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비에트, 볼셰비키-멘셰비키는 물론 러시아혁명사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 아예 없기 때문에 러시아 작품은 늘 멀리했다. 학교 때 착실하게 다른 과 문학수업을 듣지도 못한 결과이다. 내가 애살이 있었다면 철학과 문학수업들을 욕심내거나 그때 이미 웬만한 인문학 고전에 도달해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남달리 게으르고 미친 것마냥 신경이 딴 데로 가 있어서 그러지 못한 게 후회로 남는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 한 권에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다. 푸슈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체호프,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 이후의 계보에나 낄 울리츠카야는 <소네치카>(1992)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세 편의 장편 중 2001년 러시아 부커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24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1990년 고르바초프의 냉전종식 정책으로 1991년 소련 해체. 1943년 태생인 그녀는 2차대전의 진행 중에 유년기를 보내면서 소비에트 체제하를 살았다.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의 고통이나 억압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강도높게 풍자되기도 하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소련 수용소 안 강제노동의 가혹함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시대상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작가 울리츠카야의 작품에서 소비에트 체제 하의 가족이 살아가는 법이 등장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정의 일상이나 행복 보다는 국가의 이념에 충성해야 하는 소비에트 시대에 자유와 도덕 불감증에 시달리며 자기들만의 이성적 논리와 감성적 도덕으로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이들의 눈물겹고 따뜻한 이야기이다.

 

반소비에트적 성향을 가진 아버지 파벨을 중심으로 아내 엘레나와 그녀의 어머니뻘 바실리사, 딸 타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표격인 청소부의 딸이자 타냐의 친구인 토마가 한집에 산다. 파벨과 엘레나의 만남, 파벨의 이념 혹은 신념, 톨스토이주의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에 대한 엘레나의 회상, 바실리사의 이야기나 토마의 사연 등 한 지붕 아래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각자의 시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훑는다. 멀티카메라기법의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인물을 고찰하는 생생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국가의 낙태금지법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 파벨인데, 자칫 생명경시로 이어질 법한 일인데도 불구, 파벨의 주장을 경청한다면 이내 생각이 바뀌다가 곧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노동자로 남편 없이 아이 셋을 키우다가 바로 그 임신 때문에 피흘리며 죽어간 토마의 엄마는, 국가의 부주의와 무책임을 대변하는 훌륭한 예다. 최소한의 비용과 책임으로 최대한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엄마를 잃음으로서 남은 아이 셋은 오갈곳 없는 고아신세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낙태금지법은 계급이 낮은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며 법을 고치기 위해 애쓴 파벨의 행동이 차츰 이해가 되었다. 엘레나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결코 찬반론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낙태금지법에 인생이 저당잡히는 여자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윤리적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태를 권하거나 도우면 끌려가 고문 당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는 언제나 여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소설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윤리적 문제 중 다른 하나가 바로 자신의 딸이 아닌 타냐를 누구보다 예뻐하는 파벨의 부성이다. 타냐는 두 살 때 만난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안다. 친구 토마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한 것도 이런 아버지의 풍부한 사랑 덕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 악착같이 타냐의 가정에 순응하려는 토마를 보면 안쓰럽다. 어린시절의 가난했던 기억과 임신 중 죽은 엄마로 때문에 사랑과 출산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식물에만 애정과 관심을 쏟는 토마는 꿈보다는 현실안주형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해야만 하는 힘없는 계급의 표본이다. 의식주를 획득하는 일은 타냐의 집에 머물러야만 해결할 수 있는 그녀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을 테니까. 수용과 잔류를 향한 악착같은 발버둥은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연구실에 들어오는 조교나 조수를 대상으로 반복되어 오던 간소프스키의 만행은 이 사회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심지어 타냐의 처녀성마저 위협하는 걸로 끝장판에 도달한다. 이후부터는 파벨과 엘레나, 타냐와 골드베르그 형제, 바실리사, 토마, 연주자 세르게이의 삶을 향해 질주하는 독서가 시작된다. 죽지 않으면 살아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까지. 가족의 진혼곡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자의 흔적과 산 자의 추억으로 가족의 연대는 계속된다.

 

억압과 불통으로 시대를 이어가던 소비에트 체제의 한 가족을 통해 울라츠카야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새로 정립시키려 한다. 핏줄로 얽히지 않아도, 아픈 가족을 돌보면서도 끝내 지키려 했던 가치.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애. 사랑과 보호를 통해 세상 어디보다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 잃지 말아야 할, 잊혀지지 않아야 할 가치를 굳건하게 품을 수 있도록 돕는 곳. 생명윤리와 낙태찬반론, 유전학에 대한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묘사는 놀랄 만큼 정연하다. 실험동물들을 죄책감 없이 죽이며 거기서 원하는 것을 얻는 연구과정에서 충격받은 타냐가 학위와 연구 활동을 그만두고 방황하는 장면에는 공감한다. 우성유전과 열성유전에 관한 이론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면역이 약해진 타나가 임신 중 감염으로 목숨을 잃은 후 파벨은 타냐의 딸 줴냐를 키운다. 파벨이 죽자 엘레나만 남는다. 줴냐가 아이를 낳는다. 세상은 묻지마 범죄가 성행하는 흉악한 도시가 된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다. 모든 것이 운에 달린 사회는 불안하다. 자유와 도덕은 모든 시대 모든 세대에 통용되는 가치이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넓고 복잡한 소설이 아니라 좁고 깊은 소설인 듯하다. 가족 개개인의 삶을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그중에는 파벨의 내면투시나 엘레나의 꿈 속 세상 같은 이상적인 세계관도 보인다. 이들은 소비에트 시대를 벗어나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영유하는 자유로운 가족으로 탈바꿈해나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가야 할 가치는 여전히 죽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억압과 불통으로 인해 자유와 도덕이 부재하는 사회에서 가족이 가져야 할 의미에 대해 이토록 열정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 - 가장 오래된 사랑의 기록
오정희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그녀는 평생에 걸쳐 성경읽기와 베껴쓰기를 하기로 했다는데 나는 간혹 그녀의 소설을 필사하려 끙끙대다 말았다. 대학 전까진 펜을 들고 뭘 끄적이는 걸 좋아하는 편에 속했지만 이제 하루하루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메모하기도 벅차다. 나는 별로 꼼꼼하거나 치열한 편도 아니어서 게다가 심한 다혈질이고, 이러니까 성격파탄자 같다.(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지금도 필사를 생각하며 책상 앞으로 불러오는 책은 <무진기행>과 <중국인 거리> 아니면 <유년의 뜰> 같은 작품. 습관이 되어버린 당연함들. 화려한 낮과 외로운 밤이 번갈아 계속되던 날들, 오정희의 <완구점 여인>과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 심장을 훑고 지나던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소설가의 꿈을 되려 앗아가던, 내 안의 찌꺼기 한 톨을 마저 데려가던 어떤 상징들. 그녀들이 나의 뿌리였다. 바로 그때 사주에도 없는 소설가의 꿈을 버렸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오해마시라, 재능없음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혼자 싸우는 치열한 고독의 그림자를 내 인생에서 몰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공동체 작업에 더 매력을 느껴서 한때 PD나 극작가의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창작희곡을 척척 써내고 제 이름으로 연극을 올리는 동기를 간혹 부러워했다. 거기까지였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수사지휘권을 휘두르는 뒷전의 검사보다 일선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찰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어느 고시합격자의 경찰 지원 인터뷰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정적인 것들을 깨부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그늘진 生과 외로운 삶이 더 두렵다. 詩를 읽을 때면 느껴지는 밑바닥을 헤매는 감성과 꼿꼿한 이성이 맞닿는 지점이 아프다. 다행히도 여지껏 소설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순간이 거의 없었다. 남의 좋은 문장을, 소설을, 궁극적으로는 글을 조우할 때마다 불행히도 내 것은 자꾸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글솜씨가 아니라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 필요한 게 소설가라면 예선에서 탈락이었다. 바보들에게 둘러싸여 천재가 되기는 쉽지만, 천재들에게 둘러싸여 바보가 되기는 더 쉽다. 절망의 윗 단계 체념. 어떤 단어를 온갖 자존감으로 배우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 꿈에서도 그런 순간이 다시 올까 두려워 나는 인터넷 서점 한 귀퉁이 프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에 글을 쓰며 자위하는 것일까. 고개만 돌려도 나락으로 떨어질 이유가 충분한 이곳에서. 한 순간도 이곳이 위안이 된 적이 없었음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징글징글하게 의욕적이지 못하다. 글이 생계가 되지 못한 순간, 여기에 자존심을 실을 수는 없다. 남의 책에 대한 글을 하나 더 올릴 때마다 한 계단씩 추락한다. 가끔은 비참했다. 그때마다 읽지 않고 못 배기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글읽기도 중단했다.

 

고민은 없었다. 나는 글로 벌어먹고 살 일이 없을 것이고, 없게 할 것이므로. 쓰러져 잠들 때까지 드라마를 봤다. 쉽게 살고 있었다. 가을은 미드 새 시즌기란 걸 잊은 여름이 있었던가. 의학드라마 앞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플 지경이 되자, 질주가 중단됐고 비로소 정신이 들었고 책을 몇 권 주문했다. 내 손에 도착했을 때, 당장 성경책을 가져와 비슷한 장을 폈다.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읽을 때, 사무엘하 13장을 함께 읽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읽던 책들은 대부분 성경구절을 안고 있었다. 나는 쉽게 사는 법과 어렵게 사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성경책은 미니사이즈였고 속엣 것은 더 작았다. 깨알 같은 글씨 속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라는 구약은 길을 잃을 때마다 샘물 같았다. 거기서 이야기를 퍼올리거나 길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원전(성경도 어차피 누군가의 번역)과 해석서(이 책)를 비교하며 읽는 작업은 시간 뿐 아니라 능력 면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 먼 이야기는 잊었던 시공간에 다시 불을 지핀다. 마침내 2000년도 훨씬 전의 성스럽고 다채로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간다. 살라딘과 십자군의 그 이스라엘은 어찌나 다채롭고 버라이어티한지.

 

1.

하느님의 목소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충성이 대견한 아브라함의 일가만을 도피시킨 후 불태워지는 소돔은 언제봐도 카타르시스. 소돔이 실제로도 가능하다면 좋을 것이다. 잡다한 모든 것을 청소기 돌리듯 쓸어버리고, 구겨진 내장을 탈탈 털어 따사로운 햇볕에 말려 심장 옆으로 재배열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남을 자는 누구일까. 세상이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넌더리가 난다. 나는 본능적으로 진화론자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앞선다면 신을 믿지 말아야 할텐데, 나는 종교는 없지만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칭하기 어려울 만큼 신이 이 세상을 내다보고 있을 거라 믿는 쪽이고, 신이 인간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도 여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세상은 너무나 살아내기가 힘들다. 창세기는 희망이자 구원이요, 탄생이자 소멸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자본주의가 뱉어놓은 모든 허상을 언제든 재반죽시킬 수 있는 발효덩어리 카스테라로 만들어 냉장고에 처박았고, 나는 그곳에 없으려 했다. 똑바로 볼 수도 없었고, 다시는 냉장고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버리는 일, 새로 만드는 일 모두 가진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오만과 태만과 욕심과 불행을 거두기 위해 바벨탑을 저지하거나 노아의 방주를 닫거나 소돔을 몰락시켰다. 본인이 만든 어떤 것도 도자기 장인의 그것마냥 한 치의 어긋남을 보기 싫어하였다. 하지만 아벨을 죽인 카인을 용서하였다. 철저하지만 야박한 분은 아니었다. 형인 척 연기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 중 하나로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된 요셉으로 인해 태평성대를 누린다.

 

야곱과 요셉과 그 형제들 그리고 자손들까지 대대손손 자기네들의 문화를 번성시키며 살던 히브리인들은 400년이 흐르는 동안 대도시로 흩어져 이집트인들과 섞여 동화된다. 히브리인 요셉이 자기네 선조들을 기근에서 구해준 사실을 잊은 이집트인들은 자기네들의 땅과 일자리를 뺏는 히브리인들을 쫓아내기로 결심하고 자유와 독립을 빼앗은 다음 노예로 전락시킨다. 히브리인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다 구해진 한 아이는 힘이 세고 의협심 강한 파라오 딸의 양자가 되어 화려한 왕궁에서 자란다. 그의 이름은 모세. 이후 모세는 하느님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파라오에게 히브리인들에 대한 억압을 풀 것을 명하는 협상을 제안하지만 다섯 번의 재앙이 지나고 나일의 물이 홍해로 변할 때까지 이들의 갈등은 계속된다. 마침내 홍해를 건넌 히브리인들에게 황량한 땅과 굶주림은 오히려 비참하다. 하느님은 다시 먹을 것을 내릴 터이니 그날 먹을 양만 거두어들이라고 명한다. 먹을 것을 얻었으나 광야에서는 다른 유목민족의 침입을 피할 수가 없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된다. 야곱의 형 에사우의 아들인 엘리바즈가 얻은 아말렉의 후손으로 아말렉족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이었다. 비로소 아말렉족을 무찌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날 시나이 광야에 이른 이들은 모세가 나팔로 하느님을 불러낼 때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하느님 나라의 헌법 십계명을 받는다. 이들은 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수송아지로 모세의 형상을 만들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박살내 이스라엘인들에게 마시게 한다. 이제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맹세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어 기다린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대까지 벌한다." (p.219)

 

이후 40년 간 모세가 숨을 놓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주님과 친구처럼 마주 대하여 사귀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

 

2.

마태복음 1장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시작한다. 나열하면 밤샌다. 성경책 펴서 소리내 읽은 적도 있는데 쓸데 없었다. 마지막만 빼놓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14대이다. (p.228)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를 받아들이란 천사의 말씀이 내려와 그렇게 한다. 그때 동방에서 온 세 사람의 박사가 헤로데 왕을 찾아와 그 사실을 알렸더니, 왕이 이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없애라 한다. 요셉은 다시 꿈을 찾아온 주님의 천사의 말대로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한다. 헤로데가 죽은 후 요셉의 가족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자리 잡고 살았다. 현재 중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팔레스티나'는 성서 속 위대한 사건들이 일어난 땅이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로인 탓에 오랜 고난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예수는 기원 전 37년부터 팔레스티나 전체를 통치하던 헤로데 왕의 집권 말년, 아우구스토(카이사르)가 로마의 황제였을 때 탄생했다. 아우구스토가 죽고 아들 티베리오가 즉위한 후 서기 27~28년경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특사가 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부탁하고 그는 그렇게 한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다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며 자기를 따르라 하고,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파'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것은 바위라는 뜻이고, 바위는 그리스어로 '페트로스'이다. 시몬은 그렇게 게파, 페트로스를 거쳐 '베드로'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자기를 따르라 했고, 이 제자들은 훗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살고 전도 활동에 참여하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된다. 예수님의 활약상은 가르침, 선포, 치유였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즉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그대로 갚아주라는 법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대왕이 편찬한 법전의 기본법으로서 '동태복수법' 혹은 '대당명제'라 칭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는 유다교의 율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쟁과 보복이 아닌 용서와 완전한 사랑을 최고의 선으로 두셨다. (p.256)

 

1) 화해하여라.

2) 극기하여라.

3)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4) 정직하여라.

5) 폭력을 포기하여라.

6)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크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은 험하여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생명의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즉 의로움을 이룩하는 것이다.) (p.270)

 

으아, 내가 사랑하는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구절이잖아.

 

마태오복음서의 산상설교는 반석 위에 집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로 끝맺는다. 이어지는 마태복음은 정말로 지루하지만 예수님 나라의 윤리와 생활규범이자 율법이니,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주를 짜내는 기분으로 끝까지 읽는다. 세상에, 진짜 지루하다. 아홉 살, 열다섯 살 이후 교회 가본 적도 없지만 그것조차도 신앙이란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오빠(실제로 목사님 아들이었던 아홉살 때의 옆집오빠는 내 첫사랑이었다) 따라가 재미있게 노는 걸로 알았던 시절의 설교시간에는 이런 얘기들을 들었을 터, 옳은 얘기, 듣기 좋은 얘기도 반복해 들으면 지겹듯이 딱 그런 기분.

 

구약시대부터 단식은 속죄와 회개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마땅치 않게 보았고, 온갖 질병과 고통과 절망에 빠져 모여드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열두 제자를 모아 능력을 주셨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파견하였다.

 

심판자 메시아, 구세주 메시아, 613가지나 되는 유대교의 율법계율에 짓눌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것을 황금률과 사랑의 계명으로 단순화시킴으로서 자신의 짐과 명에는 가볍다고 하였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에게 놀란 제자들이 묻자,

 

"너희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였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뱃속을 거쳐 배설하게끔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고 악하게 만들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p.330)

 

라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스승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행복하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p.336)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 할 것이다'의 상황에 맞닥뜨린 자신의 배반에 베드로는 슬퍼한다. 한갓 죄인으로 묶여 뭇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끌려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은 후회와 비탄과 두려움, 죄책감과 슬픔으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받은 은돈을 성전 안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돈으로 산 옹기장이의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하겔다하마)'이라 불린다. 예수님에게 씌인 죄는 신성모독죄였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한목소리에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예수는 온갖 조롱과 멸시 속에 '유다인들의 왕 예수'라는 죄명이 붙여진 십자가에 못박혔다. 무덤 안의 예수님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일러준다. 사흘 만에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성서를 요약하면 이런 글이 된다. [1]은 구약이고, [2]는 신약이다. 첫부분 외에는 내 말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별로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고, 특히 복음은 정말 종교인 아닌 내게는 쥐약이기도 한데, 착한 사람이 되기는 별로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루살렘. 지금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아볼 생각을 하기에도 지쳐있지만, 어제의 뉴스 속 가자지구는 정말로 단테의 지옥과 다름없었다. 단테를 제대로 읽은 건 아니지만, 우리는 왜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된 집에 살면 안되냐는 여자아이의 말이 가슴에 박혀서일까, 어제 밤새도록 폭격맞고 있는 건물에서 옆 건물로 뛰어다니며 동생 구하겠다고 전전긍긍했더니, 하루가 다 피곤하다. 적어도 한 달, 길면 두 달에 걸친 이야기 성서 읽기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다시 읽으라면 차라리 예루살렘 여행을 가는 편을 택하겠다. 테러와 폭격은 이후에 생각해야겠다.

 

 

 


댓글(25)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11-20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0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0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11-2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정희 작가님께서 평생을 걸쳐 성경읽기와 필사를 하셨군요. 몰랐었는데, 알고나니 오정희 작가님이 더욱 좋아져요. 이 글 정말정말 좋아요. 정말. 지금 영화 보는 중에 잠깐 들른 거라 영화 다 끝나면 더 자세히 읽고 더 자세히 평 남겨야 겠어요. 영화 끝나자마자 북어처럼 퀭하게 침대로 직행할 지는 미지수이지만요. 나는, 드림걸즈 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22 19:34   좋아요 0 | URL
드림걸즈는 명작이죠! 좋아하는 영화예요. 소이진님은 벌써 오정희 작가님도 좋아하고 김영애 배우님도 좋아하고 이런 이런 조숙한 문학소년이 내 곁에 있다니!!!

얼른 와요, 리쓰은~~~~~~~~~~~~~ 아엠얼론애러크롯로드~~~~~~~~~~~~~~~ 불러줘요!!!

2012-11-21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11-2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차리고 읽어보려다가 아무래도 상태가 좋을 때 읽어봐야 할 글인듯 해서 인사만 전하고 가요. 잘 타이밍을 놓쳐서 이러고 있는데, 이제 자기는 해야겠죠?

맥거핀 2012-11-21 15:55   좋아요 0 | URL
정신이 그다지 맑지는 않았지만, 읽었어요. 구약과 신약을 이렇게 간단하게 줄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죠.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뭐 거의 보지 않지만), 어떤 질문들이 떠올라서 읽기가 힘들어요. 읽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게 무슨 의미일까를 되묻고는 하지요. 성경을 죽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보면 여러가지로 대단하다 싶어요(빈정대는 게 아니라).

그래도 글쓰기를 멈추지 마세요.^^

아이리시스 2012-11-22 19:4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은 잘 타이밍을 놓치고 저 시간에 주무심 대체로 몇 시까지 주무십니까?(궁금)

쓴 저보다 남이 쓴 글을, 이렇게 긴 글을 읽는 분이 더 대단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시간도 좀 남고 여유도 좀 있고 저든 책이든 이야기에든 관심이 있어야 읽힐 거라고 생각을 해보니까요.. 구약까지만 쓰고 올리려고 했는데 뒷부분도 써야겠다는 이상한 오기로 썼더니 이렇게 되었고 요즘은 다시 핵심리뷰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게 될까요? 이 글들은 타인보다는 나를 먼저 만족시켜야 하는데 저는 책을 통해(뒤에 숨어) 저를 쓰고 있어서, 제게 무슨 핵심이 있을까 싶어요.

이 글들이 훗날 제 영감의 원천이 되어줄 거예요! (작가로서가 아니라도)

루쉰P 2012-11-2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아이리시스님 제대로 된 성경 읽으시는데요. 후후후 어려워요. 어려워. 저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ㅋㅋ 근데 전 아인슈타인의 말은 참 좋아해요. 신은 믿지 않으나 인간이 모르는 우주의 법칙은 있다.고 물론 여기서 신은 인격신이겠죠. ^^ 저도 신은 믿지 않으나 뭐랄까 우연도 그렇고 뭔가 내가 모르는 법칙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래서 항상 중력을 거스른다는 마음으로 역주행을 노리고 있죠. ㅋㅋ
근데요 아이리시스님 글을 이렇게 잘 쓰시고 하시는데 소설가에 대한 꿈을 멈추셨다는 거, 물론 거기에 본인의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지금처럼 쓰시면서 나아가시면 좋지 않을까요? 본격적으로 쓰겠다고 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 소설인 것 같아요. 힘 내세요. 아이리시스님.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구요!!

아이리시스 2012-11-22 19:50   좋아요 0 | URL
루쉰님 이 글에 오시니까 정말로 교주님 같아요. 그나저나 아인슈타인의 말은 제 맘과 같아요. 저는 신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믿습니다..이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생겨먹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삭막해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정도는 투정하며 살아야겠어요. 중력을 거스른다는 마음이 멋져요. 제가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뭐든 되려고 애써볼게요!!!

2012-11-21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2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정희 작가라는 분을 소이진님 방에서 처음 접했었는데, <중국인 거리> 저도 읽어볼 거에요. 저도 필사할 거에요. (응?) 성서 얘기는 머리 아파서 안 읽었어요. 우리 식구들이 들려주는 얘기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건. --; 아, 1번 시작되기 전의 글은 잘 읽었어요, 아이님.

아이리시스 2012-11-22 20:01   좋아요 0 | URL
1번까지는 최선을 다해 썼고 2번은 이해를 잘 못했어요. 쓰긴 했는데 읽힐 거란 생각도 못했어요. 로마제국으로 다시 되돌아가 독서를 해야겠다 그 정도의 생각만 하고 덮었는데 진짜 두 달이나 읽었네요(씨익). 저는 주위에 독실한 신자분이 없는데 윗집 아주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이세요!! 필사는 원래 문체를 닮고 싶어서 하는 거라 그랬는데요, 저는 문체를 남의 문체로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학교다닐 때 문체를 오롯이 공부하고 싶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쓰라고 배웠는데요. 일단은 오정희 작가님이 단편치고는 현대적인 문체에다 이상가는 여류작가가 드물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누가 추천해줬어요.

댈러웨이님은 몇 시에 주무세요? (시차를 깨닫고나서 생긴 궁금증;;)

댈러웨이 2012-11-23 10:36   좋아요 0 | URL
열두 시, 한 시, 두 시, 세 시. 대중 없어요. 컨디션이나 다음 날 상황에 따라. 성향은 새벽형을 지향하는 야행성. ^^

아이리시스 2012-11-23 19:5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구나. 그러면 얼른 와요!! 와요!!

Shining 2012-11-2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제가 매번 놀랍다고만 하고 좋다고는 안 했죠, 아이님(그렇다고 여지껏 다른 글이 좋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아이님의 글은 대단하군_-b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는 말입니다!). 이 글 정말 좋네요.

사실 댈러웨이님과 비슷합니다만ㅎㅎ 성서 얘기는 속독한 편이고 1번,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 글이 참 좋아요. 적확하면서도 영민한 느낌. 좋습니다그려d-_-b (원숭이 아니고! 투 썸즈 업, 입니다ㅋ)

2012-11-2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22 20:09   좋아요 0 | URL
저는 계속 좋다고 말한 게 진짜 좋아서 한 건데 듣는 샤이닝님이 이런 기분인지 몰랐어요(으쓱). 요즘은 정말 좋은 글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리뷰로서, 문학으로서, 인문서로서, 칼럼으로서. 한동안 숲을 보는 리뷰를 쓰고 싶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까 '나 이거 다 안다' 느낌이라서 재수없어요(응?). 모든 것을 시도해보다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한 번 보고 싶은데 그걸 다 참아주려면 이웃분들이 고생스럽겠다..그런 생각을 했어요(요즘 심심해서;;).

Have a good time!!!

댈러웨이 2012-11-23 10:33   좋아요 0 | URL
쫌 고생스럽긴 해요. --; 뭐 그치만 예쁘게 봐주고 있는 거에요. =333==3333333333

아이리시스 2012-11-23 19:59   좋아요 0 | URL
원래 한 번씩 자발적 주관평가를 해줘야 하거든요. 지금은 평가중-_-;
예쁘게 봐주세요(꾸벅).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차백만 옮김 / 미래의창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사실상 반복보다 더한 강요는 없다. 강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단순의견을 반복적으로 피력할 때에도 같은 의견을 가지지 않은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폭력과 억압으로 변한다. 목소리가 크다고, 다수라고, 옳은 건 아니라는 것. 히친스는 '반대파'가 언제나 소수이며, 개인의 올바른 의견이 다수의 그럴 듯한 의견보다 힘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경제, 사회, 종교, 국제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장시키며 온갖 분야의 다른 사고방식을 훑으며 당당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질을 젊음이 가진 하나의 특권으로 인식시키려 한다. 그런 점에서 히친스의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며 때로 폭력적이다. 히친스는 도킨스, 촘스키와 함께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 5위 안에 들면서 그의 급진적 사상 또한 관철시켰다. 철저한 무신론자이며 <자비를 팔다>에서 이 시대의 성녀 테레사 수녀를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한 인격비방이 아닌 사회복지와 종교적 차원에서의 그것이다. 이런 급진성은 더욱 뚜렷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불일치가 불러오는 독창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껄끄럽거나 위험하다.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밍밍하게 묻어가려는, 시대에 편입하지도 시대를 비판하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일침이기도 하다. 열여덟통의 편지는 '다른'입장, '다른'반대, '다른'의견을 통해 이 시대를 말하고 있다. 출간과 번역의 시차가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나는 나가지 않겠소. 당신들에겐 나를 석방할 힘이 없소. 나를 석방해서 당신들이 이득을 볼 권한은 더더구나 없소. 나는 다른 모든 이들이 석방됐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리고 모든 폭압적인 법이 폐지됐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이곳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거요."

 

그 순간, 과연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분명했네. (그리고 그전까지 전 세계 정부들은 이 인종차별주의 정권강탈자들이 노략질한 권력을 유지하고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온갖 터무니없는 외교적 타협안을 제안해왔다네.) (p.151)

 

27년간이나 자신을 가뒀던 권력자들의 방문을 받았을 때 그들로부터 내려온 자유를 거부하며 넬슨 만델라가 한 말이다. 이어지는 권력의 맛. 감시하고 탄압하고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선동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일. 시몬 베유는 정의는 원래 '승자의 진영에서 도망치기 마련'이라고 했고,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다수 좌파, 진보 진영이 언제나 소수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지도 모른다. 마틴 루터 킹 박사는 암살되기 전날 밤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를 떨치기 위해 에로스 즉 성적 본능에 골몰해 꽤 추잡한 혼외정사를 벌였고, 이는 생식기 달린 포유동물은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본능적 행위를 인정하면서 영웅적 인물의 인간화(세속화)를 보여준다.

 

카뮈는 조국 알제리가 부당한 식민체제에 맞서 전쟁을 벌이자 고민에 빠졌지. 즉, 반란군들이 무작위로 폭탄테러를 벌이는 과정에서 식민군 병사들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쉽게 자신의 늙은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야. 결국 카뮈는 만약 자신이 정의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머니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네. (pp.160-161)

 

누구나 빠져들 수 있는 덫, 양날의 검, 개인인가 단체인가 등의 선택권에서 카뮈조차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로 들며 선택과 저항, 반대의 주체성을 스스로 획득하기를 촉구한다. 양심과 도덕기준. 개인과 역사. 흐르고 변하는 일련의 시간들 앞에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히친스는 이렇게 고한다.

 

자네는 과거의 불행하고 불평등하며 비이성적인 상황에 도전했던 이들의 힘겨운 투쟁을 결코 잊어선 안 되네. 나아가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하네. 즉, 무리나 파벌이 제 아무리 뛰어난 사상을 지니고 있더라도 결코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선 안 되네. 자기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걸세. 자신 있게 '우리'를 내세우거나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는 이들을 결코 신뢰해선 안 되네. 만약 이런 목소리가 자네 생각에서도 발견된다면 자네 자신부터 의심하게. 다수로부터 오는 안정감과 소속감이 늘 연대와 동의어는 아닐세. 오히려 그건 합의와 압제, 그리고 동종의식이라고 할 수 있네. '다수'를 언급하거나 '민중'을 칭송할 때도 이런 무리는 결국 개인으로 구성된다는 걸 절대 잊지 말게. (pp.165-166)

 

최근 MBC <아마존의 눈물>의 주인공 야노마미족의 몰살은 브라질에 만연한 불법 금 채굴업자의 만행과 이를 묵인한 브라질 정부의 합동작전으로 행해졌다. 단 세 사람만이 학살이 자행된 시간 사냥을 나갔다 변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종족과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우리가 해줄 말은, 위로는, 더 보여줄 인간으로서의 도덕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에 대해 히친스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물론 원주민 학살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금이나 광산 채굴로 인해 멸종된 종족이 야노마미 원주민 뿐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TV로 만난, 그 정답고 해맑은 이들의 터전이 이제 없다는 사실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가슴 저리게 슬프다.

 

쿤데라의 <농담>에 나오는 주인공은 트로츠키에 관한 농담 한 번 잘못했다가 평생 그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저주에 휩싸인다. 어떤 시대는 어떤 말로도 해명하기 힘든 시간이 존재하는 법이다. 졸라가 타협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할 때, 오스카 와일드는 반대로 했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히친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손을 든다. 사르트르가 반항아는 내심 세상과 체제가 지금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반면, 혁명가는 진정으로 현재 상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길 원한다고 구분짓는다. 또한 촌철살인과 위트는 급진주의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손꼽힌다. 키신저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두고 '이보다 더한 코미디는 없다'며 가수를 그만 둔 톰 레러, 1992년 당시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이 대통령 경선에서 유약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정신지체인 흑인 리키 레이 렉터라는 사형수의 사형을 명한 일, 이 잔혹한 행위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침묵, 장시간의 지루함과 간헐적인 공포로 이루어진 전쟁을 급진주의자의 삶과 동일시한 것, 확신과 경험으로 실제 움직여야만 이뤄낼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미미할 수도 있는 반대파의 삶. 많은 사례들이 함께 한다.

 

시사와 논점이 분야/쟁점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박식함 덕에 250쪽 남짓한 이 책을 보름 가까이 붙잡고 있었다. 그래봐야 밑바닥 뚫린 독서력만 확인한 셈이지만, 시야와 관심사를 더 넓혀야 한다는 것과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라는 자신감 그리고 행동과 실천의 중요성을 촉구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세상과 시사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관심 가지는 정도는 얼만큼인가. 히친스가 기준이라면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신이 정의롭다는 걸 상기할 때마다 내 조국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워서 몸이 떨린다." (p.103)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의 원죄에 대해 한탄한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국제사회 아니 이 사회만 봐도 늘 의문에 의문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던 조지 오웰의 말을 믿기로 했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10-11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1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1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8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9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는 리뷰군요. 별로 즐겁지 않은 것들이지만... <아마존의 눈물> 보지 않았지만,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리시스 2012-10-18 18:30   좋아요 0 | URL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는 책이었거든요, 섬님. 마틴 루터는 좀 놀랐지만 저게 사실인지에 대한 여부와 책임은 그냥 히친스에게 떠넘기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마존의 눈물> 일은 좀 많이 놀랐어요..

ghostsoup 2012-11-0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책의 판권에 이름이 실리진 않았으나, 이 책의 기획자입니다. 낮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책인데,
아이리시스 님의 리뷰를 읽으면 이 책이 좀더 다른 독자들에게 와닿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감동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댓글 남기고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2-11-02 16:27   좋아요 0 | URL
와우, 안녕하세요. 리뷰를 이렇게 부끄럽게 달아놔서 부끄럽습니다.. 다행이에요,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최소한 맘속에서 민망함을 좀 내려놓을 수 있겠어요. 재밌었어요. 많이 압축된 시사의 느낌이 들어서 많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어렵지만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히친스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만들어주세요^-^

2012-11-12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2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은 읽는내내 영혼을 갉아먹히는 듯하다. 검열과 통제의 아픔. 글쓰기 자체의 고통. 지나온 시대의 불운. 우리로선 일제시대에나 겪은, 공공연하게는 눈에 보이지 않게 온 세상을 휘감고 있는 구속, 그러니까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 불온한 자유를 희망하는 일.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 같은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옮겨 가게했던 것일까? 이 문제의 배후에는 무수한 해답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나도 온갖 해답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딱 꼬집어 뭐라고 확실하게 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대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반드시 극단적으로 방종하는 시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네를 타는 것처럼 한쪽 끝이 높이 올라가면 반대쪽 끝도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pp.193-194)

 

자유가 사라진 세상에 빛은 없다. 내가 아는 중국의 1900년대는 대충 키워드 몇 개로 정리된다. 사건 몇 개와 이름 몇 개. 관심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래도 꽤 짚어내면서 오늘날까지 온다. 중국/대만/홍콩 배우들에 빠져 무협영화나 역사드라마를 좋아하던 시절에는 어느 정도 나라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지금은 중국이란 나라, 확 쓸어내서 화성으로 보내버리고 싶다. 중국소설이나 영화는 늘 한정적인 시대와 배경을 다룬다. 어둡고 칙칙하고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란 이미지가 꽉 찬다. 작가들은 더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 삶의 뿌리를 붙들고 일어서려는 서민의 삶을 그린다. 불행한 자가 할 말이 더 많은 법이고, 아마 그런 것들을 두루뭉술하게 그리는 것외에는 허락되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해혁명을 다룬 [1911]이나 난징대학살을 서양인의 눈으로 본 [금릉십삼채] 같은 영화는 최근 것들. 거슬러 올라가면 [마지막 황제]나 [패왕별희], 톈안문사건을 겪은 청춘의 불안을 그린 [여름 궁전] 등이 유명하다.

 

그러고보면 신해혁명과 만주사변,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그리고 문화대혁명, 톈안문사건은 우리의 1960년대 출생의 작가가 5월의 쿠데타나 이어지는 학생운동과 혁명, 후일담 문학을 양성해내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짐작은 고요하고 강한데다 위협적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희미하게 요동치는 어긋난 뿌리와 여전히 해갈되지 않은 동부와 서부의 빈부격차, 심지어 경제적 시차가 10년에 달한다는 코카콜라 얘기나 명절 고향에 가기 위해 열흘의 기차여행을 해야 하는 어이없는 영토크기와 인구수, 동서가 확연히 차이나는 사회인프라 시설, 다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중국정부의 어이없는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티벳을 향한 부조리한 강제점령. 게다가 부유한 국가, 가난한 국민들이란 불우한 슬로건을 가진 나라. 중국에 대한 지식은 하염없이 부정적이다.

 

소설<형제>와 달리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의 출판은 대만에서는 가능했으나 중국에서는 불가능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대립결과가 반대였다면 아마 이 거대한 국가의 사정은 지금과는 판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과 중국,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정 또한 지금과는 달랐겠지. 되풀이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형제>는 가능했고 <사람의 목소리->는 불가능했던 이유, 차이는 내용이 아니라 허구와 비허구의 사이에 있었다. 소설은 되고 산문은 안되는 것, 6월 4일은 차단되고 5월 35일은 허용되는 곳.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중국에 대한 교양지식, 위화가 살아온 땅에 대한 기원이다.

 

사실 삶과 글쓰기는 아주 간단할 때가 있다. 어떤 꿈 하나가 어떤 기억 하나를 되돌리면, 그다음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마는 것이다. (p.157)

 

목차에서 예고하는 열 개의 단어는 불온하다. 루쉰, 혁명, 독서. 특히 책이 없거나 읽을 책을 압수 당하는 사회에 대한 학창시절의 토로가 오늘날 한낱 고리타분함으로 이어지는 책의 이미지를 돌려놓는다. 책을 읽지 않아도 잘 살 수는 있겠지만 책을 읽으면 훨씬 더 풍부한 삶을 즐길 수 있다. 여기 앉아 다른 세상의 사정을 자세하게 아는 것만큼 유익한 일도 없다. 오슬로의 비행기체에 붙은 입센의 초상화로 인해 애증어린 루쉰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는 일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설적 예찬까지 이렇게 슬프면서도 위트있는 책은 오랜만이다. 마오쩌둥에 대해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위화의 입장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가 추억하는 마오쩌둥이 유신정권을 추억하는 이 시대 어른들 절반의 목소리와 닮아있기도 해서다. 그런 현실은 고통과 감동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애증. 있었던 시대임을 인정하지만 되돌아가기는 싫은 시간들. 그는 유년과 청소년기를 관통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아프게 인지하면서도 비참하게 그리지는 않는다. 격변과 혼란, 부조리를 말하지만 미래와의 소통과 화해의 제스처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따스하고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모든 것을 우리 앞으로 불러온다.

 

신해혁명기 작가로 루쉰과 펄 벅이 있다. 펄 벅은 이방인의 눈으로 본 중국을 소설 속에 담아내며, 중국의 현실과 소설의 괴리를 줄이려 애썼다. 중국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한 <대지>로 퓰리처상을, 미국 여성으로선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문학 앞에 루쉰이 놓인다. 하지만 중국이란 나라의 연상에는 쑨원과 서태후, 마오쩌둥과 장제스, 덩샤오핑이 먼저 온다. 자꾸 정치인들이 떠오르는 것 또한 파란만장하고 시끄러운 중국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화는 본인의 이야기와 삶, 생각과 의견을 문학으로 풀어냈지만 그를 읽음으로서 중국작가 모두를 동시에 불러오는 경험을 하게 한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청나라는 1911년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의 성공과 부패할 대로 부패해 무너진 봉건왕조체제, 영국과의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들이닥친 열강의 이권침탈로 1912년에 멸망한 후, 중화민국으로 이름을 바꾼다. 혁명의 선도자 겸 국민당 창시자였던 쑨원의 통일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를 이은 장제스는 계속하여 공산당을 공격한다. 이 상황을 노려 중국을 먹을 심산이었던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공산당과 손잡고 국민당에 대항하고, 장제스는 공산당 공격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국공(국민당과 공산당) 내전으로 치달아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치열한 대립 끝에 장제스가 패하면서 타이완 섬으로 쫓겨간 국민당은 중화민국 즉, 지금의 타이완(대만)이 된다. 장제스로부터 시작된 타이완의 현 총통은 마잉주이다.

 

한편, 승리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지금의 중국)을 선포하며 새로운 국가를 수립한다. 즉, 중화민국(지금의 타이완)의 원년은 1912년, 중화인민공화국(지금의 중국)은 1949년 건국되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장쩌민에 이어 후진타오 국가주석에 의해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사실 굳건한지 어떤지는 잘 모른다. 위화는 중국 내에서 6월 4일 대신 5월 35일으로 그날의 사건을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정치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검열/통제 당한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예전부터 품었던 사소한 의문이 있다. 중국과 대만의 배우와 영화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나는 늘 궁금했었다. 탕웨이, 장쯔이, 판빙빙은 중국배우, 비비안 수, 정원창, 주걸륜은 대만배우, 그렇다면 얘들의 뿌리는 다 같은 거였다. 난 거의 매번 어떻게 구별해야 하나 헷갈리곤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담이 생겨나듯 그렇게 장제스가 나와 그로부터 모든 후손이 태어난 건 아닐테니까.

 

그럼 홍콩은? 기무라 타쿠야가 나오는(물론 양조위와 장쯔이도 나온다) 왕가위 감독의 [2046]에서 찾아보자. 영화가 나왔을 때 제목의 의미를 궁금해하던 이들에게 감독은 2046년이 홍콩반환 50주년 째라고 했었다. 제목과 내용은 영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극장에 앉아 주리를 틀었던 기억이 있다. 홍콩은 1842년 아편전쟁 때 영국에 먹혔다가 1997년 도로 뱉어져 중국 아래 존재하는 특별행정구이다. 여행하기에 되게 쏘쿨하고 멋진 곳이긴 하지만 별로 좋은 역사를 가진 국가가 아닌, 지금도 먹힐까 말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반쪽자리 자립영토로, 중국이 반환 이후 50년간 홍콩의 독립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1국가 2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올림픽은 특수성이 인정되어 승인 받고 중국과 따로 출전하지만 국기는 없고, 상징으로 펄럭이는 건 홍콩특별행정구의 깃발일 뿐이다. 그럼 이제 홍콩배우 찾아봐야 할까? 아니, 그럴 필요 없지. 홍콩은 중국이니까. 홍콩에서 활동하더라도, 그곳 출신이더라도 전부 중국배우로 표기되겠지. 현재 홍콩은 독립적이다.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행정·입법 및 사법권을 향유한다. 하지만 2046년에는 어떨지 알 수 없다. 홍콩은 100년이나 영국 치하에 있다가 이제는 중국의 식민화에 압박당하는 중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가까운 여행지 중 하나에 대한 다양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치과의사와 소설가. 위화는 둘 중 하나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가 일하던 사회에서는 두 직업의 보수와 위상이 다르지 않았고, 부모님이 두 분 다 의사라 전자의 길이 훨씬 쉬웠을 수도 있다. 누군가 부를 가져다 줄 직업 대신 왜 소설가를 선택했냐고 물었다지만 위화의 청년시절엔 의사의 경제력이 소설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지금과 가장 큰 폭으로 달라졌을 놀라운 사실. 하지만 경제력 때문에 직업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부르주아 계급을 타파하려는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둥 아래에서 성장했어도 그는 적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어렵게 글로 세상을 사로잡는 법을 택했고,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한 것 같다. 루쉰도, 펄 벅도, 쑤퉁도 적어도 지금 여기쯤에서 두 작품 씩은 읽어보고 싶다. 위화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9-2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아이님은 역사에도 빠삭하시군요. 요즘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우고 있는데 역사 선생님께서 자가 주도 학습(?)을 주장하시는 터라 머릿속에 잘 들어오질 않아요. 저는 선생님께서 쫘라락 정리해주시면 이해가 잘 되는 스타일이거든요.
요새 너무 게을러요, 저. 책을 좀 읽어야 하는데 책 읽은 지가 언제였더라... 으이구 멍청아! 추석이잖아요. 아, 그런데 영어 숙제가 있구나... 책 읽고 독후감 쓰려고 했는데. 지금도 영어 숙제가 쌓여있어요. 학원이 두 시부터 시작인데 그 때까지 다 해야해요. 히히... 이만 갈게요.
추석 잘 보내셔요. 아이님은 고향 가셔요? 가시든 가시지 않든 편안하고 즐거운 휴일 보내시길! 우리는 다음 주 수요일까지 쉽니다, 무려. ㅋㅋㅋ

아이리시스 2012-09-29 12:31   좋아요 0 | URL
응, 소이진님 완전 안녕. 즐거운 명절 보내고 만나요. 헐; 오늘도 학원에 가요? 으흐흐
나는 오늘 노는데, 할머니댁 그러니까 큰집 그러니까 밀양 갈 수도 있는데 아마 안 갈 것 같아요. 지금 가야 하는데 나는 준비를 안했거든요. 아 맞다, 오늘 엄마따라 가면 기차타고 가서 일해야 하고(뭐 며느리가 많아서 시키지는 않지만) 내일 오전에 가면 동생차로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아마 집에서 놀거예요!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러니까 난 책과 티비를 맘껏 볼 수 있어. 와 기쁘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다음주 수요일까지 쉰다고? 화욜도요? 학교 이상하네. 학원은 사악하고 학교는 올발라....

맥거핀 2012-10-0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서평단 때문에 읽고 있는 '코뮤니스트'라는 책에도 중국 얘기가 좀 나오기는 하는데, 참 생각해보면 20세기 들어 중국만큼 격변을 겪은 나라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그런 면에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지만) 봉건주의 국가에서 외세의 침입, 공산주의 그리고 현재는 자본주의(에 가까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면요. 그렇게 시대가 확확 바뀌면 결국 죽어나가는 것은 윗대가리들이라기 보다는 민중들이니까요. 예전에 어렸을 때 중국천안문 사태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아..그런데 왕가위의 <2046>은 제가 꼽는 몇 안되는 정말 아름다운 영화 중에 하나인데...)

추석 잘 보내셨어요? 저는 그냥 집에서 딩굴딩굴했어요. 밀린 책을 많이 읽어야지 하고 계획을 세웠으나 별로 보지를 못했네요.^^

아이리시스 2012-10-03 04:44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오늘은 제가 일찍 자가지고 두 시에, 무려 두 시에! 일어났어요. 새벽마다 폭풍 영어공부를 하고 있어서 어제부터 머리가 팽팽도는 것 같네요. 이대로 미국 가면 의사소통 잘될 듯한 미친 기분이 들기 시작해요 zZZZZZZZZZZZZZ

코뮤니스트. 그거 전에 궁금하긴 했는데 쉬워보이진 않았어요. 중국을 많이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 책이 부담스럽긴 했는데 산문집이라 쉽더라고요. 어린시절 고백이나 경험, 생각이 많은데 저는 약간 더 자세하고 어려운 사실주의 문학을 기대해서.. 산문집인 거 알고 샀으면서 왜 그런 기분이었는지.. 좀 더 어려웠어도 소화했겠다, 자세히 알고 싶은데, 이런 생각했던 것 같아요.

중국, 아프리카, 남미 정치사 같은 데는 관심이 좀 가는 편이어서..

<2046> 영상미가 죽이잖아요. 저렇게 얘기한 건 주리틀던 기억만 빼고 내용이 거의 기억 안나서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봐야겠어요. 근데 늘 이 영화 보려고 하면 중경삼림이나 아비정전 보다가 끝내버려요.

저도 뭐 시골 안갔으니까요. 큰집 찍고 외갓집 돌고 그러고 오는데 저는 안갔어요. 설날에는 따라가서 신나게 놀아야지 뭐 그런 생각을.......... 큰집 사촌오빠가 지난 6월 결혼해서 네 살 어린 새언니가 생겼는데 두 달 있으면 조카가 태어난다고 해서 계속 결혼압박 받을까봐 부담스러운데ㅋㅋㅋ

책은커녕 저는 그냥 뒹굴다가 시간 다 갔어요. 내일(오늘)이 또 휴일이라니...zZZZZZZZZZZZZZZZZ

저 탕웨이 많이 보고 싶었는데 개막식 표 못 구해서(만약 정색하고 벼렀던들 살 수 있었을까요) 티켓 몇 장 사뒀어요. 일반표도 워낙 매진이 빨라서 장동건장쯔이 나오는 영화 같은 건 꿈도 안꿨고 그냥 차선에서 골랐어요. ㅠ.ㅠ

Shining 2012-10-0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 <인생>과 <허삼관 매혈기>가 엄청나게 좋았으나 근래작은 평작이라 한동안 안 봤는데.. 이 책은 보고 싶군요. 아이님의 리뷰를 읽으니 더더욱+_+ 그나저나 아이님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상식은.... 1/4만 제 머리로 복사해주시면 하는 건 약은거겠죠. 하하하하하.

BIFF보러 가십니꽈? 멋지다... 전 고딩때부터 가고싶었는데 여태 못 가고 있다는_- 갔다오셔서 감상평 말해주기에요!

2012-10-05 0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세기 칙칙한 뒷골목에서 훗날 두 도시를 빛낼 위대한 싹이 트고 있었다. 그곳은 버려져 있기도, 선택되기도, 생채기나기도, 아물기도 했다. 쥐와 사람이 동시에 같은 곳에서 살았다. 마부와 마차, 붉은 포도주, 쿰쿰한 냄새가 가시질 않는 다락방, 낡고 녹아내려 만질 때마다 붉은 찌꺼기가 묻어나오는 철계단, 두 도시를 오고가는 거대한 도버해협, 뱃길, 악악거리며 대거리하는 소리, 가난 속에서 흘러넘치는 침울, 울음을 가장한 진짜 울음소리, 진흙탕에 넘어진 사람 머리 처박기, 뚝뚝 떨어지는 비애와 그나마 거리를 밝히는 푸른 별빛과 노란 달빛. 한 남자는 숙녀와 함께 오래 전 잊혀진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비정한 도시에 온다. 만나기로 되어있는 사람은 런던의 유명은행에서 일하는 남자가 파리지점에 근무했을 때 알던 남자다. 어떤 연유로 유령 같은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앓아온 정신착란을 숨기지 못한 채 노쇠하고 허약해진 다 썩어가는 눈빛으로나마 딸을 안는다. 찢어발겨진 1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그들은 이제 함께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두 번 읽었다. 절망과 타락 그리고 영광은 언제나 함께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타락한 도시조차 디킨스의 도입부는 멋지게 그린다. 비가 오는 거리를 미친 척 맨발로 뛰어다니던 적이 있었다. 다 커서는 아니고 학생 때 비오는 날 단짝친구와,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놀다(분신사바 유행중) 나오는 길에 그만 교문이 닫혀, 지나가는 분의 도움으로 교문을 넘다가 어차피 젖은 교복 그냥 쫄딱 맞고 강아지처럼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비는, 피하려 할 때 어렵지, 맞기 시작해서 홀딱 젖고보니 그만큼 마음 놓이고 편하고 행복하고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적이 없었다. 이상했다, 비는. 아마 이 도시의 타락과 절망의 냄새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책을 펼치며 여기 앉아 뜨겁고 달콤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꽤 오랫동안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 듯한 기분좋은 예감이 들었다. 해협 하나 사이에 두고 닿아있는 두 나라의 정반대 분위기는 그곳을 좋아하는 일부의 이유 정도는 되었다. 환상 속에서는 유럽 보다 더 이질적인 중동이나 아프리카, 남미가 더 좋지 않을까. 그곳들의 하늘은 곧 머리 위로 부서질 것 같은 색깔이다.

 

어느 도시에 머물 때 폭격 맞은 대성당이 우뚝 선 바로 그곳, 불탄 자국 성당 샛길로 마차가 지나갔다. 케른트너 거리였던 것 같다. 영국도 파리도 아닌 곳에서 홈즈의 시대를 떠올린 건 잠시 뿐이었지만, 그 맛에 여행의 매력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분명했다. 몽타주와 오마주가 군데군데 기시감으로 나타나는 현상, 그게 여행이었다. 온 세계 배낭여행객들이 하는 인도앓이를 유럽 어느 도시에서 마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서 실감했달까. 본인에게 익숙한 풍경과 가장 이질적인 곳에서 누구나 한 번쯤 앓게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인도와 영국이 아니고, 베트남과 프랑스도 아니다. 런던과 뉴욕도 아니고 파리와 뉴욕도 아닌, 많은 것을 공유했지만 많은 것에서 대립했을 런던과 파리, 비슷한 과거를 가졌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천차만별일 두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밤. 제법 많고 깊은 시대적 배경지식을 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