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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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가을이 오면 - 어떤 지옥의 불구덩이 같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권여선의 ‘가을이 오면’을 처음 읽었을 때, 무언가 잔잔한 여운이 있으면서도,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많이 있었다. 대체 어머님의 우아함이란 무엇이며, 모녀지간의 알 수 없는 애증이란 무엇일까? 일단, 모녀지간의 애증이야 남자인 내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고 쳐도, 어머니의 우아함이라니? 그런 어머니가 목사 집에서 얹혀살면서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남자와 여자와의 급작스런 관계의 진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학기가 끝나고 여름의 시작에서 여름의 끝쯤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 속에서 여자와 남자의 관계가 여자 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갈 만큼 진전된 어떤 단서가 주어진 곳이 있나? 아니, 그 전개나 흐름이 너무 급박한 거 아닐까? 이런 다소간의 혼돈 속에서 그나마 다행히도 글의 맥을 찾을 수 있었던 부분은 글 속에서 생생하게 표현된 자아의 열등의식이었다.

 

 

  조교를 통해 건네받은 돈은 한 달 반여의 작업량에 비해 너무도 보잘것없는 액수였다.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학교에서 시장을 가로질러 돌아오는 길에 발목이 접질려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입자가 고르지 않은 울렁울렁한 유리가 그녀에게 덮어씌우는 듯했다. 쓰러진 몸 위로 이글이글 노란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쪼였고 사방이 막힌 듯 조밀한 대기가 그녀를 가두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왜 이제껏 매일 시장통을 헤매었는지를 번개같이 깨달은 느낌이었다.

  여름 한낮의 시장 거리는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가 길바닥에 쓰러져 너울거리는 공기 너머로 본 것은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이었다. 발목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오감은 극도로 민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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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이 그녀를 덮쳤다. 뺨에 닿은 씨멘트가 따뜻했다. 불가사이하게도 그녀는 이 여름의 언젠가부터 자신이 이 순간을 절실히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초반 그저 담담히 자신의 얘기와 어머니의 얘기를 풀어가면서 자아에 대한 묘사에 치중하던 이야기는 이곳에서부터 급박해진다. 갑작스런 실신 후, 남자를 만나게 되고, 처음으로 어떤 남자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어머니를 함께 보기까지, 빠른 이야기전개만큼 후딱 초여름에서 여름의 끝으로 시간은 내달려 간다. 그렇지만 왜 그녀가 그 여름의 언젠가부터 그 순간을 그것도 혼절의 그 순간을 절실히 기다려 왔는지는 마지막에 와서야 드러난다.

 

 

  남자가 눈가를 실룩거리더니 등을 돌렸다.

  학을 떼겠네.

  남자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스물일곱 해 인생이 남자를 이만큼이라도 미동시키기 위해 존재해온 것만 같은, 미칠 듯한 쾌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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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옥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이마와 뺨에서 터져 흐른 진물이 꾸덕꾸덕 마르고 있었다. 알레르기가 가라앉는 걸 보니 가을이 오는 모양이었다.

 

 

  때론 알 수 없는 내부의 열등의식이란 괴물은 이유를 불문하고 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갑작스레 튀어 나오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말 그대로 열등의식이며, 괴물 그 자체이다. 그러하기에 타인의 시선으로 여기서 등장하는 내적 자아의 이러한 괴물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실상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아한 그렇지만 집요하다고 표현되고 있는 어머니, 피부 트러블이 있는 듯한 그녀의 외모, 거기에 언밸런스한 그녀의 이름, 로라. 깨금발로 디딘 듯 이렇게 불안한 내부의 형상들은 그녀를 점점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종국엔 부재한 아버지의 모습처럼 은근슬쩍 대체된 남자와도 대치의 국면으로 치달아 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왜 그녀는 이러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모든 관계를 그르쳐 버린 것일까? 혹 그러한 집착은 기실, 역으로 우아함과 소통에 대한 천착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에서 그러한 여자의 모습은 정확하게 표현할 순 없지만 다소 깨끔스런 모습으로 나온다. 말 그대로 ‘깔끔’을 은근슬쩍 떤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 부분은 다소간 여자를 표현해 나아가는 작가의 문장에서 비롯된 내 오인일 수도 있다. 비단, 이 글 뿐 아니라 작가는 그녀의 여러 작품 속에서 다소간의 결벽증 비슷한 문장력을 내내 구사하고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절망으로 치달을 예감을 복선으로 깔았던 소설 속 주인공의 시장 바닥에서의 혼절과 마지막 여자 스스로 택한 목구멍 속을 타고 들어간 불구덩이 지옥은 그녀의 어떤 천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니, 그녀가 스스로 그러한 절망을 예감하고 선택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그녀 속 열등의식이란 괴물을 스스로 마주하지 앉고선 그녀는 그녀의 가을로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아픈 발목을 주무르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떠난 남자를, 끊어진 막차를, 등록도 못한 가을학기를, 그녀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여대생 기숙사 입주권을, 상상의 전령사가 보내올 또 다른 가공할 소식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직 가을이 오기엔 먼 계절이지만, 잠시 내게 있어 그 여름의 끝을 기억해 본다. 그 끈적끈적했던 그 여름의 마지막, 단 하룻밤 만에 귀뚜라미 소리 미친 듯이 여기저기 울어대고, 단 하룻밤 만에 스산한 바람과 함께 모든 별들이 희미해지고, 단 하룻밤 만에 그 뜨겁던 태양은 모든 열기를 잃어버린 듯 이미 시들어버렸거나 혹은 오직 시들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모든 생각과 감정의 결들이 결결이 얽히고 물들어 더 이상 방향을 찾지 아니하고, 그대로 맨바닥에 머리 자올 하나하나 길게 늘어뜨리고서 매몰되기를, 함몰되기를 꿈꿨던. 그렇지만 그 밤 누군가의 몸뚱이에 옷을 입히고, 꽃을 달고, 초점을 잃어버린 눈가에 분을 바르고, 별을 뿌리고, 그리고 그렇게 언젠간 시들어버린 청춘에 생채기를 내고 단추를 여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여름의 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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