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가 그런 글을 쓴 걸 보았어.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대. 어느 날 밤 문득 그 사람의 손을 꼭 붙들고 도망치고 싶어 한 사람과 그런 생각 같은 거 해보지 않은 사람. 손을 꼭 붙들고 말이야."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지구별에서의 뜨거운 마지막 밤, 손을 꼭 붙들고. 뜨겁고도 황홀한 사랑을 반추한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 우리말로 된 소설을 읽을 수 있다면 갖은 구멍 사이로 감성이 뚝뚝 흐를 듯한 이런 제목들이어야 할 것. 굴업도와 소이작도와 소청도의 별이 사라지면,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들 한가운데서, 혼자만 너무 꼿꼿이 섰다가 비로소 조금 지칠 때, 순박한 짠내와 비릿한 그리움이 겹칠 때, 그래서 어서 훌쩍 나이를 먹고 싶을 때 다시 찾기로 나는 종종 약속하곤 한다. 최근, 책장을 뒤엎으면서 한곳에서 우르르 쏟아지기에 다시, 그렇게, 어쩌다가.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그리고 새로 읽기 시작한 소설은 기대했던 것보다 좋다. 그리고 줄줄이 엮인 어떤 책들에서 내가 공통적으로 맡았던 크고 강한 침묵과 함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조금 쓰고 싶어졌다. <사람을 위한 경제학>을 올해 만난 가장 소중한 책으로 꼽으며 두 주먹 불끈 쥐고 덤벼든 순간과 감성이 폭발해 예전에 끝난 줄 알았던 책들과의 인연을 다시 맺으려 전전긍긍하는 순간, 그러니까 인생의 두 가지 순간 못지 않은 책과의 두 가지 상반된 순간을.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다른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 바위 보는 아니다.
굳은 표정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밤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이장욱, '얼음처럼'
그날 밤의 고백은 이제껏 K가 해온 사랑에 비하면 약간 더 놀랄 정도였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K의 연애는 늘 특별했다. 우리 중 가장 간절하게 현모양처를 꿈꾸고, 누구보다 착실하고 다정한 여자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K의 인생에서 사랑은, 아마도 망망대해 홀로 떠있는 섬처럼 매번 서글펐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놀라지 않은 이유는, 꽤 오래 전 마지막일 줄 알았던 사랑을 끝낸 K라면 더이상 상상력을 발휘해도 남는 게 그 경우 뿐이었기 때문이다. K는 늘 제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 사랑을 앓았고, 그에 대해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아는 유일한 사람이 우리였다. 천성이 쾌활하고 맑고 부지런해서 나는 종종 '지는 게 이기는' 당연한 진리를 K로부터 배웠다.
열일곱, 곱고 아련한 시절부터 함께라는 이유로 나는 K가 제 사랑 앞에 놓인 돌을 얼마나 야무지게 치우곤 했는지, 끊어진 실을 부여잡고 얼마나 많은 밤을 아파했는지, 미련하리만큼 최선을 다하고 온 마음 다해 착실했는지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본인들에겐 더없이 애절한 마음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남는 사랑의 잔인한 전설을 모른 건 아니다. 당장 끝내란 말을 삼키며 겨우 내뱉은 말은 믿을게, 라는 작은 응원이었다. 우리 '사랑과 전쟁' 주인공은 되지 말자면서. 불륜은 나쁘지만 사람은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합리화가 마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밤마다 서글프게 울리는 K의 전화벨 소리에 즉각 답하는 다정한 친구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우정이 압사당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여웠다. 행복은, 책임만으로 지켜지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또 한번 생각했다. 우정이, 우정으로 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이 뭘까 싶은 내밀한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말할 때의 글이 '리뷰'가 아님에도 진짜 고민과 방황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채 자주 오해받곤 했던 것처럼, 어쩌면 적당한 아는 척과 모르는 척이 뒤섞인 이곳에서만 겨우 말함으로서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웠던 침묵과 인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순간에 절망이 밀려왔던 것을 잊지 못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해도 그 밤을 결국 견디지 못했을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깨달았다. K에게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존재가 되어야 했다. 결국 전해지지 않을 어떤 걱정을 행여 K가 읽을 수도 있는 곳에 남기며, 언젠가 약속한 그날의 치기어린 꿈처럼 무겁게, 세상의 잔혹한 이치에 절망하는, 별이 지는 밤. 별이 뜨고 지는 게 그렇듯 K의 선택은 내 몫이 아닐 것이다.
견고하게 남아 있기 위하여.
나는 그 문장을 생각했다. 영우 오빠의 가슴에 남은 그녀의 모습엔 결코 군살 따위가 없을 것이다. 초점 흐린 눈빛도 없을 것이고, 눈가의 잔주름도 없겠지. 청정한 댓잎과도 같은 이마와 맑은 물 같은 눈빛과, 사랑의 확신으로 단단히 다물린 더운 입술의 그녀가 남아 있을 터였다. 만일 1972년 그해, 그녀가 노상규를 버리고 영우 오빠 곁에 남았다면 그들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행복했을까. 끝없는 가난, 잔인한 압제, 겹치는 불운으로 그들은 하루하루 서로가 어떻게 망가지고 부식하는지 오히려 똑똑히 보았을 게 틀림없었다. 사랑만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은 전설 속에 있을 뿐이었다.
잔인해.
잠든 혜주 언니의 머리맡에서 나는 말했다.
사랑은 잔인한 형벌이야.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주 오래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궤변이 지금 다른 진실로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후회의 사슬을 온몸에 감고, 급기야 서로에게 서로가 가해자로 둔갑한 삶을 상상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혜주 언니와 영우 오빠가 함께 살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사랑은 증오가 되고 삶은 감옥이 되었을 그 잔인한 하늘에 어찌 줄 끊어진 연일망정 떠서 흘러갈 수 있겠는가.
(박범신, <외등>)
<외등>에는 위 장면을 넘어서는, 훨씬 더 강렬하고 사악하고 위험하고 격정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정작 본인들에게는 오래 전에 끊어진 연, 그 연을 필두로, 이제서야 그와 그녀를 이어보려는 혹은 끊으려는, 재희의 눈으로 세월의 끈끈함을 각인시킨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울었던 제3자, 구조로 보면 재희는 등장인물 중 가장 쓸쓸하고도 아득한 세월을 감싸쥔 화자다. 지구별에서의 마지막 밤과 멀어져간 우주를 맞대어 붙이려는 시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함께 있지 못하는 사랑은 전설이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다 몰랐고, 그녀는 그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재희는 그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존재가능한 모든 비밀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단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몰랐겠지만. 왜 한 사람만을 믿으려 하는지, 어째서 한 사람에게만 속는지, 어쩌면 놓치는 게 가지는 건지, 어떻게 끊어진 연이 '행복'한 마지막일 수 있는지. 마음이 허할 땐 목적지 없이 그저 걷는 게 좋다. 내가 나를 못보도록 작고 가치없게 걷는 길. 노래는 한 곡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