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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배를 두드리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정식 암기는 수면 중에 이뤄진다던 강사의 말은 실현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잠은 더이상 죄책감을 실어나르진 않았다. 그때 만났다. <고령화 가족>은 읽었는데 늘 이 책이 명치에 걸려 있어서 최근작을 읽기 위해 먼저 읽었다. 폭발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현실로 꿈으로 삶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갉아먹었다. 빠져들기 쉬웠기에 나오기도 쉬웠고, 다시 들어가기도 쉬웠다. 시도때도 없이 먹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짜릿했다. 8년째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소설이 이것 뿐인 건 아니었다. 장식용이었던 시절, '스토리'는 무작정 매력적인 소설의 요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읽지 않았다. '폭발하는 힘'이나 '이야기의 끊임없는 향연'이란 뻔한 수식어 말고 다른 말로 설명할 수는 없나 싶던 우려는 금세 반감되었다. 내 영역이 아닌 곳을 넘본 것 같은 민망함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한 줌 쥐고 머리로 걸러 손으로 타이핑 했을까. 나는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던 모든 이야기를 지웠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누구보다 잘 안다.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은 사실 쓸 거리가 없어 쓰지 '못하는' 거란 거. 그만큼 표현력은 중요하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가 동시에 충족 되어야 가능한 영역이 소설이고, 서사력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봉이다. 물론 이야기만 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인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문학인들이 고민해야 할테지만 독자로 존재하는 동안만큼은 골치 아픈 판단을 피해갈 수 있어 좋다. 물론 판단을 종용하는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흡인력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정작 이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앞서 출발한 모든 소설의 서사 앞에 우뚝 섰다. 어디서 본 듯도 하고 들어본 듯도 하며 약간 신파 같고 또 뻔한 여자의 일생이 담겨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우리 모두의 생활이고 삶이다. 신화이자 전설이고 현실이자 판타지다. 모든 영역에서 이처럼 또렷하고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벽돌공장의 신화는 모든 이들의 삶을 그러모은다. 그들은 살아왔지만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소설의 '실용성'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일테지만 소설이 실용적이길 원하는 사람에게 <고래>를 들이밀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어,하는 건 문학도로서 아쉽긴 할 것이다.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가깝고도 먼 세상을 묘사한 이런 장면이 고스란히 상상돼서 좋다. 이 소설은 정말로 차라리 영화를 닮았다.
그리고 바다를 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모두 끝나고 눈앞엔 아득한 고요가 펼쳐져 있었다. 곧 울음이 쏟아질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옆에 있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해의 섬들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멀리서 아른거렸고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엔 끊임없이 파도가 부딪쳐 포말이 일었다. 무심하게 고깃배 위를 오가며 끼룩대던 갈매기들이 어느샌가 쏜살같이 해수면으로 날아들어 물고기를 낚아올리기도 했다. (p.49)
읽던 날은 하늘에서 강아지가 떨어진 날이었다. 독수리 먹잇감이 될 뻔하다 땅으로 낙하한 귀여운 강아지는 좋은 주인의 품에 날아들어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 정도가 어울린다. 금복과 춘희와 이 특이한 모녀를 둘러싸거나 둘러쌌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 만찬으로 초대되려면 말이다. 나보다는 부모님과의 나이차가 더 세기 빠른 이 훈남 작가의 프로필 사진과 약간은 촌스러운 시대에 대한 삶의 수다.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자꾸만 다음 페이지로 빨려들어 얼른 끝을 보고 싶었다. 춘희와 금복과 쌍둥이자매와 노파와 애꾸눈 딸. 남자보다는 여자의 삶에 눈길이 더 갔다. 그리고 춘희와 점보(코끼리)의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에 더 눈물 지었다. 이 시대, 소설은 얼만큼 위로할 수 있나. 얼만큼 소통할 수 있나. 얼만큼 빠져들 수 있나. 문학을 배운 적이 없고 소설가를 꿈꾼 적이 없다던 등단이 늦은 어느 작가의 첫 장편소설 이후 8년. 한국문학의 길이 늘 새로웠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한낱 출판사의 작품상 하나가 문단 전체를 뒤집을 순 없을 터, 여전히 고민하고 지리멸렬하며 난삽하고 재미없고 진부하고 뻔하고 미숙하다. 훌륭한 한국문단의 작가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독자들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기에 만족할 만큼 작품수가 적은 것도 사실이다.
의도적으로 주어(나)와 뻔한 수식어(아름다운 꽃)와 뻔한 연결어를 걷어내야겠다는 생각을 수년 전부터 했지만 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결심한 것보다 더 빈번하게 써왔다. 고민의 길에는 정답이 없었다. 시간이 변화를 예고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좋다. 3대로 흘러내려오는 노파-금복-춘희의 삶이, 토속 역사소설처럼 깔리는 배경에도 굴하지 않고 전복해버리는 시공간적 배경, 환상적 수다가 작렬하는 멈춤없고 끝없는 이야기가, 그녀들이 늘 조금 넉살스럽고 단단하고 헤프고 고풍스럽지 않은 것이 전부 다 좋다.
그날 이후,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된 대신 그의 눈앞엔 기억 속에 담겨 있는 풍경들이 아무 때고, 순서도 없이 불규칙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그가 기억할 수 있는 먼 과거에서부터 눈이 멀기 전까지의 긴 시간에 걸쳐 그의 인생을 모두 기록한 사진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엔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년희 풍경과 전쟁터에서 목격한 온갖 끔찍한 장면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벽돌공장을 다닐 때 보았던 낯선 이국의 풍경들, 그리고 떠오를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미어지는 가족들의 얼굴, 또한 버드나무 아래에서 벌이던 금복과의 정사와 혼자 남발안에 남아 벽돌을 굽고 있을 때의 한없이 쓸쓸했던 겨울의 풍경 등, 그의 전 생애에 걸핀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었다. 누군가 그 장면을 필름에 담아둘 수 있었다면 한 평범한 사람의 생애에 그토록 많은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 또한 한 사람의 기억 속에 그토록 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는 한편, 인류학과 사회학, 역사학과 심리학 등 여러 인문학 분야에서 더할 수 없이 귀한 자료가 되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 모든 장면들은 몇 년 뒤, 그가 버드나무 아래 개울가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p.266)
文은 이웃소년, 어부, 걱정, 생선장수, 칼잡이 등 그밖의 모든 금복의 남자 중 가장 오래 남는다. 집안력으로 눈이 멀어갈 때나 의붓딸 춘희에게 벽돌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동시에 점보 잃은 그녀의 새 친구가 되어준 것, 금복에 대한 소유욕이 집착적이지 않은 것 등 온통 외로움과 고독으로 뭉친 사내지만 그의 눈이 멀었을 때 본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한 사람의 생애가 남긴 이미지가 위 네 문장에 보편성을 띤 채 담겨있다. '고래'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광경을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고래문양으로 만들어진 금복의 영화관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얼마나 많은 고래들의 인문학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인가. 삶이 하나의 수수께끼 혹은 미로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수련은 은교 같다. 이미 여성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남성성을 획득하려 하는 순간 금복에게 수련은 다시 태어나면 훔치고 싶은, 젊고 아름다워서 훼손하고픈 대상이다. 결핍과 질투는 계열이 같고,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세대는 필연적으로 전복된다. 전반적으로 전쟁 겪은 세대가 금복이라는 여성의 권력에 의해 주물러지는 현실이 그렇다. 남자의 꿈은 여자의 영역에 존재하고, 단 한 번도 금복을 능가하는 남성성을 가진 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술술 흘러간다고? 작가는 여자가 아니면서, 여자 금복에게 남자를 투여했다. 그러고보면 이 소설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 중 없는 이야기가 없고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없다. 신이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기 전에 이 둘은 하나였다. 성이 전복되는 순간 이야기는 성경, 전설, 신화, 구전 등 모든 시공간을 초월한 채 진행된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것들(불온한 것들)이 이해도 되고 수긍도 되고 동의도 되고 그런 것 같다. 바깥에서 보기에 고래는 그저 거대한 한 덩어리일 뿐이지만 고래(상어) 뱃속으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크고 넓은 각각의 방들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바깥의 화자와 속의 화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고래 등과 고래 뱃속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확장했다 축소했다를 반복할 수 있는 읽기다. 남은 기간이 길면 세세한 부분을 보고, 시간이 짧을 경우 전체적으로 덩어리를 기억하라던 말은 암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마 그 방법이 이 시대 소설의 영역확장에도 도움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흡인력은 숨가쁜데 앙금처럼 남은 이 미친 몰입감의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작가는 이런 말도 안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로 나를 끌고 들어갔단 말인가. 삼키면 언젠가는 뱉는 것이 세상의 이치건만 여전히 당혹스럽고 낯선 영역이 단지 나만의 체험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그나저나 춘희를 빼먹었네. 얘는 왜 이렇게 몸매,성격,운명 뭐 하나 멀쩡한 데가 없는데도 자꾸만 자꾸만 예뻐해주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