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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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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겨울 그애의 입술 감촉, 비오는 토요일 오후의 도서관, 텅빈 휴가지에서의 우리 넷, 커다란 고무통에 들어가 샤워하던 포항 민박집에서의 이틀, 국제시장통 작고 허름한 식당의 김치찌개맛, 스물두살 여름 주민센터에서의 둘도셋도 맛난 점심식사, 아지트처럼 모여들던 극장과 카페,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술집, 한여름의 휴게소 번개나들이, 한겨울밤의 공원, 검고 질펀한 모래사장, 소금기 절은 비릿한 바다내음, 가장 어린 날에 가장 높은 곳을 훔쳤던 해운대 스카이라운지 야경, 동네 쉼터 어둠속에서 나눴던 미래, 독서의 처음, 창작의 첫문장, 바다가 보이는 모텔, 처음의 수치, 엄마의 눈물과 아빠의 한숨,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이 깨지는 걸 눈앞에서 보던 날, 비맞고 교문을 넘던 노을진 저녁과 물에 젖은 생쥐꼴을 한 우리, 그애와 이어폰 나눠끼고 듣던 곡, 밤 늦은 공부, 너무 빠르고 너무 늦은 울음, 기약없는 이별과 기다림, 서글픈 바닥을 확인하는 시간, 보잘것없는 날 향한 누군가의 질투, 시기, 외면, 잊히지 않는 표정과 몸짓과 외양과 행위 그리고 말.말.말. 기억.기억.기억. 당신이 뭐라든 유일한 나만의 것. 덧그림과 채색과 마무리. 삶은 기계적이고 프로그램적이고 규격화, 일률화된 규칙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진짜다.

 

<투명사회>에 의하면, 내가 본 투명사회는 상상과 확장, 예측불가능의 개념이 완전히 무너진 사회다. 거리(distance), 아우라, 비밀, 어둠, 눈속임, 전략, 비유, 파손, 구석, 차이, 내재성, 상징, 초월, 굴곡, 빈틈, 불투명, 즉흥성, 우발, 자유, 자연발생적, 깊이, 베일, 가림, 굽은 것, 우회적인 것, 중간지대, 불명확, 은둔, 균열 등 총체적으로 뭔가 정의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사라진 영역이다. 그러므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진과 그림은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요구되고 아름다움은 본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과다와 과잉은 지양되어야 한다. 관계는 투명하게 내보이는 게 아니라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공평, 온당, 적절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더 오래 더 유익하게 유지될 수 있다. 즉, 투명의 지향점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 즉 무엇도 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예전에 노무현 전대통령이 지금 당장은 역사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결국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투명사회의 대항마는 가시적 과정이 가속화되는 속전속결의 프로세서가 아니라 고유한 시간, 리듬, 박자를 가진 상태에서 때로는 뒤로, 때로는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또 부정적인 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결국 이 네거티브한 것들이 시너지를 일으켜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적이지 않은 사회다.

 

우리는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삶이란 투입과 산출을 순환반복하는 기계적 서사에서 움직이는 결말 정해진 책이 아니라 중단, 종결, 상실, 심지어 결핍과 무(空)의 상태에 도달하는 한이 있어도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창의의 영역에 존재해야 한다. 관광자의 삶과 여행자의 삶이 다르듯, 경계와 문턱 없는 도전이 무의미하듯, 매끈하고 평탄한 인생이 재미없듯. 동경과 희망과 기대는 무조건 긍정적인 것의 증식과 대량화가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와 너희가 뒤죽박죽으로 꽉 차 있는 창고와 같은, 정돈되지 않은, 파란만장한 역사야말로 제대로된 매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투명성은 입때껏 말한 수많은 개념들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예상가능한 것, 박자도, 리듬도, 향기도, 아름다움도, 시간의 층과 침전물, 시간의 서사성과 비유의 매력이 사라진 현상, 내면의 심리나 주관성이 아닌 객관적 감정의 표출, 전시, 판매, 재현의 무대. 그래서 필름에 가둬진 시공간을 반복, 전시하는 영화와 즉흥성, 미묘한 차이, 느낌과 욕구에 치중하는 연극의 차이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p.74)

 

눈은 책 속 활자를 좇고, 귀는 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고 내가 문장과 이미지와 소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 당신이 읽은 책을 오늘 내가 읽고, 내일 내가 읽을 책은 모레 당신이 읽는다. 우리는 다른 시공간에서 각기 다른 우주의 길을 걷는다. 책에 대한 느낌도, 감상도, 지식도 모두 다르다. 우리는 일부러 그 감상을 일치시키지도 고치지도 않는다. 우리의 거리도, 감상도, 시간도, 공간도 아무것도 투명하지 않다. 내가 당신을 알 수 있고 당신도 그러하되, 서로 포개지지 않는 것. 플라톤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지 말고 빛의 방향성, 서사와 인식의 세계, 존재의 저편(초월), 유혹과 변신, 환상과 가상, 기호와 시인이 존재하는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당신과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났다. 공간은 이 주소 블로그 한곳이었지만 매번 서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을 통과한 채로. 주로 내가 흔적을 남기면 당신이 그 흔적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식이다. 우리 언제 한번이라도 오롯이 함께한 적이 있었을까. '통제사회' 챕터는 버릴 데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지금, 바로, 여기, 서로가 자유롭고 소통하고 자가발전하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적인 동시에 불가능한 미래인지. 당신이 어디 있을까, 무얼 하고 있을까를 상상하는 시간으로 행복해지는 밤.

 

벤덤과 푸코가 말한 구시대의 '판옵티콘'이 벽과 철창으로 분리된 감옥 안에 든 피감시자를 감시자가 일방적으로 지켜보는 개념이었다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현시대의 '디지털 판옵티콘'은 각자가 자발적으로 공론장에 나와 노출증과 관음증을 동시상영하는 개념으로, 모두가 감시자인 동시에 피감시자가 되는 사회다. 후자는 실질적으로 '좋아요'만 존재하는 공간이며(페이스북의 경우), 자타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자발적으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행위는 결국 강요와 같다. 마치 경쟁하듯 아이 똥기저귀 사진까지 찍어 올리던, 가사와 육아의 뿌듯함과 고충을 낱낱이 고해바치던 맘들은 생산한 정보가 타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범죄와 협박의 시초가 되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친구수, 시간 등 현재와 최초에 목매고 숫자에 안도하는 모습은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 그사람이 공개하기로 하는 한, 우리는 얼굴 모르는 사람의 주말 스케쥴과 사생활을 줄줄 꿸 수 있다. 때때로 부분의 합체는 전체의 아류가 되기도 하는 법. 부재하는 사유에 대한 무통無痛은 가시적 소통의 증가를 관계의 깊어짐으로 오해하게 한다. 가보지 못한 지구 반대편 친구를 통해 듣는 단면적 생활이 마치 내가 지구를 누비는 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에 시달리게 한다. 때로는 유명인(셀러브리티)들의 삶을 제것으로 여기며 일주일 동안 빽빽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 티브이 속 가상연애, 가상결혼, 가상동거, 가상육아, 가상여행을 통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남의 것으로 보낸다.

 

적어도 허락된 최대한에서 절반 정도는 오로지 내 오감과 관심과 욕망으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궁금한 마음을 보채지 않고 훔쳐본 걸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고 내보이면서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 이 말이 저 말로 들리게 하지 않고 섞되 섞이지 않고 얼되 쉽게 녹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저 이치에 맞으면 흘러가기도 하고 아니면 멈추기도 하는 만만한 정거장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러니 이 공간에도 예전만큼 의미는 두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의미는 더 커진 셈이다. 잊힐 시간이 필요하다. 색다른 색채와 선율을 발견하고 경악과 충동이 미안하지 않을 때까지. 새 페이지에 당신의 이름을 쓰고 함께 하지 않아도 언제나 내편이란 걸 깨달을 때까지. 그리하여 당신이 그립지 않을 때까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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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0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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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3 0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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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3 0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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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0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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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3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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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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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6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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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7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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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빅 필립 K. 딕 걸작선 1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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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야 하는데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게 범죄물(스릴러)이라면, 있을 법한데 없는 세계를 구축하는 건 SF다. science fiction(공상과학소설)으로 일컬어지는 SF의 시초는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오손 웰즈의 <타임머신>이며, 주로 인간이 닿을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존재할 법한) 세계를 상상과 기술에 기초하여 써내려간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의 예측, 기대, 추정이 이른 최초의 세계가 '바다'와 '우주'인 건 묘하지만 충분히 그럴 법하다. 둘 다 미지의 비밀을 다량보유한 세계이자 지구인이 제모습을 고수한 채 탐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후 SF는 줄곧 삶과 죽음에 열중하는데, 이러한 소재적 한계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가로질러 이야기가 출현하고 또 소멸하기 때문일까.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이 세계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기적의 계산법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우주공간과 사후세계에 골몰해온 SF는 어느 순간 배아기胚芽期 이전의 착상着床으로, 착상着床 이전의 無로 회귀했다. 모든 인간은 있는 동시에 없고, 없는 동시에 있다. 너무나도 멀쩡해서 더이상 완전할 수 없는 상태로. 아마 '유빅'은 세속의 어그러진 속성을 부지불식간에 반전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의 지각에도 차이가 있는 거로군. 앨은 깨달았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SF를 단순히 있을 법한 세계에 천착한, 맹랑孟浪한 이야기로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저'기서 '어제'와 '내일'을 비틀고, 꼬집고, 기대함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 붙박인 인간을 더욱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찬사는 필수적이다. 내가 이 생소한 장르에 대해, 겉핥기도 못했다는 걸, 언제 끝날지 모를 유영游泳을 이제야 시작했다는 걸, 혼자 힘으로 처음 떠난 여행이, 모든 스킨십을 처음으로 경험한 첫 연애가, 카뮈와 위고와 발자크가 어떤 작가인지 몰랐을 때의 첫 독서가 그랬던 것처럼 서투르고 두서없고 유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작품을 아는 게 작가를 아는 거라 할 수 없고, 작가를 모르고 작품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유빅>을 읽기 전 이 작가를 몰랐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SF문학의 경계가 어디인지, 그는 왜 필사적으로 다른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애썼는지, 어째서 그가 만들어낸 기술적이고 창대한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는지. 아슬아슬하게 작가 필립 K. 딕과의 동시대 조우를 피해간 내게도, 죽은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할리우드의 핫한 원작자로 주목받는 필립 K. 딕에게도, 2013년 막바지에서 별달리 내세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퇴화와 초월이라는 예측불가능한 현재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어 더욱 유용하고 가치있게 쓰이는 '유빅'과 <유빅>은, 유례없는 행운의 물질(matter, substance, material)이 될 것이다.

 

기이하고 거대한 힘이 그들의 삶을 재단하고 있는 것일가. 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곳은 산 자의 세계일까, 아니면 반생자의 세계일까. 아니. 갑작스러운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양쪽일지도 몰라. 어느 쪽이든 간에, 그 힘은 그들의 경험을, 아니면 적어도 그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마 쇠퇴와는 별도의 힘이리라. 


텔레파스와 프리코그(예지능력자)가 활기치는 미래, 지금부터 소개할 세계는 작아서 보이지 않는 내가 완전히 내려다볼 수도, 완벽히 구축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위해 모라토리엄 기관에 의해 냉동보존되고,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은 남는다는 미명 아래, 관 속에서 말(목소리)로만 산 자와 접촉한다. 하지만 반생자의 상태라 불리는 이 냉동보존 상태의 사람에게도 수명이 있으며 영원히 같은 상태로 존재할 수는 없다. 텔레파스와 프리코그를 막아내기 위한 반反초능력자(불활성자) 회사 대표 런시터는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스웨덴의 모라토리엄으로 가서 아내 엘라를 호출한다. 어느 날, 뒤쫓던 초능력자들이 차례로 사라지는 어려움으로 경영난에 봉착한 런시터는 거액의 의뢰를 받고 최정예 11명의 불활성자들을 이끌고 달로 간다. 무슨 일인지, 누가 배후인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시작한 작업은 달에 도착해 함정이자 계략이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알 수 없는 자로부터 대테러를 당한다. 그때 런시터가 사망한다. 그의 시신을 냉동보관해 태양계로 돌아온 일행은 반초능력 테스트 기술자이자 런시터 어소시에이츠의 공식 후계자이자 대행인인 조 칩과 반초능력자 발굴자인 애시우드, 반프리코그로서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팻이다. 곧 이들을 중심으로 야릇하고도 오묘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죽은 자와 산 자가 대화하고 텔레파스와 프리코그의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한' 반텔레파스와 반프리코그의 활동은, 이미 사후세계가 구축된 듯 보이고, 영웅주의 스토리가 판치는 세상이라면 하등 놀라울 게 없다. 기이한 세계는 조 칩과 애시우드가 현실에서, 과거와 조우하면서부터다. 달 멤버 중 하나인 웬디가 방사능에 노출된 것처럼 폭발 후 쪼그라든 사체死體로 발견되자, 이상징후를 감지한 그들이 원인찾기에 나선다. 달에서 이미 냉동보관 상태로 운반된 런시터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말(글자)로 메시지를 보내오자, 조 칩, 애시우드, 팻이 이를 알아채면서 달 멤버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시간, 물질, 장소, 기억마저 역행시키는 불가사의한 일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면서 1992년 지구를 둘러싼 세계가 차츰 1939년까지 가속 퇴행한다. 조 칩이 사는 아파트의 현관문, 커피포트, 크림과 설탕, 라디오, 녹음기를 비롯한 유빅까지 모두. 모든 것이 언제든 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빅>의 세계가 지키는 두 가지 룰은, 미래를 보는 프리코그가 직접 시간을 이동하여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과 어느 세계든 공평한 무게, 질량, 온도, 중력을 위해 균형, 비례, 조화를 유지하려는 일련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내가 틀린 경우 상대방은 반드시 옳다. 상대가 내려간 만큼 나는 올라가고, 내가 뜨거워진 만큼 상대는 반드시 식는, 대칭법이 통용된다. 혼란에 휩싸인 상황을 이해할 키(key)를 쥔 사람은, 죽어서도 계속해서 산 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런시터'와 다른 프리코그들과는 달리 미래를 본 다음 과거로 이동해 미래상황을 바꿀 능력을 가진 '팻'이다. 조 칩과 애시우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카메라는 계속해서 허우적대는 조 칩의 뒤를 쫓고, 우리는 눈앞에 있는 모든 등장인물의 정체를 의심해야 한다, 자기자신까지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잠들기 전까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어떤 식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면서 완벽하게 달라져있다면 어쩔 것인가. 슈퍼마켓이나 약국에서 내가 가진 돈이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단계별로 시간과 물질이 퇴행한다면 말이다. 오늘 만지작거린 최신식 디지털 기기가 갑자기 반세기 이전의 구식품으로 바뀌어 있다면 말이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하겠지만 머지않아 다다른 세계에 적응(순응)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인간의 힘이 미치는 작용범위이자, 경험(인식)의 가능성의 한계니까.  


"그게 쇠퇴와 함께 진행 중인 두 번째 작용이야. 동전 일부는 폐지되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돈이 되어버렸지만, 다른 돈은 런시터의 초상화나 상반신이 인쇄된 걸로 바뀌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얘기해줄까? 난 이 두 작용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 하나는 멀어져가는 작용이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과정이랄까. 그게 첫 번째 작용이지. 두 번째 작용은 그와는 반대로 존재하게 되는 과정이지. 단 예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뀌긴 하지만."


하지만 필립 K. 딕이 <유빅>의 세계를 통해 보려주는 것은 이 경험(인식)치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다. 시공간의 무너짐 속에서도 굳건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에 대한 자각같은 것 말이다. 한순간에 주인공들이 닥친 상황(환경)을 반전시키고, 실재와 환상을 뒤섞어 어느 쪽이 진짜(현실)인지를 독자가 가늠하지 못하게 만들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안을 [엔트로피 법칙]에 적용시킨다. 불안, 소비, 일회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이에 대항하는 세력의 치열한 다툼이 결국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아니냐고. 맙소사, 나는 엔트로피 법칙이나 열역학 법칙에 대해서는 아무리 살펴도 잘 모르겠다. 한편, 작가는 우리가 딛고 선 땅이 과거나 미래,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를 묻는다. 당신이 누군가의 상상 속, 과거나 미래 혹은 태양계나 우주계 바깥, 無의 상태,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증할 방법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딘가 말고는 나라는 존재(being)를 설명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안심한 순간 불현듯 뒤집히는 메카(Mecca:지금 내가 서있는 현재/지구)는 나를 비롯한 주변환경 모두를 의심하게 하고, 불안마저 증대시킨다. 관능적인 수 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엔트로피(entropy), 즉 불안과 연계시키고, 삶과 죽음, 물질과 비물질, 형태와 비형태, 과거와 미래, 현실과 환상, 육체와 영혼, 볼수있는것과 볼수없는것의 경계에서 존재자체와 어떻게 존재하는가(존재상태)를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유빅'은 말한다. 자신이 이름은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언제나 존재하는 '말'이라고. 모든 것을 새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 주위에 모든 것을 다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 세상을 겨우 다시 보고 듣고 느낀다. 현재는 살아있는 과거. 무한하며, 평범한 이해를 능가한다. 이것은 과거가 현재를 결정지으며, 현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이해 안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다. '유빅'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존재할 것이므로.


나는 유빅이다. 이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나는 존재했다. 나는 여러 태양을 만들고, 여러 행성을 만들었다. 나는 생물과 그들이 살아갈 장소를 창조했다. 나는 그들을 이곳으로 움직이고, 저곳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내가 명하는 대로 행동한다. 나는 '말'이다. 내 이름은 결코 입에 오르지 않으며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유빅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역사학자 E.H. 카는 대표작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띤다고 해서 산이 객관적으로 어떤 형태도 띠지 않는다거나 무한한 형태를 띤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쓰고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존재자체, '이름'이 아니라 '대상對象'이어야 하지 않을까. 시인 김춘수의 시구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에서의 '꽃'이 하나가 아니라 개별의 제각각을 뜻하는 것처럼, 유빅은 언제나 '유빅'이지만 때때로 그 '유빅'이 아닐 때가 있듯. 언젠가부터 내 곁을 지킨 달콤한 목소리와 설레는 노래, 눈에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스마트폰, 아침에 마신 뜨거운 커피는 더이상 내것이 아니게 될 날이 온다. 커피는 재물, 지위, 세력, 명예로도 대체가능하다. 여기 걸어가는 나와 저기 잠든 나, 지금 흘러나온 나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창조는 때로 너무 높고 아찔할 정도로 깊지는 않은가. 인간의 생각, 사상, 감정, 기분, 반응까지 창조하려는 이들의 콧대높은 오만은 옳을까, 단 한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을까. 초능력자가 판치는 세상에 왜 반초능력자(불활성자)가 필요한가. 관습과 제도 안에 갇혀 세상을 바꾸자 외치는 자들을 엔트로피가 덜 소비되는 방향으로, 좀 더 천천히 줄어드는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제각각 갈고닦은 특유의 균형과 은밀한 방식의 제안이 필요한 시대에 섰다. 당신이 어떤 세계에 있든 얼마나 대단하든,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가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세상에 널리 퍼진 싸한 냉기와 지독한 반감은 결합, 공존, 화합이라는 따뜻한 단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걷는 길과 반대 방향에서 오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를 돌려세우기 위해 악다구니와 회유, 공모의 방식으로만 대응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세상이 너무 아프다.


싸워야 하면, 그것밖에 길이 없다면 역시 최선을 다하긴 해야겠지만, 조금만 돌아볼 순 없었나. 춥고 차고 기적을 잃은 시대의 크리스마스, 그후로 엿새, 남은 연말, 한 번 뿐일 올해의 기쁘고 벅차고 아프지만 무사한 순간을. 조금은 안이하고 평탄한 정착을 기대한 내가 사악했었나. 둘러보자. 나라는 존재가, 주위가, 나라가, 세상이, 여전히 얼마나 아름다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발광發光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공존, 화합, 균형의 찰나를 보았다. 지켜질 것은 지켜지고 보존될 것은 보존되는, 디스토피아를 품은 유토피아가 멀리서 빛난다.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는 한, 아무도, 누구도, 늦지 않다. 그래서 '유빅'과 <유빅>은 너무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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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9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1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3-12-27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보고 보관함에 담아놓고만 있지요. 연초의 구매 때문에 자금압박도 심하고 살짝 무절제한 지출에 대한 반성과 함께 말입니다. 알고보니 이 양반의 소설이 영화화된 것이 꽤 있더라구요. SF는 사실 과학소설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공상'을 붙여서 번역을 했지요. 인문학자들의 고루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부터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디서 보기를 SF는 비전을 주고 과학자는 이 비전을 현실화시킨다고 했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위대한 SF작가들은 깊은 창작속에서 어쩌면 유전자 깊숙히 각인되었을지도 모르는 고대의 과학을 다시 끄집어내어 미래의 예언으로 만든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만큼, 대단한 분들이 있지요.

아이리시스 2013-12-31 01:35   좋아요 0 | URL
tran님 댓글 보니까 아무 생각없이 '공상'을 써붙인 제가 뭘 몰라서 용감했구나 싶어요, 일깨워준 거 고마워요. 저는 어쩌면 SF는 절반쯤 '말안되는 공상'이라고 생각해온 것 같거든요. 제가 지나치게 잘하는 것들 중 하나가 '지르기'라서요, 책도 사고 티(tea)도 종류별로 사고 옷도 사고 빽도 사고 삔도 사고 팔찌도 반지도 화장품도 펜도 노트도 다이어리도 등등등 저는 문구류도 좋아하고 가끔 화분도 사거든요, 장식용으로. 자금은 언제나 부족하죠, 제가 그, 말로만 듣던, <파운데이션> 낱개로 구입한 사람입니다, 이 작가도 전집박스고 뭐고 한권만 우선 골라서, 이제 <유빅> 읽었으니 다음권 사자, 하고.. 박스같은 건 울집 와봐야 남아나지 않거든요. 보관욕심은 별로 없어서..( '')

'유빅'이 뭔진 모르겠지만 <유빅>은 여전히 대단한 작품이 맞습니다. 뭔가 딱 글로는 못쓰겠는 그런 지점이 있는데, 제가 열역학 법칙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다들 이 작가를 놀라워하시니 꼭 그런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남은 올해의 하루 잘 보내세요.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transient-guest 2013-12-31 10:16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박스는 따로 알라딘에서 준다고 하니 한번 문의해보심이..ㅎㅎ 저는 예전에 아발론 연대기를 살 때 박스를 버렸거든요. 그런데 팟캐스트를 들어보니 이 '박스'가 사실 상당한 정성과 비용이 들어가는 제품이더라구요. 아깝기 그지 없습니다.ㅎㅎ '지르기'는 저도 잘 합니디만, 조심하는 거죠. 예전에 한창 영화에 미쳐있을때에도 DVD와 비디오를 모으느라 적지않은 자금이 날아간 적도 있구요.ㅎㅎ

카스피 2014-01-10 20:43   좋아요 0 | URL
SF소설에 국내에서 번역된것은 아무래도 일본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겁니다.20~30년대 미국에서 발행한 펄프픽션잡지들의 경우 보통 잡지 제목들을 판타스틱&SF가 함께 있는 제목들을 많이 사용했는데 일본이 이를 번역하면서 판타스틱을 공상으로 번역해서 SF소설을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했고 일제 시대 이를 접한 우리 번역계도 현재까지 SF소설을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하고 있는 형편이죠.

아이리시스 2014-01-12 00:37   좋아요 0 | URL
아..그렇구나. 저는 왜 '공상'을 붙였는지에 대해선 생각조차 안해봤거든요. 당연히 공상에 기반한 거라고 생각해왔고요.. 요즘 새삼 과학의 발전과 신비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학책은 무리가 있으니 SF라도 많이.. 카스피님이 종종 도움주세요!

가연 2014-01-0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SF쪽은 적당히 알고 있을 뿐이지만 유빅, 이라는 이름은 정말 친숙하네요. 옛날 알라딘 이벤트가 유빅 컵 증정아니었던가요, 하하하. 지금 솔직히 정말 아쉬운게 그때 컵 증정할 때 이벤트 참여를 했어야 했는데ㅠㅠㅠ

사실 리뷰가 좀 어려운 느낌이 들어 ㅎㅎㅎ 댓글을 봤더니 뭔가 딱 글로는 못쓰는 그런 지점이 있는 거군요! 제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게 아니군요, 하하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리시스 2014-01-08 01:39   좋아요 0 | URL
가연님 안녕? 바빠서 안오시는 거라 생각하고 오시면 인사할랬는데 한발 늦었네요, 연말연초에는 어쩐지 꼭 아프거나 뻗거나 해서.. 부모님 결혼기념일이 있고요!(이게 왜 나옴..) 유빅 컵에 생과일 주스를 꼭 부어먹어보고 싶었지만 저도 없습니다.. 이벤트에 혹해서 책 사고 그런 적은 거의 없는데..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이벤트 할 때 돈이 없었;;(흙흙)

리뷰는 어려운 게 아니라 길 뿐입니다..주절주절.. 이상하게 읽었는데도 유빅이 뭔지 설명을 못하겠는데 원래 그런지 제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지 가연님에게도 추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리뷰나 글을 쓰기 시작할 때 화면에 국어사전을 함께 띄우는 건 오랜 습관이다. 다른 나라 언어를 공부할 때 사전을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르게 나만의 선택적 차용이다. 전자사전과 스마트폰이 사전기능을 탑재해도 내가 사용하기에 가장 빠르고 편리한 건 역시 노트북 켜서 들어가는 한 포털 사이트의 것. 적어도 맞춤법에서만은 꼬리잡히지 말자는 말단 문청의 호기로운 다짐에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검색 한번 없이 리뷰 한 편을 쓰면서도 없으면 불안하다. 내가 늘 서울 사람 앞에서 '억양 빼고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박박 우기지만 사실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 파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사흘을 함께 보내며 베르사유 궁전의 삽질 추억을 쌓은 다섯 살 위 어떤 언니의 촌철살인적 표현에 의하면 '바로 그 억양'이 문제라는 것도 안다. 몰라서 우겼던 건 아니다. 


"김태희, 최지우, 손예진, 문채원, 고아라도 경상도 출신인데 서울말 저렇게 잘 해, 나도 할 수 있어. 문근영, 수지, 박신혜는 전라도 출신인데도 잘하잖아, 물론 나도 맘만 먹으면 할 수 있지." 하지만 결혼해서야 비로소 서울에 간 시골출신의 부산소녀 막내이모의 억양은 사촌동생이 제대를 했어도 여전히 밀양과 부산 특유의 사투리와 서울 억양이 뒤섞인 어디쯤이다. 중학교 때 전학 온 익산 출신 베프도 여전히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 어디쯤에서나 가능할 법한 화개장터어를 쓴다. 제법 오래 살았다. 서울 억양 하나쯤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못해도 나는 나를 인정해야 한다. 촌년이어도 어쩔 수 없지. 사투리는 현빈(친구, 우리들의 전설)도 김우빈(친구2)도 완벽하게 못하는 거니까 자부심을 느낀다. 경상도 도처에 친척이 널린 나도 부산, 울산, 밀양, 창원, 대구 억양의 깨알같은 차이를 구별한다(우왕, 몇 개 언어냐). 앞으로의 인생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됐다. 부산 사투리는 내가 현빈보다 잘하는 걸로 정리 끝(이걸 자랑이라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사투리와 살짝 억센 억양이 창피하다고는 여긴 적은 없다. 열아홉의 내가 우연히 원서를 넣어 합격한 서울의 한 대학교 공대에 진학했다면 과감히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투리 퇴치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이 간간이 남긴 했어도. 시시때때 다른 말을 쓰는 이들 앞에 섰을 때의 아찔해지는 이방인의 지위를 무겁게 인지하는 편이다. 그들 역시 내 언어영역에 들어올 때 그러하듯이. 입에 배고 몸에 깃든 평생의 습관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적어도 티나지 않게만 하자는 게 목표고, 그런데도 표현력이 이 모양이니, 라고 비난하면 쏘아줄 말이 없다는 슬프고도 잔혹한 사실은 일단 접어둔다. 자책은 남몰래 하겠다. 퍼뜩 생각나는 표현이 표준어인지 방언인지를 검열하고, 같은 뜻으로 쓰인 비슷한 표현을 찾아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멀리 못간다. 오늘도 누군가의 삶을 미묘하게 흩트렸고, 나는 나를 고민한다. 그리고 내 글도. 이윤기 선생님의 글(창작물 비롯한 번역물)을 많이 읽지 않았다. 유명한 그리스 신화 초반 몇 권과 <장미의 이름>을 포함한 에코의 몇 작품 그리고 소설 몇 편이 다인데, 작년 재발간된 <하늘의 문>을 읽다가 그제서야 그의 별세가 조금은 진심으로 아쉬워졌다. 


요즘 이런저런 생각으로 흔들리는 내게는 글 잘 쓰는 법이 절실하다. '잘'의 의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 안에 있는 어떤 의문들을 밖으로 밀어낸 결과라는 것만 제외하면 '잘'은 일반적인 의미의 '잘'과도 상통한다. 종종 현재형과 과거형, 인칭과 시점이 마구잡이로 변하는 희한한(자유로운) 리뷰가 마음에 걸렸다. 만약 완벽한 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다면 거기 도달하고자 하는 내 의지는 그다지 나쁜 게 아니잖아. 실은 없거나 모른다는 게 함정일 뿐. 이론, 글감, 경험 등을 골자로 하는 글쓰기 방법론이 쏟아져 나오지만 대다수는 장바구니에서 선택을 기다리는 처지다. 쉬어가기 삼아 펼친 이 책도 사실 처음에는 글쓰기 방법론인 줄 알았다. 왜 이제야(별세 후에) 나온 거지.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가이자 번역가로서의 이윤기라는 브랜드 파편을 '글쓰기(문학으로서, 언어로서, 번역으로서, 창작으로서, 직업으로서)'라는 주제로 재구성한 책이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적 단상과 사유를 모았다. 글쟁이의 고뇌와 기쁨, 자유를 엿볼 수 있으며, 체험과 생각에 바탕한 진솔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 


"... '나비가 바다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그 수심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는 제 몸무게를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하늘을 더 잘 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디를 향하고 어떻게 올라가고 있는지 모를 때 어쩌면 가장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다는 말도 있다. 남북은, 사랑에 빠지는 줄도 모르는 채 사랑에 빠질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게 하는 일, 나는 예술이 이것을 성취시키는 데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솔깃한데.


"아이고, 살았구나."

그로부터 한 주일 뒤, 세계 도서 축제가 열린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마음고생 많이 하셨지요?

이런 의례적인 인사 끝에, 발표 당일 내가 했던 마음고생과, 발표를 듣는 순간 내가 보였던, 이기적인 반응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긴장했다. 그가 이런 말로 나를 야단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내가 수상에 실패했는데, 모국어 문학에, 모국어에 돌아올 수도 있는 영광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는데도 자네가 보인 반응이, 뭐? 아이고 살았구나? 신문 원고 쓰는 부담에서 놓여났다고, 뭐? 아이고 살았구나? 자네가 그러고도 한국의 작가야? 한국인이야?"

그러나 아니었다. 고은 시인은 나의 고백을 듣고는 한동안 탁자를 치면서 박장대소하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 안 섭섭해. 이 사람아, 그게 인간이야. 우리는 그런 인간에 대해서 써야 해!"


언제부턴가 내가 말을 영어순으로 한다. 주어, 목적어, 서술어로 이어가야 하는데 나는 거꾸로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 사귄대. (쉬고) 한 달간 유럽 배낭여행 갔다가 머리에서 발 끝까지 커플룩 입고 공항 출국 게이트에서 손 꼭 잡고 나오는데 옛날에 본 만화 <풀하우스>의 한 장면 같았어. (쉬고) 물론 만화에서는 남자만 연예인인데 현실에서는 둘 다 톱스타라는 게 다르지만. (쉬고) 그럼 상대가 반드시 묻게 되어있다. 누가? 내가 대답한다. A랑 B가. 잘못됐다. 우리 말에는 우리 순서가 있고, 미국 말에는 미국 순서가 있다. 국문법을 파괴했고, 무의식적으로 호기심을 끌어 내 말에 관심 갖도록 꼼수를 부렸고, 일상 대화를 이런 식으로 도배하면서 내가 정보를 가졌다고 인식시켰다. 일상생활 아닌 곳에서 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나는 고치려는 의지없이 계속 이러고 있다. [상속자들]에서 탄(이민호)이가 은상(박신혜)이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드러내던 극장씬에서의 대사, "나 너 좋아하냐?"를 방송 보면서 못 알아들었다. 어젯밤 옆동네 사이트에서 기획이벤트 광고글로 "나, 이 책 읽고싶냐?"라는 문구를 띄웠더라. 처음에 그렇게 귀를 의심하다가 다음 날 기사를 읽고 다시보기를 하면서 제대로 들었다. "나 너 좋아하냐?" 아, 이건 뭐지. 이게 무슨 문법파괴, 인칭파괴, 대화파괴야. 색다르고 좋네. 


글쓰기 관련 에피소드 모음집을 읽으며 발전을 꿈꾼다는 건 꿈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애초 고민해본 적도 없는데 마치 엄청난 스타일을 고수해온 것처럼 심각한 척하는 것조차 우습다. 의식적으로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비문을 만들지 않고 인칭, 시점, 배경을 통일시키려 노력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내가 뱉어놓은 글은 늘 주관적으로만 개성적이어서 불안하게 비틀거린다. 굉장한 확신이 있는 것처럼 속이지만 사실 보편과 억지의 어디쯤에서 주저앉는다. 고민하지 않는 시간은 막상 기회를 만났을 때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쓴 글이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내가 더 예쁘고 매력있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에서 좀체 놓여나질 못한다. 우선, 이론을 쏟아내는 착실한 글쓰기 책보다는 내가 무엇을 쓸 것인지를 찾아줄 듯한 <글쓰기 좋은 질문 642>를 살까 말까. 그냥 나만의 질문 642를 만들까. 고민을 오래한다고 더 좋은 선택지나 정답이 있을 리는 없다. 주어진 상황과 낼 수 있는 용기의 게이지를 조절할 의지가 없다면. 밀린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찍을 쉼표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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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11-2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윤기님의 책은 뭘 읽어도 실망시키지 않으니까.
이 분은 좀 더 오래 사셨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이님 제목 읽고 깜짝 놀랐어요. 뭐 당분간 글을 안 쓰시겠다는 뜻인가 해서...ㅎㅎ

아이리시스 2013-12-01 08:28   좋아요 0 | URL
아깝지 않은 죽음은 없으니까요. 육십대에 돌아가신 분들을 보면 50대 중반이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요. 조부모님들이 양가 모두 85세 이상 건강하신 편이어서 (이제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안계시지만) 유전적으로는 장수할것 같고, 사고만 없었으면 싶어요. 요즘은 특히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사고를 달고 다니는 사람은 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것 같아서. 연세가 그러니 여기저기 병원 아니면 약을 달고 사시고. 근데 저희 부모님은 그렇지는 않거든요. 스트레스를 안받아야 하는데 저희 가족은 스스로 고민을 달고사는 편이어서 걱정은 걱정이에요. 내일은 어떻게 되든 오늘은 웃자, 이건 절대 될 수가 없거든요. 오늘 일은 오늘 끝장을 봐야 하고 뭐 그렇게 성격이 급한 편.. 건강에는 안좋을 것 같아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읽어보자 한지 좀 됐는데 실천을 안하네요, 제가.
애티커스님 자주 좀 오세요. 주말에 뭐하세요? (이런 사생활 침해--)

가연 2013-12-01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리뷰네요ㅎㅎㅎ 다만 여담이지만 사투리 퇴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

아이리시스 2013-12-02 00:56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은 항상 좋죠, 제게는ㅎㅎ 이제 가연님에게도 좋은 건가요? 사투리는 '억양'은 아닌걸로.. 올해도 서울에 몇 번 갔었는데 저도 그사람들 말투 들으면 이상하니까(닭살이니까) 그게그거인것 같아요. 가서 살게 되면 또 거기에 맞게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예전에 제가 좋아한 사람도 전주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서울말을 엄청 잘했거든요. 그런데 따라하고 싶어도 제가 쓰는 서울억양에 제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어쩔 ㅋㅋ

2013-12-04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4 0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르세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5
시모나 바르탈레나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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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빛과 비상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로트렉과 르누아르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다. 태초에 내가 기억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비상(飛上)이 좋았다. 평범한 발음과 입모양도, 발음하고나면 거대하게 솟아나는 근거없는 용기도.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루즈]를 보기 위해 꽃처럼 예뻤던 열아홉의 두 소녀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시내 극장으로 달려간다. 의사를 꿈꾸던 짝꿍이자 단짝이었던 친구, 붉고 강렬하고 어둡고 쓸쓸한 무대, 눈과 귀를 자극하는 춤과 음악, 예나 지금이나 빼어난 외모로 혼을 빼놓는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화면 속 화려한 색채와 강렬함, 밝고 명랑하기만 한줄 알았던 파리의 어두운 이면, 극장을 오르내리던 에스컬레이터와 사먹었던 음료와 팝콘, 비스킷, 오징어까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놀랍도록 생생한 기억이다. 더 어두운 분위기로 재즈 선율 물씬한 [시카고], 꿈에 관해서라면 따라올 영화가 없을 [드림걸즈]나 [코요테 어글리]를 좀 더 좋아하지만 다시 보고싶은 작품은 단연 [물랑루즈]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도시에 있다. 묶어둘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던 어떤 물거품에 대해 말하려면 언제나 파리가 일순위다. 아무 것도 모른다. 오르세 미술관의 몇몇 화가 그리고 낭만과 사랑으로 가득찬 예술과 문화의 도시를 알 뿐이다. 


다들 알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 훗날 파리는 내게 그렇게 정의내려진다.



           



로트렉, 클림트, 베르메르, 고야, 고흐, 무하. 로트렉과 가장 먼저 만난 건 운명이라 불러도 좋다. 우디 앨런의 영화 이후, 바로 그 작품이 이 도시를 설명하는 핫한 근거가 되었고, 더이상 나만의 추억만으로는 거기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 슬픈 사연을 들이밀어볼까. 아니면 파리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갔던 퐁네프 다리 그것도 아니면 베르사유, 시테 섬에 대해서. 아니다. 몽마르트르와 빨간 풍차에 대해 말해보자. 아, 벌써부터 불쑥 물러나기 시작하는 그리움의 향취라니. 약간의 쓸쓸함과 미각에 느껴지는 소금기가 따끔거린다. 침울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여섯 명의 화가 중 클림트, 고야, 고흐, 베르메르를 먼저 만났다면, 처음이 로트렉이 아니었다면 나는 굳이 EBS의 특집 프로그램 6부작을 찾아보고 빈약한 책장을 뒤져 굳이 한번 더 회상에 잠기기 위해 이 책을 찾아내진 않았을 것이다. 열 권의 미술관 시리즈 중 하필이면 5번이어야 했던 이유, 로트렉의 일부 작품이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색깔의 빛이 세상의 모든 길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곳. 그곳은 전세계 예술애호가들의 정거장이자 정착지였다. 나는 오르세의 공간적 변천이나 기술적 번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 내용물이 숨긴 기호와 상징, 역사에 오롯이 집중할 뿐이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의 전용관이 있는 파리의 오르세는 문화예술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곰스크 같은 곳이다. 그는 19세기 말 혼란한 사회상 속에 기꺼이 녹아든 하층계급 매춘부와 거리의 여자들을 지상으로 불러냈고, 괄시와 차별에 신음하던 이들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인격을 부여하여 세상 밖으로 낚아올렸다. 로트렉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1889년 몽마르트르의 번화가 클리시 거리에 개장한 댄스홀(프랑스어로 '붉은 풍차'의 뜻) '물랑루즈(Moulin Rouge)'로, 담벼락, 풍차, 밤거리, 댄서, 창녀 같은 몇 개의 다른 단어로도 요약된다. 태양보다 화려하고 달보다 황홀한 시계(視界)가 펼쳐졌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곳이 얼만큼 매력적인 향락의 장(場)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부모의 근친결혼과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얻은 장애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평생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거렸던 외로운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누구도 볼 수 없는 역동과 자유를 포착하기까지 벌인 사투에서 절망의 추격은 또 얼마나 거세고 급했을까. 




하지만 유전적으로 덜 자란 키, 장애로 얻은 걸음걸이로 물랑루즈, 카바레 등의 댄스장과 서커스장까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삶과 반비례하는 완벽한 역동성, 무방비한 자세로 쉬는 여자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쓸쓸함. 대부분의 파리가 보여주는 화려함에 가려 더더욱 아프고 어두운 그림자. 어디에나 존재하는 양면의 칼날을 잊지 말라는 경고일까. 헝클어진 머리칼, 뼈가 툭 불거진 등, 살짝 벗어내린 상반신, 다소곳과는 거리가 먼 자세까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갈 듯한 강인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누가 화려한 파리의 밤거리에서 그들에게 눈길을 두겠는가. 로트렉은 자신의 삶마저 짧고 강렬한 빛으로 휘감았다. 비록 후기 빛의 화가 혹은 인상파, 라고 불리는 다른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에 가려져있긴 해도,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은 남달랐다고 써도 좋다. 서른 여섯에 생을 마친 그를 보고 있으니 또다시 결핍되지 않은 내 안의 수많은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로트렉의 자세한 설명을 기대한 채 열었던 책에서 이 그림을 만나고, 한 페이지에 간략히 요약된 그의 생애를 듣는다. 그외에도 모네, 드가, 마티스, 세잔, 고흐, 쿠르베, 밀레, 마네, 라투르, 휘슬러, 들라크루아, 카유보트, 시슬레, 르누아르, 피사로, 베르메르, 고갱, 쇠라, 뷔야르, 드니, 앙리 루소 등 수려한 화가들의 작품이 반기지만 간략하고 소박한 소개가 마치 독자와 화가의 결탁과 유착을 기반으로 하는 듯 정중하다.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는 아첨, 온화로운 환심, 까다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은 서술이 오히려 오르세 미술관의 미로에 갇혀 길을 찾는 지도라도 된 듯 색채와 부피로서의 감정순환에 기여한다. 병약한 와중에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친 로트렉이 가졌던 깊은 교감력과 도피, 자기파괴에까지 이르게 한 감수성을 우린 너무도 쉽게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며 대가없이 얻기를 바라지 않던가.



           



또다른 프랑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1841-1919)는 들라크루아, 쿠르베, 모네의 기법에 영향을 받아 차츰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한다. 르누아르는 본래 인물화가였는데 점점 전통과 고전 회화의 양식에 눈뜨고, 인물의 심리를 세심하게 담기 위해 애쓴다. 독서, 피아노, 뜨개질, 오찬 등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포착한 르누아르의 장기 역시 빛과 색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표현법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포근하고 따뜻한 마력에서 찾을 수 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조.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뜨거운 감미로움. 무엇보다 색채의 풍부함이 오래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흐릿하면서도 또렷한 질감에서 명랑함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나기도 한다. 르누아르가 그린 세상의 인물들은 로트렉과는 달리, 천진난만하고 싱그럽다. 왁자한 전원풍경과 행복 가득한 생기발랄함, 바로 그 낙천성에서 그의 매력을 찾는다. 



           



시슬레와 모네의 그림을 좋아한다. 빛과 어둠, 꿈과 환멸을 그림에서 찾던 어느 날, 고흐와 고갱의 색채 대비나 램브란트와 베르메르의 소박하면서 묵직한 환희에 간혹 흔들렸다. 고흐와 밀레의 낮은 곳을 향한 진지한 태도, 쿠르베의 고집스러움, 휘슬러의 화폭이 전달하는 흰 빛의 녹턴을 잊지 못한다. 사실 오르세는 놀이터 같은 곳이다. 놀이터에서는 그네도 시소도 미끄럼틀도 포기할 수 없다. 매번 새롭다.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화가의 또 다른 작품에 자주 눈길이 멎는다. 터너의 환상적 연금술에 마음을 빼앗기고, 쇠라의 원색질주와 질서정연함에 심장이 뛴다. 이상하다. 눈을 감고 차분히 마음을 달래면 이 미술관(책이 아님)은 매번 새로운 세계로 나를 데려간다.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책이라서가 아니라 내게 특별한 시작을 선사한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의 모든 분야에 있지만 돈 많은 남자의 숨겨진 정부처럼 무의식중에 잊혀지는 것들은 많다. 나는 십 년도 훨씬 더 지난 날에 자칫하면 헤어질 뻔했던 엄마가 다음날 사다준 핑크색 테두리가 있는 흰색 긴팔 티셔츠를 생각한다. 소매가 늘어나 몇 년 전 별 고민도 없이 헌옷수거함에 넣었는데, 불현듯 당시의 모든 비극적 상황과 더불어 엄마의 표정과 말투, 티셔츠의 촉감과 디자인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시간이 멈춰버렸다. 갇힌 추억 만큼 애처로운 것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관용어의 적확함에 덧붙인다. 기억하는 만큼 체화한다. 잊혔던 날들의 기억은 서늘하게 다가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흩어지는 만큼 멀리가고 내려앉는 만큼 은밀하다. 더없이 반가운 가을바람과 아득히 먼 시간들 속에 내가 막 펼친 이 꼬깃함은 누가 접어놓은 페이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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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2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1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2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1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1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 동생은 미술관이 좋아서 한 번 더 가고싶다더군요. 제 입장에선 왠지 지구 반대편에 근사한 꿀단지를 하나 '킵'해둔 느낌. 언젠가 갈 거고, 미술관 소장품들은 분명 환상으로 좋을 테니까요. (아, 왠지 흡족하다..ㅎㅎ)
-로트렉은 왠지 좋지만 아직은 미지의 사람. 르느와르는 왠지 따분하지만 역시나 미지의 사람.. 물랑루즈는 '아름답고, 좋았고, 슬펐'단 기억이 강하네요.

아이리시스 2013-10-18 01:50   좋아요 0 | URL
같은 그림이라도 이국적 분위기에서 그림을 보면 한국과는 느낌이 달라서 좋아요. 사람구경도 재밌고요. 광장도 좋고요. 저도 근사한 꿀단지 만나러 얼른 가보고 싶어요. 비행기 타는 건 지긋지긋하지만.. 속수무책으로 하늘에 떠있는 기분이 너무 답답해요. 예전에는 센티멘탈해지면 화집이나 그림검색을 했는데 요새는 그냥 옛날 영화봐요. 근데 물랑루즈를 쓸쓸한 기분일 때 다시 한번 보려고 했는데 아직이에요 :)

2013-10-20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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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의 운명만 봐도 알 수 있듯, 운명이란 참 덧없다. A에 의해 B의 삶이 그리도 쉽게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A와 B는 가족, 친구, 연인을 비롯해 사실상 관계의 양상 거의 모두에 해당하는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친밀도가 높을수록 해당 비극의 강도가 세어지는 특성을 보여준다. 혼자 왔다 가는 세상 아니다. 독불장군처럼 있다간 세상이 코 베어가도 모를 세상. 그래서 인간은 절충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우며 자라난다. 선과 악, 능력과 신분, 성직자와 군인, 윤리와 세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주인공 쥘리앵 뿐만이 아니다. 



독실하고 순결한 성직자()를 꿈꾸지만 남보다 특출난 지능 뿐인데다 가난하고 시간이 없으니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타당한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 속의 기준이 무너진 사람을 보고 있는 일은 어찌나 아슬아슬한지. 노력이나 열정으로 되지 않으면 가능한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려 한다(). 쥘리앵의 경우 은근하다는 것과 본인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여자, 사교계,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쥘리앵의 목표에 희생되기 좋은 촉매제다. 대가를 챙긴 아버지가 억지로 떠민 집으로 들어가 레날 시장의 아이들을 돌보는 입주 가정교사가 되지만 상층사회의 배움은 도덕이 아니라 불법을 무릅써서라도 쟁취하는 법이다. 손쉽게 시장의 아내를 유혹해 원하는 것을 얻다가 들킬 위험에 처하자 평소 신부의 신임이 두터운 덕에 쉽게 추천장을 받아 드넓은 도시 브장송의 신학교에 들어간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과신하는 유형의 전형적 캐릭터. 쥘리앵의 갈등과 변화를 내세워 능력과 노력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암울한 왕정복고 체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노력과 열정이 통했던 나폴레옹 시대를 동경한다. 마음이 찬란해질 정도로 그리운 시대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문학은 희한하게도 최후에 돌아가야 할 보금자리처럼 여겨진다. 만족과 찬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지성과 감성의 기로에 서서 흔들고 쓰다듬게 된다. 스탕달 보다는 발자크와 플로베르가 좋지만 어디까지나 세 사람은 프랑스 문학이라는 갱도 안에서 하나이다. 상징성 짙은 사회소설이 부담되면서도 정작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는 할 수 없던 프랑스 왕정 역사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한 청년의 수난사에 나를 대입해보는 감각, 프랑스 문학사의 획을 긋는 작품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완연하게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라면 묵과할 수도 없고 간과해서도 안되는 지점에서의 촌철살인적 멘트. 읽어내는 자에게만 허락된 어떤 뿌듯한 벅참 같은 것. 프랑스 혁명 이후의 왕정 복고(부르봉 왕가), 나폴레옹 집권과 실각, 루이 필리프(오를레앙 왕가) 등장 직전까지가 스탕달이 마흔 여덟, 죽기 12년 전에 발표한 작품의 배경이다. 이후 나폴레옹 정권 역시 유럽을 전란으로 밀어넣었다는 명분을 쓰고 워털루 전쟁으로 명을 다한다. 신체제가 구체제를 전복할 수 없는 현대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무력하게만 보이는 이들의 부침이 약간은 멀뚱하게 느껴지는 건 너무나도 상식적인 돌담을 부수지 못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 1830년 7월 28일), 1830, 루브르 박물관 소장




미어터지는 겨울날 루브르에서 좋은 자리에 크게 걸려있기도 했지만, 유독 시선을 사로잡던 이 작품을 기억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라곤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밖에 모를 때였다. 당시 들라크루아 그림에 심취한 적이 있어 중심에 선 여인이 잔 다르크를 상징한다는 것도 아는 상태에서 본 그림이라 모나리자 다음으로 기억에 남았다. 좋아한다기 보다 그저 기억에 남은 것이다. <적과 흑>이 발표된 1830년, 비로소 7월 혁명으로 복고왕정이 무너진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성공으로부터 겨우 15년 만에 다시 황제를 맞아들인 후였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혜성처럼 등장한 루이 필리프는 국민 모두의 열망을 안았지만 사실상 착각임이 밝혀진다. 그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명을 다할 때까지 프랑스 시민의 왕으로 군림하지만 그의 집권은 왕정 복고 체제로 돌아간 것과 다름 없었다. 군주제는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고 루이 필리프는 즉위 후에도 자본가측의 이익만을 대변했다. 급분한 시민들이 벌인 2월 혁명의 결과로 공화정이 성립되지만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3세 역시 황제를 선언하면서 공화정도 민주정도 너무나 멀게만 보인다. 이러한 상황. 다소 용맹스럽지만 강인하고 유연한 정책을 폈던 나폴레옹에게는 넘치는 추종자들이 있었고, 실각 후에도 그를 그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전 나폴레옹의 인기와 명성을 입고 당선된 나폴레옹 3세는 곧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이로서 보나파르트 왕조의 막이 열린다. 1842년에 세상을 떠난 스탕달은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거나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쿠데타를 반대하다 국외추방을 당한 이가 위고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하면서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한 걸로 알려졌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1831년, <적과 흑>이 1830년에 발표되었다. 위고의 문학인생은 추방 전과 후로 나뉜다. 1862년에 나온 <레 미제라블>과는 다른 정치상황에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쓰여진 것이다. 이 시기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최초의 근대적 혁명으로 불려왔다. 


요약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이후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 자유,평등,소유권을 인정한 1793년 헌법 제정, 안팎의 흉흉한 전쟁이 거듭된 시기를 거쳐 워털루 전쟁(1815)에 의한 나폴레옹의 실각까지가 스탕달이 사회주의 소설로도, 애틋한 사랑의 심리주의 소설로도 읽히는 이 작품을 내놓은 배경이다. 정확히 루이 필리프가 취임한 해에 나왔고, 주인공 쥘리앵을 작가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도록 설정한다. 부정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대에 남몰래 침대 아래 숨겨둔 나폴레옹 초상화가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쥘리앵들이 이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가. 이 목표지향적 보나파르티스트는 신학교 교장의 신임과 영리한 두뇌로 라몰 후작의 비서로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부상한다.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사랑이나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기병연대의 중대자리는 쥘리앵의 신분을 고속승진시키지만 이후 찾아온 비극에 비하면 영광의 축에도 못 끼는 불꽃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여느 고전이 그렇듯 스토리상의 속력전이나 짜릿한 쾌감은 덜하다. 대신 반종교, 반체제, 혁명적, 저항적인 작가의 사상이 잘 반영되어 세상을 향해 돌진한 꽃다운 젊은 청년의 말할 수 없는 비극을 체화시킨다.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고결한 저울질은 바닥과 하늘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다. 운명순응자들의 끝을 알 수 없는 몰감각이 쓸쓸하다. 정확히는 피곤하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막연한 세상에서 저마다의 숫자만큼이나 존재하는 기준, 잣대, 경계, 원칙이란 숫자 0에 0을 곱한 듯한 모양새 또는 시그마나 인테그랄처럼 정답이 떨어지는 투명하고 신속한 기제가 아니다. 첫 장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의 고독해질 마지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슬프고 애처로운 비상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가 우리의 정답이라 확신할 순 없어도 그가 우리의 대안 중 하나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쥘리앵은 우리들을 닮았고, 저녁 시간의 유쾌함을 지켜주는 드라마 속 갈등유발자들과도 닮았다. 어쩌면 나를 그리고 당신을 너나할 것 없는 모두를 닮았다. 두려워해야 할 것, 궁금해 어쩔 줄 몰라야 할 것은 결말이 아니라 바로 나쁜 줄 알면서 품은 마음이다. 뭉개버린 원칙, 깨버린 금기, 등한시해야 했던 욕망이다.

 




이쯤에서 꼬꼬마 때 좋아한 Wellington's Victory을 다시 듣는 건 나폴레옹에게나 프랑스에나 스탕달에게나 적과흑에 조금은 미안한 일이지만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고 결혼 축하곡집, 체르니, 하농, 소곡집, 명곡집,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의 연주집을 뒤적이는 대신에, 누가 연주했는지 올렸는지도 모르는 Wellington's Victory을 연달아 재생시킨다. 승리의 포만감과 환희가 넘실대는 경쾌하고 가벼운 멜로디가 난데없이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로 피아노 학원 의자에 앉아 몇 번이고 건반을 두드리던 작은 여자아이를 눈앞에 데려다준다. 이게 봄과 여름 사이 적과 흑의 유일한 결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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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02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