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 루오의 '파랑새'의 거룩함과 광기의 선상에서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듯한 인상을 주는 어느 해변가, 그리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제 1번 중 "아다지오". 영화의 처음은 이렇게 무언가 절망스러운 전조가 뒤엉킨 듯 메마른 인상과 함께 시작된다.

 

 

  잉마르그 베르히만, 종교 영화의 거장 칼 테어도어 드레이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루이 브뉘엘과 함께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영화감독으로써 우리에겐 ‘제 7의 봉인’, ‘산딸기’, ‘화니와 알렉산더’, 연작물인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 빛’, ‘침묵’ 등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감독이다. 사실 이 사람의 영화를 구해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종교 영화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대한 논문을 써보고자 했기에, 겨우 구하여서 난 그의 작품들 몇 편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실 그의 작품은 매우 지루하였다. 그러니 심각하게 종교로 고민하지 않는 경우나 영화사를 공부하기 위해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 난해함에 미처 영화를 보기 전 질려 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그의 영화 속의 어떤 발작들은 뇌리에 각인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리고 이 마력은 그 전에 문학적이고, 연극적인 전통에 서있던 서구 영화사에 있어서 시각적인 효과에 의해 각인되는 예술성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남겨주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새 흔히 말하는 탄탄한 내러티브의 구축 대신, 영상 자체가 남겨주는 시각적 효과의 효시가 되어준 일련의 선각자 중 두드러지는 한 사람이 바로 잉마르그 베르히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또한 매우 조각, 조각난 이야기 구조 속에서 하나의 묘한 뉘앙스를 남기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면서 어떤 의도도 전면으로 부인한 프랑스의 누벨바그 계열의 예술 영화들과 달리 흐릿한 의도를 내세우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 흐릿한 의도 혹은 뉘앙스가 무엇인지 영화 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의 발단은 어느 불안한 가족의 위장된 평화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작가인 아버지, 종교와 현실 속에서 미친 딸, 그리고 그 딸의 성실한 남편, 끝으로 연극에만 몰두하고 있는 막내. 무언가 벌써 불안하고 불길한 조짐들로 가득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맨 처음 영화화면 속에선 잘 드러나진 않는다. 오히려 마치 여느 가족들보다 더 행복한 것처럼 그들은 해변에서 같이 해수욕을 하고, 식사를 하며, 즐거운 오후 시간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된 평화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작가인 아버지는 이제껏 글을 쓴다는 핑계로 늘 가족을 버려두었었다. 심지어 자신의 부인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했다. 그리고 딸은 정신분열이 점점 심해져, 밤과 낮에 다른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성실함의 대명사인 그의 남편은 그것을 점점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다. 게다가 막내는 그런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아직 어려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의사소통이 서로 단절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든 마치 평범한 가족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들의 오후 한 때를 그들은 갖은 연극의 설정으로 견뎌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들의 아버지가 다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당사자인 아버지는 떠날 생각을 품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 이유는 자신의 딸의 정신분열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것을 글로 쓰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여기서 첨가해서, 더 한 가지 어이없는 상황은 이 잘 나가는 작가 양반의 부인 또한, 딸과 같이 똑같은 증세로 괴로워하다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가 늘 자신의 부인을 버려두었기에 나타난 현상으로써, 영화 속에선 남편을 잃은 여자가 종교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귀결을 몇 마디 대사 속에서 은근히 암시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똑같은 증세가 그 자신의 딸에게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에 부인의 경우에는 그는 두려움으로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결국, 부인이 죽자, 그는 그 자신에 대한 비겁함으로 인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 모든 글을 포기하고서 자살 시도까지 하려 하였다. 그런데 돌연 그 순간, 그가 평생 동안 싸워왔던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이제 또 다시 그의 딸에게서 자신의 부인에게서 보았던 똑같은 증세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두려움에 맞서고자 하지만, 다시 딸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글로 형상화하려는 이기적인 욕구와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처음 영화 속에서 딸은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오히려 집안 식구 중 가장 따뜻하고, 정상적인 심성의 소유자처럼 생각이 될 정도이다. 그런데 밤이면 갑자기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하던 이부자리를 걷어차고서, 하나님이 계시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선 그 방 장롱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혼자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기도 내용은 장롱 너머의 세계와 이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지고 있다. 그녀는 장롱 너머의 세계로 가고 싶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시녀로써 시중을 들고 싶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아직 자신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무능한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동생이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그 속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기도가 끝마쳐질 때쯤, 그녀는 거의 성적 오르가슴의 모습과 닮아 있는 형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선, 다시 잠들어 있는 남편의 옆자리로 가 잠이 드는 것이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분명 그녀는 남편과 잠자리를 가져 본 지는 꽤 오래 되었으리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녀는 남편의 손길이 닿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몸과 모든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곳곳에 숨겨진 가족들의 끔찍한 상황들은 이제 드디어 버텨 내질 못하고, 표면에 드러나 지게 된다. 딸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다 보고선, 아버지가 자신의 내면적 불안을 글이라는 노리개로 사용하고자 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가 섬 밖으로 물건을 사러 간 틈새에 다시 분열을 일으켜, 자신의 남동생과 잠자리를 가져버린다. 그리고 순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동생이자 막내는 절망을 표현하기조차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와 매형이 돌아오자마자 이 사실을 알리고선 발작을 일으킨다. 영화는 끝으로 그렇게 분열된 딸과 그녀의 남편이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남은 막내가 정신을 차린 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는 말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도저히 풀 수 없는 복잡한 실타래를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이야기 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이런 복잡한 실타래를 일일이 분석하고 해결하고자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의 화면과 독특한 이야기가 우리 뇌리에 꽂히는 발작들을 어설픈 심리치료로 정화하고자 하는 유치한 수작일 것이다. 영화는 다만 혼돈을 일일이 해결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은 채, 심각하게 뭉뚱그려지고, 헝클어진 형상으로 실존하고 있는 삶의 정체 모를 불안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에 대해서 살며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해야 하고, 왜 이렇게 불안하고 기괴한 전조들로 이야기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작가가 명확한 의도는 아닐지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어떤 말이 아닌, 그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 개인은 루오의 '파랑새'를 떠올려 보았다.

 

 


 

 




  일단, 루오의 경우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로써, 유명한 현대 종교 화가임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야수파라 함은 어떤 기존의 회화가 지닌 배경, 구도 그 모든 것을 뒤로 제쳐 두고서, 색채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였던 유파라 하면 대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경우, 유독 어떤 한 색채가 지니는 감각과 정서들에 주목하여, 강렬하거나 세련된 이미지적인 그림들을 자주 선보이곤 하였다. 특히 루오의 경우, 그 자신의 독실한 종교성으로 인해 색채 자체 속에 숨겨진 종교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려내었다. 보통 매우 어둡고 침침한 그의 그림들 속에선 고뇌의 형상으로 가득한 그리스도나 창부들 그리고 광대들이 많이 보여 지고 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매우 독특한 '파랑새'라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눈을 살짝 감고서, 고개는 약간 비틀린 채, 반은 하늘에 가 있고, 반은 지상에 닿아 있는 듯한 일종의 성녀상이라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성녀상이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는 일상성을 박탈당한 거룩함으로 인해 어떤 호러틱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루오의 '파랑새'의 경우 도리어 그런 호러틱한 분위기보다 성녀 그 자체가 세상이라는 호러 앞에서 반은 몽환으로, 반은 생의 의지라는 분열된 모습으로 견뎌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즉, '파랑새'의 그녀는 외로움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이 땅의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리들의 성녀는 르네상스시대의 그 세상을 품어 안던 대자대비 하던 모습을 버리고서, 이토록 가련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나락해 버린 것일까? 그리고 왜 그녀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서 지상의 발을 반쯤 담그고서, 힘겨워 하고 있는 것일까? 비단 이것은 루오의 그림 뿐 아니라 현대 화가들의 성녀상들에 공통적으로 드리워진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시 영화로 이야기를 넘어와 우리의 주인공인 작가 아버지의 딸, 그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장롱 속의 하나님의 세계로 도피하였던 것일까? 일단 영화 전면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녀와 남편과의 관계는 단절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외로움을 신에게서 채웠다. 이것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도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설정되어져 있다. 즉, 한 마디로 그녀는 심한 욕구 불만의 상태를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장롱 속에 하나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름 아닌 자신의 친동생에게서 해갈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여린 동생을 발작케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게도 여기서 그 아버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삶의 새로운 지표를 자신의 아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도 평생 무신론자였던 그가. 그리고 소년은 아버지의 등 뒤로 보이는 유리문을 통해 어렴풋이 하늘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알아 가는 건 두 부자이지만, 사랑을 하는 건 바로 하나님이며, 정신분열에 걸린 그들의 딸이자 누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들-남자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감히 모른다. 그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글과 연극이라는 하나의 관념이고, 유희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그 속에서 사랑에 가 닿아 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할 대상조차 없이 자신의 똬리 속에서 사랑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의미한 몸짓이다. 그러나 그들의 딸이자 누나인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지만 사랑해야할 대상인 아버지와 동생은 자기 세계에 갇혀 나오질 않고, 남편은 성실함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녀를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둬두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늘 굶주려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사랑하고픈 갈망을 채우는 방법을 장롱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그럼에도 그 자신만을 위한 절대적 사랑 속에 함몰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들-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동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했던 동생과의 섹스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실현한다. 왜냐하면 동생도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처럼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서, 평생 자신의 똬리 속에 숨겨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연속의 과정을 겪은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감히 고백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하나의 종교적 광기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에, 과연 ‘이것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가?’라고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우리의 성녀 '파랑새'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왜 반쯤 미치게 보이는가? 그녀는 왜 그러면서도 거룩해 보이고, 또 가련해 보이는가? 혹 누군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는 끊임없이 지상을 떠나 하늘을 꿈꾸고 있다. 발꿈치를 들어 가슴을 내밀면 사랑의 완성이라는 하늘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녀를 이 지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그렇게 순결하면서 가련한 그 형상을 내내 드리우도록 발목을 붙잡고 있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그들은 그녀를 미쳤다 하며, 자신이 버린 쓰레기처럼 그 어딘 가로 격리시켜 버리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그녀들은 숨겨져 있는가?

 

 

  남자가 보는 여자에 대한 때론 이런 지나친 종교적 입장은 오히려 여자를 더욱 객체로 보게 함으로써, 종국엔 더욱 그 속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국 그 관념적으로 지저분해진 남자들 혹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우리의 어머니, 누이 등등의 사람들의 반 미친 사랑-만이 거울을 보듯 어렴풋이 사랑이라는 것들에 대해 배워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신의 커다란 버스의 감당할 수 없는 스피드에 치인 소녀의 오그라든 육체를 다른 누구도 품을 순 없지만, 오직 버스 운전사만이 부둥켜안고, 통곡할 수 있듯이. 사랑을 배워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날카로운 갈퀴를 들고서 우리들의 성녀를 찾아 심하게 할퀴고선, 사랑을 배웠노라고 고백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 시대에 루오의 '파랑새'와 같은 성녀가 존재하고 있는가? 아님 존재해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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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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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통해 다시 읽는 카프카와 글쓰기에 대한 고뇌

 

 

 

  모임에서 이기호의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기성작품 품평작품으로 정해서 이 기회에 나는 그의 소설집 두 권을 읽어 보게 되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고, 다른 하나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제목에서부터 끌린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었다. 먼저, 나온 작품으로 알고 있기도 했고, 그 작품 중 그의 등단작품인 ‘버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버니’의 경우는 모임에서 예전에 품평을 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랩 형식으로 구사한 문체가 과연 시적 담화라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된 ‘버니’는 내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3년이란 시간 동안 내 안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산 속에 있는 ‘예수원’이라는 곳에 다녀오면서, 내 안에 많은 자의식이 깨진 부분이 큰 탓일 게다. 뭐, 여담은 이쯤으로 해두고, 어찌됐든 새롭게 읽게 된 ‘버니’는 시적인 담화라고 이야기하기는 여전히 모자란 구석이 있었지만, 시적인 시도 그 자체였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울림이 있었다. 단순히 반복되는 순이의 랩이 보도방 아가씨의 절정의 비명에서 성공한 가수의 노래로 표현되었을 때, 그 울림은 짠하면서도 동시에 싸늘한 서글픔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유머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글 전반적으로 나는 그 비슷한 정서를 느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도 마찬가지였고, ‘국기게양대 로망스’도 그러했다. 거의 무언가 따스한 연민과 더불어 유쾌한 유머가 공존했다. 그런데 그의 글 ‘수인’과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의 경우는 비슷한 뉘앙스의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무언가 글쓰기 자체에 대해 정면 돌파하려는 작가적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수인’을 중심으로 문득 떠오른 카프카에 대한 이야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살짝 양념으로 곁들여 글쓰기에 대한 내 개인적 고뇌를 살짝 토로해 보고 싶다.

 

 

  ‘수인’을 읽기 전, 미리 줄거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듣자마자 나는 바로 카프카의 ‘소송’과 ‘굴’을 떠올렸다. 원자력발전소가 터진 후 한반도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우리 민족이 유엔에 의해 세계 각지로 타의에 의해 흩어진다는 설정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산속에서 글을 쓰느라 전혀 몰랐다가 뒤늦게야 알게 되어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심판관 앞에 서게 된다는 설정에서,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설가임을 입증하기 위해 문화적 보존의 가치로 지하 밑바닥까지 시멘트 콘크리트를 친 교보문고에 자신이 유일하게 낸 소설책을 찾기 위해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는 설정에서, 자연스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은 이건 뭐 카프카 패러디인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다 읽고서도 그런 내 애초의 생각 때문인지, 글 안에 가득 풍기는 카프카의 냄새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뭐랄까? 훨씬 유쾌하고 가볍다고 할까? 그래서 현대적으로 풀어놓은 기분이랄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카프카 그 자체를 들이밀 때, 현대의 그 독자 중,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지겨운 문장들을 끝까지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특히, ‘굴’의 경우는 카프카의 소설 중에서도 그 끔찍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고민을 했다. 다시 그 끔찍했던 ‘굴’을 그리고 ‘카프카’를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결국, 읽고서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말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십대 때 가장 내게 영향을 준 두 작가를 꼽으라면, 아마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를 꼽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건, 이 작가들이 둘 다 끔찍하게도 지리멸렬한 작가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는 ‘죄와 벌’에서 노파 하나 죽인 사건으로 빼곡한 글자체로 해서 장장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것도 그나마 짧은 편이다. 보통, 그의 장편들은 10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 다반사다. 그래도 무언가 읽고 나면, 기존의 관념을 도발하고 깨트리는 상쾌함이 있었다. 그런데 카프카의 경우는 남아 있는 글이 몇 있지도 않고, 거의 다 단편이나 중편이다. 장편이라 봤자 단 세 편뿐인데, 그 지리멸렬함은 도스토예프스키를 가히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냥 지리멸렬이라는 단어보다는 지루하다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만, 카프카는 지루한 게 아니라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헤매게 만드는 모호한 재주가 있다. 그것도 매우 지루하게, 짧은 단편에서조차. 다만, 그의 글 중 그나마 대중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글은 ‘변신’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변신’을 통해 처음 그의 글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후 카프카가 쓴 대강의 글들을 모두 보게 되었다. 미완으로 쓰인 장편, ‘실종자’와 ‘성’ 그리고 유일한 완성작인 장편 ‘소송’과 그의 몇몇 단편에서 중편까지. 그런데 특히, 그 중에서도 내게 지리멸렬함 그 자체로 각인된 작품이 중편인 ‘굴’이다. 물론, 그의 장편 또한 만만치 않지만, 여하튼 ‘굴’을 읽고서 내가 한 마디로 느낀 감정은 ‘이건 대체 뭐지?’였다. 그만큼 글 자체가 이해 불가했고, 그런 글쓰기를 통해 카프카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혼자만의 글이라는 ‘굴’을 파야만 하는지 또한 이해 불가했다. 그래서 그냥 그때는 후일을 기약하며, ‘굴’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글쓰기일거라 쉽게 단정 짓고 책을 덮었다. 그래서 ‘수인’의 줄거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읽었을 때 아주 쉽게 카프카의 ‘굴’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에 근 10년의 세월을 돌아 다시 마주한 카프카의 ‘굴’은 그리 녹록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지리멸렬함과 지루함은 여전했지만, 단순히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선 ‘굴’ 자체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발톱을 숨겨놓은 채.

 

 

  카프카의 '굴'은 치밀하고, 방대하다. 그렇지만 그의 ‘굴’은 글쓰기라 단정 짓기 힘든 게, 어떤 적의에 대한 방어책으로써의 ‘굴’이란 느낌이 글속에 강하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무지 그 적의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글 서두에서는 지하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한 동물에 대해 살짝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동물은 누구도 마주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마주하면 그 순간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늘 굴 깊은 곳에서 소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아주 작은 생물체들이 길을 내는 소리, 바람이 통하는 소리, 지상에서 들려오는 아주 조그만 소음 등등, 그렇지만 보통 굴은 평안하고 고요하다. 주인공은 그 고요를 사랑하며, 그 때문에 굴을 사랑한다. 하지만 치밀한 주인공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에 나름의 여러 가지 방비책을 세운다. 가령, 미로와 같이 얼기설기 얽힌 굴의 중앙에 광장을 만들어, 여차하면 그리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곳에 몇 개월치 먹을 식량을 비축하여, 오랜 기간 동안 머물 수도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하여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주인공은 굴의 다른 곳에도 조그만 광장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주인공은 스스로 의구심을 품는다. 과연 그의 이런 방비책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왜냐하면 정작 적이 진짜로 쳐들어오게 된다면 어떤 광장이든 다 뚫고서, 결국엔 주인공을 발견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만 주인공은 굴 중앙에 광장만큼은 튼튼할 거라고 스스로 안위한다. 그런데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그 광장에서 무언가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그냥 작은 동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커져, 주인공의 굴에서의 삶의 고요를 깨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소리는 광장에서 뿐 아니라, 굴 어디에서든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들린다. 만약 광장 가까이에서 땅을 긁는 소리라면 분명 광장에서 떨어진 굴의 입구에서는 그 소리가 작게 들려야 할 텐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크기의 소리로 땅을 긁는 소리가 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소리의 근원이었던 불안의 전조가 어쩌면 애초에 자신이 굴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했을지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 그는 분명 그 비슷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을 처음 만들던 시기였기에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소리는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때 이후로 얼마 후 잠잠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굴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더욱 촉각과 청력이 발달하면 발달했지 퇴보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굴을 만들기 시작하던 처음에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후로 한참동안 들을 수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 소리를 내내 들었다면 주인공이 굴을 계속 만들 수 있었을까? 자신의 모든 적으로부터 도망칠 피난처로써의 굴을? 어쩌면 주인공은 내내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굴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땅을 긁는 누군가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소리를 외면한 채 그냥 자신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그 자신의 굴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처음부터 모든 것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던 것이다.

 

 

  굴? 광장? 적? 카프카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밑도 끝도 없는 이 알레고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어버려, 이 소설을 알레고리가 아니라 어떤 상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믿는 한에서는 알레고리는 어떤 본질에 관해 회귀하는, 그렇게 본질을 상기시키는 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이 소설의 굴과 광장 그리고 적은 상상하면 상상하는 대로 마음껏 새로운 해석으로 재창조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좋은 소설이라 말하고, 카프카가 20세기에 가장 연구되는 대표적인 작가일는지도 모르겠지만, 동시에 밥을 입에 떠먹여주기를 바라는 독자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실존이란 견지 하에 해석하면 그냥 실존이 되어버리고, 글쓰기란 견지에서 해석하면 그냥 글쓰기가 되어버리는 그의 소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엔, 나는 지금 ‘수인’에서 제기한 글쓰기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단지 카프카의 ‘굴’을 도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행위를 하려는 것 아닐까? 많은 의구심 속에 다시 결국 갈팡질팡하다가 나는 ‘수인’의 굴과 카프카의 ‘굴’을 잠깐 비교해 보고자 한다. 어차피 카프카의 ‘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내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처럼 작가는 우연에 기인에서 글을 쓰다 ‘의지’를 넣어 글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무리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죽지 않는 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누군가의 묘비명인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마무리를 낼 수 없는 게 삶이지 않은가? 다만, 그럼에도 글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는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또 너무 옆으로 샜다. 다 지랄 맞은 카프카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든 카프카의 ‘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수인’에서의 굴은 간단명료하다. 글 서두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주인공은 굴을 판다. 거의 모두가 버린 한반도에서, 그렇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낙진이 바람처럼 휑하게 휘날리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로선 그가 소설가임을 필사적으로 심판관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는 무사히 외국으로 이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밌는 설정은 이 소설에서의 서두에서의 설정이다. 내가 글을 쓸 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 게 또 카프카의 ‘소송’을 은근히 패러디한 느낌이다. 그래도 확실히 이 작가가 카프카보다 덜 잔인한 건 황당하긴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폭발이라는 그럴 법한 이유와 핑계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형벌을 피할 수 있는 방도까지 가르쳐주니 얼마나 친절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카프카는 어느 날 주인공을 그냥 끌고 가서, 너는 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유도 모르는 주인공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1년 동안 소송을 해보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결국 그렇게 자신의 죄도 모른 채 어느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다. 이 얼마나 잔인하단 말인가? 그에 비해, 이기호는 ‘수인’에서 굴이라도 파서 자신이 썼던 책만 찾으면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보내주기까지 하겠다니, 나름 인정이 있는 작가이다. 여하튼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곡괭이를 들고서 굴을 파기 시작한다. 처음엔 서툰 곡괭이질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슬슬 곡괭이질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열흘 만에 교보문고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복도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심판장에서 보았던 서기와 알고 지내게 된다. 서기는 심판관의 명령으로 최대한 주인공의 편의를 봐주며, 2,3일에 한 번 꼴로 주인공을 찾아온다. 그러면서 그 둘은 친해진다. 그리고 급기야 주인공의 부탁으로 맥주까지 가져온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주인공은 날마다 교보문구의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스스로 불안감을 느낀다. 그가 유일하게 낸 책 한 권이 만약 교보문고 진열대에 없다면? 그가 산 속에 들어가 글을 쓰는 사이 만약 누군가가 그 한 권을 사갔다면? 그렇다면 그동안 그가 굴을 파기 위해 한 작업은 무엇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외국으로 가지 못하고 낙진만이 남은 한반도에 남게 된단 말인가? 소설가로서 아무런 희망과 꿈도 없이? 교보문고 입구 삼십 센티미터쯤 앞을 남겨 두고서, 주인공은 맥주를 가져 온 서기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토로한다. 그렇지만 서기는 말한다. 이미 원하는 곳으로 이주가 진작 결정되었다고. 왜냐하면 그의 굴 파기 그 자체가 그의 형벌이었고, 그에 대한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두꺼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부수고 굴을 팔 수 있겠는가? 벌써, 이로써 그는 그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가 한 작업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굴을 파고, 밤마다 자신의 책이 없을까봐 두려워했단 말인가? 주인공은 다 마신 맥주병을 서기의 머리에 내리친다. 그리고 자신이 파왔던 굴을 무너뜨린다. 그리고서 삼십 센티 남은 교보문고의 입구 쪽으로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그곳은 더 이상 노동이 필요치 않은 존재 그 자체로 소리를 내는 책들의 세상일 거라 꿈꾸며.

 

 

  글을 쓰는 초반에 나는 분명 10년 전쯤 카프카의 ‘굴’을 읽었을 때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단정 짓고 그냥 책을 덮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금은 그렇게 읽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고 치열한 글이기에 여러 의문들을 두서없이 던져 놓았다. 그 의문들을 다 주워 담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결국, 그러하기에 이렇게 똑같이 10년을 넘어서도 ‘굴’에 관해 나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프카의 ‘굴’이 이기호가 던져 놓은 ‘수인’에서의 ‘굴’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은 너무나 확연하게도 다르다. 이미 내용을 분석하면서도 나는 둘의 분위기가 얼마나 확연히 다른지 은근히 강조하였다. 그러하기에 ‘글쓰기’란 화두에 대해서도 둘이 내어 놓는 입장 차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카프카는 굴 파기를 일종의 글쓰기라고 봤을 때, 스스로 피난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결코 글 속에서 안주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는 글로 인해 더욱 불안해지고, 더욱 예민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엔 애초부터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고 말한다. 즉, 글을 쓰거나 쓰지 않거나 그 불안의 전조는 늘 있어왔고, 때문에 글 자체가 그에게 순간의 피난처가 되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는 죽기 전 그가 법률가로서 빠듯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서, 하루에 네 시간씩 꼬박꼬박 쓴 대부분의 글들을 스스로 불태웠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 남은 그의 글들은 그의 친구가 가지고 있던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친구가 카프카의 사후 세상에 남긴, 카프카 스스로 부인했던 글의 존재가치를 위해. 그런데 이를 뒤집기라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본연의 연민이 발동하여 이기호는 글쓰기에 대해 카프카와 비슷한 설정 속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글쓰기는 노동이 아닌 글 자체가 내는 소리라고, 하지만 그러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교보문고를 가득 메운 시멘트 콘크리트를 곡괭이질 하듯 노동을 해야 한다고, 사뭇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어떤 면에선 분명 이기호의 결론이 이상적이고 온건하다. 어느 누가 카프카처럼 글쓰기를 하고 싶겠는가?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질 않는 굴을 파서 무엇 하겠는가? 그 속에 대피한들 카프카 말대로 결코 피난처가 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그저 자신을 갉아먹는 굴 파기이며, 똬리틀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나는 카프카의 그런 ‘굴 파기’가 더욱 치열하고, 때문에 ‘글쓰기’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누구나 쉽게 결론은 내릴 수 있다.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죽음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뻔한 답을 내놓듯, 쉽게 글쓰기란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놓지 않으면서도 글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나는 카프카가 그러한 글쓰기의 꿈을 보여줬다고 지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 근방에 도달한 글쓰기의 열망으로 그는 치열하게 하루에 주어진 일과가 끝나고서, 밤마다 4시간씩 꼬박꼬박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그 아무것도 바꾸어주지 못할지라도. 책이라는 노동 없는 소리에 파묻히지도 못하고, 자신의 소설가라는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그는 글을 쓴 것이 아닐까? 그러하기에 내게는 여전히 너무 높고 어려운 카프카이다. 아니, 너무 깊고 복잡한 미로와 같은 굴과 같은 카프카이다. 왜냐하면 나로선 도저히 그처럼 글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꿈꿔본다. 카프카와 같은 열망을, 카프카와 같은 치열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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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2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2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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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2 - 시에 고백을 담아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에서 시인은 어떻게 나비의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시퍼렇고 서슬 퍼런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가 왜 나비는 무섭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공주 같은 나비였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 어떤 시절 그러했듯이, 세상이란 바다가 무섭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만 청무우밭으로 착각하고 간 바다에서 청무우가 소금에 절어지듯 어린 나비는 절어서 되돌아온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우리 새하얀 청춘이 세상이란 소금기 가득한 풍파에 절어지듯이,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쩐 삶만을 삶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아직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삼월 달에 꽃이 피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 늘 서툴기만 한 우리네 청춘이었다고 해도, 우리 가슴 속에 시리게 품을 문장 하나쯤은 남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 초생달 같이 시린 문장 하나! 그래서 살아가면서 내내 꼬옥 품어주어야 하는 상처 같은, 그렇지만 배움 같은 그런 문장 하나!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왜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물이 되기를 늘 꿈꿔왔다. 내 뜨거운 욕정이 닳고 닳아, 더 이상 그 누군가를 뜨겁게 감싸지 못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꿈꿔왔다. 그래서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라고,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고, 늘 되뇌고 되뇌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뇐 만큼 꼭 그만큼, 어느 누구와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게 되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아니다. 늘 상대가 헤어지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유는 명료했다. 내 불길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늘 혼자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사랑하고 싶다고. 어쩌면 흐르는 물이 되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그렇게 줄곧 거짓말을 해왔다.

 

 

 

절벽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거

기묘혈을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

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또꽃이향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

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

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눕는다.아아.꽃이또향기롭다.보이지

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관념적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청춘이라면 모두 이상이라는 이 이상한 사내에게 한번쯤은 꼭 끌려야만 하는 게 법이라도 되는 걸까? 이 시를 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사실 잘 난 모르겠다. 그렇지만 읽는 바로 그 순간 내 가슴 속에 울림이 있었다. 절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절벽에 핀 꽃처럼 매달린 어느 사내의 절규가, 울부짖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꽃의 절규일지도 모르는 그런 울부짖음이······.

 

 

 

 

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진 긴 묵죽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넣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태어나서 시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학교의 문학 동아리 선배인데, 지금은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란 화두와 함께, 시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대학 4학년 때 들어온 01학번 새내기 여자 후배였다. 선배의 경우는 정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인이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리움을 알고, 노래를 아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데 01학번 여자 후배의 경우는, 좀 색달랐다. 뭐랄까? 그 발상이 엉뚱하다고 할까? 아니, 처음엔 그렇게 느꼈다. 너무 찬란하고 눈부신 태양이니까, 구름아! 태양을 안아주겠니? 이런 어투의 짧은 동시 비슷한 글을 동아리 사이트에 남겼는데, 이상하게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우산을 펴는 시부터, 어차피 무너져 내릴 모래성의 허망함을 파도의 말로 따뜻하게 감싸는 시선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투성이었다. 늘 관념과 관념이란 절망에 허덕이던 내겐 그 모든 언어가 신선하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눈이 내려 검게 질척이는 눈에 대한 절망적인 시를 쓴 적이 있었다. 동아리 사이트 내에 그 시를 올렸는데, 댓글에 후배가 이런 말을 달아 놓았다. 난 그 질척이는 검은 눈들이 할머니의 주름살처럼 느껴진다고. 또 무언가 쿵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쿵하는 울림이 어떤 그림으로 내게 되살아났는지 알 것만 같다. 짙은 농담으로 그려낸 할머니의 싸륵싸륵 눈을 밟는 굽은 발걸음, 그렇게 눈을 녹이는 할머니의 소리,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본다.

 

 

 

 

호남선

 

김준태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생솔가지 저녁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그리스 민요 중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민요가 있다. 사실, 민요라기보다는 전통가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겠다.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는 장르로 꽤나 유명한 곡이니까. 여하튼 처음 이 시를 혼자 속으로 읊을 때는 그런 느낌이었다. 기차는 8시에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으로 자꾸 시계를 보고, 그럼에도 떠나는 사람은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야만하는······. 어쩌면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 근대사 속에서 터키와 전쟁을 치루며, 그렇게 누군가는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고 떠나야만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시는 그런 비장미보다는 오히려 내게는 한이 물씬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한스럽고 서글퍼서 읊다가 그만 나도 호남사람인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몰입을 할 뻔했다. 겨우 네다섯 살 적 서너 해 산 게 전부인 내가, 그리고 기차를 타고 떠가날 잘 배운 놈들의 하나일 게 분명한 내가, 감히 그런 말을 토할 뻔했다.

 

 

 

베트남 Ⅰ

 

김명인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집히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은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 3부인

남편은 출정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시션 박스

속에서도 가랑이 벌려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을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

 

 

 나는 물론 베트남을 잘 모른다. 내가 아는 베트남은 아버지의 베트남이다. 신학대를 가겠다고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후 가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놓여진 17장의 편지, 그 속에 아버지의 빼곡한 베트남과 신에 대한 고뇌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휴학하고서 방황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그 때,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의 일기장 속에 베트남의 사진들과 아버지의 글들로 베트남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베트남에 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로이에 관해선? 모르겠다. 내가 왜 이 시를 택했는지. 그렇지만 스무 살 때 처음 어느 선배가 루오의 화집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림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게 루오 그림 중 유독 ‘창부’라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빛깔의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한 허리, 그 어디에도 내가 생각하던 기존의 창부의 모습은 없었다. 단지, 거울 속 지친 기색의 창부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화집을 사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울고 있는 여자’를 보고서 여인의 슬픔을 이해해 보려 하였고, 드가의 무희들의 공연 뒤 그 시린 등 뒤를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내 청춘의 시린 등 뒤에 대한 기억을 보듬어 보려 하였다. 그리고 화사한 모네의 그림 속 여인에게서 환상을 품어보았다. 개양귀비 핀 들판에서 서 있는 여인의 풍경과 우산을 들고 뒤돌아선 여인의 자태에서 눈부신 여성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땐 몰랐다. 그 모든 시작이었던 루오의 그림의 창부로부터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 지, 그땐 미처 몰랐다.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하게 부풀어 올라 어디가 허리인지 배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어느 창부에게서, 그렇게 지친 피로의 기색을 띤 조금은 못생긴 창부에게서,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지. 문득, 내 20대 때의 모든 연민들이 가증스럽기만 하다.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

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우리말들을 모르며, 얼마나 많은 꽃들의 이름을 모르는지 생각해 보았다. 쑥부쟁이, 벌개미취, 자주달개비, 부추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이름들, 그러하기에 당연히 생경한 꽃의 정경과 향기들. 아무리 인터넷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고 들여다보아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저 아름다운 꽃의 말들로 사람들의 얼굴마다 형상을 그려주고, 새들의 날개로 옷을 지어주고, 나무와 들풀의 뿌리로 밥을 짓고, 산과 강의 풍경들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싶은데,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툰 시를 쓸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내 삶이 쭉 그러했던 것처럼. 어쩌면 박남준이란 시인도 나처럼 그러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나는 저 모든 꽃과 새와 들풀의 말들을 모르지만,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불을 떼는 법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원’이라는 산골짜기 마을에 살면서, 나는 하루 일과로 나무를 해오면 장작을 쪼개고, 아궁이는 아니지만 기름보일러 대신 사용하는 나무보일러에 불을 피우곤 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박남준 시인처럼 서툰 내 삶을, 서툰 내 시를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이 남은 재들을 부대자루에 담아 밭에 뿌리면서, 또 다른 환생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서툰 나비가 바다에 절어서 돌아와 생긴 시린 초생달이 서서히 차올라 보름달보다 환환 달빛을 드리울 그런 환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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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서
모리스 피알라 감독, 모리스 피알라 외 출연 / 무비플렉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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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서 - 소녀의 순결한 죽음에 관하여

 

 

 '사탄의 태양 아래서', 스무 살 적 기독교 문학이란 장르에 대해 공부하고자하여, 우연히 듣게 된 이 제목만으로도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을 사탄의 태양이라 하고, 것도 모자라 그 아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사탄이라는 악의 실체를 인간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그 제목으로 인해, 나는 처음으로 조르주 베르나노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책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작품이 번역된 적은 있지만, 출판사가 망해서인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연히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영화를 보게 되면서, 나는 우리나라에 출판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또 다른 작품들인 '기쁨'과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를 알게 되어 구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유독,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많이 영화화했던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게 됨으로써, 대충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윤곽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소설이나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너무나 현란한 관념과 몽상이 뒤섞인 이미지들의 축제이기에, 해석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너무나도 신학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실제로 신학적인 고뇌 속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과 영화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내 개인적으론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 중 유독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소녀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무언가 간과할 수 없는 이미지들로 내게 각인되어져, 지금부터 나는 이 뭉뚱그렸게 일그러진 이 형상들의 이미지들을 영화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중심으로 해서 쫓아 가보고자 한다.

 

 

  도니상은 무능한 젊은 신부이다. 신학교 시절부터 형편없는 재능과 의지들로 인해 유독 튀었던 그는, 그렇지만 신과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신부이다. 이 때문에 그는 늘 깊은 신앙적 고뇌의 한 가운데 던져져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 신부 밑에서 보좌하고 있는 교구 생활조차도 매우 적응해하기 힘들어하며, 늘 수도원에서 은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깊은 신앙의 고뇌로 인해 일반 신도들에게서 신이 날마다 처참하게 외면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력.하.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는 신을 그는 구원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자신을 자책하며, 채찍질을 가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다시 그 때문에, 그의 건강 또한 사제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돕기 위해 늘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해, 자신을 궁지 속으로 몰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절망의 궁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 속에 박혀 있던 악의 실존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신부들이 아닌, 가장 진실하고자 노력했던 도니상에게 왜 그런 악마의 존재가 현현하는가이다. 사실, 이것은 쉬 설명될 수 없는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고뇌가 극명하면 극명할수록 악의 실체 그리고 원죄의식에 접근하게 되어, 자신을 구원이 아닌 절망의 늪 가운데로 몰아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아주 쉽게 구원의 확신과 타협을 하여, 신을 자신의 욕망의 범주 한 가운데로 예속시켜 버리는 이들에겐, 악의 실체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원어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도니상과 같이 끊임없는 구원의 목마름과 물음 가운데 놓인 이들에겐 꼭 한번쯤은 바로 이러한 악의 실체와 대면하는 일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여하튼 그로 인해 도니상은 자신의 양심 속에서 현현한 악의 실체와 입 맞추게 되고, 이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옭아매져 들어가는 악의 올무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적... 그러나 기적이란 것은 사실 별 게 아닐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악의 실체에 대해, 절망해 대해, 깊숙이 내려가게 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악과 절망에 대해서 투시하고,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간파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그러한 절망과 악의 실체 그리고 우리 욕망의 근본을 다 파헤칠 수 있다 하여도, 그리고 또 그러한 능력을 아무리 인간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사용한다 하여도, 오히려 그것이 다른 이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원죄의 구렁텅이 안으로 집어넣어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도니상과 무쉐트와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악의 실체의 올무가 얼마나 잔인한 가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무쉐트.. 16살의 무쉐트는 영화 속에서 완벽한 악녀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가녀린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의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그러하기에 그녀는 어쩌면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매우 연약하고,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매우 순결하고 고상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이러한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매우 포착하기 힘들게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배경이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강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면, 그녀는 일단 자신의 놓인 환경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없이 자유로워지기 원하는 존재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란 존재는 늘 그러한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의 상징으로써 상정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그녀의 자유에 대한 열망의 표출은 영화 속에선 남성편력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역시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이 사회에서 (특히, 근대라는 시대상 속에서) 여성이란 존재, 더군다나 감성이 지극히 예민한 소녀란 존재가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순결이란 처녀성을 무기화 하여, 남자란 도구를 이용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독해질 수 없는 그녀는 한 가난한 소설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들통 나면서, 다시금 아버지로 인해 강제로 그 가난한 소설가에게로 귀속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아버지 그리고 그 마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동경의 도시 파리로 향하고 싶다. 그런데 그 가난한 소설가가 꿈꾸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녀와 함께 그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영영 도망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동시에, 그 지역 시의원이면서 의사인 갈레란 남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의 정부로서 그녀의 모든 고향의 삶을 청산하고 파리로 도망갈 것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사랑하던 그 가난한 소설가라는 걸림돌을 넘어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야 어떻든 간에, 살인 충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은 다음 날, 무쉐트는 식탁에 놓인 그의 총을 주워든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똑같이 그녀를 억압하려는, 영영 고향에 자신을 가둬두려는, 가난한 소설가의 턱에 대고 총성을 울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 총에 정말로 총알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충동에 의해 방아쇠를 당겼을 뿐, 정말로 살인이 일어날 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대로 살인이 일어났고, 이제 그로 인해 그녀는 완전범죄를 위해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낸 후, 그 지역 시의원이자 의사인 '갈레'에게로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순진하게 꿈꾸었던 파리로의 여행을 갈레에게 제안하지만, 갈레는 완벽하게 속물인 인간이기에, 여태껏 무쉐트 자신이 오히려 갈레에게 이용되어져 왔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아니, 영특한 그녀는 이미 그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애인이었던 가난한 소설가에 대한 살인의 죄책감으로 그녀는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적으로 공범자이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갈레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쉐트는 갈레에게 자신이 살인을 했음을 고백했음에도 전혀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지울 수 없어, 이제 자신이 사랑하던 소설가와 자주 만났던 마을 외곽 우물가에서 자살을 꿈꾸며 서성이게 된다. 그런데 그 때 악마에게서 능력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도니상 신부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악마의 키스로 사람의 마음을 투시할 수 있게 된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를 보자마자, 바로 그간 무쉐트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기에 급급한 무쉐트는 도니상 신부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하기에 도니상은 무쉐트에게 이제껏 일어난 그 모든 죄가 무쉐트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닌, 무쉐트와 혼연 되어 섞인, 그의 뿌리부터 그와 가까운 모든 존재에서 비롯된 원죄 바로, 그 악의 실체로부터 벌어진 일이며, 무쉐트의 순결한 영혼이 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거기에 얽매어져 파괴되어지길 원했음을 밝히게 된다. 그렇지만 오히려 무쉐트는 그러한 원죄의식에서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모든 욕망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음을 그로 인해 깨닫게 되어, 자살을 하게 되고... 도니상 신부는 그 때문에 자신의 교구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의 지울 수 없는 형상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팔고서라도 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모든 욕망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자신이 악마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죽은 아이를 살려냄으로써, 모든 신의 섭리를 거스른 자신의 파멸을 신에게 고백하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갈등 가운데서 자신의 몸 하나 가눌 수 없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다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무쉐트.. 그리고 원죄.. 도니상 신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이 복잡한 관계의 고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신학생으로서 젊은 도니상 신부의 고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무쉐트의 경우는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 원작가인 베르나노스의 경우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다시금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 무쉐트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의 경우,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의 무쉐트와 달리, 같은 자살의 맥락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살이 구원으로 귀결되어지고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소설 '기쁨'의 경우에서는 좀 더 확연하게 소녀의 죽음이 갖는 이미지가 구원 쪽으로 그 의미가 드러나 지게 된다. 왜냐하면 ‘샹탈’이라는 지극히 순결한 소녀의 존재가 지극히 이기적이며, 지극히 비열한 소녀의 아버지와 그의 식구들로 인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어떻게 소녀의 순결이 이 땅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살며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는 비록 소녀는 아니지만, 한 젊은 신부의 고뇌와 죽음을 통해 이러한 모든 소녀의 죽음들에 대해, '그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는 귀결을 내놓고 있다. 즉, 베르나노스는 소녀란 이미지를 통해 줄곧 순결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여왔음을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이러한 소녀와 순결이란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나는 뭉크의 그림들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흔히 많은 이들에게 '절규' 혹은 '비명'으로 각인되어 있는 뭉크의 경우, 그의 다른 많은 그림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관념에 대한 상징주의적 그림 뿐 아니라, 많은 소녀들의 그림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소녀의 그림들이 주로 순백이나 빨간 색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다리 위의 소녀들' 그리고 '빨간 색과 흰색'이란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표현이 두드러져 있음을 우리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빨간 색과 흰색으로 대비되어져 있는 소녀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 우울한 소녀의 모습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오를 것처럼만 느끼게 된다. 특히, 기묘한 달빛이 어우러진 가운데 소녀들이 사내들과 뒤섞여 춤을 추고 있는 그의 다른 그림 속에선 하얗던 소녀마저도 빨갛게 변해버리면서, 마치 죽음과 키스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데 소녀는 간 데 없고, 발가벗은 나부의 모습을 한 요염한 여자가 남자의 시신 위에서 일어나, 이상한 해골처럼 변한 남자 혹은 뭉크가 길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대체 소녀는 어디로 가고, 남자의 마른 시체 한 구와 길길이 비명을 지르는 해골만 남아 있단 말인가? 어느새 새하얗게 순결했던 소녀가 붉게 달라올라 요염한 나신의 여자로 변해버린 것일까?

 

 

 

 

 

 

 

 

 

 

 

 

 

 

 

 

 

 


 너무나도 보편화된 관념들 속에서, 우리는 뭉크와 같이, 소녀의 순결이 사라져 버리고, 소녀가 여자로 변신한다는 사실에 많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결의식이 단순히 성적관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 지게 된다.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의 경우, 오히려 순결은 너무나도 잔혹한 의식이다. 그녀는 차라리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악녀가 되길 원하였고, 가차 없이 자신의 몸을 남자들에게 내맡겼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가난한 소설가와의 사랑을 통해 더욱 명백히 그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금껏 자신을 옭아매 온 족쇄인지는 누구보다도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다시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순결의식을 더럽히기 위해,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자신의 살인충동을 실현시키게 된다. 그럼에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그녀는 소설가와의 추억이 깃든 우물가에서 서성인다. 그런데 이제 타인의 속을 꿰뚫어 보는 도니상 신부가 갑작스레 나타나, 그녀에게 그러한 진실을 명백히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녀 스스로 얼마나 순결하기를 집착하고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엇나가기 위해 그녀 스스로 자신을 원죄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니상 신부는 과감히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의미하는 바이다. 그녀는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껏 자신이 증오해왔던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대로 혼연 되어져, 평생 그 올무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순결이란 감옥 속에서... 그렇다면...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순결의식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어떻게 원죄의식으로 귀결되는 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우리는 무쉐트를 통해, 도니상 신부를 통해 가늠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쉐트와 같이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를 말살시킨 남자로 대변되는 우리이기에, 뭉크와 같이 여성 공포증에 시달리면서, 마치 자신이 무쉐트에게 살해당한 가난한 소설가라도 되는 양, 비명을 길길이 지를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인가? 혹은 순결이고, 원죄고, 이러한 관념의 잔치들을 벗어나,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믿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표도로비치처럼 아버지의 살해라도 교사해야 하는 것일까? 정녕 우리에게 순결이란 건 커다란 족쇄 이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러한 무쉐트의 죽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기에,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이미 원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인 순결이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돋아 오르는 순결의식을 지켜내기 위해 소녀들의 또 다른 죽음들을 설정하고 있다. 결국, 그 잔혹한 순결의식을 포기하지 않고서, '모든 것은 은총이다'라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계속되는 소녀의 죽음을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순결이란 것이 더욱 원죄로, 악의 실체로 옭아매 들어가는 사슬일지라도, 그를 통해서만이 인간 구원이 가능하고 신의 은총을 인간이 확인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그에게서 뭉크와 같이 소녀가 농염한 여자의 나부로서 변신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 조차도 뭉크 그림에서의 남자를 살해하고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 순결이란 게 무엇이기에, 우리를 그 원죄의식이란 절망 가운데에서 다시금 구원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쉐트의 죽음을 단지, 또 다른 무쉐트의 죽음을 통한 구원으로 그렇게 쉽게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에선,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와 달리, 순결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가운데, 갑작스레 어느 날 숲 속에서 밀렵꾼에게 겁탈 당하게 되면서, 되려 그 동안 잠재되었던 무쉐트의 순결의 의식이 되살아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무쉐트는 다시 더럽혀 지지 않을 자신의 고귀한 순결을 위해,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가 미처 스스로 떨어지지 못한 마을 외곽 어느 우물가에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그로써 영혼의 쌍생아인 두 무쉐트 모두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여 지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자살처럼...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무쉐트를 구원하고, 겁탈로써 오히려 새롭게 피어난 자신의 순결을 영원불변하도록 간직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소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혹은 구원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소녀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자살이라는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너무나도 잔혹한 것 아닐까? 그리고 다시 나는 되물어 본다. 대체 무엇 때문에, 소녀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토록 순결에 집착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날 이 시대에 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 너무나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순결이란 족쇄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감히 순결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금기와도 같이 느끼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우리에게 갈증처럼 되살아나는 순결의식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남자와 혹은 어떤 여자와 잤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순결이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조금 더 정결한 사랑을, 조금 더 순수한 사랑을 꿈꾸면서, 자신에게 가시처럼 돋아난 순결의 보호막을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그 이전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 아닌,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된다. 아니, 매 순간 새롭게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그러한 순결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다시 새로운 사랑을 꿈꿀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배신의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세우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어차피 불결해진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놓아 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그래서 마치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그 잔혹한 원죄 의식에 놓인, 우리의 가련한 무쉐트와도 같이..

 

 

 아마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접하면서 느꼈던 혼돈들을 그대로 느꼈으리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순결이란 것이 이곳에선 너무나도 간단치 않고 복잡하게 엉켜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순결의식은 순결의식이고, 원죄의식은 원죄의식이라고 하면 매우 간단할 것을, 영화는 아니, 베르나노스는 그 둘 사이에 전혀 명확한 구분 없이 헝클어진 경계를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시금,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은총이라고 결론짓고, 우리의 잃어버린 순결에 대한 집착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가 이 사탄의 태양이라는 뜨거운 불구덩이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누가 그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가운데서 정금처럼 정결하게 내어 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녕, 그 벗어나기 힘든 순결에 대해 아직 집착하는 이 있다면,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방이 불길에 아스러지는 그 처참하면서도 황홀한 자태로..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그런 이들에게 정말로 순결한 사랑의 입맞춤 있기를, 무력하게 바라며 글을 마친다.

 

 

 

 

 

 

 

 

P.S.

 

 글 서두에 '사탄의 태양 아래서'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 글을 쓴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구해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도 읽어 보았습니다. 영화와 약간 구성이 다르지만, 맥락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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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
김수영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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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1 -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은 나락의 자태

 

 

 근래 내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남들은 하루에 12시간씩 말 그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일해도 200만원을 겨우 버는데, 나는 일주일에 그 정도 일하고 그 만큼을 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자유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나는 대학로의 방송대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시늉을 한다. 실상, 공부보다는 주로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전부지만, 그 만큼 여유롭고 한가하다. 말 그대로 일종의 선비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인지 다소 게을러져서 평소 10시 넘어서 일어나는 건 기본이고, 어쩔 때는 12시 넘어 2~3시까지 잠에 취해 있을 때가 있다. 물론, 늦게까지 잠을 안자는 부엉이 생활패턴이 그 주원인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다음 날 마뜩하게 할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나는 그 무언가를 상실했다. 10대 후반부터 지금껏 나를 지탱해 주던 그 무언가를.

 

  외로움, 그리움 혹은 공허함, 이런 것들은 사실 이제까지 줄곧 너무나 익숙하게 곁에 있어 와서인지 그리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때때로 이런 감정들에 휩싸일 때면 주체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나는 그런 주기들을 견디는 법들을 배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상실감은 무엇 때문일까? 오후 3시 늦게 일어나서, 5시께나 대학로 도서관에 당도하여 하릴없이 산책이나 하는 내 자신의 일과에 대한 무력감? 혹은 그럴 때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이제 끝나버린 관계들의 아쉬움? 이 역시 모두 앞에서 말한 범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결정적으로 상실한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내가 그 동안 그토록 두려워하며 경계했던 열정이다. 열정.......

 

  십대 후반부터 스무 살까지 품었던 신에 관한 열정, 그리고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 스무 살 적, 한 여자에게 품었던 열정, 신과 여자 모두 잃고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방황에 품었던 열정, 이런 방황 가운데 훌쩍 서른이 되어 먹고살기 위해 영어에 매달렸던 열정, 끝으로 최근까지 가슴 속에 품었던 막연한 프랑스에 관한 열정 등등. 이제껏 나는 이런 열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었고, 동시에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신에 관한 열정 때문에 신을 잃었고, 한 여자에 관한 열정 때문에 그 여자를 잃었고, 방황에 대한 열정 때문에 종국엔 방황의 길을 잃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떤 열정을 상실했음을 나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나의 하루의 일과 중에서 산책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루에 두 번 정도 하는데, 학교에 당도해서 한 번, 오후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 한 번. 이렇게 하루에 두 번 정도 한 번 할 때 마다 30분 이상 소요되는 산책을 즐기고 있다. 장소는 대학로 방송대와 가까운 낙산공원이다. 그리고 산책을 할 때면 나는 위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때론 무력해지기도 하고, 어쩔 때는 어떤 영감을 받아 시를 쓰기도 하고, 소설에 대한 갈피를 잡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 내 화두는 나의 이런 상실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이었다. 아니, 어떤 부름이었다. 산책 코스 중 내가 혼자서 명명한 ‘생각 벤치’라는 곳이 있다. 다른 곳의 벤치와 달리 대학로의 전망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라 무언가 탁 막혔던 가슴이 트이기도 하고, 이상하게도 그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고즈넉해져서 그렇게 명명하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이런 저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다 결국엔 숱한 상실감들에 지쳐 생각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그 때, 가슴 속에서 어떤 시 구절이 울렸다.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같고

    

 

  김수영의 유명한 ‘꽃잎1’의 마지막 시 구절이었다. 갑자기 왜 그 구절이 떠올랐던 것일까? 그 어떤 시보다도 혁명적인 그 시가 왜 나의 이런 삶 가운데에 문득 떠오른 것일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 어떤 위로가 되는 미지의 목소리처럼 가슴 속에 남아 글을 써보려 시도해 보았다. 이 또한 거의 10년만이었던 거 같다. 어떤 스터디에서 내준 숙제가 아닌 내 스스로 내밀한 고백을 담아 무언가 평론을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든 건. 그런데 좀처럼 글이 잘 이어져 나가지가 않았다. 지금의 내 상황과 이 혁명적인 시를 도무지 연결할 고리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쓸데없는 내 얘기 뿐. 어디에도 내밀한 고백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장 써내려간 글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며칠 째 그 부름에 응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에브리맨’을 읽게 되었다. 속도를 높여, 페이지를 넘겨갈 수록 확신이 들었다. 부름에 응해야한다는. 그러하기에 지금 이 평은 어쩌면 ‘에브리맨’에 관한 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꽃잎1’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그저 쓸데없는 내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죽음이라든가 신이라든가 이런 문제에 대해 나는 그다지 할 말이 있지가 않다. 신의 문제의 경우는 스스로 뿌리를 잘랐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할 것이 없고, 죽음의 경우엔 실제로 내 경험의 테두리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작 30대 중반에 내가 감히 어떻게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일도 안 되는 허방을 짚는 짓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최근까지는 분명이 그랬었다. 그런데 근 2년 사이 나는 죽음에 대해 이제는 조금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버리게 되었다. 다만 벌써 그 이야기를 발설하는 것이 옳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단순히 대화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건 별 일 아니지만, 이렇게 글로 그 죽음에 대해 표현한다는 것은 사뭇 다른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때론 내밀한 글들이란 건 사장되지 않고 되살아나서 칼날을 들이밀기도 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눈을 떴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한 친구의 모습이 어리었다. 모두 괜찮으냐며 알아보겠느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내가 하얀 병원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주일간 내가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밤,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아버지가 문을 열어보니 내가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더란다. 그래서 병원에 급하게 데려왔는데, 의사 말이 뇌종양이라고 했다. 뇌종양....... 이상하게 어떤 울림도 충격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나와 한통속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친근한 언어로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의사 말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난 뇌종양을 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술을 좋아하는 경우 30대 중반에 나와 같은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내 경우에는 빨리 발견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종양의 진행 속도 또한 급성이 아닌 만성이라 제거하면 바로 완치가능하다고 했다. 비록 8시간의 대수술과 약 1달간의 입원생활을 더 해야 했지만, 실제로 두 달 이후 나는 이 전과 거의 비슷한 상태로 내 몸이 호전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의사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술을 몇 달 후엔 한두 잔씩 마시기 시작하였고, 1년쯤 지나서는 매일 같이 챙겨 먹어야 하는 약도 빼먹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한 3개월 전쯤 그 일이 발생했다.

 

  그 날은 사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날 스터디 모임이 있었는데 후배가 발제를 하는 날이었다. 그 당시 스터디의 경우 내 2~3명의 친한 후배와 외부에서 아는 사람의 경로로 들어온 3~4명의 사람들로 구성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들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말은 문학 모임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둘, 셋 정도 됐고, 나머지는 대체 왜 그 모임을 참가했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여하튼 그러한 간극 때문인지 그 날도 문학이 아닌 영화로 스터디 주제를 삼아 이야기를 했는데, 외부에서 온 멤버들이 가관도 아니었다. 대체 영화는 보고 왔는지도 의심스러운데다, 최소한의 예의로 글을 써오는 것조차 하질 않고서 마구 발제자를 공격해대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떤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스스로의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을 무기로 삼아 허세를 떠는데, 그 때부터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닌 과민해진 나는 심한 두통을 느껴야 했다. 이제까지 평생 처음으로 느껴본 두통이었다. 사실, 난 뇌종양을 달고 태어났음에도 평생 두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탓에 스터디가 끝나고서 돌아오는 전철에서까지 나는 그것이 기분 탓인지 두통 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기분을 전환할 마음으로 후배의 기분도 풀어줄 겸해서, 발제했던 후배에게 술 한 잔을 제의했다. 안주는 석화였고, 술은 소주였다. 한 잔을 들이키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역시, 두통이 아닌 기분 탓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약 20분, 나의 기억은 소실되어 버렸다. 앰뷸런스 실리면서부터 드문드문 기억이 나기는 한다. 계속 구역질을 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리고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후배와 함께 병원 침상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두 시간쯤 잠이 든 모양이었다. 놀란 어머니와 아버지는 술을 왜 마셨냐고 다그치기도 하시고, 대체 약을 얼마나 안 먹었으면 약물 기준치가 떨어져서 그 모양이 된 거냐고 말씀하셨다. 그때야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두려움이란 걸. 이제부터 내 몸은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약 3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작지만 나에게는 크다면 큰 변화가 생겼다. 먼저 프랑스에 대한 나의 동경을 접었다. 물론 앞으로 5년 정도 지나 완치 판정이 내려지면, 다시 나는 또 프랑스를 꿈꿀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 내가 프랑스를 꿈꾼다는 것은 그 막연함만큼 먼 이야기처럼만 느껴진다. 아니, 사실 내가 프랑스에 대한 꿈을 접은 이유는 따로 있다. 무엇이냐면, 더 이상 프랑스를 핑계로 나의 글을 쓰고 싶은 염원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지금 쓰지 못하면, 나는 언제 쓸지 알 수가 없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면, 영영 나는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난 프랑스라는 그 막연한 이름을 통해 얼마나 글쓰기를 미뤄왔던가?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바로 내 눈 앞에, 내 손에,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을.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그 제목처럼 보통남자이다. 예술가이기엔 너무 안정 지향적이고, 그렇다고 안정만을 추구하지는 못하여, 3번의 실패한 결혼을 한. 그래서 말년을 외롭게 병과 싸우다 간 보통남자이다. 이 소설 속에서 죽음이란 건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무겁지도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까닭으로 죽음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저자는 말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고. 그 속에서 주인공은 이제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우스워져버림을 깨닫는다. 은퇴 후 그림만 그리겠다는 그 꿈도, 망각의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그 대단한 결심들도, 그가 한 평생 모아온 책들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죽음 앞에서도 각자 주어진 악전고투를 치러간다. 그의 동료 중 어떤 이는 자서전을 쓰려하고, 어떤 이는 그림을 배우는데 열중을 해보고, 주인공은 죽음이란 의미와 맞닥뜨려 그 속에서 동시에 생의 의지를 되새겨 본다. 나는 감히 이렇게 직면한 죽음과 나의 죽음의 문제를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나의 죽음의 문제는 이렇게 일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일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되레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러하기에 생명으로 가닿기 위한 느린 걸음이어야만 한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대학 때 한 선배가 매 주 열리던 ‘낚시촌’이라는 시낭송 모임에서 이 시를 낭송한 적이 있었다. 평소 워낙 시인 같은 선배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가슴 속에서 묵직하게 끓어오르는 뜨뜻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전까지 단순하게 내게 교과서에 나오는 ‘풀잎’, ‘폭포’를 쓴 저항시인으로만 알아왔던 김수영 시인이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저항과 혁명정신은 내가 기존에 알던 저항과 혁명이 아니었다.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가 아닌,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은 느리고 부단하게 흔들리며, 떨리는 불안이었음을 그제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괜찮다고 스스로 안위하듯 한 번 더 읊조린다.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이제 두서도 없고 복잡한 이 글을 정리해야만 할 거 같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의 부름에 대한 내 대답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에브리맨’에서의 죽음의 일상화를 통해 깡그리 잃어버린 열정에 관한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실, 처음부터 나는 그 답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마지막 구절이었다.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은 나락. 그런 느리고 유려한 흔들림. 많이는 아니고 그렇게 조금. 사실 그러하기에 지금 당장 무언가를 못한다고 해서 그리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당장 엄청난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고 지금의 이 선비놀음으로 인해 앞으로 다소 궁색한 삶이 예정되어 있을지라도, 전혀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이 있다. 오랫동안 나의 화두의 하나였던 뿌리를 자른 꽃잎이 바람에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의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꽃잎이 어딘가로 날아오르는가와 그리고 어딘가로 흘러들어가는 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실 어차피 그 꽃잎은 어딘가에서 모르게 썩어질 것이고, 그 자양분을 바탕으로 다른 꽃을 피어낼 것이다. 그러하기에 꽃잎이 어딘가로 가거나 머무는 문제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떨어지는 꽃잎의 자태이다.

 

  언젠가 몰래 담배를 피러 나온 학교 담벼락과 마주한 꽃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봄이면 매일 눈처럼 떨어지는 것이 꽃잎이지만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그만 두 눈을 적시고 말았다. 그리고 부끄러워 그 거리를 뛰어서 인적이 드문 놀이터로 가, 서럽게 울었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 아무리 눈물을 흘리려 발버둥 쳐도 한 방울도 흘려지지 않는 눈물이 왜 갑자기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는지. 몇 년이 지나고서 문득 그 일을 기억나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때 나는 그 떨어지는 꽃잎의 자태를 통해서 내 청춘의 절정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비록 그 순간은 짧았지만, 아직도 내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릿하고 정지한 화면으로써 각인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그 때 그 꽃잎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음을. 그러하기에 아직도 나중에 떨어지는 작은 꽃잎들이 내 가슴속에서 천천히 묵직하게, 그렇지만 절정이란 이름의 유려한 자태로 나락해가는 풍경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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