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5
시모나 바르탈레나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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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빛과 비상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로트렉과 르누아르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다. 태초에 내가 기억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비상(飛上)이 좋았다. 평범한 발음과 입모양도, 발음하고나면 거대하게 솟아나는 근거없는 용기도.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루즈]를 보기 위해 꽃처럼 예뻤던 열아홉의 두 소녀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시내 극장으로 달려간다. 의사를 꿈꾸던 짝꿍이자 단짝이었던 친구, 붉고 강렬하고 어둡고 쓸쓸한 무대, 눈과 귀를 자극하는 춤과 음악, 예나 지금이나 빼어난 외모로 혼을 빼놓는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화면 속 화려한 색채와 강렬함, 밝고 명랑하기만 한줄 알았던 파리의 어두운 이면, 극장을 오르내리던 에스컬레이터와 사먹었던 음료와 팝콘, 비스킷, 오징어까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놀랍도록 생생한 기억이다. 더 어두운 분위기로 재즈 선율 물씬한 [시카고], 꿈에 관해서라면 따라올 영화가 없을 [드림걸즈]나 [코요테 어글리]를 좀 더 좋아하지만 다시 보고싶은 작품은 단연 [물랑루즈]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도시에 있다. 묶어둘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던 어떤 물거품에 대해 말하려면 언제나 파리가 일순위다. 아무 것도 모른다. 오르세 미술관의 몇몇 화가 그리고 낭만과 사랑으로 가득찬 예술과 문화의 도시를 알 뿐이다. 


다들 알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 훗날 파리는 내게 그렇게 정의내려진다.



           



로트렉, 클림트, 베르메르, 고야, 고흐, 무하. 로트렉과 가장 먼저 만난 건 운명이라 불러도 좋다. 우디 앨런의 영화 이후, 바로 그 작품이 이 도시를 설명하는 핫한 근거가 되었고, 더이상 나만의 추억만으로는 거기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 슬픈 사연을 들이밀어볼까. 아니면 파리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갔던 퐁네프 다리 그것도 아니면 베르사유, 시테 섬에 대해서. 아니다. 몽마르트르와 빨간 풍차에 대해 말해보자. 아, 벌써부터 불쑥 물러나기 시작하는 그리움의 향취라니. 약간의 쓸쓸함과 미각에 느껴지는 소금기가 따끔거린다. 침울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여섯 명의 화가 중 클림트, 고야, 고흐, 베르메르를 먼저 만났다면, 처음이 로트렉이 아니었다면 나는 굳이 EBS의 특집 프로그램 6부작을 찾아보고 빈약한 책장을 뒤져 굳이 한번 더 회상에 잠기기 위해 이 책을 찾아내진 않았을 것이다. 열 권의 미술관 시리즈 중 하필이면 5번이어야 했던 이유, 로트렉의 일부 작품이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색깔의 빛이 세상의 모든 길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곳. 그곳은 전세계 예술애호가들의 정거장이자 정착지였다. 나는 오르세의 공간적 변천이나 기술적 번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 내용물이 숨긴 기호와 상징, 역사에 오롯이 집중할 뿐이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의 전용관이 있는 파리의 오르세는 문화예술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곰스크 같은 곳이다. 그는 19세기 말 혼란한 사회상 속에 기꺼이 녹아든 하층계급 매춘부와 거리의 여자들을 지상으로 불러냈고, 괄시와 차별에 신음하던 이들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인격을 부여하여 세상 밖으로 낚아올렸다. 로트렉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1889년 몽마르트르의 번화가 클리시 거리에 개장한 댄스홀(프랑스어로 '붉은 풍차'의 뜻) '물랑루즈(Moulin Rouge)'로, 담벼락, 풍차, 밤거리, 댄서, 창녀 같은 몇 개의 다른 단어로도 요약된다. 태양보다 화려하고 달보다 황홀한 시계(視界)가 펼쳐졌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곳이 얼만큼 매력적인 향락의 장(場)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부모의 근친결혼과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얻은 장애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평생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거렸던 외로운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누구도 볼 수 없는 역동과 자유를 포착하기까지 벌인 사투에서 절망의 추격은 또 얼마나 거세고 급했을까. 




하지만 유전적으로 덜 자란 키, 장애로 얻은 걸음걸이로 물랑루즈, 카바레 등의 댄스장과 서커스장까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삶과 반비례하는 완벽한 역동성, 무방비한 자세로 쉬는 여자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쓸쓸함. 대부분의 파리가 보여주는 화려함에 가려 더더욱 아프고 어두운 그림자. 어디에나 존재하는 양면의 칼날을 잊지 말라는 경고일까. 헝클어진 머리칼, 뼈가 툭 불거진 등, 살짝 벗어내린 상반신, 다소곳과는 거리가 먼 자세까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갈 듯한 강인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누가 화려한 파리의 밤거리에서 그들에게 눈길을 두겠는가. 로트렉은 자신의 삶마저 짧고 강렬한 빛으로 휘감았다. 비록 후기 빛의 화가 혹은 인상파, 라고 불리는 다른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에 가려져있긴 해도,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은 남달랐다고 써도 좋다. 서른 여섯에 생을 마친 그를 보고 있으니 또다시 결핍되지 않은 내 안의 수많은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로트렉의 자세한 설명을 기대한 채 열었던 책에서 이 그림을 만나고, 한 페이지에 간략히 요약된 그의 생애를 듣는다. 그외에도 모네, 드가, 마티스, 세잔, 고흐, 쿠르베, 밀레, 마네, 라투르, 휘슬러, 들라크루아, 카유보트, 시슬레, 르누아르, 피사로, 베르메르, 고갱, 쇠라, 뷔야르, 드니, 앙리 루소 등 수려한 화가들의 작품이 반기지만 간략하고 소박한 소개가 마치 독자와 화가의 결탁과 유착을 기반으로 하는 듯 정중하다.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는 아첨, 온화로운 환심, 까다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은 서술이 오히려 오르세 미술관의 미로에 갇혀 길을 찾는 지도라도 된 듯 색채와 부피로서의 감정순환에 기여한다. 병약한 와중에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친 로트렉이 가졌던 깊은 교감력과 도피, 자기파괴에까지 이르게 한 감수성을 우린 너무도 쉽게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며 대가없이 얻기를 바라지 않던가.



           



또다른 프랑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1841-1919)는 들라크루아, 쿠르베, 모네의 기법에 영향을 받아 차츰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한다. 르누아르는 본래 인물화가였는데 점점 전통과 고전 회화의 양식에 눈뜨고, 인물의 심리를 세심하게 담기 위해 애쓴다. 독서, 피아노, 뜨개질, 오찬 등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포착한 르누아르의 장기 역시 빛과 색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표현법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포근하고 따뜻한 마력에서 찾을 수 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조.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뜨거운 감미로움. 무엇보다 색채의 풍부함이 오래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흐릿하면서도 또렷한 질감에서 명랑함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나기도 한다. 르누아르가 그린 세상의 인물들은 로트렉과는 달리, 천진난만하고 싱그럽다. 왁자한 전원풍경과 행복 가득한 생기발랄함, 바로 그 낙천성에서 그의 매력을 찾는다. 



           



시슬레와 모네의 그림을 좋아한다. 빛과 어둠, 꿈과 환멸을 그림에서 찾던 어느 날, 고흐와 고갱의 색채 대비나 램브란트와 베르메르의 소박하면서 묵직한 환희에 간혹 흔들렸다. 고흐와 밀레의 낮은 곳을 향한 진지한 태도, 쿠르베의 고집스러움, 휘슬러의 화폭이 전달하는 흰 빛의 녹턴을 잊지 못한다. 사실 오르세는 놀이터 같은 곳이다. 놀이터에서는 그네도 시소도 미끄럼틀도 포기할 수 없다. 매번 새롭다.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화가의 또 다른 작품에 자주 눈길이 멎는다. 터너의 환상적 연금술에 마음을 빼앗기고, 쇠라의 원색질주와 질서정연함에 심장이 뛴다. 이상하다. 눈을 감고 차분히 마음을 달래면 이 미술관(책이 아님)은 매번 새로운 세계로 나를 데려간다.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책이라서가 아니라 내게 특별한 시작을 선사한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의 모든 분야에 있지만 돈 많은 남자의 숨겨진 정부처럼 무의식중에 잊혀지는 것들은 많다. 나는 십 년도 훨씬 더 지난 날에 자칫하면 헤어질 뻔했던 엄마가 다음날 사다준 핑크색 테두리가 있는 흰색 긴팔 티셔츠를 생각한다. 소매가 늘어나 몇 년 전 별 고민도 없이 헌옷수거함에 넣었는데, 불현듯 당시의 모든 비극적 상황과 더불어 엄마의 표정과 말투, 티셔츠의 촉감과 디자인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시간이 멈춰버렸다. 갇힌 추억 만큼 애처로운 것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관용어의 적확함에 덧붙인다. 기억하는 만큼 체화한다. 잊혔던 날들의 기억은 서늘하게 다가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흩어지는 만큼 멀리가고 내려앉는 만큼 은밀하다. 더없이 반가운 가을바람과 아득히 먼 시간들 속에 내가 막 펼친 이 꼬깃함은 누가 접어놓은 페이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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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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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2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1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2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1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1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 동생은 미술관이 좋아서 한 번 더 가고싶다더군요. 제 입장에선 왠지 지구 반대편에 근사한 꿀단지를 하나 '킵'해둔 느낌. 언젠가 갈 거고, 미술관 소장품들은 분명 환상으로 좋을 테니까요. (아, 왠지 흡족하다..ㅎㅎ)
-로트렉은 왠지 좋지만 아직은 미지의 사람. 르느와르는 왠지 따분하지만 역시나 미지의 사람.. 물랑루즈는 '아름답고, 좋았고, 슬펐'단 기억이 강하네요.

아이리시스 2013-10-18 01:50   좋아요 0 | URL
같은 그림이라도 이국적 분위기에서 그림을 보면 한국과는 느낌이 달라서 좋아요. 사람구경도 재밌고요. 광장도 좋고요. 저도 근사한 꿀단지 만나러 얼른 가보고 싶어요. 비행기 타는 건 지긋지긋하지만.. 속수무책으로 하늘에 떠있는 기분이 너무 답답해요. 예전에는 센티멘탈해지면 화집이나 그림검색을 했는데 요새는 그냥 옛날 영화봐요. 근데 물랑루즈를 쓸쓸한 기분일 때 다시 한번 보려고 했는데 아직이에요 :)

2013-10-20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년 겨울에서 올해 봄까지 이 불온해 보이는 소설들을 사랑했었다. 꿈은 자본주의 사회의 훌륭한 부품인데, 꿈이 곧 혁명으로 치부되는 사회라니. 나는 사랑과 혁명 사이를, 삶과 죽음 사이를 유랑하다 흔들리던 추가 멈춘 듯 갑자기 정지했다. 계절이 두 번 지났다. 어느새 어떤 계절이 가장 좋으냐는 물음에 명확히 답을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가 되었다. 나이 탓이다. 봄이면 봄이, 여름이면 여름이, 가을이면 가을이, 겨울이면 겨울이 좋은 건 모든 계절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계절마다 추억할거리가 적지 않은, 적지도 많지도 않은 다소 오만한 나이 탓이다. 이미 많은 가능성을 잃었지만 또 수 개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모호함에 갈팡질팡하는 때. 과거에 심취한 책등을 쓸어내리면 최초의 계절에 내려앉은 의지가 만져진다. 꿈으로 써내려간 현실은 절망과 의지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없이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로 그려졌지만 현실의 황홀을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비로소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그들은 털어놓을 것이다. 고백은 가닿지 않고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간다. 미처 꺼내지도 못한 마음은 실패한다. 다시는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한 번 뿐이고 각자 다르다.


그럼에도 시대와 제도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나라는 사랑과 혁명을 동의어로 여긴다. 사랑은 조용히 혁명하고, 진실은 추억에 갇혀 경련한다. 아무도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사실에 다가갈수록 진실을 알게 될수록 더욱 선명하고 견고해지는 붉은 덩어리. 성애는 끈적대지만 애착은 역동적이다. 탐함의 미학 앞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환상적 리얼리즘. 감출 것 없는 비밀들 틈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서러운 욕망도 있다. [물처럼 단단하게]의 두 주인공은 경계, 가치, 금기를 뛰어넘어 몸을 섞는다. 시도때도 없이 어떤 환영 속에서 뒤엉키는 몸과 몸, 영혼과 영혼이 애닳토록 강렬하고 숨가쁘게. 운명에 지배된 자들의 외침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쿠코츠키의 경우]를 혁명의 축소판, 가족이라는 이름의 진혼곡으로 읽는다. 억압과 불통이 소비에트 체제 하의 쿠코츠키 가족에게 미친 영향과 소박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탄생과 소멸, 세대교체와 연대책임의 뜨거움으로 그려내고 있다.





 














[열세 걸음]에서 국가는 절대적이다. 국가가 가난과 존엄을 해결하지 못하자 좀비같은 인민들이 새장 안에서 목숨을 다한다. 교사 팡푸구이는 턱도 없이 적은 봉급과 시도때도 없는 야근에 의한 피로누적으로 교단에서 쓰러진다. 팡푸구이의 불행은 정부가 지배를 견고히 할 재도약의 기회로 이용된다. 매일 밤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내 투샤오잉의 절규는 기절했다 깨어났을 뿐인 팡푸구이를 진짜 죽은 사람으로 내몬다. 살기 위해 죽음, 그 역설의 아이러니. 산 자를 죽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부정(不正).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미친 욕망이 비열할수록, 고독이 짙을수록 문장은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미덕과 악덕,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경계를 뒤흔드는 모호함. 세련된 성적 환희로 표현된 처절함. 영웅을 원하는 사회의 대참사.



산아제한정책으로 인한 폐해는 혐오스럽다못해 부당하고 허황하다. 원제 蛙, [개구리]는 실제 산부인과 의사였던 고모를 모델로 1971년부터 실시해온 산아제한정책의 실상과 울분을 1인칭 화자의 시선으로 해부하는 작품이다. 개구리는 강한 생식력의 상징으로, 모옌의 고향인 중국 가오미 둥베이 향의 토템이라고 한다. 인구수와 경제력의 극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서 치욕과 울분을 견디며 죽어간 여자들과 빛을 보지 못한 채 색종이 잘리듯 잘려나간 티끌만한 생명. 침묵할 수 없던 소설가는 이 희생과 폭력의 시대를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생명과 목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시계(視界)로 삼는다. 





지상                  

                 

       -황학주


여기는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온다

다시 올 일 있을까 싶다

나란히 신발 벗을 때는

모르지만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나간다

모텔 같다

여기는 물감냄새가 난다는 게 문제지

사랑만 필요했던 

연인들이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

시간의 종업원이 똑똑똑 노크를 하거나

전화벨을 울려주기까지 하는 곳

슬픈 것은 사랑을 보는 모텔 주인의 생각이며

거기서 나온 인테리어 솜씨일 뿐

이상하고 또 이상해도

여기서 서화를 그릴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이 쓸쓸한 기운. 못미더운 계절. 스며드는 불안. 잔잔한 고독. 무서움과 두려움. 형체없는 모든 것이 미세하게 감지된다. 단연 무채색의 소설. 모든 것들에 심드렁해진 한 사람을 전율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누구인가. 한시가 아깝던 파리 유학시절에조차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녀와 나누던 사랑 외에는 그 무엇도 그의 심연에 파문을 던지지 못한다. 이웃집 노파의 숨겨진 비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중심을 세우고 다시 붓을 들 수 있게 된 그에게서 돌림하듯 특징없는 마을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듣는 시간.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진짜 욕망을 본다. 별이 붉고 달이 울었다. 모든 게 그의 환상에 불과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빈방을 떠올리면 한적한 터 금방 허물어질 듯한 집 한 칸이 생각난다. 안락하고 따뜻해서 기어이 매몰되고야 말 그런 집. 마을로부터 30분 떨어진 풍성한 초록의 숲 속에서 세상과 등을 맞댄 채 개울을 틔우고 물고기와 박을 기르며 사는 남자를 보았다. 이십 오 년 전의 연인을 그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제는 하얗게 센 머리색의 남자를 보았을 때, 어서 그 남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운명에게 말을 걸었다. 많은 날들을 나는 아파했다. 그의 한평생이 저릿하고, 처연하고, 애잔했다. 


아무 것 아닌 찰나. 무(無)의 세계로 흩어지는 공허. 확언하되, 이 막연함도 곧 지나갈 것이다.




















신작이 아니었다. 1991년 作. 많은 말을 하기에 너무 짧고 정적이고 부질없다. 고집스럽고 청아한, 실존했던 한 음악가의 삶을 묵직하게 그린다.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이해할 리 없는 어떤 생애.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에 얹힌 진부함이라니. 세상의 모든 저녁도, 세상의 모든 사랑도, 세상의 모든 이별도, 세상의 모든 황홀도 절망도 같은 형태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하물며 아침이라니. 미세하게 달라지는 우주에 균열을 내보고 싶은 자의 목소리. 제 길을 꿋꿋이 걷는 예술가의 찬란한 이름. 감촉과 내음이 따사로워서 잔잔한 호숫가 옆 푸릇한 들판으로 달려나가고 싶다.


17세기 프랑스 출신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 그는 음악으로 세속적 욕망을 이루고자 찾아온 제자 마랭 마레와는 상반되게, 아내를 잃고 두 딸을 홀로 키우며 영광을 선사해줄 왕실의 부름도 거절한 채 오로지 자신의 음악세계를 지키는 단호함을 보여준다. 소설적 흥미가 툭 불거진 상황설정이나 진한 감동에 있다면 이 소설은 정반대에 위치한다. 내면이 발하는 은은한 빛을 따라 걷는 자는 마침내 황홀경에 도달한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하지만 작가는 몸을 낮춰 말한다. 삶이 대체로 그러하며 순간의 선택이 생을 이루게 한다고.






편혜영은 처음이다. 나는 습작을 때때로 지겨워했다. 그때 나는 반드시 무엇이 되고 싶었다. 이 소설집을 읽게 된 건 오로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던 밤들 때문이다. 


영어단어에도 진행형을 쓸 수 없는 동사라는 게 있지. '소유하다(have, possess, owe), 원하다,바라다(want, wish)' 같은 단어. 


현재진행형과 친하지 않은 나는 밤의 현재진행형 앞에 긴장한다. 지나간 것과 지나가는 것, 분노하는 것과 분노하고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있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지금 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밤이 원치않는 비밀을 엿보는 중이라고. 애틋하고도 그윽한 시선이 가장 나답지 않은 순간마저 나를 또렷하게 한다고.





기어이 어떠한 조건을 붙이고서야 읽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장편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나는 단편을 그 자체로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 밖에 읽지 않았던 때도 그랬고, 습작에 써먹기 위해 줄기차게 읽어야만 할 때도 그랬다. 베끼고 싶은 문장을 종종 발견하지만 읽는 게 서늘해지거나 흥미롭다는 느낌이 없다. 좋다고 느낀 찰나가 가끔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단면들을 요리조리 쪼개보는 과정을 싫어한다. 부분과 단절을 어려워한다. 흐름이 없어 싫고, 묻혀버려서 싫다. 처음과 끝을 동시에 소유하고 싶고, 오랫동안 여러 번 만나 다정해진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낀다. 흥미로이 여기지 못함에도 여덟 개의 어둡고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삶을 직시하고 있어 때론 고마웠다. 밤(夜). 자체로 황홀하고 그 질감마저 투명한 것. 시시콜콜한 밤들이 지나간다. 시공간의 단절이 도무지 있을 줄 모르는, 여기는, 지상이다. 황학주 시인의 말처럼,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세상 무엇으로도 채우기 힘든, 지상의 어떤 순간과도 바꾸기 어려운, 마침내 괜찮은 계절이 왔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여름의 끝에 간신히 매달린 이 소설이 물었다. 단단하지만 허물어지는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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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17: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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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3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9 0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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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 봐, 피비! 그리고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어 봐라! 장미 한 송이를 줘 봐. 가시에 손을 찔러서 그 날카로운 고통으로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란 걸 확인하게.˝] 노력은 처음의 간절함을 잊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낀다면, 그건 헵지바와 클리퍼드와 피비가 우리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는 그의 기억을 말살한 알 수 없고 끔찍한 것이고 미래는 백지와도 같아서 그는 오직 손에 잡을 수 없고 환영과 같은 지금만을 가졌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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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죽음은 한끗 차이. 랑베르가 전무한 세상에서 그가 하는 모든 사유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식과 사유로 통하는 우아한 비상(飛上)이 좌절되는 걸 보는 건 부조리하다. 형이상학, 친근감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사람들은 항시 오만하다. 랑베르는 주위현상을 한눈에 파악하는 깊은 통찰력과 단어와 단어에 얽힌 이야기만으로 세상을 다시 써내려가는 집요함을 가졌으며, 영혼과 육체 그리고 움직임이 위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행동과 반응, 욕망과 환상, 작용과 반작용 사이를 유랑하며 열정이 사라진 세상에 물음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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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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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의 운명만 봐도 알 수 있듯, 운명이란 참 덧없다. A에 의해 B의 삶이 그리도 쉽게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A와 B는 가족, 친구, 연인을 비롯해 사실상 관계의 양상 거의 모두에 해당하는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친밀도가 높을수록 해당 비극의 강도가 세어지는 특성을 보여준다. 혼자 왔다 가는 세상 아니다. 독불장군처럼 있다간 세상이 코 베어가도 모를 세상. 그래서 인간은 절충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우며 자라난다. 선과 악, 능력과 신분, 성직자와 군인, 윤리와 세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주인공 쥘리앵 뿐만이 아니다. 



독실하고 순결한 성직자()를 꿈꾸지만 남보다 특출난 지능 뿐인데다 가난하고 시간이 없으니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타당한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 속의 기준이 무너진 사람을 보고 있는 일은 어찌나 아슬아슬한지. 노력이나 열정으로 되지 않으면 가능한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려 한다(). 쥘리앵의 경우 은근하다는 것과 본인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여자, 사교계,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쥘리앵의 목표에 희생되기 좋은 촉매제다. 대가를 챙긴 아버지가 억지로 떠민 집으로 들어가 레날 시장의 아이들을 돌보는 입주 가정교사가 되지만 상층사회의 배움은 도덕이 아니라 불법을 무릅써서라도 쟁취하는 법이다. 손쉽게 시장의 아내를 유혹해 원하는 것을 얻다가 들킬 위험에 처하자 평소 신부의 신임이 두터운 덕에 쉽게 추천장을 받아 드넓은 도시 브장송의 신학교에 들어간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과신하는 유형의 전형적 캐릭터. 쥘리앵의 갈등과 변화를 내세워 능력과 노력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암울한 왕정복고 체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노력과 열정이 통했던 나폴레옹 시대를 동경한다. 마음이 찬란해질 정도로 그리운 시대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문학은 희한하게도 최후에 돌아가야 할 보금자리처럼 여겨진다. 만족과 찬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지성과 감성의 기로에 서서 흔들고 쓰다듬게 된다. 스탕달 보다는 발자크와 플로베르가 좋지만 어디까지나 세 사람은 프랑스 문학이라는 갱도 안에서 하나이다. 상징성 짙은 사회소설이 부담되면서도 정작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는 할 수 없던 프랑스 왕정 역사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한 청년의 수난사에 나를 대입해보는 감각, 프랑스 문학사의 획을 긋는 작품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완연하게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라면 묵과할 수도 없고 간과해서도 안되는 지점에서의 촌철살인적 멘트. 읽어내는 자에게만 허락된 어떤 뿌듯한 벅참 같은 것. 프랑스 혁명 이후의 왕정 복고(부르봉 왕가), 나폴레옹 집권과 실각, 루이 필리프(오를레앙 왕가) 등장 직전까지가 스탕달이 마흔 여덟, 죽기 12년 전에 발표한 작품의 배경이다. 이후 나폴레옹 정권 역시 유럽을 전란으로 밀어넣었다는 명분을 쓰고 워털루 전쟁으로 명을 다한다. 신체제가 구체제를 전복할 수 없는 현대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무력하게만 보이는 이들의 부침이 약간은 멀뚱하게 느껴지는 건 너무나도 상식적인 돌담을 부수지 못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 1830년 7월 28일), 1830, 루브르 박물관 소장




미어터지는 겨울날 루브르에서 좋은 자리에 크게 걸려있기도 했지만, 유독 시선을 사로잡던 이 작품을 기억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라곤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밖에 모를 때였다. 당시 들라크루아 그림에 심취한 적이 있어 중심에 선 여인이 잔 다르크를 상징한다는 것도 아는 상태에서 본 그림이라 모나리자 다음으로 기억에 남았다. 좋아한다기 보다 그저 기억에 남은 것이다. <적과 흑>이 발표된 1830년, 비로소 7월 혁명으로 복고왕정이 무너진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성공으로부터 겨우 15년 만에 다시 황제를 맞아들인 후였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혜성처럼 등장한 루이 필리프는 국민 모두의 열망을 안았지만 사실상 착각임이 밝혀진다. 그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명을 다할 때까지 프랑스 시민의 왕으로 군림하지만 그의 집권은 왕정 복고 체제로 돌아간 것과 다름 없었다. 군주제는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고 루이 필리프는 즉위 후에도 자본가측의 이익만을 대변했다. 급분한 시민들이 벌인 2월 혁명의 결과로 공화정이 성립되지만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3세 역시 황제를 선언하면서 공화정도 민주정도 너무나 멀게만 보인다. 이러한 상황. 다소 용맹스럽지만 강인하고 유연한 정책을 폈던 나폴레옹에게는 넘치는 추종자들이 있었고, 실각 후에도 그를 그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전 나폴레옹의 인기와 명성을 입고 당선된 나폴레옹 3세는 곧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이로서 보나파르트 왕조의 막이 열린다. 1842년에 세상을 떠난 스탕달은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거나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쿠데타를 반대하다 국외추방을 당한 이가 위고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하면서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한 걸로 알려졌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1831년, <적과 흑>이 1830년에 발표되었다. 위고의 문학인생은 추방 전과 후로 나뉜다. 1862년에 나온 <레 미제라블>과는 다른 정치상황에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쓰여진 것이다. 이 시기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최초의 근대적 혁명으로 불려왔다. 


요약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이후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 자유,평등,소유권을 인정한 1793년 헌법 제정, 안팎의 흉흉한 전쟁이 거듭된 시기를 거쳐 워털루 전쟁(1815)에 의한 나폴레옹의 실각까지가 스탕달이 사회주의 소설로도, 애틋한 사랑의 심리주의 소설로도 읽히는 이 작품을 내놓은 배경이다. 정확히 루이 필리프가 취임한 해에 나왔고, 주인공 쥘리앵을 작가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도록 설정한다. 부정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대에 남몰래 침대 아래 숨겨둔 나폴레옹 초상화가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쥘리앵들이 이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가. 이 목표지향적 보나파르티스트는 신학교 교장의 신임과 영리한 두뇌로 라몰 후작의 비서로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부상한다.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사랑이나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기병연대의 중대자리는 쥘리앵의 신분을 고속승진시키지만 이후 찾아온 비극에 비하면 영광의 축에도 못 끼는 불꽃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여느 고전이 그렇듯 스토리상의 속력전이나 짜릿한 쾌감은 덜하다. 대신 반종교, 반체제, 혁명적, 저항적인 작가의 사상이 잘 반영되어 세상을 향해 돌진한 꽃다운 젊은 청년의 말할 수 없는 비극을 체화시킨다.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고결한 저울질은 바닥과 하늘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다. 운명순응자들의 끝을 알 수 없는 몰감각이 쓸쓸하다. 정확히는 피곤하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막연한 세상에서 저마다의 숫자만큼이나 존재하는 기준, 잣대, 경계, 원칙이란 숫자 0에 0을 곱한 듯한 모양새 또는 시그마나 인테그랄처럼 정답이 떨어지는 투명하고 신속한 기제가 아니다. 첫 장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의 고독해질 마지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슬프고 애처로운 비상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가 우리의 정답이라 확신할 순 없어도 그가 우리의 대안 중 하나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쥘리앵은 우리들을 닮았고, 저녁 시간의 유쾌함을 지켜주는 드라마 속 갈등유발자들과도 닮았다. 어쩌면 나를 그리고 당신을 너나할 것 없는 모두를 닮았다. 두려워해야 할 것, 궁금해 어쩔 줄 몰라야 할 것은 결말이 아니라 바로 나쁜 줄 알면서 품은 마음이다. 뭉개버린 원칙, 깨버린 금기, 등한시해야 했던 욕망이다.

 




이쯤에서 꼬꼬마 때 좋아한 Wellington's Victory을 다시 듣는 건 나폴레옹에게나 프랑스에나 스탕달에게나 적과흑에 조금은 미안한 일이지만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고 결혼 축하곡집, 체르니, 하농, 소곡집, 명곡집,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의 연주집을 뒤적이는 대신에, 누가 연주했는지 올렸는지도 모르는 Wellington's Victory을 연달아 재생시킨다. 승리의 포만감과 환희가 넘실대는 경쾌하고 가벼운 멜로디가 난데없이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로 피아노 학원 의자에 앉아 몇 번이고 건반을 두드리던 작은 여자아이를 눈앞에 데려다준다. 이게 봄과 여름 사이 적과 흑의 유일한 결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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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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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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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역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좋아하는 분야라고 손 번쩍 들어 편협한 독서취향 강조 말고. 문학은 역사를, 역사는 문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뛰어넘으려는 존재여야 할까. SF문학도 결국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니 대다수의 문학이 역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사실 아닌가. 역사는 과거가 될 현재의 기록이고 문학은 흔히 말하듯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을 그리는 (예술)학문의 일종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문학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이고, 역사는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거나 기록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르다면 섭섭하다. 닮았다고 갈등이 없는 게 아니듯 문학과 역사는 필연적으로 얽혔으니, 이 (제발트) 논쟁은 새삼스럽지 않다. 랑케와 카의 역사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처럼 문학이 (거대하게) 역사의 일부이거나 전부 또는 전혀 다르다고 하더라도 틀린 건 아니다. 물론 제발트가 (독일)문학이 역사 앞에 침묵했다고 말한 것 역시 일리가 있다. 일반론적인 문학과 역사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을 골자로 한 유럽, 더 좁혀 독일이라는 무대에 국한된 주장이라고 해도 받아들여진다. 전세계는 이 논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2012년 선거를 해놓고 (무의식적으로) 1970년대로 돌아가 사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럴 리도 없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3,4공화국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제대로된 문학이 나오겠는가. 나온다고 해도 온전하겠는가. 온전하다고 해도 그걸로 진정 괜찮겠는가.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p.183)





방에 앉아 방향을 가늠하지도 못한 채로, 거리로 바다로 하늘로 지구 반대편으로 우주로 은하계로, 여기 아닌 저곳에만 눈길이 멎던 날들, 땅에 발붙이기보다 구름에 실린 듯 꿈꾸고 느끼던 날들, 나는 대다수의 비물질적인 것에 남달리 애착이 강하고 욕심이 많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서가 남다른 걸로 잘 살아지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즈음 나는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며 줄 위에 선 곡예사마냥 위태위태했으리라. 알게 모르게 사람을 괴롭히기도, 이해 안되는 행동과 말로 나를 타당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확신과 자기신념이 강한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위험에 사로잡혀 어떤 날에는 조금만 옅어졌으면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 현재와 꿈의 괴리가 큰 만큼 사람은 불행하다. 세포를 건드리는 황홀하거나 위험한 순간, 절묘한 진실의 상실, 선택지가 하나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불쑥 솟아오르는 위화감을 몸소 느낄 때만큼 서늘한 순간이 있을까. 전율할만치 섬뜩하고 잔혹했던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더 많이 읽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사유의 확장과 근사한 리뷰를 선사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침묵했다. 무엇으로도 채우거나 덮을 수 없는 더위 끝의 냉소와 불시착. 나는 여름 내내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책 속에서 책 곁에서 책을 뒤로한 채 더위와 화해하고 한 살 더 먹었다. 



실제와 평가, 현실과 기록 사이의 미묘한 어조를 예리하게 써내려간 작가는 제발트, 그는 북극곰을 지켜주기 위해 틀지 못했던 에어컨 때문에 더 유난하고 별스러워진 여름에도 장엄과 숭고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다. 서늘하고 고결하고 견고하게 샘솟는 문장은 도시와 거리가 처참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조차 아름답게 그린다. 유연하고 적확한 문체, 눈에 보이듯 생생한 거리, 생동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력 등 그를 찬탄할 만한 요소는 많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저 멀리 잿빛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듯 눈앞에서 사라진다. 진실이 꿈 같고 비판이 애정 같고 잡힐 듯하다가 달아나는 글. 손택이 사진을 보고 그랬듯, 실제로 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의 글을 따라가면 텅 빈 거리에 세운 하나의 도시가 완성된다. 망각된 역사 아니, 역사가 망각된 사실 그리고 역사가 망각된 사실의 '고착'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태어나 자란 도시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세심함과 예민함 덕에 '제발트 논쟁'이라 불리는 취리히 대학 강연의 고상한 논점에 다가설 수 있었다. 성급하고 변덕스러웠으나 이제는 더없이 신중하고 솔직해진 갈증. 해소는 각자의 몫이다.


당장 이름을 두 개쯤 댈 수 없다고는 해도 제발트가 문학과 역사, 실체와 기억, 폭로와 침묵 사이에서 고민한 첫 번째 작가는 아닐 것이다. 작가와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늘 시대의 고발과 존재의 엄숙에 대해 고민해왔다는 걸 안다. 내 지난 여름은 독일의 파편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위대한 문학의 탄생을 갈망하고 또 쌓아온 모든 지식과 감정을 지우고 짓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이민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민을 갈 수도 없고 전쟁의 아픔을 배우기 위해 전쟁을 도발할 수도 없다. 겪지 못한 자들은 결국 책과 매체를 통해 간접적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누군가의 모든 상처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독일은 괴테, 토마스 만, 츠바이크, 슐링크, 제발트를 통해 언뜻 엿본 세계가 전부다. 모두 소설가이고, 역사책을 비롯해 전기나 평전 한 권 읽지 않았으니 소설가가 압축해놓거나 새로 그린 세계를 통해 독일을 배운 게 다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거쳐만 갔던 기억에 비추어도 그 도시와 나라에 대한 뿌리깊은 상처 때문에 오히려 문학에 대한 취향이 제약받을 정도다. 이 협소한 세계에 베른의 기적, 타인의 삶, 쉰들러 리스트, 굿바이 레닌, 몰락 등의 입때껏 봐온 독일영화 몇 편을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그간 생성된 독일에 대한 지식, 사유, 느낌이 변할 정도는 아니다. 유대인, 나치,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으로 굳혀진 독일 역사 때문인지 제발트의 문학이 그가 드러낸 사건이나 배경보다 문체나 느낌으로 읽히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가지고 가야 할 기억과 현실 사이의 어떤 괴리, 단호함과 절제 사이 어디쯤에서 실낱같은 끈을 붙잡고 매달리는 이들의 삶에 매혹된다. 훗날, 어느 젊은 날 불볕 더위 아래 아는 게 적어 느낌도 빈약했던 독서를 체화하거나 수정할 날도 오리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아우스터리츠]의 절반을 독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읽던 기억으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으나 2001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면서 기회를 놓쳐버린, 더이상은 그가 남겨놓은 글이 없을까, 이미 주어진 글이 흔적 전부일까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제발트의 소설 옆에. 



헨리 썰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네 명의 이민자들이 나오는 단편집 [이민자들]은 소설이라기보다 체험수기처럼 다가온다. 네 사람의 사연인데도 하나의 긴 옛날 얘기 같다. 이민의 삶이 가진 다양한 형태와 모습, 고통과 방황, 슬픔과 애처로움이 한데 스며들어 자살이라는 결말로 치닫는 동안 너무도 담담하고 적막해서 암담한 기분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인이 단순하지 않은 외부로부터 발생한 모두 아는 유명한 사건으로 인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고향이나 터전, 가족을 잃게 된 그들의 상처에 닿는다. 속단과 오해, 단절과 애수, 절망과 기억이 타오른다. 이들이 살아있는 이유 그리고 용기가 탕하고 울리는 총소리에 발맞추어 출발한 자들에게나 찾아오는 황홀한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운명이 질기디 질긴 애착과 만났을 때 낼 수 있는 비명과 통증이 여전히 문장 사이를 뛰어다니고 종이 바깥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카지미르 외삼촌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어둠의 경계야. 실제로 우리 뒤의 육지가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듯했고,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 한줄의 모래띠만이 물의 황무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I often come out here(여기 자주 온단다).' 외삼촌이 말했다. 'It makes me feel that I am a long away, though I never quite know from where(여기 오면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어디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외삼촌은 큰 바둑판무늬의 외투에서 사진기를 꺼내 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민자들, pp.112-113)


















그리고 제발트 이전을 살았던 츠바이크는 또 어떤가 하면, 같은 아픔을 가진 상처에서 쓰고 또 쓰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끝장낸다. 이런 가여운 사람.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독한 사람일까 가여운 사람일까. 하지만 죽음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말에나 남한, 북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 바다 속으로 뛰어든 [광장]의 이명훈과 충성을 다하고도 버림받은 소년이 투항 대신 기꺼이 죽음의 열차에 올라타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류환처럼 말이다. 츠바이크의 삶이 어떠했든 그의 작품은 사랑과 이별, 남녀 관계의 인간 심리를 탁월하게 그린다. [체스 이야기]에서는 유독 제발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지만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다. 1800년대의 유대인과 1900년대의 유대인이 같지 않을지라도 두 작가가 공유해온 유럽의 전쟁, 유대인, 이민자에 대한 감상은 비슷했던 걸로 보인다. 


교묘하고 영리해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란 걸 차치하고도 완전한 소설적 구성, 짜임새, 소재, 주제에 감탄하게 된다. 고도의 체스게임 안에 불안, 고립, 상처, 고통, 절망을 겪은 사내의 과거를 녹여내 복잡하고 유기적인 경험과 기억의 관계를 나치의 억압과 광기에 대항하는 한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도구로 활용한다. 체스판의 말이 된 듯한 남자, 체스로 인해 이미 다 살아버린 남자, 이야기 안팎에 존재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자 의지의 산물인 체스는 주어인 동시에 목적어, 목적어인 동시에 동사로 기능한다. 무에서도 혼란에서도 사람은 죽는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이승의 연옥쯤 되는 셈인가. 여느 게임이 그렇듯 치고 빠지고 밀고 당기는 전략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체스가 고난과 고비를 넘어 마침내 도달하리라 여겨지는 인생 여정과 닮았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각각 완전한 진공상태, 즉 외부세계로부터 애매모호하게 폐쇄된 각 방에 가둠으로써 채찍과 추위로 인해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 대신 내부로부터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우리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것입니다. 


도처에 그리고 끊임없이 한 사람 주위에 무만 있었을 뿐입니다. 완전히 무공간적, 무시간적 공허였지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에 따라 생각들도 이리저리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나 생각 자체는 사실 생각이 그렇게 실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생각은 맴돌며 무의미하게 자전하기 시작하거든요. 생각도 무를 견디지 못합니다. (체스 이야기, 중에서)


















불행해보이는 부모님, 자기 상처 안에 갇혀 술로 세월을 사는 아버지와 나름의 상처를 가졌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채로 아버지를 지키는 어머니.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 상처를 모조리 알게 된 소년이 묻는다. 왜 어머니는 아버지 곁을 지키셨어요, 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도 젊었을 때 얼마 동안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할 수도 있고, 이 사람과 살거나 저 사람과 살 수도 있지. 그러나 어느 날 너의 행동과 그 사람이 네 인생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때 가서 왜 너는 네 인생을 지키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질문이다.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36)


그리고 이렇게 떠난 여자도 있다.


마침내 그녀는 그를 떠났다. "나는 네 머리와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녀는 그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서 그의 가슴을 툭툭 쳤다. "이 안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내겐 너무 좁아."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41)



작품 '할례'를 추가해 복원한 슐링크의 작품집 [사랑의 도피]에서 '다른 남자'는 기시감이 짙다. 모든 소설이 미시감으로 읽히는 반기억력의 소유자에게 읽지 않은 작품에의 기시감이라니 새삼스러워서 이전 책을 도서관에서 읽었나 했더니 2009년은 학교에 다닐 때가 아니고 졸업한 후로 시립 도서관 두세 번 외엔 간 적이 없다. 고로 읽었을 리가 없는데 기억이 난다. 다른 소설과 비슷한가 싶긴 해도 그 다른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 한 도랑으로 빠졌다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추리. 이건 그저 간간이 흘러내리는 비스킷 찌꺼기 같은 느낌일 뿐, 작품집에 대한 희미하고 미미한 느낌으로 한 편의 리뷰를 쓰기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서 묵히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남기는커녕 읽는 순간의 작은 떨림조차도 모래처럼 빠져나가 이제는 정말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잡히는 게 없다. 소소하고 분산되고 가늠하기 쉽지 않은 균열의 절망만을 확인한다. 더이상 같은 말을 하긴 싫다. 시간이 가면 나이도 먹고 키는 안 크지만 나날이 자라는데 왜 맨날 같은 얘기를 해야 하나. 단편집을 어떻게 한 편의 통일성 있는 리뷰로 표현하란 말이냐, 이딴 웩웩거리는 감상문은 쓰기 싫다. 쓰면 쓰지 못 쓸 건 또 뭔가. 못 쓴다는 건 그야말로 안 써진다는 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나 소재가 주는 통일감, 해석의 방향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다. 다른 의미는 아니다. 



더 달려야 한다. 상처로부터 도망치든 원하는 것을 가지려 안달하든 방향만 정하면 나아갈 수 있다. 구하기 위해 펼쳐든 팔이나 버리기 위해 내민 팔에서는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행동의 직후를 봐야 알 수 있다. 책도 그렇다. 펼쳐야 알고 읽어야 알고 생각해야 안다. 써져야 쓰는 거다. 안 써지면 안쓰는 거다. 책구경이 취미라 할 수 있는 나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펼쳐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에 나를 구겨넣고 칵테일 섞듯 춤추고 나면 남을 건 남고 버려질 건 버려지겠지. 약간은 초연한 여름. 흐드러질 수록 옅어지는 욕심. 희미하게 강해지는 의지. 먹고 구역질 하고 또 먹는 폭식증 환자만큼 어리석은 행태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책에 관한 한 폭식환자가 되는 게 진리일 수 있다. 헷갈리는 진단, 애써도 어려운 예방, 궁극적 치료까지 한번에 해치우는 길인 양. 읽으면 읽을 수록 낮아지긴커녕 더 높아지고 더 늘어나기만 하는 책탑은 지난 계절에 이어 그대로인데 진저리나게 애처로운 이 계절은 여전히 온몸에 매달려 지치게 하고, 바라보는 나는 못견디게 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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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8-28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inmal ist keinmal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고 있는 요즘.
이 말의 어떤 모순적 울림이.. 제 삶에도, 이 포스팅의 책 목록에도, 아이리시스님의 글에도 묻어나 있는 것 같아...
차분해집니다.

아이리시스 2013-08-30 11:44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 책을 다시 읽고 계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저 역시 시간을 버티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시간이 너무 안가요. 동시에 빨리가고요. 서있을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느낌.

언젠가, 소설에 나오는 네 사람 중에 dreamout님은 누구와 가장 가까운 편인지 듣고 싶어요 :)





꿈꾸는섬 2013-08-29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와 좋은 글 읽고 가요. 잘 지내죠? 어느새 여름이 지나가고 있네요. ^^

아이리시스 2013-08-30 11:51   좋아요 0 | URL

여름이 얼른 가버리면 좋겠어요. 지나고 나면 이런 여름도 그리워지겠지만요. 꿈섬님이 그 자리에 계속 계신다는 느낌 이제는 들어서 오랜만이라도 서운하지 않아요.

즐거운 주말! (그러나 오늘은 금요일)


맥거핀 2013-08-2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의 과거의 전쟁, 그리고 60년대 사회변혁운동들에 대한 회고와 반성, 그리고 교훈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나오는 것 같아요. 특히 전쟁과 해서는 안될 짓들에 대한 끊임없는 언급과 반성은 집요해보일 정도입니다. 반면 우리의 과거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졌죠. 일본도 그렇고, 우리 내부에서도 말입니다. 현재에 문제가 되는 여러 사건들 역시 과거의 문제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과 여전히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배수아 번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래전에 사놓았는데 아직도 못읽고 있네요. 이상하게 집어들기가 좀 겁이 난달까. 슐링크의 <주말> 이건 어떤가요? 혹시 읽어보셨어요? 예전에 서평만 보고 와 진짜 괜찮겠다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까먹고 있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8-30 11:59   좋아요 0 | URL

전혀 관심 안갖다가 찾아봤더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자는 배수아가 아니던데 맥거핀님이 가진 책은 다른 걸까요? 번역이야 번역이고 녹록치 않은 문장들이고 스토리가 없어서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바로 그 점이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긴 하지만요. 과거사 청산을 시작하면 깨지는 건 국민이기도 할텐데요. 소수에게 보상해주기 위해 현시점에서의 세금이 사용되는 거니까.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졌어요. 국가범죄 청산이 무슨 간접세도 아니고.. 잘못은 그들이 하고 배상은 국민세금으로..

이건 많이 다른 얘기긴 하지만요.

슐링크는 [더 리더]만 샀습니다. 영 손이 안가지만요. <주말>이나 <귀향>은 언젠가 읽을 목록에.. 그 이후 한 권 더 나온 단편집은 도리도리.



맥거핀 2013-09-02 00:12   좋아요 0 | URL
아..제 착각입니다. (멍청이..ㅋㅋ) 배수아 씨가 번역한 게 아니라 예전에 가장 좋아하는 독일 작가 중에 하나라고 하더군요. 아..<더 리더>가 슐링크가 쓴 거였군요. 몰랐음.ㅋㅋ

아이리시스 2013-09-02 01:54   좋아요 0 | URL
그런거야 뭐. 저는 <삼십세>가 제 책이라고 한 적도 있어요. 저는 실비아 플라스잖아요. 이런 거에 비하면.. 잠깐 헷갈린 게 배수아 작가가 어떤 언어로 된 책을 번역했는지는 생각했는데 모르겠어서 한참 생각을 해봤어요. 화학과 나오신 자연대(공대?)생이었는데. 독어까지 잘하시면 이건 진짜 반칙이죠.

이제 저는 약간 멍청이 취소해드리려고 했는데(진짜예요) 스스로 인증한 겁니다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이걸 신판 나온 마당에 중고샵에 널려있는 구판을 사가지고 아..읽기 싫.. 영화도 한참 전에 봤고 말이죠.

Shining 2013-08-2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발트는 읽어본 적 없어요, 아이님 글 읽고나니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지 궁금해지네요.

저는 독일 작가하면 역시 헤르만 헤세.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첫사랑 같은 작가. 그리고 하인리히 뵐, 토마스 만, 파크리트 쥐스킨트(독일 작가 맞죠..?;;), 괴테, 카프카가 딱 떠오르는데 그러고 보니 대개 중,고등학생 때 읽은 작가들이네요;

그 다음엔 미하엘 엔데, 베른하르트 슐링크, 그리고 츠바이크! 가 있군요. 슈테판 츠바이크, 제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에요. 모든 작품이 다 좋은데, 구판이 많아서 개정판이나 복간 좀 내줬으면 좋겠어요ㅠ 문동에서 나온 저 책은 정말... 제가 외출할 때 가장 많이 들고 나가는 책 중 하난데 아, 반가워서 막 엉뚱한 얘기만 댓글에 달아요ㅎㅎㅎ

덧) 잠깐, 독일의 경우, 라는 건 다른 시리즈도 이어지는건가요? 유후! :^

아이리시스 2013-08-30 12:17   좋아요 0 | URL

페이퍼 쓸 때, 헤세나 카프카는 떠오르지도 않았어요. ^-^bb (엄지 두개..) 독일인은 아니지만 저는 릴케 좋아해요. 근데 쓸 정도는 아니예요.

신문에서 샐린저 작품집 출간예정 소식을 봤거든요. 남아있는 작품이 있으리란 생각도 못했는데. 츠바이크의 소설은 얼마나 더 있을까요. 더 있겠죠? Shining님 위해 다시 나와주길.. 누구한테 말해야 하죠?(히히)

외출할 때 저 책을 들고나가는 이유는 [낯선 여인의 편지] 때문입니까? (그럴 것 같아)


덧) 1년 후쯤 러시아의 경우, 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질 독서력의 소유자로서..!
아쉬운대로 그 이전에 아프리카라도 어떻게.. (보유하고 있는 텍스트, 지식 전무함)


Shining님, 저 내일 봉하마을 축제 갑니다. ^0^


Shining 2013-09-05 23:11   좋아요 0 | URL
오호. <아홉 가지 이야기> 좋게 읽은 기억은 나는데, 추가로 출간될 작품이 더 있군요. 하긴, 샐린저가 첫 작품이 대표작이 된 작가라고는 해도 그 후 작품 활동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요. 맞아요, 다시 나와주길ㅠㅠ 책이 너무 올드해서 소장 욕구가 떨어진다니까요-_ㅠ 문동처럼 깔끔한 디자인으로 나와주면 좋겠어요, 산도르 마라이 책처럼 견장본에 작은 책이어도 좋을 것 같고. 으으으, 좋겠다!

하하. 둘 다 정말 똑같이 좋아하지만, 아마 외출할 때 데려가는 이유는 낯선 여인의 편지, 때문이 맞는 것 같은데요? 츠바이크 특유의 서정성이 신파로 흐르지 않는 그 미묘함이 좋아요. 근데 체스 이야기, 도 진짜 멋진 소설. 엄지손가락이 더 있으면 모두 합쳐 올려주고 싶은, 진짜 좋아하는 소설들이에요 :)

봉하마을 잘 다녀왔어요?

아이리시스 2013-09-06 20:00   좋아요 0 | URL
봉하마을 얘기는 방명록에서 했고, 샐린저는 늘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다시 읽은 적은 없어요. 출간얘기는 원서얘기였으니 번역이 동시에 될지는 몰라도 기다리면 곧 나오겠죠?^-^

그..그..출판사에게 미안해서 다시 내주세요! 라고는 하기가 그렇고 저는 그래서 소장 안했어요.푸하하하. 저한테 있는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그리고 <초조한 마음>이고 다른 책은 없어요. Shining님 위해서 아무 출판사나 깔끔하게 내주세요, 제발요. 저 그저께 <밤으로의 여행> 샀답니다. 이건 반쯤 Shining님 덕분이에요. 미루다가 미루다가 <시간의 혼> 보다 삘 받은 거니까.

으으으, 네, 그래서 어떤 책 읽다보면 <체스 이야기> 엄청 많이 언급돼요. 그 구조와 상징성이 왜 그토록 많이 회자되는지 읽고나서야 명백하게 알 것 같아요. 읽기 전에도 늘 어떤 작품일까 궁금했었거든요. <낯선 여인의 편지>도 좋았구요. 좋아요.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