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ur Ros - Valtari [3단 에코 디지팩]
시규어 로스 (Sigur Ros) 노래 / 워너뮤직(팔로폰)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그들의 등장을 꼬박꼬박 기다렸다거나 기다려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왜인지도 모르게 기다리는 앨범 중 하나였고 나오면 습관처럼 듣게 됐고 새로 나오지 않는 동안은 이미 나와있는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다.

 

제정신과 제정신이 아닌 중간. 물론 잠에 곯아떨어지기 전의 새벽 상태를 얘기하는 건데, 나는 머리가 팽팽돌 때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겠다 싶으면 낮에는 편하게(여유롭게) 듣지 못하는 앨범을 틀어놓는다. 평소 시규어 로스 틀어놓고 있으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혼자 안드로메다로 간다. 좋은 뜻이기도 안좋은 듯이기도 한데, 지금은 안좋은 뜻이다. 왜냐면 그게 낮에는 별로 좋지 않다. 제정신이어야 현실을 직시해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실수 안하고 똘망똘망하게 살지, 아이슬란드나 북유럽이나 시규어 로스가 내 '현실'은 분명 아니잖아. 그래서 좀 참다가 밤에 틀었는데 뭐, 밤잠을 설쳤다. 심지어 틀어놓고 자서 아침에 깨어보니 아직도 이어폰으로 흐르고 있는 음악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닥터후가 된 기분. 닥터진의 송승헌, 옥탑방 왕세자의 왕세자, 인현왕후의 남자의 지현우가 된 기분. 여긴 어디고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시작부터 끝까지 꾸물꾸물하면서 시리고 차갑다. 대체 어디 이런 세상이 있나 싶어 유토피아, 샹그릴라를 찾아나서야할 것 같은 충동마저 느껴졌다. 세상에, 이건 꿈이야. 음악이 꿈이다.

 

며칠 전까진 이걸 들었다. 얘(어리니까)는 발음이 살짝 말리는 것마저도 귀엽다. 목소리 톤이 남자치고는 비교적 높은 것 같은데 고음에서 목소리가 커지는(보통 발성연습이 덜됐거나 노래 못할 때 나타나는) 일반인티(!)를 내서.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던 때부터 이미 일반인이 아니었는데도. 잘하는 게 많아 보였고, 갈 길을 명확히 아는 배우처럼 보였다. 이미지관리 플랜이 잘 짜여있는 정갈한 배우라는 이미지도 주지만, 한편으로 먼 느낌이기도 했는데 노래로 일반인티를 내다니. 드라마에 한 번도 삽입되지 않았는데(패션왕은 OST가 자그마치 일곱 번이나 나왔음) 종영한 후엔가 종영하던 주에 음원이 나왔다. OST 사서 듣고 결제하고 그러진 않지만 당시에는 종종 찾아보긴 했다. 자고로 OST는 작품 안에서 빛나는 법이니 더 말 안하고 패스.

 

 

다시 시규어 로스. 이 몽롱함과 신비로움과 아름다움. 얼마 전 소설 <조드>를 읽고나서(1권만 본 상태. 내가 그렇지!) 충동적으로 아는 사이트를 다 뒤져 몽골에 관한 (여행이든 뭐든) 다큐를 찾아냈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남의 사진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시아라는 게, 심지어 아이슬란드보다 더 낯설게 느껴진다는 게 신기해서 아주 오랫동안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그랬다. 웬만한 나라들(심지어 끔찍한 에티오피아나 폭탄 터지는 이라크 어느 마을도)도 가면 가는 거지 뭐, 하는 기분인데 이상하게도 몽골만은 이 곳이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왜?

 

이인화의 <하늘꽃>과 김형수의 <조드>가 지금 몽골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 옛날의 몽골을, 전설과 신화로 얘기하기 때문이다. 또 그런 소설들을 내가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의 것이기도 했던 땅이고, 한때 우리의 것을 공유했던 땅이며, 어쩌면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역사라 친근감이 드는건가 하면 그뿐만이 아니다. 몽골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또 어떠냐면, 사하라나 아라비아를 뛰어넘는 어떤 신비의 영역을 구축한다. 더 가까운 곳에, 더 북쪽에, 하물며 같은 인종에. 한마디로 동질감인가 하면 확인할 길이 완벽하지 않다. 모르겠다. 친구는 중앙아시아어과를 다니며 터키어와 또 뭐더라, 다른 한 가지 언어를 공부했다. 다음날 생각하길 우즈벡어였던 것 같다. 졸업 후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스탄불로 떠나거나 여느 전공처럼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진로를 택한다고 했다. 중앙아시아. 내게 중앙아시아는 딱 그 정도 상식을 지닌 곳이었고, 친구에게는 친구가 가이드를 하고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놓인 도시 정도일 것이다. 자기가 배운 언어에 대한 애증과 대학생활하며 꿈꿨던 어떤 풍경을 간직한 곳.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슴에 담고 꿈꾸는 건 너나 나나 같아, 수다떨던 이십대 초반이 떠오른다. 역사책 제일 앞 페이지에는 韓족으로서 한국,몽골,터키가 같은 혈통이라고 나온다. 쌍봉낙타가 있는 곳도 몽골, 고구려와 같은 기마민족인 것도 몽골, 고대 중국과 갖은 전쟁을 벌이며 서로 압박하며 살아남은 비슷한 역사를 지닌 것도 몽골. 내게 시규어 로스는 유럽의 몽골 같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 동떨어진 곳, 아무 것도 없는 곳, 갈 수 없는 곳, 가려는 생각조차 없는 곳,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곳, 추운 곳, 얼음으로 뒤덮인 곳,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 유토피아(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나 샹그릴라(신비롭고 아름다운 산골짜기나 그런 장소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며, 티베트어로 '푸른 달빛의 골짜기'라는 뜻)라고 해도 전혀 새로운 비유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비유(이)다.

 

허공의, 미지의, 공감각의, 초현실의, 잔향의, 울림의, 메아리의, 승리의, 장미. 반가워, 나와줘서. 조금은 두렵고 또 조금은 춥고 또 황홀한 밤을 선사해줘서 그리고 금세 사라져버리는 손길, 눈길, 발길 다 닿지 않는 곳에 있어줘서. 한결같이 혹은 새롭게. 여행지에서 들을 수도 있고, 들으며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시, 시규어 로스는 자체가 여행이다. 음악이 아니 음악 듣는 내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세계가 바로 여행이다. 일생에 몇 번, 만날 때마다 매번, 낯설어서 아름다운. 오늘 느낀 기시감이 내일 날이 밝기도 전에 이미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계속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정체모를 느낌이라니, 고맙다. 덕분에 내일이 기다려진다. 두렵지 않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티티카카 2012-06-0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 듣는 내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세계가 바로 여행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뮤직 비디오가 참 멋지더군요.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프로필 사진은 누구죠?

아이리시스 2012-06-03 02:06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은 이나영, 저는 실비아 플라스!

닉넴이 예뻐요. 그리고 반가워요. 이 밤에, 처음오신 분의 댓글이구나(!) 이러면서 행복해하고 있슴. 행복한 주말밤 되세요. 우리 음악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구요^^

댈러웨이 2012-06-0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글엔 자꾸 먼댓글을 달고 싶어지는데 엄청 참는거 알아요?
어제 계속 시규어 로스 들었어요.
오늘도 계속 들을거에요.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아이슬란드일거에요. 언제부터 그 추운 나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래의 두 음악, 아이님이랑 듣고 싶어요.

http://www.youtube.com/watch?v=9VwjiZmE_jA =>뷰욕이 피쳐링 했어요.
http://www.youtube.com/watch?v=mYIfiQlfaas => 맑고 몽환적이죠.
(성은 같지만 다른 뮤지션이에요.)

일요일 잘 보내요. ^^

아이리시스 2012-06-03 22:06   좋아요 0 | URL
나만 간 건 아니었어요 :) 안드로메다는 댈러웨이님도 같이 갔어..( '') 히히 저는 먼댓글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꾸 까먹어요! 근데 지금은 그 메뉴도 안드로메다로 가버렸어.. 지금 주소로 들어가서 듣고있는 중. 근데요, 세상에 뮤지션들은 왜 일케 많은 거예욧! 것도 제가 모르는..사실은 아는 게 극소수지만, 이야, 가야금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아.. 저 성이 아이슬란드 성이예요? 저는 이런 뮤지션이 있는지 몰랐어요. 오호호. 둘 다 좋네요^^ 맑고 몽환적.. 좀 더 다운되어 있는 듯해요. 시규어 로스는 진짜 이 세상 아닌 것 같았거든요. 잠결에..

얼마 전에 화산폭발했을 때 친구가 더블린까지 재가 날아온다며 아이슬란드 싫다고 했어요ㅋㅋㅋ 저는 그 나라는 이상하게 시규어 로스랑 화산재만.. 얼음도.. 추운 건 싫지만.. 꼭 가보고 싶어요. 꼭 가보겠다고 하지 않으면 지나쳐갈 수 없는 나라일 것 같아요.

오늘 일요일 거기 날씨 많이 추웠어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폭스8월버젯행사)(Last Tango in Paris)
20세기폭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금지된 사랑을 하고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원초적 감정을 건드리는,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격정적이고 예민하고 치열한 사랑과 욕망을 고도의 정밀함으로 표현해낸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멜로나 로맨스 영화를 잘 못본다. 잘 보고 싶은데 극장에서는 아예 고르질 않고 보다가 10분 안에 꺼버리는 게 대다수. 상큼, 발랄, 현실적 얘기들을 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고 결론 짓고도 자꾸 보려고 기웃거린다. 예전엔 프랑스 영화, 요즘은 소규모 유럽 영화들 대부분이 그런 것 같은데 그 중에서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는 <베티 블루 37.2>(1986) 다음으로 묘하게 아픈 영화다. 길을 잃은 욕망이 표류하는 것 같은 간절하면서도 치명적인 선이 있는데 스토리보다 이미지로 먼저 다가오는 감독이 그려내다보니 과하게 야한 영화로 포장된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에로틱한 면이 없지 않고 벗은 여자를 샤워시키는 장면은 후반부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선호되는 씬들이 섹스에 골몰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고독. 향할 수 없는 목표. 길 잃은 영혼. 그런 것들이 시대의 흐름창을 만나 폭발적으로 표류한다. 선호하는 감독이 없었는데 이제 알모도바르보다 빔 벤더스와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들이 더 황홀하게 느껴진다. 존재의 무거움을 감당하려고 혹은 감당하지 못해 서로가 서로에게 짐으로 얹혀야 하는, 그 모진 영혼들이 만나 결합하는 모든 장면이 파리의 퇴폐적 아름다움과 만나 야릇하고 살벌하게 진행된다. 이런 영화는 바로 그 야릇함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정말로 끝이다.

 

위태로움이 배제된 사랑은 권태를, 위험을 갈망하는 사랑은 파멸을 몰고 온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로 데뷔한 에바 그린의 엄마이자 배우인 마를렌 조베르는 마리아 슈나이더가 겨우 19세에 잔느 역을 맡은 후 육체적,정신적으로 모두 배우로서도 여자로서도 정체된 고통을 겪은 점을 들면서 에바 그린의 첫 작품을 반대했다고 한다. 내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딸이 노출과 고독의 강도가 강한 작품을 한 후 찾아올 공허를 걱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잘 해냈고 데뷔작은 큰 반향을 일으켜서 지금까지도 할리우드와 유럽 소규모 영화를 넘나들며 고공행진하는 요염한 배우가 되었다. 외모는 그때보다 못해진 것 같지만 이 작품이 첫 주연작이자 대표작이던 마리아 슈나이더에 비하면 에바 그린의 필모그래피는 꽤 단단하고 발전 가능성이 열려있다. 베르톨루치 감독이 스토리보다는 영상미에 치중하는 바람에 지독한 탐미주의자로만 꼽히는 게 아쉽다. 나는 아무래도 이제 몇몇 감독들을 완전히 편애하기로 한 듯한데 아주 좋아하는 것은 동시에 아주 싫어지기도 쉬운 지점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일 뿐이라고만 밝혀두어야겠다. 어느 시점의 나는 이 영화들에 열광했다고, 어느 감독들의 특정 시선에 기댄 이미지들을 간절히 바랐다고 뭐 그렇게 기억 속에 묻어가는 어떤 것으로.

 

다시 <대부> 시리즈를 학습했다. 봤다기 보다 학습이 어울린다. 다시 볼 경우에 생기는 어떤 특별한 시선을 나로서는 부정하기 힘들고(물론 의도치 않게 훌쩍 다가서는 지점까지 부정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지금은 말론 브란도를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느끼고 싶고 푹 빠지고 싶어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의 태생에 59년이란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픈 어떤 시간과 감정이 소중해서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다. 배우 황정민이 장례식장의 슬픔 속에 앉아서조차 다음에 연기할 때 이 감정, 이 느낌을 잊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가 징그럽게 느껴졌다던 일화에 덧붙인 다른 사람의 시각은 그는 진정한 배우가 맞구나, 하는 것이었단다. 오래 전에는 어제 쓴 글이 다음 날 읽어도 창피하고 부끄러워 늘 삭제버튼을 밥먹듯이 눌렀다. 어린 마음이 조금 유치할 수도 있고, 못 가진 걸 숨기기 위해 센 척 했을 수도 있고,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비이성적임이 부끄러워 울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삭제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 영화에 스며든 외로움과 고독,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이 점점 닫혀가는 것, 익명 뒤에 숨어 자꾸만 감춰야 하는 사랑, 다 까발림으로서 놓쳐버릴 것만 같은 상대에 대한 불안, 만나지 못하는 마음과 의미를 상실한 섹스, 쓸쓸한 파리 그리고 현대인들. 모든 것들을 원한다. 혹은 사랑한다. 다가가는 대신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를 이제는 이해한다. 아무 것도 없다. 지독한 눈빛과 광기어린 쓸쓸함 만을 제자리에 놓은 채, 대배우 말론 브란도는, 파리는, 그렇게 떠났다. 다시 꺼내볼 날은 훨씬 훗날이었으면 좋겠다.

 

나, 누군가를 소유하지도, 누군가에게 소유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을 안을 수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을 테지만 아무 것도 될 수 없을 테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 사실 때문에 하루하루를 아주 고달프게 살아서 언젠가 나를 누르고 지나갈 그 기차 앞에 설 날이 오게 될 지도. 존재를 혁명하며 섹슈얼리즘을 간절히 원하며.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2-05-3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반복되는 행위들 속에서 어떤 고독감과 허무감이 증폭되는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볼 때는 말씀하신대로 꽤 영상미가 있는 편이라, 그런 생각을 못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뭐 그런거죠. 저렇게 외롭다고 섹스를 하고 있는 저들이 외로운걸까, 텅빈 방에서 홀로 이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외로운걸까,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다면서 화면은 더럽게 이쁘네, 젠장..뭐 그런 거.

참 생각해보면 나이 70이 넘은 이 분도 올해 영화를 하나 내놓으시고 칸도 다녀가셨으니, 놀라운 할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나 더 놀라운 사실은 올해 90세가 된 알랭 레네도 올해 영화를 내놓고 칸에 출품했다는 사실..90이 되신 분이 도대체 어떤 영화를 내놓으셨을지 되게 궁금하지 않아요? (나만 그러나..)

아이리시스 2012-06-02 14:34   좋아요 0 | URL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쌍벽을 이루는 우울함이랄까, 사실 <베티블루> 보면서는 우울하진 않았는데요.. 파란 페인트 바른 집에서 살고싶다는 생각만 했었어요. 하하. 이 영화 혼자 보면 정말 그런 기분 들어요. 프랑스 영화들은 대부분 그렇던데.. 영상미가 필터 탓이 아니라 배경 탓일까요. 아직도 모르겠..

90세.. 알랭 레네요..?(찾아봄) 대단하죠.(저도 궁금함) 예전엔 노장감독이라면 고리타분할 거란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몇 번 확인한 후에는 나는 지금도 살기가 귀찮은데(!) 70..90.. 저렇게 오랫동안 살면 대체 뭘 하고 살아야 되나 싶어요.(응?)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31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고독은 파리에서 느껴야 제맛...^^
언제 다시 가서 그 고독을 맛볼 수 있을까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려나....

아이리시스 2012-06-02 14:37   좋아요 0 | URL
원래는 올해 두오모(피렌체) 가야하는 계획표인데 꼬박꼬박 넣는 저축보험 대출을 며칠 전에도 받았다는.. 넣고 쓰고 넣고 쓰고 하는 일의 연속이에요ㅠㅠ 히히히 현맘님은 훌쩍 가심 되죠^^

나 파리 다녀올게요^^(응?)

이렇게 말하는 날이 오겠죠.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03 01:34   좋아요 0 | URL
나 피렌체 좀 다녀올게요.
그래요? 난 파리 가요.
그럼 잘 다녀와요.

이렇게 일상적으로다가, 평범하게 대화하면 정말 좋겠다. 그죠?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6-03 02:10   좋아요 0 | URL
현맘님 밤에 뭐하시는 거예요?!(라고 묻고, 너는............?!)

나 내일 창원 가요.
잘 다녀오라고 해줘요.(나름 장거리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03 21:39   좋아요 0 | URL
창원 잘 다녀왔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창원도 참 심리적으로 먼데, 뭐...파리는 더하네요..ㅋㅋㅋ)

아이리시스 2012-06-03 23:00   좋아요 0 | URL
저는 비행기 타고 열세시간 영국갈 때 설렘보다는 좀 많이 무서웠거든요.. 몽골 땅 지나갈 때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지겹고 두렵고 발작 일으킬 것 같았어요. 하늘에서 열세시간이나 간다는 게.. 그리고 비행기..나이 먹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잘 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실감한 것 같아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비행기 열시간..헐..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요, 현맘님ㅠㅠ 그래도 지금 누가 가라면 당장 가겠어요!(벗으라면 벗겠어요, 그 심정ㅎㅎ)

음.. 창원 멀어요. 멀고 피곤하고 어쨌든 다 지나가서 후련해요. 제가 다 피곤해요. 현맘님은 뭐하셨을까요?! 저 지금 '체리마루' 좀 퍼먹을라구요. 장동건이 나오고 있는데 리모컨 뺏기고 송승헌 보는 엄마한테 점령당했어요! 이런..아이스크림이나 퍼먹죠 뭐ㅎㅎ
 
플래쉬댄스 - 할인행사
애드리안 라인 감독, 제니퍼 빌즈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춤은 꿈이고 이유다. 희열도 희망도 열망도 절망도 좌절도 말해야 하는데 젊은 날의 초상에는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늘 엎치락뒤치락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막힘없이 술술 말할 수도 서술할 수도 있다. 말과 행위의 괴리는 놀랍도록 부풀어오른다. 꿈에 대해 말할라치면 늘 저지당한다. 죽을 때까지 꿈꾸며 살아야 하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꿈과 청춘이 향하는 곳은 늘 한정되어 있는 시절일 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허락되지 않은 꿈꾸기가 점점 창피하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어간다. 모두에게 주어진 형벌처럼 보편적이라 딱히 억울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하얀 페이지를 열어놓고 써야 할 말을 몰라 당황한다. 오프닝부터 음악이 참 좋아서 흠뻑 빠져들었다가 끝나자마자 파일을 찾아서 아이팟에 넣고 재생시켰다. 뮤지컬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도 하는데 중간에 나오는 긴 댄스장면은 볼 때는 몰입했으면서 스토리 방해요소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뒤로 훔쳐보고 앞에서 욕하는 배드걸 굿걸

 

 

 

 

<물랑루즈>를 고3 수능시험 후 당시 단짝이던 짝꿍과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꼈고, <시카고>를 스물 하나 참 예쁠 때 단조로운 일상을 극복해줄 어떤 열정으로 받아들였고, <드림걸즈>는 비욘세보다 제니퍼 허드슨의 꿈이 이뤄지길 원하며 닳도록 OST를 재생시켰다. 그때가 막 스물 다섯이었다. 그동안 시간이 정지되었다. 꿈도 역사처럼 진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렌트>, <바흐 이전의 침묵>, <사랑은 비를 타고>, <사운드 오브 뮤직>, <피나>, <오페라의 유령>, <하이스쿨 뮤지컬>, <벨벳 골드마인>, <헤드윅>은 봤거나 앞으로 볼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의 장르가 뮤지컬이라니 바흐, 클래식도 뮤지컬로 가능한가. 우와 신기해. 이 영화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카페>가 연관검색어에 뜬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좋아해서 엄청 기대된다. 왜 모르고 있었지 보다는 어째서 관심갖지 않고 있었지 말하고 싶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존재하는 것이 내 앞에 오는 것과 받아들이는 과정은 본능,직감으로도 가능하지만 우연,필연인 경우도 많다. 피츠버그의 제철공장 용접공 알렉스는 밤에 나이트클럽 플로어 댄스로 일한다. 시간을 팔아 돈을 사고, 돈으로 꿈을 꾸는 것 또한 자본이 지배하는 고단한 사회의 일부일 터, 풋풋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춤과 무용으로 세상을 사로잡으리란 꿈을 안고 언젠가 댄서가 되기를 원한다. 그녀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밤에 꾸는 꿈과 미래를 향한 열정이 있기에 낮의 힘겨운 노동을 즐기듯 견딘다. 견디는 것조차 즐거울 수 있다. 그때 사장 닉이 다가온다. 언제 어디서나 사장님이 문제군. 드라마 <패션왕>의 마지막회는 좌절과 경악의 도가니였는데, 열아홉 번의 설렘과 부푼 꿈이 한 번의 삽질과 실수와 겉멋으로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정해진 결말(미국에서 생긴 일로 결말짓는 건 방송 전 뉴욕 로케이션할 때 찍어왔을테니)에 끼워맞춰 가는 미래가 이 시대 이 청춘(을 비롯한 대다수 노동자와 서민)을 한없이 갉아먹는다. '넌 다른 사람이 벌어다 주지만! 난 내가 벌어야 된다'거나 '너는 사랑만 해도 되지만! 나는 일도 해야 된다'던 강영걸(유아인)의 대사는 이 사회의 치자와 피치자의 근본을 뼈저리게 돌아보게 했다. '그러니까 사랑타령 그만해'라는 말에서 먹고살기 어려우면 사랑조차 철저히 짓밟힐 수 있는 가치라는 사실을 느낀 것도 묘하게 아팠다.

 

춤추는 용접공 알렉스는 순수와 미모와 재간으로 닉을 사로잡는다. 그녀가 뿜어내는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건만, 닉과 사랑에 빠져 그의 도움을 받아 훨훨 날아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은 더 큰 행운이다. 축복과 행운은 연타로 온다. 알렉스가 사랑과 꿈을 이룬 건 왕자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낮과 밤 모두를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학습시키는 기분좋은 한 편의 춤이 엔딩으로선 더없이 황홀하다. 꿈과 청춘은 진행중일 때 가장 빛나는 가치임은 틀림없다. 꿈은 이뤄지고 나면 더이상 꿈이 아니고, 꿈이 이뤄지지 못하면 더 아프지만 또 노력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에서 축복이기도 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가슴을 부여잡았다. 젊음과 음악은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대립각은 일상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다 지극히 사소하기까지 해서 야속한 경우가 많다. '재물'보다 '추억'이 <패션왕>의 이가영(신세경)이 정재혁(이제훈) 보다 강영걸(유아인)을 사랑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라면, 강영걸의 입에서 '내가 돈이 없니, 뭐가 없니'라거나 '말만 해, 니가 원하는 거 내가 다 해줄게'라는 대사는 나오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그 말이 나온 순간 이 남자가 지금껏 세상에 당하고 또 굴복하고 극복하려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즉 캐릭터의 타당성이 모조리 몰락한다는 어느 방송평론가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이 곧 사람이었다. 가진 것 없는 이가 생애 처음으로 모든 것을 가지게 됐을 때,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그게 더 반전드라마다.

 

패션,청춘,사랑의 코드를 버젓이 내걸고 화려한 걸음으로 모두가 잃은 꿈을 찾아줄 것만 같았던 이 드라마가 진즉에 패션을 버리고, 끝에 비로소 청춘과 사랑 거기다 가졌던 인간성마저 버리고 세상에서조차 버림받는 것을 목격하자 더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게 없어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제목도, 내용도 뻔한 책이 업계에서도 놀랄 만큼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뻔하지만 궁금한 것과 호기심, 듣고 싶은 말을 듣는 안도감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것과 꿈을 짓밟히는 건 동시에 있을 수도 있고, 한 번에 하나씩만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꿈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위로를 듣고 싶은 것이다. 돈도 잃고 사랑 앞에 당당하지 못해 술 취해 서럽게 울다지쳐 쓰러진 어떤 남자를 손잡아 일으켜 세우지는 못할 망정, 총으로 쏴버리는 게 처음부터 예정되었더라면 한동안 몰려오던 당혹스러움을 기이함으로 돌리고 말았을 수도 있겠다.

 

알렉스는 댄스 오디션에 참가한 후 닉이 몰래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알고는 화를 내며 싸운다. 닉은 알렉스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강영걸은 이가영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하고 또 해주고 싶어하지만 여자들에게 단순히 당신이 이룬 것을 받기만 하는 것은 꿈이 아니다. 꿈은 내 힘으로 이뤘을 때만 의미있다는 사실에 반발하는 순간 세상은 청춘을 내동댕이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타인에게 편승해 이루는 꿈은 꿈이 아니라 재물에의 욕심이고, 그래서 다 가졌을 때 사람은 항상 변하거나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되거나 한다. 청춘영화에는 거의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뛰는 가슴과 미친 열정, 올바른 방향과 제대로된 질주가 필요할 뿐이다. 어떤 식으로 위로한대도 위로를 받는 그들 자신이 받아야 할 바로 그 위로의 질을 가장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다만 기적이 있다는, 꿈을 버리면 안된다는 뻔한 말이 가장 필요하다. 그들에게도 실패와 성공과 꿈꿀 자유에 대한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일 무너져도 오늘은 집을 짓고 들어가 앉고 싶고, 내일 죽어도 오늘은 절정을 선물할 길고 황홀한 섹스를 하고 싶고,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딱 내일이 오기 전까지 살아갈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것만으로 청춘을 위로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가. 이렇게 옛날 영화 한 편이면 괜찮은 것을. 절제할 때 절제하고 폭발할 때 폭발하는 조화로운 음악 한 곡과 춤 사위 한 판이면 다 괜찮아질 것을.

 

 

 

 

아메리칸 드림이 별건가. 아메리카에서 원하고 바라는 일 할 수 있으면 그게 아메리칸 드림이지! 오래된 영화의 촌스럽고 일직선 방향의 플롯마저 멋있다. 때로는 정주행이 역주행보다 더 감동적이기도 한 법. 근데 춤출 때마다 엉덩이,다리부분을 지나치게 클로즈업하는 게 보는 내내 불편하기는 했는데, 이것도 배드걸 굿걸 영향 받은 내 구질구질한 편견 때문인지 아님 감독취향인지. 필모그래피가 이런 거 보니까 취향이군.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2-05-24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아침!! 아이리시스님^^
플래쉬댄스, 정말 오래 전 보았던 영화, 새롭네요^^
근데 그 당시에는 감독을 몰랐는데 애드리안 라인 감독이었군요.
제리미 아이언스가 험버트로 나오는 롤리타와 나인앤하프 위크, 마이클 더글라스 나오는 저 영화 ..
역시 취향이었군요, 그분.ㅎㅎ
그나저나 춤추고 싶어요, 아이님^^

아이리시스 2012-05-24 22:12   좋아요 0 | URL
네, 감독님 취향ㅎㅎ

음, 프레이야님하고 현맘님하고 두분이서 춤 배우시면 될 것 같아요. 춤은 재즈댄스,발레,한국무용할 것 없이 참 로망이에요. 요즘은 아이돌들마저도ㅠㅠ 부러워요. 누가 반대편에서 춤추면 같은 방향이 아니라서 따라하지를 못하겠어요 엉엉.

이 영화 유명했군요!

자목련 2012-05-2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하는 것이 내 앞에 오는 것과 받아들이는 과정은 본능,직감으로도 가능하지만 우연,필연인 경우도 많다 - 이 문장 참 좋아요.

익숙하고 경쾌한 리듬이 흐린 하늘을 잊게 하네요.
신나게 춤추고 나면 모든 게 달라질 것만 같은, 그런^^

아이리시스 2012-05-24 22:23   좋아요 0 | URL
날씨가 오늘도 많이 흐렸어요. 뭐 신나는 일이 별로 없네요, 자목련님은요? 재미난 일 있으심 저한테 자랑해주세요ㅠ 고민상담도 해주세요ㅠ 심심해요ㅠ

아무리 좋은 게 눈 앞에 와 있어도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다시 보니까 좋다고 해주셔서 더 좋아진 것 같은데요 히히히. 팔랑거리는 저 치마와 녹색신발이 우아한 춤과 어울리는 예쁜 옷차림 같아요. 어울려요^^

춤을 배우기에 저는 너무 수줍어요ㅠㅠ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2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래쉬댄스.
이거 개봉하고 돌풍을 일으켰을 때, 제가 우리 딸 나이였거든요.
그때 뮤지컬 영화에 꽂혀 한때 <그리스>랑 <플래쉬 댄스>에 열광한 사춘기를...
이 영화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영화 관련 잡지들을 끼고 살았었어요. 이걸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어쩌면 나처럼 고지식하고 융통성없고 재미없는 사람 마음 속에 일탈과 욕망에 대한 열정이 더 많을지도 몰라요.
말도 없고 숫기도 없고 모범생이었던 어렸을 적 진짜 내 꿈은 <피겨스케이팅 선수>나 <뮤지컬 가수>였으니까..ㅎㅎ
지금도 몸치에 음치인데도 여전히 활동적이고 액티브한 누군가를 보면 설레요.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한참 봄앓이하던 지난 달엔 춤을 배워볼까 했다니까요. 좀 움직이고 싶어요.

아이리시스 2012-05-24 22:32   좋아요 0 | URL
안녕, 현맘님. 오랜만!

이 영화가 그렇게 유명했어요? 평점이 좀 높길래 의아해하면서 그래도 볼만은 하겠지 했는데 오프닝 음악이 바그다드 카페의 콜링 유를 능가하는 거예요. 물론 화면빨은 아니지만ㅋㅋ 이 영화 태어난 연도가 저랑 같아요. 동갑이에요ㅎㅎ

아..현맘님 김연아가 되고 싶었구나? 뮤지컬도 멋있어요! 우아..저는 그런 꿈 꿔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어릴 적에 외교관이 되고 싶었는데 외교관이 공무원이란 걸 몰랐을 때의 일이에요ㅠㅠ 유창한 언어도 멋있고 외국에서 자국을 위해 일하는 것도 멋있어서요. 그 이외에는 꿈이라기 보다는 배우들이 부러웠던 것 같아요. 역할 속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과 그걸 핑계로 이것저것 배우고 이나라 저나라 다니는 게 그저 좋아보여서..( '') 근데 패션잡지 에디터와 여행사 직원도 가능하잖아요. 직업의 세계는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

현맘님 저는 몸치에다 운동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춤은 그저 로망에 불과해요ㅠㅠ 현맘님은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술을 강의하시는 분이 고지식하고 융통성없고 재미없다니 이건 불공평해요!! 스스로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저를 두 번 죽이는 거예요! 저도 활동적이진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싶다기 보다는 그런 사람 보면 신기하고 부럽고 그런 것 같아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25 22:23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그게 아이러니예요. 디자인하는 사람이 고지식하고 융통성없고 재미없다는 것이 가능하다니까요..ㅎㅎㅎ
활동적인걸 동경하면서도 절대 움직이기 싫어해요. 음악이 나오면 정말 리듬을 타고 싶어 고개가 어깨가 들썩이는데 진짜 박치에 음치. 그래서 더 로망인가봐요.

외교관이 꿈이었다니. 참 똘망똘망한 어린이였어요.^^ 지금은 늦은 꿈인걸까요?

아이리시스 2012-05-26 21:12   좋아요 0 | URL
푸하하 어찌나 똘망똘망했는지..( '') 정말로 외교관 이렇게 썼었는지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저건 마음속 꿈이고 내가 공부 못하는 거 내가 알고부터는 마음 속으로 생각만 했어요. 뭐..아주 늦진 않았는데요. 토익을 좀 하고 외무고시를 통과하면(!) 될 수 있어요. 제2외국어도 하나쯤 하고요. 제 머리와 끈기로는 한 10년 걸리겠어요.(진짜 끔찍하다..)

현맘님, 클럽가서 춤추는 건 어떠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흐흠ㅋㅋㅋ 괜찮아요, 춤이 뭐 대수라고.. 우리에겐 현맘님 디자인이 있어요. 현맘님이 그림 그리시는 거 카페 탁자 반대편에 앉아서 보는 게 소원이에요. 그림=디자인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댈러웨이 2012-05-2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댄싱 시리즈 영화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가물가물요.
이 감독이 그 감독이군요. ㅎㅎㅎ
그런데 알렉스 그러니까 퐁네프가 생각나는 건 뭔지... ( ")

청춘은 너무 빨리져요. 아무것도 모를 때 그 시절 다 보내 버리고, 후두둑 목련 지듯 툭, 통째로.

아이님, 기다렸어요!
아침에 다녀 갔는데 댓글은 이제 남기는 심정, 알죠?

아이리시스 2012-05-24 22:34   좋아요 0 | URL
ㅎㅎ댈러웨이님, 알렉스 하니까 퐁네프가 왜 생각납니까?( '')
거기서 알렉스라는 남자와 퐁네프로 여행가신 적 있습니까,라고 묻다가 갑자기 거기 주인공 이름이 알렉스인 거 생각난다..ㅠㅠ 그 영화가 좋아서 파리에 내리자마자 퐁네프 다리에 갔었어요^^

알렉스는 보통 남자이름인데, 가수도 그렇고.. 여기서 여자이름이라서 적응이 안됐어요.하하. 뭐지..이 선입견은..

네!
그 심정 알겠어요.호호호.^^

댈러웨이 2012-05-25 16:45   좋아요 0 | URL
>>>알렉스라는 남자와 퐁네프로 여행가신 적 있습니까>>> ㅎㅎㅎ 어쩌라는 겁니까 이건? 엄청 웃다 갑니다요.

아이리시스 2012-05-26 21:08   좋아요 0 | URL
퐁네프는 남자랑 가겠죠? 댈러웨이님 갔다면서요.. 들킨거죠, 저한테ㅋㅋㅋ

댈러웨이 2012-05-29 15:09   좋아요 0 | URL
알렉산더(남)->알렉스/알렉산드리아(여)->알렉스
보통 이름이 저렇게 길어 버리면 짧게 줄여서 말하는데, 알렉스 경우도 그 경우일거에요.
예) 리차드->딕(--;;) 갑자기 생각나는게 저것밖에 없네요. --;;

추천놀이 좋은데 아이님만 해줄 것요. 전 읽은게 없어서.ㅎㅎㅎ

*아이님 여기다 댓글달지마요. ^^

아이리시스 2012-05-29 16:14   좋아요 0 | URL
아......(머리 돌아가는 소리), 댈러웨이님 짱^^
근데 리차드는 왜 딕입니까?(라고 묻는다, 말 안듣고 댓글도 달고, 히히히)

맥거핀 2012-05-24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드리언 라인은 사춘기 중고딩 남학생들에게는 참 좋은 감독(...)이었습니다.^^ 올려놓으신 아이린 카라 노래 들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잘 읽었어요. 전주 나올 때부터 촌티가 물씬물씬 나는데, 저는 이런 노래 좋아요.ㅋ(예를 들어 AHA의 'Take On Me' 같은 거..) 음..패션왕 결말로 말이 많던데, 충격에서 잘 빠져나오고 계신지..

아이리시스 2012-05-25 00: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 좋아요, 촌티까지 어쩔 수는 없지만 좋기는 좋아요. 저도 이런 노래 좋아요. 뮤지컬곡 좋아요. 요즘 옛날 영화가 좋아요.

세상에, 열아홉 번을 봤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은 엔딩이었어요ㅠㅠ 신세경이 죽였을 수도 있다고 네티즌들이 추론할 때 정말로 작가 만나러 가고 싶..( '') 저는 늘 드라마는 드라마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책은 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쿨(?)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왜 게시판에 난리를 치는지 이해가 가요. 저분들 부부작가더라고요. 감이 확 떨어진 게 아닌가..

마녀고양이 2012-05-2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래쉬 댄스의 여주인공 너무 이쁘잖아요, 그런데 다음 영화부터는 별루 안 좋아서... ㅠㅠ
그리고 여주인공이 직접 춤췄다고 첨에 난리였는데, 대역으로 밝혀져서 여주 맡았던 배우가 급 하강했죠...

코요테 어글리두 무지 이쁘잖아요. 그런데
거기 나오는 남주나 여주나 그 다음 작품은 별게 없어서, 서운해요.

나두, 이런 영화 넘 좋아해요, 특히 알렉스의 사슴같은 눈망울,
현맘님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엄청 좋아해서, dvd 가지고 몇번이나 봤는데!

아이리시스 2012-05-29 16:11   좋아요 0 | URL
네!네! 저는 코요테 어글리가 엄청 좋아요. 뮤지컬영화 중에서 제일 제 스타일이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는데.. <그리스>는 더 오래된 거라 거부감이 좀 있었는데 그렇잖아도 현맘님 말씀하실 때부터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마고님은 정말 좋은 건 계속 보시는 것 같아요. 그만큼 좋아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저는 좋아보여요. 저는 좀 싫증 잘 내서 보고 또 보는 건 드문 편이어서요..

최근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다시 보고 리뷰 썼는데요. 그..(또 까먹음) 여주인공도 그랬잖아요. 거의 첫 주연작이자 대표작. 그때가 20대 초반이었는데.. 서운하고 아쉽고 그래요..

아.. 그 춤이 직접 춘 춤이 아니라니.........ㅠㅠ 배우 자존심은 배우가 지키는 게, 블랙스완처럼! (근데 이 영화는 아직도 못 봤어요..)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를 두드리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정식 암기는 수면 중에 이뤄진다던 강사의 말은 실현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잠은 더이상 죄책감을 실어나르진 않았다. 그때 만났다. <고령화 가족>은 읽었는데 늘 이 책이 명치에 걸려 있어서 최근작을 읽기 위해 먼저 읽었다. 폭발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현실로 꿈으로 삶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갉아먹었다. 빠져들기 쉬웠기에 나오기도 쉬웠고, 다시 들어가기도 쉬웠다. 시도때도 없이 먹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짜릿했다. 8년째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소설이 이것 뿐인 건 아니었다. 장식용이었던 시절, '스토리'는 무작정 매력적인 소설의 요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읽지 않았다. '폭발하는 힘'이나 '이야기의 끊임없는 향연'이란 뻔한 수식어 말고 다른 말로 설명할 수는 없나 싶던 우려는 금세 반감되었다. 내 영역이 아닌 곳을 넘본 것 같은 민망함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한 줌 쥐고 머리로 걸러 손으로 타이핑 했을까. 나는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던 모든 이야기를 지웠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누구보다 잘 안다.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은 사실 쓸 거리가 없어 쓰지 '못하는' 거란 거. 그만큼 표현력은 중요하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가 동시에 충족 되어야 가능한 영역이 소설이고, 서사력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봉이다. 물론 이야기만 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인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문학인들이 고민해야 할테지만 독자로 존재하는 동안만큼은 골치 아픈 판단을 피해갈 수 있어 좋다. 물론 판단을 종용하는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흡인력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정작 이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앞서 출발한 모든 소설의 서사 앞에 우뚝 섰다. 어디서 본 듯도 하고 들어본 듯도 하며 약간 신파 같고 또 뻔한 여자의 일생이 담겨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우리 모두의 생활이고 삶이다. 신화이자 전설이고 현실이자 판타지다. 모든 영역에서 이처럼 또렷하고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벽돌공장의 신화는 모든 이들의 삶을 그러모은다. 그들은 살아왔지만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소설의 '실용성'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일테지만 소설이 실용적이길 원하는 사람에게 <고래>를 들이밀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어,하는 건 문학도로서 아쉽긴 할 것이다.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가깝고도 먼 세상을 묘사한 이런 장면이 고스란히 상상돼서 좋다. 이 소설은 정말로 차라리 영화를 닮았다.

 

그리고 바다를 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모두 끝나고 눈앞엔 아득한 고요가 펼쳐져 있었다. 곧 울음이 쏟아질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옆에 있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해의 섬들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멀리서 아른거렸고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엔 끊임없이 파도가 부딪쳐 포말이 일었다. 무심하게 고깃배 위를 오가며 끼룩대던 갈매기들이 어느샌가 쏜살같이 해수면으로 날아들어 물고기를 낚아올리기도 했다. (p.49)

 

읽던 날은 하늘에서 강아지가 떨어진 날이었다. 독수리 먹잇감이 될 뻔하다 땅으로 낙하한 귀여운 강아지는 좋은 주인의 품에 날아들어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 정도가 어울린다. 금복과 춘희와 이 특이한 모녀를 둘러싸거나 둘러쌌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 만찬으로 초대되려면 말이다. 나보다는 부모님과의 나이차가 더 세기 빠른 이 훈남 작가의 프로필 사진과 약간은 촌스러운 시대에 대한 삶의 수다.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자꾸만 다음 페이지로 빨려들어 얼른 끝을 보고 싶었다. 춘희와 금복과 쌍둥이자매와 노파와 애꾸눈 딸. 남자보다는 여자의 삶에 눈길이 더 갔다. 그리고 춘희와 점보(코끼리)의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에 더 눈물 지었다. 이 시대, 소설은 얼만큼 위로할 수 있나. 얼만큼 소통할 수 있나. 얼만큼 빠져들 수 있나. 문학을 배운 적이 없고 소설가를 꿈꾼 적이 없다던 등단이 늦은 어느 작가의 첫 장편소설 이후 8년. 한국문학의 길이 늘 새로웠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한낱 출판사의 작품상 하나가 문단 전체를 뒤집을 순 없을 터, 여전히 고민하고 지리멸렬하며 난삽하고 재미없고 진부하고 뻔하고 미숙하다. 훌륭한 한국문단의 작가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독자들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기에 만족할 만큼 작품수가 적은 것도 사실이다.

 

의도적으로 주어(나)와 뻔한 수식어(아름다운 꽃)와 뻔한 연결어를 걷어내야겠다는 생각을 수년 전부터 했지만 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결심한 것보다 더 빈번하게 써왔다. 고민의 길에는 정답이 없었다. 시간이 변화를 예고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좋다. 3대로 흘러내려오는 노파-금복-춘희의 삶이, 토속 역사소설처럼 깔리는 배경에도 굴하지 않고 전복해버리는 시공간적 배경, 환상적 수다가 작렬하는 멈춤없고 끝없는 이야기가, 그녀들이 늘 조금 넉살스럽고 단단하고 헤프고 고풍스럽지 않은 것이 전부 다 좋다.

 

그날 이후,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된 대신 그의 눈앞엔 기억 속에 담겨 있는 풍경들이 아무 때고, 순서도 없이 불규칙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그가 기억할 수 있는 먼 과거에서부터 눈이 멀기 전까지의 긴 시간에 걸쳐 그의 인생을 모두 기록한 사진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엔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년희 풍경과 전쟁터에서 목격한 온갖 끔찍한 장면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벽돌공장을 다닐 때 보았던 낯선 이국의 풍경들, 그리고 떠오를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미어지는 가족들의 얼굴, 또한 버드나무 아래에서 벌이던 금복과의 정사와 혼자 남발안에 남아 벽돌을 굽고 있을 때의 한없이 쓸쓸했던 겨울의 풍경 등, 그의 전 생애에 걸핀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었다. 누군가 그 장면을 필름에 담아둘 수 있었다면 한 평범한 사람의 생애에 그토록 많은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 또한 한 사람의 기억 속에 그토록 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는 한편, 인류학과 사회학, 역사학과 심리학 등 여러 인문학 분야에서 더할 수 없이 귀한 자료가 되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 모든 장면들은 몇 년 뒤, 그가 버드나무 아래 개울가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p.266)

 

文은 이웃소년, 어부, 걱정, 생선장수, 칼잡이 등 그밖의 모든 금복의 남자 중 가장 오래 남는다. 집안력으로 눈이 멀어갈 때나 의붓딸 춘희에게 벽돌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동시에 점보 잃은 그녀의 새 친구가 되어준 것, 금복에 대한 소유욕이 집착적이지 않은 것 등 온통 외로움과 고독으로 뭉친 사내지만 그의 눈이 멀었을 때 본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한 사람의 생애가 남긴 이미지가 위 네 문장에 보편성을 띤 채 담겨있다. '고래'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광경을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고래문양으로 만들어진 금복의 영화관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얼마나 많은 고래들의 인문학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인가. 삶이 하나의 수수께끼 혹은 미로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수련은 은교 같다. 이미 여성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남성성을 획득하려 하는 순간 금복에게 수련은 다시 태어나면 훔치고 싶은, 젊고 아름다워서 훼손하고픈 대상이다. 결핍과 질투는 계열이 같고,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세대는 필연적으로 전복된다. 전반적으로 전쟁 겪은 세대가 금복이라는 여성의 권력에 의해 주물러지는 현실이 그렇다. 남자의 꿈은 여자의 영역에 존재하고, 단 한 번도 금복을 능가하는 남성성을 가진 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술술 흘러간다고? 작가는 여자가 아니면서, 여자 금복에게 남자를 투여했다. 그러고보면 이 소설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 중 없는 이야기가 없고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없다. 신이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기 전에 이 둘은 하나였다. 성이 전복되는 순간 이야기는 성경, 전설, 신화, 구전 등 모든 시공간을 초월한 채 진행된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것들(불온한 것들)이 이해도 되고 수긍도 되고 동의도 되고 그런 것 같다. 바깥에서 보기에 고래는 그저 거대한 한 덩어리일 뿐이지만 고래(상어) 뱃속으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크고 넓은 각각의 방들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바깥의 화자와 속의 화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고래 등과 고래 뱃속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확장했다 축소했다를 반복할 수 있는 읽기다. 남은 기간이 길면 세세한 부분을 보고, 시간이 짧을 경우 전체적으로 덩어리를 기억하라던 말은 암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마 그 방법이 이 시대 소설의 영역확장에도 도움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흡인력은 숨가쁜데 앙금처럼 남은 이 미친 몰입감의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작가는 이런 말도 안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로 나를 끌고 들어갔단 말인가. 삼키면 언젠가는 뱉는 것이 세상의 이치건만 여전히 당혹스럽고 낯선 영역이 단지 나만의 체험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그나저나 춘희를 빼먹었네. 얘는 왜 이렇게 몸매,성격,운명 뭐 하나 멀쩡한 데가 없는데도 자꾸만 자꾸만 예뻐해주고 싶을까.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hining 2012-05-2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작년에 읽었어요, 꽤 늦었죠. 그 전에 이미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고령화 가족>을 읽은 터라 더 인상깊게 여겨지더군요. 21세기에 쓰인 가장 놀라운 (한국)장편소설, 이라는 건 확신할 수 없지만 최고의 등단작 중 하나인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신인이라서 그런건지 신인이라 그럴수 있었던건지. 천명관 씨는 자신의 등단작을 넘기 위해 애쓸 수 밖에 없을거라는 많은 이들의 의견에 얼마간 동의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5-24 21:51   좋아요 0 | URL
재밌긴 한데 저는 소설이 스토리텔링만 가능하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가만보면 내용이 약간 신파같기도 해서요. 시대상이 그래서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는데 이거 읽으면서 내내 <혼불>이나 <토지> 그런 시대극이 생각났거든요. 그런 대하소설에 담긴 엄청난 인간군상이 단권에 담겨있는 건 놀랍지만 신인이기에 가장 놀라울 수 있었던 것과 문학상에 이변을 일으킨 수상작인 건 맞는 것 같아요. 이 책 사실은 오래 전에 읽으려다 여러 번 관둔 적이 있어서 저는 기대가 좀 없었어요. 유일하게 본 <고령화 가족>도 별로였고.. 가족을 다룬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봐요. 최근 읽은 소설 중 술술 넘어가고 술술 읽히는 걸로 봤을 때 확실히 흡인력은 있었어요^^

이진 2012-05-24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 아이님 <고래>읽었군요!
저도 마침 팟캐스트 듣고는 읽고보고 싶어서 샀고, 지금 제 책상에 떡하니 얹혀있는데 아이님께서도 읽으셨다니 저도 얼렁 읽고싶어요. 지금은 수행기간이라 빡세서 도저히 못 읽겠고(마음먹으면 읽을 수는 있지만) 음, 내달에 읽을까요.
석식먹으러 가야겠어요. 갔다와서 리뷰 다시 읽어봐야지 ㅎㅎㅎ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5-24 21:54   좋아요 0 | URL
아.. 그..누구지..팟캐스트요? 빨간책방 아닌가. 소이진님 페이퍼에서 봤는데 읽다가 또 까먹..( '') 그거 예고편때부터 기다렸다가 두 번 다 올라온 첫날 들었었는데..(아이팟 충전기 샀으니까요ㅋㅋ) 요즘은 [서정욱의 미술토크]인가 그거 주로 듣거든요. 짧은데 화가 한명한명 시대사조 하나하나의 요점을 확 짚어내주는 것 같아요. :)

수행평가기간..( '') 누나가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자료찾는 거 이런 거는 해줄 수 있는데.. 석식 먹고 야자하고 피곤하겠어요! 이제 집에 왔어요, 소이진님?

댈러웨이 2012-05-2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이거, 이책도 장바구니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천명관, 이 사람 무지 셀 것 같은데, 그래요?

뻔한 수식어, 주어, 저도 고치려고 의식 많이 했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아이님, 센 작가들로 요즘 한국 작가들 세 명만 좀 추천해줘요, 라고 나 막 부탁해도 되요? ㅎㅎㅎ
(김연수 성석제 김영하 배수아 한강 박민규 빼고요 =>이 중에는 좋아하는 이도 있고 별루인 이도 있음요.)

왜 배를 두드리고 잤을까? 아이님 잘 때 배 두드리고 자요? 막 이렇게 아이님이랑 친한 척하고 싶은데... 음... 거리 지키기... --;;

잘 자요. ^^

아이리시스 2012-05-24 22:09   좋아요 0 | URL
저도 정상적(?)인 시간에 알라딘 들어오고 싶어요. 어젠 피곤해서 썼던 글 두 편 올리고 쓰러졌어요ㅋㅋ
저는 60년대생들로는 전경린, 하성란, 정미경을 추천하고요. 보편적이지만 신경숙을 제일 좋아해요.('깊은슬픔'이나 '풍금이 있던 자리',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같은 거요) 세 작가의 책이 신경숙보다 들 팔리는 게 단지 신경숙 작가의 네임밸류만은 아닌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전부 대학 때 읽어서(그땐 작품집들도 좋았는데요, 저는 단편을 워낙 싫어해요, 좀 몰입하면 끝나ㅠㅠ) 지금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70년대생부터는 한국소설 거의 안 읽었어요. 뭐랄까, 한국문학이 주는 아련함이 최근 세대로 올 수록 없어지면서 아무래도 좀 더 동시대성을 갖잖아요. 그게 별로라서요..

배수아는 지나치게 시니컬하면서 난해하고, 한강은 지나치게 감정과잉이라서 스타일이 정 반대지만 둘 다 저는 별로거든요. 그래서 요즘 한국 작가들은 전작 스타일 보다는 잘 선별해서 작품별로 한 권씩 읽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히히히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서요ㅠ 누워있다가 잠든 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설마.. 배를 두드리고 잤을까요ㅠ(두드렸을 수도 있음) 거리.. 물리적 시간적으로도 우린 충분해요, 댈러웨이님!!!

댈러웨이 2012-05-25 16:49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한국 작가들은 단편이 좋더라구요. 반대로 외국 작가들의 단편은,,, 읽은 건 별루 없지만... 영.
추천작가가 전부 여성작가네요. 인상적이에요. 고마워요. ^^

아이리시스 2012-05-26 21:05   좋아요 0 | URL
꼭 여자만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저는 뭘 고를 때 호불호가 명확한 스타일은 아니예요. 그렇게 사니까 발전도 없고 여튼 고집쟁이가 돼서요. 저 원래 한고집 하는데 들키기 싫어요.푸핫. 사람한테도 안그럴려고 해요. 세상에 나랑 똑같은 사람이 여러명이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어요!ㅎㅎ 좋고 싫은 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취향일 테니 그것만 접하는 건 치우칠 여지가 많잖아요. 제가 말한 작가들은 댈러웨이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 저(!) 저한테 물으셨으니 나름 제일 제 스타일로 호호. 제가 저분들의 소설에 끌렸던 것 같아요. 남의 것을 읽는 것과 내가 쓰고 싶은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읽은 게 별로 없어서 추천이 저렇게 된 거예요. 별로 없어요ㅠㅠㅠㅠ

제가 다시 잘 읽어보고 좋은 거 추천하고, 댈러웨이님이 읽으시고 추천하고, 우리 다시 추천놀이 하면 안될까요?ㅠㅠ

맥거핀 2012-05-2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 소설 재미있기는 재미있나봐요. 제가 아는 한 분은 이 책보다가 지하철에서 내릴 때 지나쳤다고 하던데...나도 읽어볼까..오..shining님이 21세기 최고의 등단작 중 하나라고 했군요.

아이리시스 2012-05-25 00:13   좋아요 0 | URL
네! 재밌어요.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요즘 집중이 잘 안되는데도 이 책만 펴면 잘 읽히더라고요. 오..저 말은 문단에서 했을걸요. 출판사에서 써먹었거나..언론플레이에서 했거나.. 샤이닝님은 21세기 아니고, 최고의 등단작이라고..( '')

맥거핀님 읽어요. 우리 다 읽었으니까 맥거핀님만 보시면 돼요!!! 아, 소이진님도 봐야 되고^^

이진 2012-05-25 00:40   좋아요 0 | URL
오, 맞아요. 21세기 최고의 등단작. 안 읽었지만 왠지 그럴거 같아요.
그런데 첫문장은 제 스타일 아닌 거 같아 보여서 걱정은 살짝 되는데.

아이리시스 2012-05-26 21:06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주말 잘 보내요^^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융, 둘 사이에서 실험자 혹은 수제자로 활약했던 사비나 슈필라인의 이야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성적 결핍과 연관시켜 모든 연구를 진행하고, 그의 제자 융은 처음에는 가담하지만 점점 그것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다른 요소의 힘을 깨닫게 되면서 연구에서 빠져나와 무의식 세계를 주장한다. 한편, 어릴 때 아버지의 학대로 피학적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는 슈필라인은 이들의 연구대상자로 선정된 여자다. 철저하게 관찰, 분석 당하면서 우연찮게 아내가 있는 담당의사 융과 육체적 사랑(이라기엔 설명하기 불가능한 끌림)으로 발전하면서 아슬아슬한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 내쳐지기도 하고 연구의 중점에서 영감을 주는 인물로 활약하다가 결국 아동정신분석의가 된다. 영화 속에서 그리는 이들의 갈등은 연구분석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이 공유하거나 어긋나는 이론 그리고 둘 사이를 오가는 슈필라인의 대립이 전부다. 또 융의 평생 동반자 토니 볼프와 오토 그로스 박사도 나온다. 이들의 실제 삶을 얼마나 조명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실존 인물들 얘기를 풀어놓는 심리게임 영화라는 점에서, 모든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와 함께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후 대학 때 몇 권 샀던 프로이트를 읽으려고 찾긴 했는데 혼자 읽기만 하면서 소화시킬 양도 아니고 질도 아니고 해서 인터넷 서핑으로 이름 모를 이들의 보고서 겸 글들을 종종 읽었다. 프로이트는 상대적으로 융보다 훨씬 유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이론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왔음으로 그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공부하기에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그가 꿈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건 맞지만(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도), 그의 유명세 못지 않게 융의 연구도 유용하고 기발했다. 이건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저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실용적 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정신분석은 물론 여러 심리학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내게는 이게 좀 더 쉽고 유익할 것 같다. 이론은 조금씩 차근차근 공부하며 읽어나가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 책을 보았다.

 

이 책은 내가 얼마나 나를 속이고 있는가, 지금 내가 아는 나는 과거의 나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이론과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다룬다. 표지가 끌리지 않아 걱정했는데 내용은 생각보다 탄탄하고 훨씬 좋다. 하루키의 <1Q84> 리뷰 얘기를 해보면,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참 많이 좋아했고, 당시에는 안 읽은 소설이 없을 정도로 전작했으며, 하루키가 보여주는 문학적 세계관은 늘 확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리뷰를 쓸 수 있었다. 1984년과 1Q84년이 교차되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를 대비시켜 이곳에서의 나와 저곳에서의 나를 서로 다른 사람 즉 타인으로 봤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공간에 있은 적이 없을 뿐더러,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에고(자아)인 셈이다. 이렇게 텍스트를 읽을 경우, 예를 들어, 그제의 나,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가 전부 달라진다. 각각의 '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만날 수 없으며, '나'를 찾아 헤매는 또다른 '나'의 노력은 헛수고이며, 이 게임은 계속되는 '나 속이기'일 뿐이다. 이름하여 에고 트릭. 이 책은 하루키와도, 1Q84와도, 프로이트와 융과도 전혀 관련없는 독자적인 책이지만 이런 배경지식과 개인적 기대치를 안은 채 읽었다.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우리가 접하는 엄청난 수의 영화들이 이미 에고 트릭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반전영화라고 하면 절반 정도는 에고와 에고, 나와 나의 싸움이다. 똑똑해진 관객은 쉽게 속아주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트릭을 겪는 많은 예의 사람들이 나온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아주 커다란 것까지. 때로 삶과 생활 전부를 휘청거리게 하는 이런 것도 있다. 육체는 남자였지만 항상 여자였다고 말하는 어떤 남자는 여자가 되지 않고(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고도) 태어난 젠더에 순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스로는 물론 세상을 만족시킬 수 없었으니 한 순간도 떳떳하게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불행하다. 마음을 좀 확장시켜 보자. 그들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 또한 역차별 발상이며 상관 없다고 하는 것은 더한 차별,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나와 상관 없을까. 만약 내 가족이라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있을까.

 

흔한 말, 나를 믿는다는 말은 자아 트릭에서 기인한다. 하루키의 문학을 관통하는 것 또한 굳이 얘기하자면 에고 트릭에서 시작된다. 늘 이 세상과 저 세상, 이쪽의 나와 저쪽의 나에 대해 얘기하고, 또 이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하루키의 문학적 키워드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 책에 하루키가 나오는 건 아닌데 자꾸만 연결시키고 있다. 누구도 누구의 한때를 다 알지는 못하는데, 그걸 알려는 연인들의 과거집착만큼 웃긴 게 없다. 이를테면 우린 각자의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영역 밖의 존재니까. 자아에 대한 모든 것. <에고 트릭>을 설명하는 한 줄. 다양한 철학적 관점과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이 책은 생긴 것 이상으로 많이 어렵고 난해하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의 주목적이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인간성을 조명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자주들 한다. 이 주장이 옳다면,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인간성'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왔다는 사실만은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가타카>가 그리는 현실은 사람이 유전적으로 조작된 '적격자'와 자연 임신으로 태어나 열등한 '부적격자'로 나뉘는 세계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단순노동이나 지적 작업 등에 맞춰 선택적으로 길러지는 사회도 볼 수 있다. <타인머신>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수천 년에 걸쳐 엘로이와 멀록이라는 두 종족으로 진화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매트릭스>에는 모든 경험이 알고 보면 가상현실인 인류도 등장한다. 그들의 실제 육체는 누에고치 같은 캡슐에 갇혀 있으며, 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체에서 발생되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다.

 

이런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인간성이 고정불변일 필요가 없고, 이론적으로 인간 같은 피조물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pp.274-275)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영화로 설명해주는 부분이 제일 쉽긴 하네. '자아'를 열두 가지 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다보니 한 단락 한 단락이 철학자 이름 투성이다. 쉬운 책이 아니라 적어도 기본적 철학지식을 요한다. 이 책에서처럼 자아는 환경과 기질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고 또 아예 달라지거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자아의 개념으로 봐도 둘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현생과 사후 삶 또한 어떻게 생각하는 자아이냐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하지만 죽음에 관한 한, 정말로 끝일 때만 백퍼센트 확신한다. 육체와 자아에서 다중 자아, 사회적 자아, 성격과 자아, 사후의 생까지 나아가는 자아의 고찰이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분명한 것은 어떻게 변하든 한 사람의 존재로서 본질은 변함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소중히 하는 것과 나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자아가 어떤 경로로 확장되고 철학적 지평이 얼만큼 넓어져도 변할 수 없는 질량 불변의 진실이다. 

 

 

 

 

 

 

 

 

 

 

 

 

 

 

 

 

20대 초반 어정쩡한 독서가 약이 아니라 독이었음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 호기심에 섣불리 손댔던 많은 철학서와 이론서들이 그때 그 도서관에서 안 좋은 추억으로 남아 발목 붙잡고 늘어진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지배의 쾌락과 복종의 쾌락으로 관심이 갔다면 사드와 로렌스를 읽으면 됐을텐데 파졸리니의 <살로소돔의 120일>도 충격적이고. 갑자기 예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나체열연이 생각나서 이 강렬한 영화 이미지를 이 책들이 깰 수 있을까 싶다. 예고편도 심의반려된 그 가학적 성행위가 나는 전혀 불편하지도 않더라. 욕망이, 그보다 더한 욕망이 세상천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데. 솔직한 게 나쁜 게 아니라 억지스럽고 강요된 행위가 나쁜 것이다. 이성과 욕망으로 모든 것을 풀려던 이 위대한 철학 분석가들의 이론이 오늘날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가는 별도로 하고, 결론 없이 과정만 있는 이 영화가 프로이트와 융의 세계를 아주 잘 그려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의문과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5-16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5-1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상사를 인물들의 행적 중심으로 따라가면 참 재미있더군요.누군가를 열렬히 존경했다가 나중엔 실망해서 결별하는 경우를 보면 영화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프로이트와 융의 이야기가 그렇죠.한국사람들도 처음엔 프로이트의 매력에 빠지다가 이게 좀 이상한데...하고 의심할 때부턴 융에 관심을 갖는 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리시스 2012-05-17 17:49   좋아요 0 | URL
융이 사비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프로이트가 틀렸다는 걸 깨닫는 게 영화스럽기는 해요. 둘째줄 셋째줄은 저도 내내 생각하고 동의하는 부분이에요^^ 상대적으로 융이 덜 알려져서 그렇지 프로이트만 대가는 아닌 듯 한데요.. 저는 지금껏 프로이트 이론이 아주아주아주 절대적인 줄로만 알고 지냈었어요ㅠㅠ

마녀고양이 2012-05-1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에고 트릭이라는 책 잼나겠네요....
프로이트, 융, 아들러, 안나 프로이트, 코헛, 위니컷.... 정신분석에서 뿌리가 나온 이론들을 읽으면
정말 머리가 핑핑 돌아가요. 창시자들은 참 머리가 좋았다는 생각과 함께 복잡하게 생각하길 좋아했나봐 싶기도 하고,
그래서 현실에 적용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복잡한 우리 심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긴 하지요....

다들 천재들이예요, 천재... 아, 내 한계가 너무 분명하게 요즘 느껴져서, 그거 받아들이기 연습 중이예요, 헤.

아이리시스 2012-05-17 17:47   좋아요 0 | URL
네, 마고님께 필요한 책일까요? 심리학이 아니라 철학이라서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저는 딱 한 가지만 알겠어요. 제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만 잘난 사람은 없구나.. 철학자들은 제각각 본인들이 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론을 창시했지만 어느 것도 전복시키는 의견이 또 나온다는 점에서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제일 대단한 게 아닌가.. 이 복잡한 것들을 다 읽고 이해해야 하니까요..

천재는ㅠㅠ 아무리 어려운 것도 쓴 사람이 있는데 읽는 것 정도는 해야한다는 게 제 독서철칙인데 조금만 파고들면 포기하고 싶어져요. 시작도 못해요. 마고님 한계는 어떤 한계........ 없는 것 같은데요?ㅋㅋㅋ

cyrus 2012-05-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비나라는 여인은 진짜로 실제 인물인가요? 은근히 프로이트와 융과의 사제 관계가
픽션 주제로 사용되네요. <살인의 해석>이라는 소설도 그렇고요 ^^

위에 마고님이 말씀하셨지만 예전에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우연히 심리학 전공 강사님 말씀을 듣은 이후로부터는 막상 공부하려는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정말 프로이트, 융에서부터 요즘 심리학자들의 학문적 사상을 이해하는 데만 해도
학부생 시절 때 머리에 쥐가 났다면서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나네요 ^^;;

아이리시스 2012-05-17 17:43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실존인물 맞아요. 나오는 등장인물 모두 실존인물이에요. 볼 때는 좀 재밌고 네이버 평점도 제 생각보다 훨씬 높던데 저는 영화 자체가 그렇게까지 기발하거나 특별한 건 모르겠어요. 워낙 프로이트와 융에 대해 모르니까 좀 찾아볼 계기를 마련해준 것 빼고는요. 역시 시작은 관심으로, 완성은 전집으로..( '')

심리학 재밌을 것 같아요. 저는 뭘 가르쳐주는 것에 젬병이라서 선생님의 역할이 별로인데 심리학도 사람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비슷하게 느껴져요. 마고님처럼 한다면 재밌어 보이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요ㅠㅠ 노이에자이트님 말씀도 맞고요. 프로이트는 요즘 좀 특출나지 않죠. 반박이론이 훨 많고 의심살 수밖에 없는 말을 많이 하던데요..히히. 실상과 동떨어져 보면 재미있는 분야예요. 저는 무슨 '학'으로 끝나는 거 정말 싫어요. 쥐나요ㅠㅠ 행정학보다 행정법이 좋아요ㅋㅋㅋ (비교하는 거 봐라..)

맥거핀 2012-05-1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인저러스 메소드..저 영화 심히 평이 별로라서, 끙..그러고 있어요. 좀 다른 얘기인듯 한데, 인간의 학문에 대한 욕구라는 게 단순하게 지적인 측면에서 발현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프로이트와 융도 저 사비나라는 여자에 대한 어떤 감정(?)이 없었다면 그렇게 대가는 못 되었을듯..(인류사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순수한 지적동기 외에 때로는 정말 하찮은 이유 때문에 연구되고, 탄생한 것을 생각해보면요. 물론 프로이트와 융이 하찮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아이리시스 2012-05-19 00:10   좋아요 0 | URL
우리끼리 말인데 재미없어요, 맥거핀님. 평론가들 평이 별로인 건 이백프로 이해가 되고도 남아요. 학문에 대한 욕구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으로 접근해 독서를 하는 게 낫고, 프로이트와 융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본들, 대다수 책 한 권 안 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요. 그런데 극영화의 재미까지 앗아가니, 다큐나 다름 없어요.하하하.(우리끼리만 해야 되는데 공개적으로 말한다-_- 근데 저는 이승기 보면서 <군주론> 읽는 여자잖아요ㅋㅋㅋ 얼마나 기특한 선택인지 요즘 <더킹 투하츠> 완전 울트라 캡숑 짱 재밌거든요!

맞아요. 결국 그들도 지적인 측면에서가 아니고 누군가를 반박하는 이론을 창시하기 위해서, 욕망에 의해 그 또한 전복되고요. 정말로 영화 속에서 프로이트가 이론만으로 자꾸 '성적 결핍과 욕망'을 융에게 설득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근데 이런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좋기란 정말 힘들고 어려울 것 같긴 해요.

Shining 2012-05-1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맥거핀님처럼 이 영화, 혹평만 들어서 과연 보게 될지 모르겠어요_-; 하지만 코스모폴리스였던가요? 로버트 패틴슨과 함께 한 영화는 여전히 기대중입니다. 그런데 패틴슨이 잘 생긴 얼굴인가요? 전 정말 모르겠던데_- 근데 영화를 고르는 취향은 조금 예상(예상이래봤자 <트와일라잇>시리즈로 선입견이 생겼을 뿐이지만)외더군요, 이 배우.

그런데 아이님, 갑자기 생각난 건데 로만 폴란스키 뒤는 언제 하실 거에요?ㅎㅎ(놀라셨죠?^^)

아이리시스 2012-05-19 00:19   좋아요 0 | URL
저는 하이틴스러운 <트와일라잇>도 보다가 때려쳐서.. 워낙 그런 거 안 좋아해요. 노력을 몇 번이나 했는데 도저히 못보..( '') 영화가 취향이 아닌 경우 감독,배우는 별로 저한테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고요. <코스모폴리스>가 <데인저러스>랑 같은 감독인 거죠? 예전에 하정우가 고현정이랑 드라마 <히트> 하고난 후 뜨니까 그전보다 훨씬 많이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지위가 되었다던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원래 그 시리즈가 본인에게 그런 선택 아니었을까요?-_-;(그렇다고 하기엔 이전 필모그래피가 많이 후진데..)

저도저도 로만 폴란스키 세번째 비공개로 쓰기 시작한 그 페이퍼 로그인할 때마다 보면서 한숨 쉬어요.푸하하하. 이런 것조차 몰입과 지속이 불가능한 이런 인격이라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