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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의 음모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항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800년대 후반의 러시아는 내게 신비와 낭만으로 가득찬 시대다. 둥그런 지붕의 교회당과 돌바닥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륜마차들.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양산을 쓴 숙녀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차르와 대공, 왕녀, 귀족들, 그리고 요사스런 만능의 라스푸틴까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19세기 문학이나 예술, 철학 사조 등이 비교적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된 데 비해 구소련과 관계된 정치적 문제로(주로 1980년대까지) 제정 러시아에 대해서는 사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해볼 기회가 적어 어쩐지 더 호기심이 가는 듯하다.
<아자젤의 음모>가 1867년을 배경으로 청년 탐정 에라스트 판도린이 활약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몹시 관심이 가서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는 요 며칠 동안 정말 즐거웠고, 좀 과장해서 독서의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그토록 궁금했던 제정 러시아의 뒷골목과 선술집, 경찰서, 호텔, 대저택까지 진부한 표현을 용서한다면 마치 그곳을 직접 거닐어보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이 작품에는 정말 19세기의 고전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호감 가는 인물들이 가득하고, 플롯은 요즘의 현란한 미스터리나 스릴러처럼 지나치게 꼬여 있지 않다. 뒤마나 코난 도일, 쥘 베른 등의 작품을 읽듯 즐거운 기분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일급의 대중소설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한때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몰락한 고아 신세가 된 약관의 판도린은 경찰서의 최하급 서기로 출발한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별일도 아닌데 다짜고짜 권총으로 자살한 어마어마한 거부의 아들, 코코린. 다들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 유약해, 하고 말지만 판도린은 자살 직전 그의 행적과 목격자들의 각기 다른 증언, 묘한 유언장 내용에서 심상찮은 느낌을 받고는 월급을 쪼개 독자적으로 수사에 나선다(용의자 추격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월급으로 사려던 빵을 포기하고 오늘날의 택시와 같은 마차를 타는 장면은 심금을 울린다). 코코린의 죽음에 뭔가가 있다는 걸 밝혀낸 판도린은 전모를 파악할 수 없지만 국가 전복을 꾀하는 '아자젤'이라는 조직에 대해 알게 된다. 자, 여기서부터 판도린의 모험은 논스톱이다. 우리의 판도린은 죽음의 위기를 두세 번 겪으며, 혼이 빠지도록 아름다운 두 명의 미인을 만나게 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장기인 숨 참기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역전을 일구어내기도 하며, 명석한 추리력으로 결국 아자젤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성공한다.
작가 보리스 아쿠닌은 본명이 그리고리 샬로비치 치하르티시빌리(기, 길다,,)라는데 일본 문학을 평론하고 번역하는 등 러시아 문학계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란다. 아쿠닌이라는 필명은 일본어로 악인(惡人)이라는군. 1998년에 <아자젤의 음모>로 판도린 시리즈를 시작하고 나서 판도린이 활약하는 총 10권의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재미난 건 각 작품마다 추리소설의 소 장르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 <아자젤의 음모>는 음모 추리소설, 동시에 출간된 <리바이어던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식 본격 추리소설이라니, 판도린 10권을 다 읽으면 추리소설의 모든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발, 정말 제발 전권을 보고 싶다. 사실 시리즈 전작 출간이 얼마나 리스크가 크고, 만만치 않은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만 판도린 시리즈만큼은 진심으로 전작 출간을 졸라보고 싶어진다.
내 생각에 판도린은 셜록 홈스, 브라운 신부, 필립 말로 등 어떤 탐정과 비교해도 그 매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약관의 소년에 가까운 나이에 가끔 머리를 똑바로 쓰기도 하지만, 역시 미숙한 나이답게 어리버리한 실수도 곧잘 저질러 정말로 귀엽다. 팜므파탈의 매력에 휘둘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해서 공적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가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고속 승진을 하는 장면들에는 박수가 절로 나올 지경. <아자젤의 음모>는 우리의 판도린을 소개하는 스핀오프에 가까운 느낌인데, 그가 어떻게 차르의 나라에서 청년의 나이로 요직에 오르는가, 어떻게 새까만 머리의 귀밑 머리만 하얘졌는가, 왜 명랑한 웃음을 잃고 술에 절은 주정뱅이가 되었는가, 그가 어린 시절과 어떻게 작별하게 되었는가가 그려진다. 흐뭇하지 못한, 아니 너무도 처절한 마무리가 오래도록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결말의 여운은 아주 길게 남을 것 같다. <아자젤의 음모>를 읽은 사람이 할 일은 당장 속편 <리바이어던 살인>을 읽는 것뿐. 낭만이 가득찬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꼭 안아주고 싶은 판도린 탐정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