후의 세계]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은 모셔두기만 하고 있군요. [반도에서 나가라]도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번역본이 나왔으니 읽어봐야겠습니다. 번역은 어떤가요?

jedai2000 2006-05-1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이 왕창 늦었네요. 지방에 내려왔거든요. <5분 후의 세계> 읽어보겠습니다. 번역은 나쁘지 않은데 간혹 오타가 있습니다. 저는 근데 번역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서요. 윤덕주 님이 번역하셨는데 그분이 <모든 것이 F가 된다> <링> <화이트 아웃>등을 하셨습니다. 혹시 읽어보신 작품이 있다면 참조해보세요. ^^;;
 



지구촌이라더니 정말 요즘은 도처에서 외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교통과 기술이 발전하니 세계가 한마을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화 흐름에 발맞추어 절친한 친구 한놈이 국제 연애를 하고 있다. 중국 유학중에 만난 여자와 1년 넘게 교제를 계속하고 있는데, 주로 화상채팅을 통해 관계를 지속하고 있단다.

 

그런데 어제 마침내 그의 중국인 여자친구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 녀석이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오전11시부터 전화해서 나오라고 성화다. 친구 여자친구와 처음 상견례하는 자리니 나가야겠다 싶어 어쩔 수 없이 준비하고 나가서 동인천에 있는 인천 제2국제 여객터미널로 나갔다. 생전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그곳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배의 승객들을 통관시키는 곳이었다.

 

몇 시에 오냐고 물었더니 오후 2시 배란다. 하도 어이가 없어 왜 이렇게 일찍 불렀냐고 했더니, 집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쯤되면 화를 낼 기력도 없어진다. 우리는 3시간을 꼬박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 미셀 위가 골프 홀을 도는 모습을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보니 힘이 축축 빠진다. 멍하니 기다리는 것만큼 사람 지치게 하는 일이 없다. 담배를 한갑은 피웠나보다.

 

터미널 밖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말소리가 들려오길래 그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중국 여인 두 명과 한국 남자 네 명이 있었다. 솔직히 무슨 사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국 남자들이 중국 여자 한 명을 잡아 끌며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다른 중국 여인은 끌려가는 중국 여인을 보며 애타게 무언가 말한다. 그러자 한국 남자 중 한 명이 '괜찮아. 괜찮아.' 하며 억지로 데려간다.

 

나는 원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 뻔한 상상 밖에 하지 못한다. 돈을 벌러 온 중국 여자 두 명중 한 명밖에 필요가 없어 한 명은 내버려두고 가는 모양으로 보았다. 두 여자의 관계는 자매, 아니면 친구쯤 될 것이다. 한국 남자들이 데려가는 곳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술집? 아니면 더 이상한 곳?

 

이별을 맞은 두 중국 여자는 구슬프게 울었다. 끌려가는 여자는 한참 멀리 사라지면서도 고개를 돌려 남은 여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남은 여자의 두 눈에도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마침내 저 멀리까지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갈 때가지 끌려가는 여자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치 눈 속에 영원히 헤어진 자매 혹은 친구를 담아 두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남은 여자의 눈물은 강물을 넘어 바다가 되었다. 오래된 옛시구절이 떠올랐다.

 

雨歇長提草色多     비 갠 강둑에 풀잎이 이들이들,

送君南浦動悲歌     남포에 임 보내니 슬픈 노래 북받치네.

大洞江水何時盡     어느 제 마르오리 대동강 푸른 물,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저 강물에 이별 눈물 더 보태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오고 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크나큰 슬픔 역시 세계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일본의 슬픔, 중국의 슬픔, 미국의 슬픔, 태국의 슬픔 등이 들어와 떠돌고 있다. 슬픔만은 수출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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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06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5-06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지상의 시인가요?

BRINY 2006-05-0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지상의 送人이군요.

jedai2000 2006-05-0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맞습니다. 슬픔만은 수출하지 않는 세계화였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상복의 랑데뷰님...밑의 브리니님께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셨네요.

브리니님...예. 제가 참 좋아하는 한시입니다. 읽어보다가 소름을 느꼈을 정도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