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에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장 피에르 주네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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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에 - 가장 작은 일상에로의 그녀의 침투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머라는 것은 욕이라는 것이 들어가야 제 맛이다. 우리의 가장 간지러운 곳을 살살 긁어 주는 것처럼 욕이란 건 참 묘한 뉘앙스의 매력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경우 세계에서 욕에 관한 어휘가 가장 많다고 하니, 우리 민족만큼 그 효용 가치에 대 해 절실히 고민해 본 민족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지 얼마 전 한 참 영화극장에서 개봉한 ‘공공의 적’은 그러한 우리의 뉘앙스의 틈새를 잘 파고들어, 통렬하고 시원한 유쾌함을 선사해 준 바가 있다. 사실 강석우식 개그라는 것이 원래 투캅스에서도 이미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욕과 비린 인간군상의 졸렬함을 더티하지 않게 섞어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식이도 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말리에를 이야기하려는 찰나, 욕과 ‘공공의 적’을 들먹이면서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느냐 하면, 프랑스식 코미디인 아멜리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우린 가끔 프랑스식의 코미디를 접할 때 조금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이건 완전히 몽상적인 것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개그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같이 욕과 비린 인간군상의 리얼리즘이란 코미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참으로 프랑스식 유머는 부르주아하고 느끼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유머가 지닌 어처구니 없는 풍자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라는 그 이유로 우리의 현실을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진 않게 다시 바라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특히 내 개인적으론 이 아멜리에라는 작품이 더욱 요즈음 내 상황과 엇물려 그러한 감성과 단상들을 제공해 주었던 것 같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 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뭔가 유치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몇 시 몇 분에 몇 번의 날갯짓을 하는 쇠파리 얘기와 뜬금없는 사람들의 우연 속에 누군가의 정자가 누구가의 난자를 침투해 들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아멜리에의 탄생.. 그것도 모질라 이제 아멜리에의 가족에 대한 인물 묘사는 다소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물 묘사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히스테리투성의 어머니, 그리고 자기 세계에 옹골차게 빠져 있는 아버지... 특히, 이 집안이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의사라는 아버지가 딸을 일주일에 한 번씩 청지기를 대고서 진찰을 하는데, 아버지에게 안기길 원해 심하게 콩닥거리는 딸의 심장 박동 수에 딸을 심장병이라 착각하여, 딸을 일반학교로 보내지 않고 그냥 집안에서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공부하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황당한 설정도 얼마 안 가, 어느 성당에서 자살 기도를 하여 떨어지는 사람에 깔려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이제 아말리에는 완전한 외톨이가 되어버린다는 무리한 설정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쯤 되면 보통, 평범한 영화의 분위기라면 무언가 슬픈 사랑의 예감이라든가 인간내면의 깊은 상처에 대해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인 가정 속에서 이 영화는 되려, 고독한 아멜리에의 공상의 순수함과 천진함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여하튼 영화의 서론은 이쯤에서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다 자란 아멜리에라는 처녀에 대한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된다.

 

  23세살의 아멜리에는 어느 술집에서 서빙을 하며 혼자 살아간다. 그리고 주말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그밖에 달리 사람과의 접촉은 없어, 주로 사람을 관찰하거나 혼자 공상하기를 즐긴다. 사실 그녀의 이웃들 또한 괴팍하기 그지없어 각자 자신의 똬리 속에서 나오려 하질 않는 인간들이라 그녀가 호기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기도 하다. 예를 들면, 뼈가 약하여 ‘유리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맞은편 밑에 층 노인은 자신의 집안의 모든 물건들에 헝겊을 둘러싸고서 자신 또한 푹신한 헝겊으로 칭칭 감아 외부로 은둔한 채 평생 고독하게 그림만을 그리며 살고 있다든지, 집주인인 듯한 관리인 아주머니는 십 수 년 전 어떤 여자와 눈이 맞아 파나마로 달아난 남편에 대한 집착을 지우지 못하고 평생 자신의 젊을 적에 남편이 자신에게 보냈던 연애편지만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고, 아멜리에가 항상 들리는 채소가게에 일하는 청년은 사람보다 채소를 사랑하는 약간은 아둔한 사람이며, 그 주인은 그런 청년을 맨날 못살게 구는 재미로 살고, 아멜리에가 일하는 술집의 단골들 중에는 한 여자를 스토킹 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 있다든지, 평생 작가라 하여 실패한 자신의 삶에만 골몰하는 어처구니없는 소설가라든지, 심한 신경쇠약증이 있는 담배가판대의 아줌마라든가... 온통 비정상적이고 괴팍한 사람들만 가득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꼬이고 꼬인 인간군상의 모습 속에서 아주 우연히 아멜리에에게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 눈에 띄게 된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아파트의 한 귀퉁이 속에 십 수 년 전부터 숨겨져 있던, 이젠 다 늙은 중년 노인이 되어 있을 법한 사람의 장난감 상자였다. 그런데 왜 하필 장난감 상자일까? 일단, 이 답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어떻게 이 장난감 상자를 통해 엉켜진 인간군상의 매듭이 풀어져 가는 지를 먼저 지켜보기로 해보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주 우연히 수 십 년 전 어느 소년의 장난감 상자를 아멜리에는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이 장난감 상자를 만일 이제는 늙은 중년이 되었을 그 사람이 되찾는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돌변하지 않을까? 너무나 천진한 아멜리에는 그리고서 바로 결심하게 된다. 이 보물 상자의 주인을 찾아주겠노라고.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기뻐한다면 자신은 평생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살고, 그렇지 않으면 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여주인공 아멜리에는 보물 상자의 주인을 수소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닫힌 자신의 세계를 열고서 주위의 이웃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 왜 자신의 이웃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닫혀 살고 있는 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아울러 장난감 상자의 주인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는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은 주인공이다. 하여, 보물 상자의 주인에게 상자를 직접 건네주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발휘하여 보물 상자 주인을 감동시킨다.

 

  보물상자의 주인공 "브레또도"씨는 매주 화요일 닭을 사서 푹 삶아서 닭의 안쪽 허벅다리를 골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중년의 늙은이이다. 그런데 그 화요일엔 이상하게도 닭을 사지 못하고 어느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멈추게 된다. '따르릉.. 따르릉..' 난데없이 공중전화에서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브레또도씨는 다소 어이없는 상황에 얼떨떨해 하다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뚜- 뚜-", 전화는 바로 끊겨버린다. 이 게 무슨 상황일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그 때, 공중전화 박스 위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조금한 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름이 써져 있고, 안에는 누군가의 사진과 조금한 장난감 자전거와 몇 개의 작은 장난감들이 담겨 있다. 순간, 브레또도씨는 과거의 모든 일을 기억해낸다. 자신이 사이클 대회에서 일등 했던 일, 숙모의 속치마, 그리고 자신의 딸과 어린 손자... 하염없는 눈물이 새어나오고.. 맞은 편 어느 술집에서 아멜리에는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뚜벅.. 뚜벅..' 까닭 없이 눈물을 참지 못하는 중년의 남자가 아멜리에가 몰래 숨어있는 술집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술을 시키면서 술집 주인에게 감격하여 혼잣말하듯 말한다.

      

  "여보게 술 한 잔 주게.. 참 이상하지.. 누군지 모를 나의 천사가 나의 보물 상자를 찾아 주었어.. 그런데.. 참 인생은 너무나 신기하단 말이지.. 나는 수 십 년간 살았는데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상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말리에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지고, 이제 아멜리에 삶의 잔잔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다시 이야기의 앞으로 돌아가 잠깐 왜 하필 장난감 상자인지 생각해 보자. 어릴 적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소중한 것들이 있게 마련일 게다. 그런데 그것은 조금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 보면 아주 하잘 것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내 경우에는 어릴 적 조금한 고무 인형과 지우개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난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대개의 이름이라는 게 스포츠 선수 이름이거나 어디선가 들은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이었지만. 여하튼, 난 고무인형과 지우개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나의 큰 낙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그 중학교 시절, 나의 고무인형과 지우개는 어머니, 아버지에 의해 어딘가로 버려져야만 했다. 물론, 몰래 동네 쓰레기장까지 뒤져 거의 고스란히 되찾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다시 발각되어 어딘가로 숨겨진 후, 난 그것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난 어떤 만화책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난 알아요.’라는 당시 유명 가수의 히트곡 이름을 제목을 갖다 붙인 해적판 만화책이었는데, 당시 거의 용돈을 타지 못했던 내가 꼬박꼬박 돈을 모아 전권을 다 산 다음 그 책을 얼마나 또 읽고 또 읽었던 지. 그렇지만 결국, 그 책들 또한 어딘가로 숨겨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전 동생이 어딘가에서 그 만화의 애니메이션을 다운받아 놓아, 나는 다시 그 만화를 볼 수가 있었다. 내용의 수준을 떠나, 얼마나 재밌던지.. 나는 수 십 번 보았던 그 만화를 대사까지 외워가면서 자꾸 또 보고 또 보게 되는 것이다. 왜? 왜.......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너무나 많은 기준들과 책임들 속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좋아하는 것 또한 그러한 기준과 책임들 따위에 얽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기준과 책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놓여 있지 않을 때는 정말 무가치 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어릴 적 자신의 장난감 상자엔 그런 것들이 놓여 있을 리 만무하다. 그네들은 늘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이라는 외부적 요인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아무 가치 없는 것일지라도, 아직도 나의 고무인형과 지우개 그리고 만화책은 그 존재 자체로 나를 지탱하고 이루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즉, 실제로 나를 이루고 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란 이런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아닐까? 그러나 그네들은 그 자체로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다. 그 어떤 이유나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 자체!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나중에 아주 나중에 돌이켜 보게 될 때, 혹 가장 생각나는 것은 이런 보잘 것 없고 자잘한 것들이 아닐까? 물론 너무나 오랫동안 묻혀 있어 빛바랜 그 색채를 되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여담은 이쯤 해두기로 하고, 다시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에게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멜리에는 브레또도씨의 보물 상자를 찾아 준 후 이제 삶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동안 공상의 나래 속에서만 인형과 더불어 살던 그녀의 생을 다소 헝클어진 자신의 이웃들과 더불어 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성에 갇혀 있던 탓에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가 주위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법은 소리 없이 다가가는 비상한 작전들로 시작된다. 먼저, 앞에서 이야기한 채소가게의 채소를 사람보다 사랑하는 청년과 그 못된 주인아저씨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아멜리아 같이 순박한 처녀에게는 늘 무언가 남다른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을 보는 시각 또한 매우 다른 것이 통례적이다. 예를 들면, 그 채소 청년의 경우 다소 아둔하기에 일반적인 처녀들의 시각에는 다소 피하고 싶은 존재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그 못된 채소가게 주인이 채소 청년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걸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해맑기 그지없는 주인공 아멜리에는 채소청년의 그 우둔함 속에서 순수함을 발견해 낸다. 하여, 그 못된 채소가게 주인을 골려주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기가 막히다.

 

  어느 날 우연히 채소가게 주인의 집에 들를 일이 있어 들렸던 차에, 아멜리에는 채소 가게의 주인집 열쇠가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착한 마음에 채소가게 주인에게 돌려주려 채소가게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채소가게 주인이 또 불쌍한 채소 청년을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멍청이가 어떻다는 둥 그렇다는 둥. 아주 개인적인 프라이버시까지 무시해가면서 채소 청년을 모욕하는데... 순간, 분노한 아멜리에는 그 길로 열쇠 집으로 달려가 버린다. 그리고 똑같은 열쇠를 복사하고선 아주 몰래 채소가게 주인집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선 채소가게 주인의 아주 사소한 일상들을 밉지 않고 귀엽게 망가뜨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계를 앞으로 빨리 앞당겨 채소가게 주인이 새벽에 일어나 일할 채비를 하게 한다든지, 포도주에 소금을 가득 뿌려 맛을 변질시킨다든지, 디자인은 똑같지만 작은 실내화로 바꿔치기를 한다든지.. 아주 사소하지만 삶에서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채소 가게 주인이 자기 자신이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끔 한다. 더불어, 순박한 채소 청년을 교묘히 이웃에 옹골진 유리인간 노파와 맺어줌으로써 평생 고독하게 살아온 노파의 마음 문을 움직이게 만들고, 또 평생 자신을 배신한 사랑했던 남편 때문에 슬픔으로 살아가는 아파트 관리인에게 40년 만에 되돌아온 거짓편지를 찾아주어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다시금 행복을 되찾아준다든지...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였던가? 이렇게 주위 이웃의 수호천사처럼 행복의 전령사가 된 아멜리에는 유독 심한 자신의 그 부끄러움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다. 아주 우연히 어느 즉석 사진기계에서 두 번 부딪친 남자...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재밌는 설정은 이 남자 또한 아멜리에 못지않은 공상가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의 취미는 즉석 사진기계에 사람들이 찢어버린 사진 조각들을 모아 스크랩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 스크랩북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를 쫓아가다 그것을 발견한 아멜리아가 습득하게 된다. 그러면서 두 몽상가의 몽상적 사랑이 우연히 시작된다. 하지만 몽상가가 사랑한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몽상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몽상이란 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몽상가라 함은 현실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늘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목이 메어 있는 종류의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하여, 보통 이런 경우 사랑이란 것은 미지의 대상일 경우 가능할 뿐, 정작 현실에선 사랑을 못하는 것이 공식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또 다시 색다른 시각으로 이 두 몽상가의 사랑을 맺어주고 있다. 바로 처음부터 은근히 강조하였던 아멜리에의 몽상의 그 순수성 그 천진난만함이 되려,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멜리에의 그 순수성은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다. 이것은 순수하기에 오는 결과이다. 자신의 그 순수함을 지속적으로 지켜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이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그렇다면 역시 몽상가의 사랑은 다가서지 못하는 그 거리에서만이 존재하며 끝이 나야 하는가? 그렇지만 다행히도 영화 전반에 두드러지는 해피한 분위기는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면, 남이 머리를 깎아주면 되는 것이다. 몰래 행복의 전령사 노릇을 하였지만 그것을 이미 그 이 전 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유리인간 노파는 자신의 빚을 아멜리에의 사랑을 맺어줌으로써 갚는다. 그리고 영화는 두 몽상적 연인의 사랑과 더불어 모든 것이 아멜리에의 공상처럼 아름답게 풀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기술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 전개와 상관없이 유독 내 자신에게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반대로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 내내 난 우리나라의 코미디처럼 통렬하진 않지만 잔잔한 미소를 띨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감지하고 정리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그러한 주제로 나는 보물 상자 이야기와 함께 아멜리에의 작은 일상으로의 침투가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에 대해 떠올려 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의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 것 같다. 모든 것은 우연에 기인하고 있고, 또 설정 또한 괴팍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사람들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떤 거대한 신념이라거나 혹은 현실적인 것이 아닌 되려, 매우 하찮고 비현실적인 공상과 우연들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을 가능하게끔 하며, 우리는 거기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모두가 부인하기 힘든 너무나 명료하고 자명한 사실이다!! 일단 영화라는 그 전반적인 분위기를 떠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찬찬히 아주 작지만 익숙하게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들을 살펴보자. 그다음 자신의 보물 상자를 하나 만들어, 거기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넣어 보자. 그리고 그런 달콤한 몽상들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오롯이 꺼내어 놓고서 남몰래 미소 지어볼 수 있다면, 그래도 삶은 살아볼만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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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크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초특가판]
울리 에델 감독, 제니퍼 제이슨 리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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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이 영화가 나온 지도 벌써 20년 정도가 지난 거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의 제목만으로 매료되어 이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지도 어느덧 훌쩍 십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 며칠 전에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몇 차례 시도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무슨 일이 있어, 정작 비디오를 빌려 놓고서도 보지도 못한 채 갖다 주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10년이 넘은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영화를 본 지금, 나는 그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껴보며,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 써야하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지금 여기에 옮겨보고자 한다.

 

 

  영화는 크게 세 구조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노조 총파업이라는 브룩클린의 상황 그리고 임시 노조 위원인 해리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창녀 트랄라의 이야기. 이 세 축을 중심으로 양념과 같이 게이와 건달들이 껴있다. 그리고 언뜻 이 정도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 우리는 이 영화가 "분노의 포도"와 같은 노동 영화 계열이거나 혹은 인권 영화, 아니면 새로운 시각의 동성애 영화? 뭐 이런 것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모든 것들을 역으로 뒤엎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매우 강렬한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내 개인적 성향이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폭 좁은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탓이 클 게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이 지면을 빌어 나는 나의 그러한 시각 하에 영화의 세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 구조를 새롭게 설정해 봄으로써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일단은 먼저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설정한 브룩클린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50년대 공장지대인 브룩클린 시는 노조가 완전히 총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매우 살벌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벌써 파업은 장장 6개월 간 지속되었으나, 경영자측은 묵묵부답이고, 모든 브룩클린 사람들은 노동을 포기한 채 노조가 주는 배급식량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장기적 파업 상황에 지쳐 중도이탈을 하여 한두 명씩 공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들도 사실은 현 상황에 매우 지쳤으나, 이제까지 버텨온 6개월이란 시간 때문에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일 뿐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브룩클린이라는 상황이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스러운 분위기인지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려,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노동자들의 절망 혹은 현실의 냉혹함 등에 전혀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 설정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살만한 것으로 나오며, 우리의 주인공 해리의 경우엔 이 상황으로 인해 신분적 상승을 맞이한 케이스로 등장한다. 즉, 영화는 분명 노동과 파업이라는 어떤 현실 보다는 그 현실 속에 감추어진 무언가에 관심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주인공 해리에게로 건너가 보자.

 

 

  주인공 해리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임시적으로 노조위에서 노동자들의 배급과 기타 상황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임명한 임시 노조 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래 파업 전에는 일반 노동자와 같은 신분이었으나 이러한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급격한 신분상승을 체험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을 통해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해리가 다소 단순무식한 과격분자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과 오히려 파업이라는 상황을 다소간 즐기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현듯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없는가? 우리의 과거를 잠깐 기억해 보자. 아마 소설로써 우리는 그 상황들을 간접 체험 했겠지만, 6.25 당시 공산주의가 들어왔을 때,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채워 주었던 완장의 힘과 공포를 우리는 잠깐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의 주인공 우리의 해리는 그 정도로 무식하거나 단순한 존재는 아니다. 다만, 그의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쥐어진 신분을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러하기에 영화 내내 다소 불안해 보이고, 약간은 초조한 듯한 기색을 띄운다. 사실 그 전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노조위원이 되면서 그는 건달들과 자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접하게 된 듯하다. 이를 통해 노동에 익숙해 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되려, 술과 유흥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그는 노조위원이라는 커다란 직책으로 인해 가정에는 매우 소홀해 지게 되는데, 이러한 소홀함은 아내 앞에서의 성적 무력함으로 표현되어지고, 게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진다. 그런데 왜 하필 게이인가? 사실 영화는 여기서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다. 왜냐면 기존의 게이가 놀림감의 양념처럼 등장한 영화라 하기엔 게이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 너무 생생이 표현되어져 있고, 그렇다고 게이를 위한 영화라 하기엔 게이라는 대상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써 영화에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간의 억지적인 설명을 부가해 보자면 노동을 잃은 노동자의 모습과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닌 게이의 모습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과, 이 영화가 남자인 해리 그리고 여자인 트랄라 중심의 축 속에 중성의 인간 게이라는 축을 숨겨두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여하튼, 해리는 같이 자주 몰려다니던 건달들과 함께 어울리던 게이들을 알게 되고, 그 중 한 게이와 친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은 어이없는 것은 이 해리가 좋아하게 된 게이의 경우 매우 호사스런 생활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치 해리의 신분상승이 아니고선 접근할 수 없는 존재처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여기서의 게이의 이미지는 고급매춘부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 고급 매춘부인 게이에게 해리가 깊이 빠지게 됨으로써 이제 해리는 스스로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왜냐하면 게이의 호사스런 생활수준을 맞추어 주기 위해 해리가 공금을 마구 이용하게 되고, 노조 일에 소홀해 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조위원회는 해리를 바로 해고시키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노동을 잃은 노동자가 파업의 상황에서 상승한 신분마저도 잃게 됨으로써 가장 무력한 인간 실존의 상황의 모습으로 변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완벽한 무력함을 입증하는데 있어, 영화는 해리가 집착하였던 게이에게마저 철저히 버림을 받음으로써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해리에겐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다. 그러나 해리는 그 전에도 가정에서 무력하였다. 그런데 이제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가 어떻게 가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쉴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게이라는 존재에 깊은 애착을 가진 그에게 아내의 존재가 눈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불행히도 해리는 술에 취해 자신이 좋아했던 게이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에서 방황을 한다. 그리고 거의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길가에 엎드려져 있는 순간, 자신을 일으켜주는 한 미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욕정으로 불타올라 해리는 소년을 강간하려 한다. 그러나 소년은 해리를 뿌리치고 달아나, 바로 얼마 전까지 해리 자신 밑에서 자신을 돕던 건달들을 불러온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해리는 끔찍하게 얻어맞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이런 해리가 완전히 피투성이가 된 채 마치 십자가에 걸린 모습처럼 어느 철조망에 매달려 "오~ 하나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절규를 부르짖게 하며, 해리를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해리의 이야기를 멈추고 트랄라의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단순히 해리라는 한 가지 축으로만 설정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또 기존의 방식인 해리와 트랄라라는 공동주연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서로를 알고 일정선상에서 연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둘은 전혀 다른 삶들을 통해 각기 무언가를 대변하고 있고, 그것은 브룩클린이라는 마지막 상황과 대치되어 부각되어 지는 것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어쩌면 너무나 천박한 창녀 우리의 여주인공 트랄라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트랄라는 말 그대로 완전히 걸레 같은 창녀이다. 그녀에게 남자는 오직 돈이며,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남자를 유혹함으로써만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녀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트랄라는 해리 밑에서 일했던 그 동네 건달들과 한편을 이루어, 보통 지역의 순진한 군인들을 유혹하여 부둣가로 데려온 다음, 군인들을 기절시킨 후, 동네 건달들과 함께 돈을 갈취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 당연 브룩클린에서 트랄라의 평판은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트랄라의 생김새는 어찌 그리도 천박한 창녀 모습 그 자체인지... 그럼에도 철없는 한 소년은 이런 트랄라를 매우 연모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나 트랄라란 여인 속에선 낭만이라든가 사랑이란 감정은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조그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 건달들과 군인을 유혹하여 돈을 갈취할 때에 여자이기 때문에 건달들로부터 불평등하게 돈을 분배 받는 것에 못마땅해진 트랄라는, 이제 군인을 유혹하여 건달들에게 넘기는 것을 그만두고, 아예 군인들을 유혹하여 돈을 뜯는 방법으로 사는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던 중 트랄라는 이제 갓 훈련소에서 나와 이제 곧 있으면 해외로 파견 나가게 될 한 젊은 군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매우 불안해 보이지만 순진해 보이기 짝이 없다. 그러니 우리의 트랄라의 레이더에 어찌 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트랄라는 평소처럼 군인을 유혹하여 군인과 자고 난 뒤, 군인이 잠 든 틈을 타 호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순진한 이등병은 잠들어 있지 않았고, 트랄라가 자신의 옷에서 돈을 찾고 있는데도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창녀 냄새 풀풀 나는 트랄라에게 며칠이라도 좋으니까 자신이 해외로 떠나기 전까지 함께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트랄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붕 떠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트랄라가 그 정도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껏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는가? 그 거친 삶들을 생각해 볼 때, 트랄라는 이 젊은 군인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 더 돈도 많이 뜯어낼 수도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지금 하는 짓으로 봤을 때 이 순진한 녀석이 떠나기 전 자신에게 간이라도 빼줄 거 같아 보이기에,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함께 한다. 아니, 트랄라는 완전히 봉 잡았다 생각하고 며칠 동안 그오 함께 한다. 그렇지만 동상이몽이었을까? 군인이 떠나가는 날, 트랄라는 군인이 파송될 배까지 마중 나온다. 그리고 군인이 자신에게 지불할 화대를 기대하며 강한 눈초리로 군인을 바라다본다. 그런데 군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마치 자신의 애인을 두고 떠나는 양 쉬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아쉬워하다 트랄라에게 떠나기 바로 전 봉투 하나를 건넨다. 봉투에 두둑한 느낌이 돈이라고 생각한 트랄라 만면의 미소가 지어지고, 마지막 키스와 함께 트랄라는 군인을 떠나보는데, 웬 걸? 봉투 속엔 땡전 한 푼 들어가 있지 않고, 편지만 달랑 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군인 자기 자신을 위해 기다려 달라는 말, 자기도 트랄라를 위해 돌아오겠다는 말,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그러니 우리의 창녀 트랄라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는가? 순진함도 유분수지 이게 어디 될 법한 말인가? 그러나 트랄라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말들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었으며, 자신도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한 그것들을 모르게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앞으로도 창녀이어야 하고, 그것만이 자신의 살아갈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바로 여기서 트랄라는 심하게 갈등하게 된다. 영화는 트랄라가 가득 취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대변해 주고 있다. 마치 미친 듯이 술에 취한 트랄라는 수많은 남녀들이 춤추고 있는 술집에서 자신의 웃옷을 벗으며 당당히 소리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슴이다!!" 서글프게도 바로 이 말은 그 젊은 병사가 자신의 작은 가슴을 불평하자 해주었던 말이었다. 그리고서 트랄라는 수 십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관계를 갖기 시작한다. 실신하여 정신을 잃어버릴 때까지....... 그녀는 모든 남자의 욕정을 위한 도구가 되어 찢겨진 채 바닥에 엎드려져 있고, 그럼에도 수많은 남자들은 마치 그녀가 그것을 원하는 양 착각하여 그녀를 농간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죽어가기 일보 직전, 이제까지 남몰래 트랄라를 연모하던 소년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서, 주위의 모든 남자들을 쫓아낸다. 그리고선 트랄라의 벗겨진 몸을 덮어주며 처절히 통곡한다. 마치 수 십 명에게 얻어터진 듯, 고통스러운 표정의 트랄라가 가까스로 일어나며, 소년을 가슴에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어 준다.

 

 

 "울지 마.......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줘......."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 경영측이 모든 노조 측의 조건을 수락함으로써 승리한 노동자들의 의기양양한 출근의 모습을 담아내며 끝을 맺는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매우 복잡한 구조와 별 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 하려다 보니, 내용 전개가 너무 길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별개의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로 나아가고 있기에 매우 특별하다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도 밝혔듯이 이 영화는 결코 노동자 영화이거나 인권 영화가 아니다. 마치 영화의 설정과 마지막은 그러한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브룩클린으로 가는 출구가 아닌 비상구이다. 즉, 해리와 트랄라라는 파업에 있어 가장 소외되고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새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려가고 있음을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기존의 파업 영화였다면 우리는 여기서 파업이 가져다 준 절망과 더불어 그것을 겪고 일어난 인간성의 승리에 집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되려, 영화는 파업의 희생양이며 산 제물이었던 해리와 트랄라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던 민주주의, 진보, 좋은 세상에서 감추어져 왔고 숨겨져 왔던 진실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나아가 여기에 어떤 종교적 의미까지 상정한다. 해리는 바로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트랄라는 우리시대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상이다. 우리는 늘 그들을 밟고, 그들을 짓이김으로 발전의 도상으로 나아가 왔고, 영화는 바로 그 밟히고 밟혀서 가장 닳고 닳은 우리 시대의 처참한 그리스도와 마리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겐 다소 억지성 해석이라 받아들여 질 수 있겠지만, 영화는 서두부터 이러한 종교성의 물음으로 시작된다.

 

 

  "I will get up now and go about the city, through its streets and squares;

 

  I will search for the one my heart loves."

 

-Song of Songs 3:2

 

 

  "내가 지금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서 일어나 나의 마음의 사랑하는 자를 찾을 것입니다."

      

  -아가서 3장 2절 중에서

 

  그리고 영화는 바로 현대라는 도시와 브룩클린이라는 거리에서 파업이라는 광장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사랑하는 자 해리와 트랄라를 진심으로 찾은 것이다. 더불어 영화 중간에 이와 함께 또 다른 축으로 해리가 거느렸던 건달을 사랑했던 한 게이의 죽음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아야만 할 것이다. 다만, 감독으로써 그러한 게이에 대해 중심을 두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중성적 인간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고, 단지포용대상으로써의 객체적 인식 속에서 자리매김 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는 우리 시대에 짓밟힌 그리스도와 어머니 마리아가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끝없는 탐욕은 파업의 승리의 깃발을 치켜세우며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현대성이라는 거대한 공장 속으로 발걸음 하고 있다.

 

 

  그러나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기를....... 정녕 그러하다면 오! 하나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 영화 속 절실한 물음을 던져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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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할인행사
에이나인미디어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옅은 파란빛 파스텔 톤의 영상에 누구의 손목인지 모를 가녀린 손목 위로 유난히 밝게 돋아 오른 새하얀 붕대, 한 손길이 애처롭게 다가서려 천천히 가 닿고 있지만, 어느 매정한 손길에 가로막혀 붕대를 두른 손목 위로 두 손길이 포개지고 있다. 그리고 산산이 조각나는 유리알들, 부셔진 창문의 창틀 사이로 한 소년이 비집고 들어와 진열장에 놓인 망원경 하나를 몰래 훔치고선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종교 영화의 거장, 블루, 화이트, 레드에서 보여준 빛깔의 마술사, 그리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의 신비에 관한 끊임없는 모색. 같은 종교 영화 계열에 타르코프스키식의 무언가 기괴한 이미지와 분위기와는 달리 얼핏 보아도 연민으로 가득 찬 크쥐토프 키에슬로우스키 감독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시린 뉘앙스의 묘한 전조와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 구조로 들어가고 있다.

 

  매일 밤 어느 시각이 되면 시끄러운 시계 소리가 어김없이 울려 퍼지고 소년은 거실에서 재미있는 TV프로를 보다가도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기에 둘러싸인 망원경 안으로 자신의 시선을 집어넣는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어느새 소년이 가 닿아 있는 곳은 맞은 편 아파트에 비어있는 쓸쓸한 집 하나, 어느 틈엔가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면서 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다. 한 삼십대 중년에 그리 어여쁘지도 않고 무언가 찌들고 지쳐 보이는 그러나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듯한 여자, 여자의 옷깃이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여인은 훌훌 자신의 옷을 마침내 다 벗어 재끼고선, 매일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욕조로 가서 몸을 씻고 부엌을 정리하고, 우유를 마시고....... 아마도 한 열 아홉이나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법한 소년은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사춘기적의 불타는 성적 호기심을 감당하지 못해 이렇게 관음을 즐기고 있으리라. 하지만 무언가 영화에서 풍겨 나오는 배경음악은 심상치가 않다. 소년이 망원경에 자신의 시선을 투입시키는 동시에 단조의 선율로 애잔하면서도 무언가 절제된 음악의 분위기는 대체 이 관음증 환자와는 어울릴 법하지가 않는 것이다.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나오는 관음증 환자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샤론스톤이 나와 떴던 `슬리버`에서의 환자의 모습도 아니고....... 단지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따스하고 애린 음악을 배경으로 깔은 것일까? 여하튼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소년의 시선과 음악은 이러한 관음과 뒤엉켜 여인의 몸짓 하나 하나에서 풍기는 자태를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역시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그렇게 단아한 여인은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집 문이 다시 열리고 그 나이 또래의 한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벌써 강렬한 키스신과 함께 뜨거운 정사에 대한 예감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것은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 찰나에 소년이 갑자기 망원경에서 자신의 시선을 떼어놓는 것이다. 그리고선 이 놈, 어이없게도 수화기를 들더니 가스 점검소에다 맞은 편 아파트 그녀의 주소를 대며, 점검이 필요하다 거짓 신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니나 다를까 한참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려는 두 중년의 불타는 남녀가 사는 그녀의 집에 초인종이 울리며, 가스점검부가 들어선다. 두 남녀가 극구 전화한 적 없다고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들어가, 두 남녀의 달아오른 육체를 식혀주는 것이 아닌가? 음흉하게 생긴 남자는 어이가 없어 그냥 돌아가 버리고, 여인은 요사이 자꾸 일어나는 이 일들이 심상치가 않다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분명, 여기까지 모든 행위는 스토커 이상의 행위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작태임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나 아직도 여운이 남은 시린 소년의 시선과 함께 무언가 다른 예감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어느 날 밤, 어김없이 소년의 시선이 망원경에 가 닿고, 비어있는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있는데, 한참을 지나도 여인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 오늘은 밖에서 외박을 하는 거라 여기고 소년이 실망한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거의 자정 지나 새벽쯤, 잠 못 들고 있는 소년의 귀에 요란한 차 소리와 함께 여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코 밖을 내다보니, 저 번에 그 남자와 여인이 다투고 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여인을 밀쳐 버리고선 홀로 자신의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여인은 힘겹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다. 텅하니 비어있는 집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여인, 결국 가눌 수 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식탁에 엎드러뜨리고 서글픈 눈물들을 뿌리는데. 뜨거운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소년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다가 아직 잠들고 있지 않을 친구의 어머니의 방으로 찾아간다.

 

  여기서 소년의 캐릭터는 매우 특이하다. 고아인 소년은 친구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친구는 세계 여행을 떠난 상태이고, 아마 소년이 친구의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듯하다. 그리고 학교에 다닐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우체국에서 정식 직원으로써 일을 하고 있다. 아마 법적 미성년 나이를 갓 지난 듯싶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상황이 이렇다면 분명 조금은 어둡거나 해야 할 소년이지만, 소년은 전혀 평상시에는 삐뚤어지지 않고 성실한데다 스스로 공부도 매우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여기서의 이런 소년의 캐릭터의 설정은 아마 감독 자신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지만, 중년의 여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나지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설정 가운데 얼핏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소년은 친구의 어머니께 질문을 한다.

 

  "왜 사람들은 슬퍼하는 거죠?"

 

  "왜 그러니? 토멕(소년의 이름) 무슨 일이 있니?"

 

  "아니오. 그냥 책을 읽다가....... 어른들이 너무 힘들어하면서 사는 거 같아서요. 전 그런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어요."

 

  "토멕, 지금은 세계 여행을 떠난 네 친구가 아주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아기였을 적에 일이란다. 너무 아파서 마치 곧 죽을 거 같은데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더구나. 정말 내가 그 고통을 대신 당할 수만 있다면 하면서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였어. 그런데 불현듯 옆에 코드를 뽑지 않은 다리미가 보이더구나. 그래서 내 어깨에 그 다리미를 조용히 갖다 댔어.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그러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더구나."

 

  약간은 이해할 수 없는 키에슬로우스키식의 대화가 이렇게 오간 후,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가위를 꺼내서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천천히 찍어 내린다. 한 번, 두 번, 가위는 손가락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조금씩, 조금씩 그 속도를 빨리 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은 눈을 감고....... 마침내 볼펜이 한 손가락을 거세게 찍어 내린 후, 선 붉은 핏방울과 함께 고통스러운 소년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소년은 미소를 머금은 것만 같다. 아마도 분명 소년은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관음의 대상으로써 이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이제 여인의 주위를 배회하며 자신의 존재를 천천히 알려간다. 소년 특유의 그 순진함으로. 예를 들어, 소년은 자신의 직위(우체국 직원임)를 이용해 가짜 용지를 만들어서 여인을 우체국에 들리게 만든다거나, 여인이 우유를 항상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괜히 수거하기 위해 내놓은 병을 몰래 치우고선 가짜로 빈 병을 받기 위해 새벽에 여인의 집에 초인종을 눌러, 여인을 귀찮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소년이 자꾸 가짜 용지를 만들어 우체국에로 여인을 헛걸음을 시키면서 여인이 우체국 직원들에게 모욕을 받게 되기까지 하는데 있다. 물론 소년이야, 아마 그 순진함 때문에 그런 거 저런 거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여인을 보기 위해 그런 행위를 한 것이겠지만, 어른의 사회에서 위조 서류라는 문제는 만만치 않은 것이기에 여인은 심한 모욕을 당하고, 서러이 우체국 밖으로 쫓겨 나가게 된다. 이에 소년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여인의 뒤를 쫓아가 소리를 질러 여인을 멈춰 서게 한다.

 

  "잠깐만요.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너무나도 어이없는 한 마디, 순간 놀란 여인이 뒤를 돌아 소년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요."

 

  "그래. 난 아무 잘못도 없어. 하지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혹시?"

 

  "네. 다 제가 꾸며 낸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기가 찬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년을 모멸 차게 바라다보다가 다시 소년에게 놀라 묻는다.

 

  "뭐! 뭐라고... 사랑한다고... 날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오. 전 당신을 잘 알아요. 어젯밤 당신은 울었어요!"

 

  소년의 어이없는 대답들에 여인은 이제껏 자신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감을 잡고선 너무나 경악을 한다.

 

  "그럼 이제까지 너였단 말이야! 전화를 하고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가짜 용지를 만들어서 나를 곤란하게 하고, 우리 집 주소로 전화를 해서 있지도 않은 가스점검을 받게 한 게 다 너란 말이야!!"

 

  "네..."

 

  너무나 화가 난 여인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년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럴 수가.. 그게 다 너였다니.. 정말 꼴도 보기 싫구나.."

 

  그리고선 여인은 '획' 하니 돌아서 소년을 남겨두고서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 날 밤, 여전히 소년의 시선이 여인의 집에 머물고 여인은 예전에 그 남자와 같이 있다. 그런데 여인은 소년을 의식한 듯 되려, 더욱 과감하게 옷을 벗어 재끼고선 가장 눈에 띌 만한 자리에 침대를 돌려놓는다. 남자는 뭔가 이상한 듯 주춤거리지만 여인의 적극적인 태도에 이내 의심을 풀고 다시 중요한 작업에 돌입하려 불을 끄려고 하는데, 여인이 자꾸 불을 못 끄게 만든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한 남자가 여인에게 왜 그러냐고 다그치자 여인은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흥분한 남자는 수화기를 들어 소년에게 신호를 보낸다. 순진한 소년은 그 신호에 그대로 응하고, 여인의 집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남자가 밖으로 나오라고 하자 무력하게 나와 남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여인은 불쌍하다는 듯이 남자를 말리고, 멀리서 소년의 친구 어머니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소년이 어김없이 시퍼런 눈덩이를 하고 여인의 집에 우유병을 치우러 들어섰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레 여인이 튀어나온다.

 

  "괜찮니?"

 

  여인의 손길이 소년의 파란 눈덩이로 다가서려 하자 소년은 두려운 듯, 시선을 떨군다.

 

  "미안하구나. 그렇게까지 할 줄은 나도 몰랐어. 하지만 이제 뭘 잘못했는지는 알겠니?"

 

  말없이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말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모습, 그래서였을까? 여인은 못내 애처로운 시선으로 소년을 응시하며 묻는다.

 

  "그리고 어제 나한테 했던 말.... 정말이니? 그러니까.. 어제 내가 우체국을 나왔을 적에..."

 

  "네..."

 

  "뭐라고 했었지?"

 

  집요하게 여인은 소년을 추궁한다. 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였을까..?

 

  "사랑한다고요.."

 

  "음... 사랑이라...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구나.."

 

  무언가 닳고 닳았으면서도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 여인의 표정은 찌든 듯 냉소하면서도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근데 너 같은 애가 왜 나같이 나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는 거지? 대체 넌 사랑이 뭔지 알고나 있는 거니?"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자꾸 생각이 나고... 보고 싶고..."

 

  "그래? 재밌구나. 흥미롭고.. 그럼 오늘 같이 저녁이나 먹자꾸나. 어때? 괜찮겠니?"

 

  "네.."

 

  갑작스레 환희의 들뜬 소년이 미친 듯이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내달리기 시작한다. 층계를 내달리며 옥상까지 숨 쉴 틈 없이 달려가 한 움큼 쌓인 눈덩이를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고선, 뜨거운 청춘의 미열을 달래본다. 분명 소년은 환희를 꿈꾸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날 밤, 같이 저녁을 먹고 이제까지의 모든 얘기를 솔직하게 나눈 뒤 헤어질 무렵, 여인은 자연스레 소년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주 능숙하게 소년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샤워를 하고,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고선....... 아직 자신의 미열을 감당할 수 없는 소년에게

 

  "난 지금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단다. 한 번 만져 보지 않을래..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자연스럽게 만질 수 있는 거란다. 왜냐면 사랑은 터치니까."

 

  여인의 손이 소년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얹어 놓는다. 소년은 괴로운 듯 그러나 뜨거운 본능을 어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점점 여인의 깊은 곳으로 자신의 손길이 미끄러지고 있음을 응시하고 있다.

 

  "지금 축축하게 젖어있지? 그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그 걸 하고 싶을 때 나오는 거란다... 괜찮아.. 더 가까이.. 더.."

 

  마침내, 끝까지 미끄러진 소년의 손길과 함께 소년은 그만 그 순간 사정을 해버리고, 여인의 무릎 위로 엎드려 진다.

 

  "벌써 끝이야? 안됐지만 사랑이란 건 이게 전부란다..."

 

  씁쓸한 여인의 말이 채 방안에 여운을 띄고 맴돌기도 전, 소년은 벌떡 일어나 여인의 집을 뛰쳐나간다. 그리고 마구 내달려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 후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 대야에 물을 받고선 칼 하나를 떨리 듯 움켜 쥔 채 자신의 손목으로 가져간다. 투명한 물 깊은 곳곳으로 뭉게구름이 퍼져 가 듯 빨간 선혈이 번져 지고 있다. 그렇게 소년은 쓰러지고서, 앰뷸런스에 실려 간다.

 

 

 

 

 

 

  여자의 예감이란 항상 무언가 분명하진 않지만 사건의 분위기를 감지 할 수 있는 더듬이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기 주인공인 여인은 소년을 떠나보내고선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소년의 집 쪽으로 응시를 한다. 그런데 그 아파트 단지에 앰뷸런스에 누군가 실려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선, 여인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우유 배달 시간, 소년이 자신 때문에 자살 시도를 하여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부터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날마다 소년이 여인을 응시하던 그 시선이 여인에게로 전이가 되어, 여인이 이제 부재하고 있는 소년의 집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창문에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라는 글귀를 써 붙이고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애처로운 여인의 모습은 이제껏 닳고 닳은 사랑에 대해 불신하던 어제의 여인이 아니다. 여인은 소년의 사랑이 자신을 바꾸었음을 깨달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제 용기를 얻어 소년의 집으로까지 찾아가게 된다. 다행히도 소년은 죽지 않았다. 마치 죽음에서 부활하여 사랑을 가르친 그리스도처럼 팔목에 새하얀 붕대를 두르고서 그렇게 누워 잠들어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소년의 친구의 어머니가 여인을 그냥 쉽게 들어서게 해줄 리가 만무하다. 몇 번의 헛걸음 끝에, 간신히 잠들고 있는 소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친구의 어머니는 그것도 매우 불안하여 소년의 방에 들어선 여인을 뒤쫓아 들어온다. 그리고 여인의 손길이 자신 때문에 고통당한 소년의 손목에게로 가 닿으려는 순간, 여인의 손길을 매몰차게 가로막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 많은 여인. 어이할 줄 몰라 서성이다가 돌연 여인의 시선이 소년의 망원경에게로 멈추어 선다. 그리고 마치 소년이 자신의 집을 쳐다보았을 때 같은 그 심정으로 천천히 망원경 안으로 자신의 시선을 집어넣는다.

 

  분명 비어있는 그녀의 집, 거기엔 서러움에 견디지 못하고 있는 여인 바로 자신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탁자에 엎드려 너무나 슬프게 울던 날, 엎드려진 여인에게로 소년이 천천히 다가서고 있다. 소년은 가만히 여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놓는다. 마치 어떤 거룩한 성화처럼 천천히 고개를 쳐든 여인의 뒷모습은 소년의 손에게로 기대어 지고, 자신의 가련한 손길을 소년의 어깨 위로 기대어 놓는다. 마치 구원을 향한 간절한 염원처럼. 그리고 망원경에서 시선을 뗀 여인의 옅은 미소가 어린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원래 키에슬로우스키 감독의 단편 연작 시리즈물이었던 ‘십계’ 중 여섯 번째 ‘간음하지 말라’라는 작품을 연장하여 각색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순수이 종교적으로 바라다 볼 것이 많기도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읽힐 수가 있다. 사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적에 나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선 조금은 야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는 나의 이러한 관음증과 욕망을 배반하고서 오히려, 그러한 욕망을 통해 시작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내 안의 진정한 갈망을 여실히 목도하게 해주었다.

 

  군대를 제대하고서 주체할 수 없었던 그 때, 진종일 새벽길을 홀로 몇 시간씩 나다니며, 이제 주어진 내 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신학생으로써 신에 대한 열망, 동시에 인간에 대한 열망, 욕망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으로 신 앞에 엎드려질 수는 없는 것일까? 되묻고 되물었던 그 때, 내 욕망과 관음의 전이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소년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기도 하였다. 왜냐면 욕망으로 시작한 소년의 관음이 여인에 대한 따스한 사랑의 연민의 시선으로 뒤바뀐 것처럼 스크린을 향한 내 관음의 욕구가 소년의 사랑, 그리고 죽음,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을 통해 나 자신의 닳고 닳은 사랑에 관한 불신을 목도하고, 동시에 어느 날 밤 괴로웠던 그리고 외로웠던 나의 날들에 나를 지켜준 까닭 모를 손길들의 존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특히 전혀 충격적인 영상이 아니었음에도 여인의 시선 속에 되새겨진 마지막 장면, 여인이 고통으로 슬피 울던 날 소년이 함께 하던 그 여린 두 뒷모습은 신성한 충격이었고, 내내 잊을 수 없는 황홀함을 내게 심겨다 주었다.

 

  분명,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에서 신성한 것과 고귀한 것을 찾는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일 게다. 우리의 모든 시선은 관음에 가 닿아,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어쩌면 우리의 모든 무의식은 성적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가 우리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그런 의구심을 버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아마 키에슬로우스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우리 존재의 욕망의 시원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의 전이를 꿈꾸며, 영상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담아낸 것 같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그러한 그의 질문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된다.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할까? 사람의 욕망이란 것이 신성함으로 전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소외가 끝이란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처럼 그렇게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홀로' 있어도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존재의 신비가 가능한 것일까?

 

  창밖엔 비가 내리고 이럴 때면 항상 나는 서글픈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누군가를 바라보았던 내 애틋한 시선들과 또 그것이 거짓이라 믿어야 했던 기억들, 그것은 내 몫이 아니어서 더욱 슬프다는 어느 시인의 지쳐버린 연민, 버거운 처녀성을 견디지 못하고 숨죽여가며 자신의 순결을 내어버리고서도 다시금, 거대하게 가로막힌 순결의 성 앞에 질식해 버린 어느 소녀에 관한 기억들....... 마치 꼭꼭 숨어서 유난히 도드라진 꽃처럼 모든 욕망의 손길들을 배반하고서 잡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이 되어버리신 나의 그리스도의 초상. 이런 것들이 뒤엉켜 마치 사랑은 금기처럼 가 닿을 수 없는 경계처럼 내 시선 저 멀리 저 어딘가 파도가 거꾸로 밀려드는 수평선 사이로 아스러지고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내내 그리운 것들, 다시 상념들....... 오늘 괜스레 떠올려본 한 영화에 대한 기억들과 어울려 다시금 생각해 본다. 아니 기도해 본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신앙 없는 내 차가운 맘으로 모든 존재에게로 아니면 그저 아득한 당신에게로, 사람의 그 모든 욕구들이 이루어지기를....... 그것을 통해 당신의 신성함으로 가 닿을 수 있기를....... 더 이상 당신의 그 구원으로 그 누구도 소외당하지 말기를.......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써만이 가능케 하고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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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시즌 - [초특가판]
토니 뷔 감독, 돈 두옹 외 출연 / SRE (새롬 엔터테인먼트)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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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시즌 - 잃어버린 계절을 위한 염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인류에겐 추운 계절이 지나가면 반드시 봄이 오리라는 희망이 주어져 왔다. 그러나 현실은 판도라 때문인지, 모르긴 몰라도, 희망이라는 먼 수평선과의 차이만큼이나 온갖 고통들과 번뇌들 그리고 재앙들로 가득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번뇌들, 재앙들은 결국엔 희망마저 앗아가 버리곤 한다. 이 때문인지 우리는 그 숱한 시절들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부터, 이렇게 봄을 빼앗긴 우리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염을 하고 씻김의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내일로 나아가길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정말로 빼앗긴 봄이 돌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럼에도 우리는 그 오랜 세월동안 그 허무한 염과 씻김의 의식들을 계속 해왔다. 왜 일까? 아마 당장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쉬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 '쓰리시즌'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 물음에 가까운 대답들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선 놀라운 일이 하나 벌어졌다. 왜냐하면 거의 무명에 가까운, 그것도 매우 젊은, 26살의 한 신인 감독의 영화 하나가 극영화 부문 최고심사위원상과 관객상, 촬영상 등 세 개 부문을 휩쓸어 버리는 일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동안 독립 영화제로선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던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로 다루던 인권 문제나 사회 문제 같은 그런 내용이 아닌,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인데다, 그러한 내용을 뒤집어 버리는 영화이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베트남계 미국인인 퇴니 부이 감독의 영화 '쓰리시즌'은 이젠 모두에게 잊혀진 베트남의 상처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어르고 매만진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영화의 무대는 어제를 묻어두고서 살아가는 오늘의 베트남이며, 그 내용은 크게 세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하나의 큰 줄기로 나아가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베트남 소년 우디와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의 이야기

 

  우디는 만물 상자를 자신의 목에 걸고서, 비 오는 거리를 누비며, 시계, 라이터 등 잡동사니를 팔고 다니는 소년이다. 그리고 해거는 퇴역한 해병으로써, 베트남전에서 자신이 버린 딸을 찾아 베트남에 온 미국인이다. 그리고 영화는 전혀 관계없는 이 인물의 우연한 만남을 가정하고 있다.

 

  그날도 비 오는 거리를 오가며,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만물 상자를 목에 걸고, 장사를 하고 있던 우디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린 탓인지, 한 술집으로 들어가 장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우디는 우연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미국인 해거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해거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우디를 자기 테이블에 앉혀 놓고선, 물건을 팔아 줄 것처럼 하면서 술을 먹이는 것이다. 이제 겨우 열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우디에게... 그리고 우디가 취해, 잠시 졸음을 참지 못한 사이, 우디의 생명과도 같은 만물 상자를 가지고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때부터 영화는 우디가 해거를 찾아, 만물 상자를 되돌려 받으려는 이야기로 꾸며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 우디에게 매우 잔인한 일처럼 비춰진다. 그렇지만 영화는 여기서 다시 반전을 염두 해두고 있다. 왜냐하면 우디의 만물 상자를 해거가 훔쳐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거는 그저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디는 사라져 버리고, 수일 후에 나타나, 자신에게 만물 상자를 되돌려 달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해거에겐 만물상자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찾고자 원했던 자신의 딸을 찾을 길이 없어, 이제 내일이면 이 곳 베트남을 떠나야만 한다. 결국 영화는 여기서 마치, 어린 베트남 소년 우디와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의 아무 의미 없던 허무한 상황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새롭게 반전된다. 왜냐하면 우디는 해거에게서 만물 상자를 되찾지 못한 채, 비참하게 비를 맞으면서 길을 걷다, 우연히 자신과 같은 처지에 한 소녀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소녀와 함께 비를 피하려 들어선 어느 골목길에서 덤으로 버려진 자신의 만물상자까지 되찾게 된다. 그리고 해거는 우디와 헤어진 후, 괴로움에 술을 마시다, 맞은 편 테이블에서 다른 남자를 접대하고 있는 자신의 딸을 목격하게 된다. 끝으로 영화는 해거와 해거의 딸의 만남을 보여줌으로써, 어색하지만 이제 화해의 길로 접어들고자 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첫 번째 에피소드를 마치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 은둔 시인 다오 선생과 젊은 아가씨 키엔의 이야기

 

  일자리를 찾아 호치민시까지 오게 된 키엔은 연꽃을 파는 다오 선생의 집에 고용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키엔은 오전이면 연꽃이 피는 수렁으로 가 연꽃을 딴 후, 오후엔 시내로 나아가, 연꽃을 파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연꽃을 따면서, 키엔은 그곳에서 부르는 연꽃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시장 터에서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다오 선생의 부름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오 선생은 은둔자로서 그 곳 일하는 사람 가운데 누구도 본 일이 없었다. 아니, 다오 선생이 기거하는 집 근처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그 누구도 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키엔의 노랫소리에 다오 선생의 무슨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새벽녘 아무도 모르게 키엔을 따로 부른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에서 드러낸 사실은 다오 선생이 나병 환자라는 사실과 나병이 걸리기 전까진 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다오 선생은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은둔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키엔의 노랫소리를 듣자, 자신이 나병이 걸리기 전, 시장터에서 아낙네들이 부르던 노래임을 깨닫고서 자신의 젊을 적의 그리운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야심한 새벽 키엔을 몰래 불러, 다시 자신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다오 선생의 집에 종종 들릴 수 있게 된 키엔은 그때부터 다오 선생의 손이 되어, 잃었던 다오 선생의 시심을 되찾아 주려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다오 선생의 병이 깊어지면서, 다오 선생은 키엔을 부르지 않고서, 쓸쓸히 혼자서 죽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물로 키엔에게 자신의 젊을 적 사진이 담긴 자신의 시집 한 권을 남겨둔다. 여기까지 영화는 마치, 하나의 못 다한 사랑에 대한 비극적 에피소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다시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다오 선생의 시를 대필해 줌으로써 다오 선생이 죽어서 연꽃으로 피어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엔은 무수한 연꽃더미를 가지고서, 자신이 부른 노래를 들었던 시장터 강변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 연꽃을 띄움으로써, 다오 선생의 못 다한 소원을 이뤄준다. 실은, 늪 속에서만 가장 아름다운 시심을 꽃피웠던 다오 선생의 연꽃은 죽어서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젊은 시절의 시장터에서도 꽃피우길 간절히 원했던 까닭이다. 그러하기에 영화는 키엔이 불렀던 시장터 아낙네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강가에서 둥둥 떠다니는 연꽃을 보여줌으로써 두 번째 에피소드의 막을 내리고 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 창녀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는 어느 날 손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콜걸 렌을 자신의 씨클로에 태우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이는 렌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렌은 자신의 가난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기에, 콜걸이 되어,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세계인 호텔과 상류층 사회에 한 쪽 발을 들이밀고 있다. 그러니, 그런 렌에게 있어,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는 귀찮기만 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하이는 렌에게 아무런 바람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렌이 자신의 일을 끝마치고 호텔에서 나올 때면, 기다렸다가 렌을 태우고서, 렌의 집까지 데려다 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렌도 귀찮지만 자신의 편의를 위해 하이의 그런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그 어느 순간부터 하이의 행동이 부담스러워진 렌은 하이에게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며, 자신을 만나기 위해선 하룻밤에 50달러라는, 하이에겐 부담스러운 대금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하이는 평소 관심 없었던 씨클로 경주 대회에 참가하게까지 되고, 거기서 행운의 1등을 하게 됨으로써, 상금 200달러를 얻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렌과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이없는 것은, 하이는 렌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자신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의 아름다운 잠옷을 렌에게 선물하고선, 그 옷을 입어 보라고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대로 잠드는 렌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질 않는다. 그리고선 아침밥까지 주문해 놓고서, 그대로 사라져 버린 후, 다음 날 다시 렌을 찾아간다. 하지만 렌은 하이의 그런 사랑이 너무나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러하기에 렌은 돈과 옷을 하이에게 그대로 돌려주며, 제발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하이 앞에서 절규한다. 그러나 여자이기 때문일까? 자신의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하이의 그 묵직한 사랑을 렌은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하이를 자신의 집으로 들어서게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 또한 우리가 기존의 생각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 둘이 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하이는 정성스레 땀으로 가득한 렌의 온 몸을 닦아주며 어름으로써, 그 동안 창녀로써 때 묻은 렌의 육체를 깨끗이 씻겨주고 달래줄 뿐이다. 그리고선, 하이는 렌의 눈을 두건으로 둘러,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 후, 그 어딘 가로 렌을 데리고 간다. 그곳은 언젠가 렌이 하이의 씨클로를 타면서 말했던 곳이었다. 창녀인 렌이 가난했지만 꿈 많던 학창 시절, 나무에 매달린 꽃을 보며 떨어지길 기다렸던 그 시절, 어떤 잘생긴 남학생이 와서 꽃을 따다가 자신의 머리에 꽂아주길 바라던 그 시절, 그 시절 꿈꾸었던....... 나무에서 한없이 꽃이 떨어져,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머리에 꽃으로 화환을 쓸 수 있는 그 시절 그곳. 그러하기에 두건을 벗은 렌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하이의 씨클로가 렌의 집 앞에 언제까지나 머물 것 같은 풍경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만물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파는 소년 우디, 베트남전 버린 자신의 딸을 찾아 나선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 은둔 시인 다오 선생, 청순한 아가씨 키엔 그리고 가난한 콜걸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 영화는 이 불협화음과도 같은 여섯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종 씻을 수 없다 믿은 베트남의 상처를 어르고 달래며, 베트남의 잃었던 봄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두 살 때 베트남을 떠나 스무 살까지 줄곧 미국에서 자란 감독, 토니 부이의 서구적 시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토니는 영화 속에서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마치 우디와 해거를 통해서 오해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당하는 약한 자의 편에선 그것은 오해일 수 없다. 왜냐하면 강한 자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에 약한 개구리는 피를 토하고 거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약한 개구리들은 강한 자의 던지는 돌팔매와 화해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다. 절치부심이라고 했던가? 독하게 이를 악물고, 약한 개구리는 자신의 씻을 한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즉, 약한 개구리에게 씻김이란 건 오직 복수뿐이며, 그도 강한 자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시각 하에서 보면,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돌멩이는 말 그대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과 베트남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너무 간단하게 치부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화해와 공존이라는 시각 하에서 뒤늦게라도 내민 손길을 뿌리치지 말자는 얘기이다. 왜냐하면 이미 잃어버린 만물 상자를 아무리 해거에게 돌려 달라 해도 해거에겐 만물상자가 존재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걸 어떻게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씻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감독은 바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거에게 있을 거라 믿은 우디의 만물 상자의 미련을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히려 우디에게 우디와 같은 처지에 놓은 한 소녀와의 만남을 가정함으로써, 우디에게 이 연약한 소녀라도 잘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그렇게 약한 개구리끼리 오순도순 도우며 살아갈 때, 언젠가 잃어버렸던 만물상자가 예기치 않게 나타날 수 있음을, 그런 희망을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거가 아무 잘못도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디와는 오해일지라도 해거는 분명히 용서받을 일이 있으며, 그것에 대해 고백해야만 된다. 그런 이유로 해거는 자신이 버린 딸을 만나, 매우 두려운 마음으로 어색한 고백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버린 딸의 처지-남자를 접대하는 창녀로써의 처지-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해거는 반드시 고백해야 하며, 눈물을 뿌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약한 개구리와 강한 자의 오해가 풀어지고, 화해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개구리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살아남은 약한 개구리의 가족이나 친구가 강한 자가 서로 화해했다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개구리가 살아날 리는 만무하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감독은 또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생 씻을 없는 나병이라는 하늘의 저주로 살아갔던 다오 선생과 청순한 처녀 키엔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나병환자와 달리, 영화 속에서 다오 선생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연꽃과 같은 존재이다. 아니, 연꽃이란 건 수렁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던가? 연꽃의 마음이란 건 꼭 수렁 안에만 있지 않음을... 어쩌면 그러하기에 되려, 연꽃의 마음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터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연꽃은 그 강가에서 둥둥 떠다니며, 그들의 노랫소리에 화답하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었다. 그들과 정말로 대화하고 싶고, 정말로 함께 숨 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렁 속에서밖에 피어날 수 없는 연꽃은 어디로 가지 못하고, 그 스스로 은둔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자신의 젊은 시절의 그 꿈을 가슴속에 머금은 채.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서 키엔은 죽은 그 연꽃의 마음을 시장 터에 뿌려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베트남전이라는 상처 속에 죽어간 아름다웠던 젊음들과 꿈들을 묻어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되살아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넋이라도 강가에서 피어나라고. 아니, 이제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피어나라고. 그리고 이제 남겨진 이들에겐 사랑의 계절이 돌아오라고. 다시 해거의 딸과 같이 창녀인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가 다오 선생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청순한 처녀 키엔과의 못 다한 사랑을 이루어 준다. 그렇게 베트남에게 잃어버린 봄이라는 희망이. 꽃이라는 희망의 화환이 한가득 내려주라고.

 

 

  그러하기에 이제 남겨진 우리에게 남은 계절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그들의 못 다한 사랑을 꽃피우는 봄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죽어간 이 땅에 혼백들은 생각보다 그리 치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가 자신들의 고통 속에 머물러 헤어 나오지 못하길 바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자신들을 곱게 묻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못 다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피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연꽃은 수렁에서만 피어오르지만, 해거와 해거의 딸의 대화하는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하고, 시장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강가에 띄워지기도 하며, 창녀 렌의 꿈 많던 시절로 돌아가 머리에 화환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 가슴속에 묻어둘 것은 이제 묻어두자. 그리고 꽃피울 것은 꽃피워, 지나간 상처들과 고통들과의 화해와 사랑의 계절을 꽃피워 보자.

 

    

 

연꽃의 마음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의 곁에 가까이 피어나

가 닿을 순 없어도

화사한 꽃밭에 어여삐 피어나

고이 드리울 순 없어도

여기저기 모르게 피어나

당신 발치에 부딪치는

얕은 파문처럼

고요히 번져 지고 싶어요

바람에 흔들려 흩날리는 벚꽃처럼

발그레 부끄러운 당신 머리 위로

황홀히 화환을 씌울 순 없지만

당신 머리맡을 밝히는

환한 촛불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싶어요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가슴 안에 먼저

놓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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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레오 까락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나쁜 피 -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을 훔쳐라!



 스무 살,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던 시절, 나는 영화 나쁜 피를 보았고, 평생 그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미리 예감해버렸다. 컬러풀한 영상에 뒤섞인 회색빛깔의 세기말적인 우울함. 그리고 머리에 총성을 꽂는 듯한, 부유하고 흩어져 버린 대사들. 이해할 수 없는 배우들의 발작과 함께 대조되는 무미건조한 표정들, 그리고 몽환적인 영상의 이미지들. 그 당시 내 상황과 엇물려 마치 나는 그렇게 밖에 사랑할 수 없고, 그렇게 밖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버렸고, 지금도 그 고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라도 영화 나쁜 피에 대해 이 글을 통해 되 바라봄으로써 무언가 그 동안 내 속에 자연 알아진 그것들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면, 그래서 또 다른 배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렇게 그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겹지만 않을 수 있다면.......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을 일단 멈추어, 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본다.


 

 레오 까락스, 우리에겐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폴라X, 특히 퐁네프의 연인들로 매우 친숙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 심각한 우울함과 이해 할 수 없는 난해한 대사와 이미지들은 그를 다시금 우리로부터 예술영화감독이라는 별나라로 격리시킬 수밖에 없게 하였고, 그러하기에 우리에겐 너무나 범접하기 힘든 범죄형의 감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한 번 그에게 빠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독성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 심각한 전염성 불치병까지 얻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유독 내 경우에는 그 중에서도 나쁜 피 전염성 불치병이라는 레오 까락스 바이러스 균에 감염이 되어, 이제부터 애연가가 금연에 대해 광고하는 심정으로, 그 병의 위험성과 심각성에 대해 천천히 고백해 보고자 한다.


 

 핼리혜성의 접근으로 파리엔 이상 기후의 징조들로 가득하다. 연일 5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STBO라는 세기말적 병이 발발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괴상하게도 이 병은 어떤 바이러스라든가 병균의 감염 문제라기보다는 사랑하지 않는 섹스를 통해 발병되는 현상으로, 도저히 어떻게 미리 예방하기가 힘들뿐더러 치유할 수도 없는 불치병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죽음으로 이르는. 그러하기에 이미 여기서 우린 영화 속 파리의 세기말적인 절망과 우울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절망 가운데에서도 하나의 희망은 꼭 생겨나기 마련인지, 그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백신이 발견되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떤 불안과 혼돈의 전조를 드리우게 되고,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 알렉스가 등장하게 된다.


 

 알렉스는 거의 고아나 다름없는 존재다. 물론 아버지가 존재했고, 어머니가 존재했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를 평생 내버려둔 채 자신의 삶만을 살아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평생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이다. 한 마디로, 그의 삶 속에선 아버지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 시작부터 그나마 어디선가 존재하던 아버지는 미국 갱단에 의해서 살해되어 버리고, 이제 알렉스는 고아라는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던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과 아버지의 흔적들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룬 지금, 이젠 진정 자신만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 리즈에게마저 그는 이별을 선포하고, 여행의 길에 오른다. 어떤 몽환과 예감들의 전조로 가득한 여정을. 그리고 바로 그런 몽환을 쫓아 가다가 그는 안나를 발견하게 된다. 버스 창 사이로 유독 하얗게 도드라진 여자의 얼굴이 서려있다. 마치 이제껏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해 준 것처럼 신비로운 경이로 가득한 여자이다. 이미 어떤 굴레도 없는,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와 희망도 없던 알렉스에게 안나는 과연 어떻게 비추었던 것일까? 그저 떠나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 떠나질 때, 우리는 늘 어떤 신비와 경이로움 그리고 몽환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알렉스에게 안나는 나타났고, 그에게 그런 신비와 경이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유리창에 서린 얼굴을 따라 미행해 들어간다. 그리고 안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지....... 안나는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의 애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버지의 친구는 그동안 그를 간절히 찾아왔다. 한 마디로 자연히 그 둘은 알아질 수밖에 없는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알렉스의 여행이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서 떠나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 떠나지는 여행이 아닌, 그 동안 자신에게서 부재했던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가는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떠올려 보게 한다.


 

 마크는 알렉스의 아버지 장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갱단의 일원이었던 듯싶다. 특히 알렉스의 아버지 장의 경우는 도둑질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돈 씀씀이가 좋지 않았는지, 미국 갱단에게 자주 돈을 빌리다 못 갚게 되어, 결국 살해당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연 그 빚의 부채를 장과 같은 일원이었던 마크가 떠맡게 되어, 이제 마크가 다시 살해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 빚이라는 건, 아들에게 떠맡겨 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고전적 방식이라면 아들이란 존재는 당연히 아버지의 그런 죽음에 대해 알고 복수를 할 의무가 있다. 더군다나 알렉스는 장을 닮아 있었다. 한 마디로 알렉스 또한 도둑질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동안 마크는 알렉스를 찾아왔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갱단의 빚을 갚기 위해 그 당시 파리에 돌고 있는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 STBO의 치료 백신을 훔칠 것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은 알렉스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렉스는 안나를 쫓아, 제 발로 찾아 들어왔다. 그러니 마크로선 이 일은 기막힌 행운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로서는 끔찍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가 내린 그 천부적인 도둑질의 재능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다. 그가 아는 건 오직 지금 자신이 안나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운명이거나 숙명 같은 믿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안나가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크의 애인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안나는 마크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결코 자신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면 안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결국 마크를 도울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안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다만 안나와의 만남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마크를 도와 사랑 없는 관계로 발병하는 불치병의 치료 백신을 훔치는 것밖에는 달리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그 셋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게 된다.


 

 안나는 늘 마크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알렉스는 안나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그 전에 알렉스의 애인이었던 리즈는 아직도 알렉스를 잊지 못하고, 알렉스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다시 예전부터 리즈를 좋아하였던 알렉스의 절친한 친구인 도마는 리즈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마지막 그 꼭지 점에 서 있는 마크는 오직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을 훔쳐야 한다는 것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그들은 자신을 바라다보는 존재들에게 매정하지 못하고, 순간순간마다 조금씩의 마음을 내어주고 있다.


 

'순간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그 순간으로 영원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알렉스는 안나에게 묻는다. 그러나 안나를 고개를 젓는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순간의 모든 즉흥적인 감정이 모두 진실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랑일 수 있다면, 안나는 알렉스를 몇 번이고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알렉스는 그렇게 수십 번 리즈를 사랑했었다. 그런데 왜 불현듯 갑작스럽게 알렉스는 리즈를 버려야만 했고, 전혀 알지도 못하던, 그것도 오직 마크만을 바라보고 있는 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알렉스는 말한다. 속도감을 찾고 싶었노라고. 그렇다면 왜 알렉스는 안주하지 못하고 질주해야만 하는가? 안나와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다시금 속도감을 잃어버리는 안주가 아니란 말인가? 사랑이란 것이 그 폭발할 듯한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영원히 식지 않고서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무엇이어야만 한단 말인가? 알렉스의 옛 애인 리즈는 말한다.


 

'알렉스, 넌 사랑을 몰라.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리고 알렉스는 말한다.


 

'여자들이 나에게 그러더군. 단순해지라고. 그런데 그 단순해진다는 게 나한테는 너무 어려웠던 거야.'


 

 어쩌면 알렉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안나에 대한 그 사랑에 있어서, 잃었던 자신의 열정의 속도감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린 알렉스의 선택은 자신 하나에게만 속해 있던 문제는 아니었다. 마치 먹이 사슬처럼 알렉스의 친구 도마는 닿을 수 없는 리즈를, 다시 리즈는 닿을 수 없는 알렉스를, 그리고 다시 알렉스는 닿을 수 없는 안나를, 마찬가지로 안나는 닿을 수 없는 마크라는 수평선을 쫓아 달려가는 형국이 되어, 결국 그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있던 리즈와 도마에게로 그 모든 관계의 병적증상이 드러나게 된다. 리즈는 알렉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알렉스와 가장 절친하던 친구 도마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알렉스를 배신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 없는 관계를 통해 도마는 STBO라는 사랑 없는 관계에서 오는 세기말적 병에 걸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역으로 알렉스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 STBO를 치유하기 위한 백신을 알렉스가 훔치는 과정에서 도마가 이 모든 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경찰에 밀고를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렉스는 연구소에서 백신을 훔치는 순간, 사방에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버리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단 하나의 인질인 자기 자신의 머리통에 총을 꽂고선, 당당하게 경찰들 앞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미리 도마의 밀고를 눈치 챈 리즈의 도움으로 그 곳을 탈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은 약간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알렉스는 도주과정에서 자신을 쫓던 경관을 총으로 쏴 죽였을 뿐 아니라, 갑작스런 리즈의 등장으로 인해 마크와 안나 그리고 또 다른 모두에게 배신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다시 자신을 도피시켜 준 리즈에게로 영영 안주하면 된다. 그러면 그 모두에게 배신자가 될지언정, 어쩌면 자신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또 다시 잠든 리즈를 버려두고서, 안나와 마크에게로 달려간다. 마치 늘 부재하였음에도 떨쳐버릴 수 없던 자신의 냉정한 아버지를 평생 바라보던 어머니에 대한 그 연민을 져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사실 그 이전에 영화에선 아마 과거에 알렉스의 아버지 장과 연인이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미국 갱단의 여두목이라는 존재가 나와, 알렉스에게 마크와 안나를 배신할 것을 촉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알렉스는 마치 그 배신에 대해 거의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차피 알렉스에게 중요한 것은 안나이지 마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미국 갱단 여두목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것 또한 알렉스가 아닌 마크이며, 게다가 사실 마크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알렉스를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 무엇보다도 마크는 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늙었음에 비해 안나가 너무 젊고,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크의 목숨만 보장된다면, 알렉스 자신은 그 미국 갱단에게 STBO의 치료 백신을 넘겨주고서, 받은 돈으로 안나와 함께 어딘가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된다. 어쩌면 이것은 마크가 가장 바라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안나는 결코 마크를 저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어리석게도 알렉스는 죽어도 안나를 배신할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결국, 알렉스는 리즈의 도움으로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리즈를 버려두고서 안나와 마크에게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신의 대가로 미국 갱단에게 총상을 입게 된다.


 

'마치 나의 인생은 연습장에 마음대로 그려진 낙서처럼 그렇게 살아져 왔어.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부셔지기만 하고, 해변이나 바위에 닿지 못하는 파도처럼. 그리고 인생을 알았을 땐 모든 것은 이미 늦어버렸지. 하지만 그래도 난 믿었어. 아직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그들 모두는 원래 예정대로 스위스로 달아날 비행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알렉스는 총상이 심각해져, 이제 거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엔 미국 갱단이 쫓아오고 있고, 다시 그 뒤로 리즈의 오토바이가 뒤따르고 있다. 처음 이 사실을 몰랐던 마크와 안나 일행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알렉스의 숨겨진 총상에서 피가 새어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시면서, 마크와 안나는 사태를 파악하게 된다. 마크는 복수심에 그동안 두려움에 떨었던 미국 갱단과 그 여두목에게 총을 겨누어, 그들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이미 그렇다 해도 알렉스의 죽음만은 도저히 어이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알렉스는 비행장에 도착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둔다. 뒤따라온 리즈에게 그 특유의 복화술로 이야기하면서.


 

'리즈, 나의 귀여운 리즈, 모든 것은 끝났어.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우리의 지난날처럼 되겠지.'


 

 알렉스가 그렇게 숨을 거두자, 리즈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홀연히 왔던 그 모습 그대로 오토바이를 타고서 돌아간다. 그리고 안나는 갑자기 미친 듯이 비행장 활주로에서 뛰기 시작한다. 마크가 그 뒤를 쫓지만 금세 멀어져 가고, 마치 한 마리 새가 된 듯 뛰어가는 안나의 모습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영화 나쁜 피는 사실 그 줄거리 잡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또 여러 가지 이야기로 읽힐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복잡한 씬 하나하나에 담긴 이미지는 마치 의미의 과열된 포화 상태처럼 여기저기 흩날려 있어, 영화를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강의 줄거리와 어설픈 평을 가지고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다. 더군다나 비록 '나쁜 피'라는 영화 하나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영화로 볼 수는 있긴 하지만,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레오 까락스의 영화들과 기묘하게 연관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 때문에 이 영화를 보았을 적에 나는 그 몽환적이고 발작적인 배우들의 동작과 대사들 말고는 머릿속에 모호한 느낌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슴에 남아, 무언가 파도치는 것처럼 내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다시 그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되었고, 결국 시간이 오래지나 어느 순간에 내가 그 속에 흠뻑 담가졌다 나왔음을 자연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나는 여러 번에 사랑을 했고, 그것이 불가능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사랑이란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무슨 사랑이기에, 그것은 불가능으로 밖에 치달을 수 없는 것이었을까?


 

 영화에선 줄곧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 백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간에 모두가 그 곳으로 향해져 있음을 우린 그 관계의 고리 속에서 알 수가 있다. 심지어 미국 갱단의 여두목마저도 그 치료약에 목말라 있음을 우린 영화를 보면서 금세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이라는 게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사랑이 없어서 생긴 병이라면 사랑만 있다면 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이라는 의미는 종국적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왜 알렉스는 그리고 모두는 사랑이 오길 자연 기다리지 않고서, 그것을 훔쳐내려 한단 말인가? 사랑이 훔쳐질 수 있는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결코 사랑은 훔쳐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왜 알렉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고, 끝내는 그 죽음에 이르는 그 불치병으로 자신을 내던진 것일까? 여기서 잠깐 우리는 알렉스의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해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알렉스의 아버지 장은 천부적인 도둑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그런 장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지만, 그 천부적인 도둑질 재능 하나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어떤 물건에 대한 것이 아닌 사랑에 대한 것임을 우린 금세 눈치 챌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전혀 훔쳐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하기에 다시 어쩌면,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도둑질 할 수 없는 도둑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이유로 유독 그들의 관계는 사랑 없는 관계 속에만이 놓여 있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을 훔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랑은 결코 훔쳐지지 않고, 훔쳐진 사랑이라면 그들한테 이미 흥미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장은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알렉스를 낳았고, 알렉스는 다시 부재했지만 평생 그에게 짐이 된 그의 아버지 장을 떨쳐내려 몽환적인 안나와의 사랑에 기대었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배운 도둑질이라는 재능 말고는 아무 재능도 없었기에, 다시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서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는 이런 알렉스가 절망으로 흘린 나쁜 피를 얼굴에 묻히고선, 마치 새가 된 듯 비행장 활주로를 뛰어감으로써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함께 그 불가능성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왜? 왜? 사랑은 그렇게 끝까지 그 목마름으로 불가능해야만 하는 것일까? 알렉스와 안나, 리즈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버지라는 그 부재한 대상의 나쁜 피들을 정녕 떨쳐 낼 수 없단 말인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알렉스는 안주하지 않고 질주하길 원했다. 아마도 알렉스는 그것을 사랑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안나의 마지막 심장이 터질듯 달리는 모습은 그러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알렉스인 감독 자신(레오 까락스의 본명은 알렉스 뒤퐁이다)의 염일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레오 까락스는 사랑하는 그 순간순간 자체가 완전한 채로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순간의 감정들 그리고 열정들, 불꽃같은 욕정들....... 이런 사랑에 대해, 자연 시간이 지나지면서, 우리는 늘 불신해 왔다. 왜냐하면 빨리 불타오르는 불줄기일수록 금세 식어지는 모양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그 찬연히 불타올랐던 그 순간 보다 더욱 오래도록 남는, 싸늘히 다 타버린 잿더미들을 아직도 치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순간에 완성될 수 있는 진실 일 수 있으며, 순간의 감정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말할 수 있겠는가? 쉽게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었다고, 그것은 사춘기적 불장난이었다고, 아니면 그것은 쉽게 써 내려져간 낙서였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 사랑이란 건 오래 지속되어야 하며, 서로 간에 불꽃이 튀어 올라 빚어질 상처들은 미연에 방지하면서 혹은 조금씩 양보해 가면서, 그렇게 버티어 가는 것이, 그렇게 밀고 당기면서 자연 익숙해지는 것이어야지, 확 피어올랐다 금세 사라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 하룻밤의 사랑이라도 그 순간 진실했고, 진정 사랑하고 싶었다면,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말 아닐까?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리고 순간은 지나가면 사라져 버리는 그 무엇이지, 오래도록 멈춰 서는 그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잠깐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레오 까락스는 진심으로 그런 자기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었던 거 같다.


 

'순간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그 순간으로 영원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그러나 우리는 안나처럼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니 우리 모두의 나쁜 피라는 굴레들은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그것은 거짓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도 버거운 것처럼 안주할 곳을 찾아, 연일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부표들 같이 맞닿지 못하고 서로를 부유해야 하는 것일지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렉스도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리즈와의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대체 사랑이란 건 무엇이란 말인가? 심장이 터져 버리도록 날아오를 수 있다면, 그리고 마치 다리를 잃어버린 새처럼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수 있다면, 끝내 곤두박질치며 맨 머리로 맨 바닥에 부딪친다 해도 우리의 모든 나쁜 피들을 이 땅에 흩뿌릴 수 있다면, 추락하는 모든 것들에 날개가 없다 해도, 피비린내 나는 온 몸으로 섞어지는 자태가 추악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위로 꽃이 피어 오를 수 있을지도, 그리고 한 마리 새가 그곳에 내려 앉아 있을 수 있을지도,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순간의 사랑! 어쩌면 그것은 이런 권태로운 기적 속에서 일어난 신비일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다시 어쩌면 순간순간의 모든 사랑들로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그렇게 믿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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