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아이들 1 천국의 아이들 1
마지드 마지디 지음 / 효리원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천국의 아이들 - 웃기고 슬픈 아동의 세계로의 초대장

 

 

  만일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아마 이런 영화를 하나 만든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아주 작은 물건 하나에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바로 이런 영화이다. 신발이라는 아주 작고 하찮은 물건 하나로 삶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성찰하고, 더불어 유쾌한 행복까지 전해주고.. 물론 아마 내 기질 상 영화 찍으면 난잡한 내용에 판금 조치될 확률이 더 크겠지만-.- 뭐, 여하튼... 그럼에도 사람이 한 번쯤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꿈꿔 본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렇게 간혹 글을 쓰지만... 아주 어둡고 칙칙한... (소설이나 시 경우;;) 사실 정말로 한 번 쯤 써보고 싶은 글은 난 ‘어린 왕자’ 같은 글이다. 그렇지만 아마 이 정도 되려면 인생을 한참 달관하고 나서 모든 것들을 하나로 오롯이 녹여낼 수 있는 황혼의 나이쯤이 아닐지...

 

 

  그럼 이제 삼천포는 이 쯤 해두고, 본격적으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잘 접하기 힘든 아랍 영화이다. 일단 먼저 여기서 떠오르는 건 아마도 ‘빈 라덴’과 무시무시한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후세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영화를 조금 본 사람이라면 ‘올리브 나무 사이로’나 ‘체리향기’같은 영화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영화와는 역시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영화이고, 우리가 떠올리는 그러한 아랍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뜨리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영화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일단 사건의 전말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신발 하나로 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주 작은 꼬까신^^; 하나를 요모조모 수선하는 데부터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좀 있으면 한 귀여운 남자아이가 그 신발 수리에 대한 가격을 치르고서 다시 야채 가게로 가, 감자를 외상으로 사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지레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나와 여동생의 신발을 수선하고, 감자를 사러 나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돌연 여기서 발생한다. 이 귀여운 남자아이가 어머니의 과도한 심부름에 들 것이 하도 많아 깜빡했는지 동생의 신발을 야채가게에 놔두고 와버린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신발만 고쳐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여동생을 집에서 마주쳤을 때, 그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그래서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야채가게로 달려가, 야채가게 아저씨의 눈치를 봐가면서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이미 신발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밖에 없는 신발을 잃어버린 여동생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지고, 아빠에게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다.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착하디착한 소년은 여동생에게 집안의 가난을 설명하면서, 당분간 비밀로 할 것을 간청한다.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분간 그 둘은 소년의 신발을 함께 쓰기로 한다. 아직 저학년인 동생이 어차피 오전반이고, 오빠인 소년은 고학년이기에 오후반이니, 시간만 잘 맞추면, 그것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이 연일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수업이 ‘땡’하고 끝마치자마자, 여동생은 그 조금만 몸짓으로 사력을 다하여 뛴다. 빨리 오빠에게 신발을 건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조그만 걸음으로 아무리 뛰어도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오빠는 초조하게 어서 동생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생이 겨우 도착하여 이제 신발을 체인지할 시점, 오빠인 소년은 화를 미처 내기도 너무 바빠 부랴부랴 학교로 미친듯이 뛰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어찌해도 지각을 면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몰래 학교로 들어가는데.. 왠지 학생주임 같은 표정 뚱한 선생 하나가 소년을 발견한다. 그리고 단단히 주의를 주며, 다음부터 그러면 학교에 못 오게 하겠다고 엄포를 한다. 하여, 다음부터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은 더욱 정신이 없다. 학교 시험을 치는데도 전속력으로 문제를 풀어 남들이 채 반도 풀기 전 나와 집으로 열심히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만 너무 빠른 속력을 주체하지 못하는데다, 신발은 자신의 고사리 발에 비해 왜 이리 큰 지, 그만 발을 헛디뎌, 신발이 개울로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물이 흐르는 속도를 따라 신발을 잡아보려 애쓰는 귀여운 여자아이의 처절한 몸짓...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오빠의 신발... 것도 모자라, 어느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으니... 그만 이 귀여운 소녀는 엉엉 울어버리고, 보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벱! 이를 지켜보던 한 정의의 할아버지가 긴 막대를 들고 와 오빠의 신발을 꺼내주는 것이 아닌가? 비록 물에 젖고, 형편없이 헤진 신발이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학교에 신고 갈 신발도 없는 절실함에 소녀는 죽었다 살아나는 심정으로 신발을 신고서 다시 아장아장 오빠에게로 뛰어간다. 그러나 오빠 측에선 다시 늦는 여동생 때문에 속이 타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마구 화를 내는데, 귀여운 여동생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오빠 신발이 너무 커서 그렇단 말이야. 그리고 너무 지저분해서 창피해 죽겠어. 오늘 다 아빠한테 일러 버릴 거야."

 

 

  이 말에 다시 미안해진 오빠는 동생을 달래며,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고, 부랴부랴 학교로 뛰어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학교에서 시험 성적 100점을 받아 선생님께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여동생에게 고스란히 헌사하며, 다시 동생을 달랜다. 이렇게 다시 몇날 며칠이 지나고...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 ‘자라"-’(여동생의 이름^^)는 우연히 자신의 신발과 똑같은 신발을 누군가 신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재밌게도 신발은 보이는데, 신고 있는 주인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쭈뼛쭈뼛..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살펴보지만.. 수많은 인파에 묻혀 잘 보이지 않고.. 이 때 부터 쉬는 시간마다 ‘자라’의 추적이 시작된다. 얼굴도 필요 없고 오직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발! 그 발만을 바라보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신발을 신은 그 발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도 감동하여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아니나 다를까 자라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여자아이의 집을 추적해 간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집 위치를 확인한 후 오빠에게 부랴부랴 그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서 다음 날, 우리의 귀여운 두 주인공은 다시 그 여자아이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집 앞까지 갔는데, 웬 눈이 먼 장님이 나와 그 여자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눈이 먼 장님은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인 것 같다. 그리고 왠지 아버지의 차림새로 봤을 때, 그 집은 형편없이 가난해 보인다. 즉, 여기서 두 착한 아이에게 사태는 애매모호한 해석을 띄게 된 것이다.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장님이고, 우리 보다 형편이 더 어렵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장님인 아버지를 인도하며 같이 일을 돕는다. 이 얼마나 처량한 모습인가? 그만 두 주인공은 풀이 죽어 차마 말 한 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그리고 다시 삶은 계속 반복되어진다. 비가 오나, 때론 바람이 휘몰아 쳐도, 두 소년 소녀는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뛰고 또 뛰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가 그들에게 찾아온다. 바로 무엇이냐면....... 짜잔!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 그것도 엄청난 부상이 주어지는데, 우리의 남자 주인공 ‘알리’(소년의 이름)에게는 3등에게 주어지는 상품에 유독 눈이 확 띄는 것이다.

 

 

  3등 상품- 운동화!!!

 

 

  이게 웬 하늘이 내리신 기회란 말인가? 여기에만 참가해서 3등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이 밤낮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걸 끝마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학교대표는 다 뽑혔다는 것이다. 그 동안 알리는 학교에 빨리 뛰어오고 가느라 미처 학교대표를 뽑을 때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너무나 결사적이었기에, 담당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냉담한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아이의 서러운 눈물 앞에 어찌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랴? 하여, 어쩔 수 없이 1000미터 기록을 재기로 하고, 측정을 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알리가 누군가? 밤낮으로 지각하지 않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속력으로 학교로 달리기를 하였던 아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 자연 남들 보다 눈에 띌 정도로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알리는 당당히 학교 대표로서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에게 알림으로써 둘은 손꼽아 그 날을 기다리게 되고, 드디어 운명의 아침이 밝아온다.

 

 

  구간은 4km.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아이들이 모였다. 그런데 우리의 알리가 여기서 과연 3등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아는 일. 경기는 시작되고, 알리는 힘에 겹지만 여동생의 귀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결승점을 얼마 앞둔 상태에서 선두권을 형성하여 몇 아이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그런데, 너무 여동생의 목소리의 힘이 컸을까? 알리의 스피드를 다른 아이들이 따라오질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알리는 속도를 조절하며 일등도 보내고... 이등도 보내고... 삼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속력이 모두 엇비슷한 대여섯의 아이가 몰려 있어, 자칫하면 삼등도 어려운 판국이 아닌가? 이에 다시 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안간힘을 다해 뛸 수밖에 없고... 영화의 영상은 여섯 아이가 거의 동시에 결승점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슬로우 비디오로 잡는다. 과연 알리는 삼등을 할 수 있을까?

 

 

  아주 느리게 온갖 힘을 다해 여섯 아이가 결승 테이프로 다가가고, 결승 테이프가 끊기는 순간. 그만, 알리는 놀라 버리고 만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처지지 않기 위해 달린 것이 그만 일등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주위에선 난리가 나고, 우리의 주인공 알리를 얼싸안으며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고, 여기저기 사진 플래시가 터지는데, 알리는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있다. 그는 일등을 했기에 여동생에게 신발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고 이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 자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빠가 신발을 가져 오겠지?’, 마치 서울 가신 우리 오빠 기다린다는 우리나라 노래처럼 자라의 표정은 들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들어오는 오빠의 모습은 개선장군이 아닌 패잔병의 모습이 아닌가? 사태를 파악해 버린 자라는 그만 실망해 버리고, 알리는 미안하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퉁퉁 붓고 피나는 발바닥의 상처를 물로 씻는다. 이제 이렇게 영화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려는 찰나... 다시 장면이 바뀌어, 두 소년소녀의 아버지의 자전거 뒷모습이 포착된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예쁜 여자애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제 다시 대충 영화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너무나 재밌게 본 영화였기 때문인지 글을 쓰는 내내 흥겨운 기분이 가시질 않는 거 같다. 그리고 연신 우리의 귀여운 ‘알리’와 ‘자라’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3등을 위해 목숨 건 알리... 그러나 1등이 되어버려, 1등이 되고도 패잔병처럼 눈물을 삭히어야 했던 그 장면은, 보는 이들 모두에게 눈물과 함께 웃음을 선사하는 어이없는 감동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아들 앞에서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처럼. 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페이소스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영화를 잘 모르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듯이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라는 건 이런 양면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동시에,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의 포착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믿는다. 아주 가장 작은 일상 하나를 포착하여 그를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대변할 만한 찐한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전해 줄 수 있는 것! 만일 이것이 글로 쓰여 졌다면 너무나 관념적인 언어의 현란한 잔치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다.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다른 여자아이의 발을 바라다보는 자라의 표정 그 하나만으로 우리는 신발이 지니고 있는 온갖 은유와 상징을 직감각적으로 바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는 작업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삶의 애환, 그리고 아이들의 순진무구함, 그런 것들이 혼연일체 되어, 우리를 그리움을 넘어, 감정의 정화와 이입이라는 신세계로 데려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결코 간접적 체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생생히 체득한 하나의 삶처럼 자신을 고스란히 그 속으로 데려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시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면 이것은 타인이 들려주는 옛날얘기와 같은 그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런 까닭으로 역시 직접적인 체험과 경험의 체득을 위해, 난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기억에서 말소시킨 후, 직접 영화를 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뭐, 무협소설 영웅문에 나오는 주백통이 아닌 이상, 기억을 지운다는 건 ㅋㅋ) 그리고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쓰인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이 다 그런 거다! ㅋㅋ-,-;;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그 자체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줄 것을 확신해 본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감정을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한다. 찌든 삶의 때들이 정화되는 그 기분을.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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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첫사랑에 관한 너스레

 

 

 

 세상엔 참 많은 첫사랑 이야기가 있다. 아니,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때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처럼 고통스럽고, 때론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처럼 숭고하며, 때론 영화 '몽정기'에서처럼 풋풋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그러나 과연 맨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는 그 현상이 첫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갈민휘의 경우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첫사랑은 배가 뒤집혀지도록 보고 싶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그것은 갈민휘 개인적인 정의지만. 여하튼...

 

 

  오랜 왕가위 팬으로써 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보아왔지만, 선뜻 '첫사랑'이란 영화는 손에 가질 않았다. 일단, 소문이 왕가위가 실제 감독이 아니라 제작만 한 거라서 그런 지 영 이상하다는 둥, 내용이 산만하다는 둥, 일반적인 평이 좋지가 않았고, 개인적으로도 귀여운 금성무와 이유유가 곁눈질로 흘끔흘끔 웃고 있는 비디오 케이스를 고르려 할 때마다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첫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동생이 빌려다 놓은 영화 '첫사랑'을 우연히 보고 난 지금, 나는 내 첫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지울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단,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기본적으로 염두 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실험적인 정신이 투철한 까닭으로 다소 산만한데다, 순전히 농담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구성방식 또한 매우 특이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화는 크고 작은 6가지의 에피소드로 나뉘고 있는데, 앞에 부분에 등장하는 4개의 에피소드가 뒤에 등장하는 2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기 전 실패한 시나리오로써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정말 실패한 시나리오라서 그런지, 전혀 이야기 할 어떤 건더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나는 이 네 가지의 에피소드에 대해선 전혀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영화의 시작부터 중간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 영화의 감독인 갈민휘가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왕가위에 대한 갈민휘의 오마주 영화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필요한 부분에 한에서만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여하튼 처음 영화는 해설자인 갈민휘가 등장하면서,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남발하는 가운데, 본 에피소드로 넘어가고 있다.

 

 

 

본 에피소드 1. 첫 만남-정신병자와 몽유병자의 세계

 

 

  청소부인 임가동(금성무)은 정신병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몽유병에 걸려 돌아다니는 황유유(이유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매일 밤, 임가동은 황유유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난 3개월 전 만자에서 동니만으로 이전 배치 받았다. 이 3개월 동안 난 매일 밤마다 몽유병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방을 헤맨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가끔은 깨어있는 듯도 하다. 그녀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임가동은 유유를 깨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가해본다. 눈을 감은 채 넋이 나간 유유의 머리채를 잡고서 흔들어도 보고, 목을 졸라도 보고,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도 보고^^;; 그렇지만 유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깨어나질 않는다.

 

 

  "정말 알고 싶어요. 밤에 무엇을 하는지... 최근에 캠코더를 샀는데 자기 전에 몸에 고정시키죠. 그러면 밤에 한 일을 알 수 있겠죠. 치료가 안 되더라도 뭔가 찍히면 기분이 달라지겠죠."

 

 

  평소, 자신의 몽유병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유유는 어느 날 캠코더를 구입한다. 그리고 자신의 배에 부착하여, 자신의 몽유 상태에서의 삶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는 임가동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일 밤, 그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임가동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몽유의 상태 속에서, 자신이 임가동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을 하게 된 이유로, 몽유병이 완치되게 된다. 그래서 유유는 그 때부터 거짓으로 몽유병 흉내를 내면서, 임가동과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둘의 관계는 조금씩 미묘해진다.

 

 

  어느 날 둘은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유유는 흘깃흘깃 눈을 뜨며, 임가동을 훔쳐본다. 왜냐하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임가동이 유유를 빤히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무언가 유유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임가동의 시선을 유유는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유유 그 자신이 더 이상 몽유병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로 인해 결국, 둘의 눈은 서로 마주치게 되어 버린다.

 

 

 

 

 

 

 

"이런 걸 시작이라 하죠.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작은 끝을 의미하기도 하죠. 모르는 게 약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이 몽롱할 때가 더 행복하죠. 사랑은 그가 보낸 꽃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곁에 있어주고 부드러운 한마디와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면,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고 사람을 취하게 하죠."

 

 

  서로 눈이 마주침으로써 서로에 대한 감정에 대해 두 사람은 슬며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몽유의 상태 속에서의 밤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낮에서의 만남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급작스럽게 전혀 다른 반전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언제나 사랑에 있어서 남자는 서툴고 성급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임가동은 매우 조급하게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바로 다음 날, 자신의 사랑을 유유에게 고백해 버린다. 아니, 너무나 어이없게도 청혼을 신청한다. 그것도 캠코더를 통해 일방적으로. 그리고 것도 모자라, 유유에게 자신의 고백이 담긴 캠코더와 함께 둘의 결혼 청첩장을 보낸다. 어디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가 보낸 청첩장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결혼 청첩장에 자신과 유유에 이름을 대신 새겨 넣은 청첩장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결혼식장의 장소가 잘못 기입된 청첩장이었다. 그러하기에 둘은 엇갈리게 되어 버리고, 각자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 결국엔 만나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날 싫어한다면 얘기 할 텐데... 난 그다지 무지막지하지도 않은데..."

 

 

  그 후, 임가동은 밤마다 유유를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녀는 오지 않는다.

 

 

 

 

 

본 에피소드 2. 사랑이후 -이일평과 조미나의 사랑이 끝난 이후의 세상

 

 

  이일평(갈민휘)은 조미나(막문위)와 10년 전 결혼을 약속했고, 집안이 부유한 미나가 모든 결혼준비를 다 했었다. 그러나 일평은 그런 관계가 싫었다. 그녀가 이상형이 아니었거나, 부담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식장에도 안 나타나고, 그녀가 준 결혼반지만 들고 도망쳐서 숨어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무엇이냐면, 그가 10년 동안 거의 날마다 미나에 대한 악몽을 꾸어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나와의 결혼을 배신하고 도망쳤을 뿐 아니라, 미나가 자신에게 준 결혼반지를 현재의 자신의 아내에게 결혼반지로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악몽은 항상 미나가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죽이거나,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결혼반지를 되찾아 가는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전 애인이었던 그 공포스러운 미나 아니, 그에겐 사탄 그자체가 찾아오게 된다.

 

 

"콜라 하나 주세요."

 

 

 

 

 

 

 

  아무런 예감도 없이 자신의 가게에서 평화롭게 수박을 자르고 있던 일평에게 미나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등장을 한다. 그래서 순간 놀란 일평은 자기도 모르게 수박을 자르던 칼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겨서 쥐어든다. 그러나 미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일평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콜라를 마신 후, 계산을 하고선,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그녀의 심정은 사랑을 잊는 술을 마신 기분일 거다. 매정한 애인이 떠났는데, 그녀도 나도 서로 상관 않고, 왜 이리 간단하지? 첫 콜라 병을 시작으로 사탄은 되돌아왔다. 누군가가 감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게 일에 관심이 없어졌다. 혹시 내가 사랑을 잊는 술을 콜라에 타서 그녀에게 마시게 한다면 그녀가 알아챌까? 그러나 그게 어디서 파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진짜 마신다면 날 무시할까? 세상은 마음처럼 안 되던데 이번에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뒤로 종종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똑같은 방식으로 콜라를 주문하고선, 그 자리에서 다 마신 뒤, 가버리곤 한다. 그리고 오직 일평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아직도 그녀가 그를 잊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며, 일평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일평의 아들을 예전에 자신과 일평이 자주 만나던 식당에 데리고 가서, 항상 일평과 자신이 즐겨 먹던 음식을 사주던가, 혹은 일평의 부인과 친해져서, 일평을 위해 만드는 옷 뜨개질 감을 미나 자신의 취향인 노란 조끼로 고르게 하던가... 이런 식으로 일평을 옥죄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오후, 그녀는 가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일평의 호주머니에 공포스러운 메모 하나를 남겨 놓는다.

 

 

  "오늘 밤 7시 30분 항상 만났던 그 식당에서 만나요."

 

 

  그러나 너무나도 그녀가 두려운 일평은 차마 나가질 못하고, 대신 그녀와 그를 잘 알고 있던 후배를 속여, 그 자리에 내보내버린다.

 

 

  "10년 동안 알고 지내 온 형이 나에게 이럴 줄 몰랐다."

 

 

  식당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일평의 후배와 미나가 앉아있다. 그리고 일평은 자신의 가게 앞에서 후배의 명복을 빌고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후배는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며, 미나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일평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미나가 일평을 어느 정도 체념한 것이 분명히 드러나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상하게, 일평의 공포감은 쉬 사라지질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공포감의 원인인 결혼반지를 어떻게 하든 미나에게 되돌려 주려고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의 부인의 손에 꼭 끼어져 있다. 그래서 여기서 영화는 약간의 위트를 발휘해, 일평이 자신의 부인 몰래 강탈하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잠들어 있는 부인의 얼굴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후, 막대기로 내리쳐 정신을 잃게 하게까지 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그리고 이렇게까지 훔친 결혼반지를 일평은 두건을 뒤집어 쓴 채 미나에게로 달려가 되돌려준다. 그러나 며칠 후,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평소처럼 콜라를 마시는 가운데, 일평이 잠깐 다른 일을 보는 사이에, 가만히 결혼반지를 카운터에 놓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이를 곧 알게 된 일평은 비 때문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미나에게 다가간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그 날 밤을 기억한다. 그 날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갑자기 용기가 생겨,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녀 곁에 가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우산이 있는데 차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나중에 몇 번이고,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의 중요성을 몰랐다. 오히려 엉뚱하게 느껴진다. 평소에 기억을 잊는 술, 사랑을 잊는 물, 다리 없는 새 등을 썼는데, 그 순간에는 한 마디 아니, 반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산을 받쳐 든 일평은 미나에게 씌어주며, 택시를 잡아준다. 그리고 미나가 택시에 들어서는 순간, 10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미나에게 이야기한다.

 

 

  "미안합니다."

 

 

  그 날 이 후, 일평은 자신의 부인에게는 새 결혼반지를 사주고, 미나의 반지는 자신만의 추억의 상자에 넣어둔다. 그리고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고, 다시 평소처럼 생활 할 수 있게 된다. 또,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노란 조끼를 입은 사진을 한 통 찍고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현상을 맡긴다.

 

 

  미나는 현상을 하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평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끝으로, 영화는 다시 처음처럼 갈문휘가 혼자 나와, 첫사랑과 영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한다.

 

 

  "몇 편의 첫사랑 이야기를 찍고 나서야 내가 첫사랑을 찍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죠. 지금 첫사랑이라는 영화를 찍었다고 쳐요. 내게 첫사랑이 주는 것은 눈물하고 과정을 그린 것들이었어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느낌은 이래요. 힘들고... 2년 동안 알아낸 것이 아! 사랑은 이런 느낌이어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나서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죠."

 

  "아 좋다. 아 찡하다. 제 첫사랑의 느낌은 이런 감명 같아요. 냉정히 생각하면 그건 얻기도 힘들고 잊기도 힘들죠. 아무 때나 있지도 않죠. 사람은 이상적인 첫사랑의 느낌을 가질 수 없죠. 인간은 너무 더러운 존재고 조잡스러우니까요. 어느 날 불쑥 나타나고, 정말 그 애가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둘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그 후에도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램인데,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죠. 그러다 보니 나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다 찍었는데 시작할 때와 같은 기분이에요. 알고 보니 숙명적으로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야 천천히 얻을 수 있는 건데..."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보고, 그게 이거였어? 여긴 이렇게 찍었어?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헤어지고 난 뒤, 그녀는 요즘 어때? 잘 있어? 또 뭐해? 이랬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아직 하고 싶은 걸 다 못했는데... 괜찮아요."

 

 

 

  어쩌면 누구에게나 첫사랑이란 것은 심각한 병적 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하면, 몽롱하면서도 아리고, 때론 공포스럽기까지 한...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마련이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쉬 첫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잊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순수에로의 집착이며, 우리들의 잃어버린, 그러나 되찾고 싶은 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세상에 온갖 시간과 물질들로 찌들어버린 우리는 첫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럽고, 괴롭다. 이미 너무나 멀어져, 다시는 다가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나 첫사랑에 얽매어 있을 순 없는 법이다. 그러하기에 아마도 갈민휘는 자신의 그 첫사랑에 대한 이러한 집착과 모순을 그 동안의 왕가위를 오마주하면서 왕가위 영화의 내용을 빌려 정리해 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 영화를 보았거나, 지금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본 이라면 위의 물음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 편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듯이, 첫사랑은 처음부터 병적 증상이며, 또한 너무나도 성급하며,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오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사랑이후에 관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처럼 우리는 첫사랑에 대해 터무니없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것이며, 오.해.다. 그러하기에 결국, 첫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인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잘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저 오해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공포의 대상도, 고통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 그러니 아주 당연하게, 그것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 추억이란 이름의 보물 상자에 언제나 곱게 접어서 가끔씩 열어보면 그만인...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당연한 이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영화는 왜 그토록 부산스러운 너스레를 떨었던 것일까?

 

 

  너.스.레.를. 떨.다... 수다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능청을 떤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는 바로 이 부분이 내내 걸렸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왕가위가 보여준 영화 속에서의 사랑이야기는 주로 아비정전에서의 '다리 없는 새'와 동사서독에서의 '취생몽사'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의 영화를 빌린 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즉, 그 동안의 왕가위 영화 속에선 어떤 너스레가 없었다고 갈민휘는 생각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 속에서도 그는 너스레라기보다는 아주 뻘쭘한 대사 한 마디를 던지고 있다.

 

 

  "우산이 있는 데 차 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정말로 엉뚱하기 그지없고, 생뚱맞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 말은 무언가 너스레다운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일평은 미나에게 아주 뻔한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척, 그리고 그 동안 서로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분명히 무언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능청을 통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모든 말을 다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때는 분명히 하나의 너스레가 우리들의 그 온갖 공포와 고통을 감추고서도 그것들을 씻어 내리며, 동시에 그것들을 정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갈민휘는 너스레를 떨기엔 다소 커 보이는 첫사랑의 문제를 그렇게 영화를 통해서 줄곧 너스레를 떪으로써, 씻어내고, 정리해 간 것 같다. 물론, 너스레로만은 부족하기에 영화 속에선 분명히 일평이 미나에게 사죄를 하며, 또 마지막에 이야기의 총 해설자로써 그 스스로 눈물을 뿌리기도 하지만...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고수한 이러한 너스레가 그의 첫사랑의 문제를 정리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도...

 

 

  어쩌면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한 나는 아직도 너스레를 떨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하기에 내게 있어 첫사랑이란 것은 누군가의 말들처럼 명치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저린 기억이며,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런 기억과 고통일지라도, 너스레를 떨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또 나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때는 누군가의 너스레가 참으로 부담스럽고, 측은해 보이기 짝이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론 정도를 지나친 너스레 때문에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한 너스레 속에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배려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리 무겁거나 심각하진 않지만, 무언가 분명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스레 그 자체는 언제나 비극적인 것을 비극적이지 않도록 하는,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는, 힘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첫사랑과 같은 순수에로의 집착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순수에로의 집착은 분명 고귀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똬리를 틀고 감아 들어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도록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혹은 불변할 것이라 믿은 그 모든 것들이 배신하는 것처럼. 그러하기에 오히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순수에로의 집착은 언제나 늘 무겁고, 위험해 왔다. 그러나 순수라는 것을 동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동경할 수 있단 말인가?

 

 

  종이를 접는다고 하여, 종이의 부피와 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 종이 자체가 다른 물질로 전이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첫사랑이라는 순수에 대해 다소, 너스레를 떤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너스레를 통해 우리가 부피와 무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크기가 다소 작아진, 첫사랑의 문제와 순수의 문제를 대면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그 무서운 첫사랑의 공포로부터, 순수에로의 집착에로부터, 좀 더 한 발짝 나아가, 다시는 대면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또 다른 첫사랑의 순수에게로 데려다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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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 프랑스 문학에 대한 추억여행 혹은 긴 여정에 대한 예감

 

 

  몇 년 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방송대 불문과의 프랑스 단편이라는 과목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텍스트로 해서 시험을 치룬 적이 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이십대 때 대학시절 신학이 전공이었던 탓에 아마 다른 서적으로 얼핏 접했던 거 같다. 물론, 이 때문에 두 작품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기까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천국으로 간 집달리’의 경우는 거의 종교우화서적에서 본 아슴푸레한 기억이라, 제목만 기억날 뿐 내용 자체가 거의 흐릿하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는 읽는 순간,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져, 읽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비록 시험 때문이긴 했지만, 그 까닭에 원어로 본 이유도 각인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 그 시험은 기말시험으로 프랑스 단편 과목의 거의 300페이지 분량 가까운 책 전체를 범위로 했는데, 다른 단편은 사실 지금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뭐랄까? 그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아릿한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할까? 사실, 이십대 때부터 줄곧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특히 프랑스 문학에 동경이 강했던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삼십대가 넘어서 굳이 방송대 불문과에 들어갔고, 불어를 공부하기 위해 또 굳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영어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과 어둠에 대한 동경이 함께 공존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프랑시스 잠 작품들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상상력과 서정성, 동시에 기독교 문학을 공부하면서 접하게 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 여타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현학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광기의 향연들, 이 양극의 기묘한 유혹은 프랑스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내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을 채워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번에 마르셀 에메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생존 시간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한 마디로 기막힌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발랄하고 경쾌한 서곡에서 씁쓸하고 여운이 있는 비극의 전조로 뒤바뀌는 서정적 변주곡! 만약 나라면 같은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작업을 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 상상력이란 건 고작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AV동영상 수준의 상상력이었다. 몰래 여자의 알몸이나 훔쳐보거나 강간하고 도망가는 그런 식, 혹은 그러다 문득 회의에 빠져 성적인 담론에 대해 내 나름의 개똥철학이나 진부하게 늘어놓을 게 뻔한 졸작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곡으로 따지만 실험적이고 전위적이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협화음들로 듣는 사람들의 귀에 민폐를 끼치는 그런 곡이었을 것이 다. 그렇지만 마르셀 에메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우리를 동화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화적인 세계로까지 데려간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구성은 흔한 신화적 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어, 그것을 만용하게 되었을 때 결국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날개에서부터 혹은 마이더스 손 이야기와 같은 신화이거나 우화와 같은 구성, 거기에 그 시대의 현대성을 가미시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로 그러한 신화적 구성에 단초를 제공한 획기적인 상상력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라는 설정과, 둘째로 그 설정을 현대적으로 재가공하여 새로운 신화의 옷을 덧입혔다는데 있다. 만약, 작가가 마지막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그저 벽속에 갇혀버린 것으로 끝내고, 교훈적으로 마무리했다든가 혹은 재미를 위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비약적인 능력을 한껏 치장했다면, 글은 신화적이도 동화적이지도 못하고 한없이 졸렬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적절하게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벽에 가두어 놓고, 또 그 남자를 위해 담벽으로 스며드는 기타의 선율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선율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들어버린 야심한 새벽 홀로 남겨진 이들의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질 위로의 선율이 되고, 혹은 누군가를 애타가 사랑했지만 끝내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속 담벽 안에 가둬버린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의 슬픈 발라드로 남게 된다.

 

 

  두 번째로 나는 ‘생존 시간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역시 정말 기막힌 상상력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작품 ‘인간은 모두 죽는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경우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 1946년이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가 1943년이니까 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는 장편이고, 이 작품은 단편집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서로 구상했던 시기는 비슷했을 것이라 예상해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지식인층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상기조가 ‘실존주의’임을 떠올려 볼 때, 그 시기 이런 비슷한 작품이 다수 쏟아졌다고 하더라도 하등 기이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두 작가가 비슷한 소재임에도 이야기의 초점과 중심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보부아르의 경우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다 실존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이유로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던 반면에, 마르셀 에메는 그 특유의 유머와 함께 시간의 상대성과 사회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블랙코미디의 분위기를 연출해야했다고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아니, 이 역시 초반 가벼움을 가장하면서 부드럽게 다가와 자신의 사변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특히, 시간의 상대성에 관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의 상대성은 철학적인 관념으로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의 여지를 독자에게 준다. 왜냐하면 작가 자체는 글속에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어떤 자신의 철학적인 주관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달에 15일을 사는 남자, 혹은 36일 사는 남자와 같이, 사실은 밑도 끝도 없는 가정을 진짜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 객관적으로 표현해내고, 그 속에 처한 작가로 대변되는 주인공 자신의 느낌을 간결하게 적어 내려갈 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 좋은 소재가 단편으로 종결된 까닭에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묻어둔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내 개인도 그러한 부분은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가 길게 늘어졌다면 작가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 그러한 소재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인 사르트르, 알베르트 까뮈 등이 충분히 무겁고 진지하게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 보태서 마르셀 에메가 현학적인 이야기들을 마구 늘어놓았다면 지금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우리는 결코 지금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마르셀 에메는 역시 내가 처음 마주한 그 느낌 그대로 내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나의 오랜 동경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게는 이 글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서정과 더불어 양극에 서있는 어두운 관념에 대한 환상이 아직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어릴 적 처음 마주했던 ‘어린 왕자’와 같은,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벽을 드나드는 남자’와 같은, 이런 간결하고 아름다운 동화와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어둠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분명 이런 아름다운 단조의 변주곡을 하나쯤 써내고 싶다. 쓸쓸하지만 여운 있는 서정성 가득한 발라드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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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스텔지아 -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에 대한 고백


 

 설령, 길 위에서만 살다 길 위에서 죽어버릴 구도자일지라도, 혹은 영원히 이방인으로만 살다가길 원했던 까뮈의 뫼르소일지라도, 그리고 빈집을 견딜 수 없어 낡은 외투 하나만을 꼭 부여잡다 겨울 빛깔처럼 투명하게 어느 봄날에 분질러져버릴 젊은 시인일지라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리움이란 것은 늘 있게 마련인 법이다. 비록 그들에겐 돌아가야 할 집도,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뿌리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되어주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의미 없음 너머에 까닭 모를 설움이 다른 그 누군가에게라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목마름 같은 그 그리움들이 너무나 컸던 그 이유로, 메말라 진 까닭인지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그리움 하나쯤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이유를 알고 싶어, 목이 마르고, 그렇게 목마른 이유로, 어떤 이들은 끝내 아무 것도 마시지 못하고, 메말라 간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늘 그 그리움의 이유들을 알고 싶어, 목이 말랐다. 그리고 그런 목마름 가운데 오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는 한 사람의 목마름과 마주해 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를 맨 처음 만난 것은 영화 '희생'에서였다. 알 수 없는 기괴한 이미지들과 너무나도 심각한 종교적인 냄새들 그리고 광기와 어우러진 화두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골이 지끈거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주인공 알렉산더 교수가 자신의 여자 하인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세상을 구원한 후, 깨어나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장면과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준다면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라는 대사는 매우 인상 깊게 각인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이 때문에 그 후, 난 그의 영화들을 다시 어렵사리 구해보기 시작하였고, 그런 와중에 영화 '노스탤지어'를 통해 그의 목마름과 광기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이해가 영화사 속에서 독특하게 '완벽한 영상시인'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적인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맥을 짚는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잡고서 큰집의 기둥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목마름의 이유들을 그를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고백일 따름이지 해석이 아니라 생각해 보기에, 지금부터 천천히 그의 영화 '노스탤지어'를 따라, 내 그리움과 목마름의 이유들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영화는 처음 먼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어느 벌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마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이 이탈리아로 나와 있어, 쉽게 이탈리아의 어느 벌판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타르코프스키라는 인물의 성격상, 개인적으로 여기부터가 분명 예사로운 조짐은 아니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알다시피, 노스탤지어 즉 향수이며, 지평선이라는 것은 닿을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들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러면서 영화의 두 주인공 코르차코프와 유제니아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서 영화 화면에 처음 잡히었던 지평선의 풍경을 따라, 어느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장면을 카메라의 시선이 고정된 자세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 구조로 들어서게 된다.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인 코르차코는 18세기 러시아의 작곡가 소스노프스키의 전기를 쓰기 위해, 자신의 여자 친구이며 이탈리아인으로서 이탈리아어를 통역해줄 유제니아와 함께, 소스노프스키가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온천 마을 바뇨 비뇨니에 당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뿐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도 매우 복잡하게 영화와 엇물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얽혀 있는 실제 상황이다. 소스노프스키라는 인물의 경우, 18세기 러시아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서, 러시아의 유명한 노예 신분의 음악가였는데, 지주의 후원을 통해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을 왔다가 이탈리아에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유 뿐 아니라 부와 명예 그리고 직위까지 그 모든 것을 보장받게 되지만, 고국인 러시아를 잊지 못해, 다시 노예 신분으로 돌아갈 줄 알면서도 러시아로 돌아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소스노프스키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를 만든 직후, 러시아에서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영화의 상황은 미래에 고향을 떠나 방황하게 될 타르코프스키 자신에 대한 진중한 고백이 담긴 예감과 전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선 내내 향수에 대한 이상스런 이야기들과 더불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의 마을과 고르차코프의 고향 러시아의 이미지가 몽환적으로 교차되어지면서, 극대화된 그리움의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가 여기서만 머무른다 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러한 향수 속에 숨겨진 궁극적인 그리움에 대해 묻고 있고,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제 영화 속에선 전혀 새로운 인물 도메니코가 등장하게 된다.

 

 

  어느 날 유제니아와 함께 온천 주변을 거닐던 코르차코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도메니코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으며, 7년간이나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가두고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이다. 이에 그의 아내가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류를 구원할 방법을 생각하며 홀로 지내고 있던, 말 그대로 완전한 미치광이였다. 그런데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면들에 대해 오히려 관심을 갖게 되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심지어 그는 이 때문에 영화 내내 마치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애인 사이로 함께 하던 유제니아와 결별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도메니코도 세상의 종말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로 떠나면서, 코르차코프는 생소한 이탈리아 마을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스노프스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서 떠나려는 찰나, 우연히 로마에 머물고 있던 유제니아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도메니코가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며칠째 인류의 종말과 구원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 그와 동시에 그(도메니코)가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분신자살을 시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떠나기 전, 코르차코프에게 이야기 한 내용이었다. 무엇이냐 하면, 도메니코는 인류에게 종말이 올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그러한 인류의 종말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선 로마와 자신의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동시에 불꽃이 피어올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로 떠나기 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던 코르차코프에게, 자신이 로마에서 분신자살을 할 때, 마을에 있는 온천에서 촛불을 켠 채 꺼뜨리지 않고서, 온천의 맨 처음 위치한 장소에서부터 끝까지 들고 가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코르차코프는 도메니코의 그런 말들에 대해 진지하게 듣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 여행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유제니아와의 통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상기하게 된 것이다. 이에 코르차코프는 떠나려는 걸음을 멈추어, 다시 마을의 온천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날까지 말짱하던 온천이 완전히 메말라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코르차코프는 실제로 도메니코의 말을 믿게 된 듯, 도메니코가 로마의 광장에서 우스꽝스럽게 분신자살하는 그 순간,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마을의 온천에서 촛불을 켜고선 조심스레 걷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러한 코르차코프가 바람에 자꾸 꺼지는 촛불을 다시 켜기를 반복하면서, 온천의 처음지점부터 끝지점까지 고통스럽게 걸어가는 장면을 세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은 성공한 코르차코프의 희망을 발견한 얼굴과 함께, 갑자기 전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 궁전처럼 생긴 어떤 커다란 집 가운데 앉아 있는 코르차코프의 모습을 잡으며, 영화를 끝마친다.

 

 

  이제 복잡하고 기괴한 그리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영화의 얘기를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역시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 속에서 시인 코르차코프가 이미 던진 질문이지만, 소스노프스키는 왜 자신이 다시 노예가 될 줄 알면서도 고향인 러시아로 되돌아 가, 평생 괴로워하다가 자살해 버린 것일까? 대체 고향이라는 것이 어떤 힘이 있기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자유마저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우리는 보통 자유를 찾아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 동안 너무나 많이 접해 왔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용되어 졌든, 혹은 문학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대리 만족을 주었던 간에,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의 틀 안에서 자유란 것은 분명, 인간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과연 자유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자유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바람을 따라 하늘로 도달하고파, 자신의 뿌리 깊숙이 박힌 대지를 버리고서, 하늘을 향해 이카로스와 같이 나래를 폈을 때, 태양에 아스러지는 자태와 유사한 문제이다. 즉,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뿌리 깊숙이 박힌 삶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무한한 자유로의 상승을 꿈꾸지만, 자유란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쉬 도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히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리는 어이하지 못하고, 다시 자유에로의 한없는 비상을 꿈꾼다. 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 자신이기도 한 코르차코프는 자신의 조국 러시아를 등지고서, 오직 소스노프스키로 대변되는 자유와 궁극적인 그리움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고 있는 방랑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매몰차지 못하게도, 자신의 조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의 풍경, 가족의 모습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인 샘(온천)과 러시아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유제니아와 같은 존재 사이에서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망명을 결심하고 있던, 타르코프스키의 미리 예감된 계산과도 같은 복선이었다. 즉,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뿌리를 버리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때, 극심하게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완성한 직후 서방세계로 망명하였고, 영화 속 코르차코프는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온천 마을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향수병에 시달리던 코르차코프는 어이없게도 세상의 종말을 믿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결국 왜 그는 미치광이 도메니코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촛불 하나를 들고, 온천을 걸어간 것일까?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가진 자유에로의 관심이, 그들의 향수의 대상인 자신이 뿌리박고 있는 고향과 연관되어져 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그 고향이라는 것이 조국 러시아를 넘어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고향에 대한 것임을 우린 쉬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떠남이라는 것은 자신의 거추장스런 뿌리를 자르고서 바람을 따라 나래를 펴 비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깊게 뿌리내리기 위함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저변에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뿌리도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그대가 곁에 있다고 해서 그대가 그리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대라는 존재가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 누구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모두가 애초부터 무언가 상실한 채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체 무엇이 그립고, 무엇이 목마르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우리에게 그 대상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그러니 어느 누가 영화 속에 우리의 그리움의 원천인 이탈리아 마을의 작은 온천이 하루아침에 메말라 버리고, 그 때문에 이 세상이 종말의 위기에 처했다고 하여, 그것이 거짓이고, 가짜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도 모르고 날뛰는 방랑자와 미치광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느 시인은 자신에겐 조국도 없고, 고향도 없고,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 시인은 자신의 집이 비어있음을 고백하면서, 그 속에서 사랑을 잃었음을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그리고 스무 살 적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진리 보다 귀중한 내 자신의 진실을 찾고자, 집과 교회 그리고 친구들과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마저 버리고서 길을 나섰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 알아졌던 것은, 나에겐 이미 그것들이 존재한 적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그대로 돌려놓고자 하는 내가 그런 말들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 때는 분명히 그랬고, 그러하기에 지금 역시 그러한 나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그런데 왜 그처럼 소중하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그리고 그 누군가들은 쉽게 발설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 모든 그리움 끝에서조차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게로 쪼르르 되돌아오거나, 그 목마름 끝에서 견뎌내질 못하고 분질러져 버리는 것일까? 먼 지평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경계는 정녕 우리의 고향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갈 곳은 그 어디고,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한량없는 질문들 끝에서 도메니코와 같이 스스로 불살라 질 이들을 생각할 때면, 난 가슴이 아려와 도무지 무엇이 진실인지, 이제껏 고백했던 그 모든 진실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하고만 싶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모든 것들은 희미해져버리지만, 그럴 땐 도메니코를 대신해 불살라질 촛불 하나를 켜고서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던 코르차코프처럼, 내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돌아갈 집에 밤새 떠나간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아직 불빛을 차단하지 않을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해 본다. 그리고 태양 끝에 가 닿고자 나래를 펼쳤던 어느 벼랑에서 되돌아 선 그 걸음으로,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것이라고, 그 품에서 모두 살아질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나도 아직 꺼놓지 않을 불빛 하나쯤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비록 나 역시 코르차코프처럼 그 대상조차 알 수 없는, 목마른 광기 그 이상 그 무엇도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도메니코와 내 자신을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들을 위해 촛불을 켜보고 싶은 것이다. 단 하룻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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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만세 - 자위, 섹스 그리고 그 너머


 

 애정만세!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9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써 우리에게도 선보인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대만 영화인데다, 당시 기준으로 보통 비디오대여점에 들여 놓을 만큼 재미있는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해서 전혀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영화 꽤나 안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군대를 제대하고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여 밤마다 학교 주위를 배회할 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4학년 2학기를 앞두고 학교를 자퇴한 괴짜 선배를 알게 되어, 그 선배의 소개를 통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때 나는 그 선배와 함께 그 때까지 이름만 듣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영화의 평생 분량을 거의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화사를 좔좔 꿰게 되었지만, 그런 우리조차도 그 영화를 보고선 머리가 띵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체 이게 뭐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유럽 예술 영화처럼 알레고리와 상징이 가득한 관념적인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우리는 갖은 폼 잡으면서 영화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고, 아는 지식 모르는 지식 총 동원해, 피 튀기는 토론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대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촬영 기법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영상이 남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거의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수준... 물론, 장선우 감독의 실험 정신에 대해 내가 평가 절하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그 만큼 허무하고 허탈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내내 가슴에 남는 영화였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났다. 현재 그 선배도 나도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버둥거리고 있고, 또 그 만큼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변했을 것이다. 뭐 이젠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 굳이 이런 말을 꺼낸다는 자체가 우스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여하튼 이제 나는 그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이 사회를 배회하고 있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뭐랄까..? 제법 고대 하늘나라를 배회하던 신학생의 때깔을 벗고, 현대 사회인 흉내를 낸다고 할까? 그러면서 이제야 나는 이 영화가 이야기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 한 남자가 어느 아파트 열쇠 키를 훔치는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보아하니 그 남자 행색은 번듯한데, 어디 오갈 때가 없는 모양인 것 같다. 그래서 아직 분양이 안 된 아파트의 열쇠 키를 훔쳐, 잠시 동안 그 집에 기거할 작정인 모양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몰래 그 집에 들어가, 제 집 인양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데... 아니, 갑자기 웬 칼? 이 남자 사는 게 힘들었나?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디 자살하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눈을 찔끔 감고서 칼을 손목에 가져가 보지만, 쉽게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하고... 남자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재차 칼을 손목에 다시 가져가 보지만... 도저히 칼은 손목을 긋지 못할 거 같은데...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무래도 이 남자는 이 영화 주인공이 아닌가? 하고 잠깐 의문을 달 새, 순식간에 카메라는 한 삼십대 중반의 여자와 이십대 후반의 다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사람이 북적대는 어느 밝은 카페, 한 남자가 앉아 느긋이 담배를 피고 있는데, 그 옆에 마치 중경삼림에 임청하를 연상시키는 듯한 복장을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문다. 보아하니, 섹시한 모양이 보통이 아닌 아줌마!^^;; 그래서 인지 옆에 남자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못 뗀다. 그리고서 여자가 자리를 뜨니까 웬 미행? 첩보영화인가? 여하튼 조금은 백수건달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이는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고, 여자는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듯 갈 길을 가는데... 갑자기 조금 수상쩍은 느낌에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러자 남자는 마치 자기도 갈 길을 간다는 듯 자연스럽게 공중전화 박스로 가 전화를 건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첩보영화 공식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자가 그 사이에 도망가지를 않고, 남자가 전화를 거는 전화박스 뒤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장면은 바뀌어,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럽게 어느 아파트에 들어서더니, 서로 굶주렸던 듯 급하게 옷을 벗으며, 애정행각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집은 자살 시도를 하고 있던 남자가 몰래 들어가 있던 집이었다. 그러니 자살을 하던 남자는 깜짝 놀라, 자살하다 말고 옷가지를 급히 챙겨 입고선, 잠시 그 집안에 다른 남녀의 불꽃 튀는 사태를 파악한 후, 몰래 도주를 해버리고.... 두 남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며... 어느새 다음 날 아침...

 

 

  이제 영화는 대충 윤곽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자는 알고 보니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여자고... 그래서 그 아파트도 그 여자가 관리하는 집 중 하나인 것이었다. 그리고 자살을 하던 남자는 납골당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인데, 조금 사회 부적응 끼가 다분히 있어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 하나는 밤에는 시장 바닥에서 노상 판매를 하지만, 거의 말 그대로 백수건달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백수건달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갖은 후, 또 몰래 그 아파트 키를 훔쳤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시 여자를 꼬셔 보려고 하는 거 같은데... 여자는 뒤가 깨끗한 여자인 듯, 별로 그 백수건달 같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엔 조금 바빠 보이는 것도 같고... 여하튼 간에 그것은 둘째 치고, 그 백수건달 남자가 열쇠를 훔치게 됨으로써, 이제 그 빈집에 또 다른 기거자인 자살하던 남자와 마주칠 일만 남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처음엔 서로 둘 간의 존재를 몰라, 두려워 하다가, 둘 다 그 집 주인이 아닌 객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둘이 동맹을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원래 그 집 주인은 아니지만 임시적으로 그 집의 관리자인 여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 둘은 서로 공생하게 된다. 여자의 빈 집에 혹은 여자라는 빈 집에 제 집 양 기생하면서 공생하는 두 남자 이야기... 벌써 이것부터가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집에 기묘한 동거자인 두 남자와 한 여자에 대한 무언가 알 수 없는 관계의 고리들을 더욱 복잡하게 깔아 놓고 있다.

 

 

  먼저,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자살하던 남자가 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 전반에서부터 드러나지 않고 중반이 돼서야 드러나는 점으로 보아, 남자는 분명히 자신이 게이임을 숨기고 있고, 또 그로 인해 매우 괴로운 상태인 듯싶다. 특히 게이인 남자의 그런 부분을 영화는 성적인 억압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범한 아시아의 사회에서 자신이 게이임을 드러내고서, 정상적인 삶의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차마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늘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억압은 게이의 자위를 통해서 드러난다. 남자를 좋아하지만 그 사실을 밝히는 순간, 분명히 그 남자로부터 버림받거나, 동물 취급받을 것이 뻔한 게이.... 그러니 게이는 같이 동거하게 된 백수건달 남자에 대해서 이상한 연모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표출하지 못하고, 혼자 있을 때면 끊임없이 자위의 세계로 탐닉해 들어간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미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버린 것 같았던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그 특유의 백수건달 끼를 발휘해,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는 귀찮다고 하지만, 혼자서 한 밤을 보내기엔 너무 고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여자는 애초부터 자신의 빈 집에 대해 어떤 권리도 없는 부동산 중계인으로서 관리자였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자는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 불현듯 느낀 공허함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자위를 하다가... 남자가 전화로 슬쩍 언급했던, 남자의 일하는 시장 골목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을 배회하다가 다시 남자와 마주쳐, 둘은 자연스럽게 첫 날 관계를 가졌던 그 아파트 그 침대로 다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각, 게이는 전혀 그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그 곳에 자연스럽게 누워있었다. 그러니 다시 자살을 시도하던 그 첫 날처럼 도망을 가야하는데... 벌써 남자와 여자는 그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한 김에 게이는 침대 밑으로 숨어 버리고... 이제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극에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익명의 관중으로써 참여하게 된다. 심하게 흔들리는 침대... 여자의 숨넘어갈 것 같은 비명소리... 그리고 그 침대 밑에 숨죽여 자위하고 있는 게이....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아직 잠들어 있고, 여자가 먼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긴다. 그리고 대충 샤워를 하고선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자연스럽게 그 집을 나선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갈 곳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자가 완전히 나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게이가 기어 나온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데.... 너무나 안쓰러운 그 모습.... 게이는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더블 침대에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남자의 다른 편에 쭈그리고서 누워,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다본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손길로 매만질 수 있다면... 당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분명 게이의 몫은 아니다. 아마 결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척이던 남자가 갑자기 잠결에 게이가 전 날 같이 자던 여자인 줄 알고, 덥석 안는 것이 아닌가? 놀란 게이는 어이할 줄 모르지만, 왠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왠지 빨갛게 달아올라 주체할 수가 없는 모양이 된다. 그러하기에 게이는 참지 못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의 입술에 몰래 입을 맞추고... 다시 몰래 잠들어 있는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두고서, 여자가 나갔던 그 문으로 그대로 그 집을 나온다. 그리고서 영화는 다시 장면을 바꾸어, 집을 나갔던 여자의 걸음에 시선을 맞춘다.

 

 

  차에서 내려 어딘 가로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 여자... 카메라는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서, 그 걸음 하나하나를 지겹게 다잡아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지겨운 기다림 끝에 다시 카메라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는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런데 갑자기 웬 서러운 울음? 알고 보니 이 당찬 여자가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매우 서럽게... 차라리 펑펑 쏟아내면 더 좋을 것을... 훌쩍훌쩍 참는 것이 더욱 서러워 보인다. 그런데 카메라는 다시 전혀 청중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자의 그런 훌쩍거리는 모습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잡아내고 있다. 한 몇 분이나 지났을까? 줄곧 흐느끼던 여자가 이제 제법 자신을 추스르고서 담배를 문다. 이제 영화가 끝나려나 보다. 그런데 이 여자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물고서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영화는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끝을 맺는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아니, 이 허무한 영화의 알 수 없는 알레고리에 생기는 의문들에 대해 물음을 가져보아야겠다. 그렇지만 결코 답을 낼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음이란 건 그 자체로 답을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너무 이제껏 답을 요구해 왔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허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이 허무함을 그대로 인정하며 묻는다. 왜 이 영화는 전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하는 허무한 영화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앞에서 이 영화가 나는 결코 유럽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알레고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와 게이 그리고 여자는 우리 현대인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알레고리의 속성이 갖는 어떤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라든가 귀결은 여기에 없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풍자라기보다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다소 의도적으로 어떤 기법도 사용하지 않았고, 주인공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마치 가정용 비디오에 담은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영화는 사실적인 것이다. 다만 간간이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장면에 매우 길게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예를 들면, 주인공 여자가 모기 한 마리에 갑자기 자신의 멍한 상태를 자각하고 모기를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이라든가... 남자가 게이에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어디든 데려다 주겠다고 하자, 고작 게이가 남자와 함께 간 곳이 게이의 직업과 관련된 납골당을 판매하는 곳이라든가... 분명, 이런 장면들은 은근히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풍자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제목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런 것들은 부차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현대인들의 애정에 대해서 섬뜩하리만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게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게이는 그 특이함으로 인해 쉽사리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정의 형태가 아닌, 다소 특이한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게이의 그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억압의 다른 표현인 성적인 억압이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 영화의 게이처럼 자신의 성적인 욕망의 정체를 쉽사리 누구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들어, 우리가 회사나 혹은 동료라는 정상적인 관계 사이에서 간혹 느끼는 성적인 욕망을 우리는 쉽게 표현할 수 있는가? 결혼한 사람은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럴 수 없고, 또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수시로 아주 자연스럽게 생기는 성적인 욕망을 모두 분출한다면, 이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그리고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가지만... 여하튼 간에, 우리는 제도든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것들을 쉽게 발설하고 행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흔히 변태라고 칭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짐승 보듯이 본다. 왜냐하면 엄연히 사람과 짐승은 욕망을 대함에 있어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게이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니라고는 말해도 짐승처럼 볼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때론 우리의 감당할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영화에서의 게이처럼 자위로 분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법 온당해 보인다. 혼자 남겨진 방에서 여자 옷을 입고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한다던가, 혹은 수박을 먹다 말고 수박 껍질로 자신의 볼 살을 비비며, 자신의 뜨거운 미열을 시원하게 달래준다던가...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자신도 짐승 취급당하지 않고... 하지만 문제는 그래도 우리는 외롭다는 사실이고, 또 그것은 왠지 진정한 육체에게로 가지 못하는 자기비하와 수치스러움이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자는 혼자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그 능글맞은 백수건달 남자를 다시 찾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갈했으면 끝이지, 왜 또 서러워서 그렇게 길가다 말고 어느 벤치에 앉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사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조차 성적인 욕망은 쉽게 표출되고 대변될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하기에 미국의 영화들에서조차 완전한 포르노 급의 XXX등급 영화를 제외하고는 성적인 표현이 자제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자위는 죄악시되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슬슬 일반적인 영화 속에서도 성적인 표현의 수치가 그 강도를 높여가고, 그와 비례해 당연히 자위하는 모습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자위의 형태가 매우 다양해지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위가 이젠 자신의 몸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화되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1970년대 어느 영화에선 헬기의 차가운 금속 표면에 대고 자위하는 여자가 등장하게 되고, 90년대엔 영화 클러쉬에서 자동차의 속도감을 통해 자위하는 남녀가 등장하며, 자연스럽게 애정만세에서는 수박에게 자위를 하는 우리의 게이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만큼 우리의 성적인 욕망의 대상과 깊이는 확장되었으며, 이것은 그와 동시에 우리의 육체의 소외 현상과 더불어 성적인 억압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심각해졌다는 증거가 되게 된다. 왜냐하면 과거에 비해 훨씬 비대해진 우리의 성적인 욕망은 우리들의 육체 뿐 아니라 모든 세계로 확장되었는데, 아무리 새로운 가치관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은 전혀 바뀐 것이 없어, 우리는 모두 그 커다란 차이 속에서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 우리 자신은 헬기의 표면과 자동차의 속도 혹은 수박에 대고 자위할 만큼 스스로 변태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건전한 생각이다. 성적인 욕망만 비대해져 자신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주체하지 못한다면, 아니 책임질 수 없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속 편하게 자기 자신은 이런 변태가 아닌 건전한 정상인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들 그렇게 외롭다고들 난리란 말인가? 과연 그 말이 말 그대로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분명, 자기 자신은 변태가 아닌 정상인인데, 그래서 그냥 혼자라서 외로운 것뿐인데도, 자꾸 다른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헬기나 자동차는 아니지만, 그 무엇으로든 간에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표출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표출 시, 자신도 모를 상실감과 수치감에 다시금 자신 앞에 커다랗게 구멍 나있는 성적인 욕망의 크기와 부피를 대면하고 경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영화에서의 여자처럼, 그러한 자기 자신의 성적 부피에 비례해, 너무나도 소심한 자신의 결단력을 인정하게 되고, 완전한 백수건달 남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는 여기서 참고 다시 자위로 함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분명, 자위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자위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에 내재된 어떤 다른 대상을 그리워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혼자 목욕하다 말고, 새벽 거리를 뛰쳐나와 남자와 해묵은 격정을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자는 서럽게 흐느낀다. 대체 왜? 그것이 그녀가 원한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자위로 대충 자기 자신을 달래고 말지, 뭐 하러 서러운 그 짓을 했단 말인가? 아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냥 애초에 애정이라는 것, 섹스라는 것이 어차피 자위와 비슷한 서러운 것이니까, 그냥 혼자서 외로울 순 없는 것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섹스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오직 애정만이, 섹스만이 우리의 권태로운 삶을 구제하고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가? 사실 그러하기에 마지막 여자의 처절한 울음조차도 또 다시 반복되는 그 관계를 예견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애정이라는 것도 없으면 너무나도 권태로워 도저히 어떤 의미도 발견하기가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현대인은 이 애정이라는 굴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위의 굴욕감과 도발적인 관계 후 오는 해묵은 육체의 설움 사이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아이러니들이란 말인가?

 

 

  군대를 제대하고서 지난 방황의 흔적들을 다 지우지 못하고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던 적이 있었다. 마치 발갛게 달아오른 사람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새벽 그 어두웠던 골목길에서 누군가와 부딪쳐 흐드러진 정사라도 할 수 있다면... 늘 자위일 수 없는 이유를 묻고, 차라리 그곳에서 안위하기를 바랐지만,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나의 육체와 마음은 그렇게 그 거리에서 서성이다, 아침이면 제풀에 지쳐, 좁은 방안으로 기어들어가, 새우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천천히, 자위 일 수 없는 이유를 포기하고, 자위 밖에 안 되는 내 욕망의 한계에 대해 수치스러워하며, 그곳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그 때 섹스 말고는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신학생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몰래 담배를 태우러, 지나치던 학교 바로 옆 골목길에서... 나는 목련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파르르 떨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슬프다는 내 관념보다 앞서, '아'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오며, 양 볼에 까닭 모를 눈물이 떨구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신을 차리고서 너무나도 부끄러워,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선, 재빨리 그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당도한 것은 항상 담배를 태우던 놀이터 벤치였다. 그래서 거기서 마음을 추스르려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무는데... 다시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마치 해묵은 격정을 풀고서 서러웠다는 듯 한참을..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여자처럼... 그러하기에 다시 부끄러워진 나는 겨우 울음을 참고서, 나를 울린 목련 나무 한 그루를 다시금 몰래 올려다보았다. 벌써 봄날이 다 지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기라도 한 듯 목련나무에 잎새들은 다 떨어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잎새들만 여전히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시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다만 그 시린 가슴으로... 꽃잎이 다 떨어져 말라비틀어진 희망의 가지라도 다시 붙잡아야겠다고, 그런 것이 삶이라고.... 자위가 자위를 넘어선 어떤 그리움일 거라고, 그럴 것이라고... 나는 다시 자위일 수 없는 이유들을 되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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