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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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그리고 작가 자신이 말하는 누보로망

 

 

  아주 오래 전에 갑자기 한 친구 녀석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여자 친구랑 어느 카페에 들어왔는데, 카페 이름이 ‘누보로망’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 여자 친구가 그 의미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영어는 아닌 거 같고, 다른 나라 말 같은데, 왠지 나라면 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지만 당시 문학에 대해 겨우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내가 그 뜻을 알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대충 아마 ‘새로운 사랑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그 의미를 잘못 가르쳐 주었던 것이 문득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누보로망이라는 그 의미는 전혀 반대인데 말이다.

 

 

  작품 속에 부재한 듯이 보이는 혹은 철저한 보는 자의 시선(블라인드 뒤의 시선)으로서만 존재하는 주인공과 그의 아내 A는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바나나 농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저녁이면 같은 식민지령의 프랑스인이라 추측되는 프랑크와 크리스티앙 부인과 저녁을 같이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늘 그렇게 반복된다. 다만 심상치 않은 것은 A와 프랑크와의 관계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마치 숨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집요하게 세세한 움직임과 미묘한 변화들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가장 집착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둘이 시내로 장을 보러 가는 일이다. 가는데 4시간, 그리고 오는데 4시간, 아프리카의 고르지 못한 길 사정을 감안하면, A와 프랑크 아침 6시 반쯤 출발해서 자정쯤에나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마치 전조라도 깔듯이 프랑크는 자신이 새로 구입한 엔진이 신통치 않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둘은 그 복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엔진 고장으로 인해, 그 날 밤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몇 번의 그런 일이 있었는지, 단 한 번뿐이었는지, 소설에서는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다. 집요하게 그 둘을 쫓는 화자의 시선만큼 불안정한 그의 시간과 공간 관념은 이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린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그 일이 반복되고 앞으로 반복될 것만 같은 뉘앙스를 띠울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설 속에서 화자가 집착하는 대상은 지네이다. 물론 화자는 지네 뿐 아니라 집안의 구조 부인 A와 관련된 모든 사물들에도 천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독 그는 지네를 무서워하는 아내와 그 아내를 위해 지네를 짓이겨 치우는 프랑크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지네의 죽음에 발작적인 경련을 일으키는 아내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동시에 그 남은 흔적들이 어떻게 집안 천장에 달라붙어 존재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지우기 힘든지 설명하는데 많은 장을 할애한다. 실제로 주인공은 그러한 지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을 한다. 고무지우개로 지워보기도 하고, 칼로 긁어도 보고,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새로 노란 페인트칠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내가 결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집안을 노랗게 단장한다 하여도 지네가 없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프리카이고, 어쩌면 지네는 화자를 은근히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처럼.

 

 

  사실, 스스로 줄거리와 작중 인물의 개성에 대해 철저하게 부인하는 작가인 로브 그리예의 소설 속에서 이야기 구조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위에서 묘사한데로 소설 속에선 이야기 구조가 부재하다. 그리고 작중 화자 또한 거의 부재하다 말할 수 있다. 이야기라 봤자 지독한 사물에 대한 묘사와 마치 사물화 된 듯한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나열하고 반복할 뿐이다. 어떠한 교훈도 감동도 심지어 삼류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사소한 기쁨조차 없다. 하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의도들이 곳곳에서 이야기 구조를 파괴한 이 소설의 새로운 형식 속에 깔려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대체 작가가 의도한-사실 작가는 작가 스스로 그 의도를 부인하고 있을지라도- 그 의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누보로망에 대한 비평서나 이론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평서나 이론들이 작가 로브 그리예의 소설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누보로망이 하나의 이론이기보다는 운동이라고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보로망은 소설에 대한 새로운 탐색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기존의 소설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으로 부정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험을 결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서는 로브 그리예가 주창하는 누보로망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의문을 던지는데 한계를 긋고자 한다.

 

 

  첫째, 누보로망은 위에서 밝힌 대로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소설을 위한 시대적 탐험과 고뇌이다. 과거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 나름대로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만 더 이상 교훈으로써 혹은 어떤 재미로써의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던 소설의 기능이 기실 유명무실해지면서 소설은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르트르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들은 그것을 참여에서 찾으려고 하였고, 어떤 이들은 소설을 통해 어떤 사회적 참여와 동시에 어떤 철학적 고찰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시대적 기능들도 이미 그 밑천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누보로망은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소설을 쓰고자하는 당시 일련의 프랑스 작가들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기존의 소설의 이야기 구조와 작중 인물, 형식과 내용, 그리고 기존의 작가의 역할들을 부인한다. 먼저 이야기 구조에 대해선 이미 시대적으로 해체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플로베르서부터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이러한 유행은 프루스트에게서 더 자유로워졌고, 포크너나 베케트에 이르러선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미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시점에 맞추어 이야기 구조를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취사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작중 인물의 경우, 발자크에서 보여주는 전형적 인물형이라는 것이 현대에 들어서 그 의미를 상실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혁명과 현대라는 시대에 진입하게 위해 많은 대전을 겪어야 했던 프랑스에서 그러한 전형적 인물들은 무언가 시대를 대변하거나 독자들의 감정을 대리하여 해소시켜주는 기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서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가 있을까? 절대적인 권력과 영웅이 사라진 지금 그러한 전형적 인물을 묘사하는 자체가 아마도 시대적 착오일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기존의 서구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서 소설과 예술 전반에 대해 형식과 내용을 분리한  후, 그들의 휴머니즘과 사회주의라는 진실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소설에 대해 형식주의라 비판하는 경향에 대해 재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은 새로운 탐험이며 모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비판가들은 좋은 글, 그리고 좋은 소설에 대해 휴머니즘이나 사회주의란 그들의 바탕 아래 예전의 것들에 대한 향수만을 복사하거나 재생시키기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기존의 작가 역할이 너무나 전지전능하고 인본주의적이었음에 대해 로브 그리예는 비판을 한다. 예를 들어, 기존의 작가들이 ‘날씨가 변덕스럽다’라고 표현한다던가, ‘웅크린 산’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어떤 작가 자신의 시선 속에서 사물을 의인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독자에게 감정이입이라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동시에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 자세와 재창조를 방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가는 철저하게 사물과 인간을 분리시켜, 그대로 있음에 대해 묘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소설의 예술적인 무용성의 기능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예술의 가치는 어떤 실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인은 망치로 못을 박지만, 음악가는 망치를 통해 어떤 새로운 찾으려고 한다. 전자는 실용적이지만 후자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하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예술의 가치는 현존하고 있다. 소설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혹은 어떤 감동과 진짜 인생을 대리 경험하기 위해서 소설을 봐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소설이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소설이 철저히 무력하다는 이유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기실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저자는 소설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할 수 없다. 그냥 소설 그 자체를 위해 글을 쓰고, 창조 그 자체에 의미를 구하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하지 않은 로브 그리예의 소설 질투와 누보로망 사상에 대해 너무나 쉽게 접근하고 쉽게 단정지은 작업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저자의 소설과 사상을 통해 소설의 기능에 대해 몇 가지 화두를 던져볼 수 있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찾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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