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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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좌파로 불리는 김규항이 강독의 형식으로 마르코복음을 읽고 자기나름의 해설을 덧붙였다. 

저자는 예수를 교리대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즐기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하는 자, 즉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로 우리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리는 자로 해석한다. 

여자, 아이들, 병자, 변방 이민족들까지 두루 아우르며, 가장 낮은 자를 섬기는 임금으로 살았던 예수의 삶을 성서의 구절들을 하나하나 인용해 밝혀본다. 많은 이적들 어디에도 '나'를 세우지 않고 '당신의 믿음'이 그들을 살렸다고 말하며,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애끊는 마음으로 함께하면서도 위선적인 율법자, 지배자에게는 누구보다 단호한 분노를 보인다. 

오늘날 '돈을 많이 번 사람은 하느님에게 축복받은 것', '예수는 비폭력주의자' 였다는 주장들이 예수 자신의 의중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도 보여준다.  

예수는 결코 돈을 많이 번 사람을 축복받은 사람으로 인정해 가난한 사람은 반대로 죄가 있는 것처럼 소외시키지 않았으며, 이교도와 천대받던 세리들, 죄수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오히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저 높은 곳의 하느님이 아닌 우리 눈 앞에 일어나는 불의와 학살과 온갖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받는 분으로서의 하느님, 곧 가장 약한 어린아이 하나를 섬기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같이 보았던 사람이 예수이다.   

예수의 평화는 저항으로서의 평화였다는 것을 밝힌다. 평화는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라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노력이야 말로 평화로운 일이라고 봤다. 실제 예수는 예루살렘의 회당앞에서 사제들과 결합해 높은 가격에 제물을 파는 장터를 생의 마지막 날들에 엎어버린다. 또한 지배자 로마군대를 인민에게 들린 귀신에 비유하여, 돼지 몸으로 보내 호수에 빠트려 죽이는 서슬퍼런 비유도 서슴치 않는 이 이기도 했다. 

김규항은 예수가 왜 사형을 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로마 뿐만 아니라 로마에 빌붙은 같은 민족 지배층, 또 이스라엘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고 백성들을 돕고 있는 것처럼 일견 보이지만 온갖 율법들로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는 바리사이인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탄압을 받는다. 즉 지배체제에 의해 사행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규항은 갈릴래아 변방, 로마와 유다의 지주들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의 땅의 한 청년이 매시아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었으며 왜 죽임을 당해야만 했는지를 말한다. 김규항의 책속의 예수는 2000년 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거짓 믿음과 거짓 교회가 판치는 이 사회에, 이 잔인한 자본주의 시대에 그저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죽음으로서 아니라고, 바르게 사는 삶은 '나를 이해하고, 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태일은 학교를 다닌 기간이 다 합쳐야 4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노동법을 읽고 제 목숨을 버릴 줄 알았다. 여기 무수한 책을 읽은 나는 참으로 알고 있는지 반성이 된다. 

<책속의 구절들> 

P13

예수는 새로운 사회의 실체는 그 체제나 법 같은 형식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성원들의 지배적인 삶의 방향과 결에 있음을 되새겨 준다. 

P32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예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누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와 대화하려 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P54~56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인자는 또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중략)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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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 제도가 사람을 위해 생긴것이지, 사람이 제도를 위해 살지 않는다. 최근 장애인분을 위해 정류장이 아닌 병원 앞에 세워준 버스기사에게 벌금을 부과한 판사는 이 점을 고민해 봐야한다.

P68

신앙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참여인 것이다.

P73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이해하고 느끼는 건 물론이려니와 삶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P80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왔고 지금 이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P103

하느님 나라 운동에 임하는 사람은 운동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쓰이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P110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중략)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P185

남보다 많이 갖는 게 축복이 아니라 내 것을 없애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게 축복이라고 말한다. 

P196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가 무작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교회가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거나 야합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다. 

P210

가난한 사람은 남보다 적게 가짐으로써 모든 사람이 고루 갖게 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으며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그러므로 당연한 이치일 뿐이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들!

그대들은 웃게 되리니.

(루가 6:20~21)

<함께 읽으면 좋을 책>


 

김규항씨와 같은 한신대 출신의 신학자입니다. 학자인 만큼 일목요연하면서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게 쓰여진 책입니다. 평소에 의심이 가던 성서의 많은 구절들이 이 책을 읽고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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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5-2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서는 전 세계 많은 이들이 믿는 기독교의 경전이지만 의외로 자의적으로 해석할 부분이 무척 많습니다.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몰몬교도 나오고 통일교도 나오고 요즘 말썽이 많은 JSM(?)인가도 있고 아무튼 타 종교에 비해 의외로 이단이 많은 종교지요.
이 책도 지은이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책들중의 하나인것 같군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읽기 좀 그렇겠지만 나름대로 이런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5-22 16:31   좋아요 0 | URL
교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아니겠습니까?
가끔 염화미소를 떠올리는데, 부처가 연꽃을 들어올리는 마음을 아는것처럼 시공을 넘은 예수의 마음의 이해,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그닥 그렇지만 저희 어머니는 나름 독실하신데, '똥누는 것도 예수쟁이처럼'이 모토십니다. 참 맞는 말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