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단과 유일이 절대권력으로 작용하던 시대, 구체제를 향한 의문과 전복을 위해 찾아든 회의주의, 그 중심에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가 있었다. 몽테뉴는 에세이(수상록)에서 '유일한 확실성은 불확실성뿐이다.'라고 말하며 회의론과 다양성에 무게를 싣는다. 판단에 있어 독단은 무지와 다르지 않으며, 아는 것이 적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고 했다. 여기, 감히 도전하지도 말았어야 할 것에 도전한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한 편(아직 진행중인데, 쏟아지는 평과 기사들처럼 정말 이렇게 예상불가능한 드라마도 처음!). 공교롭게도 초능력(그래, 뜬금없지만 초능력이다),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벌이는 대결을 주제로 하는 두 권의 책. 솔직담백히 말하자면, 세 편의 텍스트들은 어떻게 봐도 대충 잘 받아들이는 내가 보기에도 참 재미있다. 일단 한국판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종이는 문학성을, 영상은 장르성을 추구하는 기존 스토리텔링의 틀을 깨부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신을 이겨보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없었음에도 그렇게 되어버렸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보겠다고 시작한 실험이 인생을 뒤흔드는 광경. 신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한계를 너무나 잘 아는 자들이 만든 이야기.

 

니 말대로 향은 선물이 아니라 저주였고,

선악과는 애초에 먹지 말았어야 했고,

비밀은 비밀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고,

죽은 자를 살리는 건 감히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그걸 꼭 부딪치고 깨지고 내 눈으로 확인해야 깨달으니

난 얼마나 어리석은지. - <나인-아홉번의 시간여행, 8회>

 

1년만에, 실종된 형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포카라로 향한 선우는 늘 조금은 불안하고 떨렸던 형의 인생을 떠올리며,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형이 왜 아무도 모르게 히말라야를 오르려다 눈사태로 죽어갔는지 이해하고 싶다. 지상에 다시없을 낙원처럼 투명하고 청명한 공기, 푸른 산과 흰 구름은 사람이 죽어나가기에는 어딘가 불완전한 기시감과 위화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기자이자 앵커인 선우는 마침 히말라야 취재차 나가있는 후배 민영에게 키스하며 삼개월의 계약연애를 제안하고, 민영은 장난반 진담반으로 진행된 대화 속에서 오랫동안 동경해온 그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구걸해서 만나고, 혼나면서 데이트 할' 이들의 앞날에 어떤 가혹한 판타지가 숨겨져 있을지 꿈에도 모른 채. 포카라에서의 낮과 밤은 사랑을 시작한 연인에게 부족함이 없다.

 

형이 죽기 직전 피우려했던 향 한 개, 이십년전으로 이어주는 통로. 향 하나는 삼십분간의 시간여행을 허락하며, 조건은 미치오 카쿠가 말한 평행우주, 즉 이십년전과의 교집합, 평행이론. 선우는 우연히 주운 삐삐에 뜬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가 1992년의 저와 마주하면서, 그 세계로 뛰어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결혼한, 아버지의 병원이 통째 악마의 손아귀로 넘어가버린 날의 진실을 찾기 위해. 그는 간과한다. 이십년전의 진실이 변하면 현재의 진실 역시 변한다는 걸. 형이 죽음을 무릅쓰고 피우려했던 향,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하염없이 많아 전설 하나만을 믿고 나머지 향을 구하러 떠났다가 변사했다는 걸 선우가 알게됐을 즈음, 그에게도 이상징후가 찾아온다. 과거로 가서 진실을 보고, 그날 밤 있었던 사건을 막아 아버지를 살리는 일. 그는 가능할 거라고 믿는다.

 

진실은 역사가 되어버린 신념같은 거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도, 변해버린 후가 전보다는 훨씬 가혹하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완벽한 조작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은 누군가의 양심과 맞바꿔질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고나서 비로소 아버지가 반대하던 여자와 결혼한 형은 평생 불안과 우울에 시달린다. 게다가, 사랑을 잃어야 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혼자만 기억하는 병. 그는 원래 기억과 뒤바뀐 조작된 기억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두 개의 기억. 그중에 하나는 물리적으로는 소멸된, 불가능한 기억. 선우는 형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여자의 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을 전송받으면서, 이 판타지를 스스로 끝내야겠다는 결심에 이른다. 모든 것을 아는 유일한 친구의 걱정근심을 무마시키기 위한 말. 

 

"버리고 왔어. 1992년에. 원점으로 돌아온 거야. 한달 전 향 같은 건 모르던 때로. 판타지가 없던 시절로.

너는 죽어도 못 찾을껄. 지도 검색에도 안나오는 곳이니까." - <나인-아홉번의 시간여행>

 

매번 우주를 뒤흔드는 경험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작은 균열 하나가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그런 경험을, 어디로 튈지 모를 시간 한줌을 붙잡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구경한다. 사람은 늘 원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을 하거나 되기 위해 애쓴다. 생성과 소멸에 대한 고찰, 결국 뒤집을 수 없는 한계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에서 기억도, 유물도, 통증도 그대로인 삶이 과연 끝나기는 할 것인가. 질문이 많은 사람은 결코 평온해질 수 없다. 그는 주어지지 않거나 알 수 없는 것이 궁금해질때쯤, 손에 들어온 기회를 사용함으로서, 감히 단 한 번 신 행세를 하다가 된통 당한다.

 

 

 

 

 

 

 

 

 

 

 

 

 

'모든 정보는 추상적이다. 메타포가 들어있지 않은 정보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사실이라고 믿는 구체적이고 계량화된 정보 대부분은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은유적이고 불분명한 꿈의 기록만이 보존될 것이다' - <중화의 꽃, 1권>

 

대한민국 서울. 중국과 일본의 초능력자들이 창세기의 돌, 제네시스 록에 반응하는 '중화의 꽃'을 찾기 위해 몰래 잠입한다. 하늘, 바다, 육지를 관할하는 개별 국가기관 소속의 국정원, 군인, 경찰은 외계인에게 납치당했었다고 주장하는 이십대 여성들의 증언에 따라, 그들이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알몸으로 도포에 싸여 버려진 연유를 추적하는데, 실상 강간이나 폭행의 흔적은커녕, 아무 증거나 단서가 없는데다가, 여성들이 한목소리로 외계인을 봤다고 주장하면서 미궁으로 치닫는다. 소재가 초능력자라기에 판타지나 SF 액션에 나오는 유토피아/디스토피아 같은 영 낯선 세계를 떠올리고는 기겁했다. 착각이고 함정이었다. 초능력자들의 대결로 이 책을 홍보한 건 마케팅측의 오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초능력자를 소재로 한다는 얘기에 흥미진진한 소설 한 편을 근거도 없이 배제할 뻔한 나에 의하면. 초능력자는 겉으로 나, 초능력자요, 붙이고 다니지 않는다. 멀쩡하다. 숨겨져있다. 장르로 치면, 차라리 첩보에 가깝다. 모든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만을 잘한다. 훈련되었을 수도, 타고났을 수도 있다. <중화의 꽃>에는 과거나 미래를 보는 자, 도공으로 상대의 심장을 멎게 하는 자, 장소나 물건에 대한 사이코메트리들이 나온다. 이중에 제일은 미래를 보는 자, 중화의 꽃이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단서는 충분한 그녀를 두고 벌이는 아시아 3국의 대결이다.

 

<궁극의 아이>에도 중화의 꽃처럼 미래를 보는 남자가 나온다. 생식력이 현저히 떨어져 대부분 스무살 이전에 죽는다는 궁극의 아이. 최초는 아니나 마지막도 아닐 궁극의 아이 중 하나인 신가야는 한국출신으로 범죄기록이 있음에도 불구, 인류의 미래 보고서라고 불리는 카이헨동연구소로 발탁된다. 범죄경력에도 타당하게 획득한 영주권에 대한 의문에 맞서듯, 그의 존재는 유일하게 사랑한 엘리스에게 역시 비밀과 환영으로 남아있다. 지금, 어떻게, 왜, 연결되었는지 모르는 세계의 다섯 거물들, 나다니엘 밀스타인, 안톤 쉬프, 조지프 체임벌린, 조나단 킨데마이어, 오귀스트 벨몽에게 차례로 한 통의 편지가 도달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거대한 테러, 죽음을 알리는 편지, 까마득한 기억들. 십년 전에 죽은 자로부터 어떻게 복수가 자행될 수 있을까. 형사 사이먼은 추적에 나선다.

 

"십년 전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 <궁극의 아이>

 

악마개구리문양, 바다에 사는 뿔 달린 개구리로 불리는 어떤 모임. 그들은 손아귀 아래 세계를 장악한 신 같은 존재가 되어있다. 한 나라의 운명이 그들 손끝에 달려, 되살아날 수도, 의미없이 죽을 수도 있었다. 정보가 곧 힘이었다. 그들은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한층 더 강력한 부와 권력을 움켜쥐길 바랐으며, 세계를 휘둘렀다.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고싶은 걸 위해서라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도 남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공리주의는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신가야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한사람이었다. 가야처럼 '궁극의 아이'로 판명난 아이들이 카이헨동연구소로 잡혀와 기억을 세뇌당하고 자유를 빼앗긴 채로, 온갖 실험과 업(카르마) 속에서 미래를 예견하다 죽어갔다. 모든 사실을 밝힐 사람은 사이먼 뿐이고, 사이먼은 아내 모니카의 죽음과도 연관있을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신가야가 사랑했다는 여자, 뚱뚱해서 제발로는 밖으로 나와 걸어다닐 수도, 앉았다 일어날 수도 없는 엘리스와 딸 미셸을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질문한다.

 

엘리스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일곱살 이후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엘리스는 제 눈앞에서 연기처럼 죽어간 가야와의 추억 대신 미셸을 안았다.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 많은 것을 약속했지만 단 5일만이 허락되었던, 그들의 슬픈 마지막. 의문투성이 이별은 가야를 잃은 십년간 그녀를 허무와 체념에 뒤섞여 살게 했다. 사이먼은 신가야의 물음에 따라 엘리스로부터 사랑한 남자에 관한 모든 기억을 요구한다. 숨막힐 만큼 아름답고 애처로운 닷새의 기억 속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살인사건을 해결할 단서가 포착된다.

 

"당신은 머릿속이 온통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그건 평생 과거라는 철창 속에 갇혀사는 거라고요." - <궁극의 아이>

 

눈치챘겠지만 모든 이야기의 핵심 그리고 권력은 미래를 보는 눈에 있다. 미래는 예측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 그들의 능력은 좋게 사용될수도 그 반대일수도 있지만, 궁극의 아이들은 늘 거의 언제나 이용당하다 가치가 다해지면 버려졌다. 미래를 말하기 위해 온갖 약물주사와 뇌실험으로 너덜너덜해진 삶을 붙잡고 가야는 엘리스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엘리스와 미셸의 미래를 보았다. 서로를 다주어도 아깝지 않은 오백년같은 오일의 사랑이, 십년 후 여자와 딸을 살리는데 이용된다. 엘리스의 기억 곳곳에 남겨진 가야의 단서가 사이먼에게로, 사이먼이 잃어버린 모니카에게로. 주가를 예측하고, 전쟁을 예측하고, 이득과 손실을 예측하고, 방향을 예측하면 누군가의 손아귀에는 세상을 주무를 강력한 힘이 생긴다. <궁극의 아이>가 개인적인 사랑으로, <중화의 꽃>이 동북아 세계정세의 삼키고 뱉는 숨가쁜 역사현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다를 뿐, 두 소설은 같은 얘기를 하고있다.

 

누가 들어줄리도 없지만, 새삼 뒷짐지고 몽테뉴처럼 모럴리스트 노릇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연스럽지 못한 욕망은 결국 파멸을 향해 달려가기밖에 더할까. 슬픔과 아름다움이 마치 처음 본 풍경처럼 공존하는 눈부신 이야기들 앞에 주춤할 필요는 없다. 소설이 소설로 기능하며 역할을 다할 때, 세상은 아무런 흔들림 없을 것이다. 문제는 소설 속 모습이 미래, 초능력, 시간여행 같은 흔적만 살며시 지우면, 놀랄 만큼 현재와 닮았다는 게, 소설과 문학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예견한 이슬람 세력과 중국의 부상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얼마전에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가 분명 다르며,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책을 읽었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가 다른 걸 알지만 이제 세계의 의식속에서 '주의(-ism)'와 '교리'는 거의 한목소리처럼 들려온다. 아랍권, 중동국 출신들의 반인류적인 테러, 반서양주의를 반자본주의로 해석하는 것,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을 경제적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면서 나타난 세력의 갈등과 내분에서 전쟁까지.

 

요즘 나는 북한이 제일 무섭지만 나아가 북한만 적으로 여기는 대한민국 사람들도 무섭고, 한편 중국의 거대한 힘이 두렵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독특한 체제도, 법(외국인에게 참정권을 허하면!) 하나만 갈아치우면 가능한 중국의 세계권력 지배구도 장악(을 뜻하는 엄청난 수의 인구)도, 아무거나 다 먹는 식습관도, 무력에는 무력으로 맞서는 거라며 위협에 위협으로 무장하는 일본도. 내가 아는 과거 어느 시점도 동북아가 평화로운 적 없지만, 잘 살아있어야겠다. 죽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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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4 1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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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4 2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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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5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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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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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4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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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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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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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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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5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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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5: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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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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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2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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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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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6: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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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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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2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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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7 2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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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4-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들과 드라마를 후루루룩 연결하는 솜씨에 감탄을 표합니다. 신과 시간여행으로 시작해서, 잘 살아있어야겠다,로 끝나는군요. 신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관점에서는 신도 결국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고, 시간여행도 결국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겠죠. 그 드라마를 저는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쩐다면서요?)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결국 이 현재에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어제 간만에 <오블리비언>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내가 네 신이다! 그리고 그 신은 어떻게 되었냐면...뭐 아무튼 나 초능력이든, 시간여행이든 이런 거 되게 좋아해요. 요즘에 <임사체험>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엄청 재밌어요(그래서 요즘 제 리뷰에는 심심하면 임사체험이라는 말이 등장. 또 써먹을 예정).

아이리시스 2013-04-27 23:15   좋아요 0 | URL
우아, 맥거핀님 되게 반가워! 뭔가 계속 징징대다가 맥거핀님 안계시니까 징징댈 언덕이 없어진것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어디갔었어! 저도저도저도 초능력이든, 시간여행이든 완전 좋아죽겠어요. 제가 읽은책이 아무리 없어도 이것만읽진 않았는데, 전에 한번썼는데 또 굳이 쓴걸보니 제가 이걸 되게 좋아한다는걸 알겠어요. 그리고 지금 보니까 나인, 보다 궁극의 아이, 궁극의 아이보다 중화의 꽃, 이렇게 보는족족 차례대로 더 재밌어서 신났어요. 결국 현재에 잘 살기 위해서. 그말이 맞네요. 정답이다..

<오블리비언> 톰 아저씨 나오는거죠? 전에 찜했는데 재밌어보였는데 개봉했나보네요. 내가 네 신이다! 으흥!! <임사체험>까지는 아직 진도를 못나갔; 는데 지금 그 임사체험, 이 검색하면 나오는 그 두권짜리 일본작가이름 책인가요?(검색해봤음!) 재밌겠어요. 뭔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이러면 그냥그런데, 저는 예전에 <아랑사또전>도 재밌게봤고, 환생에도 관심있고, 뭔가 거시적인게 좋아요. 감히 인간이 도전못할 신의 세계, 신의 영역 그런게 진짜 있는지 의문이긴 해도 재밌어요. <나인>의 이진욱은 짱이죠!!

임사체험, 얼른 읽고 또 써먹어요. 꼭이요!! 약속도 지켜요!!! (제가 안지킨다고 똑같이 하지말고요!!) =3=3=3

좋은 주말, 좋은 밤!!

ICE-9 2013-04-2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랬어요^ ^ 제가 보는 드라마, 제가 보는 책(중화의 꽃)을 같이 보고 읽고 계셔서...
'나인'은 예전에 보았던 영화 '도니 다코'나 '나비 효과'가 참 많이 생각나더군요. 그러고보면 최근에 나온 '루퍼'도 그런 영화중 하나네요. 흥미로운 것은 시간을 적극적으로 바꾸려 드는 이 세 영화의 결론이 모두 똑같다는거죠. 그렇게 어쩌면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일 수 밖에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나인'의 결말 역시도 어느정도 예상되기는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런 주제에 대해서 이미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정확히 예견했네요. 그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죠. 물론 신이 얼마든지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었지만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세계가 가장 적합했기에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그렇게 그는 지금 현재를 언제나 모든 가능한 것 중의 최상의 상태로 보았었죠. '나인'이든 그 세 영화든 결국은 라이프니츠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축복처럼 주어진 향이 저주가 된다는 이야기 역시 샘 레이미가 즐겨 다룬 주제였죠. 대표적인 게 예언하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기프트'였고 사실 바로 그 후에 나온 영화 '스파이더 맨'은 기프트의 주제를 보다 확장한 영화였고 기프트 이전에 그를 재기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작품인 '심플 플랜' 역시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였죠. 아마도 자신의 영화 인생 역정이 정확히 축복이 저주가 되었었기에 더욱 그 주제에 대해 민감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제가 이거 너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네요. 같은 걸 보고 읽고 하는게 반가워서 그만 수다를 떨게 되었습니다^ ^ 중화의 꽃에 대해 쓰시면 또 와서 떠들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잔뜩 늘어놓아도 내치지 말아주시기를 빕니다. 하하^ ^


아이리시스 2013-04-28 15:31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이라면 항상 좋죠. 요즘 대화를 나누고싶은가봐요. 양방소통의 긴글이 좋아졌어요. 보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저는 괜찮아요. 같은 주제로 자꾸 만들어지는 이야기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 지금 특수사건전담반 텐, 보는중인데, 방금도 '중화의 꽃'을 읽었더니 별로 재미가없네요. 가질수없는 현실이니까 이야기가 되면 관심이 가져질수밖에 없는것 같은데, 샘 레이미 말씀하시니까 말인데, 왔다갔다하는선에서 이제는 더 새롭고 신선한 얘기를 고민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가족 아니면 사랑을 구하기위해서인데, 현실에서 그것들이 풍족하게 가능하다면 그런일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심플플랜,은 못본 영화라서 찜해둡니다^^

헤르메스님도 뭔가 인생에서 바꾸고싶은 일이 있나요? :)

달사르 2013-04-2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댓글은 다른 사람도 좋네요. ^^
댓글이 길어지면 왠지 '정'도 더 담뿍 담기는 듯? ㅎ


저도 최근에 비슷한 류의 만화를 봤어요. 힛. 은근 만화가 쉽고 좋다니까요. 제가 본 내용은 주인공이 어떤 보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이었어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지금처럼 계속 여행을 다니며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담긴 소원을 말했는데 그 소원이 그만 이루어진 거에요. 10년이 지나도 주욱.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동료들은 점점 늙어가는데 혼자만 그대로. 게다가 다음 소원으로 만든 동생 역시 자라지 않고. 경악을 한 주인공은 동생을 자라게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보석을 찾으러 나섰죠. 그 와중에 동생이 다쳐 죽게 생겼는데 그순간 눈앞에 나타난 보석. 주인공은 딴 맘을 먹죠. 그 보석으로 동생을 살리지 않고 "우리 일가만 보석을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결국 동생은 죽고..ㅠ.ㅠ 주인공은 보석을 다시 찾아 죽은 동생을 살리는데. 동생을 죽기 직전에 살리는 것과, 이미 죽은 동생을 새로 살리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지 주인공이 자꾸 동생을 낯설어 합니다. 과거와 겹치는 사건이 일어나면 자꾸 첫번째 동생이 떠오르는 거죠. 그러다보니 동생이 동생 같겠어요? 이 와중에 동생은 동생 나름대로 소원을 빌러 보석을 찾으러나서고.

암튼, 이런 내용인데요.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위 소설들은 더 재미있어 보입니다!!!!
'중화의 꽃'이 눈에 더 들어옵니닷! >.<
과잉기억증후군의 엘리스는 ㅠ.ㅠ 너무 불쌍하네요. 소설을 위한 장치로는 아주 잘된 설정같은데 그런 걸 떠나 심적으로 너무 불쌍해요..돌아서면 까먹는 제가 차라리 낫네요. 기억력이 자꾸 떨어져 툴툴거리는데 그러지 말아야겠어요. ^^

아이리시스 2013-04-29 00:53   좋아요 0 | URL
그 만화 제목뭔가요? 어쩐지 재밌을것 같아요. 동생을 살리는거랑 <나인>의 주인공이 아버지를 살리러가는거나. 근데 살려놔봐야 두시간후에 또 죽더라고요. 저 드라마에서는요. 사람은 언제 죽을지, 언제 무슨일을 당하게될지 전혀 모르면서 사는게 곧 행운이라고 봐야할것같아요. '중화의 꽃'에서 항공관제사가 비행기충돌을 막고, 경마의 1등을 예견하고, 사람과 말이 죽어나갈때, 미래를 본다는게 얼마나 두려운일인지 알것같았어요. 모르니까 살지, 알고는 갈수없을길이 많을듯해서.

과잉기억증후군의 엘리스가, 결국 그 기억으로 딸을 구하는걸 보면 설정은 멋지고요, 심적으로는 힘들것 같아요. 저는 초단감정소유자라, 어제 싸우고 오늘되면 풉니다. 앙금같은게별로 없는것 같아요. 하루지나면 왜싸웠는지 모르겠어요. 기억도 안나고 남아있지도 않고. 나쁜걸 오랫동안 되새기지않는 버릇이나 습관은 삶에 좋은기능으로 작용하는것 같아요. 기억은 붙잡고 살되, 툴툴거리지는 말아요, 달사르님! ^^

2013-04-29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9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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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소리없이 뭉텅 잘려나간다. 흔적, 그림자, 말이나 문장 대신 남겨진 단 하나의 희미하지만 분명한 형체. 과거는 기억의 울부짖음이 만들어내는 칵테일이다. 수많은 맛과 빛깔로 이루어진 날것들이 내는 목소리는 새롭다. 부딪고 겹치고 구르며 재배열되는 지난 날. 과거로 대변되는 상처, 후회, 회한에 포개지는 단상은, 당사자가 대상을 얼만큼의 밀도로 어떻게 회상하는지와 상관없이 비교적 비슷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다. 서로 다른 시간을 껴안지만 현재라는 좌표에서 덧없기는 매한가지다. 오늘을 사는 동시에 어제를 살고,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을 살지만 다가올 시간을 붙잡지 못하듯 지나간 시간을 멈출 수 없으며, 고행의 산행 혹은 안나푸르나의 봉우리에서 내려꽂힌 이의 마지막 눈동자처럼 희미하고 착잡하게 멍울지어질 뿐이다. 그래서 잊혀진 변두리 동네 카페는 차라리 죽은 자들, 잃어버린 자들의 안식처다. 과거의 상흔은 가족오락관의 스피드퀴즈처럼 빠르게 패스된다. 카페는 본성적으로 태만을 안고 있다. 거기서는 갈기갈기 찢겨 굴절되고 오목해진 일상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얼만큼 중요하든 상관없이 달겨든다. 찌질한 질투를 깊고 짠한 사랑으로 둔갑시키고 흔한 불륜을 달콤한 로맨스로 치장하는데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시간이다. 포근하고 달짝지근한 공기가 감도는 곳에서 독한 환멸 역시 농도가 약간은 더 옅어지지 않을까. 문하에게 산타 페의 카페는 <nowhere>이자 <everywhere>이다.

 

 사랑은 세상에 없다고 겸허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누천년에 걸쳐 퍼마시고 퍼마셔도 고갈하지 않은, 그 어마어마한 추상명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길이다. (p.192)

 

문하는 우연히 발견한 쓸쓸한 카페 주인 산타 페를 형이라 부른다. 말을 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산타 페는 인하 형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형이 가르쳐준 많은 것이 세상에 없는 형이 나(문하)의 하늘이자 땅이고, 지구이자 우주였음을 상기시킨다. 형은 곧 기다림이자 인내, 그리움이다. 기다림, 인내, 그리움은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대신 주어의 생략을 용인한다. 문하가 한 일은 차라리 고행이고 인내일 것이다. 동네 돌+아이로 취급받는 물귀신을 만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너는 세상이라는 틀에 갇혔고, 갇혀있는 세상 안에서만 자유로우라는 뜻에서 '갇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를 애증하며 사는 수인을 도서관에서 만나면서, 형을 본다. 정확히는 그 시절 형이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무 늦었지만 더이상은 늦지 않도록. 책과 카페는 여유와 생이 혼합되고 압축된 노랫말이다. 하나는 반드시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한다. 그는 카페에서 비로소 객관적 방관자 입장으로 들어가면서 잃어버렸거나 지나온 시간을 회상한다. 회상은 이중으로 겹쳐지고 부서지며 인물, 사건, 시간의 경계를 지운다. 지금 문하 곁에는 형과 아버지, 산타 페와 물귀신 모두 부재상태다. 형과 아버지 그리고 물귀신은 산타 페와 달리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한다. 아버지를 애증하는 배다른 형을 추억하며 가지는 죄의식, 형과 어머니가 서로를 향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불편한 적대감, 부와 재물을 향해 질주하던 아버지의 죽음 같은 추상명사와 씨름하며 이미 일어난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건 쉽사리 망가진다.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라든가 신부처럼.

 하지만 슬픔은 영원히 아름답다. 왜냐하면, 우리는 슬픔을 아름다움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p.194)

 

추상명사는 탕진되지 않는다. 형과 아버지, 산타 페와 물귀신, 하연과 수인 역시 사랑과 죽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므로 병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들을 돌이키는 데는 시간과 인내만 있으면 된다. 그(녀)와 이야기하면 가슴에 숨구멍이 솟아난다. 수줍음 위로 시간이라는 덫이 거듭 쌓인다. 누구와 무엇을 나누는 일이 매번 기적인 걸 몰랐을 때는 어떻게 견뎠을까. 약속, 기억, 목소리, 장소, 사람, 축제를 포함한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에 그 아니면 그녀가 있었다. 지금 기다리며 슬퍼하며 읊고 끄적이고 기뻐하며 아파하며 한껏 다가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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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3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3-04-14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은 작품 만나고 나니 다 읽기도 전에 자꾸 리뷰를 들여다보게 되네요. 리뷰 보다 책 읽다 또 리뷰 보다 책 읽다..이렇게 책 읽는 것도 색다른 재미같아요. 이제 곧 퇴근인데 집에 가서는 맘껏! 읽어야겠어요. 아이리시스님과 겹치는 책이 한 권 더 늘었어요. 히힛. ^^

아이리시스님 리뷰는 진작에 봤는데
아리시스시님 리뷰는 리뷰가 아니라 한 편의 작품 같애요.


아이리시스 2013-04-18 18:08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이젠 이응준은 다 읽으셨겠어요, 제가 너무 늦어서 막막하고 은은한 감동마저 날아가버렸을지도.. 스물일곱에 썼댔잖아요. 글쓰는 이들은 이유도 없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스물일곱에 이런 생각들을 표출하려했다는 것이, 소설의 내용 자체보다는 어쨌든 대단해요. 뭔가 에피소드가 더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저도 달사르님에게 여쭤볼 것들이 있는데, 적절한 때를 찾아보겠어요..^^

아....기분좋은 칭찬이에요(울렁울렁)^^
 
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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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집중했고 결핍을 보았다. 구원에의 갈구를 들었지만 모른 척한다. 나는 구원을 모른다. 외로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울어보았다. 살아내는 방법을 듣기 위해 처내미는 귀는 불순했다. 가까스로 떠올려진 기억. 고독했을 때가 까마득했다. 지나친 낙관과 애처로울 정도의 당당함은 가난에서 나오고, 그외의 것들은 없었다. 내팽개쳐진 장기들처럼 지도와 지표가 부유하고, 약도 있고 희망도 있는 나는 더없이 완벽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불우한 가정환경, 아버지의 오랜 부재, 어머니의 재가, 잃어버린 고향'으로 대변되는, 머리 위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우중충한 껍데기의 의기양양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수동성 외에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다만 휘청거렸다. 가질 수 없는 변명은 굴욕이었다. 더이상 울지 않는 그와 결코 수렴되지 않는 내가 만나 생의 이면을 볼 줄도 알게 되면 그때 말하겠지, 아무 곳에도 없고 무엇으로도 구할 수 없는, 구원 아니면 희망. 그가 찾는 모든 것.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울타리가 새삼 옥죄일 리 없고 별안간 해방을 선사할 리도 만무하므로 그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무극사는 유일한 설정임에도 비성공적이다. 그는 초라한 몸뚱아리 하나를 바치고 비로소 신화가 된다. 뒤란의 주홍색 감나무. 헛헛함이 발작적으로 배어나오는 방. 회색빛으로 감금된 잔혹한 사내. 큰아버지의 서랍에서 꺼내준 손톱깎이. 비밀은 모두 핏빛이다. 가문의 기둥이자 닫힌 벽의 상징 큰아버지, 압축적 삶의 본보기 뒷방 남자, 바람나기 위해 아들 버린 어머니, 세속의 대변인 전도사, 마지막으로 그의 유일한 그녀는 숨통을 끊지 못해 바라보는 펄떡이는 심장이다. 신에게로 가는 계단을 불사르기 전에는 감히 벗어나지 못하는. 육욕과 소유욕, 애증과 환멸이 도사리는 도시의 유일한 방랑자. 희뿌연 세상을 헤엄치는 내장 터진 한마리 물고기. 불가능을 역설하면 결국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아무도 시도의 목숨줄을 끊지 못한다. 가까스로 부여잡은 숨통을 틀어쥐고 피떡 같은 생의 곳곳을 방황한다. 계절은 하나의 형태로만 저물고 뜬다. 곪아터진 상처에서 썩은내가 진동한다. 드디어 살아있음이다.

 

어두운 지하방, 그의 폐허는 병적이다. 차단된 공기는 잃어버린 추억을 헤집고, 청각과 미각을 지배한다. 그는 가장 외롭고 고독한 방식으로 신을 향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은 순간에도 결코 존재이기를 그만둔 적은 없다. 집, 방, 과거를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던 앙드레 지드의 말을 가슴에 안고, 참고 참으며 울음의 강을 건너 기어나온 땅. 세상과 신은 그곳에 비로소 존재할 것이다. 불가능인 줄 알면서, 주어진 시간이 모종의 음모같을 때, 이승우의 소설은 놓인다. 살기 위해 죽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기쁨과 환희가 그러하듯 구원조차도 고통을 담보한다는 걸 아는 이에게만 세상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시건방으로 점철되어진 상처를 뽐내며 퀴퀴한 지하방으로 숨어들 때 그는 존재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 뿌리를 탐하는, 여자를 창녀 취급한 그의 행동은 이보다 더 쓰릴 수 없는 신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래도 괜찮아? 이래도 살래? 아니면 죽을래? 삶과 죽음은 한끗이다. 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죽는다. 습득된 모든 존재의 이유,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음을. 아프게 버틴다. 앞뒤, 위아래, 내면과 외면이 금지된 숨바꼭질을 시작하는, 꽃가루가 부유하는 봄밤이다. 감히, 당신의 현실과 신화는 몇 대 몇이냐고 묻는다. 내가 선택한 권리다.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이 여행은 모험이 뒤따른다. 잘못하다가는 사실의 영역으로 발이 빠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신화를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무극사를 '신화적'으로 가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행선지로 무극사를 '막연하게' 상정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예컨대 그에게 무극사는 '막연한' 어떤 곳인 것이다. 이럴 때, 그가 무극사를 향해 간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무극사는 고향과 대극의 자리에 있다.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것은 곧 무극사(신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p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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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3-2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승우 책 읽으시네요. 저도 이 책으로 이승우 시작했는데요. 눈은 계속 읽히는데 점점 답답해져오는 그 무엇. 아이리시스 님 리뷰 보니 새삼 그때의 그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네요. 아고..저, 손톱깍이..ㅜ.ㅜ 답답함에도 계속 눈으로 읽던 그 순간. 오랜간 가슴에 담겨지던 그 여운. 도대체가 알쏭달쏭한 느낌이었는데 말이죠.
어맛..개정판이 새로 나왔네요? 13년 1월이네요? 와우~ 대박!

아이리시스 님, 이승우 다른 책도 읽어보신 거 있으세요?

아이리시스 2013-03-25 17:00   좋아요 0 | URL
우와, 달사르님!! 와락. 우리 그 시리아 이후 처음 맞죠? 이승우 작가는 아버지뻘인데 데뷔할 때 저는 이 세상에 없었고 어차피 모든 작품을 한참 지나 읽는거여서 연대기는 무시했어요. 일단은 초기작이랑 최근작 읽는 게 목표였는데 이거 외에는 에리직톤의 초상, 지상의 노래, 사랑이 전설이요. 일단 장편부터 보려고요. 한낮의 시선인가 그거 남았죠? 식물들의 사생활도. :)

이 책은 개정판 나왔어요. 따끈따끈하게 받았는데 외양은 변하지 않았네요. 저는 에리직톤의 초상 좋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로마 아니, 바티칸이 나와서 그런걸지도.. 신은 역시 바티칸에서..( '')

달사르님이 읽어보신 건 뭐뭐있어요? 소설집은 뭐가 좋아요?

달사르 2013-03-27 18:52   좋아요 0 | URL
넹. 맞아요. 시리아 이후. 전 그 뒤로도 여전히 지도를 좋아한답니닷. 힛.
이승우 작가가 저는 삼촌 뻘. ㅋ
우와. 벌써 여러 권 읽으셨네요? 계속 읽다보면 겹치는 책도 생기겠어요.

저는 이승우 책을 최대한 많이 질러놨어요. 일단 쟁여놓고 시작할려구요. 근데 다 넘넘 좋아요. 아이리시스님 읽으시는 거 봐가며 같이 읽어도 되겠어요. 아이리시스님은 바티칸 좋아하시는군요! 음..알았어염. 체크! ㅎㅎ (저는 중간중간 읽어서요. 죄다 새로 시작해야 되요. ^^ )

아이리시스 2013-03-27 20:25   좋아요 0 | URL
네~~~ 다 쟁여놓고 인증샷. 읽기 시작할 때 인증샷. 읽고나서 리뷰랑 페이퍼. 이렇게 삼종세트 부탁해요. 바티칸의 신비주의와 종교의 오묘함이 좋아요. 무슨 말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화이팅!

제가 찾아보니까 작가님이 우리 아부지보다 한 살 동생이세요! 아버지 아니었어요, 삼촌이었어!ㅋㅋㅋ

달사르 2013-04-14 19: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이거 읽고 얼마나 웃었든지요. ^^

이런 건 제가 또 잘 따라하지요. 쟁여놓고 인증샷. 읽기 시작할 때 인증샷. 읽고나서 리뷰랑 페이퍼. ㅎㅎㅎㅎ
일단 책부터 다 찾구요. 여지껏 찾았는데 이제 절반 찾은 거 있지요. 도대체 책들이 어디로 숨었는지..ㅠ.ㅠ

아이리시스 2013-04-18 18:14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몇 번 갈아엎고부터는 분명히 있다는 건 알겠는데 찾지는 못하겠어요. 그러면 그 책은 찾다지쳐서, 읽고싶어도 못 읽고 마는데, 그렇게 자꾸 쌓이면 신간은 구간이 되고, 구간은 더 구간이 되어가면서, 도서정가제도 아닌데, 신간을 사서 구간만든 걸 후회하게 되겠죠. 이런 수지안맞는 재테크가 있나요. 으흥!

이승우 삼촌 짱 멋져요!~~~~~~~~~~~~~(댓글의 끝이 이렇습니다)

맥거핀 2013-03-25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식한 질문 하나 해도 되요? 무극사가 뭔가요, 절이름? 극락이 없다? 그가 현실을 떠나서 제대로 신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솔직하게 말하면요. 사실 이승우 작가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요. 장편도 그렇고, 단편집도 그렇고..아마도 무슨 수상집 안에 들어있는 건 한 두편은 읽었겠지만요. (수상집은 대체로 보니까요.) 요즘 나름 핫한 작간데, 어떤 책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저는 이상하게 아이리시스님 서재에만 오면 폭풍 질문을..

아이리시스 2013-03-25 19:16   좋아요 0 | URL
여기서는 실제 존재하는 절이름인데 상징적 의미가 있어요. 해석이 각자의 몫이고, 이런 해석이 한국소설에는 많죠. 부모의 역할, 가부장제, 가족의 부재 아니면 사랑에 모든 탓을 하기 때문에. 맥거핀님하고 저하고 이것만 닮았죠. 하나만 물어볼게 해놓고 폭풍질문 하는 거ㅋㅋ 그나마 대답가능한 선에서 물어줘서 고맙습니다(__) 이 책도 그렇고 '지상의 노래'도 무난해요.

참, 홍수현이 나오는 <외등> 봤어요. 좋았어요. 당연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했던 부분이 안나왔고 처음부터 눈이 멀어있는 거든가 그런 건 책이랑 달랐어요. 이 댓글에 어째서 감상문을 쓰고 있는 걸까요.

Shining 2013-03-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리직톤의 초상, 개정판 내지는 복간 나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작가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기다리고 있습니다_-* 저는 이 책도 좋고 지상의 노래도 왕 좋지만, 단편이 더 좋아요. 미궁에 들어선 테세우스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는(뭔 말이야ㅋㅋ) 문장이 좋아요. 문장 뒤켠에서 아른거리는 어떤 근원적인 죄책감도요. 좋아요 좋아요. 이승우 작가도 아이님도요(흐뭇).

아이리시스 2013-03-27 20:21   좋아요 0 | URL
그래요, 짱이야, 왜 저한테는 직접 말씀안하신 거임?-_+ 예전책들 말예요, 좀 제대로 복간해서 개정판 낼 필요가 있어요. 제가 박범신 작가님한테 꽂힐려고 할 때 읽고싶은 책들은 서점에 팔지 않았어요. 난 그분의 이삼십대 시절 쓴 소설이 궁금했는데. 도서관에는 가볼 생각을 못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어서 흥!

응, 장편 다음에 단편도 읽어볼 거예요. 한 권 읽었는데 제목 뭐더라, 이래서 단편이 문제예요. 읽는동안 휘발되거든요. 저는 소설 쓰기 직전에만 단편을 읽어요. 그러니까 최근 오년간 소설쓴 적이 없음. 쓰면 뭐해요. 지금은 박범신 작가님 옛날소설, 심지어 팔지도 않아@.@ 읽고있으니 그 사이에 Shining님이 소설집 순위 좀 매겨줘봐요. 아, <칼>은 몇 번째로 좋아요? 저는 수상집을 싫어해요. 사고싶지 않지만 사주겠어요ㅋㅋㅋ

작가님 옆에 제가 있어요. 너무 좋아요.

Shining 2013-03-28 11:56   좋아요 0 | URL
책 모양새도 그렇고 폰트며 행간이며..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도서관에 있어도 빌리기 싫을 때가 있다니까요_- 흐흐흐

그럼, 오 년 동안 단편 읽은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순위를 매길 순 없어요....(밀란 쿤데라는 매겨놓고ㅋㅋ) <칼>이 제일 좋아요, <오래된 일기>(그러니까 표제작 오래된 일기)하고요.

그럼요 그럼요. 저는 이승우 작가님과 아이님을 사, 사랑하니까요(어머).

아이리시스 2013-04-13 14:54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사랑고백 받고 나 좀 어디갔다오느라..푸핫 십일동안 뭘 좀 하느라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안쓰려고 했던 거 아닙니다(말투 왜 이럼?). 그 책 새로나오면 사야겠네요. 생각해보니까 그 책 좋았어요. 그런 남자가 연애하자면 피곤하겠지만.. 저는 귀찮은거 딱 질색. 귀찮게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그런 사람 금방 알아봐요. 뭐 살면서 그런 사람 없었지만요. 사실 만나기 힘든 남자들 아닌가요? 이해라고 하지만 노력외에 해줄 게 없잖아요. 나는 너를 이해하고있다.. 아..피곤해.. 퇴폐적인 성향의 사람들 앞에 나는 늘 주눅이 들어요. 밀란 쿤데라 매겼지, 참.

나 단편 읽은 적 있어요. 이승우도, 임철우도 또..읽었을 걸요..(무확신..)

transient-guest 2013-04-09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님은 이동진 기자의 문학적 숭배의 대상이라고 해요. 빨간책방에도 나온적이 있구요. 아마도 이동진 기자가 전작을 한 유일한 작가인것으로 압니다. 저도 이 책은 관심이 많이 가요. 요즘 한국책 구매를 자제하고 있어서 보관만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자주 주문하면 책값보다도 배송비용이 확 올라가는게 신경이 좀 쓰입니다.ㅎㅎ

아이리시스 2013-04-13 15: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트란님. 저도 최근 한 달 빼고는 꼬박꼬박 빨간책방 들었는데(나올때마다 꼬박아니고 내킬때마다 꼬박) 이승우작가님 나온 거 들었어요. 도란도란 나눴던 이야기나 분위기는 기억에 없지만.. 다 기억하기에 뇌용량이 너무 벅찹니다..풉. 저로서는, 진심으로, 트란님과 댈러웨이님이 어떻게 책값+배송비까지 신경을 안쓰고 충당하실지 신기할 뿐입니다..저라면 책을 안읽겠습니다.............( '') 이건 아니겠죠..

저는 알라딘에서 전자책 한두권 빼고는 안산지가..어언..1월3일에 주문했네요. 미스터리의 계보, 사고, 체벤구르, 야만스러운 탐정들 1,2 ... 저 뭐하는 거죠? ㅋㄷㅋㄷㅋㄷ
 

 

 

 

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는 계속된 궁정생활로 창작력과 상상력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1786년 9월에서 1788년 6월까지 20개월간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이탈리아 기행>은 여행 중 독일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일기, 메모와 보고를 손질하여 1829년에 엮은 책이다. 스물 일곱의 청년이 바이마르 고문관으로 10년을 일했으니 문인의 피가 흐르는 그에게 몰래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는 것 정도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베로나와 비첸차의 고대 건축에 매료되고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로마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경유해 다시 로마에 머물며 자유로운 방랑자 생활을 한껏 즐긴다. 철저히 익명의 여행자로 머물며 체험을 극대화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사상을 가다듬던 그가 바이마르로 돌아와 실러와 손잡고 고전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일생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1774년, <파우스트>가 1831년에 출간된 걸로만 봐도 이탈리아 여행에서 시작된 고전주의의 열망과 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스물 여섯의 청년과 여든 넷의 괴테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이 존재하지만 그가 남긴 두 작품은 동일한 명성으로 여전히 감동적으로 읽힌다. 죽음 직전에 <파우스트> 2부를 탈고했으며, 이는 스물 세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생애의 대작이었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이탈리아행이 훗날 그의 창작력과 감수성에 큰 영향을 줬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부터 베네치아의 곤돌라와 로마의 전경, 아버지의 여행지도 등을 접했던 그에게 어째서 이탈리아였냐고 묻는 것은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김은숙 작가가 쓴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그녀가 그에게 묻는다. 여기서 그녀는 전도연이고 그는 김주혁이다. 처음 프라하를 방문하면서 프라하 노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에게, 도착하기 전부터 프라하에서만 구할 수 있는 티셔츠를 입은 그에게, 여기 오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지금 입은 티셔츠 만큼이나 프라하의 많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냐고. 그는 유학 보낸 애인의 변심에, 제대로 끝내기 위해 프라하로 향한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메일로 받은 사진 속 거리와 풍경과 티셔츠는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것이다. 비로소 사랑이 끝났을 때, 그것들은 같은 온도로 느닷없어졌다. 편지를 찢고 티셔츠를 버리는 대신, 그는 프라하로 간다. 납득하지 못한 채 끝내는 작별은 그에게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므로, 유일한 주소를 들고, 여자가 보내준 티셔츠를 입고, 처음 보는 거리를 떠돈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사랑했지만 그들의 이탈리아가 모두 달랐던 것처럼,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가 그런 것처럼, 내가 아는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로, 프라하 역시 이 가여운 남녀에게 서로 다른 과거와 미래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추억을 동봉하고 봉인한다. 그의 대책없는 프라하행이 다시 새로운 사랑으로 안내한다. 그들의 만남이 프라하에서는 우연이었고, 서울에서는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사랑을 끝내야 하는 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흔적을 찾기 전에는 마침표를 제대로 찍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어느 도시는, 가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추억과 그리움 혹은 기다림의 흔적 같은 것이다.  

 

 

 

 

 

 

 

 

 

 

2부작의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이탈리아 기행]은 그즈음 운명처럼 보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전집이 출간물결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어도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달빛 프린스]에 셰익스피어가 등장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리어왕을 소개했는데 평소 맥베스와 파우스트를 동시에 읽겠다고만 생각하던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불만 밝혀준 셈이었는데, 어쨌든 셰익스피어가 사랑과 신화, 운명과 복수, 희극과 비극의 거의 원형적인 모습을 띠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지만, 같은 이유로 내가 셰익스피어 보다는 그리스 비극을 더 좋아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1564-1616)가 자국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그토록 여러 편 썼는지, 베네치아(베니스의 상인), 베로나(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의 두 신사), 밀라노('템페스트'에는 밀라노 대공이 등장) 등 그 배경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을까. 물론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대가 르네상스를 관통하고 있었고, 이탈리아가 그 중심에 있기는 했어도 이탈리아 배경이 한두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사랑이 굉장했고, 괴테 못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토대가 된다.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4대 비극, 템페스트 외에는 상당량의 작품들을 읽지 못해서 제대로 말하기 어렵지만, 이 다큐에 나오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인이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상당수 썼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특별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대항해 시대, 식민통치가 만연한 유럽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있었든 그건 그 후손들의 문제일 뿐이다. 알려진 바대로라면, 셰익스피어가 영국을 떠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데 그렇다면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저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탐나서 제 지역 출신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일까.

 

셰익스피어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현실로 존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풍스런 도시 베로나. 시에서 운영하는 '줄리엣 클럽'에는 여전히 해마다 오천 통이 넘는 편지가 도착한다. 다양한 국적을 지닌 손편지들 속에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희비극과 사랑에 관한 고백이나 고민이 담겨있으며, 주최측에서는 매년 처치곤란이면서도 여전히 신화적인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들로 인해 낭만성을 획득하는 이 도시를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에 가슴 설렌 이들과 사랑에 눈물짓고 아픈 이들을 동시에 위로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말을 들어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이들에게는 그리움을 내려놓을 곳이 생긴다. 줄리엣 클럽은 아마도 사랑에 절망한 청춘에게 거의 유일한 소통의 통로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랑은 환하게 피는 반면, 어떤 사랑을 어둡게 저물고 있으며, 저무는 것이 새로 피어날 미래를 위함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추억을 재산처럼 여기게 될 언젠가를 위해 이 도시는 사랑을 보관한다. 한 도시를 영원히 낭만과 비극의 땅으로 만드는 힘. 문학의 힘이자 대문호의 힘이자 도시의 힘. 셰익스피어를 읽고 괴테의 시대로 돌아가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고스란히 따르겠다는 다짐이 지나치게 길어졌다. 책이 죄다 새빨간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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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3-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 오늘도 1등 댓글이요!!!
아이리시스님 정말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그걸 죽을때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지...살짝 고민 좀 하고 있어요.ㅎㅎ
괴테와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고 싶다는 욕심은 앞서는데....ㅜㅜ 과연 읽을 수 있겠죠?ㅎㅎ
멋진 글이에요.^^

아이리시스 2013-03-13 16:47   좋아요 0 | URL
꿈섬님, 오늘 날씨 귀신나올 것 같아요. 재밌겠죠? 귀신나오면. 으흙으흙. 일단 쓰고 틀린 건 내일 고치자고 내버려두었는데 보니까 많아서(엄청 많아서) 수정을 좀 하고 그러고보니 꿈섬님 댓글 보여요 히힛.

네! 우린 죽을 때까지 읽고 싶은 책만으로 숨이 막히고 말 거예요. 저는 그럴 거란 확신이@.@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아주아주 두껍고 어려운 책 몇 권 사서 죽을 때까지 이해하기 위해 낑낑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그 사람은 독서가일까요, 아닐까요. 셰익스피어 다큐 엄청 좋았는데 그거라도 보시면 좋을 거예요. 해브어굿데이!!

맥거핀 2013-03-1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책이 다 새빨갛네..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지만, 지하철에서 들고 있으면 포스 나오겠어요. 아침 지하철에서 고전 같은 거 들고 있는 처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외모점수*3의 가점을 드립니다(라는 개드립). 좀 다른 얘긴데, 얼마전에 지하철에서 최근에 나왔던 밀란쿤데라 전집 중에 한 권 들고 계신 수녀님을 뵜었는데, 어찌나 멋있던지.

아이리시스 2013-03-16 01:13   좋아요 0 | URL
어느 전집이든 예쁜데 아직 구입은 안했어요. 뭘 쌓아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옷장의 옷과 빽 뿐인데요 큭큭;;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들이 꽤 있나봐요. 저 지하철 탈 일 거의 없긴한데 못봐요, 독서하는 사람. 지하철은 항상 너무 붐비고 저는 대체로 멍때리고 있어서ㅋㅋ 쿤데라 전집 중 한 권을 든 수녀님이라.. 외모*3 해서 몇 점?(...) 수녀님 예뻤습니까.

맥거핀 2013-03-20 14:33   좋아요 0 | URL
근데 저기에 함정이 있는데, 외모점수가 0이면 아무리 *3을 해도 0점이라는...은 두번째 개드립이구요, 그 수녀님은 여러모로 미인이셨습니다. 정말로.

아이리시스 2013-03-21 18:12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하하하 곱하기 할 게 없어..없으면..으하하하하하하 계속 웃기네 그럼 다음에는 더하기를 해봐요 곱하기 하지 말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

Shining 2013-03-1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전 정말 본 드라마가 없네요. 하지만 저것도 라인업과 스토리는 알아요ㅋ 신기하네요, 저 이번에 템페스트 구입했거든요ㅋ 헨리5세도 읽고 싶은데(예전에 흥미로운 글을 읽은 후 기억만 해두고 여지껏...) 그 책 판본이 너무ㅠㅠ 아는 사람 말이, 셰익스피어는 전자책으로 사서 필요할 때마다 본다고 했는데 저도 그렇게 해야하나.. 끙. 고전을 읽고 샆어요 아이님. 이 페이퍼 읽으니까 더욱! 어흥!

아이리시스 2013-03-20 01:22   좋아요 0 | URL
어흥! 리처드 파커 같아요ㅋㅋㅋ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이탈리아 기행이라니 BBC에서 만들다니 이러면서 보는 동안만큼은 전집 통째로 읽을 기세에 전투력이 상승했었지만 이틀만에 셰익스피어란 무엇인가..누구인가..더군다나 희곡..몰리에르 이후로는 처음.. 졸업하고 처음인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겨서.. 무방비 상태로 맞은 돌 같아요. 지금 Shining님이 부추겨서 헨리5세가 눈앞에 아른아른거려요. 습관이란 게 무섭게 빨라요. 한국소설 읽고 나니까 번역체를 읽질 못하겠고, 장르문학 읽다보니 페이지 안 넘어가는 순문학 읽던 제가 저 아닌 것 같아요. 나누기 싫어도 자동으로 나뉘는 문학 스펙트럼 체험중..으흙흙.

이제 자요? 자는 거죠? 내일 봐요, 굿나잇, Shining님^^

2013-03-23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3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의 웃음이 그 환한 박하꽃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별이었던 그때.

 

어느 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편의 소설이 있었다. 아주 발랄하고 배부르고 따스하고 행복한 그런 밤이었는데 두 권의 소설을 만난 뒤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밤에 나를 달래기 위한 음악을 들었다. 그 밤을 다스리기 위해 환한 불을 밤새도록 켜두었다. 환하게 밝힌 밤에는 꽉 잡고 놔주지 않는 사랑이, 고통이, 세월이, 증오가 뒤섞여 넘실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표면적이었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슬아슬한 절벽이, 소리없는 번개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닿지 않는 마음이, 그렇게 모든 것들이 여전히 있다. 여기에, 환상처럼 뭉클하고 애닳게.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거다 싶었던 그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싶었던 그때. 그러면서 좋았던 그때.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떤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서라도 네가 사랑하는 그 무엇을 구하고만 싶었던 그때. 바람이 많이 불어도 좋았고, 눈이 많이 내려도 좋았고, 비가 올 때 들리는 음악은 또한 얼마나 환상적이었나. 그리고 네가 거리에서 전경의 몽둥이에 맞아 쓰러질 때 너에게로, 너에게로 내 몸 다 주어서라도 가고 싶었던 그때. 그리고 그때. (<박하>중에서)

 


 

로렐라이

                   

                   - 하이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옛날의 동화 하나가
잊혀지지 않고 이토록
나를 슬프게 하는지

바람은 차고 날은 저무는데
라인강은 고요히 흐르고
산봉우리 위에는
저녁 햇살이 빛난다
저 건너 언덕 위에는 놀랍게도
선녀처럼 아름다운 아가씨 앉아
금빛 장신구를 번쩍이며
황금빛 머리칼을 빗어 내린다

소녀는 황금의 빗으로 머리 빗으며
나지막히 노래를 부른다
기이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선율의 노래를

작은 배에 탄 뱃사공은
걷잡을 수 없는 비탄에 사로잡혀
암초는 바라보지 않고
언덕 위만 바라본다

마침내 물결은 조그만 배와 함께
뱃사공을 삼켜 버렸네
그녀의 노래와 함께 이것은
로렐라이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법 잊혀진 세 소설들의 공통점은 욕망이고, 사랑이다. 오래된 사랑소설을 읽는 일은 남모를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나오지 못하고 매몰되고마는 은밀하고 내밀한 경험이다. 새 것, 보편, 베스트, 고전에 무던히도 열올렸으니 탐독이 어디로 향해야 할까 생각하다 구멍난 시절의 독서를 메우기로 한 게 이 책이었을까. 언젠가, 사랑이 있었고, 가난도 있었다. 가난한 남자는 더 불우한 환경에 놓인 한 여자를 사랑했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가난밖에는. 내가 더 잘 나가를 몸소 부르는 다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게다가 그 남자가 정말로 잘났을 경우라면 게임은 끝났다. 바보 아닌 이상 지는 쪽을 알 수 있으니 더 갈 필요도 없건만, 끝까지 가본다.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확실히 이십세기의 감수성을 안고 있다. 다른 남자는 비교할 수도 없게 부자 할아버지를 가진, 가진 것들을 모조리 물려받을 유일하거나 유력한 핏줄이다.

 

그 역시 가진 이가 그렇듯 배려 대신 무례함을, 경쟁 대신 쟁취를, 그리움 대신 자신감을, 훈장처럼 입었다. 그가 유일하게 자존심을 굽혀도 괜찮은 대상은 그녀 뿐이다.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아야 하므로 괜찮은 것이다. 현대사의 아픈 부분과 겹쳐져 때로 신파처럼, 실화처럼 그렇게 진행되는 소설은, 마음 먹지 않아도 갈길을 간다. 힘을 지닌 자가 그 힘을 휘두르면 사랑은 잔인하게 휘어지고 부서진다. 사랑은, 대상을 건드리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탐욕과 도피의 끝. 체념과 포기의 시작. 이 길 끝에는 무엇이 더 기다리고 있을까. 여자 대신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괴롭힌 순간, 가난한 사랑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사랑은 가난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확연하게 휘어잡는다. 가난한 자는 가진 자의 사랑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런 구조로 진행되는 <외등>은 <은교> 보다 더한 욕망의 사랑소설이다. 사랑의 비극이 갈 수 있는 최대치를 밟고도 한참쯤 더 멀리있는 소설이다. <은교> 속 욕망들이 방향을 잘못 찾았다고 여긴 적 없다. <외등>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품지 말았음직한 욕망을 욕망함으로서 핏빛 사랑 속으로 서서히 걸어들어간다. 이제는 까먹어버려서 희미한 두 남자와 여자. 과거와 현실. 희생과 착취. 자유와 억압. 서로가 서로의 반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할 단어들의 대립만이 내 안에 남았다. 그들에게 희망은 한낱 실줄기이고, 외등이고, 기다림이고, 늦어버린다. 사랑은 어긋나고 삐뚤어져버린다. 한사람이 한사람을 지독히 사랑할 때 발생하는 모든 비극을 담아내지만 그 비극이 눈부셔서 차라리 비극적이어서 다행이라고 느끼게 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목숨보다 더 아낄 때 한 여자는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좋았을 것이다. 둘 다 움직였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감지하지 못한다. 외등이 홀로 켜진 불이 아니라 각자 켜진 불이고, 홀로 켜진 불은 차라리 켜지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이 외롭고 고독하고 아팠을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외등 하나 밝힌 채 기다리다 떠났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되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슬퍼도 슬프다고 외치지 못하는 그녀를 비추는 평생 단 하나의 불빛이던 그. 그 불빛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한 남자가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한 한 여자를 평생토록 기다렸다. 목숨은 끊어졌고, 여자가 돌아왔지만, 사랑은 저 멀리 있었다. 사랑 사이로 아버지라는 애증어린 존재의 기억이 끼어든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세월을 숨겨놓는다. 누구든 읽지 않았다면 그건 직접 읽음으로서 확인하면 좋겠다. 아버지와 여자. 누구였던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선택했다고한들 잘한 선택일 수 있었을까. 오래 전 서른쯤 되면 세상 누구보다 매력적인 남자와 세상 누구도 해보지 못한 사랑을 할 줄 알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목숨 따위 걸 사랑은 없었고, 세월이 흘렀고, 나는 감수성 돋는 소녀가 아니다.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늦어도 지금쯤은 진행중이었어야 한다. 두 사람의 그 무엇 이상을 원하고 또 방해하는 운명조차 피해갈 마음 말이다. 마음을 버리면 살지만, 품을 경우 파멸의 지름길로 걷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은 모른다. 서로에게로 휘감기듯 천착하던 순간들. 눈을 감아도 잊혀지지 않고 눈을 떠도 떠오르지 않는 세월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과 아프게 기억될 서글픈 사랑의 분열을.

 

<박하>는 오래 전 잃어버린 그 사랑을 찾으러가는 여정이다. 굉장히 호기롭게 시작한다고 여겼던 소설은 아내와 아들 둘을 잃은 남자가 잊혀진 사랑의 흔적을 찾아떠나는 고고학적 여정에서 그만 감수성을 잃어버리는데 그래서 차라리 신파에 가까운 <외등>의 감수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길 위의 질문은 끝내 그곳에 닿지 못했고, 떠남은 결코 치유의 과정이 아니었다.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까지'라는 글에 의지해 여행을 떠난 남자는 기록이 사라진 곳에서 다시 새 기록을 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못했어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제는 사라져버린 고대도시 하남을 찾아가는 칸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랑으로 세상에 발자국을 찍고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박하사탕을 빨았는지 알싸하면서 달달해질 때까지의 그 순간이 좋아 자꾸만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기도 했다. 유영과 유예는 분명히 다른 단어지만 이 순간 같은 뜻으로 겹쳐진다.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파괴된 폐허도시, 사라진 언어, 잃어버린 사람, 잊혀진 기억에 대한 환기는 아련하고 또 아득해서 닿지 못할 곳에 떠있는 것만 같았고, 나는 닿지 못해 자꾸만 까치발을 했다. 닿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었다. 만질 수 있다면 쓰다듬고 싶었다. 내 곁에 불러앉히고만 싶어 애가 탔다.

 

<사랑의 전설>은 답답한 첫사랑이라는 점에서 [건축학개론]과 닮아있다. 첫사랑이라고 무조건 감수성 돋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영화로 배웠다. 마침 다시 보게 된 손예진,조승우,조인성의 [클래식]은 액자 속이나 바깥이나 거의 완벽할 정도의 감수성을 체험하게 하는데 [건축학개론]은 아니었던 것처럼. 감수성은 부족하지만 다이렉트로 닿지 못했던 감정이 공중을 배회한다. 정확한 문장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거짓없는 흔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제 색을 거의 퇴색할 지경의 지점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이런 사랑은 폭발지점이 없고, 절정이 없으므로 욕망이 타오르지 않는다. 감동이 덜하다. 영화가 그런 것처럼 그들의 감정은 소멸되고 증발했다. 촌스럽고, 답답할 만치 느리게 닿는다. 결말이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사랑의 전설이 될 만한 연애소설은 아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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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3-0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안녕^^
ㅎㅎ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고 가요. 도달불능의 사랑이라, 제목부터 멋져요.
인생은 소설 속 주제처럼 욕망, 사랑 그것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물론 완전한 사랑이란 없겠지만요.^^

아이리시스 2013-03-06 21:11   좋아요 0 | URL
꿈섬님 진짜 오랜만에 1등 댓글 고마워요. 사랑하면서 잘 지내고 계시죠? 애기들도 잘 있고?^^ 예전에는 몰랐는데요, 커갈수록 사랑을 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그리고 조건 따지며 이득산출하는 게 사랑이 아니랄 수도 없지만 꼭 순수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누구나 순수한 사랑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잖아요. 오랜만에 사랑론 쓰려니까 너무 어려워요@.@ 자주 오셔서 1등 댓글 부탁해요ㅎㅎㅎ

맥거핀 2013-03-0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새벽에 지나간 사랑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쓰시면 어쩝니까. 그런 건 소주를 한 잔 하면서, 열심히 잊으려고 애쓰면서, 아니 사실은 열심히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찌질하게 전화를 손에 들고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없는 번호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번호를 눌러 그 소리를 다시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찌질한 코스를 밟아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쯤은 있는 거잖아요..(하지만 이제 삼천원으로는 소주 한 병 마시기도 버거운 돈이 되었군요,라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세.^^)

저는 박범신의 <외등>을 드라마로 봤습니다. 홍수현이 쩔었는데...

맥거핀 2013-03-03 01:18   좋아요 0 | URL
그리고 노래방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찌질 2콤보를 달성해야..



아이리시스 2013-03-06 21:1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런 생각하면서 쓰지 않았지만 이 사랑은 분명 도달불능의 사랑이에요. 사랑이라고 부르짖다가 끝난 것 같아서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쓴 반면 창피해가지고 이제 왔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도 홍수현이 어떨지 알 것 같은데, 그거 어디서 볼 수 있지, 아! 홈페이지 다시보기! 근데 그거 아이디랑 비번 까먹어가지고 어쩔;; 정말 찾기 귀찮은데 오백만년정도 그래서 못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제가 가장 자주 가던 게 방송 3사 홈페이지였는데 말이죠! 방송인 꿈꿀 때 얘기(풉).

찌질은 쓰리콤보 달성해봅시다.. 이 노래 음.. 좋네요..노래방에서 혼자 부른 적 있기없기? 요즘은 시간이 흐른 후 걸어보면 대체로 더이상 없는 번호겠죠? 번호이동도 쉽고 마음이동도 쉽고 너무 쉽고.. 아..댓글에서 자꾸 뭐가 흘러나오려고해서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겠어요. 홍수현..나도.. 저 여자 혜주 말이죠, 누가 해도 완전 아름답게 빛날 거예요. 나름 수동적이기만 한 여인이 아닌 건 맘에 들어요. 박범신 작가님은 젊을 때도 완전 사랑 이야기를 잘 썼고, 나이 드셔서도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두 권 읽고 이런다..( '')

프레이야 2013-03-03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아이님, 오랜만이에요.^^
일단 '외등'을 담았어요. 중고도서가 있네요. 박범신의 '은교' 이전이 궁금해서요.ㅎㅎ
'사랑의 전설'은 품절이에요.ㅠ

아이리시스 2013-03-06 21:18   좋아요 0 | URL
아..책이 있으면 드릴텐데요, 제가 읽을 때도 '사랑의 전설'은 품절이었어요. 전자책 읽었거든요. 프레이야님, 오랜만이에요. 봄에 가장 걸맞는 감수성을 가진 분이실 것 같아요. <외등> 좋아요. 제일,은 아니고 모처럼 좋아하는 소설에 등극했어요. 현대사 얘기도 되게 좋아요. 남자의 아버지와 여자의 어머니의 삶도 슬퍼요. 문득 쓸쓸해지는 날에 또 읽을래요.

프레이야 2013-03-07 11:27   좋아요 0 | URL
외등, 중고샵에서 구입했어요. 어제 왔네요.
책장이 다 떨어진 누런 종이더라구요.ㅎㅎ 좋아요.
녹음할 책으로 찜했어요.
아이님, 화사한 봄날 누리세요^^

아이리시스 2013-03-11 19:2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네요. 댓글조차 벅차게 느껴지는 봄이에요ㅠ.ㅠ
책장이 다 떨어진 누런 종이라니ㅠ.ㅠ ㅠ.ㅠ
화사한 봄날은 저를 울게 해요. 다 떨어진 누런 종이도..
하지만 재밌기만 하면 돼요. 가끔은 누런 책들을 다 갖다버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은 책이고 세월은 세월이고, 프레이야님 (책구입) 추진력은 엄청나네요^^

자목련 2013-03-0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등>은 책으로 읽고 드라마로도 봤는데 전체 줄거리가 생각이 않아요. 다시 읽어야 할까요? ㅎ
허수경의 <박하>는 어떤가요?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니.. 시인이 쓴 소설은 궁금하면서도 선뜻 손이 닿지 않아요. 그나저나, 봄 잘 지내시나요? 늦어도 너무 늦은 안부로군요..

아이리시스 2013-03-11 19:29   좋아요 0 | URL
화사한 봄날에 조금 적절치 않지만 다시 읽어도 좋겠지만, 봄날을 너무 슬프게 만들 이야기예요. <박하>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는데, 제 기대치가 기대치만큼 딱 그만큼 더 높은 곳에 있어서 그랬기도 하고, 주인공이 아내와 두 아들을 잃은 남자예요. 잃은 게 딸일지도 모름.. 제 기억력이 딱 그 정도랍니다..자목련님..으흙. 그 남자가 어느 기록을 따라 그 사랑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인데요. 약간은 겉도는 느낌이에요. 시인은 시를 써야 하고,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 해요. 음..저는..봄을 만끽하는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