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이면 한 해에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책이나 영화, TV 프로그램 등의 결산을 하곤 했다. 올해는 연초에 뒤숭숭한 일이 많고 바빠서 넘어가게 되었는데, 역시 안 하니까 재미가 없다. 그리하여 일단 먼저 2008년에 본 수십 편의 일본 미스터리 중에서 베스트를 뽑아보는 시간을...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08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풋풋하던 고등학교 시절 사귀게 되어, 약간 머리가 굵어진 대학교 때 헤어진 그녀로부터 7년 만에 전화가 왔다. 이미 결혼해 외동딸을 키우고 있는 그녀는 딸에게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에 대해 심한 자책감을 가지고 있다. 왜 그녀는 딸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학대를 일삼는 것일까. 한편 그녀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다. 아마도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 자녀를 사랑하는 그 느낌 자체를 모르는 것이라고 추측한 그녀는 완전히 사라진 유년기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한다. 단서는 그녀 아버지가 남긴 유품 속의 지도 한 장과 비밀스런 어느 집의 열쇠 뿐. 주인공은 옛 애인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의 기억을 재구축하는 하룻밤의 여행에 동참한다. 그 끝에 감춰진 비밀은 무엇일까?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제조기이자 희대의 스토리텔러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보이는 깔끔한 본격 미스터리. 모든 사건이 하루 동안에, 외딴 집 한 채 안에서 벌어져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하다. 최근 청소년 범죄나 노인 복지 등 사회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작풍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1994년에 쓴 이 작품은 '회상 속의 범죄'라는 미스터리의 오래된 주제를 밀도 있고 오싹하게 그리고 있다.
4위 황금을 안고 튀어라 - 다카무라 가오루

'지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집요한 묘사로 유명한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 다카무라 가오루의 데뷔작. 백억 엔 상당의 금괴가 잠들어 있는 은행을 터는 여섯 남자의 이야기다. 언제나처럼 철두철미한 리서치로 오사카 시에 위치한 은행 주변의 지형지물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웬만큼 끈기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여기서 독서를 포기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말초적이고 대중적인 재미 따위를 이 작가의 작품에서 기대하면 곤란하다. 단순히 일확천금을 노리고 은행을 터는 강도들이라고 보기에 여섯 남자들은 모두 끝 모를 허무와 고독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사나이는 누구나, 아니 사람은 누구나 몸과 마음이 다 외로운 존재인 것인지, 커다란 고독과 마르지 않는 슬픔을 안고 인간이 없는 세계로 떠나고 싶어하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아프게 느껴진다. 작품 후반부, 실제로 은행을 터는 장면은 분 단위로 실시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전까지의 다소 지루한 흐름을 일거에 반전시키는 속도감이 일품이다. 빼어난 미스터리로 보든, 잘 된 한편의 문학 작품으로 보든 손색이 없는 수작으로 데뷔작에서 이 정도의 경지를 보여준 다카무라 가오루는 역시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존경과 낭패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난공불락의 작가다.
3위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하라 료

비열한 도시를 헤매는 고결한 밤의 기사 필립 말로 탐정.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이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영원한 아이콘은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감흥을 준 모양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출신의 하라 료가 바로 그런 작가인데, 챈들러의 작품을 수없이 읽고 사숙해 마침내 데뷔작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 일본의 필립 말로라 할 수 있는 사와자키 탐정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하라 료는 일본의 레이먼드 챈들러가 되었으며, 그 명성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실종된 르포라이터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인 사와자키 탐정은 최근 일본 전역을 떠들석하게 했던 도쿄 도지사 저격 사건과 사라진 르포라이터가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야쿠자가 마약 거래한 돈을 훔치고 잠적한 전 파트너 덕분에 경찰과 야쿠자 양쪽에서 견제를 당하는 고달픈 신세의 그는 내세울 빽도, 완력도 없지만 진실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사건의 핵심을 파고든다. 하드보일드의 에센스를 고스란히 간직한 근사한 분위기와 챈들러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문장이 돋보이며, 챈들러만큼 냉소적이지만 챈들러보다는 훨씬 따뜻한 느낌이라 누가 읽어도 만족할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위 인사이트 밀 - 요네자와 호노부

산 속의 고립된 건물 '암귀관'에서 열두 명의 참가자들이 거액을 놓고 추리 대결을 펼친다. 간단한 규칙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면 시급 2배의 보너스를 받는데 이 금액은 누적된다. 또한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탐정이 되어 살인자를 밝혀내면 시급 3배의 보너스를 받게 되고 이 금액도 누적된다는 식. 세상에 돈 마다하는 사람 없듯이 참가자들 중에서도 돈이 궁한 사람이 있었고, 그는 암귀관의 규칙을 적절히 활용하며 시체를 하나씩 늘려 나가 보너스 금액을 올린다. 하지만 암귀관에는 탐정 역을 맡은 유키도 있었으니 그는 안 돌아가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 범인의 정체와 범행의 진짜 목적을 밝히는데 도전한다! 흔히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본격 미스터리의 단점을 오히려 극한까지 밀어붙여 마치 게임같이 속도감 넘치는 새로운 스타일의 미스터리로 만들어낸 역발상이 돋보인다. <배틀 로열> <큐브> <쏘우> 같은 잘 만든 스릴러 영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Y의 비극> 같은 고전 본격 미스터리까지 다채로운 작품들의 재미가 혼합되어 있어 시종일관 기분 좋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논스톱 퍼즐 미스터리!
1위 고스Goth - 오츠 이치

열일곱 살에 등단한 괴물 혹은 천재 작가 오츠 이치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 다른이의 죽음을 보고 싶어하고, 끔찍한 살인사건을 조사하며 살인자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고스 족'인 '나'와 밤을 사랑하는 소녀 요루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집에서는 평범한 부모의 아들이며 좋은 오빠지만 나의 어두운 내면을 알고도 여전히 나를 똑같이 대할 수 있을까? 나와 요루는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6개의 기묘한 사건과 맞닥뜨리며 인간 존재의 심연을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만다. <ZOO>와는 달리 매번 같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연작 단편집으로 연쇄 토막 살인사건을 본격 미스터리풍으로 멋지게 풀어낸 '암흑계'와 기가 막힌 반전이 돋보이는 '개'가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모든 작품들이 전부 수준급 이상이다. 우리와는 사고 체계가 다른 '비정상적인' 나와 요루가 서로의 아픔에 교감하며 조심스레 손을 내미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도 찔끔 났음을 고백한다. 개인적으로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멋진 독서를 했다고 생각하며, 주인공들의 연령이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빌미로 정부에서 내린 어이없는 19금 판정도 쉽사리 잊지 못할 것 같다. 작가 후기를 보면 오츠 이치는 애절한 이야기에는 강하나, 미스터리에는 약하다는 평판을 듣고 미스터리를 강화하기로 마음 먹고 썼다고 하는데,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느 정도의 노력을 통해 그 부분을 확실하게 채워 넣은 능력을 보면 과연 천재다, 하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게 된다.
베스트 단편
<제3의 시효> 중 '제3의 시효' - 요코야마 히데오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탁월한 이 단편집에서도 가장 빛나는 작품이 바로 표제작인 '제3의 시효'다. 15년이라는 살인의 공소 시효를 앞두고 있는 강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구스미 반장 이하 F현 경찰청 강력계 2반의 민완형사들. 모든 힘을 쏟았지만 아무 성과도 없이 사건의 종료가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감정이 없는 듯한 냉혈한 구스미 반장은 제2의 시효,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제3의 시효를 준비하며 범인을 압박하는데...제3의 시효가 주는 기발함과 통렬한 반전, 작가 특유의 감동과 인간미가 어우러진 정말 잘 쓴 단편이다. F현 경찰청의 경관들이 돌아가며 주인공을 맡는 이 단편집은 표제작 말고도 거의 모든 작품들이 높은 완성도를 자랑해 감히 필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