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는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크메르제국의 수도였던 곳으로서, 현재의 캄보디아 북서부, 씨엠립 근교에 위치한 왕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도성을 의미하며, 왕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9세기 초부터 15세기 초까지의 제국, 그 시대의 유적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802년, 힌두교도 왕이었던 자야바르만 2세가 현재의 프놈쿨렌 언덕에 왕조를 창건하고 점차로 국내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유타야의 압박을 받아 메콩 강 유역으로 중심을 옮긴 15세기 전반까지를 캄보디아사에서는 앙코르시대라고 부른다. (p.578. 옮긴이의 글)

 

 

학부 때 미술사학을 복수전공으로 생각해볼 만큼 좋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랬듯 주로 서양, 그것도 중세, 르네상스 아니면 19-20세기 미술사에 아주 얕게 발 담그고 있을 뿐이면서 나는 학문을 할 수도 있을 거라 착각했다. 예를 들면, 다시 진로를 정한다 해도 국문과 지망을 도무지 고려할 수 없는 건 모두에게 어렵지만 특히나 진절머리나게 싫은 「국어학개론」 때문이고, 미술사학 역시 전공으로 하거나 그쪽으로 나가기에는 얄팍한 호기심만 갖고 있었기에 생각이 실천으로 옮겨가진 않았다.

 

이제 세계가 주목해야 할 곳은 아시아라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한다. 비단 유적지, 유물 등의 문명 뿐 아니라 베트남 전통 식당이 이탈리아 요리 식당으로 대체되는 일련의 서양화에 대항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길을 걷기에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보는 일도 속상하고 서글픈 일. 식민시대, 약탈의 피해, 억눌리고 저평가된 아시아 고고학사를 고미술(건축물은 이미 제법 주목받는 듯)사 중심으로 조사, 발굴하여 학술적으로 끄집어내어 대중화 시킬 필요가 있다(학계에서 이미 진행중인지도 모르고 꾸준히 진행해왔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전히 미술사는 서양사에 집중되어 있다). 정체되고 해체되어 여기저기 널린 아시아 고고학과 미술사를 유럽에 견주어 뒤지지 않는 특수하고 고유한 문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아시아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아무도 우리의 것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이득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앙코르 고고학 역사 속의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에 대해 쓴 책이라기보다는 식민주의 시대의 프랑스의 역사책이라는 『앙코르와트』는 쉬운 책이 아니다. 파리의 프랑스극동학원과 국립동양어학교, 파리와 리옹의 기메미술관, 마르세유와 파리의 고문서관 등 관계기관의 약력이 폭넓고, 인물 약력 역시 헷갈릴 정도로 방대하고, 또 이 책을 일본 미술사학자가 쓰면서 일본(다른 아시아국)과의 연관성까지 다소 고려하도록 만들어졌다. 역사의 배후를 짐작하고 이해하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이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작가가 프랑스의 시점에서 서술했을 뿐, 캄보디아의 입장에서 새로 쓸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데서 같은 대륙인으로서 서글픔이 느껴진다. 그런데, 일본이 오로지 피해자로서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 속에서 일본은 늘 가해자였는데.

 

 

 

하필 왜 캄보디아일까. 아프리카는 얻을 게 많은 대지인만큼 위험부담도 커서 복불복이라면 넓지만 부상 못한 국가가 수없이 많은 아시아는 좋은 의미에서든 그 반대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 크고 인구가 많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고 개발부상중인 국가가 많다. 천 년의 신화 앙코르와트 씨엠립에 가도 아무런 지식이 없어 내게는 별 감흥이 없을텐데도 오랫동안 앙코르 문명을 동경해왔다. 신비롭고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약간 슬프고 아픈 역사마저도.

 

얼마 전 가짜 삼을 진짜라고 속여 판 일당이 20억 가까이 챙겼다는 뉴스를 보며 피해자들은 대체 진짜 가짜를 구별할 수도 없으면서 그 비싼 걸 뭐하러 사먹었을까 생각했다.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효용만을 바라고 믿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서도. 이 생각이 약간은 잘못되고 위험하고 일반화의 오류를 비롯한 온갖 오류를 품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먹을거리, 화장품, 명품가방, 모피코트, 거기다 미술품, 고고학적 유물들까지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것들에도 대입추론 가능하다. 나 역시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그림이 가짜라한들 '진품'이란 강력한 신뢰 아래 감상할 뿐 구별할 능력도 이유도 목표도 없으니. 

 

 

 

대표적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박물관(미술관)들이 당시 식민국에서 훔치거나 불법 반출한 유물들로 가득찼다는 사실은 새 소식도, 신기한 일도 아니다. 대영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는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전용관이 마련되어 있고, 이는 식민지의 미개성과 서구의 근대성을 밤과 낮, 흑과 백으로 대치시키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비슷한 지배력을 가진 유럽국들에 전통적으로 문명교화의 사명을 부여한다. 고고학적 기술의 성공으로 거둔 다수 복원도와 복제품은 식민지국(인도,캄보디아 등)의 정체성을 현저히 훼손할 뿐더러 전통을 빼앗고 역사와 정신을 망각시킨다. 빼앗긴 국가로서는 다시 돌려받기도 어렵고 불가능한 상황에 속이 쓰린 패배감과 전통을 지키지 못한 부채감을 떠안게 된다. 

 

『앙코르와트』는 19세기 후반(1866) 프랑스 해군 대위로 복무 중이던 루이 들라포르트가 조사차 방문했다가 접한 앙코르 유적에 매료되어 오로지 유물 약탈을 목적으로 조사를 수행하고 결과를 반출한 사정으로 시작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시작이 끝무렵 결과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프랑스는 당시 지배국 유럽 중에서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알제리, 카메룬,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도미니카, 이집트, 모로코, 콩고 등을 비롯한 광대 식민제국을 건설했다. 캄보디아는 1863년에서 1953년까지 근 100년간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다. 어릴 때부터 데생을 그리는 등 예술적 호기심이 많던 들라포르트는 1880년, 캄보디아의 풍물, 문물, 유적의 소개와 고찰, 유물반출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한 기행문 겸 예술 전반에 걸친 역사서 <캄보디아 여행>을 펴낸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빈번했던 유럽 식민제국의 약탈은 우연한 기회로 시작됐지만 차츰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지금까지도 유럽 각국에 엄청난 부를 선사하고 있다. 1907년 돈황굴에서 발견된 무수한 경전을 프랑스로 가져간 폴 펠리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앙코르 왕조 모두를 포함하는,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크메르 제국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고미술품과 유적의 슬픈 진실을 추적하고, 웅장함과 화려함을 고루 갖추고 있는 낯선 앙코르 유적으로 기꺼이 인도하는 책이다. 수많은 삽화와 사진으로 크메르 유적과 유물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 비록 성격이 다르지만 아시아 대륙이라는 동질성으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다시 비판해보게 한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땅과 하늘, 현세와 상상 속, 기독교와 유대교, 유럽과 이슬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언덕 위 도시와 메시아 국가라는 이중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서의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루살렘의 기원, 역사, 지정학적 위치를 논증적으로 서술한다. 성서 이야기가 제법 많아서 어려움을 느꼈는데, 대체 성서에 얼만큼 통달해야 다윗과 골리앗, 노아의 방주, 카인과 아벨 이야기처럼 명확하고 재빠르게 성서의 부분 부분을 짚어낼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종종 성서와 관련된 인용을 만나면 늘 성서를 혼자 읽을 수 있을 듯한 자신감에 불타오르지만 막상 내것으로 만드는 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불가능한 일이던지. 툭 던져진 성서 속 인물의 일대기를 어슴푸레 연결하다보니 결국, 성서를 버리고 이 책을, 예루살렘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닿는다. 읽는 사람의 목적과 집중에 따라 얻고자 하는 게 달라지는 카멜레온 같은 책이다.

 

성서와 예수, 순례와 종교적 성지(복음), 폭력과 희생이라는 키워드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기원을 찾고 말할 수 있는 땅. 예루살렘의 기본적 텍스트는 당연히 성서일 수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지정학적, 지리학적, 문화적, 인류학적, 종교적으로 대치하는 지점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각종 문제들-종교 분쟁, 영토 분쟁, 난민, 테러, 유대인과 아랍인-을 읽어내야 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세 대륙, 세 문명, 세 종교의 열병과 광기가 왜 생겨났는지, 다들 왜 그 땅을 손에 넣지 못해 죽고 죽이는 뻔한 싸움을 지속하는지를 추적하다보면 결국 현재 종교적 폭력과 유혈 희생제의, 보복과 홀로코스트를 능가하는 무시무시한 상황과 만난다. 거기다 원유原油의 패권다툼까지 더해지면 이 땅의 피바람은 당분간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득 보는 자와 희생되는 자가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책을 고르고 어떤 진실 혹은 지식을 기대하며 읽는 중에 내가 범한 실수가 있다. 제임스 캐럴이 이 책을 쓴 건 2011년도, 물론 그때도 이스라엘의 국제적 정세와 사정은 물론 역사적 평가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지만 커다란 분쟁이 다시 발발한 지금 와 보니, Jerusalem, Jerusalem: The Ancient City that Ignited the Modern World라는 원제를 『예루살렘 광기』로 바꾼 건 현상황(이스라엘(선진국)과 팔레스타인(하마스)의 직접적 대치상황)에 적절하게 일치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책이 가진 의도를 비튼 걸로 보인다. 적어도 나는 '현재'를 위해 책을 골랐는데 과거를 훨씬 많이 본 느낌. 내용의 키워드 중 'The Ancient City'을 빼놓을 수 없고, 이 모든 현상을 '광기'라는 단어 안에 가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거대한 예루살렘의 물꼬를 트는 방향잡이 노릇을 탁월하게 해낸 책이란 생각을 하면서 제목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국은 물론 세계 전역의 지도와 욕망의 고리를 어떻게 얽히고 설키게 만들었는지 밝히며ㅡ비슷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많은 루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려준 책 중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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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9-0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는 곳이 앙코르와트거든요. TV에서도 앙코르와트 관련된 다큐 같은게 하면 항상 멍하니 보게되는데, 진짜 이상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곳 같습니다. 꼭 앙코르와트 아니더라도 동남아시아 쪽은 한 번 쭉 돌아보고 싶어요.

아무튼 이런 앙코르와트 같은 경우를 보아도 양놈(?)들이 알고보면 제일 나쁜 것 같습니다. 위에 쓰신 팔레스타인 문제 같은 경우도 보면 저도 관심이 있어서 관련된 책을 조금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가장 나쁘게 생각되는 것은 거기에 개입한 영국,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예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개입을 하고 있죠. 물로 테러같은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어떤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근데 이번에 미국 기자 사건 같은 것을 보아도 미국은 다시 개입할 것 같더군요.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듯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렇게 다를 바는 없구요.

아이리시스 2014-09-05 01:20   좋아요 0 | URL
가까워서 가긴 쉬울듯한데, 그러고보면 꼭 거기 가고싶다기보다는 뭔가 아우라에 말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요, 중국일주도 하고 싶고(거기 진짜 사진 보니까 아무것도 없던데, 무려 북경도요..), 동남아는 더 말할것도 없으니, 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는 말하면 입만 아프죠. 이러다 아무데도 못 가보고 나이 들어 죽겠죠.. 나이 드니까 열정이 확실히 줄기도 하고..여기나 거기나 싶고.. 저희 아빠가 해외 처음 갔다 오셔서 그러셨는데.. 여행 엄청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전부 강대국들 싸움이죠. 성서,종교적 성지,신 찾고 해봐야 결국 석유 문제고, 핵 문제고, 땅따먹기고.. 그거 알려다 저 책 읽으면서 수명 줄어들 뻔 했네요-_-;;

우리나라는 중-러-미 전쟁나면 초토화될, 디딤돌이죠(무서웡).


참, 오늘.. 고마워요^-^

2014-09-12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13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2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3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문학만 읽는 사람 아니, 문학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지만 문학에 관한 한, 하나의 길을 만들고 싶다. 또한 내가 낸 길이 믿을 만한 문학사전이기를 바란다. 한편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책들만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렇기는 하지만. 문학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말로는 못할 한 마디였으면 싶다. 독서에 관한 한, 상대가 먼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배경지식의 결함은 진정한 관심과 경청의 마음가짐으로 극복가능) 결정적 단점이 있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까지도 충분히 괜찮았으니까. 마음과 의도는 왜곡되기 마련이고 나이를 먹어 좋은 점은 당연한 걸 두고 예전처럼 많이 오래 속끓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간혹 진짜 천재 얘기를 들었다. 커서 뭐가 될까 궁금했다. 흝어보고도 80% 이상을 완전히 복기하는 친구를 두고 누군가는 처음엔 이기려 했고 열등감을 가졌지만 본인이 너무 힘든 나머지 나중에는 그냥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 인정하고 말았는데 그 인정 과정이 참 힘들더라는 얘기. 천재 의대생인 엄마가 시인 아버지를 만나 진화론적으로 완벽히 결합된 자식을 창조하고 싶어했다는, 제 엄마를 소시오패스라고 아프게 말하는『신의 퀴즈』의 한진우 박사를 보면서 나는 한번쯤 고독한 천재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독서다. 한 분야의 천재적 기질을 발현할 수 없다면 최소한 수많은 시공간의 간접경험으로 내가 원하는 지식욕을 채워보자, 나는 이런 원대한 꿈도 품었을 거다, 아마.

 

 

1.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지만 전혀 다른 낯선 두 문명-아시아와 남미-을 연결하고, 고대 중국과 현대의 페루라는 2000년 터울의 시간을 교묘하게 잇는다. 진실은 현상황의 위기를 모면할 열쇠가 다른 문명의 과거에 있는 식이다. 외교부에서 일하는 아버지 덕에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랐다는 작가 이력으로 보면 여러가지 문화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창작된 것 같다. 차용했을 뿐인 공자, 노자, 손자 등 고대 중국 철학가들의 사상에 작가가 정말로 정통한지는 미지수지만 <손자병법>, <논어>, <도덕경>의 구절을 비밀을 푸는 열쇠로 배치하여 서구 문화에만 익숙한 우리를 불교, 도교, 카발라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보기 드문 소재랄 수 있는데 내용이나 구성은 인디아나 존스류의 모험담과 다르지 않다. 전생과 현생, 빛과 어둠, 선과 악, 입구와 출구,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 등 흔하지만 말로 하기 힘들었던 세계관-잉카 문명과 진나라 문명-을 자연스럽게 융합한다.

 

마추픽추가 눈앞에 있다. 칠레 시인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추픽추는 영혼의 평온함과 우주와의 영원한 결합으로 가는 여행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한없는 나약함을 느낀다. 남미에서 가장 경이로운 곳. 생명의 순환 한가운데이 있는 나비들의 안식처. 또 하나의 기적." (p.231)

 

진시황은 고대 중국의 다 빈치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린카이푸에게 죽어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다. 의심보다 믿음이 컸기에 과감히 맡긴 시도가 이토록 오랫동안 하나의 비밀을 품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자기 시신을 안치할 때 이룩한 모든 재산과 명예, 수천 명의 노역자와 장인, 왕녀들, 신하들을 산 채로 함께 묻어 무덤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명령하지만 린카이푸는 명령에 따르는 척 하면서 이 모든 사람들을 살릴 묘책과 방도를 강구한다. 언젠가 더 좋은 삶에 대한 꿈, 더 나은 세상이 오리라 선언한 린카이푸는 예언자였다. 그로부터 2000년 후, 현재 페루는 안보를 위협받는 위기 상태다. 대통령은 이를 비밀 리에 해결함으로써 국민을 보호하고 국가적 위신을 바로 세우며 주모자를 색출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다. '열두 개의 바람을 다스리는 자'인 세인츠SAINTS 핵심요원 수호는 인종은 다르지만 마음만은 하나여야 할 할아버지 디에고와 함께 문제의 마추픽추로 향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수수께끼의 비밀이 뒤얽히며 수호와 오드리, 디에고, 로니의 활약이 펼쳐진다. 페루를 악의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한 누구아의 돌이 2000년 전 숨겨진 진시황릉에 있다. 열두 개의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돌을 가질 경우 날씨를 조종하는 절대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쌍의 단추가 있답니다. 좋은 단추, 나쁜 단추 이렇게 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좋은 단추를 나쁜 단추보다 더 자주 누르면 그들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결혼하기 전 1년 동안 이 점을 생각해보라고 하더군요." (p.389)

 

액션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영상이겠지만 주역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2000년의 간극과 진시황릉과 마추픽추의 조화는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게다가 좋아하는 소설인 <둔황>이나 <지상의 노래>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세월과 시공간의 간격이 넓고 깊지만 변할 것은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월(시간의 흐름) 속에 비밀을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어하는 자들이 수도없이 많지만(혹은 당시에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로 반드시 숨겨져야 하는 비밀도 있기 마련이지만) 세상이 변하고 다른 가치가 덮여 온통 새로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며 나무와 산과 하늘이 아는 한 완벽히 가려지는 비밀은 없다는 점에서.  

 

 

 

 

 

 

이 소설들은 밤새워 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도 의미도 충분하다.

 

 

 

2.

 

어떤 계절은 혼자만 발을 뺄 수 없게 하는 재주를 타고 난다. 먼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질 때까지 머물기도 싫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도시의 끝에서 안도감과 초조함을 동시에 느끼는 계절. 여름은 누구에게나 뜨겁고 특별한 기억이지만 유독 이 소녀들에게는 더했던 것 같다. 그 여름, 도시 개발에 밀려 점점 더 음침해지는 뉴욕의 변두리 공장지대 레드훅에서 분홍색 고무보트를 타고 기름기 섞인 바다로 나간 권태로운 두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판단을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믿는 신중함을 가진 가게 주인 파디도 좋고 소녀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떠다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변하지도 새로워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의 감수성을 지닌 진중한 소년 크리도 좋지만, 그 누구보다도, 꿈을 잃고 노래하는, 물가에서 온몸이 젖어 팔다리가 축 늘어진 채로 발견한 밸러리를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자기가 믿는 방향으로 들쳐안고 뛴 로맨티스트 예술가 조너선이 좋다. 모든 날씨를 음악으로 바꿔말하는 자연스러움, 말할 때 극적인 몸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거나 무대 뒤의 연인을 향해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낭만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조너선은 파디에게 그날에 어울리는 음악을 언급했다. 지난주에는 "거슈윈을 위한 오후네요. 대체로 맑고 살짝 상쾌하면서도 비가 올 것 같은"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제 밤에는 이렇게 물었다. "오늘 해 지는 거 보셨어요? 해거름을 그렇게 그리는 양반은 필립 글래스밖에 없죠." (p.61)

 

뉴욕의 공장 변두리가 어떤 분위기인지, 개발과 고립, 권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이 젊은 작가는 공감각적 묘사와 공포와 환상이 자아내는 이미지 형상화의 고수다. 미스터리 같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순수한 성장 드라마같다. 사라진 소녀들 중 한 명만 발견되고 소녀조차 떠있는 보트가 기울어지면서 친구 준이 이상한 그림자에 이끌려 물속으로 빨려들어갔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증언하지 못하는 와중에, 철없는 소녀들의 이상야릇한 마지막 모습이 조너선과 크리에게 포착됨으로써 모든 의심의 고리가 이들에게 쏠린다. 형사는 왜 밸러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를 묻지 않고 무조건 조너선과 크리를 의심할까. 진짜 둘중 범인이 있을까. 한 마을에 사는 소녀들을 안다는 이유로 은연중 용의선상에 올라 당하는 협조를 빙자한 수사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밤에 혼자 부두를 거닐고 있을 때면 크리는 어디 사차원 세계에라도 뚝 떨어졌으면 싶었다. 평생 한곳에 갇혀 살았다는 느낌, 이 좌절감을 달래줄 무언가가 걸렸으면 했다. 그런데 지금 저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부두에 가만히 서서 그런 걸 바란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보트를 타고 강 위로 나가면 레드훅에서 해방감을 느낌과 동시에 레드훅 가까이에 머물러 있는 셈이었다. 저 두 소녀는 온 도시를, 온 해안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심지어 저 멀리 뉴저지의 항구들조차 저 애들 것이었다. 저 애들은 도시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 밤의 모험을 저 애들만 누리게 할 순 없었다. (p.106)

 

입바른 소리로 합리적인 척 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자기 삶에 충실하면서 타인의 삶을 따뜻하게 봐주는 일은 어려워서 대단한 일이다. 그냥 지나쳐도 됐을 일들, 어느 누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믿고 또 믿어주는 마음,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 이 엄청난 주인공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일은 생략하더라도, 막상 끝이 나니 개발과 소외의 경계에서 시름을 앓는 뉴욕 변두리 레드훅의 임대 아파트 단지와 동네 사람들의 작지만 반짝였던 여름날들이 간혹 떠오를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었던 그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너무 서투른 대신 너무 바르고 아름다웠던 온기를 우리는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내것을 예뻐하고 지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연인, 내 친구, 내 조카, 내 일, 내 집, 내 차.. 우리에게는 이토록 간절히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서 지키고 싶어도 지킬것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종종 잊는다. 타인의 외로움 속으로, 타인의 추억 속으로, 타인의 이기적인 동화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는 건 어떨까. 늦지 않게 이런 소설을 만났고 이제 곧 이 여름밤의 열기도 가실 테니까.

 

 

 

3.

 

 

미국에서 늘 좋은 반응을 얻었거나 얻고 있다고 소개되는 작가지만 이 작품은 한국계라는 정체성과 이방인이라는 낯선 땅에서의 고독을 모두 내려놓은 채 써내려간, 그간 출간된 작품과는 다르게 굉장히 메타포적이고 낯설다. 환상의 거미줄을 헤치고 작가가 던진 먹이를 받아들기 위해 몇 개의 난관을 거쳐야 하는 기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말지는 지금의 입장, 의지, 사고가 결정한다. 쉬이 잘 읽히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판이 자기가 키우던 수조의 물고기를 갑자기 전멸시킨다든지, 차터 지역으로 차출된 레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B-모어 지역을 떠난다든지 하는 대목에서는 99%의 확률로 문맥이 주는 이외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세계의 안과 바깥, 인내와 폭발, 수용과 도전의 대비는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지 억지스럽게 읽어낸 의미는 아니다.

 

미래의 미국 사회는 B-모어, 차터 그리고 자치주라는 기묘한 방식으로 각자 다른(우리는 계급으로 읽어내는) 세 개의 세계로 나뉘었다. 우리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각자가 판단해 보시길. 적어도 나는 내가 속할 만한 곳을 택한 상태에서 읽긴 했으나 세 세계의 장단점, 같은 점과 다른 점은 굳이 판단하지 않았다. 작가 역시 의도적으로 (무형의) 계급을 위시한 상태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구성한 것처럼 보였다. 판과 레그는 B-모어 지역 토박이로, 이 지역 사람들은 완전히 정체되어 변화와 도전을 저버린 삶을 산다. 여기서 만족이나 안정을 얻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기력에서 오는 권태, 두려움에서 오는 정체에 삶의 재미를 뺏겨버린 것처럼 보인다. 대다수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거나 과도하게 집착하는 법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차터 지역으로 차출된) 남자친구 레그를 찾아 나선 판의 결정은 고요한 물 위의 물수제비처럼 변하지 않던 B-모어 사람들을 조금씩 바꾸어나간다. 단지 사랑은 아니었다. 아기에게 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해서도 아니었다. 시작은 어떤 끝을 바라보며 선택되지만 조금만 지나보면 우연이 운명을 이끌고, 운명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끝을 위해 시작했지만 어느새 끝과 시작은 각기 다른 지점에 서 있기도 한다. 판이 그랬고 B-모어 사람들이 그랬고 자치주에 살던 여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료 문제를 가장 크게 다루는 건 미국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계급 문제가 의료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때문일까. 의료 문제는 결국 돈, 계급, 생명 존중, 고독과도 연관되어 이 사회의 병적인 문제들을 예리하게 각인시킨다.

 

그녀가 길을 나선 것은 단지 레그를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레그가 어디로 갔는지, 또는 그가 심지어 살아 있는지에 관한 진짜 실마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그런 불확실성을 가지고 우리의 봉쇄 구역을 떠나려고 하겠는가? 레그가 자극제였던 것은 맞다. 그건 정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일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결코 하나의 사람이나 사건만으로 전체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아무리 소중하고 아무리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할 때마다 끊임없이 팽창한다. 종국에 가서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pp.95-96)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이창래 작가가 태양보다는 토양 같은 사람일 거라 추측한다. 가장 열악하고 뜨거운 순간에도 그는 꼿꼿하고 예리하게 몸을 낮춰 방어한다. 부르짖지도 숨지도 않고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간 읽은 세 편의 소설들 중에서도 나는 여전히 <생존자>를 제일 아낀다. 준, 헥터, 실비는 한 번 읽히고 잊혀질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 전쟁의 역사는 전쟁(의 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이전과 이후에 더 의미있는 무엇으로 변했다. 네 번째 작품으로 <가족>을 읽는다.

 

 

4.

 

 

태운 사람 모두를 죽인 여객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3개월의 갓난 아이를 추적해가는 슬프고 기이한 미스터리지만 책을 덮을 때 이것 말고 어떤 결말을 더 생각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말을 모른 상태에서는 충분히 재미있지만 막상 결말을 알면 이렇게 싱거울 수가 없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서정이 다분한 문장은 충분하지만 의도된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진실을 즐거운 반전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건이 기묘할수록 산 자들에 의해 조작, 은폐되는 일이 허다한 법.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들 사이에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들을 잘 포착한다. 할머니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손자의 사랑을 지켜주고, 탐정은 모두가 행복해길 바라지만 결국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소녀의 언니는 동생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 선택이란 걸 하지만 그건 어린 소녀의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소년은 모두가 욕심내는 소녀를 이렇게 지킨다.

 

릴리는 이야기를 지어서 말하길 좋아했다. 마르크는 아래 침대에 누워 릴리가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곤 했다. 가끔 릴리가 무서워할 때면 침대에 앉아 릴리가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주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릴리가 늦게까지 책을 읽으면 불빛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양에게 햇빛을 그만 비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p.409)  

 

 

 

5.

 

 

<세계 아닌 세계>과 <패자의 기억>은 혁명의 시대를 몸소 부딪쳐나가는 사람들의 긴 인생에 바치는 헌사다. 멕시코 작가 호르헤 볼피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 체르노빌 사고, 냉전체제 종식 등 20세기를 관통하는 러시아사를 배경으로 얽히고 얽힌 관계와 삶을 시간순으로 짚어가는 소설 <세계 아닌 세계>를 구성했고, 색다른 소설이 낯선 배경을 가리키고 있어 시간의 경과와 인물의 성장, 소설의 끝이 한 곳에서 만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프랑스 작가 미셸 라공도 <패자의 기억>에서 비슷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실제 기계공이면서 노동자였던 그는 2차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의 경험과 문학과 예술의 세계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넓힌 풍부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주인공 알프레드가 유럽의 20세기-가장 혼란한 시절-를 통과하면서 겪는 아나키스트들과의 추억담, 독서와 체험 사이의 괴리,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작가가 스스로 펴낸 20세기 회고록인 셈이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본 적 없는 자칭 '패자'의 굴곡진 삶을 펼치면 놀랍도록 가짜같은 진짜 역사가 흐르기 시작한다.    

 

알프레드의 말은 진심이었다. 바스킨의 그림에서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 플로라, 꿈속에서 본 플로라를 제외하면 알프레드는 플로라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머릿속 방황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욕망에 따른 동요까지도? 그는 플로라를, 바스킨이 그린 나체의 플로라를 갖고 싶었다. 알프레드는 그녀가 자신의 여자였을 때 원했던 것 이상으로 강렬하게 플로라를 탐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플로라를 향한 이런 열정이 난폭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플로라를 멀리했던 것이다. (p.435)

 

레닌, 트로츠키, 크롯포킨, 고리키, 블룸, 마흐노, 소렐, 페기, 말로 등 이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알프레드 곁을 스쳐지나거나 더없이 오래 머무른다. 그랬다고 해도 여전히 한때다. 한때 우리 곁을 지키던 사람들, 한때 우리 곁을 스치던 바람, 한때 우리와 같은 생각과 웃음과 희망들. 가장 복잡하고 혼란했던 시절 자의반 타의반 이별한 연인을 아쉬워하지 않을 도리는 없지만, 삶이란 어느 경계를 지나면 가능했었던 동화와 꿈이 실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리는, 어떤 기약도 확신도 없는 무엇 아니던가. 갖가지 모양의 삶이 허공을 떠돌고 그것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이기거나 실패했다고 말해질 수 없다. 

 

영원한 영원은 결코 없다. 아직 너의 삶에 간섭할 수 있다는 작은 진실 하나만이 그저 고마웠을 뿐. 비현실같은 비명과 신음과 폭탄 사이, 은은한 사랑을 찾아나서는 길에서 주어진 물결 따라 파도를 타는 것외에 다른 경로는 도통 허락되지 않는 여정이었다. 여기서 더 크면 우린 어떤 어른이 될까, 마음 깊은 곳에 이상한 질문을 품는다.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는 분명 있지만 겪지 않고는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 경계. 중간. 희미.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 사라졌건만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온 알프레드는 더이상 예전의 알프레드가 아니며, 다시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때 깨달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아 서로의 현재와 과거를 반추하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이 독서의 결과, 사랑스러운 레지스탕스가 나오는 <유럽의 교육>을 떠올리며 평소 궁금했던「10월혁명」과「스페인 내전」을 가르쳐줄 책으로 터를 옮겨갔다.

 

 

 

6.

 

그리고 몇 편의 소설은 기대와 달랐다. 그게 꼭 나쁜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누구나 설정, 소재, 캐릭터, 구성, 결말 중 하나라도 자신을 휘어잡아주기 바라며 책을 펼치지만 거기 미치지 못할 때 그 작품은 아주 빠르게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난 너에게 장미정원을 약속하지 않았어>와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은 바쁘고 강압적이고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이 세계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내가->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삶에 지친 현대 여성 밀라가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에 시달리며 자발적으로 찾은 정신과 상담에서 우울증을 진단받게 되어 입원한다면, <난 너에게->에서는 열여섯 살 소녀 데버러가 마음 속 또다른 세계인 '어두운 왕국'에 의해 광기로 타락해가는 정신분열증으로 부모님에 의해 병원을 찾게 된다. 부모님마저 이해하는 엄마와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는 와중에 데버러는 점점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밀라와 데버러는 병원에서의 상담치료, 비슷한 환자들과의 관계로 자신감을 안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헤이즐을 떠올렸는데 암 환우 모임에서 만나 서로의 아픔과 마음을 나누며 공감한다는 얘기에도 별로 공감하지 못했던 건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건 아픈 사람'이라는 뻔한 방식을 거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불안, 허무가 눈에 보이는 고통, 어려움, 혼란에 비해 다소 작게 느껴진다. 힐링 소설의 범주에 내멋대로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함께도 행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가든 스펠스>와 <집으로 가는 먼 길>을 나란히 놓는다.

 

 

7.

 

천둥꽃은 실제인물인 주인공 엘렌 제가도(Helene Jegado, 1803-1852)를 지칭한다. 그녀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 엄마가 어릴적부터 그녀를 천둥꽃이라 불렀지만 왜 그렇게 불렸는지 다 읽고나서도 잘 모르겠다. 한눈을 많이 팔며 읽어서 사연이 나왔는데 놓친 걸 수도 있다. 천둥꽃은 귀하디 귀하게 길러졌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유로 몰락한 귀족 가문의 가사도우미가 된다. 미스터리로 치면 '왜'가 빠졌기 때문에 장르로도 드라마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지만 브르타뉴 지방색과 1800년대 시대상이 오싹하고 광기어린 여인을 형상화하는 데 무리가 없다. 컬트 문화, 미신, 신비주의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벨라도나 열매와 비소의 독으로 가는 곳마다 그녀의 요리를 먹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불구하고 이유와 동기를 밝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떨어진다. 그녀는 결국 재판장에 서지만 콜레라 창궐과 겹치는 바람에 희생자 수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꼈거나 재현하고자 한 부분이 사건 전체가 아니라 중세와 맞닿아있는 브르타뉴 특유의 민중성 묘사에 있었던 것 같다.

 

 

8.

 

2013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북한을 소재로 주목을 끌지만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되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이례적으로 낯선 스토리다. 한국문학이 북한을 소재로 쓴 작품에서 이념적 갈등이 없던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보는 북한과 서구가 보는 북한의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고아원 원장의 아들이자 주인공인 준도의 직업을 특수훈련을 받은 일본인 납치담당으로 설정했는데 부조화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의 고위 간부에게 엄마를 뺏긴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애증, 엄마를 향한 깊은 그리움, 인민배우 선문과의 사랑. 일상을 놓고 보면 보통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루트 때문일 수도, 한반도에 사는 당사자로서 자동 형성된 이념을 뒤엎기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작가는 북한을 오로지 인권의 사각지대로 설정한 상태에서 특수하고 부조리한 면을 최우선으로 둔다. 준도를 정부 당국의 억압에 직간접적으로 항거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물로 설정한다고 밝혔지만 이데올로기 최전선 북한의 상황이 훨씬 뜨겁고 처참하다는 걸 아는 나와 우리에게는 싱거운 요리일 수 있다. 북한 인민이 그저 평범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9.

 

 

 

 

 

 

 

 

괴테, 실러, 토마스 만, 찰스 디킨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자주 마시기도 했지만 작품에서 언급한 경우도 있다. 찰스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프랑스 귀족이 초콜릿을 마시는 장면을 약간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퇴폐적인 면모를 그렸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남태평양에서 직접 카카오를 경작하면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것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힘든 노동인지 썼다. 시대가 변해 초콜릿 대신 차와 커피를 즐겨 마시지만 지금도 초콜릿 생산과 조리 방식은 열대 우림에서 유럽으로 카카오의 명성이 뻗어나가던 16-19세기처럼 대중 깊숙한 곳에서 변신을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다.

 

그중에 아동노동은 가장 나쁜 경우에 속한다. 비슷한 나쁜 일들은 도처에서 같은 방식으로 발생한다. 바나나, 커피, 초콜릿, 카카오. 뭐 하나 다를 게 없다. 특정 지역, 특정 기후에 재배되는 돈되는 작물에 대한 착취가 카카오를 강타한다. 카카오의 핑크빛, 핏빛 역사를 되짚으며 나아가는 달콤하면서도 잔혹하고, 매혹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책이다. 카카오의 과거와 현재, 생태와 재배법까지 모든 것을 다룬다. 유리잔에 찰랑이는 맑은 핏빛 와인의 향과 혼자만 아껴마시고 싶은 맛. 온갖 비밀을 품은 이 작고 붉은 빛 나는 갈색 열매는 가히 열대 우림의 승자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협정 182조는 최악의 아동노동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여기서 아동이란 18세 이하 모든 사회 구성원을 말한다. '최악의 아동노동'이라는 표현은 노예제, 인신매매와 같은 노예제와 유사한 행태, 학교에서의 노예 노동과 강제 노동 및 의무 노동 같은 농노 노동, 무장 투쟁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을 포함해, 아동 매춘 제공 및 알선, 포르노나 유산 포르노 제작, 마약 거래에 이용하거나 불법 행위에 아이들을 연루시키는 행위, 아동의 건강과 안정, 도덕에 해가 되는 노동을 말한다.

 

2000년 서아프리카 카카오 농장에서의 아동 노예를 다룬 내용이 언론에 나왔다. 독일, 영국, 미국의 중앙지에 기사가 실렸고, 주요 방송국은 끔찍한 영상의 르포를 방영했다. 아동 납치와 강제 노동에 대한 세계적인 비난이 일었고, 국제노동기구는 서아프리카의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가나, 나이지리아에 대한 대규모 조사를 단행했다. 조사 대상은 최악의 아동노동 행태들이었다. 강제 노동과 벌채용 칼을 사용하는 위험한 노동, 과도하게 무거운 카카오 자루 운반, 독성 살충제 살포 등이다. (<신들의 양식, 인간의 욕망-카카오> p.83)

 

자, 책을 읽었고 페이퍼도 마감했으니 어떤 의미(-적어도 독서)에서는 이 계절을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까. 책으로 완벽해진 계절 따윈 살면서 단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오래 전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 독서는, 결국 찾지 못할 완벽한 책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고, 삶은, 결코 없을 완벽한 생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며,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믿는 완벽한 짝을 갈구하는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완벽한 계절이나 완벽히 아름다운 날들 같은 것들을 나는 믿지는 않지만 여기 아닌 세상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편이 살만한 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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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든 피해자든 수용소 생활을 한 자는 많다. 죽은 자들보다 적겠지만 산 자들도 꽤 된다. 사건이 하나라고 해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몸 전체가 젖은 자와 발만 담근 자,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겪은 자와 일부만 경험한 자 등 그 가해와 피해의 경험이나 기억의 범주가 전부 같지도 않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망각의 욕망이 차올라도, 가해자의 왜곡과 은폐 노력이 아무리 절실해도, 기본적으로 세상에 비밀이란 게 있을 수가 없다(고 믿는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싶어했다. 말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거나 그 용기가 함께 생활했으나 처참히 떠난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 일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은 상황 전반을 해석해보려 하지만 겪지 못한 일을 빠짐없이 알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이고 눈물겨운 반면, 애초부터 한계를 갖는다.

 

홀로코스트 반백 년을 훌쩍 지난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수용소에 관한 지식은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손만 뻗으면 닿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 그전에나 후에도 끔찍한 일은 많을 텐데 유독 더 혹독하고 야만스럽게 기억하는 자들이 많다. 프리모 레비는 사람들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고통과 아픔과 비극의 진실을 알기 거부한다고 말한다. 내것이 아닌 상처를 헤집어서 괜한 죄의식이나 죄책감에 시달릴까봐 두려워서겠지. 그런데 왜 유독 프리모 레비는 더 많이 읽히거나 주목 받는가. 단지 그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3.1운동은 어린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뛰쳐나와 일어난 일제시대 최고의 독립운동이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목이 터져나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역사는 유관순 만을 기억한다. 그녀는 어렸고 붙잡혀 처참한 고문을 당했고 그러면서도 목이 터져라 소리쳐 결국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같은 일을 겪어도 소수의 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그림자로 남는다. 안네와 프리모 레비가 대표주자가 될 수 있는 건 그들이 문학적 글쓰기를 뽐냈기 때문이지, 그들만이 살아남거나 유독 심한 고통을 겪었거나 역사에 희생당했기 때문은 아니다. 우린 이름있는 자들 뒤에서 그림자의 그림자로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고 덜 연구된 부분은 비밀을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쪽, 즉 압제자들 쪽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롯 대다수는 알고 있는 게 적었고, 극소수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놀라우리만치 잔혹하게 저질러진 일들에 대해, 나치 기구 내에서 모를 수 없었던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할 수 있었는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눈과 귀를 (무엇보다 입을) 꽉 닫고 있겠다는 보다 신중한 길을 선택했는지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살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게 보면 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p.14)

 

특수적 상황이 보편화가 되어버렸고 그들이나 장소 혹은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 여러 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 가해자와 피해자, 기억과 망각을 굳이 프리모 레비의 목소리로 읽을 의미가 사라지니까. 한여름에 아우슈비츠라니, 어딘지 모르게 뭉클하고 알싸하다. 더 많이 공감하고 아파하고 이해해야지. 나치스와 아우슈비츠 담론을 써내려간 철학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읽는 페이지는 아직 50p..

 

 

이현수의 <나흘>은 구소은의 <검은 모래>만큼, 김영하의 <검은 꽃>만큼 좋다. 임철우의 <황천기담>을 어서 읽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떠올리는 <이별하는 골짜기>와 <등대>만큼 좋다. 여기서 '좋다'는 '아프다'와 동급의 의미에서다. 무겁고 질기고 깊고 아련하다. 때로 너무 아득해서 끝끝내 닿지 못하는 삶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솟구친다.  

 

 

 

사랑보단 미움이 훨씬 강한 화력과 점액질의 성분을 갖고 있다는 걸 그때야 나는 알았다. ... 폭발을 억누르며 사는 경우가 가장 나쁘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나는 남은 목숨을 부지하며 변함없이 인영을 기다린다. 우리는 너무 깊고 무거웠고 불안한 세월은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지금 세속의 질서를 지키며 수도승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넘어선 상태이고, 인영이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대도 나는 이 오래된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다. 비록 고독과 황폐의 끝을 본다 할지라도. 이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경우의 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이현수, <나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는 피해자가 어떤 사정으로 가해자가 되어버리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피해 사실을 영원히 묻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가해자를 온전히 미워하지도 못하게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품은 대상을 보는 일이라든가. 아버지의 가정 폭력 앞에 자식이 느끼는 애증같은 것. 여자라서, 남자라서, 가난해서, 사랑해서, 나약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한때, 그 처참함과 애절함을 <나흘>은 마치 어제처럼, 내 일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또렷하게 포착한다.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한 상처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자가소독하고 아물도록 기다리지만 상처는 터져 피가 나고 곪고 닳고 삭혀야 겨우 아물 기미가 있을 뿐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이들의 충실한 죄의식은 그로부터 다시 반 백년이 지날 때까지 죽은 채 살아숨쉰다.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로 인해 드러난 진실은 추악하고 처참하고 아프지만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내시가家, 동학 혁명, 6.25까지 현대사 60년의 세월을 두 가문과 마을 사람들을 통해 듣는다.

 

여자들이 머무는 부엌에는 칼과 피와 꽃이 있다.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자기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가랑이 사이로 아기를 낳는다. 여자들은 하루에 세 번, 날카로운 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자르고 벤다. 무심한 얼굴로 생선을 토막내고 포를 뜨며 살아 있는 닭의 모가지까지 비튼다. 그런 뒤 피 묻은 손을 씻고 정결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꽃을 예쁘게 꽂는다. 강인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라는 이미지 뒤엔 이런 잔인함이 숨어 있다. 아버지의 말처럼 나는 지금도 여자를 모른다. 여자들의 산수도 헤아리지 못한다. (이현수, <나흘>)

 

 

 

이 책을 읽은 시점은 츠바이크의 또 다른 책 <어제의 세계>를 펼쳤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때였다. 아직도 그 책은 앞쪽 어딘가 책갈피가 꽂힌 채 집구석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당장 그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라앉은 1인칭 시점이 묵직해서 굉장한 몰입이 필요한 책이었다. <체스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정우성과 이시영이 키스신 드립으로 제작발표회를 했지만 정작 줄거리상 그 키스신은 있으나마나 한 사소함(심지어 욕망도 아님)인 걸로 기억되는 <신의 한 수>를 볼 때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정우성보다 피프광장에서 먹은 매운 어묵과 씨앗 호떡이 더 기억에 남는 그런 영화였는데, 바둑이 꼭 체스 같고, 보는 내내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츠바이크의 소설을 읽었으리라는 확신 아닌 확신을 했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 나타난 한 명의 천재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찬가지로 역사상의 별 같은 순간은 이후 수십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한다.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들어가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시간의 뾰족한 꼭지점 하나에 집약되어 실현되는 것이다. 보통은 평온하게 전후로 나란히 일어나던 일이 단 한 순간 속에 응축되어 나타나고, 그러고 나면 그 순간은 역사상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하게 된다. 단 한 번의 긍정이나 단 한 번의 부정, 너무 빠르거나 혹은 너무 늦거나 하는 일이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서 개인의 삶, 민족의 삶 심지어는 인류 전체의 운명의 흐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서문)

 

예전에 하나의 별과 또 하나의 별이 십자가처럼 겹쳐져 중앙에서 만나 빛나는 사실을 믿었다면 요즘은 뾰족한 세 개의 꼭지점이 겹쳐지지 않은 채 손을 붙잡고 있는 트라이앵글을 믿는다(고 누구에게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그런 이야기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누구나 보고 듣고 공부할 수 있는 시공간이지만 아무나 배열할 수는 없는 특별한 우연과 열정의 역사. 그렇게 어느 영역에 나타난 반짝이는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십자가 혹은 트라이앵글을 가능하게 하는가. 우리는 그걸 운명이라고도 우연이라고도, 그것도 아니면 역사 혹은 이미 지나왔지만 앞으로도 올 수 있는 일이라고 부른다. 전후, 좌우, 위아래처럼 그때 그 시간 그곳에서 하필이면 그 순간이 실현되었다는 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익숙한 내용에 독특한 시각(관점)에 구성과 문체의 독창성에 감탄하지만 다소 이렇게 수긍하게도 하는 책이다. 그렇지만 평범했어, 라고.

 

 

 

 

보르헤스의 강연은 어렵다. <칠일 밤>도 그랬고, 그의 강연은 머릿속에서 잘 정리되지 않는다. 비유와 암시가 많고 그걸 적절하게 이용하는 글쓰기에 능한 문학가이자 비평가라 그럴 거라고, 내가 스페인권이나 남미 문화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 권 두 권 읽으면서도 계속 같은 느낌이라 이제 잘 모르겠다. 소설도 이론(강연)도 어려운 보르헤스에게 끌리는 이유가 낯선 예문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암시의 마력에 빠졌기 때문일까, 손에 잡히지 않는 멀고 두렵고 아득한 느낌 때문일까.

 

에머슨(Emerson)은 어딘가에서, 도서관이란 죽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일종의 '마법 동굴'이라고 쓴 듯싶군요. 여러분이 그들의 책갈피를 펴면, 이 죽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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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부(敎父)의 또 다른 문장이 생각나는군요. 그 교부는, 무식한 사람의 손에 책을 건네주는 것은 아이들의 손에 칼을 건네주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책이란, 고대인들에게는 한낱 임시변통물에 불과했습니다. 한 편지에서 세네카(Seneca)는 거대한 도서관들에 반대해서 썼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뒤, 쇼펜하우어는 책을 사는 것을 책의 내용을 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고 썼습니다. 가끔 저는 집에 쌓인 많은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새 책을 사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답니다. 서점에 들어가서 제 취미-예를 들어 그대 영시, 또는 고대 노르웨이 시-에 딱 맞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되뇝니다. "저 책을 살 수 없어서 얼마나 애석하냐, 이미 집에 한 권이 있으니 말이야."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척하는 삶>(제목이 척하는 삶이 뭐냐!)에서 내가 접은 부분은 지난번에 썼던 리뷰를 참조했더니 두 구절이다. 주로 닥 하타가 세계 2차 대전 일본 군의관으로 참전했을 때 거기서 만난 위안부 자매와의 기억의 일부. 사실 이창래의 소설은 소재에 비해 도드라지게 확 튀어오르는 문체는 아니다. 한국전쟁, 참전 군인, 고아원에서의 삶을 다룬 <생존자>도 그렇지만, 입양된 재일한국인, 참전 군의관, 위안부, 입양을 다루는 <척하는 삶>도 예외는 아닌데, 시점이 주로 다 겪은 후의 시간을, 아프고 고통스런 기억을 담담히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기에 독자가 직접 주인공의 삶에 뛰어들지 않게 되면서 고통의 맥락이 조금 희석되는 느낌을 받는다. 겪은 사람도 이리 덤덤하게 살아가는데 징징대는 내 존재가 사치 아닐까 싶은 마음에서 오는 위안. <생존자>는 또 다른데, 이 소설은 정말 좋다. <척하는 삶>은 <생존자>에 비하면 구성이 훨씬 단조롭고, 아픔을 제대로 터치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일부러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작년 봄 쓴 페이퍼를 열어 보았더니 당시엔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세 작품을 연달아 읽는 시간은 정말 끔찍했다. 우울에서 나와 다시 우울에 빠지고 또 다시 빠지며 다가올 낙관을 고대하던 시간이.  

 

 

누군가 그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면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 젊은 남자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그녀의 거기 있음 그 자체에 끌렸다고 말하겠다.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이 결국 아름다움 같은 것조차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는 그때 그것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그저 그녀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몸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또 그녀의 잠든 정신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러면 그녀가 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pp.333-334)

 

닥 하타의 인격이나 인간성을 의심한 적은 단연코 없지만 이상한 점이 많다. 모든 것을 겪은 후 철저한 이방인이 되기로 하면서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한국 태생의 부모 모르는 버려진 여자아이 입양하는 것. 규정에 어긋나 불가능하다며 남자아이를 권하는 담당자를 설득해 기어이 여자아이를 데려오는 것. 딸이 간절했을 수도 있지. 혼자 사는 나이든 남자가 자신이 태어나 버려진 땅에서 버려진 여자아이를 입양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의심할 만한 일인데, 설정이나 상황이 어색해서 자꾸만 나쁜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그간 쌓인 내 선입견에서 나온다는 걸 깨닫고 근거 없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자각했다. 그는 그저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었을지도. 연애도 하고 호의와 선의를 베푸는 삶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고, 과거에 느꼈던 고독을 나누고 위로받으려는 마음으로 예쁜 딸을 원했을 뿐인지도 모르는 일. 내가 너무 오해 했다. 딸도 왜 하필 자신을 데려왔냐며 자라는 내내 오해 한다. 게다가 왜 당신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냐며 질책한다.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에서 문제의 본질을 피한 채 계속 소리없이 삐걱대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한다. 군의관으로서의 경험, 한국인 위안부 자매를 보며 느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 과거의 갈등이라면, 시니컬한 딸이 계속 엇나가기만 하는 이유와 관계 회복은 현재를 떠받치는 갈등이다. 

 

나는 이제 뭘 '본다' 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하는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p.116)

 

 

그러니 사람이든 문학이든 그외의 어떤 것이든 약간은 내가 들어갈 틈을 주는 은근함이 좋다.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겉과 속이 뻔한 사람보다는 사기는 안 친다는 가정 하에 조심스럽게 자기를 감추는 사람이 매력 있다. 혈액형, 별자리 모두 나더러 완벽주의 성향이란다. 다 믿을 것도 못 되지만 영 아닌 것도 아니라서 절반쯤은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는데 생활 속의 나는 덤벙대고 고집 센 다혈질에 가깝지만 막 쓰는 페이퍼조차 이렇게 괜찮은 마무리 하려고 애쓰는 걸 보면 맞는 것도 같다. 집앞 슈퍼에도 씻고 옷 갖춰입고 가는 건 또 어떻고. 꼭 그런 날 몇 년 안 보던 친구나 이웃 사람 만나는 법이니까. 지식욕이 강하고 생각이 많고 유능하지만 성욕을 감추는 순수기질에다 뮤즈와 완벽주의 성향.. 나는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영감은 나한테 더 필요하지 남한테 그 좋은 걸 왜 주냐고. 더해서 자부심이나 자긍심 꼭대기에 닿기 전에 여기서 끝낸다. 항상 그랬지만 더우니 쓰는 것보다 읽는 거, 읽는 것보다 데굴데굴 누워서 보는 게 더 편하다. 요즘은 장나라와 장혁, 한그루와 연우진, 우에노 주리, 기무라 타쿠야, 에이타와 나가사와 마사미, 오구리 슌 나오는 드라마랑 <MOZU>.. 그것만 보면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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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7-2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신간인 줄 착각했어요. 이달 초에 베를린에 갔을 때 '홀로코스트 추도비'를 직접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 베를린에만 무려 16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보르헤스의 문학은 아이리시스 님한테도 어려운가 보네요. 저는 철학자들의 책 가운데 쇼펜하우어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고 자만할 정도인데, 어느날 밤 늦게 라디오를 듣다가 '보르헤스와 쇼펜하우어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나중에 꼭 '보르헤스'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치더군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보르헤스의 책은 단 한 권도 펼쳐보지 못하고 있네요. 어려우면 도대체 얼마나 어려울까 싶어서라도 언젠가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드네요... ㅎㅎ

* * *

······ 나는 스위스에서 머물던 시절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했다. 만일 나에게 한 명의 철학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택할 것이다. 만일 우주의 수수께끼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언어가 그의 책 속에 쓰여져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책을 독일어로 읽었고 나중에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도 읽고 또 읽었다. ······

아이리시스 2014-07-28 18:56   좋아요 0 | URL
oren님 안녕하세요.

제목과 시점이 딱 맞아떨어져 오해할 만 해요. 댓글 읽고 서재 놀러갔는데 사진 보니까 이 세상 같지 않고 좋네요. 독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3년 전부터는 독일에 가보고 싶어요. 프랑스는 파리 빼고 다 좋다는 얘기를 오랫동안 살던 지인에게 많이 들었는데, 저는 그래도 이탈리아를 좋아하거든요. 그 거대한 유적의 도시가 이 세상 같지가 않아서요. 독일 일주하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oren님이 부러울 뿐이에요ㅠㅠ

보르헤스는 소설도 강연도 미로 같고 철학적 사유를 많이 요구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어렵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난해함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비유와 암시는 철학으로도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아래 구절은 보르헤스가 스위스에서 쇼펜하우어를 읽고 단 한 명의 철학자로 선택하는 구절인가요? 쇼펜하우어를 다 읽고 자부심 느끼는 oren님이라면 보르헤스가 궁금해지기도 할 것 같네요. 그럼 저는 쇼펜하우어..ㅎㅎ

루쉰P 2014-07-2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워낙 좋아하는 프리모 레비의 작품이라 나오자 마자 샀어요.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더라구요. 레비가 난해한 게 아니라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할 지 말이에요. 음, 그러니까 인간은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또 자신이 당했던 기억을 망각하고 또 다시 그런 행동을 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레비가 자살한 이유는 그런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근데 아이리시스님 너무 많이 읽으시는거 아녀요? ㅎ 밖은 폭염으로 불타고 있는 데, 아이리시스님의 서재는 독서열로 뜨거우네요. ㅎㅎㅎ

저도 한 달에 한 권은 읽을거에요. 그리고 쓸거에요. 뭔가 사람이 계속 도전을 해야죠!!!

아이리시스 2014-07-28 19:02   좋아요 0 | URL
의외로 잘 안 읽혀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저는 얇고 익숙한 사유라서 후딱 읽으려고 했는데 불가능하더라는 의미! 이스라엘이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 업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행하는 학살이요.. 현재 이스라엘의 주체는 당시 히틀러에게 당한 유대인의 민족이 아닌 다른 유대인이라는데 뭐가 맞을까요. 누구 알려주실 분ㅠㅠ 유엔사무총장 된 후로 가장 많이 반총장님께서 욕을 드시고 계시더라고요. 망각도 능력이라고 자주 생각하는데, 안 좋은 기억을 잊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전전긍긍하며 힘든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해서요.

너무 많이라니.. 우리 모두 늘 읽는 정도죠.ㅎㅎㅎ 쓰긴 쓰고 있으신 겁니까? :)
 

 

 

 

서재에서 도서관 타령해봐야 별 수 없다. 여긴 책을 파는 곳이니 나는 별로 좋은 고객이 아닐 터. 이제야 책값 걱정을 한다. 주문하는 책 태반이 문학일 때는 정해진 금액에서 어떤 책을 택하는 게 가장 이상적일까만 고민하면 됐다. 관심사 아니 갖겠다는 욕망이 커질 때 상황은 더 열악해진다. 이러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어려운 책을 구입해(그래도 한글로는 쓰여있어야 함) 일 년 내내 읽는다면.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든가 단테의 <신곡>을 암기해보는 건 어떨지. 이래도 괜찮을까. 이언 매큐언과 슈테판 츠바이크, 요 네스뵈와 줌파 라히리, 산도르 마라이와 옌롄커와 오에 겐자부로, 줄리언 반스가 한 페이지에 등장하는 페이퍼. 지금까진 생각의 골이 얕을 때 페이퍼를 썼다. 이제 그냥 단상이 되어버렸지만. 비교적 같은 시기에 내가 '읽었다는' 사실 빼고는 만날 이유나 까닭이 하나도 없는 작가들. 김경주의 시로 표현하자면,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작가가 내 마음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쓸 책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쓴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영혼에 처벌 받을지 모르지만 시체를 사랑해서 묻지 못하는 사제처럼 불가능한 영혼을 꿈꾼다 환영에 습격받은 자로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몇천 년 전부터 살았던 바람이 내 머리칼을 멀리 데리고 날아갈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김경주, 『몽상가』중에서

 

아빠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설령 맞다 해도 내가 아는 건 당연히 남들도 알고, 하물며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남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0.1%를 제외하면 주어진 정보, 해결능력, 생각의 방향이나 가치 등이 큰 범주내에서는 대체로 일치하는 법이니 상황의 난이에 휘둘리지 말라는, 그럴 경우 특별히 주눅들것도, 특별히 잘난척할것도 없다고 하신 말이다. 좀 유리하다고 나서고 좀 불리하다고 숨으면 언젠가 내가 휘두른 칼에 내가 다치는 거라고. 그렇건 아니건 어떤 범주에서 이 난이를 인정한다 해도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소통의 불안정성이다.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했다면 이 사회에서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퇴폐적이고 예리한 감수성의 천재 피아니스트가 생겼을 리 없고, 누군가 미쳐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왔을 리도 없다. 너무 평범해서 그 평범함이 진저리칠 만큼 싫은 우리는 과연 미치지 않아서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언젠가 그들은 고위 관료가 되고, 경례를 붙이고, 권력을 과시하고, 틀에 박힌 일장 연설을 뿌리다가 유순한 닭대가리가 되어 예전의 적들이 되는 대로 던져주는 부스러기에 감읍하리라. 하지만 잊힌다 해서 과거도 죽음도 묻히는 건 아니다. 시간 안에 시간이 있고 과거는 현재를 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다시 죽을 테고, 저주받은 자들은 다시 저주받을 것이다. 절름발이를 제조하는 체제는 예견된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또 다시 그렇게 작동할 것이다. -니콜라이 그로츠니, <분더킨트>

 

 

분더킨트(Wunderkind)는 '음악, 문학, 예술계의 조숙한 어린 천재나 신동'을 일컫는다. 배경은 1987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2년 전부터 역사가 이뤄지는 날까지, 소피아의 영재음악학교에 다니는 소년 콘스탄틴의 기록이다. 소년의 눈에 비치는 모든 세계-레슨, 연주, 수업의 단상과 친구, 사랑, 선생님에 대한 느낌-는 브람스와 쇼팽과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리스트, 라벨, 슈만,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등 수많은 음악의 불꽃과 절망, 음모의 선율로 형상화된다. 핍박당하는 시대와 체제의 아르페지오. 세속적 속박과 창공의 경계선, 화음과 흐름과 모욕과 경멸의 순간을 허공으로 날려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의 흐느낌은 와인에 취한 자의 눈에 비친 거리의 네온사인처럼 흔들린다.

 

소년은 누릴 수 없는 불행을 타고났다. 이해받을 수 없는 약점. 재능을 갖춘 자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열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를 괴롭힌다. 붉은 저주가 되어 비밀을 속삭이는 음성, 시간 안에 갇혀 시간을 뛰어넘는 자의 슬픔, 생각 없는 시계 같은 연주의 야만성. 예술의 열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음악이란 최면에 걸린, 악령에 사로잡힌 복종과 다름없다. 같은 상황을 남과 다르게 느끼는 것. 천재는ㅡ 땅 밑에 사는 자, 인생 전체에 걸쳐 반쯤 파인 터널을 걸으며 연주하는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현실에 갇혀 신음하고, 영혼과 유령을 연기하는 카니발에 음악이라는 도구를 들고 참여한 사람이며, 삶의 대부분을 몽유병 상태로 보내는 존재들이다. 시대가 버린 도주한 용의자들. 이 소설을 읽은 후 열고 나온 문을 닫아야 했다. 쏟아진 이데올로기, 불가능한 사랑, 교만하고 잔인한 십대의 레퍼토리가 다시 지하 감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을 읽고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갇혀있다는 사실에서 놓여나기 어렵다. 방, 거실, 집, 놀이터, 공원, 하다못해 기차역, 관광객 들끓는 여행지에서조차도. 나는 기꺼이 갇히는 대신 더욱 바짝 더듬이를 세운다. 겨우 주인공과 함께 비슷한 이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울고 웃을 수 있었다. 미쳤다는 걸 인정하는 게 보통 정신으로는 되는 일이 아닐테니, 독서가 가능한 만큼 덜 미쳤다는 뜻도 된다, 안심하자. 뛰어난 문장도 대단한 사건도 없다. 소소한 사연이 있을 뿐인데도 그게 삶의 본질인 만큼 잘도 굴러간다. 우리가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날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기 때문일까. 나라는 존재의 균형점이 타인에게 있다는 역설이 조금은 슬프게 들린다.

 

 

 

 

 

어둠침침한 침실에서 보면 그녀의 집은 황량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대륙처럼 보였고, 그 광활한 대지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가족들은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어떠한 환상도 없었다. 예전에 자신이 세운 계획들은ㅡ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지만ㅡ시간이 지나 빛이 바랬고,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세운 것이라서 모든 사건을 다 통제하려는 과도한 낙천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그녀는 육감의 덩굴손을 집 안 곳곳에 뻗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미래에까지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또한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남에 대한 친절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법이었다. -이언 매큐언, <속죄> (p.107)

 

호손의 <주홍글씨>, 매즈 미켈슨의 영화 [더 헌트]가 다루는 지점은 같다. 합리의 무모한 도전이 어떻게 불합리가 되는가, 그러니까 마녀사냥 당한 헤스터와 루카스가 어떻게 이 상황을 버텨나가는가 혹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대우 받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속죄>는 <주홍글씨>와 [더 헌트]에 해당하는, 사건발생 후 마녀사냥의 행보와 로비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다. 다만 로비가 군인이 되어 전쟁의 시기를 견디는 순간만으로 로비가 견디는 죗값의 상황이 압축되어 펼쳐질 뿐. <속죄>에 한 챕터를 더 쓸 수 있다면 그건 <주홍글씨>나 [더 헌트]가 될 것이다.  

 

 

 

 

원제는 구판 <연민>이 아니라 신판 <초조한 마음>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츠바이크는 같은 내용이라도 여느 작가들에 비해 굉장히 집요하게 쓴다. 순간을 포착하는 묘사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감정몰입도가 점점 높아진다. 단편도 그런데 심지어 장편에 대해 덧붙여 뭣하겠나 싶으면서도, 이 가능한 상황의 불가능한 묘사, 꼼꼼한 심리전, 예민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연민'이 이토록 양가적인 감정이란 데 어김없이 동의하면서도 어느 경우 소모일 수도 있지만 또 어느 경우 최소한의 호의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연민이 아무리 부조리하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인 한, 좋은 사람이고 싶은 한,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격상 한 작가를 연달아 전작할 가능성은 지금까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어떤 독서 스타일이나 습관은 각기 다른 분야의 책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거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위대한 해리 홀레 반장만 기억한다면 이 작가를 잊을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다. 놓칠 때가 많았던 추리 시리즈물 중 그나마 첫 스타트를 첫 (번역)작품으로 시작한 드문 작품인데, 겨우 두 권째. 앞으로도 나는 기존에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가 한 권 한 권 구간으로 전환될 때마다 읽기로 한다. 이왕 늦은 거 책값이라도 굳게. 얼마 차이도 안 난다는 게 함정, 이러다 도서정가제 실시되면 그건 그것대로 또 낭패. <스노우맨>이 시릴 정도로 차갑고 순백의 눈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면 <레오파드> 역시 흰 이미지가 월등하지만 콩고 때문인지 상상 돋는 살인무기 때문인지 붉고 단단한 강렬함이 먼저 느껴진다. 더 생생하고 더 정교하고 더 가차없는 스토리. 더 말하기에 이미 늦기도 했고, 더 써봤자 앞으로 읽을 분에게 방해라면 몰라도 도움이 될 리 없다.

 

 

 

파리누쉬 사니이는 1949년 이란에서 태어나 심리학자, 사회학자, 연구자로 정부 각 부처에서 고위직 간부와 고문으로 다년간 경력을 쌓아온 다소 지긋한 나이의 작가다. <나의 몫>을 읽는 일은 말하면 입만 아픈 아랍(이란)의 진부한 현실을 꼼꼼하게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아프간의 실상을 다뤘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다르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건도 더 알아야 할 사건도 없는 현실을 굳이 두꺼운 책과 힘겨루기하듯 읽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나 오빠에게 돌아가는 대가를 위해 제 입이나 덜어줄 양으로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 한다. 강간과 다름없이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나이 차 큰 남편 수발과 함께 평생 부엌데기로 사는 삶이 나의 몫이 아님을 아랍의 여자들이라 하여 몰랐을 리 없다.

 

여주인공은 가족 몰래 연애를 하지만 오빠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 남자가 도망가고 힘든 시간을 겪는다. 다행히 잘못된 전통과 관습을 전복시키려는 소수의 반집단(혁명집단) 소속의 남자와 결혼하면서 불행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관습적 결혼과 핍박의 삶으로부터는 구해졌다. 하지만 남편은 가정보다는 바깥 일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아내에게 원하는 공부를 하게 하고 혁명을 돕게 하지만 가정을 안정감 있게 꾸리지 못한다. 남자가 잡혀가고 홀로 가사와 육아, 생계를 책임지는 마수메에게 더이상의 공부는 무의미하다. 전통과 관습이 고수되는 테헤란에서 여자에게 교육이란 그야말로 삶을 방해하는 사치다. 남편을 잃어도 자식은 커간다. 이 고단한 시간, 지난한 고통의 보상은 아들이 보내는 감사인사다. 서글프고 막막하다. 아직도 이런 사회가 지구상에는 대단히 많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삶이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나, 만약 그 반대라면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은 철로를 걷기 위해 사는 것처럼 지루할 것이다. 영혼을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어떨지, 나는 모른다.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문학을 아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살다가 약속도 인사도 없이 한 사람이 먼저 떠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믿을 만한 조력자이자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한 사람들. 어쩌면 다른 사람에 비해 나눌 수 있는 기쁨을 하나 더 가졌기에 잃었을 때 내 팔다리가 두 배로 잘려나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 '팻에게 바친다'는 줄리언 반스의 헌사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랑고백으로 들릴 즈음, 오랜 시간 침묵을 거듭하다 비로소 입을 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삶의 일부였음을 조심스럽게 선언하는 목소리.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보내기까지 여전히 함께였으므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개 옳다.

 

 

 

 

 

<저지대>를 읽으며 별로 재밌지도 않은 <나의 몫>이 떠오른 이유가 아마도 '혁명'이라는 화두 때문일 것이다.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상황은 별다를 것 없는, 어쩌면 단지 '현재'나 '행복' 혹은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지금 힘든 상황에 대한 '회피'에 치중했을 평범한 선택이 삶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이유. 참으면 현상유지가 가능하지만 삶이 고통스럽고 대항하면 무언가에 나를 바칠 것처럼 살아야 하면서 미래를 가늠할 수가 없어지는 것. 혁명. 하지만 이 얘기는 혁명이 주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모든 키를 수바시와 우다얀의 한가운데 있던 가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 떠밀렸다기보다는 셋은 혁명이든 책임이든 배반이든 어떤 식으로든 선택이란 걸 했기 때문에. 행복과 사랑의 순간이 무척 짧고 고달팠던 기억과 그 기억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던 한 여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그렇다면 유독 정해진 운명에 매몰당한 사람은 벨라가 아니었을까. 출생에 얽힌 비밀, 엄마를 향한 원망과 그리움. 그러나 벨라 역시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꾸리게 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전적으로 '선택'의 범주로 엮인다. 처음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에 휘말릴 때는 차라리 가만히 있어야 그 소용돌이가 날 그저 스쳐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웠기에 선택을 하면 할수록 더 끈적한 갯벌 속으로 자꾸 빠지는 상황을 혼자서는 도저히 그려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아니란 걸 알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을 때 우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세 명의 주인공, 어쩌면 그들의 딸 벨라와 형제의 부모까지도 그들이 한 선택을 후회했으리라 가정해본다. 하나의 삶이란 곧 포기한 다른 삶에의 영원한 갈증이기도 하니까. 결국 가장 불행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일지도.

 

 

 

 

<아름다운 폐허>는 옅고 싱겁다. 아름다우면서 폐허같은 느낌을 형상화했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제일 외로워졌고, 그 외로움은 정말 폐허같았으니까. 영화로 치면 압도하는 장면이 없다고 해도 좋다.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아쉽다는 기분이 절로 들 때 그건 어느 정도 필요했던 것이다. 서정적인 표지그림과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 포르토 베르고냐'라는 배경에 끌렸다. 만약 50년이라는 시간 사이로 흐르는 강과 베르고냐에서 할리우드까지의 거리를 짐작했다면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 외딴 섬마을(한적)과 할리우드(복잡)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감명깊은 스토리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놓칠 수는 없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아무도 모르게 훔쳐 수첩 귀퉁이에 적어두고 싶은 문장이 제법 있다. 잊힌 시간과 그리움에 관한 절절한 관조.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감수성은 역시 멀찍이 떨어져 낯설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난 시간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다.

 

 

 

 

어쩌면 고통이란 밤이 새벽빛에 서서히 물드는 것처럼 그렇게 차례를 지켜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숙명이 아닐까. 꼭 만나기로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고, 내가 만든 아이의 평화로움은 순식간이며, 악순환의 고리, 카르마, 불투명한 미래, 오랜 습관, 불행의 꿈나무 같은 사람들. 이 전쟁같은 삶은 실은 아주 극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문학적으로 특별하다는 느낌도 없다. 그런데 간절하다. 뭔가에 쿡쿡 찔리듯 아프다. 현란하고 기교있게 씌어진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흔들리는 정직한 비극. 삶은 계속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 아우성이고, 그걸 지켜내려는 노력은 전쟁과 같다. 아이는 부모의 땀이고 눈물이고 비밀이다. 더 완벽하고 대단하고 멀쩡해야만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둠과 어둠이 만나면 더 짙은 어둠이 된다는 공식은 끝내 믿지 않으련다. 그럴 수가 없다. 여행은 절망이었다. 수많은 위기의 확률을 마지못해 이겨낸 절.망.

 

 

 

 

 

산도르 마라이는 분명 세 명의 주인공 시점에서 각자의 입장을 써내려가기로 철저하게 구상한 후 쓰기에 돌입했을 것이다. 일롱카의 입장에서 일단 쓰자, 다음은 페터의 입장에서 써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유디트의 입장에서도 쓰자, 하고 썼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서늘하고 개인적인 독백을 내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뭘 하는지 몰랐다. 총알처럼 달렸던 상권이 끝나고 하권을 시작하며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기 시작했으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좋았다, 고 쓰기에 민망한 책이 될 것 같다. 좋았지만 좋지 않다? 이상하다. 평소대로라면 일롱카의 마음을 읽었으니 페터도 궁금해야 정상 아닌가. 페터를 읽어야 유디트의 마음을 읽을 차례가 오는데, 요즘은 읽던 책을 미뤄두는 경우 없이 대체로 끝나면 다른 책을 시작해왔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미뤄두었다. 이 질식할 듯한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갈 힘이 지금은 부족하다. 

 

 

 

 

동물이라면 또 모르지만 식물에는 통 감정이입이 안 된다. 장미 꽃다발은 집구석에서 몇 년을 갔고 핑크색 국화 다발은 거기서 벌레가 기어나올 때까지 몰랐다. 꽃은 예쁘지만 세심하지 못한 나는 문학 속 꽃들을 일일이 확장시킬 능력이 거의 없다. 한 권의 문학 속에 활짝 핀 꽃들에 동그라미 치며 읽으면 대략 몇 송이의 꽃을 만나게 될까. 저자가 고른 서른 세 편의 문학에서 찾아낸 알록달록한 꽃들을 담은 책이다. 김유정부터 박경리, 박완서, 김훈, 이승우, 신경숙, 정이현까지 골고루 담겼다. 읽고 또 읽어도 꽃이 등장하는 문장은 늘 낯설다. 훌쩍 들판에 나갔다가 한켠에 곱게 핀 야생화 이름을 내가 알아채는 날까지 꽃을 알아가도록 노력해야지. 희고 노랗고 빨갛고 보랗다. 사진이 알록달록 참 예쁘다. 마음이 다 참해진다. 늦기 전에 곱디 고운 꽃을 꺾어 책갈피로 만들어봐야지. 적어도 오늘만은 꽃 생각으로 내 안이 환해진 느낌이다.

 

 

 

 

 

중국에서 인육 식용이나 사체강간은 그리 충격적 소재가 아니다. 내가 읽어온 몇 안 되는 중국문학은 죄다 처음에는 포기하고 싶다가 끝에 가서 전율을 느끼고, 비로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거나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같은 대륙의 다른 책을 집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독서는 망각과 기억이 점강과 점증을 반복하는 증상을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어느 작가의 작품이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좋을 때 비로소 긴 시간에 걸쳐 전작을 읽으려 결심한다. 비교적 최근에는 모옌과 옌롄커, 앨리스 먼로가 그랬다. 딱 두 권씩 읽어봤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는 같은 기간 비교해 모옌이 앨리스 먼로보다 두 배 가까이 덜 팔렸다는데 중국 역사와 문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이질적인지 말해주는 지표다. 어떤 식으로든 미국보다 중국이 더 멀게 느껴지기는 한다.

 

앨리스 먼로보다 모옌이 월등하게 좋았다. 첫 권 첫 장에서 간파했다. 모옌은 처음부터 매몰차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나는 대개 고통 속에서 질척거리는 삶, 끝까지 가는 삶, 시대적 핍박과 굴종의 삶을 다루는 작품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에 끌린다. 읽은 작품이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삶의 처절함과 무거움, 일상의 소소함 중에 내가 끌리는 쪽은 기질상 전자일 수밖에 없다. 기대를 완전히 넘어서거나 배반당할 때 나는 전율한다. <물처럼 단단하게>가 붉고 뜨거웠다면 <사서>는 질펀하고 차갑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나는 이제 중국문학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굳히게 됐다. 미지의 영역에서 성큼성큼 다가온 중국문학은 아직 정체 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을 뿐더러, 오롯이 제모습을 보여준 것 같지도 않다. 넓고 큰 나라인 만큼 문학의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릴 것 같다. <열세 걸음>의 첫 열 장을 다섯 번쯤 재시도한 경험에 비추면 <사서> 역시 읽기 편한 작품은 아니다. 단번에 손아귀에 잡히지 않더라도 일단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교훈, 그러면 더 큰 감동을 얻으리라는 확신이 이제는 생겼다. 뒤죽박죽, 흐릿흐릿, 읽고나서 더 어려워졌다. 절절하고 웅숭깊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한다 해도 직접 읽는 지식인들의 강제노동수용소 묘사는 더 멀고 더 이 세상 같지가 않다. 심상찮다. 문화대혁명, 대기근의 실정은 잘 모르지만, 처연하고 서늘한 느낌만은 다음 읽을 작품에 되려 압사당할 때까지 지속될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정당하고 너그러운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고 예쁜 애인과 만나고 하는 사이에 틈을 내어, 말하자면 여가가 있을 때 찬사를 드리면 그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무슨 의무를 떠맡긴다면 그건 추억을 요구하는 것일 터인데, 우리의 기억력은 짧거든요. 그러니 친구들 가운데 우리가 사랑하는 건 갓 죽은 사람, 마음 속에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뿐으로 결국 그건 우리들의 감동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들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카뮈, <전락>

 

자유를 구속당하고 시간을 빼앗긴다 해서 추억과 사랑을 멈출 수 없듯 고통과 후회와 감동과 의무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나는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고, 가장 불행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책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건 아마도 내가 모르는 천상의 시간을 흐르게 하고 색다른 세계를 선물받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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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5-3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고 계시는군요.
여전히 많이 읽고 좋은 글 올리시고~^^
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고 가요.^^

아이리시스 2014-05-31 07:24   좋아요 0 | URL
꿈섬님, 잊을 만하면 그래도 한번씩 만나서 정말 반갑고 좋아요.
저는 잘 지냅니다.. 별일 없는 게 너무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요.
자주 보고 싶어요. 글을 핑계로라도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세상에서 제일 즐겁게.

2014-06-01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2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진심 아홉 시 뉴스를 사랑한다. 어쩔 땐 뉴스 보며 욕하는 게 나한테 딱 맞는 스트레스 해소법인가 싶을 정도로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이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은 또렷해졌다. 며칠 전 저녁 뉴스에서 중국이 공개한 일제시대 일본군이 작성한 위안부 공금 구매 기록문서를 보았다. 처음에는 싸울거면 저네끼리 싸우지 왜 우리나라 위안부를 들먹이나 했는데 나중에 난징대학살(1937-1938) 때도 같은 일이 많아서 함께 공개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쨌든 일본의 불리한 역사에 대한 안하무인격 부인은 우리 뿐만 아니라 중국한테도 분통터지는 일이다. 새로이 출간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에는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중국계 미국인인 이민 2세 아이리스 장은 직접 겪진 않았지만 민족의 상흔으로 남은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조부로부터 전해 듣고 왜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끈질긴 자료 조사 끝에 이 책을 펴냈다. 그녀는 당시 일본군이 벌인 난징대학살을 히틀러, 무솔리니, 크메르 루주(폴 포트)의 그것보다 훨씬 더 흉악하고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건이라고 한다.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하지만 그 성공은 내내 그녀를 위협과 협박 속에서 살게 한다. 마침내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자살한 채로 발견될 때까지. 진실을 알리는 대가치고는 너무 무섭고 소름 끼친다. 진실은 그런 거다. 그래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세상 어디에도 쉽고 편리하게 얻을 수 있는 진실은 없다.

 

 

 

 

 

 

 

 

 

 

 

 

 

 

미국인들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폭격기가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럽인들은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독일 공군 루프트바레와 기갑 사단인 판처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인들은 이보다 좀 더 빠른 1935년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은 군대를 앞세운 일본이 만주 점령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 193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라쇼몽> 같다.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원인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진실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시아 내집단이라 여기면 마지막 두 줄을 역사로 배우겠지만 만약 이 사건 바깥에 존재하는 외집단이라 여길 경우 균형 있는 시각을 위해선 다섯 줄의 역사를 모두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만큼 누군가의 어떤 입장이 되어보기가 어렵단 뜻이다. 역사에 A라는 사건이 존재한다 치면, B는 A를, C는 A,B를, D는 A,B,C를, E는 A,B,C,D를... 이렇게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은 정보의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배우고 선택한다. 이건 비극일까 희극일까, 아니면 그저 다행일까. 우린 점점 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알아야 할까. 우리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시간을 되돌리고픈 이 순간도 언젠가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한순간 한순간이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덧없는지.

 

 

 

아이리스 장의 이 저서는 2005년 옌거링의 <진링의 13소녀>로 이어진다. 진링은 난징의 옛지명이다. 장예모 감독은 이 판권을 사들여 동명의 영화를 만든다.

 

 

 

 

더 알아야 할 것은 난징대학살 혹은 식민지였던 한국에 저지른 일본인 혹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세세한 진실이지만 관심만 가지면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들을 쓰느라 백지를 남용하기는 싫어졌다.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마치 타국의 동의를 구하듯 오바마 대통령에게 일본군 위안부 만행에 대한 생각을 물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마치 나 쟤한테 맞았으니 더 힘센 네가 쟤한테 한 마디 해줘, 라는 것 같았다. 물론 제법 강경한 의견을 피력한 오바마의 태도가 의외이긴 했지만 그곳이 청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고, 그걸 대서특필하여 오바마 한 마디에 일본이 '쫄았다'는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은 웃긴다. 어쨌거나 우리 일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결하는 게 보기 좋다.

 

 

 

 

 

 

 

<도시와 나>에 실린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는 세비야를 무대로 한다. 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좋아해서 피렌체 두오모를 오르고 헤어진 연인을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미래를 상상하고 부르넬레스키를 좋아하지만, 스페인이 그런 것처럼 가우디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스무살 건축학도였던 단짝친구가 빌려준 책에서 가우디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여행소설 외국편 <도시와 나>를 읽은 게 지난해 연말, [꽃보다 할배]-스페인 편이 세비야로 떠난 걸 방영한 건 올해 3월 말인가 4월 초. 나는 지난 연말에도 모르고 있던 콜럼버스의 삶과 세비야에 눈길이 멈췄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세비야 대성당의 보물이라는 '콜럼버스의 묘'와 후원자와 반대자, 응원과 무관심,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영광과 몰락이 가져다준 거대한 역사. 그걸 떠받친 여행의 힘이 조금 경이롭게 느껴진다.

 

여행의 부수단어가 설렘이라고만 생각했다. 갑자기 시작될 수도 있고, 큰맘 먹고 오랜만에 찾아가는 길도 있고, 누군가의 부고를 받고 떠나는 사연도 있다는 걸 잊지만 않으면 여행은 대체로 들뜬 상태에서 시작되고 또 끝난다. 그곳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버리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두 소설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해당 도시만의 매력을 듬뿍 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일탈과 방랑은 적어도 누군가를 위로한다. 아닌 줄 알면서도 여전히 이곳만 아니면 행복하리란 생각에 잠못 이루는 날이 있고, 떠나고 싶어 안달하는 날이 있으면 머물 곳이 있어 다행이다 싶은 날도 있다. 하물며 떠난다는 계획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날이 있다. 여행이 주는 확신은 떠났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돌아와 만나게 되는 내가 이전의 나와는 절대적으로 다르리란 확신. 그게 전부다.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도 읽는 사람이 얼만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배경지식과 가치관이 달라지면 몰입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멜로와 스릴러의 궁합이 절묘하지만 역시 서스펜스가 고도에 다다를 때 이 소설은 가장 빛난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솔직담백하게 써내려간다는 느낌을 주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순간 장악력, 드라마같은 장르적 스토리, 스토리텔러가 되어 정주행하는 작가의 용기와 고집이 보인다. 영국 아마존에서 개인출판으로 성공한 좋은 예. 신인작가에게 기존작가와 겨룰 수 있는 게이트웨이가 넓어졌단 건 기득권이 줄고 기회가 공평해졌다는 점에서 올바른 일인데, 전자책 루트가 종이책 시장을 위협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한편 아찔하고 공허해진다. 세상에 진정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긴 한 걸까. 어느 한 구석 숨쉴 공간 없는 촘촘한 구성을 보면서 케이트와 잭, 폴의 행보가 계속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잘 짜인 구성과 플롯만으로도 충분히 자리를 지킬 만하다. 바이러스, 재난, 모성, 집착, 광기, 첫사랑, 기억과 같은 장르문학 특유의 소재를 잘 버무린다. 중반을 훌쩍 넘어설 때까지도 계속 누굴 믿고 누굴 의심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내달린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데도 팔다리가 뻐근하고 어깨가 뭉친다.

 

 

 

<파계재판>이 놀라운 건 첫장 빼고는 모조리 재판으로만 진행하는 특이한 구성 때문이지 사건의 어마어마한 창작력이나 짜릿한 반전의 쾌감 때문은 아니다. 처음에 일본 고전소설 <파계>를 선뜻 떠올리지 못한 건 그 파계가 그 파계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읽고나니 <파계>를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단숨에 <파계>를 연달아 읽었다. 우리도 조선시대 백정(소나 개, 돼지 따위를 잡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붉은 점을 찍거나 도한屠漢이라는 호칭을 써넣어 차별한 기억이 있고, <파계>에 의하면 일본도 메이지 유신으로 이미 신분제를 철폐했음에도 불구, 여전히 부락민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차별과 편견이 있었다. <파계재판>은 이 상처가 한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주는 문학적 상상의 끝에 서있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 이성을 잃게 되는지, 편견이 만연한 사회가 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죄인으로 몰아가는지, 경계를 넘어서려는 노력과 금기를 깨트리려는 노력은 때때로 얼마나 부질없는지. 이 재판은 한 남자의 절절함을 끝까지 믿었던 위대한 변호사의 승리이자, 실체는 없어도 언제나 응원 받는 진실의 승리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아끼고 좋아한다. 인류가 그런 것처럼 천 년의 시간 동안 인간 곁에 머무른 물고기 대구의 일대기를 다양한 시각과 각도에서 서술하는데, 그 대부분의 역사가 미국, 유럽 등 서구에 머물러 있어 괴리감이 느껴지긴 한다. 동생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생선 한 가지만 쓰라는 시험 답안지에 '고기'라고 쓴 적이 있고, 내 기억은 갈치와 고등어를 필두로 가자미, 오징어 외에는 거의 모든 생선을 분간하지 못한다. 물고기는 생선이고, 생선은 먹는 것. 가끔 찌개도 회도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 이해 못하는 이 책 속 대구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대구 서식지, 생김새, 탄생비화, 좋아하는 먹이, 온도, 요리법. 자연은 위대하다. 쉽게 많이 얻으려는 탐욕이 대구라는 어종을 지구상에서 없앨 뻔 했다. 남획이 대구를 멸종시킬 수도 있었다. 대구는 이러한 비극과 불운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긴긴 세월, 인간의 어획력은 물론 무역의 판도와 역사를 바꾸거나 새로 쓴 위대한 물고기다. 

 

 

 

 

있어서는 안되는 장면을 버리고 없어서는 안되는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스케치부터 세심한 손질까지 구석구석 손보다가 비로소 색을 입히고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다시 읽을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전율한 장면이 실제로도 가능할 거라고, 배 안의 아무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또 믿으려 했다. 두꺼운 레깅스 위에 야상점퍼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몸이 덜덜 떨려왔다. 세숫물은 차갑고 눈물은 뜨겁고 외침은 공허하고 기다림은 미온하다. 벌써 지치면 안된다. 아직 덜 슬퍼했다. 언젠가부터 머릿속을 맴도는 '빅토리아 메러디스호'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의로 떠났지만 타의로 돌아오지 못한 모르는 얼굴들을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문학의 기적을 현실의 이기주의가 덮어버릴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데려갈 높고 푸른 사다리 하나쯤 있으리라 믿고 싶었던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지상같지 않은 지상에 머물러 있다.  

 

 

 

하늘의 기를 받아 현실에서 말하는 자들. 소리꾼과 무인은 아주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소리'꾼', 무'인'이라 발음할 때의 야무진 입모양과 피를 토해야만 살 수 있는 고독의 내음까지도. 불꽃같은 삶이 예상되었다. 시대가 고요해도 내면이 들끓으면 지옥과 다름 없는데 이 잔혹한 시대를 맨정신으로 건너는 이들의 삶이 다 그렇지 않던가. 한밤의 갈대숲에서 다리를 벌려 거친 사내의 숨소리를 받아들인 여인은 그날 밤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수수께끼 같은 밤 버려진 여자에게로 흘러든 달의 정령으로 잉태된 아들은 어느새 매일 아침 어린 아내가 바치는 신선한 소의 피를 받아마실 정도로 쇠한 사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읽을 때 알아야 할 것은 쇠한 사내인가, 쇠한 사내를 만든 지독한 세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한구석도 보드라운 구석이 없는 세상의 단단함에 다칠 걸 알면서도 줄곧 들이박는 심정으로 걸어가는 자들인가. 이 소설은 국창 임방울(1904-1961)의 일대기를 그린다. 이 연약한 사랑의 기억을 무르익은 소리로 다시 만난다. 

 

 

 

"약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사막 가장자리, 바스토(미국 캘리포니아 중남부의 도시 이름)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로 시작하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는 감히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말하고 싶다. 그 순간 나를 견디게 했었다고. 겁이 많으면서도 환각과 일탈의 순간을 동경했다. 국세청에는 체납자들을 독촉하는 업무를 맡는 직원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지만 남에게 소리 지르는 걸로 스트레스 푸는 사람에게는 딱 맞는 보직이다. 우리는 아무도 누구를 재단할 수 없다. 나는 가장 힘들 때 정작 제일 무겁게 입을 다무는 사람이지만, 남의 불안을 잘 다독이는 편이고, 사항이 중대할수록 오히려 더 대담해진다. 낙관적인 천성과 예민한 본성이 서로를 완벽히 통제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포트노이의 불평이 짜증난다는 리뷰를 많이 보았다. 미국은 여전히 술과 약, 섹스에 탐닉한다. 환상과 비행으로 불안을 표출하는 소년과 닮은 주인공들이 미국 소설에는 많이 나온다. 조니 뎁과 베니치오 델 토로의 연기 궁합에 전율하던 시절, 정신착란이 최고도에 달한 상태에서 라스베가스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했던 철없던 욕망이 기억난다.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지혜(남상미)와 현우(이상우)는 휴가차 제주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 때문에 인연을 맺는데, 그 책은 지난해 한참 드라마 마케팅을 하던 그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에 타자마자 책을 껴안고 잠든 지혜는 제주에 떨어질 때까지 현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잠들었을 때 떨어진 책을 줍다 우연히 페이지 가득한 지혜의 메모를 읽으며 키득거리던 현우가 지혜를 알 뿐이다. 건축가였던 현우는 라디오 메인작가 지혜가 쓴 감성 충만한 메모에 반했고, 지혜가 제주에서 또 책을 흘리는데 그걸 현우가 주우면서 여행길 하루를 함께 하게 되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역사가 이루어진다. 둘 다 즉흥적인 기분파가 전혀 아니었다는 점에서 사랑의 끌림은 역시, 이상하다.

 

 

이중섭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이 그때 내게 더 끌렸기 때문에 그 책 대신 이 책을 선택했는데 구성이 특이하다. 여느 일대기처럼 시간순 서술이 아니고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일본 유학시절의 어려움과 고독,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킨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화가의 남은 가족들이 화가의 기념관 행사에 초대되고 참석한 장면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가장 암울하고 불안했던 시대로 돌아간다. 불우한 천재화가 이중섭과 그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의 아름답고도 처연한 일상과 사랑을 극화시킨다. 가난과 우울로 가득찬 화가의 길은 전시라는 시대상과 맞물려 피난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 일본, 부산, 제주를 오가며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그리움에 떨었던 한 화가의 삶은 고스란히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봄이 더이상 봄같지 않게 지나가고, 예전처럼 간절하지 않아도 5월이 온다. 오래 글이 없어 서운했고, 겨우 이만큼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페이퍼 제목은 권정일의 시, '마녀의 도서관'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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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04-3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에는 뉴스를 못 보겠더라구요. 가슴이 아파서.
한마디 더 듣고나면 팔을 못 들어올릴 거 같아서요.

...지금 한지 인강 듣고 있는데 한지 너무 어려워요 ㅠㅠ
수능치는 사람들이 한지를 제일 많이 선택한다는데 나는 당최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 이게 뭐야 진짜!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

아이리시스 2014-04-30 23:47   좋아요 0 | URL
귀염이 소이진님 잘 지내고 있죠? 아프지 말고. 어제는 비오고 오늘은 추워요. 반팔 입었다가 다시 긴팔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는중인데.. 다시 조금씩 힘내고 책 한 권씩 읽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거의 최근에 읽은 책이 아니라서 아직도 책이 재미있을 정도로 눈에 안 들어와요.

한지=한국지리 맞죠? 뭔가 모르게 엄청 어려운 과목이었어요. 심지어 그런 과목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그게 제일 공부하기 쉬우니까 그런 거겠죠? 근데 이게 사회탐구 선택과목이에요? 우리때는 사회문화를 제일 많이 했었는데 나는 문과가 아니었으니까...................( '')

방금 검색 한번 해봤는데(나는 쓸데없이 이런거 잘해....) 이거 해요, 동아시아사.대박.

소리 질러요. 내가 들을 수 있어요. 소이진님 화이팅!!

2014-05-02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2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5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6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