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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유대계에 유독 지성인들이 많다. 유대인의 공부법, 부와 성공이 출판계 키워드가 된 걸 보면 똑똑하긴 한 모양인데 또 한 명의 이스라엘 출신의 젊은 역사학자가 나타났다. 『사피엔스』는 사실 진화론을 쭉 읽어온 독자에게라면 그다지 감명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들었다). 진화론에 해박하지 않지만 특별히 어렵거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아는 당연한 역사를 전혀 새로운 이론처럼 다시 쓰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이클 센델이 초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용한 멋진 정리법이 생각나는 인류학적 통사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문자사용/선사시대.. 연도와 시대는 물론 인류진화 순서를 얼마나 힘들게 달달 외웠는데 이들이 한때 공존한 각기 다른 호모종이라는 건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등 여섯 종이 지구에 살았단다. 내가 외운 이름들이 진화한 순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호모 종이었다니, 한때는 죽어라 싸우고 경쟁하다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는데 그 살아남은 조상이 내 조상이라니 아니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니. 현생 인류의 조상과 네안데르탈인의 이종 교배는 여러 번 일어난 흔적이 있고, 그렇다면 지금 어딘가 이종 교배로 태어난 종의 후손이 살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이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증거는 또 어디에.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물음과 해소되지 않는 갈증의 연속이다.
50명 정도의 무리가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수립이 수렵채집인이자 단일계로 살던 인류를 처음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헌터>에서 보니 몸집이 작고 힘 약한 종은 거의 언제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더라.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사자나 호랑이는 늘 사슴이나 토끼를 이길 것 같지만 싸우는 구도가 1:수십마리이면 사자나 호랑이도 지치거나 포기한다. 그러면 사슴이나 토끼가 살아남을 확률이 커진다. 사슴이나 토끼가 잡아먹힐 확률이 그 반대보다 월등한 건 사실이지만 사자나 호랑이를 만났다고 해서 언제나 희생되는 게 아니다. 위험한 숲에서 사자나 호랑이 그리고 약하고 작은 종이 공존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유독 뼈가 굵고 힘이 세며 뇌용량이 큰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종도 무리의 습격에는 꼼짝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이후 다른 종을 사라지게 만든 건 직접적인 충돌에의 희생보다는 가혹한 기후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언어, 문화, 국가, 종교, 과학이라는 비가시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특히 종교와 과학은 중세를 거쳐 오늘날까지, 먼 미래까지 인류를 지배하는 방식의 메커니즘일 확률이 높다. 같은 민족, 같은 종교, 같은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허울 아래 모든 개체를 하나로 묶는 힘, 사피엔스만의 특출난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저자의 말처럼 정말 자연발생설에서 유래한 운좋은 돌연변이의 탄생 혹은 정신병 때문이었을까.
과거를 거쳐 현재를 조명하고 곧 닥칠지 모를 비극적 미래까지 나아간다. 유발 하라리가 보여주는 게 사피엔스종의 비극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분명한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사피엔스종이 사피엔스종보다 더 나은 종을 만들어내지 말란 법이 없다는 사실을. 언어와 무리생활과 도구 사용 그리고 과학기술은 널리 언급되는 데 반해 종교의 의미를 인류와 연결시키는 건 그가 과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이자 인문학자라는 데서 기인한다. 지리상이든 기후상이든 다른 종들의 도전을 모두 물리치고 살아남은 게 내 조상이라니 경이로운 자부심마저 느꼈다. 하지만 사피엔스종이 원한 게 더 나아지려는 거라면 너무 멀리 왔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었다면, 능력이 아니라 자연적이었다면 사피엔스의 운명 역시 과신하지 못한다. 실제로 과학혁명 이후 인류의 가치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중세 과학혁명은 단지 부재하는 신을 물리치고 부당한 대우에 시름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작업의 시작이자 잃어버린 합리성을 되찾는 일이었다면, 이제 과학이 시도하는 많은 업적들-유전 공학과 생명 공학-의 무궁한 발전은 우리의 질서와 가치 그리고 의미와 목숨을 위협한다. 곧 땀 흘려 일하고 일한 만큼 먹을 수 있었던 공평한 시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긴 시간 속에서 길을 잃기 쉽지만 『사피엔스』에서 주목할 사실은 과거에 우리(사피엔스)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넘어 여전히 살아남을 것인가의 중대기로에 선 인류의 현상황이다. 사피엔스가 멸종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멸종을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뭘까. 곧 다가올 재앙, 자연발생을 불사의 능력이라 믿는 인류의 오만함이 미래를 망치고 있다. 더 대단한 종이 있다면 언제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는 사피엔스를 두고볼 지 모를 일이다.
진화론은 자주 인류가 이룩한 성과를 간과하거나 과찬한다. 고작해야 현재를 과신하고 과거를 둘러보며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뿐인 위치에서 과학을 전지전능함으로 치부한 탓에 나무인 채로 숲을 들여다보려 한다. 나무가 숲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후반부는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 반신반의하면서도 너무 재미있다. 낙관과 비관의 의미를 모두 남겨놓는 저자의 통찰과 예견은 역사학자 혹은 인문학자에게서 나오는 신중함이다. 인간은 자주 너무 많은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유발 하라리가 자기 소속감을 내려놓고 냉철하게 구사하는 종교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특히 인상 깊은데, 적어도 학자로서의 그는 사피엔스라는, 유대계라는 기존 이론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은 걸로 보인다. 아니면 사피엔스는 과학의 모든 장점을 장착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뱀파이어처럼 피를 마시며 평생을 사는 불사신으로, 어쩌면 하나의 더 높은 종에게 사로잡혀 제2의 종으로 반식민적인 삶을 살 수도. 잘 몰라서 누리는 특권인가, 온갖 상상이 가능한 미래를 즐기는 것 또한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서재에서 다시 한 달을 사라지는, 공백 갖는 사피엔스다, 포스트사피엔스가 되고 싶은,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사피엔스다.