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전체가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허먼 멜빌, <모비 딕>)

 

이 좋은 봄날! 세 권의 책을 읽느라 지난 주말을 몽땅 허비했다. 먹는거야 배만 채워도 좋다 싶을 때가 일 년에 반이지만 책은 그럴 수 없다. 주어진 삶도 시간도 너무 짧고 불행히도 나는 오지랖이 넓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게 아닌 한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미뤄둔 드라마를 채울 시간은 날아갔고 어쩌다보니 계속 보는 [아빠 어디가]에서 안정환 vs 송종국 라이벌 매치만 제대로 보았다. 나는 축구보다 여행이 더 좋은데, 지난 주에 이어 여행을 안 갔다. 시청률 안 나온다고 기획의도를 바꾸시면 안됩니다, 소리쳤다.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국가 전반의 구조를 공부하고, 방랑자 이슈메일이 되어 신비로 뒤덮인 바다를 탐험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비극을 겪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런 주말도 있고 이런 주말도 있는 것이다. 그런 주말도 의미있고 이런 주말도 의미있다. 비로소 <아프리카 방랑>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모비 딕>의 끝페이지와 조우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징조만도 대단한 것이었다. 자식 세대에는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거라는 믿음은 확신의 기준이었고,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보르헤스는 '모든 지식은 기억에 불과하다'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관심사에 해당하는 많은 내용을 책으로 배우지만 정작 지식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서가 단순히 재미나 흥미 이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냐 물으면 내 대답은 '예스'다. 그걸 바라고 원한다. 이건 이십대 초반에 의견정리 끝냈으니 이젠 독서가 즐거움 이상의 것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맞다, 같은 책을 동시에 읽어도 각자 다른 것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거기서 리뷰의 필요성이 나온다. 하지만 많은 리뷰가 다른 단어를 쓰는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리뷰는 반드시 필요한가. 반복적인 패턴, 자기복제는 나와 상대 중 누구의 시간을 더 뺏는 일일까.

 

아무것도 못 얻었는데 얻은 척 무얼 쓸 필요가 있을까. 나쁜 책을 나쁘다고 쓰는 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경험상 내게는 별로 그렇지 않다.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기는 누워서 떡 먹는 것만큼 쉽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럴 만한 책이 아닌데도 유난히 별점이 후하다면 그건 내가 선택한 책에 대한 실패와 오용한 시간사용을 무마하기 위해 나온 무의식적 처량함이지, 소위 공짜로 받은 책에 대해 주례사 비평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별점이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같은 책을 동시에 읽으면서 각자 얻어가는 지식이 다르다는 데 쿨할 자신이 없다. 책이 공짜로 내것이 되는 것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공공도서관이 들어서기를 나는 더 바란다. 시간을 들여 내가 무언가를 했다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알파가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솔직한 것이다. 변하기 싫은 나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책이기를. 책이 지식이라면 지식이 기억이 아닐 리 없고, 그 반대라고 해도 여전히 지식은 기억이다. 몇 번째 서랍을 열어 말을 꺼내볼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아프리카 방랑>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을, 그전에는 <노예 12년>을, 그전에는 까먹었지만 기어이 찾아내 적어보는 <모사드>, 그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딸 1>, 그전에는 <북극여행자>, 그전에는.. 다섯 권을 연달아 떠올린 건 순서별 기억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랍, 종교분쟁, 인종차별, 노예, 흑인, 이집트 같은 키워드 때문이다.

 

중간중간 <친구 사이>, <침묵의 거리에서>, <길귀신의 노래>, <픽션들>, <눈먼 암살자>, <런어웨이>, <내 아내에 대하여>, <당신이 그만두라고 조를 때까지>, <열세 번째 배심원>, <파계 재판> 등 언뜻 떠올려도 여러 권의 문학을 읽었고, 이전으로 올라가면 서재의 글이 뜸해진 올해 시작점, <디어 라이프>와 <유빅>의 리뷰를 쓸 즈음부터는 <진저맨>, <검은 모래>, <여인의 초상>,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사형집행인의 딸>, <밤의 새가 말하다>, <도시와 나>, <중세의 가을>, <둔황>, <종착역 살인사건>, <블레이베르크 프로젝트>, <파리인간>, <에라스뮈스>, <니체 자서전> 등을 읽었다. 너무나 사소해서 생략되는 몇몇 에세이도 더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을 다시 읽겠다는 다짐은 실현되지 않았다. 또다시 새로운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토요일>, <초조한 마음>, <비행공포>, <책 읽는 소녀>, <미시시피 미시시피>, <불안한 남자>,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포트노이의 불평>, <지도와 영토>, <소리와 분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나무 위의 남작>, <어제의 세계>, <고양이 테이블>은 읽기 시작했거나 읽다만 상태에 있다.

 

 

 

 

 

 

 

 

 

 

 

 

 

 

 

 

불행의 첫 번째 주인공이 아닌 한, 때로는 그 첫 번째 주인공에게조차도, 자신을 찾아온 슬픔이나 절망보다 더 강한 건 현실이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 얘기다. 1달러로 하루를 살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남편이 불치병에 걸린 아내로 인해 오랜 꿈을 접지만, 안다, 누군가 꿈을 포기한다고 아내가 낫지는 않는다는 걸. 비용과 슬픔과 무기력을 태운 가정이 난파당한 배처럼 휘청대자 남편이 결단 내리는 부분에서,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곳에 대해 설명하다가 폴 서루의 <아프리카 방랑>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기억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찾아보지는 않을 생각이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읽고, 우리나라 사람이 쓴 아프리카를 읽었으니 외국인이 쓴 아프리카도 읽어야 한다면서 <아프리카 방랑>을 구입했었다. 폴 서루가 세계적인 여행작가라는 사실이나 그의 이력은 몰랐다. 아프리카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는 땅이 아닌 지 오래된 데다, 우리 삶의 반열로 끌어당기기에는 너무나도 멀다.

 

폴 서루는 30년 전 평화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는 서구열강의 오랜 식민주의로 비문명적이고 질서가 없긴 했지만, 지금처럼 전쟁의 땅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훨씬 더 평온하고 따뜻했다고 회상한다. 열띤 청춘 시절을 잊지 못해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들어간 건 2000년대 초반, 이 책의 번역출간은 2011년, 오늘은 2014년 춘삼월. 시간이 흘러도 아프리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정적으로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머무르는 동안 남쪽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아프리카의 위험을 경고했다. 여행 떠나오기 전 만난 지인들은 거의 마지막 인사하듯 했다. 30년 전 폴 서루가 가르친 십대 소년은 어느덧 사십대가, 대여섯살에 불과하던 꼬마는 훌쩍 키가 자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청년이 되어 있다. 시간이 그들을 외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아프리카의 비극은 더 심화되었다.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 인종, 종교와도 싸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랭보가 이곳에서 그처럼 행복하게 지냈던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랭보가 아프리카를 좋아한 이유는, 아프리카가 유럽과 달랐고 서구 세계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이유에서 아프리카가 좋았다. 아프리카는 때로는 반항적이고 때로는 나태한 땅이었다. 아프리카는 내 고향과 완전히 달랐다.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은 암흑성에 있는 것과 같았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아프리카 방랑>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널리고 널린, 흔하디 흔한 일회용의 여행기록이 아니다. 사실적이고 우아한 문체, 사람과 풍경의 생생한 묘사, 이성과 감성을 절묘히 오가는 온도는 아프리카를 아꼈고 아끼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풍경에 집착하거나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기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생각과 의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말라위, 모잠비크,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치며 어젯밤 생생하게 머리속에 떠오른 장면은 한줄기 빛이었다. 빙하기가 시작되며 필연적으로 찾아온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의 과정은 역사학적 보편성을 띤다. 인간이 머리를 쓰고 도구라는 걸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당연히 그에 따른 부수적 가치들이 동반성장한다. 아프리카도 그래야 옳았다.

 

아프리카에는 장수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에 누구도 나이 많은 걸 자랑하지 않았다. 누구도 오래 살지 못했다. 따라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나이는 시간을 측정하는 우연한 방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에서는 중대한 일을 성취하거나 가치 있는 일을 끝내기에 충분한 시간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서구 세계의 두 세대가 아프리카에서는 세 세대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은 일찍 결혼해서 일찍 자식을 낳고 일찍 죽는 삶으로 요약된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폴 서루가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감회에 젖은 채 하얗게 센 머리로 되돌아가는 건 발전의 싹을 어떻게 틔웠는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본 아프리카는 도리어 예전에는 없던 국제 원조와 간섭에 신음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독재자들은 부자 나라의 원조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국가의 가난을 유지하려 하고, 그러려면 무지한 국민이 교육을 받아 똑똑해져서는 안된다. 아프리카의 절망과 신음 그리고 눈물은 그것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폴 서루는 누구보다 강력하게 예전과 지금의 차이를 느낀다. 정작 제대로 된 길이 놓이지 않은 아프리카는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온갖 이해관계가 먹이사슬처럼 얽힌 이곳에서 지구의 반전이 시작되어야 한다. 인종과 노예 문제, 식량 전쟁, 기후와 환경 전쟁, 사회 제반시설의 부족이라는 단어가 아까울 정도의 결핍, 종교적 충돌과 끊임없는 내전과 전쟁까지, 세계를 관통하는 모든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토록 외로워 슬픈 아프리카, 폴 서루는 오히려 무덤덤한데 나는 이 대륙의 모든 가능성들이 아쉽고 아프고 안타깝다.

 

 

 

 

 

 

 

 

 

 

 

 

 

 

 

 

맹세컨대, 이런 생각 해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버나드 쇼는 행여 이런 생각을 했더라도 표면에 드러나는 이상의 뜻에서 한 말이지만, 그건 그가 불우한 어린시절을 딛고 끝내 성공했다고 여겨지니 그럴 뿐이다. 열두 살에 사업실패로 광기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자살한 일은 버나드 쇼에게 자신에게도 숨겨져 있을지 모를 광기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내가 대부분의 작가가 (큰)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이상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만을 작가의 범주에 넣고 꿈을 꾸었다. 어떤 식으로도 구체화되지 못한 꿈이었고, 반드시 작가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슈퍼마켓 주인이 갖다놓은 물건을 일 년이 지나도록 사는 사람이 없는 것과 책이 잘 팔리지 않아 그럭저럭 원고료를 받고 사는 이가 다를 게 없다. 물론 많은 의미에서 다르지만.

 

사실 내 경우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걱정된다. 나는 섬에 고립되더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작가들은 본인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잘 모이지를 않는다. 글만 보면 작가들이 모든 덕목의 표본 같지만, 그들은 상습적인 무정부주의자이며, 논쟁을 좋아하고, 감상적이고, 잘 흥분하고, 누군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말하면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언론을 통해 활동하는 작가들은 그나마 사회성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홀로 앉아서 세상만사를 머리로만 해결하려 들고 작품에 딴죽 거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탁월한 유머 감각이 없으면 정치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소설가들을 외계인 취급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면 개인주의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해진다. 심지어 군인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경제적 압박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금전적인 이해를 신경스는 사람이면 작가를 직업으로 택하지도 않는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경제는 재미있고 정치는 복잡하다. 나는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세상은 한 세대 전이지만 우리는 같은 바탕에서 성장한 세상에서 살았고 또 살아간다. 버나드 쇼는 서른 개가 넘는 챕터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수많은 얘기는 핵심으로 다룰 수 있는 단편적 의견이 아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의 지도로 보면 우리가 사는 지금이라는 시점은 너무나 작아서 점 하나로도 표현이 안된다고 했다. 일생에서 처음과 끝은 굉장히 길지만 정작 우리는 다 합쳐서 하나의 점도 안된다.

 

우리의 외무부장관 파머스턴은 이렇게 얘기했다. "어떤 나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고 싶으면 그 나라에 30년 동안 살면서 그 나라말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어떤 일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다. (중략) 세상일의 상당 부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할 수는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있기 마련이다. 그 일들은 어떤 식으로든 하는 것이 전혀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중략)

확실히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러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반면 사상가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우리의 어제, 오늘, 내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삶은 결국 정치다. 버나드 쇼가 들려준 것처럼 한사람 한사람에게로 와서 어떤 삶이 되는, 그런 삶.

 

 

 

 

 

 

 

 

 

 

 

 

 

 

 

 

<모비 딕>은 과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고래 보고서! 이 유쾌한 고역, 혼돈, 경악은 시종일관 영혼을 빼놓는다. 멜빌이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 순간조차도 좋다. 영혼이다가 사물이다가, 어제였다가 오늘이다가, 일상이다가 일탈이다가 한다. 끝인가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시작한다. 죄없는 고래는 이유없이 불려나와 모질게 당한다. 인간에게서, 인간을 위하여 모든것을 내어주고 또 빼앗아 간다. 거대한 몸집을 처절하게 뒤집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뿜어내고 죽는, 피흘리는 고래는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북극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낯선 그린란드 어느 외딴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북극곰과 배타고 나가 기다림과 씨름하다 기어이 마주치게 되는, 한시점의 향유고래. 향유고래의 배가 갈리고 내장이 터져나오고 바닥이 피로 흥건해지자 비로소 탐욕을 접는 인간. 자연과 인간의 거대한 싸움에서 나는 경악과 몽환을 동시에 경험했다.

 

처음에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여관은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소설의 계보에서 <모비 딕>은 분명 탐험소설에 속하지만 읽기 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철학적이고 탐구적이다. 바다 앞의 인간, 인간 앞의 바다, 그리고 고래. 크게 잡아도 세 가지로 요약되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빠르지 않고 만만하지도 않다. 바다든 갑판 위든 고래든, 열 길 물 속이든 한 길 사람 속이든 아무것도 모른다. 바다는 아무것도, 첫날밤 새색시처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 고래는 대체, 무슨 연유로 끌려나와 쓰러져 피토하고 아낌없이 다 내주고 돌아가는가. 어디로.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거나 모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종교가 정말로 광신적이 되어 그 사람에게 명백한 고통이 되면, 그리하다 결국 우리의 이 지구를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버리면, 그 개인을 구석으로 데려가서 문제점을 따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 <모비 딕>)

 

탐험이나 모험에서 볼 수 있는 속도감보다는 사색적이거나 철학적인 여백의 공간이 더 넓다. 단순히 고래잡는 얘긴 줄 알고 덤볐다가 내 주말이 사색으로 가득 찼다. <암흑의 핵심><어둠의 심연>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맞닿는다. 문체는 반짝이고, 시도는 새롭고, 스며드는 시선은 따스하다. 고래의 계보와 특성은 부수적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바다와 기약할 수 없는 긴 항해, 죽음을 무릅쓴 40년 간의 필사적인 사투에서 미지의 공간을 찾을 수 있다. 필요한 건 예비 보트, 예비 돛대용 목재, 예비 밧줄과 작살, 쇠고기와 빵, 물, 연료, 쇠테와 통널 등의 항해 도중 잠깐씩 정박하는 항구에서는 구하지 못할 귀한 물건들이고, 이 미지에 참여한 이들은 기이한 식인종 퀴퀘그, 이슈메일, 빌대드 선장, 펠레그 선장, 에이해브 선장, 채리티 아줌마, 일등항해사 스타벅, 스틸킬트, 래드니, 그들은 바다 위에서 차례로 죽어나간다. 그게 운명이라는 듯, 만약을 영원히 반복하는 벌이 주어졌다.

 

군함의 닻을 계류용 밧줄을 매는 기둥으로 삼고 작살 다발을 박차로 삼아 저 고래에 올라타고 가장 높은 하늘로 뛰어 올라가서, 무수한 천막이 늘어선 가상의 하늘이 정말로 내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진을 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먼 멜빌, <모비 딕>)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바다를 만나고 포경선은 포경선을, 인간은 하늘과 만난다. 멜빌과 <모비 딕>에 쏟아지는 공식적 찬사가 아니라도, 19세기 상상력은 확실히 지금보다 멀고 높고 뜨거웠다. 싸움이 고독한 이유는, 망망대해 배 위에서 후퇴할 공간이 한평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힘과 힘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절망하고 실패하는 이야기이기에 성스러운 경지에 있다. 증오는 복수가 되고, 복수는 위험을 무릅쓴다. 에이헤브 선장이 자신을 물어뜯은 고래에게 집착하는 동안 배에 탄 사람들은 목숨을 위협받는다.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먹힌 에이헤브가 40년간 바다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하늘 아래 두 존재가 동시에 평화로울 수 없다는 상황은 자연에게 지배당할 것인가, 자연을 지배할 것인가와 상통한다.  

 

"계속 태양 쪽으로 몸을 돌리는구나. 죽음을 앞둔 마지막 동작으로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이마를 돌려 태양에 경의를 표하고 기원하는구나. 고래도 역시 불을 경배하는구나. 태양의 가장 충실하고 광대하고 당당한 신하여! 아아,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내 눈이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이 광경들을 보는구나. 보라! 물로 에워싸인 이 광대한 바다를 보라. 더없이 공정하고 공평한 이 바다에서는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허먼 멜빌, <모비 딕>)

 

에이헤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복수를 한다 해도 인간의 발을 뜯어먹을 고래는 없어지지 않는다. 종이 번식하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이 없애버리면 그러지 않겠지. 그렇다고 인간이 고래 위에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인간이 고래에게 도전하는 한, 고래에게 먹힐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기한 건 멜빌이 의도한 이 위대한 모험소설 안에 인간 군상은 물론 세계를 둘러싼 모든 의도가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신, 사랑과 증오, 일상과 일탈, 종교와 광기, 위대한 주제로 꼽히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까지. 마지막으로 고래포획은 금기시되지만 여전히 불법수탈로 이뤄지고 있다. 달리 먹고살 일이 없는 북극에서는 고래를 못잡게 하거나 북극곰 개체가 줄어들자 도시 번화가로 떠나 약탈당한 마을마냥 변두리가 텅 비었고, 여러 생명체의 포획은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도 큰돈이 된다고 들었다. 예전에 푸른 제주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생각이 난다. 뭔가 짠해서 일부러 다큐까지 보고 그랬는데 돌고래조차도 이렇게 감격스러운데 흰 고래라니, 모비 딕이라니, 한동안 북극사진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세계가 지구촌이 아니라는 걸 믿으면서도 세계 어디로든 맘만 먹으면 내 발로 밟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북극은 아직도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미지의 장소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주말이 황홀했다는 것은 동시에 대충봐도 2000페이지는 넘는 문자를 소화하느라 진이 빠졌다는 소리다. 다음 소설 한 권을 집어드는데 페이지가 얇아지니 중무장하고 행군하다가 무거운 거 다 벗어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독서의 무게는 페이지수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만 지난 주말에는 분명 그랬다. 팔과 머리가 동시에 무거웠으니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시간을 팔아 책을 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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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3-25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써로... 폴 서루...
왜 다른 책은 번역이 안되나 했더니, 아프리카 기행문이 있었군요. @@

아이리시스 2014-03-30 07:49   좋아요 0 | URL
이름이 낯익긴 한데 이상하게 다른 데서도 들어본 듯한 이름이에요. <아프리카 방랑>에 보면 자기책 인용 되게 많이 하는데 정작 번역된 건 하나도 없었어요. dreamout님은 벌써 알고 계셨군요!

막 버라이어티한 여행기 기대하시면 드라이하고 딱딱할 수도 있는데 그냥 무난해요^-^b

2014-03-26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30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4-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래서 아이리시스님이 좋아요 ㅋ 불 타는 주말을 보내셨네요. ㅎㅎㅎ
글 속에 쓰고 쓰고 또 쓴 집념의 아이리시스님이 참으로 좋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전 왜이리 숨어지내는지. ㅋ
전 독서가 어렵네요. 글도 못 읽고 쓰지도 못하고 있어요. 푸하

아이리시스 2014-03-30 07:47   좋아요 0 | URL
불 타는 주말, 앗싸라비야, 하고 싶었는데. 사실 좋다고 생각해요. 아무 방해도 안 받고 일주일에 하루쯤 책만 읽는 거. 그치만 그러기에 제가 너무 젊죠. 건강하고. 예쁘죠. 푸핫.
루쉰님 기다리다 지쳐갑니다. 교도들과 신자들도 모두 파업했어요, 반성하세요!
돌아오세요, 언제든지^-^

Shining 2014-03-29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걸 주말에 다 읽었어요....?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요........(털썩) 저는 모비딕도 아직 안 읽은 독자...ㅋㅋㅋ
저는 이번 주말에 영화 세 편을 보기러 했는데 벌써부터 다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왜 읽지도 못할 책은 만날 보관함에 담고, 당장 보지도 않을 영화를 결제하는거죠? 왜, 왜그러죠. 나만 그런가.......

이번 주말엔 뭐 읽어요? :)

아이리시스 2014-03-30 08:13   좋아요 0 | URL
그런데 주말이 참 짧아요. 후딱 지나가요. 책이 참 별거 아닌데 대단한 게, 세 권 읽느라 지난 주말엔 정말 한 게 없어요. 잠을 많이 자긴 했지만 거의 책만, 진짜 책만 읽어야 이틀(정확히는 하루 반나절이지만)만에 끝납니다..(흐억)

금요일부터 비가 와서 날씨가 되게 별로예요. 어젠 하루종일 비왔고 오늘도 흐려요. 주말 날씨 뭐 이래.. 그렇지만 영화 보러 가기로 했으면 봐야죠! 어떤 영화 보러가는지 궁금해요...

제말이요... 맨날 담아요.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보관함 터져나가요. 오천권은 있을 거예요. 정리할 엄두도 안나요. 어느날 싹 지우고 다시 담기 시작해요. 이게 뭐하는 거죠? 왜그러죠? 두 달 동안 책 안샀어요. 돈 없어요, 흙흙. 집 여기저기 책이 쌓여있으니 엄마 눈치가 좋지 않아요.-_- 이렇게 4월까지 참을까 싶어요. 히히히^-^

이번 주말엔 서평도서를 해치우겠어요. 음음, <책 읽는 소녀>, <미시시피 미시시피>, <포트노이의 불평>, <대구>가 있어요! 근데 어제부터는 <윈터스 테일>을 읽는 중 :)

일요일이 밝았어요! 영화 재미있게 잘 보고 와요 ^______________^

맥거핀 2014-03-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이걸 책지옥이라고 해야하나요, 책천국이라고 해야하나요? 그야말로 책들을 씹어먹으면서 날들을 보내고 있군요. 가끔 보면 저는 알라딘 오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책도 안 읽는데, 왜 여기와서 기웃거리고 있는지...근데 진짜 저 같으면 책 읽다가 지쳐서 포기할 것 같은데...대단해요!

<모비딕>은 아주 예전에 읽었는데...읽고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쓸 생각을 했지,였어요. 어떤 이야기나 책들은 아주 가끔 다른 무엇인가가 인간의 손을 빌어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4-03-31 11:14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안녕, 오랜만. 제가 좀 극단의 끝장판이라 중간이 없어요. 다 읽겠다고 작정하고 덤빈 거였으니 목표달성한 셈이죠. 재미로 읽었음 진작에 포기했겠죠. 제 의지도 뭐 그리 굳건한 편 아닌데다, 취미생활에 그럴 필요가.. 책도 안 읽는데 왜 여기와서 기웃거린다니요... 큰일날 소리. 그러다 안오시면 저는 어쩌라구요.........

<모비딕>이 재미있을거란 생각은 들었어요. <해저 2만리>도 재밌게 읽었고, 요즘은 바닷속 세계와 생명체에 관심이 가요. 여튼 대단해요. 눈앞에서 고래가 뒤집는 광경을 보고싶을 만큼. 멜빌이 19세기 사람이라는 걸 전제해도 그렇고 안해도 그렇고요. 그 어떤 현대작가보다도 세련된 문장으로 써요. 맥거핀님은 은근 문학 많이 읽으신 독서가 느낌....
 

 

 

페이퍼 제목의 문장은 카프카가 한 말이다. 나는 애초부터 내가 나 이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가름나진 않았지만 여튼 카프카는 좋은 뜻에서 한 말이겠지, '휘어진 그림자를 원망하면 안된다. 휘어진 내 몸을 펴야만 한다'고도 했으니까. 어느덧 올해 첫달도 다 지나간다. 말일에 명절 연휴가 있으니 그전에 뭘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첫문장을 못 쓰는 슬럼프에 빠졌다. 시간의 텀으로 나는 점점 가라앉는다. 더 깊이 가라앉으면 떠오르는 시간도 더 길어질 걸 알면서도 뭍으로 올라와야 한다는 걸 자주 잊는다. 귀찮아졌고 지루해졌고 동기부여가 사라졌고 책과 TV는 재미있다. 굳이 적자면 책 몇 권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영상으로 옮긴 다큐를 보았다. 생전 처음으로 스크립터가 되어보았다. 읽어야 할 책을 못 읽어 써야할 리뷰 기한을 넘긴 걸 까먹을 만큼 하얀 여백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얼른 검은 글씨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늘 말하지 못해 안달하고 쓰지 못해 애태우는 애였는데. 간혹 극장과 집을 오가며 텔레비전과 씨름하면서도 나는 잘 살아갈 것이다. 책과 그림, 술과 사람으로 더 풍성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과는 별개로. 이럴 땐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 열정에 바친 예술가들이 부러워진다. 

 

'내 영화, 그림, 표면만 봐라.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던 워홀은 돈을 버는 것, 일하는 것, 사업을 잘하는 것 모두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림은 돈이 되기 어렵지만 건축은 곧 돈이고, 책은 팔려야만 돈이 되고, 영화는 티켓을 파는 걸로, 방송은 광고를 통한 소비욕 자극으로 돈을 번다. 워홀은 상업 예술가, 나아가 사업 예술가를 꿈꿨다. 슬로바키아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 부모 밑에서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은 그가 뉴욕으로 건너간 건 1949년이었다. 그곳에서 스물 다섯의 동성애 작가인 트루먼 카포티에게 반한다(사랑으로서인지 우정으로서인지 팬으로서인지는 몰라도). 큰 틀에서 보면 예술사에 획을 긋거나 혁신한 건 없지만 그는 24시간 파티장, 히피문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예술패턴이 확연하게 달라지던 역사적 순간에 서 있었다. 워홀의 도전정신은 약간의 발상 전환만으로도 누구나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고흐 생전 유일하게 400프랑(당시 우유 한 잔이 1프랑)에 팔린 <아를의 붉은 포도밭 [Red Vineyards at Arles, 1888]>은 파리의 안개에서 벗어나 프로방스를 거쳐 빛을 향해 남쪽으로 향하던 고흐가 아를의 론 강 근처 작은 마을에서 고갱과 함께 생활하던 중 그린 그림이다. 고흐는 평생 꿈꿨고 가난에 시달렸다. 산만한 사색가였던 그는 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다. 본인이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의 짧은 생애에는 불행의 요소가 많았다. 반면 워홀은 나중보다 현재의 명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돈을 벌 수밖에 없던 이유다.

 

 

* "일단 유명해져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앤디 워홀

 

* "내가 지금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나중에도 가치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사람들이 나에게서 어떤 가치를 찾는다면 나는 지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이름 모르는 풀잎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밀은 밀인 것이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보다 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가슴이 시키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죽음이 두려우세요?

"외로움보다는 덜 무서워."

기도를 하세요?

"그럼, 난 사랑을 믿거든."

일을 하시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요?

"매번 무대 커튼이 올라갈 때마다."

여자로서 가장 좋은 기억은요?

"첫 키스."

밤을 좋아하세요?

"그래, 많은 불빛과 함께라면."

새벽은요?

"피아노와 친구들이 있으면 좋지."

저녁은요?

"그건 우리에겐 새벽이거든."

여성들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어요?

"사랑."

젊은 여성들에게는요?

"사랑."

어린이들에게는요?

"사랑."

누구 옷을 뜨시는 거죠?

"내 스웨터를 입을 사람."

 

초등학교 중퇴, 키 142센티미터, 부랑의 미혼모, 파리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이브 몽탕, 장 콕토,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 테오 사라포. 가난 속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자란 그녀는 남자(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건네는 모든 조언이 '사랑'에 치중될만큼. 그녀는 <장미빛 인생(원제:프랑스어: La môme, 영어: La Vie en rose)>의 주인공 에디트 피아프이다. 노래와 사랑에 모든 영혼을 바친 여자. 장 콕토는 에디트 피아프에 대해 '나는 피아프보다 영혼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 "사랑은 경이롭고 신비한 거야. 사랑은 나에게 있어 노래를 부르게 해주는 힘이지. 노래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노래는 존재하지 않아." -에디트 피아프

 

 

또다른 여성작가 한 명을 보자.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가 다른 큰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다. 신경쇠약에 걸리고 전염병으로 어머니를 잃은 뒤 정신질환 증세마저 더해져 자살을 시도한다. 나중에 언니의 권유로 아버지가 같은 남매 넷이 따로 나와 살다가 블룸즈버리 그룹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여기서 포스트, 케인스, 러셀, 헉슬리, 엘리엇, 미술가 프라이 등과 만나고, 역시 블룸즈버리 그룹에 속해 있던 남편과 결혼한다. 그녀가 결혼 후 1차대전이 일어나기 한해 전 <출항>을 탈고한 후 자살을 재시도한 것이나 전쟁의 도가니 속에 미쳐가던 59세에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서 주머니에 돌을 넣고 물속으로 걸어들어가 끝내 자살에 성공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늘 정신이상이 도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강박증에 시달린 울프가 남긴 유서에는 '저는 생명을 잉태해본 적이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로서의 역할을 여기서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쓰여있었고, 그녀의 시신은 3주 후 강물 위로 떠올랐다.

 

 

 

"당신은 왜 눈동자를 그려넣지 않나요?"

"내가 그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리게 될 거야."

 

반면 가톨릭의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란 19세 여인. 이탈리아 출신으로 리보르노, 피렌체, 베네치아를 거쳐 파리로 터전을 옮긴 이후 장 콕토, 피카소, 마티스를 만나지만 아방가르드 미술은 물론 어느 화풍에도 가담하지 않고 고독 속에서 독특한 예술실험을 해나간 남성. 그가 결핵성 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림 <자살>을 남기고 9개월의 둘째 아이를 간직한 채 5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린 여자는 베개 밑에 면도칼을 품고 자던, 사랑밖에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22세의 여자였다. 남자와 여자는 20세기 파리 데카당스 청춘들의 한중심에 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이다. 생전 연인이 나눈 대화는 눈동자를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라고 여긴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모든것을 걸었던 에뷔테른의 잔잔한 행복과 슬픈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하다. 가난한 유대인 화가와 딸의 결혼을 끈질기게 반대한 여자 부모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합장된 그들의 묘비명은 이러하다.

 

-이제 막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모든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반려

 

 

대가는 도와주고 믿어주는 이가 적지 않은 걸로 이미 대가가 된다. <살인자의 기억법> 말미에 덧붙여진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 작가는 백수 작가지망생 아들의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매일 비워준 아버지 덕분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썼다. 물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더 좋은 작가가 되겠다고도 썼다. 그렇다면 프로이트 역시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업적과 영광을 돌려야 할 듯하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아들의 발가락이 내 머리보다 영리하다'고 했다. 사람들을 이를 두고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표현한다. 다윈의 진화론과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의학을 선택한 프로이트는 '이 작품은 내가 운 좋게 발견한 것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물들을 담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했던 <꿈의 해석>을 2년간 351부밖에 팔지 못했다. 제1차대전 즈음 독일군을 대상으로 정신병학을 연구했다는 명목으로 나치정권은 그의 서적을 불태웠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면서 게슈타포의 위협을 받게 되자 루즈벨트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82세에 영국으로 망명한다. 프로이트의 생도 알고있던 것보다는 훨씬 파란만장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깊숙이 마음을 뚫고 들어온 말은 피카소의 입을 통해서 왔다. 다이어리에 뭔가를 한줄 끄적였다. 그리고 비로소 첫문장을 시작한다. 나쁘지 않게, 더 늦지 않게, 최선을 다하여. 대가들의 짧은 문장 안에서 인생을 대표하는 삶의 자세와 표정을 본다. 나는 자주 어떤 문장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희망을 발견하고 열망을 키운다.

 

* "착상은 출발점일 뿐이다.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 "세상이 지나치게 좁든지, 아니면 우리들이 엄청나게 크든지, 어쨌든 우리는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프란츠 카프카

 

*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못참을 게 없다는 것이다." -아르튀르 랭보

 

 

하루종일 비맞은 대지가 축축한 물기를 머금었다. 날이 어두웠고, 하늘이 가라앉았고, 나는 무기력했다. 최소한의 말귀가 통하지 않는 어떤 사람 때문에 뜻하지 않게 욕설이 오고가는 싸움을 해야 했다. 집안일이다. 동생이 자진해서 갔지만 동생의 급하고 독한 성격을 알기에 싸움터에 보낸 기분은 편치 않다. 욕은 하되, 손은 대지 마, 말했지만 흥분에 들뜬 동생은 금방 내 말과 내가 말했다는 사실마저 잊을 게 뻔하다. 돌아와서 내가 저사람을 때릴까봐 경찰을 불렀다고 말했으니까. 이제 우리가족은 내가 지킨다며 두주먹 불끈쥐고 나서는 저애가 어릴때부터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며 식구들을 불안에 빠뜨리던 그애가 맞나. 지구대를 거쳐 경찰서까지 갔다 돌아와서도 의기양양하다. 그래, 저애는 웬만해선 기죽는 법이 없지, 그게 자주 나를 미치게 했고, 가끔은 든든했지만. 낮엔 피자를 시켜줬고, 늦게 일어난 내게 피자 데워먹고 있으라고는 싸움터에 갔다. 불안의 오후가 지나고, 장녀인 나보다 더 장남같은 동생의 비행담을 줄줄이 생각해보면서 피식거린다. 저애는 온 삶이 반짝이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이 불합리한 세상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뜨거운 자만의 흔적이랄까.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려스러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역시 든든하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悲歌를 읽는다. 비가 그쳤는지 밖에 나가볼 생각이다.

 

...

다만 많은 것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삶 속에 있는

모든 것. 사라져 가는 것이 우리에겐 필요하며

이상하게도 우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쉽사리 사라지는 우리와,

한 번, 모든 것은 단 한 번 존재할 뿐, 한 번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

우리도 한 번 존재하노니 결코 다시 시작되는 법이 없다, 하지만

한 번 이렇게 존재했다는 사실은 되물릴 수 없으리라.

...

대지여, 사랑하는 그대여, 내 바라노라, 오오 믿어라, 이제

그대의 많은 봄 필요치 않으리, 나를 그대에게 이끌기 위해 - 하나의 봄,

아아, 한 번의 봄만으로도 내 피엔 너무 많노니,

이름도 없이 나 그대에게 가려하노라, 오래 전부터,

그대는 늘 옳았노라, 그대의 성스러운 착상은

허물없는 죽임이니.

...

 

-릴케, <두이노의 비가> 제9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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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6 0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4-01-2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디 워홀의 말이 재미있어요. 일단 유명해지라는 말도 그렇고, 내 영화, 그림, 표면만 보라는 말도 그렇고요. 그렇다고 사람들 박수 받으면서 똥을 싸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무것도 없다던 그 '뒤'에 보이는 속셈은 한 번 뒤집어보고 싶기도..

그나저나 님에겐 참 든든한 문장들, 아니, 동생이 있군요. 부럽습니다.

아이리시스 2014-01-27 20:22   좋아요 0 | URL
포핀스님, 저는 확실히 워홀 스타일 쪽은 아닌것 같아요. 유명해지면 돈을 많이 벌고 명성도 얻겠지만 일단 유명해지라는 말에 동조할만큼 제가 성공지향형 인간은 아닌 듯해요, 슬프지만. 아닌건 아닌거죠, 저는 저니까요^^

따로살더니 엄마밥 못먹어서 덩치가 커진, '자주' 짜증나게 하지만 '가끔' 든든한, 피자,자장면,탕수육,순대국 이런거 같이 먹는 아직 같이 사는 동생이 있습니다.. 그제,오늘은 좀 든든합니다. 일년에 이틀 정도만..

2014-01-2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문장도 아이님 글 맥락에 놓이니 다르게 읽히네요. (더 의미 있어져요.)
근데 "세상이 너무 좁거나 우리가 너무 크다. 세상은 자신으로 꽉 차 있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사실 오늘 전 그 정반대를 느꼈어요. 세상은 아주 큰데 우리는 너무 작죠. 작은 몸에 걸맞게 좁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저 너른 산맥과는 달리... 오늘 남부에서 로마 오는 기차에서 느낀 거예요. 근데 첫문장이 안 써진다는 건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건데요.?! 아마 소설 아닐까요? 맞죠? :)

아이리시스 2014-01-27 20:17   좋아요 0 | URL
거기 좋아요, 섬님? ^-^bb

친구신청 받아줘서 고마워요. 사진 틈틈이 잘 볼게요!
맞아요, 서글프기도 하지만 세상은 아주 큰데 우리는 너무 작죠. 커지려고 애쓸 뿐이죠. 음, 생각해봤는데요, 첫문장이 안 써진다는 건, 저걸 쓰던 시점부터 지금까지는 '계획한 일과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하기가 싫어' 의 뜻이었던 것 같아요. 징징댄 거죠. 그래서 사실은 그날 다이어리에 초딩계획표 닮은 몇 개월 계획표 짰어요. (소설을 쓰는 건, 소설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어 (책이든 글이든)잘 팔리고 돈을 많이 버는, 그래서 그돈으로 진짜 마음속에 가득찬 꿈을 이루는 것보다는 아주 쉬운 일이에요, 섬님^^)

남부 어디일까 막 궁금해요, 소렌토,나폴리,아말피,카프리,포지타노,베네치아,피렌체,하하, 마지막 두개는 남부도시에 속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기억에 의하면 로마보다는 남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이제 로마에 계세요? :)

안그래도 소식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가웠어요! 남은 시간 즐겁게, 안좋은 일은 당하지 마시고 행운만 가득하시길! (진심-빨리와요, 배아파,부러워,나도가고싶어,어서와요,빨리오세요,빨리)

아이리시스 2014-01-28 01:54   좋아요 0 | URL
으하하, 뭔가 촉이 와서 제가 지금 막 이탈리아 지도 검색했더니 저 도시들중에 로마가 제일 남쪽.. 이걸로 제 방향감각이 제로인 건 증명되고...( '')
그러니까 저는 제가 이동한 순서가 남에서 북으로, 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우리나라에서도 남쪽에서 사니까. 어쨌거나 섬님이 로마에 계신건 안변하니까 으하하하

사진들 좀 보고 잘게요!

2014-01-28 0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9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3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3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6 0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작가가 그런 글을 쓴 걸 보았어.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대. 어느 날 밤 문득 그 사람의 손을 꼭 붙들고 도망치고 싶어 한 사람과 그런 생각 같은 거 해보지 않은 사람. 손을 꼭 붙들고 말이야."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지구별에서의 뜨거운 마지막 밤, 손을 꼭 붙들고. 뜨겁고도 황홀한 사랑을 반추한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 우리말로 된 소설을 읽을 수 있다면 갖은 구멍 사이로 감성이 뚝뚝 흐를 듯한 이런 제목들이어야 할 것. 굴업도와 소이작도와 소청도의 별이 사라지면,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들 한가운데서, 혼자만 너무 꼿꼿이 섰다가 비로소 조금 지칠 때, 순박한 짠내와 비릿한 그리움이 겹칠 때, 그래서 어서 훌쩍 나이를 먹고 싶을 때 다시 찾기로 나는 종종 약속하곤 한다. 최근, 책장을 뒤엎으면서 한곳에서 우르르 쏟아지기에 다시, 그렇게, 어쩌다가.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그리고 새로 읽기 시작한 소설은 기대했던 것보다 좋다. 그리고 줄줄이 엮인 어떤 책들에서 내가 공통적으로 맡았던 크고 강한 침묵과 함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조금 쓰고 싶어졌다. <사람을 위한 경제학>을 올해 만난 가장 소중한 책으로 꼽으며 두 주먹 불끈 쥐고 덤벼든 순간과 감성이 폭발해 예전에 끝난 줄 알았던 책들과의 인연을 다시 맺으려 전전긍긍하는 순간, 그러니까 인생의 두 가지 순간 못지 않은 책과의 두 가지 상반된 순간을.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다른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 바위 보는 아니다. 
  굳은 표정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밤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이장욱, '얼음처럼'


















그날 밤의 고백은 이제껏 K가 해온 사랑에 비하면 약간 더 놀랄 정도였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K의 연애는 늘 특별했다. 우리 중 가장 간절하게 현모양처를 꿈꾸고, 누구보다 착실하고 다정한 여자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K의 인생에서 사랑은, 아마도 망망대해 홀로 떠있는 섬처럼 매번 서글펐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놀라지 않은 이유는, 꽤 오래 전 마지막일 줄 알았던 사랑을 끝낸 K라면 더이상 상상력을 발휘해도 남는 게 그 경우 뿐이었기 때문이다. K는 늘 제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 사랑을 앓았고, 그에 대해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아는 유일한 사람이 우리였다. 천성이 쾌활하고 맑고 부지런해서 나는 종종 '지는 게 이기는' 당연한 진리를 K로부터 배웠다. 

열일곱, 곱고 아련한 시절부터 함께라는 이유로 나는 K가 제 사랑 앞에 놓인 돌을 얼마나 야무지게 치우곤 했는지, 끊어진 실을 부여잡고 얼마나 많은 밤을 아파했는지, 미련하리만큼 최선을 다하고 온 마음 다해 착실했는지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본인들에겐 더없이 애절한 마음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남는 사랑의 잔인한 전설을 모른 건 아니다. 당장 끝내란 말을 삼키며 겨우 내뱉은 말은 믿을게, 라는 작은 응원이었다. 우리 '사랑과 전쟁' 주인공은 되지 말자면서. 불륜은 나쁘지만 사람은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합리화가 마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밤마다 서글프게 울리는 K의 전화벨 소리에 즉각 답하는 다정한 친구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우정이 압사당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여웠다. 행복은, 책임만으로 지켜지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또 한번 생각했다. 우정이, 우정으로 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이 뭘까 싶은 내밀한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말할 때의 글이 '리뷰'가 아님에도 진짜 고민과 방황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채 자주 오해받곤 했던 것처럼, 어쩌면 적당한 아는 척과 모르는 척이 뒤섞인 이곳에서만 겨우 말함으로서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웠던 침묵과 인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순간에 절망이 밀려왔던 것을 잊지 못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해도 그 밤을 결국 견디지 못했을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깨달았다. K에게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존재가 되어야 했다. 결국 전해지지 않을 어떤 걱정을 행여 K가 읽을 수도 있는 곳에 남기며, 언젠가 약속한 그날의 치기어린 꿈처럼 무겁게, 세상의 잔혹한 이치에 절망하는, 별이 지는 밤. 별이 뜨고 지는 게 그렇듯 K의 선택은 내 몫이 아닐 것이다.


견고하게 남아 있기 위하여.
나는 그 문장을 생각했다. 영우 오빠의 가슴에 남은 그녀의 모습엔 결코 군살 따위가 없을 것이다. 초점 흐린 눈빛도 없을 것이고, 눈가의 잔주름도 없겠지. 청정한 댓잎과도 같은 이마와 맑은 물 같은 눈빛과, 사랑의 확신으로 단단히 다물린 더운 입술의 그녀가 남아 있을 터였다. 만일 1972년 그해, 그녀가 노상규를 버리고 영우 오빠 곁에 남았다면 그들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행복했을까. 끝없는 가난, 잔인한 압제, 겹치는 불운으로 그들은 하루하루 서로가 어떻게 망가지고 부식하는지 오히려 똑똑히 보았을 게 틀림없었다. 사랑만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은 전설 속에 있을 뿐이었다.
잔인해.
잠든 혜주 언니의 머리맡에서 나는 말했다.
사랑은 잔인한 형벌이야.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주 오래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궤변이 지금 다른 진실로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후회의 사슬을 온몸에 감고, 급기야 서로에게 서로가 가해자로 둔갑한 삶을 상상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혜주 언니와 영우 오빠가 함께 살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사랑은 증오가 되고 삶은 감옥이 되었을 그 잔인한 하늘에 어찌 줄 끊어진 연일망정 떠서 흘러갈 수 있겠는가.
(박범신, <외등>)


<외등>에는 위 장면을 넘어서는, 훨씬 더 강렬하고 사악하고 위험하고 격정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정작 본인들에게는 오래 전에 끊어진 연, 그 연을 필두로, 이제서야 그와 그녀를 이어보려는 혹은 끊으려는, 재희의 눈으로 세월의 끈끈함을 각인시킨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울었던 제3자, 구조로 보면 재희는 등장인물 중 가장 쓸쓸하고도 아득한 세월을 감싸쥔 화자다. 지구별에서의 마지막 밤과 멀어져간 우주를 맞대어 붙이려는 시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함께 있지 못하는 사랑은 전설이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다 몰랐고, 그녀는 그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재희는 그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존재가능한 모든 비밀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단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몰랐겠지만. 왜 한 사람만을 믿으려 하는지, 어째서 한 사람에게만 속는지, 어쩌면 놓치는 게 가지는 건지, 어떻게 끊어진 연이 '행복'한 마지막일 수 있는지. 마음이 허할 땐 목적지 없이 그저 걷는 게 좋다. 내가 나를 못보도록 작고 가치없게 걷는 길. 노래는 한 곡 뿐이었다.




사랑과 증오의 관계는 너무도 내밀한 것이어서 그들 사이에 오간 말들을 모조리 채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의 전부일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박범신, <외등>)



10년 전, 수애를 스타덤에 올렸던 미니시리즈 [러브레터]는 사제가 되려는(혹은, 된) 한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을 성당에서 함께 보낸 둘이 대학에 가면서 각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생활의 반경이 넓어지면서 생겨나는 잦은 오해와 끈질긴 마음과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담아낸. 사랑과 신성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에 비하면 지향하는 지점이 다를 뿐더러 메시지조차도 상반되지만 <높고 푸른 사다리>는 성직자의 꿈을 안고 속세를 버린 채 베네딕도 수도원에 모인 이들의 삶에 얽힌 사연을 담아내는 동시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수사(修士)의 하늘(신)에 닿기 위한 노력과 고통을 수반한 사랑(욕망)의 갈등을 통해 자신과 둘러싼 세상에의 궁극적 탐구 여정을 따라간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오직 한 인간으로서 신성한 사제가 되기 위한 믿음과 인내를 시험받는 남자의 번뇌에 집중하면 책 소개글에 쓰인 것처럼 하늘에 닿기 위해 제일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간 한 영혼의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그보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제시하는 조심스럽고도 단호한 방향잡이와도 같지만 말이다. 

"말하기로 했어. 내가 세운 규칙이 부질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는 내 부족함을 울기로 했어. 나는 내가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슬픈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틀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더 강하긴 하지만 행여 기억이 맞다면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뺑뺑이로 배당된 졸업작품(소설) 담당교수라는 이유로 그녀가 무척 궁금해진 나머지(수업도 들었지만), 방 구경을 위해 사보았던, 서해문집에서 나온 <작가의 방>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쌤이 아니라 공지영 작가의 말이다. 궁금증이 생기면 제일 먼저 서점으로 달려간다고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생경해서였다. 나도 대체로 그러했기 때문이고, 온 천지 묻기만 하면 누구든 알려줄 지인이 넘쳐날 듯한 사람이 궁금증이 생기면 가장 먼저 책을 펼치고 또 믿는다는 말이 신기해서였던 것 같다. 


자녀들의 도시락을 싸거나 요리를 해야 할 때는 요리책을, 힘들거나 위로받고 싶을 때는 종교서를 읽으며 달랜다는 말이 작가로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면서도 새삼스러웠다. 이 얘길 하는 이유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믿는 종교(물론 가톨릭이겠지만)가 무엇이든 <높고 푸른 사다리> 같은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자아 혹은 정체성 찾아 삼만리 소설이 낯설지 않다는 뜻에서다. 소설로서의 잠언집 느낌이 물씬하니 계속 한 달 전쯤 읽은 코엘료의 <아크라 문서>를 떠올리고 있다. 그쪽보단 이 소설이 훨씬 재미있을 뿐더러 더 마음에 든다. 


오래 전 <수도원 기행>을 퍼낸 적도 있으니 그다지 새로운 정보도 아니건만, 나는 어째서 새삼 요한의 번민과 고뇌 속으로 깊이 몰입하게 되는지. 어딘가 닿고 싶은 지상의 모든 이들 앞에 높고 푸른 사다리 하나쯤 놓아주고 싶은지. 나, 그 사다리 타고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로 훌쩍 사라지고 싶은지. '수도원'이 배경인 문학으로는 퍼뜩 떠오르는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가 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높고 푸른 사다리>는 <에리직톤의 초상>과 더 많이 닮았다. 

 

 

"냉철한 머리, 뜨거운 가슴"

-알프레드 마셜 (Alfred Marshall, 1842~1924)

 


한 조각의 빵이 없어서 우는 사람이 있고 100조각의 빵이 지루해서 우는 사람이 있어. 둘 다 지옥 속에서 사는 거지. 어쩌면 빵이 없는 형벌은 빵 한 조각이 주어짐으로써 단순하게 벗어날 수 있지만, 100조각의 빵이 지루해서 우는 사람을 구원할 길은 참으로...... 참으로 없어." (같은 책)


작가는 '요한'을 주인공으로서 삼았으면서, 정작 진짜로 하고 싶은 메시지들은 거의 다 '미카엘'의 손에 들려준다. 놓여나지도 사로잡히지도 못해 괴로워하는 요한을 보자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본능에 충실한 페스티벌을 즐기는 것 뿐인 듯하다. 귀퉁이 접힌, 다 읽지 못한 혀의 감촉을 포함하여 헤맬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 



심보선, '독서의 시간'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우주가 기우뚱했고 그리고 다른 우주가 생겨나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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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12-10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면 거의 매년 문학상 수상집 같은 걸 최소 1권은 읽었었는데, 올해는 생각해보니 한 권도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올해나온 수상작품집 하나를 읽고 있어요. 근데 (상당히 건방진 얘기겠지만) 이름들은 거의다 익숙한 이름들인데, 어째 이상하게 감흥이 오는 게 별로 없어요. 분명히 소재들도 새로운 면이 있고, 기존에 못봤던 스타일도 있지만, 왜 그런지..소설 읽는 감각이 많이 없어졌나봐요. 그래서 장편을 몇 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올해 나온 한국문학 장편 중에 괜찮은 게 뭐가 있을까요? <높고 푸른 사다리> 저 소설 괜찮을까요?

참 이상한게 예전에 막 바쁘고 그럴 때는 이것도 봐야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그랬는데, 막상 시간이 생기면 할 게 없거나, 하고 싶은 의욕이 안 생겨요. 아무래도 인간의 의지란 내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시퍼요. 킁.

아이리시스 2013-12-11 01:20   좋아요 0 | URL
(상당히 건방진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다 잊혀지기 전까지 말을 안 걸려고 했어..( '')

어느 정도는 그 느낌을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책소개만 딱 봐도, 제가 좋아할 것 같은 것, 그 반대인 것, 그럭저럭할 것. 감을 잘 잡는 편이고, 대체로 맞아요. 맥거핀님 감각이 옅어졌다기보다 소설이 전반적으로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거나 '과잉'인 것 같아요. 맥거핀님은 그래도 소설 꽤 읽는 편이신 것 같은데, 아니었나요?^^

저는 <높고 푸른 사다리> 좋았어요. <도가니> 보다 좋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보다도 좋았고. 저는 저 소설들도 거의 좋았거든요. 개인적으로 어떤 기대치의 문제도 있고, 작가 자체의 네임밸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 좋아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문학적 마인드 차원에서 보면, 독서, 특히 문학읽기는 어느 정도의 마음의 의욕을 동반해요. 예전에 진짜 힘든 적 있었는데, 마음이 힘들 때는 책이고 뭐고..영화고 뭐고.. 시간이 많아서 잘하게 되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시간만 많아가지고선 그다지 쓸데가 없죠. 돈도 필요하고, 애인도 필요하고, 의지도 필요하고, 친구도.. 맥거핀님도...( '')

올해 나온 소설 떠올려 보지만 딱 꽂힐 만큼 좋아한 게 있었는지 생각이 안납니다.. <지상의 노래> 좋아요!! 해외것도 골라야 하나요?

맥거핀 2013-12-12 00:28   좋아요 0 | URL
그럼 <높고 푸른 사다리>와 <지상의 노래>를 읽어볼까요? 장편은 아니지만, 오늘 서점에서 김연수 작가의 신간을 사기는 했습니다만..^^; 나는 그래도 우리나라 소설들이 여전히 좋고, 나름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12-12 12:05   좋아요 0 | URL
안 읽었지만 추천할까 했는데(뭔짓이냐!) 샀다는 댓글 보니까 딱 제 맘 들킨 것 같네요. 저도 사긴 했는데 어제 표제작 펼쳤다가 가만히 다시 닫은.. 단편은 학교때부터 늘 빌려오고 사고 그런데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어요.

지상의 노래, 는 작년에 나왔는데 그걸 막 올해 거라 추천하질 않나.. 가만보면, 제가 진짜 산만한가 보오(갑자기 사극톤), 고상하고 침착하고 차분하고 싶지만 도통..원체.. 그래서 오늘 굳게 결심한 건데, 말이라도 적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쉰P 2013-12-1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라는 친구는 유뷰남을 좋아했나봐요;;;; 전 왜 딴 내용은 안 들어오고 이런 것만 눈에 들어오죠..
"사랑은 잔인한 형벌이야"
이게 왜이리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죠..
눈은 쌓이고, 아이리시스님의 리뷰는 좋고, 문장은 저를 찌르고..
에잇, 담배나 펴야 겠어요!

아이리시스 2013-12-18 23:18   좋아요 0 | URL
사랑은 여전히 진행중인 것 같아요, 괜히 안좋은 소리 나갈까 겁나서 물어보진 않았는데.
마음 찔렸다고 "사랑은 잔인한 형벌이야" 이러고 돌아다니지 마요, 루쉰님ㅋㅋ

루쉰님 진짜 웃겨요, ㅋㅋ 많이 하고 싶은데, 큰소리로 웃고 싶은데 저 참는 거예요. 또 눈이 온다는데, 저는 내일부터 겨울잠 잘겁니다.. 너무 피곤해요.. 루쉰님은 리뷰대회 참가하도록 해요, 12월에 리뷰대회는 너무 잔혹하다..놀아야 하는데..겨울잠도 자야하고.. 에잇, 술이나..

이제 떡볶이 먹으러 갈거예요!

2013-12-18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8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장을 훑어본다장담은 못하지만 다시 꺼내볼 책은 거의 없다. 한때의 소비용이었으므로 다시 나에게로 와서 피와 살이 될 것 같진 않다. 내 한때의 시간을 채워주었다, 정도에서 정리하자. 소설과 산문 들이 주욱 늘어선 틈에서 한창 허우적대던 기호학과 음모론 해설서들 사이로 <경계에서 춤추다>가 눈에 띄었다. 당시에는 읽지 않은 책이다. 재일조선인의 신분으로 디아스포라''의 애환에 대해 써내려가는 서경식이란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이란 부제에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나는 한곳에 오래 머문다. 십년째 연애는 끝내지 못했고, 이십년째 살던 집에 살며, 다시 대책 없는 여행을 갈 용기도 없다. 새로운 생활에의 동경과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나 사랑 같은 것을 간절히 원하는 기질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이 좋다.

 

전에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고 비슷한 류의 에세이 말고 다른 성격의 책으로 좀 더 깊게 다가가고 싶었는데 워낙 독보적 위치를 보유한 소재이기도 하지만 저자 역시 본인이 획득한 굳건한 정체성을 내려놓기가 애매한 모양이다.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나의 서양 음악 순례>, <고뇌의 원근법>은 예술 에세이,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은 좀 더 학술서로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강연이나 칼럼을 묶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철학자, 평론가, 비평가들이 쓰는 글이나 인터뷰집 같은 장르에서 겹쳐지는 지점을 보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 아주 좋아하는 소재가 아니라면 실은, 같은 책을 두 권이나 읽을 필요없다. 굳이 따지면 <경계에서 춤추다>도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유명한 소설가와의 열 통의 편지 배틀. 편지글이란 것만 차이가 날 뿐, 단상에 가까운데다 특이할 것도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색적 경건함이 배어나는 글들이다.

 

 

실제 독일을 모르지만 베를린이라는 지명이 풍기는 어둡고 막막하고 질식할 듯한 공기, 그 지독한 고독을 맡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유없이 독일이 낯설고 어렵다. 생각해봤더니 러시아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와도, 히틀러,스탈린,무솔리니가 오늘날 갖는 이미지와도, 같거나 닮아 있다. 근거도 없이 머리가 행하는 배척이다. 지금의 나는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을 여지껏 몰랐던 세상을 보여줄 신세계라고 여긴다.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하이델베르크, 퓌센, 로텐부르크, 밤베르크 같은 도시들을 알게 되었고, 더이상 베를린 장벽이나 동독과 서독이라는 단어의 어감에서 예전에 종종 떠올린 막막함이나 거리감 혹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외국생활이란 건 둘로 나뉘었다. 외교관이나 해외주재원 아버지를 따라 떠돌거나 돈 많은 집 자녀들이 유학이나 요양 차 나가있거나. '의지'에 의해 여행이나 유학을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항시 충분하거나 충실하지 않고, 하고 싶은데 못해 안달하는 그 생활. (를 비롯한 주변인들)에게는 가고 싶어도 많은 걸 걸어야 하는 길이므로 경계를 넘는 게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거나 모험 아니면 도전인데, 누군가에게는 같은 일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져 고통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새삼 억울했던 건 아니다. 세계 각국을 떠돌며 자란 2세들이 인종차별이나 따돌림의 어려움으로 인한 이방인으로서의 고독과 외로움을 토로하면 내 반응은 하나였다. 아무리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어도 최소 한 달 이상 같은 곳에서 거주해보지 않고는 해당 국가나 언어에 근접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비용과 시간으로 환산하면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기회, 일 년에 단 며칠, 그것도 평생에 몇 번 허락되는 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라면 경계에서 춤춘다는,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길 잃은 그들이 부러울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환상으로 보고 자기의 행복을 평온으로 인식 못하는 한때의 나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그들이 느낀 외로움이나 어려움 같은 걸 이해 못한 건 아니다. 질투가 반이고 하소연이 반이었지. 명치에 통증을 느꼈다. 그럴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것과 그럴 수 없어 그러지 못하는 것의 차이. 멀고 먼 틈새를 확인하는 일은 뼈아팠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의지와 상관없이 이방인이 되어버린 디아스포라들의 처절하고 잔혹한 소외와 편견이 어쩌면 내게서 시작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으므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에서 태어나 몇 개국을 떠돌긴 했어도 시민권을 얻어 말년을 미국에서 보낸 에드워드 사이드는 '에드워드'라는 영국식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 성을 조합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도계 미국인 작가 줌파 라히리가 쓴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고골이 된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인도계 미국인'으로서 결코 버릴 수 없었던 벵갈지방의 관습 때문이고, 독일어로 시를 쓰는 유대인 작가 파울 첼란은 본명 '안첼'에 들어 있는 두개의 음절을 뒤집어서 필명을 만들었으며, 프리모 레비의 성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친척이라고 주장하며 접점을 찾아내려는 사람도 있다. 국가와 언어, 그것이 만들어낸 문화, 그리고 정체성. 경계는 질문한다. 무엇이 다르게 하냐고. 다른 것은 과연 무엇이냐고. 이렇게 대답한다. 명확하게 답할 수 없지만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바로 그 이유가 이 모든 낯섦의 경계이자 장벽이라고.



황정은 작가가 처음이라 내게는 비교할 과거가 없다. 읽었더라도 아마 전작과 연결시키는 비교 감상을 했을 것 같진 않다. 다만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그 소설만큼의 감동은 아닐 거라 예감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이 뻐근함이 작가에 대한 호의로 표출될 리는 만무하다고, 그러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앨리시어는 병들었고, 꿈꾸고, 날아오른다. 갈곳을 잃는다. 한숨과 쉴새없는 버둥거림이 오래도록 멈추지 않는다.

 

흡수될 만한 문장이 아니고, 생각보다 얇고, 강하고, 느리게 읽히고, 울컥한다. 생각만큼 어둡고 무겁다. 그게 다다. 그리고 있어야 할 곳에 정확하게 존재하고 있는 존재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꽃도 새도 강도 바다도 너도 그들도. 경쟁자도 미래의 어딘가에 있을 그 누군가에게도. 낙관론자는 없다. 나는 더군다나 아니다. 놓쳐야 할 것은 되도록 빨리 놓치고, 감사할 것에 미리 감사하고, 피하지 않고 이 터널을 제대로 통과하는 것. 결국, 문학은, 살아가자고 말한다. 언제나 말해왔다. 삶의 방식에는 선택지나 출구가 없으며, 정답도, 반전도 없다고. 현실을 살 수 없는 모든 순간이 막막해진다.



 

학부 때 일이다. 시작도 못해본 창작에는 나날이 자신감이 떨어지고내 눈에는 문장을 다루는 능력이 보통 아닌 친구조차도 자주 '흉내낸다'는 독설을 들을 때였다. 이 책은 그때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의 기획과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저서에서 '독서'라는 한 가지 주제를 향한 깊고 넓은 자료조사의 향기를 맡았다면,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는 그 정도의 압도적 방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은 훨씬 세심하고 방대한 자료조사를 필요로 했음이 틀림없는데도 그 규모가 덜하게 느껴지는 건 수 개의 도시와 수 백명의 등장인물로 시공간을 분리시키는 방법 때문이다. 1913년이라는 한 해를 열 두개의 달로 나누고, 영국과 프랑스(+스페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체코)로 양분하여 서유럽 대 동유럽으로 좁힌다. 소설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평론가, 정치가를 끝도없이 넘나들지만 연결점만 잡으면 파편처럼 흩어진 듯 정신없어 보이는 시공간에서 질서가 보인다. 300명의 등장인물이 재등장하거나 이어가는 순간이 많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만날 수 있어 인물이나 이야기가 '소비'되는 형식은 아니다.

 

1차 세계대전 바로 전 해, 유럽의 도시에서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고 있었나. 그들은 어디서 서로 스쳐갔고, 무얼 하고 있었고, 어떤 생각으로 가득찼으며, 어떻게 서로 연결되었나. 궁극적으로는 그에 대한 해답이면서, 1913년 유럽 문화사를 월별로 해부하는 성격의 서정적이면서도 분석적인 책 한 권이 새로 알려준 사실. 1913117, 알제리 몽드비에서 1차 대전에서 아버지를 잃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청각장애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게 되는 알베르 카뮈가 태어난다.

 

릴케, 카프카처럼 실질적으로 유약한 '여성적인' 기질을 가진 작가들이 사랑 앞에서는 그토록 망설이는 소심함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작품에서만은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성을 발휘하여 신들린 것처럼 줄줄 써나갔고, 히틀러는 빈의 거리를 떠돌며 예술화가를 꿈꾸며 건축물들을 그렸고, 피카소와 마티스는 아플 때 꽃을 사들고 방문할 만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처음 만난 펠리체 바우어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키워가다가 비로소 약혼하지만 곧 파혼하게 된다. 망설임과 수줍음으로 가득찬 그의 편지에 묻어나는 작가로서의 불안과 남자로서의 사랑이, 문학(고독)에의 갈구와 사랑에 대한 열정이, 파편처럼 튀어나가 그의 실존을 위협한다. 파혼 후 1914년에 <소송>을 쓰기 시작한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염문을 뿌린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는 또 어떤가. 심장병으로 말러를 잃고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의 절절하고도 숨막힌 사랑을 받던 알마는 집착과 광기로 변해가는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 관계를 정리한다. 이후 그로피우스, 프란츠 베르펠과의 결혼과 이혼, 그외에도 외모로 수많은 남성들에게 사랑의 불을 지핀 알마는 팜므파탈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프로이트의 제자 융은 스승을 비방하며 결별을 선언하고 프로이트는 의기소침하다. 그가 그럴수록 '친부살해'이론은 더욱 발전해간다. 파리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선보이고 이즈음 코코 샤넬은 작은 모자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로베르트 무질이 <특성 없는 남자>, 토마스 만이 <마의 산>,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권을 쓰기 시작하거나 내놓는다.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과 결별 후 극도의 불안을 앓다가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30년을 보낸다. 클림트와 실레는 여성 모델들을 두고 누드를 주로 그리며 불안과 욕망을 화폭 가득 담아내며 열정적 광기를 표출한다. 자위, 성교, 누드, 동성애까지 가리지 않고 두루 담아낸 클림트의 모델들은 가운 아래 아무 것도 입지 않고 그의 주문과 요구에 응했는데, 그가 원할 때 언제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편한 상태여야 했기 때문이다.

 

더 얘기할 인물들이 남았지만 한 해를 다루는 만큼 그들이 훗날 어떻게 됐는지는 스스로 찾는 게 좋겠다. 더 깊게 팠어도 좋을텐데 넓어지기만 하다가 살짝 지루해질 즈음 끝난다. 년월주일시분초 단위로 나뉘는 1년이란 시간은 인간의 인생에 얼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 해를 전방위적으로 담아내는 일이 한 주제를 깊이 파는 것 이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 접점을 찾지 못할 경우 연결하는 자체가 무의미하게 보일 위험 때문인데, 이 책은 그 어색한 빈틈을 너끈히 채운다. 1913, 이 찬란한 시대가 곧 펼쳐질 20세기를 지원사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유럽인들에게 '13'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가 두려움과 어둠에 가까웠다고 할 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이라는 의미심장한 여행은 그 자체로 신나는 일이다. 비록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해도. 더 할 말이 남았는데 억지로 끝내는 기분이다. 나는 시작도 안했는데 페이퍼는 이미 쓰여졌다. 희미하고 우련하다.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정치,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사진, 연극, 영화, 패션, 과학 등 문화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자 했으나 결국 1913이라는 단 한 해, 유럽 몇 개국을 돌 수밖에 없는 이 세기의 여름처럼. 내가 뭘 아는지 알 수가 없고 매번 이 레퍼토리로 끝나는 독서가 지겹다.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을 극복해야 하는 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예술이 꽃피워낸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기계(기술)에 지배당한 황폐한 마음(정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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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0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1913년에는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군요, 놀라와요.
우리나라 1913년은 끔찍한 시기였는데 말이죠. 정확하게 이 때는 아니지만,
전쟁은 심리 검사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사람의 지능을 측정하는 것에 대해서 기틀을 잡기 시작했죠..
우리나라는 어둠에서 허우적대고, 겨우 근대에 눈뜨기 시작할 때 말이죠. 상상하면 너무 충격이랄까... ^^

아이리님, 오랜만이예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궁금했어요. 쪽~

아이리시스 2013-11-12 02:14   좋아요 0 | URL
다음 해, 191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니까, 세계사(유럽사)에서 20세기는 1914년부터로 본대요. 그래서 1913년도가 어떤 상징적 의미도 있고, 이후 전쟁 겪고 불과 몇 년 만에 유럽의 중심이 확 변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이고, 서양이 13이라는 숫자에 갖는 의미 때문에 선택된 연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의미도 있어요. 우리나라는 미개했는데 여기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지금도 널리 살아서 읽히는 주인공들이잖아요.

근데 우리 정말 오랜만이에요, 저는 잘 지냈어요, 자주 마고님을 떠올렸어요. 끝은 늘 잘 계실거야, 생각하곤 했고요. 간혹 페이퍼 읽으면서 그때마다 보고싶었어요. 벌써 겨울이 왔어요. 건강 잘 챙기세요 ^^

transient-guest 2013-11-10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 작가는 '라디오 책다방'을 들으면서 늘 그 작품세계가 궁금한 작가에요. 목소리가 그윽한 것이 라디오 방송에 딱 맞는 차분함을 주면서도 '으하하'하는 웃음소리는 살짝 톰보이적인 친구여자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3-11-12 02:18   좋아요 0 | URL
나와있는 책이 몇 권 없기도 하지만 중편이라고도 못하겠는 얇은 책 한 권으로는 짐작이 안되는 작가인 것 같더라고요. '라디오 책다방'에 매번 나오시나요? 저는 창비, 문동 새로운 팟캐스트 생기고는 빨책부터 전부 끊어버려서. 히힛. 사실 시간이 없더라고요. 귀를 기울일 시간. '톰보이적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아요. 소설 읽기 전 오래 전부터 작가님 프로필 사진만 보면 이미지가 그럴 것 같았거든요. 누군가의 작품세계가 궁금한 것, 다음 작품이 궁금한 것. 그게 최고의 작가라는 뜻과 같을 거예요 ^^ (저는 아직 그 정도로는 못 느꼈지만..)

2013-11-24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4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3-11-26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잘 지내시죠 ㅋ
하루키는 왔으나 전 오지 못 했어요~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시는 지 궁금하더군요 ㅎ
흠....전 살아돌아 갈 날을 준비 중 입니다. ㅋ

아이리시스 2013-11-27 23:28   좋아요 0 | URL
아니 누구세요, 하루키님이세요? 여기 와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부활하신 거 만세, 축하해요)
루쉰님 제가 리뷰대회에서 2등한 거 안거예요, 모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미스터리의 계보인가 뭔가로 수상을 노린 이후로 지금 처음 여기서 얘기하는 거예요? 하루키는 이제 빠빠이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많이 컸고 이 정도면 한 작가의 세계에 이미 깊이 침투한 것 같아요.
또 읽게 되겠지만(읽은 척은 해야!)...(--)(__)

잘 지내는지 궁금하면 돌아와요. 어떻게 지내시는 거예요? :)

루쉰P 2013-11-29 09:05   좋아요 0 | URL
원 세상에!!! 리뷰대회 2등 하신거에요!! 왕 축하 축하!!
죄송해요 -.- 몰랐어요....이런...
ㅋㅋㅋ 미스테리 계보로 수상을 노린 시절...아 그 때가 언제인가...ㅋㅋㅋ
정말 대단하세요. 전 아이리시스님이 탈 줄 알았다니까요. ㅋㅋㅋ

하루키...훗..저 역시 하루키는 침투하지 못하고 근처 맴돌다고 지금은 정지 상태에요. 하핫.
아마 저도 읽게는 되겠지만, 읽은 척만 하게 될걸요. ㅋ

어떻게 지내는가에 대한 답변은 곧 올리겠습니다. 푸핫 ㅋ

아이리시스 2013-12-01 08:32   좋아요 0 | URL
아니..축하가 너무 늦잖아요, 담부턴 타이밍에 맞게 해주세요(큭큭).
근데 제가 그 후로 일들이 많아서 그런 적이 있었는지 가물가물.. 이 정도 시간이면 루쉰님이 알라딘에 계셨는지 안 계셨는지조차도 잊어먹을 지경.. 반성하도록 하세요, 답변을 하긴 하는군요, 오랫동안 기다리니까.

2013-11-2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7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7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4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4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서 지금 못 읽겠어요. 오늘은 11시까지 야근한 날이거든요...ㅠㅠㅠㅠㅠㅠㅠ
생각많은 어린이, 아이님. 잘 지내고 있죠? 그러고 보니 부산 사람인데 한 번 볼 수도 있겠다. 그쵸?
여튼 안부만 전하고 가요. 글은 아직 안 읽었어요.ㅎㅎ

아이리시스 2013-11-29 02:53   좋아요 0 | URL
네, 맘먹으면 두번 볼 수도 있죠, 지구 반대편에 살아도 섬님이 찾으시면 꼭 보러 갈게요.
알라딘 마을 이웃들에게는 다 갈 수 있어요(거짓말한다..).

안녕, 섬님. (글 안 읽고 댓글 달아도 좋아요!)

2013-12-01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2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폴란드계 미국 수학자이자 지도와 해도 일반 의미론의 아버지 알프레드 코르집스키(Alfred Korzybski)는 '지도는 땅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덧붙여 '모든 지도는 추정이자, 일반화이자, 해석'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프로이트, 메스머, 코헛이 세계 각국의 과학자, 음악가, 정치가, 작가 들을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 가상 심리 상담 방식으로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쉽게 서술한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의 한 구절에서 접한 후 아이디어 수첩 한 귀퉁이에 적었다. 본래 많이 넓게 넣기만 좋아하지 깊이 파거나 되새김질하는 건 나중 일이라 알츠하이머 환자 마냥 메모 행위 자체를 잊는 초(超).반(反).기억력을 소유하고 있어 정작 제일 중요한 순서대로 잊기 시작하는데 리뷰는 적어도 읽은 책을 기억한다고 기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언제나 옳다. 리뷰는 해석일 뿐 공상은 아니다. 한 달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idea)은 글(text)이 아니다. 



*



책을 덮자마자 서해바다로 떠나면 더없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글로 옮긴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순간 섬광이 일듯, 그 빠르고 정직한 흩어짐의 미학과 철학적 억측이라니 조금 아득하고 애탄다. 사실은 증발되고 기억은 왜곡된다. 시간은 덧입혀지고 장소는 희미하게 빛바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내가 거기에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물음 앞에 사진, 대화, 기억은 부질없다. 그래서 추억이라는 포장지와 고통과 상처를 숨길 마음의 서랍이 주어진 걸까. 중앙에 닿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황망함이란. 어쩌지 못해 허둥대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허무함이란. 나만 보는 것도 위험하지만 아무도 못 보는 건 더 큰 문제가 된다. 읽는 동안만은 적어도 타인이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을 후각으로 전한다. 바다, 흙, 꽃과 나무, 병원, 문어와 대하, 숨겨진 절, 계부, 지하 룸살롱의 퀴퀴함, 비췻빛 도자기, 기러기 아빠, 불륜, 약속, 권태, 첫경험, 갈구, 열망, 절망, 고독.


더불어 충청도. 서해. 통영. 배 위. 바다 한가운데. 풍덩 빠져죽어도 좋을 것. 



나는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멀어져 어딘가에 격리돼 있던 시간들을.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만 까마득한 심정이 되어 나는 듯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략)


애초부터 나는 그들과 만날 수 없는 지점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라는 새삼스런 의혹이 독사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자기 박물관>, 문어와 만날 때까지





*



있을 법한 일이고 있었던 일이다. 삶과 독서를 부연하기 싫은 날들이 많았다. 비루하고 구차한 삶도 지면이나 스크린을 통하면 반짝인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난 그냥 책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관심있게 살피는 이야기는 결코 내것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될 이야기들이지만, 편안한 자세로 이불 속에서 주억거리며 읽기에는 죄의식과 괴리감이 가득찰 수밖에 없는 사변적(思辨的)인 구석이 있다. 이야기가 재미나 흥미로 소비되는 시대. 픽션으로서의 사회문제는 처절함이 희석된다. 상황이 심각하면 할수록 가공한 이야기보다는 논픽션이 힘을 갖는다. 홀로 진실을 대할 용기도 잘못을 바로잡을 힘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소비형태로 전환되는 추세도 자극에 자극을 유도해온 것에 대한 부작용인 것 같다. 




철썩같이 믿었던 사고(思考)의 비체계는 불특정다수에게 찾아오는 어떤 불합리로 증명된다. 가까스로 나를 피해간 불운이나 재앙을 통해 삶이 모두에게 공평하지는 않다고 인지한 순간 불운하면 불운할수록 이야기는 나와 멀어진다. 이란이 닥친 문제라는 점에서 제 위치를 상정할 수 있을 <나의 몫>에서 모든 잔인은 바깥으로 밀려나온다. 수도 테헤란과 지방 도시의 대비는 두드러지고, 공동체 사회 내에서조차도 서로가 가진 관습과 문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 체제를 타도하고 의식을 전환시켜야 하는 혁명이 옅지만 붉게 한복판을 관통한다. 과도기이긴 해도 여전히 여성탄압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반복으로 익숙해진 불행은 더이상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보수적 사회, 무슬림 가정 하에서 어머니와 딸에게만 묵살된 자유의 의미는 남성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짐승이나 노예의 것과 다를 게 없다. 히잡과 차도르는 여성을 굴복시키고 더러 남자를 절대자(神)로 통용시킨다. 적은 사람들의 바꾸기 위한 절박함과 여러 사람들이 지키려는 굳건함과 또다른 무엇.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도 유지되지도, 옳지도 그르지도 않게 흘러간다. 




*


엄마는 인생의 대부분 동안 엄마가 아니었다. 그전에는 '다이너'에 불과했다. 임신하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 신분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규정되지 않고, 얼마나 별 것 아닌지 몰랐다. (대디 러브, p.45)


쇼핑몰에서 순간적으로 아이 손을 놓는다. 순식간에 아이는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엄마는 필사적으로 차 꽁무니에 매달렸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다. 하지만 아들을 잃어버린다. <대디 러브>는 여느 범죄문학처럼 고통과 복수, 범인찾기에는 관심이 없다. 유괴가 두려운 건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이미 죽었으리란 절망의 무한반복 때문이다. 기대와 절망은 교차되고 그때마다 부모는 세상이 끝나버리는 고통을 겪지만 누구도 그 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애닳는 심정이 생생하고 압도적이다. 몇몇 문장은 놀랍도록 인간 본성의 핵심을 찌른다. 다섯 살 꼬마가 잔인하게 학대당하며 느꼈을 공포가 전해진다. 어떤 공포는 죽음과 맞먹기도 한다. 다섯 살 남자아이는 엄마 아빠는 네가 미워서 새아빠에게 입양보냈다는 말에 세뇌당한다. 열한 살로 커가는 동안 남아있는 기억은 거의 없다. 왜곡되고 뒤틀리고 새로 쓰여진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만 미묘하게 달라지는 처음의 몇 챕터는 시나리오처럼 상황을 펼쳐놓는다. 과정에 비하면 결말은 덜 중요하다. 애초 범인을 잡고 범죄이유를 캐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오직 이 순간 뿐. 주제의식의 강렬함이 의문과 논란을 불식시킨다. 우리 모두 제대로 겪지 않은 일에 대해 얼만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은 결국 허공을 맴돌 뿐인데.





*


같은 일을 겪어도 대처는 누구나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인이 내린 판단을 나의 기준으로 재단하거나 윽박질러서는 안된다. 프리모 레비에게서 여전히 아우슈비츠나 홀로코스트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건 이 독특하고도 대단한 영역을 구축한 작가를 전부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작품을 다 읽지 않았으면서 안다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사실상 그가 가진 이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와 화학자로서 공장관리자로 일하며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만약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바로 그것에 가장 적게 가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더욱 많이 말하고 더욱 요란하게 말하는데, 슬프고도 신비로운 현상이다. 직업을 찬양하기 위해 공식적인 의례에서는 교활한 수사학이 동원되는데, 그것은 냉소적으로 칭찬이나 메달이 임금 이상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고찰을 토대로 한다.  (멍키스패너, pp.120-121)



이렇게 소설이 되다니 놀랍다. 나는 장비에도 공구에도 무지하지만 제 몸을 움직여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에게는 일에 관한 한, 직업(돈벌이) 이상의 어떤 철학이 있음을 믿는다. 조립공 파우소네는 한곳에 머무르는 걸 싫어해 다양한 작업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국경 넘는 건 다반사인데다 항구, 철탑, 다리, 석유 시추 작업장 등 현장을 누비며 책상에 앉아 종이서류와 씨름하는 직업군에서는 알지 못하는 기쁨을 맛본다.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한낱 노동으로 하찮게 취급하는 시대를 잔잔한 슬픔이 섞인 대항으로 애통해한다. 일의 특성상 공사가 끝나면 헤어져야 하지만 그래서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아는 그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몽상가이자 모험가다. 


일에 대한 철학과 위트, 성실의 의미는 돈의 기계가 되어버린 일벌레들에게 매혹과 감동을 주며, 효율과 합리에 매몰된 편리와 속도에 반기를 든다. 당연하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일은 종요롭다. 노동자는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그 다음에 놓인다.




*




 "난 그저 최고가 되려는 게 아니다. 가장 높이 올라가서 아무도 나에게 닿을 수 없게 만들고 싶다. 나는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달해야 할 곳에 가고 싶을 뿐이다. 당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면 당신의 모든 것은 곧 유일한 것이 된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영화라면 잔잔하고 가슴 찡한 작품이 됐겠다. 짧지만 난데없이 쏟아지는 벼락같은 이야기는 또렷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도 감동이 차오르는 판타지다. 영원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영원하리라 믿는 것들에 대한 간절함으로 가득차 있다. 다른 사람의 전 생애를 파노라마처럼 보는 능력을 가진 남자는 공항, 기차역, 여행가방, 호텔, 공연 음악, 신뢰, 영혼, 열망, 긴장, 그리움, 호기심, 목욕물, 베이비 파우더에서 풍기는 엄마의 미소를 연상(聯想)시킨다. 누군가의 처음과 마지막을 볼 수 있는 묘한 불공평 앞에 불행과 행운이 번갈아 감지되고, 그 강렬한 가능성이 현실과 비현실, 꿈과 열망을 오가며 그를 지구라는 행성의 중심으로 옮겨놓기 위해 애쓴다. SF나 판타지 장르에 가두지 말고 바깥 행성으로 밀려난 남자를 다시 행성 안으로 들이기까지의 소동들을 기록한 일지로 읽으면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마침내 삶의 중심으로 되돌아온다. 그에게는 여전히 잃어버린 것보다 앞으로 잃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음 행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행성에서 태어난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 만나지 않아야 사람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다. 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면 괜찮을 소중한 하룻밤. 안녕.


그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몇 개의 눈빛과 호흡, 몸짓, 혹은 미소를 지니고 있는지,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알아챌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났다. 또 다른 능력 중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비롯해 좋아하는 사람들과 겸손, 행복, 성실, 사랑, 그리고 삶을 나눌 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매 순간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고 알맞은 표정을 지을 줄 안다. 한마디로 매혹적이고 놀라운 사람이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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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강아지는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 까만 어미의 새끼도 아닌데 아주 까맣고 보드라운 털과 반짝이는 눈을 가져서 오가는 사람들마다 감탄사를 숨기지 못한 채 쓰다듬었다. 잘 보이는 곳에 데려다놔도 자꾸 구석으로 숨어들던 수줍음 많고 어둠을 사랑하는 몽상가였다. 태어나자마자 형제들에게 밀려 젖을 먹지 못하자 몸집이 작고 약해서 어디로도 보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어미곁에 남겨두었던 아가였다. 처음 어미를 따라 바깥구경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꼭 닫아도 하루종일 손님이 드나드는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며칠간 동네를 훑었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사고를 당한 흔적도 소식도. 잃어버렸다. 시간이 훌쩍 지나고 뒷길을 지나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빨래를 널며 개를 쓰다듬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집 마당을 들여다보니 까만 개가 캉캉 짖으며 애교를 떠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그토록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까만 강아지였다. 사랑받고 있었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고 오다가다 안면도 있는 편이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개가 있네요. 우리도 키우거든요." 

"아, 어릴 때 길을 잃어버려서 여기까지 왔기에 주인도 못 찾고 해서 데려와서 키웠어요." 


그는 돌아섰다. 예전에 잃어버린 강아지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다. 개는 무척 사랑받으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어느 집 대문일까, 한 동네긴 해도 우리 집에서는 꽤 떨어진 곳이다.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 후로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생의 절반은 살았을텐데. 물론 이것도, 아빠 얘기다. 세상에는 기적같은 일도 뿌듯한 일도 친절한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그 사실이 항상 위로가 되진 않더라도 아주 가끔은 바깥에서 기쁨을 찾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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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닷새로 자가축소시켜 사는 것 같다. 달이 바뀌기 전 마지막 이틀 바뀐 후 첫 이틀 그리고 앞뒤로 반나절씩. 나머지는 온데간데 없다. 11월은 하루 늘려 엿새 정도는 정신차리고 살아야겠다. 생각만 하지 말고 글도 좀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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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1-0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어느새 11월이지 뭐에요.
생각만 하지 말고 글도 좀 쓰면서,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윤대녕의 소설이 좋아보여 담아가요. 어제 한집에 사는 동반자에게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니
윤대녕과 몇을 꼽네요. 이청준이 일순위구요. 살면서 대놓고 한번도 물어보지 않은 것이에요.^^

아이리시스 2013-11-04 20: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건강하게 잘 계신 거예요? 들어와서 책만 검색하거나 뭘 찾아보고 가거나 하면서 서재방문이 점차 줄고 있었어요. 저는 그래도 달이 비워질 때 들어찰 때는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시간운용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한 달에 네 편(일주일에 한 번)은 써야 감이 안 떨어지겠다 생각은 들어요. 사실 자주 쓰면 쓰는 게 후딱 금방이더니 이젠 그것도 벅차요. 윤대녕을 읽은 게 아주 오래전이라 원래 소설의 느낌이 잘 생각 안나요. 이청준을 일순위로 꼽는 동반자라니 멋지네요. 요즘은 옛것, 옛글, 고풍스러운 느낌이 워낙 그리워요. 이제 종종 물어보셔요. 신기하네요, 자주 물어보셨을 듯한 질문이기도 한데 말예요.^^

생각만 하지 말고 글도 좀 쓰면서. 프레이야님도 자주 좀 써주세요. 제가 열심히 읽을게요^^

2013-11-03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3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3-11-05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은 정말이지, '글'이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자주 무엇인가를 적다가 지워버리나 봅니다. 가끔씩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는데, 적지는 못해서 생각으로 그치고 말지요. ..

아이리시스 2013-11-05 12:30   좋아요 0 | URL
방금 한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타이밍'도 중요해요. 생각을 돌이킬 '여유'도 필요하고요. 페이퍼를 한 개 쓰는 건 결과적으로, 열 개 쓰는 것보다 어려웠어요. 그러고보면 생각을 '잘'하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