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융, 둘 사이에서 실험자 혹은 수제자로 활약했던 사비나 슈필라인의 이야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성적 결핍과 연관시켜 모든 연구를 진행하고, 그의 제자 융은 처음에는 가담하지만 점점 그것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다른 요소의 힘을 깨닫게 되면서 연구에서 빠져나와 무의식 세계를 주장한다. 한편, 어릴 때 아버지의 학대로 피학적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는 슈필라인은 이들의 연구대상자로 선정된 여자다. 철저하게 관찰, 분석 당하면서 우연찮게 아내가 있는 담당의사 융과 육체적 사랑(이라기엔 설명하기 불가능한 끌림)으로 발전하면서 아슬아슬한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 내쳐지기도 하고 연구의 중점에서 영감을 주는 인물로 활약하다가 결국 아동정신분석의가 된다. 영화 속에서 그리는 이들의 갈등은 연구분석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이 공유하거나 어긋나는 이론 그리고 둘 사이를 오가는 슈필라인의 대립이 전부다. 또 융의 평생 동반자 토니 볼프와 오토 그로스 박사도 나온다. 이들의 실제 삶을 얼마나 조명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실존 인물들 얘기를 풀어놓는 심리게임 영화라는 점에서, 모든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와 함께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후 대학 때 몇 권 샀던 프로이트를 읽으려고 찾긴 했는데 혼자 읽기만 하면서 소화시킬 양도 아니고 질도 아니고 해서 인터넷 서핑으로 이름 모를 이들의 보고서 겸 글들을 종종 읽었다. 프로이트는 상대적으로 융보다 훨씬 유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이론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왔음으로 그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공부하기에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그가 꿈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건 맞지만(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도), 그의 유명세 못지 않게 융의 연구도 유용하고 기발했다. 이건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저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실용적 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정신분석은 물론 여러 심리학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내게는 이게 좀 더 쉽고 유익할 것 같다. 이론은 조금씩 차근차근 공부하며 읽어나가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 책을 보았다.
이 책은 내가 얼마나 나를 속이고 있는가, 지금 내가 아는 나는 과거의 나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이론과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다룬다. 표지가 끌리지 않아 걱정했는데 내용은 생각보다 탄탄하고 훨씬 좋다. 하루키의 <1Q84> 리뷰 얘기를 해보면,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참 많이 좋아했고, 당시에는 안 읽은 소설이 없을 정도로 전작했으며, 하루키가 보여주는 문학적 세계관은 늘 확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리뷰를 쓸 수 있었다. 1984년과 1Q84년이 교차되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를 대비시켜 이곳에서의 나와 저곳에서의 나를 서로 다른 사람 즉 타인으로 봤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공간에 있은 적이 없을 뿐더러,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에고(자아)인 셈이다. 이렇게 텍스트를 읽을 경우, 예를 들어, 그제의 나,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가 전부 달라진다. 각각의 '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만날 수 없으며, '나'를 찾아 헤매는 또다른 '나'의 노력은 헛수고이며, 이 게임은 계속되는 '나 속이기'일 뿐이다. 이름하여 에고 트릭. 이 책은 하루키와도, 1Q84와도, 프로이트와 융과도 전혀 관련없는 독자적인 책이지만 이런 배경지식과 개인적 기대치를 안은 채 읽었다.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우리가 접하는 엄청난 수의 영화들이 이미 에고 트릭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반전영화라고 하면 절반 정도는 에고와 에고, 나와 나의 싸움이다. 똑똑해진 관객은 쉽게 속아주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트릭을 겪는 많은 예의 사람들이 나온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아주 커다란 것까지. 때로 삶과 생활 전부를 휘청거리게 하는 이런 것도 있다. 육체는 남자였지만 항상 여자였다고 말하는 어떤 남자는 여자가 되지 않고(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고도) 태어난 젠더에 순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스로는 물론 세상을 만족시킬 수 없었으니 한 순간도 떳떳하게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불행하다. 마음을 좀 확장시켜 보자. 그들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 또한 역차별 발상이며 상관 없다고 하는 것은 더한 차별,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나와 상관 없을까. 만약 내 가족이라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있을까.
흔한 말, 나를 믿는다는 말은 자아 트릭에서 기인한다. 하루키의 문학을 관통하는 것 또한 굳이 얘기하자면 에고 트릭에서 시작된다. 늘 이 세상과 저 세상, 이쪽의 나와 저쪽의 나에 대해 얘기하고, 또 이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하루키의 문학적 키워드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 책에 하루키가 나오는 건 아닌데 자꾸만 연결시키고 있다. 누구도 누구의 한때를 다 알지는 못하는데, 그걸 알려는 연인들의 과거집착만큼 웃긴 게 없다. 이를테면 우린 각자의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영역 밖의 존재니까. 자아에 대한 모든 것. <에고 트릭>을 설명하는 한 줄. 다양한 철학적 관점과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이 책은 생긴 것 이상으로 많이 어렵고 난해하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의 주목적이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인간성을 조명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자주들 한다. 이 주장이 옳다면,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인간성'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왔다는 사실만은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가타카>가 그리는 현실은 사람이 유전적으로 조작된 '적격자'와 자연 임신으로 태어나 열등한 '부적격자'로 나뉘는 세계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단순노동이나 지적 작업 등에 맞춰 선택적으로 길러지는 사회도 볼 수 있다. <타인머신>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수천 년에 걸쳐 엘로이와 멀록이라는 두 종족으로 진화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매트릭스>에는 모든 경험이 알고 보면 가상현실인 인류도 등장한다. 그들의 실제 육체는 누에고치 같은 캡슐에 갇혀 있으며, 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체에서 발생되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다.
이런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인간성이 고정불변일 필요가 없고, 이론적으로 인간 같은 피조물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pp.274-275)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영화로 설명해주는 부분이 제일 쉽긴 하네. '자아'를 열두 가지 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다보니 한 단락 한 단락이 철학자 이름 투성이다. 쉬운 책이 아니라 적어도 기본적 철학지식을 요한다. 이 책에서처럼 자아는 환경과 기질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고 또 아예 달라지거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자아의 개념으로 봐도 둘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현생과 사후 삶 또한 어떻게 생각하는 자아이냐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하지만 죽음에 관한 한, 정말로 끝일 때만 백퍼센트 확신한다. 육체와 자아에서 다중 자아, 사회적 자아, 성격과 자아, 사후의 생까지 나아가는 자아의 고찰이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분명한 것은 어떻게 변하든 한 사람의 존재로서 본질은 변함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소중히 하는 것과 나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자아가 어떤 경로로 확장되고 철학적 지평이 얼만큼 넓어져도 변할 수 없는 질량 불변의 진실이다.
20대 초반 어정쩡한 독서가 약이 아니라 독이었음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 호기심에 섣불리 손댔던 많은 철학서와 이론서들이 그때 그 도서관에서 안 좋은 추억으로 남아 발목 붙잡고 늘어진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지배의 쾌락과 복종의 쾌락으로 관심이 갔다면 사드와 로렌스를 읽으면 됐을텐데 파졸리니의 <살로소돔의 120일>도 충격적이고. 갑자기 예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나체열연이 생각나서 이 강렬한 영화 이미지를 이 책들이 깰 수 있을까 싶다. 예고편도 심의반려된 그 가학적 성행위가 나는 전혀 불편하지도 않더라. 욕망이, 그보다 더한 욕망이 세상천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데. 솔직한 게 나쁜 게 아니라 억지스럽고 강요된 행위가 나쁜 것이다. 이성과 욕망으로 모든 것을 풀려던 이 위대한 철학 분석가들의 이론이 오늘날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가는 별도로 하고, 결론 없이 과정만 있는 이 영화가 프로이트와 융의 세계를 아주 잘 그려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의문과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